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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의자왕 20년

5월

폭풍우가 몰아치고

천왕사와 도양사의 탑에 벼락이 쳤으며

검은 구름이 용처럼

공중에서 동서로 나뉘어 서로 싸우는 듯하였다'


의 다음 기록은


6월

왕흥사의 여러 중들이

모두 배의 돛대(돛을 달기위해 배 바닥에 세운 기둥)와 같은 것이

큰 물을 따라 절 문간으로 들어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들사슴 같은 개 한마리가

서쪽으로부터 사비하 언덕에 와서

왕궁을 향하여 짖더니

잠시후에 행방이 묘현해졌습니다


서울(수도, 백제 수도는 사비)의 모든 개가

노상 路上 (길 바닥,길 위)에 모여서

짖거나 울어대다가

얼마 후에 흩어졌습니다


귀신이 하나 대궐 안에 들어와서,,


<귀신>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


고 크게 외치다가

(大呼百濟亡百濟亡 대호백제망백제망)


곧 땅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의자왕이 이상하게 생각해서

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했습니다


석자 가량 파내려 가니

거북이 한마리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등에,,


'백제는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


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의자왕이 무당에게 물으니

무당이 말하기를,,


<백제 무당>둥근 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찬 것이니

가득 차면 기울며(백제)

초승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차지 못한 것이니

가득 차지 못하면 점점 차게 됩니다(신라)


(해석으로는 백제는 둥근달[늙음]이니 기울 것이고

신라는 초승달[젊음]이니 앞으로 창창할 것이다)


고 하니

의자왕이 노해서 그(무당)을 죽여 버렸습니다,,


어떤 자가 말하기를,,


<어떤 자>둥근 달 같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초승달 같다는 것은

미약한 것입니다


생각컨대

우리나라는 왕성하여지고

신라는 차츰 쇠약하여 간다는 것인가 합니다


라고 하니

의자왕이 기뻐했습니다


(즉 바른말 하는 사람은 죽이고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사람에 기뻐했던 의자왕입니다,,)


<라봉봉>그렇게 백제 멸망 직전에는

해괴한 일들이 끊이지 않았고

그 정점이 '둥근달과 초승달 이야기' 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다음기록에서는 신라(5만 군사)와 당나라(13만 군사)의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며

백제 700년(정확히는 678년) 왕조가 끝나게 됩니다


저는 무당을 바른말 하는 사람이라 했으나

아무래도 이런 무당,샤머니즘이

과학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 할 수 있다하더라도

무당 역시 백제 말기의 나빴던 사회적 상황과

해괴한 변고들에 이런 점괘를 내놓은 것일거고

그렇다면 무당의 말이 충분히 과학적인 예측이고

바른 말이라 할 수 있기에 바른말 하는 사람이라 썼습니다


여기서 의자왕의 대처방법이 문제가 있었던게

그렇다면 더 좋은 방법으로 국정을 수습할 생각을'

했었어야 하는데

바른말 하던 무당을 죽여버리고

이에 다른 의자왕에게 듣기 좋은소리만을,

아첨한다고 할 수 있었던 간신이라고도

불린다고 할 수 있겠을 사람의 말을 듣고 기뻐했고

결국 아무런 대책없이 신라와 당나라의 대군을 맞게되었고

백제 700년 왕조가 허무하게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 700~900년 왕조가 끝나게 되며

한국은 광할한 북방영토를 잃었다면

백제 700년 왕조가 끝나며 광할한 해양영토(+왜 세력)와

찬란,고고,우아,세련됬던 백제의 예술,문화를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고 신라의 삼국통일을 불안전한 통일로 보는 이유가

고구려 영토만이 아닌 백제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신라 입장에서도 당대에 최선의 판단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또 신라 역시 자주적으로 이후

당나라에 맞서서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고

한국 문화의 중심이 됬으나

역시 안타까운 것은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 통일왕조 수나라가 멸망하기는 했으나

그것을 온전히 이어받은 다음 중국통일왕조인

당나라,중국에 비해

한국 고구려,백제,신라는 온전한 통일을 하지 못했고

만약 당대의 고구려,백제,신라 한국 삼국인들이

조선(고조선)의 후예와 삼한 三韓 이라는 이름 아래

평화적이고 온전한 통합이 이루어졌다면


한국은 자주적인 기상에 광활한 대륙과 북방영토와(고구려)

해양강국이 되서 일본과 바다 건너에도 큰 영향을 끼치며

세련되고 고고하고 우아하며 수준높은 문화,예술(백제)을

가지고 수준높은 정치체계(신라)를 가진 나라가 됬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로부터 한국은 중국에 많은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엄연히 독자적이고 수준높은 문화와 문명을 가지고 있었기에

중국에서도 함부로 하지 못했는데


당대 한국 삼국인들이

중국 거대통일 제국의 등장에

너무 조급하게 행동한 면도 있다고 생각되기도 하고


다시 백제 의자왕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렇게 의자왕은 백제에 기이한 일들이나

주위 사람들의 진심있는 조언들을 무시했고

바로 다음 기록에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게 되는데도 역시

유능한 인물이었던 흥수의 조언을 무시합니다,,


고위관료인 좌평이었던 충신 성충도 감옥에서 굶어죽었고

바른말 하던 무당도 죽임을 당했고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는 와중에도

좌평 흥수도 감옥에 있었다 하니

의자왕 말기에 식견이 있고

바른말 하는사람들이 어디있었을지(죽음,감옥),

입발린 말을 하고 사리사욕에

치중했던 인물들이 어디있었을지(고위관직)는

다른 망국의 왕들과 비교해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중국 사상가 공자님의 말씀인 논어에는


'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타나고

도가 없으면 숨는다,

나라에 도가 있을때는 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없을때는 부유하고 귀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라는 말이 있는데

의자왕 말기에 사리에 밝고 바른말 하던 사람인

성충,무당,흥수가 어떠한 입장,위치였는지,

정세를 파악하지 못했고 의자왕에 듣기 좋은 소리만 하며

사리에 밝지 못했던 인물들이 어느 입장,위치였는지에

대해 의미심장한 옛 성현의 말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의자왕이 망국의 왕이었기에

망국의 왕 특유의 비통함 등 역시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또 신라에서 백제 마지막왕인 의자왕의 정통성을

깎아내리려는 조작이 없었다고 할 수도 없겠으나


의자왕은 고구려 마지막왕 보장왕같이

연개소문이라는 권신에 의해

실권이 없던 왕도 아니었고

유능했던 아버지 무왕이 물려준 기반등에 나름 강한

왕권으로 시작했음에도 그의 재위기간동안의 행적과

재위 후기에 그의 주변,가까운 곳에

어떤 사람들만이 남았음은

의미,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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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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