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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과 광주학살>

[서울의 봄 VS 신군부] 

[북괴남침설]

[3김]

[전두환 VS 김대중]

[5.17 쿠데타]

[5.18 광주민주화운동]

[광주학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삼청교육대]

[체육관 대통령]

[5공화국]

<라봉봉>

 

[서울의 봄 VS 신군부] 

12.12 사태(12.12 군사반란) ,

하극상을 일으킨 순간부터 전두환은

피의 킹스로드에 탑승했고

 

당시까지는 명분상으로

박정희 시해범 조사 때문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잡아넣은 것이었고

12.12사태는

전두환과 육사출신들이 군선배들에게 파벌에서 밀릴까봐 일으킨

ㅈㄴ 무리수였기에

군내에서는 이미 알법할 사람은 다 알고 있던 하극상 , 쿠데타였지만

 

당시까지 국민들은 그런거까지는 잘 모르고

박정희의 죽음에 그저 민주화가 시작된 것이라 여기며

대국민적 축제분위기였고

 

1980년 5월 15일 민주화를 열망하며 서울역에 모인 10만 시민 , 서울의 봄

 

이에 

박정희 암살 다음날인

1979년 10월 27일 부터

전두환과 계엄군이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광주 민주화운동일(1980년 5월 18일) 하루전날인

1980년 5월 17일까지의

반년가량의 짧은 시기를

 

'서울의 봄'

 

이라 합니다

 

당시 국무총리로서 대통령직을 계승한 최규하 역시

군부가 아닌 순수관료출신으로서

상식이 통하는 인물이었고

유신독재에 신음했던 국민들은

다시 군부가 아닌 민간에 정권이 이양될 것이라 여겼는데

 

당시 전두환은 이미

12.12 사태로 호랑이 등 , 피의 킹스로드에 탑승한 상황이었고

육사 동기들과

군장성 선배들을 조졌던

12.12 사태를 일으킨 이상

후퇴해버린다거나 머뭇거린다가는

곧바로 군법회의나 야당인사들의 견제에

전두환 역시 단두대로 직행이었기에

전두환도 어서빨리

서울의 봄을 끝내고

군사정권을 이어가며 대통령이 될 준비를 시작합니다

 

기호지세

 

[북괴남침설]

그러나 당시 야당인 민주당계에는

윤보선 , 김대중 , 김영삼 등 거물정치인들이

이전 박정희 생전시기부터 박정희와 맞다이를 뜨며

박정희를 위협하고 있었기에

 

전두환에겐 이 인물들은 크나큰 걸림돌이었고

오랫동안 비합리 , 비상식적인 말도안되는 유신헌법 , 유신독재에 지쳐있던

국민들의 군부에 대한 반발도 상당했기에

전두환은 서울에 봄에 맞서

다시 서울의 겨울을 불러올 비장의 카드를 사용합니다

 

전두환도 비록 무식한 군인이었지만

박정희 대통령 생전부터

오랫동안 청와대에서 근무하며

권부에서 보고 들은것이 많았던 전두환은

12.12 사태 이후

1980년 4월 중앙정보부장 서리(대리)에 임명되어

보안사령관(군정보)+중앙정보부(국가정보)까지 모두 관리하게 됬고

 

이런 상황에서는 북한의 위협 ,

 

'북괴남침설'

 

(당시까지 반공정서가 강해

북한을 북한괴뢰 북괴 , 중국을 중국 공산당 중공이라 했음)

 

을 사용하는 것이 전통적 수법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중앙정보부를 이용해

곧바로 민중들의 민주화열기를

북한과 관련있다거나 북한이 침공한다는 것으로 몰고가려했고

미국 국무부(미국 외교부) 는

 

'ㅈㄹ ㄴㄴ해 북한남침 그딴거 없음ㅋ'

 

이라고 성명을 발표해줬고

대한민국 국방부 역시 당시 북한의 남침준비는 없었고

전두환이 권력잡으려 ㅈㄹ한 것일뿐이라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3김]

북풍몰이가 실패로 돌아가자

전두환은 결국 민주화 시위를 주도하고 있던

야당 인사들을 조져버려서

국민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며

민주화 열기를 잠재우려 했는데

 

당시 정계에는

 

김영삼 , 김대중 , 김종필

 

3김이라 불리며

대권경쟁에 뛰어들며 거물정치인으로 활약하고 있었고

 

3김 , 왼쪽부터 김종필 , 김대중 , 김영삼

 

특히나 전두환은 3김 가운데

김대중을 가장 두려워하고 싫어했습니다

 

[전두환 VS 김대중]

왜냐면 김대중은

한때 박정희와 대권에서 1-1로 맞다이떠서

아슬아슬하게 대권에서 패배했는데

이때 박정희는 부정선거를 했음에도 겨우 이긴것이라

김대중을 두려워하며 유신을 선포해

대통령 선거제도를 없애고

독재정을 연 것이었고

 

박정희 최대 대항마였던 김대중 , 박정희정부 시기 김대중납치사건

 

전두환의 스승이었던 박정희와도 삐까삐까 맞다이떴던 김대중은

천재적인 대중 선동력과 군부독재에 맞서 온갖 역정을 거치며

스타정치인으로 급부상한 인물이었고

 

 

이미 민주정을 시행하고 있었던

미국이나 외국의 인사들 역시 앞으로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이끌어갈 거물정치인으로

김대중을 지정해놨던 상황이었기에

전두환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선

반드시 김대중은 조져버려야 하는 눈엣가시였습니다

 

[5.17 쿠데타]

김대중은 그렇게 전두환의 집중타겟이 되었고

1980년 5월에 들어서며

전두환은 학생들에게 앞으로 기본질서를 부정하는 행위(시위하면) 를 하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엄단하겠다고 경고했고

 

이에 학생들 역시

계엄령을 해제하지 않을 경우

5월 10일을 기해 가두시위를 단행하겠다고 맞섭니다

 

결국 전두환은 3김과 학생들을 찍어누르고

민주화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했고

 

학생들 시위가 점차 과격 , 대형화되자

5월 17일 저녁 계엄군은 출동해서

김영삼 , 김종필 , 김대중 3김을 가택연금 , 구속하는 동시에

재야인사와 학생 600여명을 전격 연행했고

 

이것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묻혀

별로 이야기 되지 않지만

역사학계에서는 역사용어로

 

'5.17 쿠데타(5.17 내란)'

 

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정치활동 일체금지 , 5.17쿠데타

 

그날 자정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탱크로 무장한 군병력이 주요 두시에 투입 ,

전국대학 휴교령 , 국회봉쇄가 시작되며

5.17 쿠데타가 일어났고

 

특히 김대중 등 정치인이 체포되자

광주에서 학생과 시민들은 대대적 시위를 벌이며 저항했고

특히 5월 17일에는 광주에도 군인들이 투입되며

전남대 , 조선대에 특전사 7공수여단 장교 68명 , 사병 680명이

M16 소총을 지닌 채 투입되 학생들을 구타하며

체포하고 두 대학에서 100명을 넘게 연행했고

계엄군은 두 학교를 완전 점령합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결국 이 사건의 여파로 그 다음날인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 일어납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전라도 출신 정치인으로서

전라도의 상징적 존재였던 김대중의 체포에

광주시민들이 분노해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시작된것도 있지만

그 전날부터 학생들이 잡혀가고 구타당하는 상황이었고

5월 18일에도 휴교령이 내려진 학교 앞에 학생들이 군인들과 대치하다

무자비하게 폭행 , 구타당했고

 

결국 분노한 광주 학생 , 시민들은 그날부로

대대적으로 민중봉기 , 민주화운동을 시작합니다

 

그날 광주의 군중들은

거리에 몰려나와

 

'전두환을 죽여라'

 

'계엄령을 해제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외치며 짝을 지으며 행진했고

시위가 커져가자

전두환과 신군부는 진압군 투입을 결정했고

 

결국 유혈진압 , 유혈사태가 발생하며

광주 시민들은 학살당합니다

 

공수부대원들의 잔혹한 진압

 

곤봉에 맞는 시민

 

 

계엄군의 폭력에 대한 소식이 시민들에게 전해지며

시민들도 저항하기 시작하는데

점차 시위대들은 학생뿐만 아닌 시민들도 합류하며

계엄군에 필사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고

진압봉 , 대검 , 가혹행위 등 야만스러운 계엄군의 진압 뿐만 아닌

시민들에 대한 발포 , 사망자도 발생했고

18일 , 19일 참혹한 상황에도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시민들도 저항하며

20일 최초의 계엄군 사망자도 발생했고

계엄군들은 군중들을 향해 총기를 집단발포하고 

시민들이 학살(최초 집단발포때 4명사망) 당합니다

 

20일 계엄군과 대치하는 시민들

 

금남로의 차량시위

 

결국 광주 시민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느끼고

광주 외부 등으로 진출해 경찰서와 무기고를 점거하고 무장했고

전라도 각 군 , 시 등에서 시위대에 의한 경찰서 공격 , 무기탈취가 일어났고

곧바로 무장한 시위대는 다시 광주로 향해

시민들에게 무기를 분배해 무장시켰고

징병제로서 군대경험이 있었던 시민군들은

자신들을 '시민군' 이라 부르며

계엄군과 맞섰고

 

트럭을 타고 질주하는 시민군

 

도청광장앞의 시민 궐기되회

 

도청광장앞의 시민들과 시민군

 

전남도청안을 지키는 시민군

 

체계적 훈련과 압도적인 화력을 가지고 있었던 계엄군을 물리칠 수는 없었지만

계엄군과 독재에 저항하며

시민들의 광주수호 , 민주화 의지를 표출하고 있었습니다

 

<시위도중 한 여성>우리 모두 나섭시다.

학생들을 살립시다.

계엄군을 물리치고 우리 스스로 광주를 지킵시다.

 

[광주학살]

결국 신군부와 전두환은 광주에 대한 참혹한 유혈진압을 실시했고

압도적 화력을 이길 수 없었던 시민군 , 시민들은 학살당하는데

9일간에 거친 광주민주화운동은

163명 사망 , 166명 행방불명 , 3139명 부상이라는

전라도와 한국사의 크나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학살되 방치된 시신들

 

상무관에 안치된 시신들

 

아버지 영정사진을 들고 세계를 울린 희생자의 5살 자녀 , 5월 아이

 

광주를 유혈진압한 전두환과 신군부는 김대중이 폭동을 조종하고 있다며

김대중에게 내란혐의를 씌우고 북괴 간첩들이 전라도에서 섞여있다 허위선전하며

민주화를 요구하던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내몰았습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1980년 5월 27일 전두환은 이전 유신과 같은

입법 , 사법 , 행정을 모두 장악하는 초헌법적 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 국보위를 조직해

전두환은 상임위원장이 되어 최규하 위의 왕 , 무신접권 집권자 혹은

쇼군처럼 군림하며 대통령이 될 준비를 시작합니다

 

국보위를 설치하는 전두환

 

전두환은 집권 전 , 후 기간동안 모두

정치적 양아버지 , 스승이었던 박정희가 했던 행동을

이름만 살짝 바꾸는 식으로 실제론

토씨하나 안바꾸고 그대로 복사+붙여넣기 했고

국보위는 이전 박정희가 5.16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모델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그랬던 것처럼

 

부정비리척결을 명분으로

공직자 , 국영기업 , 공기업 , 금융기관 , 교육계 등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해직시켰습니다

 

[삼청교육대]

전두환은

1980년 8월 4일 사회악일소특별조치에 의한

삼청5호계획에 따라

군대식 시민 교화기관 '삼청교육대' 를 만들어

시민들을 잡아서 군대식으로 개조시켰는데

 

삼청교육대

 

전두환의 삼청교육대 명분은 깡패들을 잡아넣어서

정신을 개조시킨다는 것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무고한 시민들 ,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이 많이 잡혀들어가

곤혹을 치루고 삼청교육대는

툭하면 군 교관들의 구타와 가혹행위들이 자행되는 등 인권유린이 극심했습니다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 제5공화국의 삼청교육대편 , MBC 드라마 제5공화국(第五共和國) (2005) The Fifth Republic

 

[체육관 대통령]

전두환은

이전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기직전 스스로 대장에 진급했던것 처럼

역시 

1980년 8월 6일 전두환은 스스로 대장에 진급했고

 

전두환의 대장진급 , 전두환에게 별달아주는 최규하 대통령

 

군선배들 조지고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전두환은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전두환과 신군부의 압력 등에 불안해진 최규하 대통령은 결국 

8월 16일 자진 하야를 선언했고

이에 전두환은

1980년 8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선거에 의해

무소속으로 단독출마해

99.9퍼센트라는 지지율로 대한민국 제 11대 대통령에 당선되는데

이 과정은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그냥 코미디라 보면 됩니다

 

체육관 선거

 

이를 체육관 선거라 부르고 있고

전두환은 국민의 지지가 아닌 체육관에서 친위세력들에게 만들어진 대통령이라는 뜻으로

 

'체육관 대통령'

 

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전두환 취임식

 

선서하는 전두환과 최규하 대통령

 

[제5공화국]

광주 학살의 여파가 가라앉지 않은 살벌한 분위기에서

전두환이 스스로 대장 , 대통령에 취임해버리자

당시 광주학살 , 삼청교육대 등 무자비한 폭압정치를 본

민주화인사 , 시민들은

 

뒷구멍으로 조용히 조졌던 박정희때보다

더 무식한 대놓고 하는 폭압정치가 일어나자

전두환이 무슨일을 하더라도 그저 두려움에 떨며

숨을 죽이고 있었고

1980년대는 그렇게 야만과 학살과 폭력으로 얼룩진 시대였습니다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은

액윽보수 선배였던

이승만 , 박정희처럼 대놓고 왕으로 군림하고 싶었지만

이승만과 박정희가 치졸하게

장기집권독재하며 질질 끌다가

말년이 참혹했던 것을 눈으로 봤던 인물이었기에

 

대통령 임기를 7년 단임으로 하되

다음 대통령을 자기 부하로 내세워 상왕으로 올라

영원히 군림하는 꾀를 내었고

 

(ㄹㅇ 나름 머리굴린 문어대가리)

 

물론 재임말년에 국민들의 거센 반발과

미국의 압력으로 전두환의 장기집권구상은 허사가 되지만

하여튼

1980년 10월 27일

대통령 7년 단임제로 하는

제5공화국 헌법이 제정되어

 

전두환의

전두환에 의한

전두환을 위한

 

전두환으로 시작해서 전두환으로 끝나버린

괴뢰공화국인

대한민국 제5공화국이 출범합니다

 

제5공화국

 

 

 

제5공화국은 전형적인 단순무식 군사국가였고

같은 군사국가였지만

신기술 , 절제와 금욕으로 국민들을 통제하던

구군부의 박정희(1984 스타일) 와 정반대로

 

신군부의 전두환은 우민화 정책 ,

 문화와 자유와 쾌락으로 국민들의 눈을 가리기 시작했고 (멋진 신세계 스타일)

 

달랐던 박정희와 전두환의 통치술

 

제 5공화국은

한국 최대호황기와 맞물려진 황금시대기도 했지만

시작부터 학살 , 피로 얼룩져있던 탐욕과 쾌락의 시대였습니다

 

<라봉봉>5.18 광주민주화운동이 공식명칭이지만

처참한 학살이기도 해서

광주학살도 맞는 표현이고

 

이미 광주민주화운동이 끝난지

40년이 되는 오늘날 철없이 광주를 비하하거나

지나치게 성역화하는 모습도 있지만

실상은 더 참혹하고 잔인한 대학살 사건이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남긴 영향은 엄청났고

결국 모진 수십년간의 군부독재정권을 끝낸 계기가 되고

군사독재 , 독재에 신음하는 아시아 , 개발도상국여러 국가들의 모범이 된

선진적 민주화 시위였기에

오늘날까지 세계사적으로도 큰 의의가 있는 것이고

학살의 원죄를 가진 전두환은 오늘날까지

살인마 , 학살자로 비판받고 있습니다

 

전두환은 그전까진 야심있고 능력있는

준비된 군인이었지만

준비된 대통령은 아니었고

본인 스스로도 대통령이 될거란 생각을 하지 못한 상황에서

박정희 사후 급하게 폭력적으로 정권을 잡아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학살을 하며 국민들을 억압하게 된 것이었고

이에 잠시동안 국민들은 움츠려들었지만

곧 다시금 일어나며 군사정권을 무너트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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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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