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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대의 십자외교 관계>


의자왕 13년

큰 가뭄이 들어서

(백제)백성들이 굶주렸습니다


8월 가을

의자왕이 왜국(일본)과 우호 관계를 맺었습니다


<라봉봉>의자왕의 아버지인 무왕대에는

왜와의 사이가 소원하기도 했으나

의자왕대부터는 다시 백제와 왜의 관계가

좋아졌고

의자왕은 고구려와 왜와 연계해

적극적으로 신라를 견제했고

특히 왜는 백제와 뗄레야 뗄 수 없는 나라였기에

아무리 사이가 소원했어도 

'가재는 게편' 이라는 말같이

왜는 애초에 선진문물을 가지고 건너간

백제인들이 왜의 주류층이었다고 하고

금방 다시 우호관계를 맺었고

백제 멸망시기에는

왜에서 정말 본국을 지원하다싶이

백제에 수많은 지원군을 보냈는데

이에 단순히 백제와 왜의 관계가

이웃나라의 관계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의자왕은 고구려 - 백제 - 왜 이렇게 연계전선을 형성해서

당의 개입을 막고 신라를 더욱 압박했다고 하고

이에 고구려 백제 왜 vs 신라 당나라 구도로 당대의 국제질서가 형성됬고

이에 북방 고구려(+더 북방의 돌궐)부터 백제와 왜까지 남북으로 이어지고

신라 당나라는 동서로 이어져서

당대의 상황을 '십자외교 관계' 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사치와 향락에 빠지는 의자왕을 말린 백제 충신 성충>


의자왕 15년

2월 봄

태자의 궁을 수리하는데 대단히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했으며

왕궁 남쪽에는 망해정을 건축했습니다


5월 여름

붉은 말이 북악 오함사에 들어가서

불당을 돌면서 울다가

며칠 후에 죽었습니다


7월 가을

마천성을 중수했습니다


8월

의자왕이 고구려, 말갈과 함께

신라의 30여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


신라왕 김춘추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서


<김춘추>백제, 고구려, 말갈 등이

우리의 북쪽 국경에 침입하여

30여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의자왕 16년

3월 봄

의자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 成忠 이


<김부식>혹은 정충 淨忠 이라고도 한다


적극 말렸더니

의자왕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하려는 자가 없었고

성충은 옥에서 굶주려 죽었습니다


<성충>아아 !

당나라는 신라의 손을 들어주고 있고

신라는 한창 국운이 강하다

백제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


<백제 옥지기>성충 어르신 !

나라 걱정보다는 몸을 추스리셔야 하옵니다 !


<성충>나는 이미 어라하(왕)의 미움을 받아

죽을 몸이네,

그러나 이 나라의 운명이 걱정될 뿐,,

붓과 종이를 주게, 마지막으로 어라하에게

간하겠네 !


그(성충)가 죽을때

의자왕에게 글을 올려 말했습니다


<성충>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마디 말만 하고 죽겠습니다


제가 항상 형세의 변화를 관찰하였는 바,

전쟁은 틀림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전쟁에는

반드시 지형을 잘 선택해야 하는데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군사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 沈峴 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방어하여야만

방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자왕은 이를 명심하지 않았습니다,,


<라봉봉>의자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졌다는데

이는 '의자왕과 삼천궁녀' 이야기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궁녀가 삼천명이나 됬을 리는 없고,,(말도 안되는 숫자입니다)

그런 기록도 없는데

단지 '삼국유사'에


'의자왕과 여러 후궁은 화를 면하지 못할 거를 알고

떨어져 죽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의자왕은 당에서 죽었다

명백히 기록되있기에 궁녀들만 떨어져 죽었을 것이다'


이런식으로 기록되있고

이후 조선시대 문인들이 이런 것에 대한 글을 쓰며

많은 궁녀를 문학적 표현으로 삼천 궁녀라 표현한 거라 합니다

즉 삼천궁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으나

당대의 의자왕이 점차 국정을 멀리하고

궁녀들과 사치와 향락에 빠지게 된 거 같습니다,,


또 그것을 말린 백제의 충신 성충은

결국 의자왕의 분노로 옥에 갇히게 됬고

굶주려 죽어가면서도

의자왕에게 나라를 걱정하는 글을 올렸는데

의자왕은 끝까지 식견과 연륜이 있던 충신의 말을 듣지 않다가

멸망의 위기를 자초하게 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충신은 바른말을 하는 인물이기에

역사적으로 왕의 분노로 죽게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성충의 경우도 이와 같았고

유교라는 사상이 왕이 잘못해도 무조건적으로

받들라는 개념이 아니라

왕이 잘못된 판단을 내릴때는

반대하는게 신하의 도리라 가르치는데

이에 조선시대에서도 왕에게 조언을 하는 기관인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가 있었는데

오늘날 유교의 이미지는 무조건적으로 받들라는

꽉 막힌 이미지로 해석되는거 같고


좌평 성충도 결국 궁녀들과

음란과 향락에 빠졌다는,, 의자왕을 적극 말리다가

의자왕의 분노로 감옥에서 죽게 됬습니다,,


백제도 많은 인구와 비옥한 농토 +

왜라는 지원세력까지 합치면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었고

실제 백제 말기까지

신라를 크게 위협하기도 했는데

의자왕이 충신 성충의 말을 들었다면

또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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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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