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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의 격랑>

[호헌동지회]

[민주당 창당]

[보수계와 민주계]

[최초의 시련]

[4.19 혁명]

[민주당의 분열]

[5.16 군사정변]

[정치활동정화법]

[민주투사의 ]

<라봉봉>

 

[호헌동지회]

(이전 김영삼 이야기와 이어짐)

그렇게 이승만은 3선개헌 당시

야당과 여당 자유당내 독재 반대파들의 반대로

1표차이로 모자라 실패했는데

사사오입 , 반올림을 적용하며 억지로 3선개헌을 통과시켰고

개헌 정족수를 1석 낮춰 개헌안은 가결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이로인해 개헌 반대파는 이를 위헌으로 규정하고

위헌사태를 반대하는 모든 정치인들은 헌법 수호를 내걸고 모여

 

'호헌 동지회'

 

를 결성합니다

호헌동지회 사람들은 야당 , 정당을 만들기로 하며

민국당과 장면이 이끄는 원내 자유당파가 모여들었고

 

(대충 민주당 결성전 집단들)

 

3대 국회시절 조병옥(가운데) 과 김영삼(오른쪽에서 두번째)

 

예전 이승만 대통령은 민국당을 견제하며

민국당 전신인 한민당이 지주들로 조직됬기에

지주들을 대표하는 당이라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국민들에겐 이쪽 계열엔 표를 주지마라했고

 

야당은 당세가 약했는데

3대 국회당시는 정원 202석중

민국당 15석 ,

자유당 114석 ,

무소속 66석이었기에

 

야당은 압도적이던 이승만의 자유당을 대항하기 어려웠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무리하게 자유당과 의원들을 끌어모아

사사오입 개헌을 통과시키자

점차 의원들도 이승만의 반민주적 행보에 등을 돌려갔고

 

사사오입 개헌에 항의하는 의원

 

민국당이나 자유당 반발파에서는

거대한 이승만 자유당 지배체제 아래서는

야당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에

 

사사오입 개헌파동 이후

호헌동지회는 세력을 넓히게 되며

자유당에 겨룰만한 야당을 만들려 했고

재야 정파 통합을 위해 노력합니다

 

[민주당 창당]

김영삼 역시 이승만에 반기를 든 자유당내 의원이었기에

야당 합류는 필연이었고

김영삼은 민주정치는 정당정치라는 민주주의 교과서를 신봉하던 사람이었고

당시까지 대한민국은 정당정치 틀이 잡히지 않고

국회 역시 무소속 아니면 이승만 자유당 독점의 정당이었기에

신당운동을 펼치며 세력화된 야당을 조직하려 노력합니다

 

결국 사사오입 개헌의 부당성에 항의하던

김영삼 의원 및 자유당 소장파 의원 12명은 자유당을 집단 탈당해

새로 발족된 민주당에 입당하였고

 

1955년 신익희 , 조병옥 , 장면 , 윤보선이 중심이 되어 창당된 민주당은

민국당과 김영삼 등 원내 자유당(이승만 반대파) 들이 합당하여

원내의석 33석의 작은 야당으로 출발했고

당시 김영삼은 민주당 중앙당 청년부장 겸 경남도당 부위원장을 맡게 됩니다

 

오늘날 더불어 민주당 출신 대통령 문재인과 여당 더불어 민주당 역시

이때 1955년 창당된 민주당을 자신들의 뿌리 정당이라 보고 있습니다

 

민주당(1955년)

 

자유당

 

김영삼은 생각보다 민주당 의원수가 적자

아쉬워했고

또한 자유당처럼 농어민을 기반으로 하는 대중정당이 아닌

초기 민주당이 보수주의 정당으로서

지역 유지연합같은 출발을 했기에 다소 불만이었습니다

 

친일논란이 있었던 민주당 창립인사 장면(왼쪽)과 윤보선(윤보선은 독립운동가지만 집안이 친일집안)

 

[보수계와 민주계]

실제로 오늘날 보수계(자유당 이후부터 오늘날 국민의 힘까지) 정당이 

기득권 , 보수부자정당 이미지가 있지만

시작은 친일 관료 , 농어민들의 지지로 시작된 정당이었고

 

오늘날 민주계(민주당~오늘날 더불어 민주당까지) 정당이

서민 , 농민 이미지가 있지만

시작은 친일 지주 , 이승만 자유당 탈당파 , 도시민들의 지지로 시작된 정당이었기에

 

보수계 정당과 민주계 정당은 시작부터

약점과 한계가 각각 있기도 했고 둘다 정치학적으로는

보수계 정당으로 분류됩니다

 

실제론 모두다 시작이 잘못된 한국정치정당사

 

그렇다고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에서 이미지가 전범급인

진짜 공산주의 , 사회주의 , 진보계쯕에는 분노와 증오가 가득했기에

 

(북한 공산당 , 사회주의자들이 남한을 기습 남침하며

한국전쟁이 시작됨)

 

진보정당을 대한민국에서는 만들기가 매우 어렵기도 하고 대안이 없어

현재 오늘날은 각각 보수계 정당은 보수층을 ,

민주계 정당은 진보층을 대표하는 정당으로 이미지가 굳어지게 됩니다

 

오늘날 더불어민주당(민주계) 과 국민의힘(보수계)

 

하여튼 민주당도 초기엔 자유당 반대파가 만들기도 해서

보수적 색체가 강했고

무엇보다 친일 지주층들이 만들어낸 당이라

귀족적 색채도 풍기며

국민 , 대중적 지지와 공감을 받기 어려운 당이기도 했고

특히 당시는 대한민국은 산업화 전이기에

농민 VS 지주관계가 사회적 이슈로서 큰 예민한 사항이었고

이러한 것들 때문에 김영삼도 본인은 친일지주출신은 아니지만

지역유지 출신으로서 합류한 것이며

 

일단 이승만 자유당 독재를 막아내는 것이 중요했기에

당시 민주당과 국민들은 일단 연합하여 반독재 운동에 힘쓰게 됩니다

 

<김영삼>우리는 이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반대해 뛰쳐나왔으니

반대당에 참여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렇듯 한국의 야당은 여당이 위헌을 하면서까지

시도하는 장기집권에 반대해서 출발했다.

출발이 그랬기 때문인지 여야 관계는 내내 같은 길을 걸었다.

여당은 장기 집권을 위해 헌법도 고치고 ,

자유도 제한하고 ,

인권도 유린하는 권력 정치를 했고 ,

야당은 반민주적인 권력 정치에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야당의 길은 갈수록 가시밭 길이었고 ,

야당에 몸담은 나는 투사가 되어 갔다.

이런 길은 의원 생활 반년의 경험밖에 갖지 못했던

25 초선 의원 때의 선택이다.

그리고 선택은

이후 올바른 선택을 열어 잘한 선택이었다고

나는 믿고 있다.

 

[최초의 시련]

1958년 4대 총선을 앞두고

부산지역의 기반이 약하다는 민주당 중앙당의 요청으로

김영삼 의원은 지역구를 고향 거제에서

자신의 정치적 고향이 되는 부산 서구로 옮겼습니다

 

부산서구에서 유세하는 김영삼 , 김영삼의 정치고향 부산서구

 

그러나 ,

4대 총선에서

이승만과 자유당은 본격적으로 독재에 들어가며

전국 도처에서 등록방해 , 불법선거 등 부정선거를 강행해

선거를 혼탁하게 했고

김영삼 의원 역시 선거에서 낙선하는 쓰라림을 맛보게 됩니다

이는 김영삼이 자유당을 탈당하고 야당에 참여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고

김영삼은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진 그런 상황이 되며

정치입문 최초로 시련을 당하게 됩니다

 

 

[4.19 혁명]

4대 국회는 야당과 언론탄압으로 일관된 국회였고

종신집권을 꿈꾸던 이승만정권은 

1959년 유력 야당지 경향신문을 폐간 조치 ,

 

김영삼은 원외에서 활발한 정치활동을 벌이며

민주당 4대 대선후보 조병옥 박사를 추대 ,

조병옥은 이승만과 대결을 벌였으나

대선 1달을 앞두고 병으로 사망 ,

1960년 4대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자유당의 이승만과 이기붕이 당선됬고

이때 역시 부정선거였는데

자유당의 부정선거에 분노한 국민들은 일어섰고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 , 시민들의 시위가 계속되었고

이로인해 한국 최초의 민주주의 시민혁명

 

'4.19 혁명'

 

이 일어나

자유당 12년 독재정권은 붕괴 ,

이승만은 하야 후 하와이로 망명가게 됩니다

 

4.19 혁명 , 무너지는 이승만 동상

 

1960년 7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실시된

5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민주당은 압승하게 되었고

김영삼은 다시 국회의원에 당선됩니다

 

[민주당의 분열]

같은해 ,

8월 민 , 참의원(당시 국회의원은 하원과 상원이 존재해 민의원과 참의원이 있었음)

합동회의에서

제4대 대통령으로 민주당 윤보선 대통령이 취임했고

 

민주당 윤보선(왼쪽) 대통령과 장면총리

 

4.19혁명 이후 부패한 자유당에 분노한 전국 국민들은

민주당에 표를 몰표해주었고

당시 총선에서 압승한 민주당은

원내 2/3 석을 확보한 초거대 정당으로서

개헌선을 확보했지만

 

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난 5대총선(혁명총선)

 

곧바로 신파와 구파로 분열되어

내부 정쟁만 벌이고 혁명후 국민들의 다양한 요구들을 수용하기는 커녕

자유당과 똑같이 부패하고 있었고

과도기적 혼란상황에서

군부는 꿈틀이기 시작합니다

 

당시 김영삼은 윤보선의 민주당 구파쪽이었고

막 정치에 입문하기 시작한 김대중은 장면의 민주당 신파쪽이었습니다

 

[5.16 군사정변]

당시 대한민국은 한국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된 시기였기에

군부가 엄청나게 비대해져 있었고

윤보선+장면 민주당 정부는 그런 군부를 축소시키려 했는데

 

이에 군내의 박정희 소장은

사회불만있는 장교들을 모아 군사쿠테타를 계획해고 있었고

군부 역시 군부를 신경쓰며 강력하게 통제하던 이승만에 비해

군부를 축소시키려 하던 민주당 정부에 별다른 애정이 없었기에

박정희의 쿠데타 모의를 알고 있음에도 묵인하게 됩니다

 

결국 윤보선-장면 민주당 정부의 혼란을 빌미로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의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고

 

5.16 군사정변

 

당시 김영삼 의원은 고향 거제에 있었습니다

고향에 들른 사이 서울에서 쿠데타 소식을 들은 김의원이었고

이후부터 30여년간 군사정권이 시작되며

민주주의의 기나긴 암흑기가 시작됩니다

 

[정치활동정화법]

비상계엄 아래 국회는 해산 ,

모든 정치활동은 중단됬고

기존 정치인들은 부패한 구시대 정치인으로 몰려

강제 은퇴되었고

세대교체와 체질 개선이라는 명목아래

4천명이 넘는 정치인들이 수난을 당하게 됩니다

 

정치활동정화법

 

하야성명을 발표하는 윤보선 대통령

 

김영삼 의원 역시 수사당국에 불려가

조사를 받은 뒤 자택에서 감시를 받게 되었고

 

부패한 나라를 전부 쓸어버리고

나라를 발전시키려는 야망을 가졌던

박정희는 정치정화법(정치활동정화법 , 정정법)을 만들어

4374명의 정치인을 묶어둔 채

민주공화당을 창당한 후

김영삼을 비롯한 민주당 인사들의 참여를 강권합니다

 

민주공화당(공화당)

 

<김영삼>출발부터 잘못됐던 5.16 당연한 결과를 가져왔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는 법이다.

국민은 젊은 장교들의 정치시험의 모르모트(실험용 동물)가 되고 말았다.

너무나 값비싼 희생을 지불했다.

그러나 대가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너무나 소중한 교훈을 얻은 것이다.

 

군사 쿠데타는 실패했다는 교훈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아무리 후진국이라도

국가 건설의 수단으로 비정상적인 지름길이 있을 없다는 것을

5.16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이것이 가장 값있는 가치이다.

 

[민주투사의 길]

그러나 김영삼은 공화당의 참여회유를 거부했고

야당 재건과 민정이양 촉구에 나서며

1963년 재야 세력과 청년당원을 동원해

군정연장 반대 데모를 주도하다

서울 구치소에 수감되기도 합니다

 

 

석방 직후 김영삼은

 

<김영삼>민정 이양을 통해 민주회복이 될 때까지

계속 투쟁할 것

 

이라 선언합니다

 

민주투사 김영삼

 

이후 윤보선이 주도해 창당한 민정당에서는

김영삼을 초대 대변인으로 선임했고

 

1963년 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당 윤보선은

군복을 벗고 출마한

공화당 박정희와 맞섰지만

박정희 후보에게 패배하였고

 

남북구도(도농구도) 로 흘러간 5대 대선

 

군복을 벗고 민간대통령으로 선출된 박정희

 

<김영삼>기성 정치인은 정정법(정치정화법)이라는 사슬로 발을 묶어두고

그들은 공화당이라는 정당을 사전 조직 ,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

선거라는 형식을 밟은 민간정부를 다시 손에 넣었다.

그들이 무리한 재집권을 강행하는 동안

나라는 너무나 많은 희생을 지불하지 않으면 되었다.

혁명공약을 휴지화함으로써

국가의 신용은 국내외에서 여지없이 떨어졌으며

국민 속에는 걷잡을 없는 불신의 풍조를 씨뿌렸다.

 

이어서 11월에 시작된

6대 총선에서

야당 후보로서는 전국 최다 득표율을 기록하며

김영삼은 3선의원이 되었습니다

 

공화당(갈색) 의 압승으로 끝난 6대총선 , 김영삼은 노란색 민정당

 

그러나 점차 정치군인의 시대가 시작되며

민주화의 길은 저만치 멀어지던 상황이었습니다

 

<라봉봉>김영삼은 비민주적으로 흘러가는 정당정치에서 

상식을 지키려는 인물이었고

이승만 독재나 5.16 군사정변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등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선을 그은 인물로서

 

너무도 당연한 상식이 필요한 국민들의 요구에 점차

청년정치인에서 거물정치인으로 성장하게 됬고

밀실에서 타협하고 방관하는 그저 그런 정치인이 아닌

투쟁가 , 투사로서 활약하며

적극적으로 독재에 맞서 싸워나갔습니다

 

민주화 운동가들이 대통령이 된 이후엔

경제 문제에 취약하고 국정수행력에서 크나큰 실책을 저질렀지만

그들의 민주화운동 정신은 참으로 순수하고 숭고했다 생각합니다

 

이후 30여년간 지속된 한국 민주주의의 암흑기 ,

길고긴 비민주적 군사정권 , 정치군인들에

맞선 민간 정치인으로서 

점차 김영삼은 군부에 맞서

민간 , 민중을 대표하는 스타정치인으로 급부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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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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