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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후

후삼국의 백성들은 다시 한 지붕아래에서 살게 되었고

 

이후 고려에는 개혁군주가 나타나는데

그는 바로

고려 4대왕 광종입니다

 

광종

 

태조 왕건의 넷째 아들이었던 광종은

기존 고려 건국의 주체 세력이었던

'호족(지방 호족)' 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려 노력했고

 

호족들의 세력 기반이었던 노비들을 해방시키는

'노비 안검법' 을 시행합니다

노비는 국가에 세금을 내지 않았고 호족의 사병화도 될 수 있었기에

노비가 많아지면 국가 재정이 약화되고 호족의 힘이 강해질 수 있었고

노비 안검법을 시행해 후삼국통일 전쟁 당시 전쟁으로 억울하게

노비가 되거나 한 사람들을 선별해 다시 양인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또 호족의 힘을 약화시키려 했던 광종은

고려로 귀화한 중국출신 '쌍기' 의 제안을 받아들여

관리의 시험 선발제도인 '과거제도' 를 실시하는데

과거제도를 시행함으로서 호족(귀족) 들이 혈연으로만

벼슬을 가지지 못하게 했고

이에 고려의 귀족층인 '호족 사회' 는

과거시험을 준비하게 되었고

과거시험 등을 통해 다시 자녀나 친인척들을 밀어주는

'문벌 귀족 시대' 가 시작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광종은 관리들의 옷색을 품계에 따라 정하는

'공복' 을 제정했고

신생국가 고려의 여러 내정을 다졌으며

'칭제건원' 을 해서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제정했고

고려가 자주국이자 '황제국' 임을 나타냈습니다

 

고려 황제 광종은 그렇게 당당한 자주국가를 만들려고 노력했고

고려는 고구려의 진취적 기상을 이어받아

내부적으로도 짐 , 태자 등 여러 황제적 칭호를 썼고

외세에 굽히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광종은 이후 개혁에 반발하는 신하들을 죽이는

'피의 군주' 가 되었고

광종 역시

 

'신생국가에는 건국자 이후 엄격한 통치자가 나타난다'

 

라는 패턴에 속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 : 조선 태종 이방원)

 

광종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빛나거나 미치거나' , 출처 : MBC 월화 특별기획 : 빛나거나 미치거나 (2015)

 

이후 고려는 동아시아 국가들과 교류하며 여러 번영을 하다

북방에서 북방민족이 성장하자 북방민족과의 대결을 하게 되었는데

먼저 고려는 건국부터 태조왕건의 '북진정책' 으로

한민족 국가인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적대시하고 있었고

북방에서 강성해진 거란은 중국 송나라를 침공하기 앞서

후방의 고려를 제압해 놔야 겠다고 판단해

고려를 침공하게 되었습니다 (거란의 1차침공)

 

이에 거란 장수 소손녕은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는데 고려 국왕 성종과 고려 신하들은

크게 두려워했는데

이때 고려의 외교관 서희는

국제적인 안목을 바탕으로 소손녕이 공격하는게

단순한 고려침공이 아니라

중국 송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고려가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무력시위의 성격임을 파악하고

홀로 소손녕의 진영에 가서 담판을 합니다

 

<소손녕>고려는 신라에서 나왔고

고구려의 옛땅은 거의 우리 거란에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옛땅은 우리거니 내놔라 !!

 

<서희>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했으며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나라 이름도 고려고

수도도 평양인데 ?

 

<소손녕>흐음 ㄱ- 그러면

왜 송나라랑만 교류하고 우리 거란이랑은 교류하지 않는 것이냐 !!

 

<서희>아 그건 우리 고려랑 거란 사이에 여진족이 길을 막고 있어서임

우리도 너희랑 잘 지내고 싶음 ㅇㅇ

같이 여진을 몰아내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면 너희랑 친하게 지낼게 ㅋ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

 

소손녕은 거란의 강성한 군사들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할말을 하는 고려의 서희의 인품에 감탄했고

이에 요나라 군은 물러났고

고려는 이 담판으로 '강동 6주' 를 얻게되 압록강 유역에 진출합니다

 

강동 6주

 

땅을 뺏길 위기에 처하다가 도리어 영토를 넓힌 서희였고

 

'세 치 혀가 칼보다 강하다'

 

라는 말이 어울리는 인물이라 할 수 있으며

서희는 뛰어난 국제정세를 보는 안목과 외교로 나라를 구한

한국사의 위인입니다

 

고려의 대외교관 서희

 

이후 거란이 물러가고

이후에도 거란은 고려를 간섭하며

또다시 고려를 침공하는데 (거란의 2차침입)

고려는 우여곡절끝에 겨우겨우 막아냈고

 

이후에도 거란은 고려를 위협하자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을 준비했고

거란은 또다시 침공하는데 (거란의 3차침입)

이때 결국 거란을 벼르고 있었던

강감찬 장군이 나서

길러놓은 20만 군대로 흥화진에 진을 치고

수많은 쇠가죽을 엮어 삼교천 강물을 막아놓았고

거란 장수 소배압이 얕은 삼교천 강을 건너자

쇠가죽 둑을 터트렸고

강을 건너던 거란군사들에게 차가운 겨울강물이 쏟아지자

고려군이 튀어나와 활을 쏘았고

이후에도 거란군은 개경에 도달했는데 삼엄한 개경 경비에

결국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려 했고

이때 강감찬 장군은 다시 거란군을 귀주에서 궤멸시켰고

귀주 벌판은 거란군의 시체로 뒤덮였습니다 (귀주대첩)

 

귀주대첩 민족기록화 - 이용환 작품

 

백방의 노장 강감찬 장군은 승전해 돌아왔고

고려 백성들은 나라를 구한 강감찬 장군에 감격했습니다

 

강감찬 장군

 

귀주대첩으로 고려는 강성한 거란군을 물리친 이후

고려는 동아시아의 무시못할 국가로 여겨지게 되었고

동아시아는 고려 중심의 평화시대가 시작됩니다

 

귀주대첩 이후 주변 국가들과 교역하며 평화를 누린 고려인들

 

그렇게 거란의 대규모의 1차 , 2차 , 3차 침입까지 막아낸

민족 자주국가 고려인들은

외세에 비굴하게 굴복하는 것보다 자존심을 지키려 했고

이러한 불굴의 정신은 이후의 대규모 외적의 침입때에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오늘날 서희와 강감찬 장군은

나라를 구한 한국사의 위인으로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라봉봉>저는 고려는 한국의 중세시대이기에

은근 어두컴컴한 느낌도 있고 괴상한 느낌도 있다 생각하는 편이지만

고구려를 계승한 진취적인 느낌은 정말 좋다고 생각됩니다

 

한국이 전통적인 초강대국이었던 중국 바로 옆에서 ,

주변에서 수많은 큰 세력들이 일어나고 멸망하는 것을

가까히 본 지리적인 입장에서

반만년 역사를 유지하고 지켜왔다는 것은

진취적이고 자주적인 민족적 기상과

선조들의 큰 노력이 있어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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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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