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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의 유년시절>

[김영삼과 바다]

[할아버지]

[한국학생 VS 일본학생]

[해방]

[모범학생]

[서울대 철학도]

[손명순]

[6.25 전쟁]

<라봉봉>

 

[김영삼과 바다]

김영삼은 1927년 12월 20일 경상남도 거제시의 대계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김영삼의 고향은 항구라하기도 작은 조그만한 갯가마을이었고

바닷소리와 뱃소리가 있는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난 김영삼은

평생동안 바다에 매여있는 한 인간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3살때 김영삼은

혼자 바닷가에서 놀다가 집에서 잡아다 소금에 절여놓은 멸치를

정신없이 먹었는데

짜디 짠 멸치를 배터지게 먹다가 갈증이 나고 배에서 야단이 나서

급하게 논에 엎드려 물을 실컷 마시고 올챙이 배가 되어 돌아왔고

이날 어머니에게 심한 꾸중을 들었습니다

 

평생 명절선물로 멸치만 고집했던 김영삼 , TV조선

 

이때가 김영삼의 생애 최초의 기억이었고

바다와 관련한 최초의 기억이기도 합니다

 

어린 소년 김영삼에게 바다는 최고의 선생님이었습니다

 

<김영삼>실제로 바다는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폭풍 ,

평화 ,

넓이 ,

깊이 ,

색깔 ,

모든 것들이

우리들에게 하나의 교사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의 체내에 바다의 냄새가 ,

바다의 보이지 않는 가르침이 배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바다 소리만 나오면 ,

거기가 고향이거니 하고 생각하는 습성이 배어버린 것도 사실이다.

나에게 있어 바다는 고향인 것이다.

 

김영삼과 바다

 

또한 김영삼의 아버지는 어장을 경영했기에

김영삼에게 바다는 선생님임과 동시에

생존의 터전이었고

 

김영삼은 어린시절이나 나이가 들어서까지도

바다는 ,

자신만의 안식처였습니다

 

<김영삼>그리고 나는 바다 없이는 살아올 없었던 ,

그리하여 지금도 바다에 매여 있는 인간인 것이다.

 

[할아버지]

당시 거제도에서 멸치어장을 경영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는데

낙후된 시골에서 살지언정 생각만큼은 낙후되서는 안된다 생각했던

김영삼의 할아버지는 거제에서 처음으로 멸치어장을 개척하였고

사업은 성공하게 됩니다

 

김영삼 생가 , 영남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던 김영삼 집안

 

김영삼의 할아버지는 자녀들 교육에도 각별한 관심을 가졌고

할아버지에 의해 김영삼은 5살때 서당을 ,

7살때는 학교에 들어갔고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한학을 공부한 김영삼은

서당에서 한문구절들을 읽고 외웠고

 

어린시절 배웠던

덕불고필유린 같은 글귀를 이후에도 서예로 쓰며

참뜻을 깨닫게 됩니다

 

<덕불고필유린 德不孤必有隣>

덕이 있으면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

 

김영삼 대통령의 서예 , 역사바로세우기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당시 시골에서 깨어있는 어른 , 개화인이었기 때문에

김영삼에게 구식 서당교육만 시키지 않으려 하였고

곧바로 7살의 김영삼을 소학교(초등학교의 옛말) 에 입학시켰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시대적 풍습이 많이 남아있었기에

김영삼이 다니던 소학교는 대부분 10살이 훨씬 넘어서 입학하였고

소학교 4학년때 결혼한 학생도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하여튼 ,

김영삼의 집에서 학교까지는 20여리까지 되었기에

김영삼은 소학교시절부터 하숙을 하였고

김영삼은 불리한 여건속에서도 할아버지의 열성으로 공부를 했고

결국 할아버지의 결단에서 김영삼은

거제도에서 최초로 대학엘 입학하게 됩니다

 

당시 김영삼은 기독교인이었던 할아버지나

집안 내력을 닮아 깨어있는 인물이자

기독교인이 되었고

 

거제사람들인 뱃사람 , 어민들은 미신을 자주 믿었기에

어촌에서는 고기잡이 전 안전을 비는 굿판이 온 동네가 떠들썩하게 벌어졌고

풍성히 만든 잔치음식도 절반 가량을 바다에 던져넣었는데

이런 것을 생생히 본 김영삼은 뭇내 안타까워했습니다

 

거제도 별신굿

 

그러나 거제도 출신의 인물이었던 김영삼에 대해

거제도민 , 고향사람들은 김영삼을 열렬히 지원해주었고

오랫동안 개발되지 않았던 거제도민들은

김영삼을 영삼이 하고 따뜻히 맞아주었고

김영삼은 평생 거제도민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김영삼>거제는 내 뿌리요 ,

내 흐르는 피의 오랜 고향인 셈이다.

일년이면 한두번 고향을 찾는데 ,

고향에 가면 나는 언제나 성묘를 잊지 않는다.

가까이는 할아버지 내외분 , 어머니 그리고 백부님 , 백모님의 묘소가 계신 곳이다.

내가 죽어 묻힐 곳도 바로 거제가 아닌가 한다.

결국 나는 거제에서 와서 거제로 가는 몸이 것이다.

 

오늘날 거제시

 

[한국학생 VS 일본학생]

하여튼 ,

김영삼이 태어나던 시기는

일제강점기로서

일제가 식민지를 수탈하고 전쟁을 부르짖으며 막바지로 달려가던 시기였고

김영삼은 중학교에 다닐 무렵부터

우리 민족의 운명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김영삼은 아주 우연히도

일본인 교장선생의 이사를 돕다가

한국인들은 구경도 하기 힘들던 귀한 설탕이

포대째 있는 것을 발견했고

 

갑자기 심술이 난 김영삼은

심사가 뒤틀려서 운반도중에

설탕포대를 입으로 물어뜯어 길가에 흘려버렸고

(ㅆㅂㅋㅋ)

 

 

일본인 교장선생은 분노했는데

결국 김영삼의 고의적 심술임이 탄로나

김영삼은 무기정학처분을 당해

학업은 중단되게 됩니다

 

할아버지는 뜻밖에도 김영삼에게 관대하게 대해주었고

이후엔 대충 어른들이 문제를 해결해줬기에

김영삼은 다시 학업을 할 수 있었지만

그때부터 김영삼은 조국과 일본의 관계를 깊게 성찰하게 됩니다

 

김영삼이 다니던 통영중학교는

일본인 학생이 한국인 학생보다 3배 많았고

일본학생들과 일본선생들은 합세해서 항상 문화적 문제로

한국학생들을 멸시하는 비열한 모습을 보였고

 

경남 통영중학교 시절 김영삼

 

쪽국 학생들은

한민족의 전통과 혼이 담김 된장 , 김치냄새를 못맡겠다며

트집을 잡거나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기 등

온갖 나쁜짓을 저질렀고

 

결국 심술+정의왕이었던 김영삼 학생은

한국여학생을 희롱하는 등의 이런 못된 일본남학생들의

못된 버릇을 고처주기 위해

일본인 몇놈을 하교길에 붙잡아 뭇매를 가해 주었고

 

 

결과는 김영삼에게 불리했음에도

김영삼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에 의한 투옥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당시 분위기처럼

일본선생들의 체벌을 비겁하게 피하려 들지 않았고

언제나 주범으로서 처벌받기를 원했습니다

 

<김영삼의 회고>단순한 어린 학생들의 주먹다짐이 아니었다.

어른들끼리의 잔인한 전쟁이 바다에서 밀림에서 한창일

우리들도 논바닥에서 뒷동산에서 작은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것때문에 이후에 보수계대통령 되고서도

변함없이 반일감정은 ㅆㅅㅌㅊ였음)

 

쪽본학생들 패고다니던 시절의 빵삼이형

 

그러다 패전 기색이 짙어진 일본은

1945년 7월에 방학도 없이 학생들을 끌고나와

비행장 방공호 파는 작업에 동원시켰고

계속 일본 선생과 학생에게 괴롭힘 당하던 김영삼은

그곳에서 일본인 급장(반장의 옛말) 을 흠씬 두들겨 패주었고

김영삼은 또다시 정학처분을 받고 집에 돌아와

사실을 알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게 됩니다

 

[해방]

일제강점기 36년동안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에게

학살 이외에도 생활속에서 극심한 학대를 당했고

 

일제의 악랄한 폭압과 사슬에서 벗어났다는 기쁨에

한국은 온 동네마다 축제가 벌어졌고

김영삼 역시 유소년기를 일제강점기때 지냈지만

나름 부잣집 도련님이었음에도

어린 마음에도 소년 김영삼도 뭔가 잘못되가는 느낌을 받을만큼

일제강점기는

일본인들의 한국인들에 대한 학대가 극심했던 시기였습니다

 

하여튼 ,

또다시 정학처분받고 돌아온 사실을 알게된 김영삼 가족들은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학생들의 사정이 어떤줄 잘 알았기에

김영삼을 꾸중하거나 책하지 않았고

김영삼을 염려했을 뿐입니다

 

하여튼 ,

해방이 되자 기세등등했던 일본은 하루아침에 패전죄인이 되어

한반도에서 허겁지겁 쫓겨갔고

상황이 정반대가 되자 

김영삼은 기분이 정말 나는거 같았습니다

 

광복당시 기뻐하는 한국인들

 

식민지 한국에서 의기양양했다가

패전후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본인 학생들은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축처진 어깨로 있었고

특히 일본인 여학생들이 훌쩍거릴때 김영삼은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패전후 집으로 돌아가는 한국내 일본인들

 

<김영삼>이제 너희들도 알게 될 것이다

나라를 빼앗긴 민족이 심정이 어떠한지를 ,

그리고 너희들이 저지른 죄를 용서받으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가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

 

 

당시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에게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을 강요받았기에

본국으로 쫓겨가던 일본인들에게 우리가 당했던 만큼의 아픔을 안겨주려는

한국인들도 있었지만

김영삼은 쫓겨가는 일본인들의 뒷모습을 보며

일본인들에 의해 황폐해진 이땅을 다시 부흥시키고

다시는 주권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힘을 쌓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게

더 중요하다 생각했습니다

 

<김영삼>해방의 이날을 위해 피흘리고 쓰러져간

모든 지사 , 열사들의 위업을 받들어 살아서

해방을 맞은 우리들이 해야 일이 너무도 많다는 자각이 나를 흥분시켰었다.

 

[모범학생]

해방을 맞은 김영삼은 보다 넓은 곳에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고

당시 부산은 일본인 학생들이 모두 일본으로 돌아갔기에

학생들이 부족했고

경남 곳곳에서 수재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기에

김영삼도 이때 경남중학 3학년에 편입하게 됩니다

(당시 중학교는 6년제임)

 

해방후 억압이 풀린 새로운 분위기에 적응한 김영삼은

행복한 학창시절을 보내게 되었고

더이상 동급생끼리 싸울 필요도 없었고

교사에게 반항할 이유도 더욱 없었기에

김영삼은 문제학생에서 하루아침에

모범학생으로 지내게 됩니다

 

경남중 시절 김영삼

 

나름 김영삼은 운동에 더 관심을 갖기 시작해

공부벌레로 남진 않고 운동과 학업을 모두 병행했고

이로인해 성적은 중상위권이었지만

국어와 역사를 특히 좋아해 책도 많이 읽었고

축구도 좋아해 많은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즐깁니다

 

[서울대 철학도]

김영삼은 1948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하였고

그해는 5월 10일에는 제헌국회의원 선거 및 제헌국회 개헌 ,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선포된 해였습니다

 

청년 철학도 김영삼은 이런 역사적 사건을 직접 바라보며

흥분하게 되었고

김영삼은 이전부터 이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훌륭한 정치인이 되려는 포부가 있었고

김영삼 외에도 당시에 각 대학 정치학과에는

패기와 야심넘치는 청년학도가 가득차 있었습니다

 

청년시절 김영삼

 

<김영삼이 학생시절 하숙집에 붙여놓은 글>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

 

 

김영삼은 중학시절부터 정치인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치학과에 진학해야만 정치인이 될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오히려 정치학도입네 정치가처럼 하는 허세때문에

정치에 대한 신선한 매력을 감소시킨다는 우려때문에

철학과를 지망했고

대학에서도 철학 전공 , 정치학 부전공을 하며

정치학과 철학을

6:4로 배분해서 공부하는 것을 고집스럽게 지켜나갑니다

 

[손명순]

김영삼은 서울대학교를 다니던 중 

평생의 반려자 손명순과 결혼을 하였고

당시 손명순은 이화여대를 다니고 있었는데

이화여대는 금혼 규정이 있었지만

주변 친구들이 손명순을 감싸주는 바람에

첫 아이를 출산하고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김영삼-손명순 대통령 부부

 

1951년 9월 29일 김영삼의 서울대 문리대 졸업사진 , 손명순 여사와 함께

 

손명순은 김영삼의 연인이자 모진 고난을 함께 이겨낸

고마운 동지이기도 했고

손명순 여사는 김영삼의 번잡한 정치생활중 한번도 불평 없이

조용히 내조와 격려를 보내주고 다섯 아이들의 방파제가 되어줍니다

 

또한 ,

대한민국 정치인과 기자들은

모두 상도동의 손명순 여사가 끓여준

시래기 국(시래깃국 or 시락국 , 멸치육수를 내고 무청말린 된장국)

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손명순 여사는

시래기국 마니아였고

김영삼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시래기국 수천그릇을 끓여 대접합니다

 

시래기국

 

[6.25 전쟁]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 6.25 전쟁이 터졌고

김영삼에겐 8.15 광복보다 6.25 전쟁이 더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개전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됬기에

김영삼은 당시 어떤 생각을 하기도 전에 이미 북한 인민군 치하에 갇히게 되었고

 

인민군 치하당시 서울 , 스탈린과 김일성 우상화 집회가 열린 서울의 모습

 

한국전쟁 당시 인민재판

 

총칼을 앞세우며 무고한 사람들이 죽여지는 일이

서슴없이 자행된 것을 본 김영삼은

숨어지내며 어떻게든 살아남아야한다는 각오를 단단히 했고

서울을 빠져나가기 위한 방법을 찾다

친구를 만나 서울을 탈출해 친구 고향집에서 숨어서

신분을 감추고 농부로 변신하며

기약없이 때를 기다리며 쥐죽은듯이 숨어지내게 됬고

 

젊은마음의 김영삼은 이때에도

마을에서 마을 청장년들에

나를 믿고 따르겠냐 다짐케한 다음

청장년들을 마을에서 보초를 서게 하고

외지인들이 마을에 오면 무조건 체포토록 지시합니다

 

이때 김영삼은 무기를 구하려

내무서를 습격해 따발총과 장총을 빼앗기도 했는데

오히려 무기를 습득하고난 뒤 김영삼의 불안은 더욱 커져갔고

결국 숨겨준 마을에 화를 입을까 두려워

김영삼은 마을에서 짐을 챙겨 길을 떠나 다시 서울로 갔고

서울에서 며칠 숨어지내다

국군의 9.28 서울수복을 맞이하게 됩니다

 

9.28 서울수복

 

그러나 다시 중공군의 대공세로

서울이 재점령 당했고

1.4 후퇴때는 김영삼은 이전 악몽때문에

이번엔 일찍 서둘러 남하했고

1951년 2월 학도의용군에 입대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학도병들 ,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

 

김영삼은 국방부 정훈국 대북방송 담당원으로 배치됬고

계급없는 군인이지만 8개월간 대북방송을 하다가

국회 부의장이었던 장택상의 부름을 받아 그의 비서관이 되었고

김영삼은 장택상의 비서관으로 근무하며 학업을 계속해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게 됩니다

 

막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났는데

곧바로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김영삼은 6.25 전쟁 당시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이런 숨막히는 역정을 걷던 상황에서

김영삼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나름대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몸을 바치겠다는 용기와 신념을 가지고

정치에 입문하게 됩니다

 

<김영삼>6.25 겪은 사람들에게는

모두 불행했던 세월의 상처가 각인돼 있을 것이다.

역시 마찬가지로 생사의 기로에서 좌절하지 않았고 ,

인내를 시험하는 무대에서는 끝까지 참아냈고 ,

용기가 필요한 상황에서는 비겁하게 물러나지 않았으며 ,

나의 청년기를 지배했던 정치에의 염원도 실현했으나

6.25 운명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또한 민족분단이 낳은 비극적 산물로서

생애에 있어 매우 소중한 교훈을 안겨주기도 했다.

 

<라봉봉>IMF의 주범으로 유명한 김영삼 대통령이지만

그 전까지는 김대중과 더불어 한국 민주화 운동의 거목이기도 했고

여러 파란만장한 20세기 대한민국 근현대 정치사를 상징하는 대표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김영삼은 멸치부잣집 외동아들로 태어나

개구장이와 고집센 도련님 모습이 있고

나쁜짓 하던 일본놈들을 흠씻 두드려 패주었다는 어린시절 회고를 보면

밉상인 놈들이 맞을때는 뭔가

폭력적이라기 보다는 통쾌하기도 해서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도련님' 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김영삼은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의 한국판 도련님 대통령이었다 할 수 있고

풍족하게만 살아온 정의의 도련님으로 성장한 김영삼은 정치에 입문하며

독재와 투쟁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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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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