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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바다의 왕자 장보고가 사망한 이후부터

다시 신라와 동아시아 바다에는 해적들이 들끓기 시작했고

신라 왕실에서는 귀족들의 왕위쟁탈전 , 흉년 , 민심의 이반 등으로

신라는 점차 피폐해져 갔고

특히나 신라에는 혈통으로 신분이 결정되는

'골품제' 가 있었는데

성골과 진골은 왕족이고 그 이하는 6두품이라고

왕족들이 신라의 1~5등 벼슬을 독차지했다면

6두품들은 6등 벼슬까지밖에 오르지 못했고

이에 능력은 있었으나 왕족이 아닌 신라의 지식인 '6두품' 계층 역시

신라 왕실에 등을 돌렸습니다

 

혈통으로 승진에 제한이 있었던 '골품제'

 

대표적인 6두품 인물이자 신라의 지식인 최치원

 

한편 지방에서는 해적과 도적들이 들끓었는데

이에 점차 신라 수도 금성에는 세금이 올라오지 않았고

신라 왕실 역시 힘이 약해져

지방 세력의 눈치를 보고 있었고

때마침 옛 백제 지방(서방)에서는 '견훤' 이

옛 고구려 지방(북방) 에서는 '궁예' 가 힘을 크게 길러

나라를 건국했고

그들은 각각 백제와 고구려를 잇는다 했고

이에 견훤은 후백제 , 궁예는 후고구려를 건국하게 되는 것입니다

 

점차 지방에서 일어난 도적들은 견훤이나 궁예 밑으로 들어갔고

통일신라는 다시 옛날 고구려 , 백제 , 신라가 맞섰던 삼국시대처럼

또다시 후고구려 , 후백제 , 신라로 나뉘게 되어

'후삼국시대' 가 시작됩니다

 

후삼국시대 지도

 

후삼국 시대를 다룬 한국의 전설적인 드라마 '태조 왕건' , 출처 : KBS 1TV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 (2000) 太祖 王建

 

이에 수많은 6두품 지식인 세력들도

골품제로 출세에 제한이 있었던 신라에 등을 돌려

후고구려나 후백제 세력으로 들어갔고

후고구려와 후백제는 점차 나라꼴을 갖추었습니다

 

후고구려의 궁예는 나라이름을 마진으로 바꿨고

또다시 마진이라는 이름에서 태봉이라고 나라이름을 바꿨는데

옛날 총명했던 것과는 달리 점차 타락해서

신하들을 의심해 잔혹하게 죽이고 있었고

이에 그의 부하장수 왕건이 반란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다시 그 땅에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고려' 를 건국하게 됩니다

 

고려 태조왕건 표준영정 , 출처 :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이길범 화백 작품

 

왕건은 궁예와 달리 어진 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려서

후삼국시대 전쟁으로 혼란에 빠진 지방 호족들과 백성들은

그에게 몰려들었고

 

점차 대세가 고려에 기울자

신라 마지막왕인 신라 56대왕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함으로서 1000년사직의 바통을 왕건에게 내어줍니다

 

천년사직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 어진(왕의 그림)

 

왕건은 경순왕을 크게 우대해주며

신라 백성들을 어루만졌고

한편 백제에서는 왕위 쟁탈전이 일어나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라는 절에 갇혔는데

견훤은 금산사를 탈출해 왕건에 의탁했고 (견훤이 왕건에 의탁한 것은 경순왕 항복 이전)

왕건은 견훤을 크게 우대해주었고

결국 후백제 역시 고려의 공격으로 멸망하게 됬습니다

 

강성했던 후백제는 그렇다치고

말기에는 힘이 약할대로 약했던 신라는 그래도

1000년 사직(조정, 역사) 에 정통성이 엄청났던 나라였기에

경순왕의 항복 전

신라 내부에 반대파도 있었는데

바로 경순왕의 태자였던 '마의태자' 였습니다

 

<마의태자>나라의 존망은 반드시 천명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다만 충신, 의사와 함께 민심을 수습해 

스스로 수비 하다가 힘이 다하면 그만 두어야지

어찌 천년 사직을 하루 아침에 가벼이 남에게 주는 것이 옳은 일이겠습니까 !

 

그러나 신라조정 내부는 이미 힘이 다할대로 다한 신라여서

더이상 답이 없음을 직감했기에 마의태자의 의견은 무시당했고

경순왕은 왕건에게 항복했습니다

이에 울분에 찬 마의태자는 홀로 금강산에 올라가

삼베옷(마의)을 입고 천년왕조 신라의 자존심을 지키며

풀뿌리를 캐어먹다 죽었습니다

 

결국 신라와 후백제의 항복을 받아낸 고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했고

오랜 전쟁에 지친 백성들에게 세금을 10분의 1로 깎아주거나

면제해주고 어진 정치를 펴냈습니다

 

태조 왕건의 고려에는 한국 마지막 북방왕조 발해가 멸망하자

발해 유민들과 발해태자 대광현이 내려와 왕건에게 항복했고

왕건은 고구려, 백제 , 신라를 진정 재통합한 임금이 되었고

개경을 수도로 하는 500년 고려왕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왕건은 후삼국통일 이후

옛 고구려 영토를 되찾겠다 선언한 후

옛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을 수도급으로 높여

'서경' 이라 칭하고 고구려 영토를 되찾겠다는

'북진정책' 을 실시했고

발해의 유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적대시했습니다

 

태조 왕건의 북진정책으로 넓어진 영토

 

고려는 이름과 같이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서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도 오랜 분열이 있었던

옛 고구려 지역 , 백제 지역 , 신라 지역 백성들은

고려시대에 와서야 고조선의 후예임을 본격적으로 자각하는

진정한 민족통합을 이뤄냈고

 

태조 왕건이 건국한

고려는 한국 중세시대를 대표하는 나라이자

여러 민족문화가 꽃피고 수많은 북방민족 , 왜구와의 대결을 하며

자주성을 지키려 한 나라이자

 

호족 - 문벌귀족 - 무인시대 - 권문세족 - 신진사대부

 

로 이어지는 화려한 귀족 문화가 꽃피운 나라였습니다

 

고려 태조왕건의 동상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민족유산 '고려청자'

 

<라봉봉>후삼국통일을 한 왕건의 비결은

다름아닌 삼국 백성들을 통합하는 '포용력' 에서 나왔고

고려의 후삼국통일은 신라의 나당동맹으로 이룬 삼국통일과 달리

외세의 힘을 빌리지 않았기에

더 의의가 있다고 여겨지고 있고

오늘날 분단상태에 있는 한반도를 통일하는데의

중요한 모범사례라고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인자함과 어진 마음으로 후삼국 백성을 통합하고

민족 자주국가였던 고려시대를 연 '태조 왕건' 은

오늘날 한국사의 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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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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