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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왕의 황조가 , 해명태자의 자결>

[아버지가 남긴 증표]

[유리왕과 황조가]

[국내성 천도]

[해명태자]

<라봉봉>

 

[아버지가 남긴 증표]

부여를 탈출해서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 임금이었는데

예전에 주몽이 부여에 있을때

예씨부인과 결혼해 예씨부인은 임신을 했던 상태였습니다

 

비상한 능력을 가졌던 주몽은 부여 대소왕자의 질투와 견제에 결국

남쪽으로 도망서 나라를 세우기로 했고

 

임신한 예씨부인에게 떠나기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몽>나는 남으로가 나라를 세울것이오

만약 아들이 태어나거든 ...

 

주몽이 부여를 탈출한 뒤

예씨부인은 홀로 사내아이를 낳았고

아이 이름은 유리였습니다

 

사극 '주몽'의 유리와 예씨부인

 

어머니와 성장한 유리는 어렸을때 거리에 나가놀며

새총으로 참새를 쏘다가

실수로 물긷는 부인의 물동이를 깨뜨렸습니다

 

그 부인이 꾸짖으며 말하기를

 

<부인>이 아이는 애비가 없어서

이렇게 노는구나 !

 

하고 면박을 주었고

부끄러워진 유리는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 예씨부인에게 물었습니다

 

<유리>나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고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

 

이에 예씨부인은

 

<예씨부인>너의 아버지 주몽은 천제(하느님)의 손자이고

하백(물의 신)의 외손인데

부여의 신하되는 것을 원망하다가

남쪽으로 도망쳐서

고구려라는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너의 아버지께서 떠날 때 나에게 말하길

 

'만약 아들이 태어나거든

내가 숨겨둔 증표가

칠각형 돌위에 있는 소나무 밑에 있으니

그것을 발견하면 그것을 들고 나에게 찾아오도록 하시오'

 

라고 말했단다

 

유리는 곧 온 마을을 뒤져서

칠각형 돌위에 있는 소나무를 찾으려 했지만

도대체 그게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지친 유리가

마루에 앉아있다가

기둥과 추춧돌사이에 무슨 소리가 나는것을 보았고

자세히 보니 주춧돌이 칠각형이어서

곧 기둥밑을 파보았더니

반으로 부러진 칼 조각이 나왔습니다

 

주춧돌과 기둥

 

부러진 칼

 

유리는 어머니 예씨부인과 함께

부여에서 탈출해 고구려로 도망쳤고

졸본으로 가서 아버지 주몽 임금을 만나고

부러진 칼을 바쳤습니다

 

이에 주몽 임금이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칼조각을 꺼내서 맞춰보니 딱 맞아 하나의 칼이 되었고

이에 주몽임금은 기뻐하며

유리를 태자로 삼았습니다

 

[유리왕과 황조가]

주몽임금이 세상을 떠나시자

곧 유리가 고구려 2대 임금 , 유리왕이 되었고

 

사극 '바람의나라' 에서의 유리왕

 

유리왕은 처음엔 다물후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았으나

왕비 송씨가 곧 죽자

다시 두 여자에게 장가를 들게 됩니다

 

한 여인은 고구려 여인 화희였고

한 여인은 한나라(중국) 여인 치희였는데

 

두 여인은 유리왕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서로 싸웠기에

결국 유리왕은 동쪽과 서쪽에 동궁과 서궁이라는 두 궁궐을 지어서

각각 따로 살게합니다

 

화희와 치희

 

고구려 벽화속 높은 신분의 고구려 여인

 

이후 유리왕이 일주일동안 사냥을 나가니

화희와 치희는 싸우게 됩니다

 

<화희>너는 한나라의 천한 종년이면서

어찌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 것이냐 ?

 

이에 치희는 부끄럽고 분해서

궁궐을 나와 집으로 도망쳤고

 

유리왕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채찍질해서 쫓아갔으나

치희는 분함을 참지 못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에 유리왕은

슬픔에 빠져 나무 밑에서 휴식하다가

꾀꼬리 부부가 모여 우는 것을 보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유리왕>

펄펄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답구나

외로울사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輿歸

 

이 노래는 황조가라 불리게 되었고

고대한국의 서정시로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황조가를 부르는 유리왕

 

[국내성 천도]

유리왕은 이후 고구려 내정에 집중했고

부분노 장군을 시켜 선비족들을 물리쳤고

 

한편 금와왕의 뒤를 이은 부여의 대소왕은

남쪽의 고구려를 호시탐탐 노리고 5만 군사로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큰 눈이 내려서 돌아갔습니다

 

어느날은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서

유리왕은 신하에게 돼지를 뒤쫓게 했고

돼지는 국내성에 이르렀는데

 

돼지를 붙잡은 신하는 돌아와서

유리왕에게

국내성이 토지가 비옥하고 자연이 준험해

수도를 옮긴다면 전쟁걱정이 없을 것이라 간언합니다

 

이에 유리왕은 국내에가서 지세를 살펴보더니

수도로 하기 좋다 여겨

결국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습니다

 

고구려 두번째 수도 '국내성'

 

유리왕대부터 국내성은 고구려의 2번째 수도가 되었고

위나암성은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산성이 되었습니다

 

또한 국내성은 평시수도였고

전쟁시 전시 , 산성수도였던 환도성이 있었습니다

 

왼쪽 산성이 전시수도 환도성 , 아랫쪽 평지성이 평시수도 국내성

 

집안시에 남아있는 옛 고구려 국내성 성벽

 

[해명태자]

유리왕에게는 해명이라는 태자가 있었는데

해명태자는 힘이 세고 용감한 태자여서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았습니다

 

만화 '바람의나라' 속 해명태자

 

한편 고구려 이웃나라였던 황룡국왕이

이 소문을 듣고

황룡태자에게 사신을 보내서

강력한 활을 선물했습니다

 

이에 해명태자는 황룡국 사신 앞에서

손으로 활을 꺾으며 말하기를

 

<해명태자>하하 ! 내가 힘이 센 것이 아니라

활이 약한것이다

 

라고 말했고

이 소식을 들은 황룡국왕은 부끄러워했습니다

 

유리왕은 이 소식을 듣고 해명태자에게 분노하며

황룡국왕에게

 

<유리왕>해명은 자식으로서 효성이 없으니

내가 해명을 사신으로 보내거든

나를 위해서 해명을 죽여버리시오

 

라고 말했고

결국 해명태자는 황룡국왕의 요청을 받고

황룡국을 방문하려 합니다

 

이에 어떤 사람이 해명태자를 보고 걱정하며 말리기를

 

<어떤 사람>황룡국왕이 이유없이 만나자하니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으니 부디 가지 마십시오

 

이에 해명태자는

 

<해명태자>하늘이 나를 죽이려 하지 않는데

황룡국왕인들 나를 어떻게 죽이겠느냐 ?

 

하며 태연하게 황룡국으로 갔고

 

유리왕의 요청을 받은 황룡국왕은

처음엔 해명태자를 죽이려했지만

해명의 늠름한 풍채를 보고

감히 죽이지 못하고 예절을 갖추어 고구려로 돌려보냅니다

 

해명이 멀쩡하게 돌아오자

이에 유리왕은 해명에게 사람을 보내 말했습니다

 

<유리왕>내가 도읍을 옮긴 것은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국가의 위업을 다지려 했던 것인데

 

네가 나를 따르지 않고

힘이 센것만을 믿고

이웃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자식된 도리가 이와 같을 수 있는가 ?

 

여기 칼로

너는 자결(자살)하라

 

고구려의 검 '환두대도'

 

부끄러워진 해명태자는 아버지가 보낸 칼로 곧바로 자결하려 했고

이에 어떤 사람은 자결하려는 해명태자를 간곡히 말리며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태자께서는 마땅히 다음 고구려 임금이 되실 분인데

왕이 보낸 사자가 한번 와서 말한다고 자결한다면

왕의 지시가 진실이라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

일단 자결을 멈추어 주십시오

 

이에 해명태자는

 

<해명태자>저번에 황룡국왕이 강한 활을 보낸것은

나는 그들이 우리 고구려를 업신여길까 걱정되어

일부로 활을 잡아당겨 꺾음으로서 답한 것이었는데

 

(원래 동양에서 무기를 선물하는 것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일임)

 

뜻밖에도 아바마마께서 나를 불효하다 생각하시고

칼을 내려 자결케 하시니

아버지의 명령을 어찌 거역할 수 있겠느냐 ?

 

이에 해명태자는

동쪽 언덕으로 가서

창을 땅에 꽂아놓고

말을 타고 달리다 창에 엎어져 자결했습니다

 

만화 '바람의나라' 에서 말을 탄 해명태자 , 역사나 창작물에서도 슬픈 비운의 인물로 유명합니다

 

해명태자가 자결하자

유리왕은 총명했던 셋째아들 무휼을 태자로 삼았고

 

(해명태자=고구려판 사도세자 , 무휼=고구려판 정조)

 

왕자 무휼은 뛰어난 군사전략과 총명함을 보이며

유리왕 사후 3대 고구려왕 '대무신왕' 이 됩니다

 

<라봉봉>세계 각각 나라들의 초기 건국 신화나 전설들이 있는데

한중일의 경우를 살펴보면

 

중국은 초기부터 지도자의 덕성이 중시되나 뒤통수 , 정치질이 강한 성향이 많고

 

일본은 초기가 너무 신화적요소가 많거나 미개한 부분이 많아

일본 초기역사는 그냥 한국에서 배우며 힘을 키우던 시기였고

 

한국의 경우는 왕은 하늘의 후손이라는 '천손사상' 및 인내심 ,

지도자의 용맹함이 부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여튼 어린 유리도 주몽의 아들답게

어린시절부터 용맹한 의기를 발휘해 증표를 찾고

아버지에게 간 인물이고

 

단 국왕 '유리왕' 의 경우는

건국 초기였던 고구려의 기틀을 잡고

신생국가인 고구려를 호시탐탐 노리던 중국 한나라 , 부여 , 이민족들과 대결해야했기에

엄격하고 엄격한 왕일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고

 

이에 애초부터 엄격하고 총명한 성향이 강한 셋째아들 무휼을 왕위에 올리려

괜한 구실을 만들어 해명태자를 살해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도세자를 살해한 영조와 비슷)

 

하여튼 고구려는 이렇게 과격한 역사가 많고

거친 만주지역에서 워낙 사방팔방으로 강대국들에게 둘러쌓이며 성장한 고구려였기에

고구려 왕실은 백제나 신라왕실보다 더 빡세게 돌아갔고

고구려 왕실수난사는 이후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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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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