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남로당 박정희>

[광복군 중대장 박정희]

[귀국]

[박상희]

[조선경비사관학교]

[대구 10.1 사건]

[상희형의 죽음]

[남로당 가입]

[이대생 이현란]

[숙군]

[백선엽]

[백의종군]

<라봉봉>

 

[광복군 중대장 박정희]

그렇게 박정희 , 다카키 마사오는

만주군관학교 수석졸업 , 일본육사 졸업을 한 후

만주국내 최고 브레인 초임장교로서 임관하는데

곧바로 일본제국이 멸망하고

만주에는 소련군이 진격하기 시작했고

1945년 8월 15일 한국은 광복을 맞습니다

 

광복이 되자

패전국 일본제국 만주군 군복을 입고 있던 박정희는

좆되버렸는데

 

좆되버린 일본제국 다카키 마사오 중위

 

소속부대가 사라진 박정희는

동료들과 9월 21일 베이징으로 건너가서

장교 경험자를 찾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 광복군으로 편입되어

중대장 , 광복군 장교로 활동합니다

 

대한민국 광복군

 

광복군들은

소총과 기관총 등 기본무장을 갖추고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갈날을 기다리며

매일같이 훈련했고

제일 힘든건 식량이어서

북경 동포들에게 식량을 얻어서 부하들에게 먹이느라

애를 먹습니다

 

이무렵 박정희 광복군 중대장(만주군 출신의 카멜레온 정희) 은

다음과 같은 광복군 노래를 직접 지어서 불렀습니다

 

<박정희의 광복군 노래> 

조팝 깡다리에

소금국만 먹어도

광복군 정신만은

씩씩하게 살아있다

 

하여튼

ㄹㅇ 누가보면 거의 광복군에서

10년동안 산전수전 고생한 사람이 지은 노래같을 정도로

일본제국 밑에서 오랫동안 똥고빨았던

박정희도 보통 놈이 아니었던 인물이고

 

하여튼 ,

당시부터는 이제 일본제국이라는 거대한 악의 제국이

소멸했기에

한국인들은 이전부터 꾸준히 분쟁은 있었지만

별다른 큰 논쟁으로 벌어지지는 않았던

좌우이념논쟁이 거대한 중심의제로 떠오르게 되었고

 

원래부터 수직적 관계서열 , 조직문화에 익숙했던

박정희 광복군 중대장은

부대내 공산주의자 병사들이

뜬금없이 훈련중에 공산당 회의에 가야겠다하자

 

<박정희>잔말말고 훈련이나 받아 !

 

하고 일부로 더 빡세게 굴렸습니다

 

이에 분노한 공산주의자들은 

박중대장을 규탄하는 회의를 열었고

밤중에 선동을 하자

옳소 ! 하며 동조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이에 박정희 중대장은

 

<박정희>옳기는 뭐가 옳아 

돌아가 잠들이나 자 !

 

하고는 돌아왔고

 

 

평생 동양 , 무사적 서열관계와 계급관계에 철저했던

박정희는 나이와 계급을 무시하고 맞먹으려 드는

공산주의식 인간관계에 강한 거부감을 느낍니다

 

(근데 역사에서는 공산주의 이론이 나오기 전부터

이런 문화들이 북방계 , 유목민족 ,

나이 상관없이 친구먹는 조선유교문화 등에서도 있었는데

꼭 나쁘지만은 않지만

그냥 박정희는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거부감 및

말을 안듣는 부하들이 싫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광복군 내에서도 이런 이념논쟁 문제가 있었지만

한반도 본토는 더욱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귀국]

이후부터는

미군정에서 중국에 수송선단을 배치해

열심히 중국내 한국인 , 광복군들을 한국으로 실어날랐고

박정희 역시

1946년 5월 6일 미해군 수송선에 올라

2일후 부산항에 도착합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콜레라가 번지고 있었기에

배에서 내리며 미군 검역관들에게

DDT 가루를 뒤집어 쓰는 전신소독을 받았고

 

DDT 살충제 (현재는 발암물질로 사용금지)

 

고국으로 돌아온 박정희는

가난하고 무질서한 조국에서

미군과 소련군 , 좌파와 우파 등 사상과 이념논쟁에 싸우는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보게 됩니다

 

박정희는 고향에 돌아왔는데

한때 일본군시절

별달린 일본제국 군복 , 긴 칼 , 망토를 차고

고향 주민들에게 부러움을 받았던 박정희는

모든 지위를 박탈당한 후

거지꼴에 밀짚모자와 지팡이 하나 들고 돌아왔고

 

 

가족들은 그러게 왜 교사직 버리고

군인되서 거지가 됬냐고

면박을 주기도 했고

 

박정희는 이때부터 별다른 일없이

고향에서 백수생활을 하게 됩니다

 

[박상희]

박정희에게는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친형이 있었는데

박정희가 아버지처럼 존경하던 11살차이 친형 박상희는 

이전부터 신간회 활동 , 동아일보 기자 , 조선건국동맹 참가 등

여러 독립운동을 하며 박정희의 고향 구미에서의 큰 존경을 받는 인사였고

사람들은 박상희를 대통령감이라 여겼고

박정희 역시 자신과 달리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에 힘쓴 형을 깊게 의지하고 존경했습니다

 

일본군 박정희의 친형 및 독립운동가 박상희

 

해방이 되자

박상희는 구미에서 좌우를 가리지 않고 큰 인기를 얻었고

구미 지역 지식인 리더로 활동햇는데

당시 지식인들도 좌나 우로 구분되던 시기여서

박상희는 점차 좌익으로 기울었고

 

박상희는 여운형 노선을 옹호하며

이승만을 비난하는데

 

해방후 우익 지도자 이승만(왼쪽)과 중도좌파 지도자 여운형

 

박정희는 그런 형의 말에 수긍하려 들지 않고는

 

<박정희>이승만 박사도 해외에서 평생 독립운동을 해오신

훌륭한 분이십니다

 

하고 정색을 빨았습니다

 

박정희는 광복군 중대장시절 공산주의자 병사들에게

시달린 경험때문에 본능적으로 좌익에 가담한 형에 대해서

꺼리는 입장이었고

 

박상희 역시 출세를 위해 만주군에 입대했던

동생 박정희를 좆같아하며

 

<박상희>정희한테 돈주면 안돼

 

하며 친척들에게 고립시키려 합니다

 

 

[조선경비사관학교]

한편 당시 백수신세가 된 박정희는

고향 친구들을 만나며 놀러다녔고

그러다 만주군관학교와 육사동기 이한림을 만났는데

이한림은 그 군대 경력을 살려서

오늘날 국군 전신인 남조선국방경비대에 들어갔고

만군인맥 박정희에게 시골에 틀어박혀있지말고

빨리 국군에 들어오라 권유했고

박정희 역시

곧바로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합니다

 

조선경비사관학교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 일본육군사관학교를 거쳐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의 모태인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세번째 입학을 하게 되었고

한명이 군대를 두번가기 , 한군두도 빡센건데

박정희는 그렇게 군대를 세번간 것이었고

 

만주와 일본군 출신의 박정희 만군인맥들도

이때 다시 이곳에 경력자로 입학해서

한국군 창군의 주역이 됩니다

 

한국군은 창군 초기

비주류의 광복군과 중국군 ,

주류의 일본군과 만주군 등

다양한 출신들이 몰려들었고

일제강점기 시기 일본군이 쓰다버린 무기와 군복 , 막사들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도 있었기에

초기엔 많은 혼란이 따르게 됩니다

 

남북은 38선으로 나뉘어 있었고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북한군을 소련군식으로 ,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남한군을 미군식으로 개조하기 시작했는데

 

미국은 당시까지만 해도 소련과 연합해서 독일과 일본과 싸우기도 해서

자유주의 VS 공산주의 사상갈등이 그리 크지도 않았고

개인의 자유를 매우 중요시하는 나라였기에

한국 남한군내 좌익이나 우익 할 것없이

 

'사상의 자유'

 

원칙을 적용해 입대자의 사상을 문제삼지 않았고

이에 초기에 한국군에는 좌익사상을 가진사람들도 입대하게 됩니다

 

좌익에 거부감 느끼던 박정희와 만군인맥들은

앞으로 독립된 한국에서 한국군인으로서

한국의 군사적 독립을 주요 이념으로 설정했고

만주와 일본사관학교에서 이미 정규교육과정을 수료했던 그들은

엘리트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초기 한국군에 이념도 다르고 여러 무식한 사람들이 막 입대하자

속으로 ㅈㄴ게 무시하기 시작했고

또 일제식 군교육에 익숙했던 그들은

미국식 군교육이 시작되자 미고문관들과 충돌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박정희나 만주군출신들은

워낙 혹독한 환경에서 교육을 받았기에

일본군출신들과 달리 나름 유연히 적응했고

이에 점차 초기 한국군 내부에서는

박정희와 만주군 출신들이 주류화 되기 시작합니다

 

[대구 10.1 사건]

당시 박정희의 성장도시 대구는

당시 미군정의 식량정책 실패로

쌀값이 폭등해 좆되버렸고

콜레라까지 창궐해

1700여명의 사망자가 나왔는데

거기다 미군정은 일제강점기 시기 친일경찰들을

다시 고용해 민중들을 괴롭혔고

 

다시 복귀하는 친일파들

 

이에 개빡돈 대구인들과 좌익인사들은

대구폭동(옛날표현) , 대구항쟁 , 대구 10.1사건을 일으켰는데

지역유지이자 남로당 간부였던

박정희의 형 박상희는 이때 선두에 서서

2천명 군중들을 이끌고

구미경찰서를 공격해 경찰관과 우익인사들을 감금했고

10월 6일 경찰이 발포한 총을 맞고 사살됩니다

 

대구 10.1 사건

 

[상희형의 죽음]

박상희는 말년에는 공산주의자로서

동생 박정희와 싸우기도 했지만

 

평소 인간적 모습과 포용력이 강하고

독립운동가 출신 ,

좌익이었지만 외국의 한국 신탁통치에 찬성한 좌익들과 달리

중도좌파로서 신탁통치에는 침묵했고

똑똑하고 키도 크고 힘도 셌던 인물이라

 

구미사람들의 지지를 받은 인물이었고

박정희 역시 그런 형을 결국 어려워하고 존경했는데

 

 조선경비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있던 박정희는

고향에서 일어난 난리에

아버지처럼 의지하던 형이 갑작스럽게 죽었음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고

훗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박정희>형님(박상희) 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사람이 좋고 여러사람들이 따르다가 보니까

그 사건에 휩쓸려 든 것이다

 

 

[남로당 가입]

또 당시 대구사건은 엄연히 미군정의 무능으로 일어난게 맞았던 것이기에

이때부터 박정희는 미국 , 미군에 대한 증오심을 품게 되었고

 

이렇게 아버지같이 여기던 상희 형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상황에서

멘붕이 온 박정희는

점차 좌익동기들과 어울려 다니며

남한은 부패하고 혼란하고 외세 미국의 간섭을 받기에

오직 북한만이 자주적 민족통일을 이룰 수 있다거나

이런 말들에 대해 선동되기 시작됩니다

 

대구 10.1 사건 , 대구폭동은

박정희 뿐만 아니라 조선경비대(대한민국 국군 전신) 에

반미감정과 좌경화 시키는 거대한 계기가 되었고

당시 미군정은 일제강점기 시기 친일경찰을 다시 불러서

고용하는 형태였기에

좌익 청년들은 우익으로 태세전환한 친일경찰에게 쫓기며

도피처로 군에 입대해 국군들을 선동했고

 

이런 친일경찰들에 거부감이 강했던

청년 , 젊은이들은 분노하며 군대에 입대했는데

박정희 역시 이렇게 한국군내부가

적화되던 상황에서 빨간물이 들게 된 것이었습니다

 

워낙 미국인들이 대구에서 벌인 무능한 행정과

친일경찰들을 그대로 쓴것이 한민족 정서에 어긋나는

기괴한 일이엇기에

이때 반미감정이 증폭되어

남한은 공산주의가 침투하기 쉬운 상황이 되었고

 

결국 박정희는 남조선로동당에서 가입 , 활동하며

정부전복 기도사건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이대생 이현란]

하여튼 이런 상황말고도

박정희는 육군중장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했다가

신부쪽 들러리로 온 이현란이라는 이화여대 학생에게 반해버렸는데

 

이현란 , 아랫줄 맨왼쪽

 

딸까지 낳아준 본처였던 김호남은 무식하다며

ㅈㄴ게 싫어하고 무시했던 박정희였고

 

유부남 박정희는

꿈에 그리던 엘리트 신여성 , 이대나온 여자 이현란이

미인에 날씬한 몸매이자 반해버려서

총각행세를 하며

 

북한 공산당에게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무작정 월남해서 부모님도 없고 의지할곳 없는 이현란에게

학비도 내주고 접근했고

 

1948년부터 8살 아래의 처녀 이현란과 동거에 들어갑니다

 

(아무리 봐도 박정희 기록에서는 정상적인게 찾기 힘듬 ..)

 

박정희는 이미 자신이 김호남에게 장가를 들어

10살넘은 딸을 두고 있다는 말을

이현란에게 하지 않았고

이때부터 본처 김호남과 이혼하려 애를 쓰게 됩니다

 

박정희도 해도해도 너무했던게

김호남은 비록 무식했던 , 전통적 사고의 구여성이자 촌여성이었지만

박정희가 홀로 만주가서 일본군으로 ㅈㄹㅈㄹ할때

홀로 시가에서 살며 남겨진 박정희의 딸을 키우며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착한 며느리 , 조강지처였고

박정희 역시 마음에도 없는 혼인을 부모강요로 한것이었지만

딸까지 낳아준 김호남에게 월급도 주지 않다던가

마주치기도 싫어했고

 

빡돈 형 박상희는 이에 생전

박정희를 패다싶이 해서 김호남의 방에 집어넣기도 했습니다

 

(ㄹㅇ 박상희는 착한 형이었고

박상희 죽음에 박정희도 멘탈 많이 무너졌음)

 

근데도 정신 못차리고

총각행세하며 의지할곳 없는 이대생 이현란을 꼬셔서

동거에 들어간 박정희였고

 

박정희는 이현란이 눈치 못채게

빨리 김호남과 이혼수속을 하려 김호남을 찾아나섰지만

김호남은 이혼서류에 도장찍기를 거부하고 도장런해버렸고

 

박정희 역시 부모결혼으로 억지 결혼생활을 하다

이현란에 빠져서

난생 처음 장미빛 미래가 펼쳐지는가 했더니

김호남이 생각보다 말을 듣지 않자

잿빛 미래가 펼쳐지며 멘붕이 오게 됩니다

 

그렇고 그런 상황속에서

한국군 내부에서는 공산당 , 남로당 조직을 찾아서

점차 숙청(숙군) , 제거하고 있었고

 

숙군과정에서 총살되는 좌익군인

 

남로당에 가입한 박정희 소령 동무는

국군 , 숙군수사팀의 정보망에 딱 걸려버립니다

 

근데 박정희는 한창 아내 김호남에게는 없었던

연애감정을 처음 느껴보며

이현란에 푹빠져 있었는데

 

숙군수사팀에 딱 걸려버려서

빨갱이로 잡혀들어가버렸고

빨갱이+로맨틱 불륜가이였던 박정희 소령은

그 절박한 상황속에서도 이현란에게 쪽지를 써서 고백합니다

 

<박정희의 쪽지>현란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도망갈 수 있었는데도 가지 않았다

 

근데 문제는 박정희 동거녀 이현란은 

이미 북한 공산당에게 일가 전재산이 몰수되고

가족들도 다 좆된상황에서

월남한거라서 공산주의와 북한에 대한 증오심이 상당했던 인물이고

 

'빨갱이가 싫어서 월남했는데

빨갱이 마누라라니'

 

하며

배신감에 박정희를 떠나게 됩니다

 

결국 박정희는 이전에 만주 일본군시절 광복을 맞이해

일본군 직위해제 및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이제는 잡혀버린 국군 공산당원이 되어

가족도 , 사랑하는 동거녀도 , 국군 소령직도

모든 것을 잃고

폐인의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었고

 

박정희 뿐만 아니라

박정희의 여인이었던 김호남과 이현란의 인생 역시

좆된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숙군]

하여튼 박정희 소령은 결국 수감되어

남산 기슭의 헌병대 영창에 들어갔고

이럴때가 올줄 알았다며

박정희는 순순히 자술서를 쭉 써내려갔고

 

자신이 남로당에 가입한 것은

형 박상희가 대구폭동으로 살해당할때

남로당원이 유족들을 도와주고 있어서

남로당의 제안을 받아

형의 원수를 갚기 위해 남로당에 가입했다 했고

박정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군내 남로당 조직원들이름을

많이 털어놨습니다

 

그럼에도 당시 국군내 남로당 , 공산당 문제는 심각했기에

박정희는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되었고

수사에는 순순히 응해서 다 털어놓습니다

 

근데 군조사관들도 박정희의 이력을 살펴보다

의아하게 여겼는데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를 수석(1등)으로 졸업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나온 것을 알게되었고

 

이에 박정희를 유심히 관찰했는데

평범한 좌익 같지는 않았고

자포자기도 않고

그렇다고 특별이 생애 애착이 있는것처럼 보이지도 않아

과연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백선엽]

또 만주군 인맥들 역시 박정희의 똑똑함과 인물됨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살릴려 했고

만주군 출신으로서 한국군내 숙군수사 총책임자 백선엽 대령은

박정희만은 일단 살리기로 결정합니다

 

박정희를 보호한 백선엽

 

백선엽은 박정희와 마주하는데

죽기 일보직전인 박정희는 백선엽에게

 

<박정희>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애원했고

백선엽은 무심코

 

<백선엽>도와드리지요

 

라고 정말 무심코 말해버리고

결국 박정희를 살리기로 결정합니다

 

[백의종군]

결국 박정희는 석방되었고

백선엽이 뒤를 봐주었는데

백선엽은 일단 형이 확정될때까지 박정희 소령을 근무시켰고

결국 박정희는

1949년 2월 8일 고등군법회의에서

반란기도죄로

사형구형에 무기징역과 파면 , 급료몰수형을 선고받습니다

 

그러나 곧 박정희는 남로당에서의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은 이력과

군내에서도 인물이 아깝다는 여론이 커서

파격적 특례를 받아 징역 10년으로 감형되고 형집행이 면제됬고

 

박정희는 이후에도

백선엽의 비호를 받아

백의종군처럼

군복을 벗은채로 까만 양복을 입고

육군 전투정보과에 정상출근해

따로 기밀비에서 월급도 수령합니다

 

이시기가 박정희 최악의 시기였는데

1949년 여름엔 나이든 홀어머니가 결국

박정희의 무기징역에 충격을 받아 별세하셨고

 

나름 박정희가 깊게 존경했던 이순신 장군의 일생과

겹치는 부분이 있는데

이순신 장군은 모함을 받아서

모진 고문을 당해 만신창이 몸이되어 파직당하고 백의종군할때

엎친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박정희는 이때

자신이 자초했던 비참한 상황을

타인이 모함해서 억울하게 된 이순신의 심정으로 연관시켰을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

박정희 인생의 최악의 상황이 바로 이 시기였고

 

박정희는 보직없이 군 정보국에서 그저 실장이라 불리며

이 시기에도

일처리 , 판단은 똑부러지게해서

젊은 장교들의 존경을 받았고

이때 육군 8기들과 접촉해

5.16 군사정변의 인맥을 만들게 됩니다

 

상관들에게도 존칭받고 지냈던 당시 박정희 실장

 

또 경상도 수재 , 대구사범 , 만주군 수석답게 

보고서를 잘쓴다는 소문이나서

여러 장교들이 부탁하는 문건을

대필해주는 알바도 하고 있었고

 

그러나 미래도 , 전망도 불분명한 박정희였고

늘 근엄했던 그도

군인들 사이에서

항상 사복차림으로 의기소침하게 지내며

언제 좆될지 모르는 상황이 됩니다

 

근데

그러다 갑자기

1950년 6월 25일 ,

북한이 남침하면서

박정희는 육군 포병 소령으로 복귀하게 되었고

박정희의 인생은 또다시 급변하게 됩니다

 

(난 롤러코스터 워어어)

 

<라봉봉>보통 박정희같이 큰 인물이라 여겨지는 인물들은

미담이 되게 많은편인데

박정희 같은 경우는

시대가 워낙 격변하고 어둡던 시기 성장한 것도 있고

본인의 극단적 기회주의 , 이기주의 성향과 맞물려

왠만큼의 평범한 이야기보다는 괴담이 너무 많아서

특히 쓰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나름 인생 굴곡을 겪으며

그가 존경했던 이순신과 나폴레옹과 겹치는 면도 보이는데

 

나폴레옹 역시 후임들에게는 큰존경을 받은 인물이고

박정희는 남로당 사건에서 겨우 살아남은 이후

점차 후임들의 환심을 사기 시작합니다

 

무언가 하려고하면

그앞에 대사건이 터져버려서

급격히 망하거나 급격히 재기하는 모습이 반복되고 있고

가히 죽을때까지 박정희는 롤러코스터같은 인생을 살았고

한국 역사상 가장 위험한 대통령이기도 했습니다

 

반응형

'어린이 한국역사 > 2집 Humanism'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정희와 제3공화국  (0) 2020.12.03
박정희와 5.16 군사정변  (0) 2020.11.29
만주군 장교 박정희  (0) 2020.11.25
박정희의 교사시절  (18) 2020.11.19
박정희의 유년시절  (0) 2020.11.17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