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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자 김정호>


고산자 김정호는 아쉽게도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기록이 없기도 하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도 불분명해서 그의 대한 기록 대부분은 창작된 것입니다,,

일단 그러므로 창작되어 널리 알려진 이야기를 쓰겠습니다,,

고산자는 김정호의 호입니다


조신시대 말기인

조선 23대왕 순조 초기에 1803년쯤 황해도 토산에서

김정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정호는 항상 산과 들을 다니며

땅의 모습과 형태들을 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김정호>이다음에 커서 우리 마을 지도를 그려보고 싶다 ~_~


당시 산에는 호랑이가 살아 매우 위험했지만

그럼에도 어린 정호는 담력이 세서 항상 산에서 뛰놀며

지도등을 그리면서 놀고는 했습니다


<김정호의 아버지>정호야 뭐하니


<김정호>지도를 그리는 중입니다 ㅎㅎ


<김정호의 아버지>허허 꽤나 자세히 그렸구나

더 자세히 그리려면은 글자도 알아야 한단다


가난하고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정호의 아버지는

정호가 글을 배울 수 있도록 글공부를 시켰습니다


<마을 사람들>상놈이 글을 알아서 뭔 소용이람

 

주위의 비난에도 어린 정호는 묵묵히 글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어린 정호는 지도를 그리며 행복감에 젖었고

지리책을 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지도가 있기는 있었지만 관청에서만 있거나

대부분 지도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고

제대로된 지리책을 접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김정호는 20살정도에 결혼을 했지만

가난한 살림이었고 이에 아내와 같이 보따리 장사를 하며

마을 , 지역 이곳저곳 돌아다녔습니다

고생도 고생이었지만 김정호는 아내와 마을을 다니고 산을 넘으며

땅의 모습등을 보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김정호>오히려 돌아다니면서

다른 지역 지리도 알 수 있어서 좋군 허허허


<김정호의 아내>짐이나 드세요 ㅡㅡ


장사를 하던 김정호는 좀더 체계적인 지도들을 접하려면

역시 서울을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아내와 함께 서울(한성)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래서 김정호 부부는 남대문 밖

한성 만리재(만리동) 에 살게 됬습니다


김정호는 지도를 찾으러 다녔으나

당시 백성들은 지도를 사용하지 않았고

제대로된 지도는 관청에서만 구할 수 있었고

미천한 신분이었던 그가 관청을 출입하며 지도를 보기는

어려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정호>지도를 구할 수는 없을까,,


김정호는 계속 지도를 찾고 있었고 그러던 중

어떤 사람이 김정호에게 최한기라는 실학자를 찾아가라 일러줍니다


최한기는 유명한 조선 실학자로

과거에 합격하고도 과거시험의 폐단을 보고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학문 연구에 집중한 인물입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최한기 같은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과거시험의 폐단과 신분적 제약 , 근대화된 외국 문명에 대한 관심

등으로 기존의 성리학만을 외우던 양반들과 달리

기술이나 실용적 학문등에도 관심을 가진 이들이 등장했고

이를 '실학자' 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김정호는 실학자 최한기의 집을 찾아갔는데

놀랍게도 최한기는 김정호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최한기>신분이 무엇이 중요합니까 ?

세상에는 이렇게 지도에 열정있는 분들이 필요하오 ~


<김정호>아아 ~


김정호는 최한기의 도움으로 여러 지리책과 지도들을 볼 수 있었고

마음이 잘맞은 두 사람은 절친한 평생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최한기에게 지도 책도 빌린 김정호는 결국

직접 나서서 백성들의 삶이 편해질 수 있는

좋고 정밀한 지도를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정호는 괴나리봇짐을 싸매고 집을 나섰으나

아내와 어린 딸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김정호의 아내>저희 걱정은 하지 마시고 큰 뜻을 이루로서 !


김정호는 항상 걸어다니며

지방의 지리와 산과 강의 형태 이외에도

특색과 특산물 등을 조사했고

지나갈때마다 보이는 높은 산마다 올라가 지도를 그렷습니다

가난한 형편에 항상 걸어다니며

밥도 얻어먹고 잠도 알음알음 새우잠을 자며

 한국의 구석구석을 조사했던 김정호였습니다


결국 김정호가 30살정도 되던

1834년에 청구도라는 우리나라 지도 2책을 완성 했고

이 지도는 훗날 '대동여지도' 의 기초가 됩니다

김정호가 청구도를 만들자

그것을 본 최한기는 자신의 일인것 처럼 기뻐해주었고

김정호는 이에 더 힘을 얻었습니다


<김정호>더 좋은 지도를 만들어 봐야겠다 !!


이후에도 김정호는 더 좋은 지도를 만들어 보기 위해

전국 방방곳곳을 돌아다녔고

조선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던 백두산도

8번이나 올랐고 그의 고생은 말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김정호는 청구도를 기초로 하고

그동안 지역들을 다니며 새로 조사한것을 합쳐

지도를 만들었고

이후 최한기와 함께 인쇄할 목판을 새겼습니다

이후 목판이 완성됬고

이에 김정호는 목판 인쇄로 지도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한국의 문화유산 ' 대동여지도 大東輿地圖 ' 입니다


<대동여지도>


대동 大東 은 조선 , 

여지 輿地 는 수레 여자에 땅 지자로

만물을 싣는 수레같은 땅 , 즉 땅 ,

도 圖는 그림을 뜻합니다


대동여지도는 가로 19판, 세로 22층이며

가로 360cm에 세로 685cm 의 거대한 지도입니다


이외에도 김정호는 국토정보를 더 자세히 이해하려면

지도 이외에도 지리지도 함께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에 대동지지라는

30권 15책의 지리책을 만들어서 한국의 지역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정보를 써놓았습니다

비록 대동여지도는 오늘날 지도보다 당시 과학적 측량기술이 부족해

정확도가 떨어진다고 할 수 있으나

조선 전역을 돌아다니며 향토적인 이야기를 많이 기록하고 있어

오늘날에도 그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김정호는 그렇게 어린시절의 꿈을 이루고

정밀하고 과학적인 지도와 지리서를 만들어 냈고

이는 단순한 그의 열정이라기 보다

백성들의 편의를 위한 그의 애민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1864년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당시 실권자였던

흥선대원군에게 바쳤습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지도의 정밀성에 깜짝 놀라면서

이것이 외국으로 새어가면 큰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김정호는 상을 받기는 커녕

흥선대원군에 의해 옥에 갇혔고

모진 매를 맞으며 고문당하다 사망했습니다


이후에서야 사람들은 대동여지도가 얼마나 중요한 지도인지를

알게 되었고

그렇게 사람들은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를 

기억하며 고산자 김정호는 한국사의 위인이라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라봉봉>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남긴 큰 업적을 남긴 인물임이도

그 기록이 거의 없다싶이 하고 이는 그가 부귀영달보다는

순수한 지도만들기 자체에만 집중하느라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또 오늘날에는 김정호는 흥선대원군에게 고문당해 죽지 않았고

그 기록들이 일제가 한국사를 폄훼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 이야기 되나

일단 기존에 유명한 이야기를 쓰기로 했습니다


무엇이던지 간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남겼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할 수 있고

조선 백성들을 위해 큰 뜻을 품고 온갖 고생을 하며

만들어낸 전설적인 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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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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