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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은 사사오입 개헌 이후

본격적인 독재정치를 시작하게 됬고 (박정희 · 전두환의 군사독재와 다른 성격의

이승만 , 자유당 독재시대입니다)

 

사실 재밌는 사실은

이승만은 일단 학자형 + 엘리트주의 성향이 강한 인물이어서

독립운동 시기 유창한 영어실력 및 국제정세판단 능력으로

미국에 일제에 대한 정보제공 및 독립운동 활동을 하기도 한 인물이고

대중들 사이에서는 '이승만 박사' 라 불리었는데

 

나름 그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고 한국에

미국식 자유주의 + 미국식 정치 + 미국식 민주주의 를 도입했던 인물이며

문맹퇴치에 힘쓴 인물이기도 한데

이전부터 여러 이승만 정부의 교육정책들이 있었고

이에 한국의 전통적인 과거시험을 봤던 그러한 출세적 교육열과 맞물리게 됬는데

 

원래 교육+사상들은 경제적인 문제들이 해결되야 도입된다고도 하지만

한국인들은 유독 먹을것을 포기하면서까지 (땅팔거나 소팔거나)

교육에 집착하는 성향이 강했고

이에 단시간에 한국인들은 문맹퇴치에 성공하고

 

(세종대왕이 만드신 한글이 배우기도 쉽고 우수해서이기도 함)

 

대한민국 정부시작과 함께 도입된 새로운 선진 서구사상 + 민주주의들을

받아들이게 됬습니다

 

쉽게말해 한국인들은 이승만이 도입시켜준 미국식 , 선진 교육을 받았는데

교육에서 배운 민주주의의 내용과 이승만의 정치행보는

전혀 다를뿐더러 독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승만 독재에 많은사람들이 양민학살당하거나

지식인들이 사법살인이나 정치깡패등으로 숙청 , 위협당하자

점차 이승만 정부에 등을 돌리게 되었고

그러며 점차 이승만 독재의 종언이 다가오기 시작했는데

 

그 방아쇠는 1960년 3월 15일에 치루어진 부정선거에 의해 당겨지게 됬는데

이승만은 이미 이전 3대 대선 선거에서

부통령을 자신의 사람인 이기붕을 당선시키지 못하고

민주당의 장면을 당선시켰기에 많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고

 

이승만 정권의 2인자 '이기붕'

 

3대대선에서도 진보당의 조봉암에게 30%가량의 득표율을 내주며

자유당세력과 아첨꾼에 둘러싸여

자신은 마치 미국의 '조지 워싱턴' 처럼 대한민국의 '국부' 라고 믿고 있었던

이승만은 큰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유력 차기대선주자인 조봉암을

사법부를 동원해 불법적으로 사형시켜버립니다 (사법살인)

 

또 언론들의 입에 재갈을 물렸고

다음 선거때는 확실히 이기기 위해

부정선거를 계획하게 되는데

당시 이승만의 측근은 어떠한 비합법적인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이승만과 이기붕을 대통령 , 부통령에 당선시키려 부정선거를 계획했고

 

결국 1960년 4대 대선이 치뤄졌는데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조병옥이 갑자기 사망해버렸고

이승만은 사실상 또다시 대통령당선에 확정됬는데

당시 이승만도 85세의 고령에 건강도 안좋아서

급해진 자유당은 차기 후계자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려

엄청나게 노력하게 됬고

 

1960년 3월 15일 제 4대 대통령선거에서

자유당은 부정선거에 엄청난 돈을 끌어당기며 총력을 다했고

 

리승만과 리기붕 이름이 써져있는 당시 선거 포스터

 

투표함안에 30%정도를 이승만 이기붕으로 미리 채워놓거나

투표함 바꿔치기 ,

야당 참관인 쫓아내기 ,

선거에 익숙하지 않은 문맹자 노인들을 유도해서

3인조나 5인조로 투표시켜 자유당 후보를 찍게 유도하기 ,

죽은 사람 이름을 선거인 명부에 올려 자유당을 찍게하기 ,

고무신이나 막걸리 같은 친숙한 서민생필품들을 뿌리며

유권자들에게 자유당을 뽑으라는 압박을 하는 뇌물살포 등이 있었고

 

3인조 혹은 5인조 공개투표

 

특히 자유당이 살포한 서민 생필품이었던

고무신이나 막걸리 뿌리기는 워낙 유명해

당시 3.15 부정선거에서 나온 '고무신 선거' , '막걸리 선거' 는

부정 뇌물선거를 비유 , 대표하는 이야기가 됬습니다

 

당시 3.15 부정선거 증거품으로 나온 고무신으로 한국정서가 가득담긴 한국만화 '검정 고무신' 같이 당시 한국인들에게 고무신은 가장 대중적인 신발이고 친숙한 물건이었습니다

 

특히 한국을 대표하는 술이자 서민들의 친구였던 '막걸리' 는 이후에도 선거판에 애용되었습니다 , 당시는 1978년 국회의원 유세장에서 막걸리를 대중들에게 나눠주는 모습

 

또 당시 대한민국 사람들은 건국초기였기에

아직도 '대한민국(민주정)' 이 아닌

'조선(왕정)' 식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승만은 대한민국 최초의 대통령이었는데

미국의 최초의 대통령 '조지 워싱턴' 은

당시 미국인들 역시 왕정에 익숙했기에 그런 민도를 이용해

더 대통령을 할 수 있었음에도

깔끔하게 박수칠때 떠나거나 탈권위적 모습을 보여준것과 대비되게

 

미국의 '국부' 라 불리는 1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 오늘날에도 미국인들이 그를 링컨 대통령과 같이 사랑하는 이유가 그가 '내려놓는 것의 중요성' 을 안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워싱턴과 비교되는 한국의 초대대통령 이승만 공식 초상화

 

이승만은 국민들이 미성숙한 것을 이용해

더욱 권력을 잡으려 했고

'박사 이승만' 이 아닌

탐욕스러운 추악한 노인의 모습을 보였다 할 수 있습니다

 

하여튼 이 고무신 · 막걸리 선거라 이야기 되는

3.15 부정선거 결과는

당연히 자유당의 이승만과 이기붕을 대통령 + 부통령 에 선출시켰고

 

문제는 자유당에서 선거조작을 너무 열심히 해서

이기붕 득표율이 99% 나 총 유권자 수보다 많은 115% 까지 달성되서

일부로 이승만 80% , 이기붕 70% 로 적당히 줄여 발표하는 촌극도 벌어졌다 하고

 

(러시아의 군사독재자 이미지가 강한

푸틴 대통령의 당 역시 부정선거로

이전에 140% 득표율을 올린 것으로

해외에서 많이 까였습니다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한다는데

독재 자체가 부하들이 믿고 따라줄 수가 없기에

해괴한 득표율이 나오고 수습하기 바쁜 것일 겁니다)

 

이러한 계속되는 자유당의 만행에

국민들도 슬슬 분노하기 시작했고

선거 당일부터 마산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3.15 의거)

마산에서부터 4.19 혁명의 신호탄이 쏘아졌습니다

 

3.15 의거 기념탑 , 창원시 마산 합포구 서성동 소재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 당일 ,

자유당에게 투표권을 우롱당한 마산 시민과 학생들은 거리에 뛰쳐나와

시위를 벌였고

경찰이 총기를 발포해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1차 마산의거로 총 9명이 사망하고 80여명이 부상을 입었고

이승만 자유당 정부의 유혈사태 및

이 소식을 들은 전국의 국민들은 충격에 빠집니다

 

또 4월 11일

3.15 마산의거에 참여한 마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안된

김주열 학생 (김주열 열사) 이 실종된 지 27일만인

4월 11일 아침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왼쪽 눈에 경찰이 쏜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른 것이

부산일보를 통해 보도되며 시위는 전국적으로 퍼지며 격화됩니다

 

김주열 열사

 

최루탄이 눈에 박힌채 발견된 김주열 열사의 시신

 

이승만은 자신의 독재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시위를

공산주의자의 만행이라 몰았고

결국 4월 19일에

4.19 혁명이 일어나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과 전국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서울에서만 시위대 규모가 10만명이 넘었고

시위의 방향은 이승만이 있는 경무대(청와대의 옛 이름) 를 향했고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하기 시작해서

21명 사망 , 172명 부상이라는 엄청난 유혈사태가 일어나고

경찰의 발포는 이어져

이날 서울에서만 104명이 사망하고 경찰 역시 3명이 사망하게 됩니다

 

4월 19일 경무대(청와대) 로 향하는 시위대

 

분노한 민주시민들을 총으로 억누를 수는 없었고

시위대는 서울 각지 파출소들을 파괴하고 불살랐고

일부 시위대들은 카빈소총으로 무장해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합니다

 

4월 19일 이날 서울 이외에도 광주 , 부산 등 전국적인 시위가 일어났고

서울시내 거의 모든 대학 학생들은 교문을 박차고 뛰어나와

4.19 혁명을 주도했고

특히 고등학생인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것에 가장 분노한 것은 같은 또래 고등학생들이었고

고등학생뿐만 아니라

이후 국민학생(초등학생의 옛 이름) 어린이들 역시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

 

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에 나와 데모를 했는데

4월 19일에 수송국민학교 6학년 학생 전한승(13세) 군이

총에 맞아 사망했던 것도 있습니다

 

수송 국민학교 학생 어린이들이 데모하는 모습

 

4월 25일 서울대 대학교수단은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워 데모를 했고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라는 플랜카드를 든 교수들의 시위

 

이전 선거를 다시하라는 시민과 학생들의 요구와 달리

교수들은 아예

 

'이승만 하야(물러남)'

 

를 직접요구했고

 

당대 교수라는 직업은 사회를 이끄는 지식인 이미지 및

엄청난 권위와 존경이 있었기에

경찰들 역시 교수들의 시위에 함부로 하지 못했고

결국 이기붕 집이 파괴되고 파고다 공원의 이승만 동상이

군중들에 의해 철거되고 정치깡패 두목들의 집이 부셔지는 등

이승만과 자유당은 점차 시민들의 민주화 바람에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4.19 혁명당시 시민들은 이승만이

시민들을 공산주의자 , 북한 간첩으로 모는 것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반공(공산당 반대)을 외치거나 질서유지를 하려 노력했고

 

탱크를 몬 계엄군이 출동하기는 했지만

시위대속 한 10대 소년은 탱크위로 뛰어 올라가

 

'대한민국 국군 만세 !'

 

라 외치기도 했는데

이때 눈물을 흘리는 군인도 있었고

이후로 계엄군은 시위건으로 현장출동때마다

시위대의 따뜻한 환영과 박수를 받았다 하고

계엄군은 이승만 정부를 지킬 마음이 사라지게 되고

4.19 혁명으로 군에도 민주화가 시작되 군인들은

점차 이승만의 사병이 아닌 국민을 지키는 군대라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4.19 혁명 당시 계엄군의 셔먼탱크 위에 올라가서 환호하는 서울 시민들 ,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도 하지만 총구는 시민들의 세금으로 만들어집니다 ,,

 

결국 군부까지 등을 돌리자

고위 관계자들은 이승만에게 하야를 권유했고

궁지에 몰리고 충격에 빠지고 이승만은 결국

 

<이승만>내가 그만두면 더 이상 다치는 사람이 없단 말이지 ?

 

하고는 결국 하야를 결심하게 되고

이승만은 4월 26일 아침 10시 20분경 사임할 것을 발표했는데

비슷한 시간인 9시 45분경 파고다 공원에 몰려든 군중들은

이승만 동상의 목에 철사줄을 걸어 쓰러트렸고

현재는 그 자리에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있습니다

 

시민들에 무너지는 이승만 동상 (엄청나게 큰 동상인데 역사에서도 전통적으로 독재자 특징이 아이돌[우상] , 동상을 좋아하는 거 같습니다)

 

이승만이 물러나자

한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자유당은 힘을 잃었으며

절망에 빠진 이기붕의 장남 육군소위 이강석은

권총으로 아버지 이기붕 및 가족들을 모두 살해하고 자살했고

 

비운의 가족사 이기붕 일가 , 맨왼쪽 이강석

 

이승만은 당시에도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채

다시 돌아와 재기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채

미국의 도움을 받고 하와이로 망명했고

이후에도 한국으로 돌아오려 했지만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돌아가는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정부를 부정하며

4.19 혁명의 정당성 및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주장하던

박정희 정부에 의해

계속 거부되었고 결국 영영 고국땅을 밟지 못하고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사망합니다

 

1962년 하와이 요양병원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 부부 ,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애국자' 이기도 했지만 아집과 탐욕으로 독재자의 길을 걷기도 했고 나름 더 추해지기 전에 자진 하야로 나름 신사적으로 끝낸 인물입니다 여러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인물인데 이승만 대통령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역시 한쪽 성향만 강한 인물이 많아 절반만 지지하고 절반은 반대하는 경향이 많아보입니다

 

<사상계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의 인기를 끌던 시사잡지) 1960년 5월호>

민주주의의 나무는 국민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

 

사상계

 

<1960년 9월 20일 지식인이자 시인 김수영의 일기>

언론자유나 사상의 자유는 헌법조항에 규정이 적혀있다고 해서 

그것이 보장되었다고 생각해서는 큰 잘못이다. 

 

이 두 자유가 진정으로 보장되기 위해서는 위선 자유로운 환경이 필요하고 

우리와 같이 그야말로 이북이 막혀 있어 

사상이나 언론의 자유가 제물로 위축되기 쉬운 나라에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이 두 개의 자유의 창달을 위하여 

어디까지나 그것을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하지 

방관주의를 취한다 해도 

그것은 실질상으로 정부가 이 두 자유를 구속하게 된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4.19 혁명의 영향을 크게 받은 저항시인 '김수영'

 

한국역사 최초의 민주정의

첫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아집과 욕심으로 국민들에게 또다시 왕처럼 군림하게 되

첫단추를 잘못꿰 쫓겨나게 되었고

 

이에 일어난

4.19 혁명은 한국판 '프랑스 혁명' 에 비유되기도 하고

한국인들은 이날로 인해 처음으로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5000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체감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고

 

이후에도 민주주의의 원칙과 시대에 역행하는 지도자 , 독재들이 시작되기도 했지만

4.19 혁명의 정신을 계승하고 교육받은 민주시민들은 계속해서

저항을 멈추지 않았고 경제발전 이후 민주화를 이뤄내게 되었습니다

 

<라봉봉>원래 민주주의 , 민주화요구는

보통 경제발전이 어느정도 이루어져야

국민들에게 발생한다 한다지만

 

(배가 불러야 자아실현등의 고차원적 욕구가 생겨난다는 욕구이론과 비슷)

 

예외로 일본의 경우에는 미국을 위협할 정도로 엄청난 크기의 경제대국이 됬음에도

역사왜곡 , 과거사 반성에 실패했고

자민당 장기집권이 시작되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돈의 힘 , 야쿠자와 결탁한 거대한 성매매 산업 등으로 굴복시켰으며

오늘날에도 일본은 지표적으로는 민주주의 수치가 높을지언정

제대로된 민주주의가 없다 이야기 되고있고

4.19 혁명에 큰 영향을 받은 시인 김수영 (라봉봉의 본명 김수영과 이름이 같음 [한자는 다름])

이 말한 것처럼

 

'언론자유나 사상의 자유는 헌법조항에 규정이 적혀있다고 해서 

그것이 보장되었다고 생각해서는 큰 잘못이다'

 

라는 말처럼

민주주의는 가만히 있다고만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통계적 허울은 조작이나 현실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기에

좋은 지표로 참고할 수는 있어도

단순 통계에만 집착해서만도 안됩니다

 

한국은 4.19 혁명을 통해 사실상 동양의 유일한 민주국가로 나아가는 길이

트이기 시작했고

 

동양은 대체적으로 오랫동안 서구열강들의 식민지배를 겪고

독립 후 외국의 공장으로 쓰이거나

단기간에 국가주도 정책으로 경제발전한 경향이 많아

여러 검은돈과 엮인 독재자들의 출현이 많아졌고

오랜 시간동안 경제와 민주주의가 천천히 발전한 서양과 달리

민주화가 오늘날에도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도 많고

한국인인 저도 한국에 불만은 정말 많지만

4.19 혁명이나 여러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그나마 동양 혹은 세계에서도 민주주의 의식이 높은 나라가

대한민국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문제지만 다른곳은 더 심한 느낌 ?)

 

제도적 민주화는 군사독재 기간의 경제발전 이후에

이루어졌지만 사실상 본격적인 민주화는 4.19 혁명이 시초라 볼 수 있으며

그렇다면 한국은 경제발전보다 민주화가 먼저 일어났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 원인은 결국 한국 특유의 '높은 교육열' 에서 나왔다 생각하고

당시에도 한국인들은 한국전쟁으로 세계에서 거의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음에도

유교적 선비사상 및

교육을 통해 누구라도 신분이 상승할 수 있다는

기대감 , 일제시대때 교육통제에 대한 반발 때문에

학교 교육에 집안 재산을 팔아가면서까지 교육열을 높인 경향도 있고

 

배움의 중요성을 안 이승만도 국방비 다음으로 늘 교육비로 투자해

자신 스스로가 자신을 타도하는 자산을 키웠다고도 하나

이는 박정희 , 자한당 계열이나 민주당 계열 대통령 할 것없이

한국인들은 그냥 학교나 교육에는 돈을 엄청나게 많이 썼고

 

(비록 그게 주입식 교육 , 학교교육 등의 잘못된 방향이더라도

대한민국은 오늘날에도 교육비는 엄청나게 쓰는 나라라고 보여집니다

막상 저는 독서는 많이했는데 학교교육에는 부정적인 입장입니다)

 

교육을 받은 한국인들은 정작 교육 내용같이 정책이 흘러가지 않고

많은 법들이 무시되는 것을 보고 느끼고 분노해서 자주 일어나는 나라가

한국이고

 

(국민성이 다혈질이어서라기보다 법 이해도가 높기 때문이라 보여집니다)

 

민주당계열 인사들 역시 4.19 혁명이나 한국의 여러 민주화운동들을

자신들의 자산이라 여기기는 하나

정작 정권을 잡고 여당이 되었을때 여러 법을 무시하거나

자신들이 분노했던 독재세력 , 기성세대와 똑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자가당착에 빠지기도 했고

 

하여튼 한국은 이전 고대시대때에도

가장 약하게 시작했던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결국 높은 교육과 지식의 힘이었다 생각하고

이후부터 이어진 선비정신 등이나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쉬운 글자라 이야기되는 '한글' 의 발명 등

여러 교육이 발달하기 좋은 조건들이기 때문에

 

딱히 무언가 생각나는게 없음에도

의외로 강한나라가 대한민국이라 생각하고

오늘날에도 미국도 견제할 만큼 기술이나 우수한 것들이 많은 나라인데

정작 초강대국이자 왠만한것은 1위가 당연시하다싶이한 미국은

소수 엘리트인 1퍼나 3퍼센트가 '나머지의 무식한 사람들' 을 이끈다는 이야기가 있고

실제로

 

'미국인들은 무식하다'

 

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실제 실험에서도 미국인들은 기초상식능력이나

외국 혹은 자국이 지도에서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거나

역사지식을 모르는 경우가 많고

 

(일본인들도 역사를 잘 모르지만

일단 미국을 공격하다 미국의 반격에 학살당한게 많아서

그런쪽으로 역사를 왜곡하느라 나름 역사를 아예 모르지는 않는데

미국인들은 그냥 백치같이 역사를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제 서구 사회나 미국 , 일본 같은 자유주의 국가들은

표면적인 민주주의 지표는 높지만

개개인의 교양상식능력이나 시민의 힘이 강한게 대한민국이라고도 생각되고

그렇지 않더라도 저는 그런쪽으로 가는게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하여튼 평론적으로는 단계적 욕구이론처럼

민주주의 국가가 되기전 경제발전이 우선된다는 이야기가 있고

여러 일들은 체계적 , 단계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정말 무언가 '특출난 것(한국의 경우 높은 교육수준)' 이 있을 경우에는

'예외도 있다' 라는 것이 역사에서는 항상 이야기 된거 같고

 

한국 민주주의 발달사도 4.19 혁명당시

6.25 전쟁 이후 세계 최빈국에서 자국 독재자를 끌어내린 것이나 마찬가진데

당시 외국인들이 보기에는 전쟁 , 검은 돈에 휘말려있는

아프리카 소국의 독재자를

아프리카 소국인들이 끌어내린 것같이 놀라운 사건이라 볼 수도 있고

 

4.19혁명은 당시 세계적인 최빈국에서 일어난 혁명으로서

이전부터 세계 초강대국을 자처해왔던 강대국이었던 프랑스에서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것과도 다른 모습이

한국의 '4.19 혁명' 이고 하여튼

세계 및 독재에 신음하는 동양사회에 모범이 된 사건이

4.19 혁명이고 세계적으로도 자랑스러운 무형유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국이 산업혁명 전 명예혁명 등으로 시민사회가 성립되어

민주주의가 발전해 산업혁명 시기

안정적인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한국 역시 4.19 혁명 직후 5.16 군사정변이 시작되

오랜 군사독재기를 겪기는 했지만

5.16 군사정변의 주역 박정희 대통령 역시

4.19 혁명에 대해 감히 부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5.16 군사정변의 정당성을

4.19 혁명과 엮어일어난 '군사혁명' 으로 포장하기도 했으며

 

나름 이승만 정부에 대한 전국민적 반발감을 알고

독재를 하면서도 4.19 혁명처럼 자신이 물러날 수도 있음을 알기에

여론이나 야당에 대한 완전한 탄압을 시행하지는 못했으며

 

이러한 상황속에서 나름 시민의식과 법적 인권보호도 성장할 수 있었기에

4.19 혁명은 영국 명예혁명이 산업혁명에 영향을 준 것 같이

 

(경제계에 정치적 안정성 제공)

 

한국 경제성장에도 영향을 끼쳤다 할 수 있습니다

 

4.19 혁명 이후 한국 민주주의는 군사독재라는 어두운 시기에도

여러 성장통을 겪으며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고 할 수 있고

 

또 다른 이야기들로는

북한은 4.19 혁명을 미제와 미제 앞잡이들에게 쌓이고 쌓인 남조선 인민들의

원한과 분노의 폭발이며

반미 구국항쟁 및 이승만 괴뢰도당 반대 운동이라 이야기하지만

정작 4.19 혁명의 진정한 민주이념을 깊게 이야기 할 경우

3대 김씨일가의 세습독재 역시 위태로워 질 수가 있기에

북한은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일단 

반정부 성향을 위주로 이야기하고

북한정권 정당성에 이용하는 분위기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독재를 하고 있기에 깊게 이야기 할 수록

자가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 민주화 운동사입니다

 

(사실 악인이라 불리는 인물들도

정작 착한 사람들이 만든 명품브랜드를 좋아하거나

종교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 같습니다)

 

북한 이외에 세계적으로도 보면

오늘날 홍콩 바닷가에서 15세 여학생의 시체가 알몸으로 떠올랐다거나

러시아 푸틴정부의 선거조작 등은

이전 한국의 이승만 정부 당시 사건들이 떠오르게 되고

 

조지오웰의 1984나 동물농장같이

독재에 의해 통제된 사회같은 디스토피아 소설도 있지만

역사적 현실과 사실은 지극히 정상적인 생각을 하는 선량한 시민들이 의해

독재는 무너지고 새로운 시대로 변화하게 됬고

결국 어떠한 독재권력도 선량한 시민과 민주주의의 힘을 막아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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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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