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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고려 3대왕 정종 3년

948년 11월 9일

고려시대 금주(오늘날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에

큰 별이 떨어졌습니다


그날 밤 금주 고을을 지나가던 사신은

큰 별이 어느집 지붕위에 떨어지자 그 집을 찾아갔는데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었습니다


<아기>응애 ~ 응애 ~


사신은 그 집에 가봤는데

마침 그 집 부인이 아이를 낳았다고 했고

이에 사신는 큰 별이 떨어진 곳에 아이가 태어났으니

소중히 키우라 이르라 전했습니다


<사신>정말 좋은 기운을 타고난 아이다,,


이 아기가 바로 고려를 지킨

한국사 호국영령 강감찬 장군이십니다


큰 별이 떨어졌다는 강감찬 장군의 출생지를 기리려

이 곳은 이후부터

낙성대 落星垈 (떨어질 낙 , 별 성 , 집터 대) 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오늘날 서울시 관악구 지역입니다


강감찬의 아버지 강궁진은 진주 강씨로

고구려 장군 강이식의 후손입니다

강궁진은 신라 말기 경주에 머물다가

태조 왕건을 도와서 고려 건국을 도와

삼한벽상공신에 책봉된 개국공신입니다


강궁진은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은천이라 지어줬습니다

은천은 강감찬 장군의 어릴 적 이름입니다


보통 위인들은 대충 어느정도만 생겼어도

잘생겼고 풍채가 좋다 이런 식으로 기록이 될거 같은데

은천이는 키가 잘자라지 않아 풍채도 볼품없었고

얼굴도 못생다고 합니다,,


그러나 은천이는 글도 잘 배우고 병서도 읽었는데

동네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할때는 

아이들보다 몸집이 작았음에도

꾀도 많고 다부져서 자신보다 큰 아이들 사이에서도

항상 대장노릇을 하며 앞장섰습니다


은천이는 못생겼어도 의젓한 아이였고

글공부를 좋아했고 꾀가 많았습니다

또 개국공신 집안의 명문가 자제였지만

검소한 생활 습관을 유지했습니다


당시의 고려의 국제정세 이야기를 잠시 해보면,,

당시 고려는 태조 왕건이 고구려를 계승해

고려라는 나라이름을 정하고 후삼국을 통일하고

어진 정치를 피고 있었는데

외국 사정으로는 중국에서는 당나라가 멸망했고

동쪽 몽고지방에서 거란족이

북방에서 세력을 키웠습니다

이에 거란에 밀린 여진족도 고려쪽으로 남하하며

고려는 두 북방민족들이 큰 위협이 됬습니다


당시 중국은 당멸망후 혼란스러운 시기였어서

거란은 이틈을 타 세력을 키웠고

이후 거란은 요나라라 나라 이름을 고치고

북방 한민족 국가이자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정복해서

고구려의 옛땅을 차지하자

고려는 거란을 짐승같이 여기며 적대시했고

거란에서 사신과 선물로 낙타 50마리를 보내자

거란이 보낸 낙타 50마리 선물을

개경 남쪽 만부교 다리아래에 묶어

굶겨죽이고 거란 사신들을 귀양보냈습니다


이후에도 거란의 세력은 강해져서 나라 이름을 요라 고쳤고

고려인들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군사를 모아서

고려 3대왕 정종때 30만 군사를 모아

광군이라는 군사 조직을 만들고 성을 쌓아 침략에 대비했습니다


이후 은천이는 강감찬이라는 이름이 되었고

그는 과거에는 조용히 지내며 학문에 열중했던 것으로 보이고

36세때서야 과거 시험에 합격했는데

장원, 1등으로 합격했습니다


이전부터 고려 국제정세는 큰 변동이 있었으며

북방에서는 거란과 여진이 고려를 위협하고 있었고

거란의 괴롭힘에 못견딘 발해 유민들도 고려로 피난오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강감찬은 나라를 위해 벼슬길에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성종은 강감찬을 양주(오늘날 서울) 목사로 임명했고

그곳에서 강감찬은 고을 백성을 살폈는데

양주에는 호랑이의 행패가 심했습니다


<양주 백성들>호랑이에게 물려간다 !


이 말은 이때부터 유행한 말이라고 합니다,,


조정에서도 양주고을은 호랑에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어고

이는 양주 고을에 울창한 숲이 많아서 호랑이들이 숨기 좋았기 때문입니다

강감찬이 부임하자

양주 고을 백성들은 그의 못생긴 모습과 작은 체구를 보고 실망했습니다

그러나 강감찬은 마을주변의 숲을 모두 베고

활잘쏘는 사냥꾼들을 모아 덫을 놓고 함정을 팠습니다


숨을 곳이 사라진 호랑이들은 금방 사냥꾼들에게 몰려

함정들에 잡혔고

더이상 양주 백성들은 호랑이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그때서야 양주 백성들은 강감찬을

호랑이보다 무서운 목사라 존경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강감찬은 나무를 벤 곳에 농사를 짓도록 했습니다

이에 양주는 풍요로워 졌고

양주 인구가 갑자기 두배로 늘었습니다


강감찬은 양주목사 임기가 끝난  이후에는

경주 지방관이 됬는데

당시 경주는 신라의 천년 수도였기에 들어선지 얼마 안된

고려 조정에 대한 반감이 심했던 지역이어서

양주고을의 호랑이 퇴치 이후

지혜롭고 영리했던 강감찬을 알아본 성종도

경주같은 어려운 지역을 보내 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강감찬은 경주로 내려가서 부임했고

경주 백성들은 키작고 못생긴 강감찬을 얕보았습니다

새로온 고려 지방관 강감찬을 골려주기 위해

경주 백성들은 이상한 탄원을 올렸습니다


<경주 백성들>아이고 사또 ~

개구리 울음소리가 시끄러워 밤에 잠에 잘 수가 없습니다 ~

양주에서 호랑이를 모조리 잡았다하시니

경주에서는 개구리 울음도 그치게 해주십시오 ~


이에 강감찬은 경주거리에 방을 붙였습니다


<경주거리의 방>오늘 하룻밤동안만

개구리에게 울지 말것을 명한다

-경주 도호사 강감찬-


이를 본 경주 백성들은 비웃음을 쳤으나

그날밤 정말로 개구리들이 울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날밤동안 강감찬이 보낸 사람이 막대기로

밤새 연못을 휘저어 개구리들이 울지 못했지만

이에 다음날부터 경주 백성들은 강감찬을 무서워했고

경주 인심이 잡히게 됬습니다


성종도 이 소식을 듣고

강감찬에게 언젠가 큰 일을 맡기겠다고 생각했습니다


993년

강감찬이 44세때

거란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를 침공해왔고 이는 거란의 1차 침입입니다


성종은 신하들을 불러 회의를 했습니다

당시 강감찬은 아직 주요관직이 아니어서 별활약을 하지 못했지만

소손녕은 고려군에게 항복하라는 편지를 계속 보냈습니다


<성종>어찌 해야할까 경들은 대책을 내놓으시오 !!


<고려 대신들>80만을 막기는 어렵사옵니다,,

서경 이북땅을 거란에게 내주고 항복합시다,,


그러나 서희는 반대했습니다


<서희>선조들의 땅이자

조상들이 피땀흘려 가꾸신 땅을 싸워보기도 전에

내줄 수 는 없사옵니다 !!!!!!


<성종>그치만 대책이 없잖소 ㅠ,,


<서희>소신이 나아가서

소손녕을 달래보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안융진에서 서희와 소손녕은 담판을 했습니다


<소손녕>고려는 신라땅에서 일어났고

우리는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으니

고구려 옛땅은 우리땅이다 !


<서희>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나라를 고려로 지었고

수도도 평양인데 말도안되는 소리를 하는 것이냐


대화 도중 서희는 거란이 고려를 침공하려는 게 아니라

송과의 관계를 끊으려 왔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희>우리 고려가 요나라와 교류를 못한 것은

여진족이 가로막고 있어서요

그러니 여진족이 차지한 땅을 우리가 차지하여

성을 쌓도록 해주시오


결국 서희의 담판으로 요나라는 물러가게 됬고

그뒤 고려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압록강가에

여섯 진을 쌓아서

강동 6주를 수복했습니다


땅을 주고 화친을 하긴 커녕 지혜와 꾀로

오히려 영토를 늘려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한

한국사의 대 외교관 서희입니다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18살의 목종이 왕위에 올랐고

18살도 당시 기준으로는 성인 연령이었지만

왕이어리다는 이유로

어머니 천추태후가 정치를 도왔는데

천추태후와 목종의 외가 김치양 등이 권력을 휘둘렀고

당대 고려는 이전 서희의 담판이후 요나라와 교류하고 송과

관계를 끊는다 했지만 오히려 송나라와 더 친하게 지내려 했던 시기입니다


당시 예부시랑 (오늘날 외교부 차관) 강감찬은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거란이 다시 쳐들어 올거라 말했지만

관료들은 이를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때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목정을 해치려 하는 모의를 하자

위험을 감지한 목종은

서북면 도순검사로 압록강 남서쪽을 방비하던

강조에게 개경으로 돌아와 자신을 도와달라 했고

군사를 이끌고온 강조는 김치양 일당을 처치했으나

갑자기 목종까지 왕위에 끌어내 죽이고 대량원군 ,

고려 8대왕 현종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이에 강감찬은 다시 큰 걱정을 했습니다


<강감찬>아아 ! 거란은 지금 고려를 칠 것을 벼르고 있건만,,

강조의 난을 트집잡아 분명히 쳐들어 올것이다,,


결국 거란은 역시 강조의 난을 구실로

강조의 죄를 묻겠다는 트집을 잡아

거란 성종은 1010년 11월 16일

보병과 기병 4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서

2차 침입을 했고


거란 성종은 그중 20만을 이끌고

강조가 지키는 통주로 진격했으나 직접 나선

강조의 고려군에게 계속 패했고

이에 승리에 도취된 강조는 방심하고 전쟁터에서 한가롭게 바둑을 두다가

거란의 기습공격으로 거란 성종에게 사로잡혔습니다


<거란 성종>(정변을 일으켰지만 인물됨은 훌륭하군,,)

너는 내 신하가 될 것이냐 ?


<강조>나는 고려사람이다

왜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 ?


<거란 병사들>무엄하도다 !


거란인들은 강조를 모질게 고문하고

다시 물어도 강조의 대답은 같았고 이에 거란인들은

고려인 강조를 죽였습니다


비록 반정을 일으켜 고려왕 목종을 죽인 강조였지만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끝까지 유지하려 했던 강조입니다


거란의 성종은 강조를 무찔렀음에도 강한 고려군에 고전하고 있었고

결국 급하게 개경을 행해 진격했습니다


현종은 어전회의를 열었고


<현종>어찌해야 좋소,,


<고려 대신들>항복하는 수밖에 없사옵니다,,


이에 조용히 있던 강감찬이 나서 적극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강감찬>항복한다면 고려 백성은 저들의 노예가 됩니다

화친하자 하면서 일단 적의 공격을 멈추게 하고

일단 상감께서는 남쪽으로 난을 피하십시오


강감찬은 일단 거란군이

지칠때를 기다려 무찔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현종은 강감찬의 말대로 개경을 떠나 나주까지 몽진(임금의 피난) 했고

그동안 고려군도 열심히 싸웠으나

끝내 고려수도 개경이 거란군에 함락됬습니다


거란군이 개경을 점령했을때

하공진과 고영기는 거란 진영으로 가서

군사를 물려줄 것을 요청했고

거란군도 고려군의 끈질긴 항전과 지침등에

결국 거란 성종은 군사를 되돌리게 됬습니다


강감찬의 지혜로 거란의 2차 침입은 끝났고

나주에 있었던 현종 역시 개경으로 돌아와 강감찬에게

고위 문관직 벼슬을 주었습니다

강감찬 장군은 이미지와 달리 문관이었습니다,,


이후 다시 강감찬은 현종에게 말했습니다


<강감찬>거란왕은 얼마후 또 쳐들어 올것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그들을 막을 군사를 양성해야 하옵니다


<현종>경의 말대로 해야겠소 !!


강감찬은 동북면 행영 병마사 직책을 맡아

국경지대를 지켰고 이때 강감찬은

처음으로 문관이 아닌 고위 무관직을 받았습니다


거란 성종은 사신을 보내서 또다시 강동 6주를 내놓으라 위협했습니다


<강감찬>어림없는 소리요 그땅은 원래 고구려의 영토였소


강감찬은 요사신의 요구를 한마디로 거절하고

계속해서 부지런히 성을 쌓았습니다


그뒤 강감찬은 여러 고위직을 거치다

자신의 조상대 부터 내려오던 재산인

개령(경상북도 상주) 밭을 나라에 바치고

군사 기르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강감찬>나라가 없으면 밭이 무슨 소용이랴,,


젊은이들은 강감찬 휘하로 군사가 되기를 청하며

몰려들었습니다


1018년 12월

거란 성종은 소배압으로 하여금 10만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서 고려를 침으로서

거란의 3차침입을 시작합니다


고려 조정은 강감찬을 상원수로 ,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서

20만 8천 고려군으로 하여금

거란군에 맞서게 했습니다


강감찬은 이미 20만의 군사를 길러놓고 있었고

흥화진에 본진을 치고 강민첨에게 기병대 1만 2천을 데리고

산골짜기에 숨어있다 적이 나타나면 매복공격 하라 명령했고


그후 강감찬은 수많은 쇠가죽(소가죽)들을 밧줄로 묶어

쇠가죽 댐을 만들어서 삼교천 상류를 막았습니다


소배압은 거란군을 이끌고 얕은 물의 삼교천을 건넜고

그때 강감찬은 밧줄을 끊어 쇠가죽 막은 물을 흘려보내라 했습니다


갑자기 쏟아진 차가운 겨울강물에

거란군은 물속에서 갈팡질팡했고

그때 숨어있던 고려군이 나와 활을 쏘자

거라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소배압이 남쪽으로 향했으나

이번에는 숨어있던 강민첨의 고려군에게 또다시 당했고

이에 그래도 포기하지 않은 소배압이 개경으로 가자

강민첨 역시 2만 군사를 이끌고 지름길로 가서 내구산에 숨어있다가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습니다


소배압은 겨우겨우 고려군의 기습공격을 받으며

이후 남은 5만 거란군으로 개경부근까지 갔지만

개경의 삼엄한 방비와

병사들도 굶주리고 지쳐서 이길 가망이 없자

되돌아 가기로 했습니다


1019년 2월 1일

후퇴하던 거란군은 귀주에 도달했습니다

그때 강감찬이 귀주 동쪽에서 수많은 고려군을 이끌고

깃발을 앞세우며 몰려왔습니다


이후 귀주벌판은 도망치려는

거란군의 필사적인 저항이 있었고

이에 고려군은 용감하게 맞서 거란군을 무찔렀습니다

이에 귀주 벌판은 거란군의 시체로 뒤덮였고

10만 거란군중 압록강을 건너 도망친 자들은

수천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강감찬 장군의 나이 71세때 일어났던

외침에서 나라를 구한 한국사 전설의 전투 귀주 대첩입니다


<귀주대첩 민족기록화>


<강감찬>아아 조상님들이시여 드디어 원수를 갚았사옵니다 !!


승전해 돌아오는 강감찬 장군에

현종은 친히 영파역(황해도 우봉)까지 직접 맞이하러 나갔고

강감찬 장군이 걸어오는 길에 비단을 깔게 했습니다

현종은 백발의 노장 강감찬 장군의 머리에 금으로 만든 꽃을 꽃아주었습니다


<고려 백성들>강감찬 장군 만세 !!

고려 만세 !


<현종>강장군의 지혜로 나라를 구하게 되었소


현종은 귀주대첩을 기념하기위해

영파역을 의흥 義興 (옳을 이 , 시작할 흥)이라 바꿔불렀습니다


귀주대첩으로 동아시아의 판도가 바뀌어 고려의 전성기가 시작됬고

이후부터는 거란도 고려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됬습니다


전설적인 업적을 남긴 강감찬 장군은

더이상 할일이 없다 생각하고는

다음해 6월 간청끝에 조정에서 명예롭게 은퇴했습니다


<고려인들>우리가 이토록 평화롭게 살게 된 것은

강감찬 장군 덕분입니다 ~~


강감찬 장군은 이후 고향에서 밭을 가꾸며 책을 쓰며 조용히 지내다

82세에 문하시중(오늘날 국무총리) 벼슬을 받았고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라봉봉>강감찬 장군은 고려 대외교관 서희를 존경했다고 하고

서희같이 나라를 거란의 침입에서 구한 인물입니다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은 20만 고려군이

10만 거란군을 무찌른게 뭐가 어려운가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당대 요나라는 크게 일어나고 있던 시기였고

10만 거란군은 유목민족답게 순수 정예 기병이었다 할 수 있기에

보통의 전투였다고 보면 안되고

항상 다수의 병력에도 조심하고 조심해서 승리를 이끌어낸

한국사 명장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이었습니다


강감찬 장군이 없었다면

한민족은 이민족의 노예나 속국화가 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귀주대첩은 전설적 승리라 기억되고

강감찬 장군은 고려의 이순신 장군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나라를 구한 한국사 위인으로 이야기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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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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