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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공왕 12년

정월(1월) 봄

(혜공왕이 관직 이름들을 이전으로 복구하고

다음 기록에는,,)


혜공왕이 감은사 感恩寺 에 행차해서

바다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幸感恩寺望海 행감은사망해

로 감은사에 행차해서 동해를 바라보았다고도

해석 할 수 있는데

감은사는 문무왕과 신문왕이 지은 절이기에

태종 무열왕계 왕통의 메카같은 곳이라 할 수 있었고

마지막 태종 무열왕계 직계 왕통이라 할 수 있었던

혜공왕의 감은사 방문은 자신의 조상을 기리고

훌륭한 정치를 하겠다는 모습을 보이기 위함일 수도 있습니다)


2월

혜공왕이 국학에 가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3월

창부 倉部 (오늘날 기획재정부]재정경제부]) 에

사 8명을 더 두었습니다


7월 가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특산물을 바쳤습니다


10월 겨울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나름 감은사 행차, 국학에서 강의를 듣는 모습 등

성인이 된 혜공왕도 그 나름대로 여러 쇄신의지를

보여주려 하기는 했다고도 할 수 있으나

이미 혜공왕대에 이르러 왕실 세력이 미약해져 있었고

이런 정도의 모습만으로 정국을 타개하기에는

무리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혜공왕 13년

3월 봄

서울에 지진이 있었습니다


4월 여름

지진이 다시 발생했습니다


상대등(신라 귀족 수장직)

김양상(훗날 신라 37대왕 선덕왕으로

혜공왕을 죽이는 인물,,) 이 상소해서

시국을 극렬하게 비판했습니다


10월 겨울

이찬(신라 2등벼슬) 김주원이

시중(오늘날 국무총리) 이 됬습니다


혜공왕 15년

3월 봄

서울에서 지진이 발생해서

민가가 무너지고

사망자가 백여 명이 됬습니다


금성이 달에 들어갔습니다


백좌 법회 百座法會 (사자좌[부처님이 앉는 자리] 같은

자리 백 자리를 만들어 놓고 높은 승려를 모시고

설법하는 큰 법회) 를 열었습니다


혜공왕 16년

정월(1월) 봄

누런 안개가 끼었습니다


2월

흙비가 내렸습니다


혜공왕이 어렸을 때 (8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들자

음악과 여색(여자) 에 빠져서

아무 때나 법도를 잃고 놀러 다니며

기강이 문란하여 재난과 이변이 자주 발생하였으므로

인심 人心 (민심) 이 이반되고

사직(조정, 나라) 이 위태로웠습니다


이찬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키고

무리를 모아서 대궐을 포위해서 침범했습니다


4월 여름

상대등 김양상(훗날 신라 37대왕 선덕왕 김양상) 이

이찬 김경신(훗날 신라 38대왕 원성왕 김경신) 과 함께

군사를 동원해서 김지정 등을 죽였습니다


(김지정의 난도 난이지만

이를 진압한 두 인물이 37대왕, 38대왕이 된다는 것도

참 혼란스러운 신라의 상황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혜공왕과 왕비는 이 난리 중에 군사들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반란세력 김지정 측 군사인지 진압세력 김양상 측 군사인지

명확하게 나와있지 않고

대신 삼국유사에서는 '혜공왕을 죽인 것이 김양상' 이라

기록하고 있기에 김양상이 혜공왕을 죽였다고 하고

이에 김지정의 난도 사실 혜공왕이 김양상 일파를 제거하려는

친위 쿠데타가 아닐까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만약 그랬으면

곧바로 김양상의 역습으로 사망한 혜공왕입니다,,)


김양상 등이 혜공왕의 시호를

혜공왕 惠恭王 (은혜 혜, 공손할 공)이라 했습니다


<김부식>대비 신보왕후 (혜공왕의 첫째왕비) 는

이찬 유성의 딸이고

다음 왕비(혜공왕의 둘째왕비 창창부인) 는

이찬 김장의 딸이었는데

역사서에는 두 왕비가 궁에 들어온 시기를 기록하고 있지 않다


<라봉봉>그렇게 혜공왕 시해 이후부터

태종 무열왕계 왕통은 끊기게 되고

신라 중대는 끝나고 신라 하대가 시작됩니다


혜공왕 마지막 기록쯤에는

나이가 들자 음악과 여색에 빠져서 ~~ 하는

폭군의 면모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혜공왕을 시해한 김양상 일파가

혜공왕에 대한 폭군의 이미지를 더 깊게 썼을 가능성도 있고

(조작이라 해도

이런 조작도 아무 이유없이 나오는 것도 아닐거 같고

분명 혜공왕 역시 신하들에게

문란하고 안좋은 모습등을 보이며

빌미등을 제공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 혜공왕 역시 나름 성인이 된 뒤로

어머니와 김양상이 주도하는 정치에서 벗어나려

애쓴 모습들이 있다 하는데 (감은사 방문 등)


대표적인게 혜공왕 13년 4월에 김양상이 상소해서

시국을 극렬하게 비판했다는 기록에서

바로 6개월 후 이찬 김주원을 시중에 임명했다는 것인데

김주원은 혜공왕과 마찬가지로 태종 무열왕계 후손이었고

이에 김주원을 키워서 김양상을 견제하려는 혜공왕의

의도였을 것으로 짐작되고 이후 김지정의 난이 일어나자

혹은 혜공왕이 김양상을 제거하려고 김지정 등으로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자 분노한 김양상 일파가

혜공왕과 왕비를 죽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어떤 해석이던지

대혼란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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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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