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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정치인 김영삼>

[장택상]

[최연소 국회의원]

[김영삼 VS 이승만]

[사사오입 개헌]

[자유당 탈당]

<라봉봉>

 

[장택상]

서울대 철학도 청년 김영삼은

6.25 동란을 겪으며 역사의 소용돌이에 빨려들어갔고

생사의 기로속에서

나이는 어리지만 나름대로 정치에 투신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몸을 바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김영삼은 전쟁전인 1949년 명동에서 열린

정부수립 기념 웅변대회에 참가해

2등상으로 외무부 장관상을 탔는데

 

당시 외무부장관은 장택상이었고

이때 장택상과 인연을 맺은 김영삼은

이후엔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때

김영삼은 서울대 동료들과 장택상 선거운동을 도왔고

장택상이 2대 국회의원이 된 후 곧

6.25 전쟁이 터지고 김영삼은 생사의 기로를 넘게 됩니다

 

죽을 고비를 넘긴 김영삼은 

이후 학도의용군에 입대했고

국방부 정훈국 대북방송 담당원에서 8개월 대북방송을 하다가

당시 국회 부의장을 맡고 있던 장택상의 부름을 받아 

비서관이 되었고

장택상 비서관으로 일하며 학업을 계속해 서울대를 졸업하게 된 것입니다

 

장택상과 김영삼

 

장택상은 윤보선 대통령과 같이

영국 명문대인 에든버러 대학교 동문이고

 

윤보선과 비슷한 점이 많은 인물인데

가족은 친일파인데 본인은 집안 재력을 이용해

독립운동을 한 케이스의 인물이었습니다

 

장택상은 6.25 전쟁때는 이승만이 수도 서울을 사수한다 해놓고

피난간 것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지만

이승만이

 

<이승만>내가 당덕종(전란 진압후 백성에게 사과한 당나라 황제) 이냐 ?

사과하게 !

 

하고 분노했다는 이야기는 나름 유명하고

장택상은 독립운동가이자 노덕술같은 친일파 중용 ,

이승만에게 충성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한

잘말하면 중도., 그냥 애매한 인물이었고

과연 한국 정치 애매함의 끝판왕이었던

김영삼을 키운 인물다운 인물이었습니다

 

대한민국 3대 국무총리 장택상

 

김영삼은 자신을 정계에 입문시켜준

장택상을 엘리트이자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로서 존경했고

 

정치인 장택상이나

윤보선 , 김영삼 두 대통령은

나름 태생적으로 부잣집 아들이라

질서유지+보수적 성향이 기본적으로 탑재되있었기에

집안에서 홀로 튀어나갔음에도 귀족적 성향이 존재했고

이로인해 잘말하면 중도나 온건파지만

뚜렷한 정치적 색채를 띄지 못하고

무색무취한 모습을 보여 지탄을 받기도 한 인물입니다

 

하여튼 공통점이 많았던 장택상과 김영삼이었기에

김영삼은 장택상을 잘 따르게 되었고

김영삼은 장택상의 정치현장을 곁에서 지켜보며

나름대로의 정치역량을 다듬게 됩니다

 

[최연소 국회의원]

1951년부터 1953년동안 장택상 보좌관일을 하던 김영삼은

25세가 안됬기에 나이가 어려서 법적으로 국회의원 출마 제한이 있었고

1954년 25세가 되자 피선거권(선거에 뽑힐 권리 , 출마권리) 가 주어졌고

김영삼은 그해 5월 20일 실시된 3대 국회의원 총선에 출마할것을 결심합니다

 

김영삼은 비록 나이가 어리고 미숙했지만

나름대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몸을 바치겠다는 신념과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고향인 거제군을 선거구로 택해서 출마했고

 

김영삼 아버지는 25살 아들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겠다하자

아무리 넉넉한 집안이었음에도

 

'아직 어린 것이 무슨 입후보란 말이냐'

 

하고 거절했고

아버지의 고집에도 주변 사람들과 어머님의 응원에

결국 아버지 역시 김영삼의 후원자가 되었고

이미 멸치사업으로 영남에서 손꼽히는 부자이자

거제도에서 유력집안이었던 김영삼네 집이었기에

지방 유지들까지 김영삼에게 붙었고

 

당시 한창 3선을 하려 발악하던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정당인 자유당은

이승만 3선을 트기 위해 개헌선인 원내 3분의 2를 확보하려하고 있었기에

지방까지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자유당 이기붕은 김영삼에게 자유당에 들어오라 했는데

김영삼은 선뜻 들어가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일단 조직의 중요성을 알던 김영삼은

무소속 정치인으로서는 아무것도 하기 힘들다고 생각했고

지방 유지들의  강력한 권유에 자유당에 입당 ,

선거운동을 시작했고

 

1954년 3대 총선 선거유세 시절 김영삼

 

당시 부패했던 한국 정치를

상징하는 막걸리 , 고무신 선거라는 말이 있었는데

당시는 민도와 경제 , 교육수준이 지금보다 훨씬 낮았기에

선거철에 서민애용품인 막걸리와 고무신을 뿌리며

마치 반장선거에 피자나 햄버거를 쏜다는 식으로

국가 선거가 이루어지던 시대였고

 

선거를 앞두고 표심을 얻기위해 제공되는 막걸리를 마시는 시민들

 

고무신과 금품

 

다른 정치인들과 달리 김영삼에겐

 

'왜 고무신을 한 켤래도 구경할 수 없냐'

 

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지만

김영삼은 큰 길을 가는 사람의 심정으로

의연히 대처하며 유혹을 뿌리치려 했습니다

 

 

선거 결과 결국 김영삼은

사상 최연소로 만25세의 나이에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현재까지도 이 기록은 깨지지 않았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말도 안되는 기록인데

역사에서

왕조시대나 현대시대나 원래 건국초는 이런게 가능하고

 

대한민국 건국초는 전쟁으로 모든게 리셋되기도 하고

막 나라가 시작해

자리도 많고 대부분 고위직들이 젊었던 시대라

한국 군사 , 정치 , 경제계 1세대들은 

이런 신화같은 이야기가 가능하던 시기였고

 

20대에 별을 단 국군 장군 ,

36세 육군참모총장 ,

만주군 수석출신 36세 장군 박정희 ,

말도 안되는 성적으로 꼴찌로 육사 1기에 합격한 전두환 등

2021년 기준으로는 말도 안되는 청년 고위직들이 가능하던 시기였고

 

물론 역사에서는 서양도

세습이나 가문빨로 20대 정치인들 등장사례들이 있었지만

김영삼 역시 아무리 부잣집 아들이었음에도

지금이라면 이렇게 서울대 철학과 대학졸업장 한개만 있는 20살 청년에게

표를 주기는 어렵기에

이런 건국초기 시대적 사회상에 맞는

최연소 , 청년 정치인이 탄생하게 됩니다

 

김영삼은 나름 자신이 영국 원스턴 처칠 수상과 같은 나이에

국회의원이 됬다는 사실로 인해

꿈에 부풀어 흥분하게 되었고

이어서 김영삼은 이기붕의 안내로

경무대(청와대의 옛 명칭) 를 방문해

자유당 초선의원들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하게 됩니다

 

[김영삼 VS 이승만]

김영삼은 이승만을 자유당 대표이자 조직 보스로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회의원 신분으로서 국정 최고 책임자 대통령을 만나려 했고

 

사실 아무리 국회의원(입법부) , 대통령(행정부)이

삼권분립에 의해 분리된 독자권력임에도

같은 여당끼리이 잘 지내는 것은 매너이고 너무 선을 긋는 것도 비매너긴 한데

 

당시 청년 국회의원 김영삼 의원이 이승만 대통령을 당대표적 총수가 아닌

의원 대 대통령으로 만날려 했던 이유는

 

당시 김영삼도 조국광복에 평생 몸바치며

당시 건국의 아버지로 여겨지던 이승만 대통령을

다른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존경하기는 했지만

 

당시는 이승만 대통령이 3선개헌 공작을 위해 ㅈㄹ을 하던 시기였고

어린시절부터 심술보와 정의가 넘쳤던 김영삼은

그런 이승만의 개헌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당시 이승만과 자유당은 민주주의를 한다면서

헌법을 마구 뜯어고치며 특정인물의 집권연장을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로인해 김영삼은 원래부터 당시 자유당 입당도 꺼림직했고

당의 힘이 필요한 정치현실과 형편상 타협해 자유당에 입당한 인물이었고

 

생각에 잠긴 김영삼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게 되자 불쑥

이 대통령에게

 

<김영삼>박사님 , 3선 개헌을 해서는 안됩니다

대통령은 이번만으로 끝내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민족의 영원한 대통령으로 남으셔야 합니다

 

하고 첫대면에서부터 솔직하게 국민의 뜻을 있는 그대로

당돌하게 건의합니다

 

화기애애한 초선의원 축하장에서

새파랗게 어린 초선의원이 불쑥 그런 말을 하자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고

이승만은 안색이 변하며 특유의 안면경련 + 좆같은 표정을 짓게 되었고

 

이승만 스트레스 받으면 나오는 표정

 

김영삼 의원의 돌직구에 갑자기 안색이 싹 변한 이승만 대통령은

얼굴 근육을 씰룩씰룩거리며 경련을 일으킵니다

 

김의원의 패기

 

이후 이승만은 눈을 아래로 지그시 깐채

아무 대꾸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김영삼과 의원 일행을 뒤로하고

응접실 뒷문으로 나가버렸고

 

의원들은 안색이 백짓장처럼 변해있었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기붕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김영삼 의원에게

 

<이기붕>김의원 ,

돌았어 ?

왜 그런 말씀을 함부로 드려 !

 

하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승만 최측근 이기붕

 

그날 경무대를 나올때 일행 모두가

김영삼에게 못마땅한 표정을 풍겼고

김영삼 역시 존경했던 인물이 막상 처음 보자마자 쫌생이같이 나오자

자기는 자신대로 크게 불쾌해하며

 

<김영삼>도대체 나를 뭐로 취급하는 거야 !

 

하고 혼잣말을 했습니다

 

당시 김영삼의 생각으론

아무리 이승만 대통령이

국가의 원수이자 연세와 경륜이 많은 독립투사로서

국민의 칭송을 받는 어르신이라 할 지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대통령 당신의 입장일 뿐이고

나는 비로 나이어린 정치 초년생이라 하더라도

국민이 뽑아 보낸 국회의원인데

적어도 민주국가에서 입법부 대표 국회의원이 행정부 수반 대통령에게 국민의 뜻을 밝혔으면

가능하던 불가능하던 경청이라도 하는 것이 예의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권위에 대한 간섭이란 선입견으로 화를 내고 돌아서 나가버린

이승만의 태도에서 크게 무시당한 기분을 느끼게 되었고

 

삼권분립 , 실제로 국회의원(입법부)은 대통령(행정부)의 부하가 아니라 동등한 권력임

 

원래 이승만도 영어도 ㅈㄴ게 잘하고

한국 독립에 큰 기여한 외교독립투사로서

대한민국 대통령 초기엔 한국민중과 엘리트들의 큰 존경을 받았지만

 

(ㄹㅇ 초기엔 깔게 별로 없었음)

 

이놈도 조선 선조 임금마냥

권력욕도 매우 강하고 쫌생이 , 찌질이 기질도 강했기에

지 권력앞에선 불통 기질이 강해서 말년이 평탄치 않았고

청년의원 김영삼의 당돌한 질문에도 대답도 않고 기분나쁘다고

떠나버린 찌질한 모습을 보였고

이는 김영삼 뿐만 아니라 그를 주변에서 모시던 정상적인 측근 ,

엘리트들에게도 다 한번씩 이런 모습을 보였기에

김영삼 뿐만 아닌 윤보선 같은 측근들 역시 이승만의 이런 모습을 보고

매우 실망해 점차 그를 떠나게 됬고

이승만 대통령도 주변의 유능한 인물들은 정권 말년엔

점차 다 도망가고

말년의 주변엔 아부하는 부패하고 무능한 측근 , 소인배들만 남게 됩니다

 

김영삼 역시 민족의 영웅같은 인물을 만난줄 알았더니

이승만도 괜히 젊은 의원에게 무안주고 말씹고 나갔기에

괜한 쫌생이 새끼가 대통령인 것에

기분이 매우 잡치게 됬고

 

하여튼 , 이런시기는

점차 자유당과 야당은 크게 분화해 정당대결이 시작되던 시기였고

야당은 자유당을 정책으로 도전하지 않고

자유당의 악정을 토로하기만 했고

 

자유당 역시 정책제시가 아닌

이승만 업적을 과시하기만 하는

내용이 없는 여야간 권력투쟁이 점철되게 됩니다

 

[사사오입 개헌]

당시 자유당은 이승만의 3선개헌을 위해 공작을 집요하게 진행시키고 있었고

그럼에도 김영삼 의원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냉소짓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자유당 지도부의 개헌공작에 맞서

개헌 반대에 나선 의원들도 점차 일어나기 시작했고

김영삼은 신익희 , 조병옥 , 장택상 등의 거물급 인사들과 같이

접촉하며 뜻을 같이하는 개헌반대 자유당 의원들을 포섭해 맞서기 시작했고

 

3대 국회 시절의 김영삼(오른쪽에서 두번째) 와 조병옥(가운데)

 

당시 김영삼 의원은 이미 

이승만 대통령의 비민주적 독선과 장기집권으로 인한 부정부패의 척결 없이는

정권은 물론 국가 장래가 없다 확신했기에

평화적 정권교체만이 문제 난국해결과 민주정치 구현의 지름길이라는 신념을

유감없이 표현했고

내 일신상의 안위보다는 나라의 장래를 우선해야한다는 일념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연장을 막는 개헌반대 운동에 앞장서게 됩니다

 

결국 이 3선개헌안을 두고 국회에서는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됬고

당시 자유당 의석수가 총203석 중 137석으로 어마어마했음에도

이승만의 장기집권으로 가는 3선개헌은

자유당 내부에서도 말이 많은 개헌이었기에

 

자유당내에서도 김영삼을 비롯해 12명이 반대표를 던졌고

야인시대 주인공 김두한 의원도 김영삼과 같이

이승만 3선개헌에 반대한 의원이었습니다

 

1954년 국회의원 야구친선경기의 김두한(맨 오른쪽) 과 김영삼(오른쪽에서 두번째) 의원 , 사나이 가슴이 웅장해진다

 

그럼에도 야당을 빙자해온 무소속에서

10명이 찬성표에 가담해었고 

 

결국 총투표 202표 중 찬성 135표 , 반대 60표 , 

기권 7표로가 되었는데 딱 1표가 부족해서 이승만의 3선개헌은 저지됩니다

 

'총 투표소 202표 중 가 135표 , 부 60표 , 기권 7표로

한 표가 부족해서 이 개헌안은 부결되었다'

 

엄숙한 선포에

야당의석에서는 일제히 함성이 터졌고

하여튼 당시 김영삼은 자유당임에도

위협과 유혹에도 이승만 독재에 맞서

역사의 오류를 돌이켰다는 자부심과

정치인생 첫 수확이라는 점에서 큰 감회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

이승만도 보통 ㅂㅅ가 아니었기에

이승만은 국회의 반대를 순순히 인정하지 않았고

그날 밤 경무대에서는 번복 지령이 하달됨과 동시에

정부에서는 느닷없이 135표로 개헌안이 가결된 것으로 인정된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찬성 135표를 사사오입(반올림의 옛 표현) 하면

수학에서 반올림은 4는 0이지만 5부터는 10으로 세기에 

대충 135표에 1표차이니 대충 인정하자는 억지논리를 내세웠고

 

303명의 3분의 2는 135.333이므로 135표를 얻은 개헌안은

가결이라는 기상천외의 수학공식을 가져나옵니다

 

 

이승만이 말도안되는 억지까지 부리며

개헌을 통과시키자

사람들은 3선개헌을 '사사오입 개헌' 이라 부르며 조롱했고

오늘날 역사에

3선개헌은 '사사오입 개헌' 이라 남게 됩니다

 

사사오입 개헌에 항의하는 민주당 이철승 의원

 

[자유당 탈당]

법치를 무시하는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에 대한 배신감이 커진 김영삼 의원은

더이상 자유당과 노선을 할 수 없다는 중대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이때부터 김영삼은 개헌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는 야당과 적극적으로 합세 ,

자유당에서 탈당하기로 결심하고

반독재투쟁에 앞장설 것을 천명합니다

 

<김영삼>1인 독재의 뿌리를 내리려는 사사오입 개헌은 불법무효 ,

호헌(법 수호)을 위해 생명을 걸고 기꺼이 반독재투쟁 대열에 앞장서 나가겠다

 

김영삼의 자유당 탈당은 이승만 정부의 부도덕성을 주의하던 국민들에게

환호를 주었고

김영삼을 비롯한 12명의 탈당은 꺼져가던 민주주의의 희망의 불씨가 되고

집권독재여당 자유당에게는 치명적 타격을 입히게 됩니다

 

<김영삼>우리는 이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반대해 뛰쳐나왔으니

반대당에 참여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렇듯 한국의 야당은 여당이 위헌을 하면서까지

시도하는 장기집권에 반대해서 출발했다.

출발이 그랬기 때문인지 여야 관계는 내내 같은 길을 걸었다.

여당은 장기 집권을 위해

헌법도 고치고 ,

자유도 제한하고 ,

인권도 유린하는 권력 정치를 했고 ,

야당은 반민주적인 권력 정치에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야당의 길은 갈수록 가시밭 길이었고 ,

야당에 몸담은 나는 투사가 되어 갔다.

이런 길은 의원 생활 반년의 경험밖에 갖지 못했던 25 초선 의원 때의 선택이다.

그리고 선택은 이후 올바른 선택을 열어 잘한 선택이었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렇게 이 시기부터 청년 정치인 김영삼은 부패한 일반적인 관제 정치인의 길이 아닌

독재여당에 맞서는 야당 정치인이 되는 길을 택하게 되었고

불의에 항거해 독재에 맞서는 민주 투사의 길을 가기 시작합니다

 

<라봉봉>김영삼은 부잣집 외동아들임에도

어린시절부터 뭔가 근본이 정의의 심술보 성향이 강한 개구장이였기에

나쁜 일본 어린이들과 쌈박질에 열심이었고

나이먹고 정계에 입문해서도 이와 같은 행동은 반복됩니다

 

보통 부잣집 아들들은 윤보선 대통령처럼 점잖게 조용히 있는 이미지인데

김영삼은 성격이 워낙 특이한 인물이기도 했고

매우 부유한데 투사형캐릭에 민중운동하는 조합이 특이한 케이스라

정계에서도 초기엔 굳이 더러운 뒷돈같은거 받거나 하며 휘둘리지 않고 할말 다하는 케이스였고

패기넘치는 청년정치인의 모습을 국민들에게 신선하게 보여주었고

 

이승만 정부 시기 김영삼의 비중은 역사에서 적었지만

사사오입 개헌 당시 김영삼 단 한명이 찬성하기만 했어도

사사오입은 문제없는 합헌으로 끝나고 4.19 혁명의 불길이 솟아오르지 않았을 수도 있기에

역사는 작은 개인 한명한명이 큰 물줄기를 바꿀 수도 있는 참 특이한 것입니다

 

청년들은 경험도 적고 미숙하지만 막 어린시절이 끝나

순수함도 남아있고 중년이나 노인들보다 아직 덜 썩어있을 확률이 높고

크나 큰 포부를 지니는 시기이기 때문에

특유의 패기가 있는 시기로서

때로는 경륜있는 노인들보다 지혜롭고 뛰어난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김영삼 역시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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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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