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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VS 유신독재>

[10월 유신]

[목숨을 건 귀국]

[가택연금]

[유신정우회]

[신민당 총재]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유신의 어둠속에서]

[유신의 어둠을 뚫고]

[YH 사건]

[김영삼의원 제명파동]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부마민주항쟁]

[10.26 사건]

<라봉봉>

 

[10월 유신]

1971년 4월 27일 열린 7대 대선에서는

민주공화당의 박정희는 신민당 김대중을 아슬아슬하게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지만

 

박빙이었던 7대대선 , 박정희 VS 김대중

 

당시에는 부정선거 논란이 있었고

박정희 정부의 독재에 대한 반발도 상당했던터라

 

1971년 5월 25일 열린 8대 총선(국회의원 선거) 에서는

민주공화당은 113석(55.4%) ,

신민당은 89석(43.6%) 을 가져가며

 

신민당은 공화당과 박정희의 독주를 막아낼 수 있는

강력야당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7대총선에서 공화당 129석 , 신민당 45석이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던거와 반대로

8대총선은 공화당과 신민당이 거의 삐까삐까뜨는 상황이었고

 

박정희 역시 이에 위기를 느껴

10월 유신 , 유신독재를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박정희의 심정

 

신민당과 민주화세력이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고 

점차 여당과 박정희를 압박해오자

위기를 느낀 박정희는

1971년 10월 서울에 위수령(군대가 동원되 그 지역 감시) 발동 ,

10개대학 무장군인을 투입하고 휴업령을 내렸고

급기야

12월 16일에는 비상사태 선포 ,

27일에는 야당의원들을 피해 공화당 단독으로

국가보위법을 날치기로 통과시키는 등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독재의 암운이 드리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

박정희는 실제론 영악한 독재자였고

1971년 9월 20일에는 남북적십자회담을 하고

1972년에는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며

국민들에게 통일의 꿈을 부풀려주는 희망고문을 병행하였고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김일성 , 7.4 남북공동성명

 

곧이어

1972년 10월 17일 특별선언을 발표 ,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해산 및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며

 

'10월 유신'

 

을 시작하게 됩니다

 

10월 유신

 

유신발표 후 광화문 앞에 동원된 탱크

 

10월유신이란 ,

원래 유신은 혁명 , 개혁을 뜻하는 의미로서

메이지유신의 유신 역시 그 유신인데

 

박정희는 이전 5.16 군사정변 , 쿠데타를 일으키며

썩은 정부를 갈아없어 리셋시키고 새로 시작해야한다며

자신의 쿠데타를 군사혁명이라 주장했듯이

 

이번엔 신민당과 민주화세력에 위기를 느끼며

정치쿠데타를 일으키며

자신의 정치쿠데타를 '유신' 이라는 개혁이라고

예쁘게 포장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심플했던 유신찬반투표(3차국민투표) 홍보 , 대놓고 찬성번영 반대파멸ㅋ

 

총통이 된 박정희

 

[목숨을 건 귀국]

당시 김영삼 의원은

미국 하버드 대학초청으로 워싱턴에 머물던 상황이었는데

방송으로 소식을 듣자 곧바로 서울집에 전화를 했고

부인 손명순 여사는 

 

<손명순>비상 계엄이 선포되고 국회가 해산되었다.

야당 정치인들은 구속되고 ,

비서까지도 체포되었다

 

하며 김영삼에게 귀국을 늦추라 호소했고

미국 교수진들과 관리들도 투옥될 것을 우려하며

김영삼에게 귀국을 적극 말렸는데

김영삼은

 

<김영삼>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인데

나 혼자만의 안전을 위해 남을 수는 없다

 

,

 

동지들과 국민들이 겪고있는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

 

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귀국했습니다

 

[가택연금]

귀국하자마자 김영삼은 자택에 연금되었고

1972년 12월 27일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이용해

8대 대통령에 취임했고

이때부터는 일반적 국민선거대통령이 아닌

장충체육관에 부하들을 모아서 하는 관제 간접선거를 했고

박정희는 득표율 100%를 받고 대통령에 당선 ,

이때부터는 완전하게 히틀러 총통 , 독재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김영삼>헌정이 일시 중단됐다거나 연금당했다는 것보다

정치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회한에 더 괴로웠다.

무엇인가를 하지 않고는 나를 용납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담배와 술을 끊었다.

줄담배였고 술도 밤새워 마실 수 있는 말술이었다.

연금당한 상태서 이것마저 끊는다는 것이 어려웠지만

이걸 해내야 나의 결의를 가슴에 새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연금이 풀리고도 국민들의 얼굴 대하기가 부끄러웠다.

호텔 같은 사람이 붐비는 곳은 한 동안 가지 않았다.

유신은 야당이 당하고도 국민 앞에 부끄럽기만 했던 패배였다.

그랬지만 망명자가 되지 않고 곧장 돌아온 나의 선택은 나를 구해주었다. 

 

 

유신대통령은

초헌법적 권한이 부여되며

긴급조치권 , 국회해산권 등의 권한이 부여되어

행정부 , 입법부 , 사법부 3권을 모두 장악하게 되었고

유신독재자 박정희의 완전한 철권통치가 시작됩니다

 

이 시기 김영삼은 상도동 자택에서

나오지 않고 박정권의 행태에 개탄했고

결국 다시 각오를 다지며 활동을 재개해

1973년 9대 총선에서 다시 당선되며

9대 국회에 진출합니다

 

[유신정우회]

이미 유신헌법에 의해 국회 역시 박정희 부하들로 장악되었고

유신헌법은 국회의원 1/3을 대통령이 지명할 수 있었기에 

 

대통령이 임명한 유신국회의원

 

9대 총선은

공화당+유신정우회(유신헌법에 의한 국회의원) 이 146석을 ,

신민당이 52석을 가져가며

신민당은 완전히 핫바지 정당으로 주저앉게 됩니다

 

대통령이 국회의원을 직접 뽑는 유신정우회

 

이에 말도안되는 유신의원들이 장악한 9대국회에서

총의석 1/3 도 못미치는 신민당이 다수의 횡포를 막아낼 수가 없었고

박정희는 1973년 8월 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을 일본에서 납치하는 등

횡포가 극에 달하던 시기였습니다

 

김영삼은 신민당 부총재로서

유신타도를 선언하였고

개헌추진을 당론으로 확정하고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신민당 총재]

박정희는 1974년 1월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선포하며

민주세력을 탄압하려 했지만

 

다들 아가리 싸물어 !!

 

오히려 이로인해 국민운동이 더욱 거세졌고

개헌운동이 확산되던 1974년 4월 신민당 대표 유진산 총재가 사망하자

45세의 김영삼 의원은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었고

김영삼의 시대가 시작하며

어느덧 김영삼은

박정희에 대항하는 대표적 야당 지도자로 완전히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당시 신문>야당의 김영삼 시대는

거친 투쟁을 특징으로 한다

 

1974년 11월 16일 여당의원들의 제지를 받는 김영삼 총재 , 태생적으로 투쟁 그 자체였음

 

김영삼 총재 체제하의 신민당은 반유신투쟁을 전개했고

김영삼은 미국과 일본을 방문해 해외동포들에게 협력을 구하기도 했지만

박정희는 야당과 학생 , 국민들의 극심한 반발에

자신과 유신체제에 대한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시행했고

국민이 철폐를 원한다면 즉각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다 하였습니다

 

(박정희의 캐삭빵)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결국 치뤄진

1975년 2월 12일 치뤄진 4차국민투표(유신찬반투표)에서는

유신찬성 73.1% , 유신반대 25.6% 라는 표로

국민들은 박정희 정부를 다시한번 신임했는데

이때도 부정투표 논란이 있었고

 

국민투표에 투표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딸 박근혜

 

박정희는 교사들을 동원시켜

녹두장군 전봉준의 노래

'새야 새야 파랑새야' 를

'새야 새야 유신새야' 로 개사해

학생들에게 보급시켰고

국뽕을 주입하고 민족의식 , 반공위협을 주며

유신투표 찬성에 투표하도록 열을 올렸습니다

 

<새야 새야 유신새야>

새야 새야 유신새야

푸른 창공 높이 날아

조국 중흥 이룩하고

자주 통일 달성하자

새야 새야 유신새야

너도나도 잘살자는

유신 헌법 고수하여

국력 배양 이룩하자

유신 유신 우리 유신

우리 살길 오직 유신

유신 체제 반대하면

붉은 마수 밀려온다

 

유신헌법 홍보표어

 

4차 국민투표 포스터

 

하여튼 ,

유신헌법이 국민투표로 통과된것으로 발표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2월 13일 자신의 일기에

 

'신은 나에게 또다시 중책을 맡기시다.

신명을 다해 중책완수에 헌신할 것을 서약하다'

 

하며 자뻑에 빠지며 유신체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합니다

 

이겼다. 계획대로

 

당시는 미개한 조작이나 정부적 동원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개인주의 시대가 아니었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불안정한 시대였기에

국력이 약해져서 나라가 남에게 넘어간 아픔을 얼마전에 겪었기 때문에

국뽕 , 애국주의 마케팅이나 반공위협이 실제로 진정 통했던 시대였기에

실제로도 유신 찬성에 투표한 사람들도 많았고

유신독재는 시작때가 문제가 아니라

박정희 정권 말기인 70년대 말기에 본격적으로 문제가 나타나며

결국 대규모 반정부 , 민중시위로 나타나게 된 것 입니다

 

1975년 5월 박정희와 김영삼의 영수회담

 

일단 하하호호

 

[유신의 어둠속에서]

하여튼 ,

유신헌법까지 국민투표로 신임을 얻게되자

박정희는 또다시 호랑이가 날개를 얻은 격이 된 것이었고

위기를 느낀 신민당과 김영삼은

강력하고 단일화된 민주세력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윤보선 , 김영삼 , 김대중 등의 회담을 개최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하였고

 

이시기 하필 베트남까지 완전히 공산화됬나는 소식이 들려오자

박정희 정부는 반공을 명분으로 더욱 민주화운동을 강경하게 탄합하며

신민당과 민주화세력은 미궁에 빠지게 됩니다

 

<김영삼>그러나 아무리 외쳐봐도 소용이 없었다.

소위 헌법에 관한 논의를 금지하는 대통령 긴급 조치라는 것이 발동되어 있어서

국내 신문 방송은 내가 말한 헌법 비판을 줄도 보도하지 못했다..

 

 

1976년 3.1절을 기해

윤보선 , 함석헌 , 문익환 등 재야인사들은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며 유신을 규탄했지만

박정희의 탄압정치는 더욱 강화되어

김영삼 총재역시 자리에서 밀려났고

너덜너덜하게 두드려 맞은 야당은 제구실을 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1978년 7월 6일

박정희는 9대 대통령에 또다시 100% 득표율로 셀프선출되었고

이에 점차 국민들의 불만들도 폭발하기 시작합니다

 

[유신의 어둠을 뚫고]

1978년 12월 12일 열린 10대총선에서는

역시 박정희는 자기 맘대로 국회의원 1/3을 뽑을 수 있었기에

여당인 공화당+유신정우회가 145석 ,

신민당이 61석을 가져가게 됬지만

 

실제론 야당 득표율이 여당을 1% 앞서는 선거결과가 나와버리게 되었고

당시 박정희는 유신독재뿐만 아니라 물가폭등 등 악재가 있었던 상황이어서

국민들은 여러 이유로 신민당에게 표를 몰아주기도 한 것이었습니다

 

공화당은 유신정우회덕분에 과반의석은 확보했지만

득표율에서 야당에 뒤졌다는 것에 경악하며

심각한 위기를 느꼈고

점차 박정희 유신체제의 몰락의 도화선에 불이 붙어지기 시작하게 됩니다

 

결국 국민들의 반유신의지에 힘입어

1979년 5월 궁지에 몰려있던 김영삼은 다시 당권을 탈환해

박정희와 다시 맞서게 되었고

 

<1979년 4월 김영삼>

돈과 권력에 굴복하는 결과를 가져올 때는

국민은 공화당 정권을 버리듯이

신민당도 버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제 밤은 깊었습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밝아옵니다.

우리들이 민주주의를 찾고 헌법을 개정하며

우리들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있는 날이 반드시 다가온다는 사실을 믿읍시다.

우리는 희망을 가집시다.

악한 자가 일시적으로 이기는 경우가 있지만

결국에는 정의가 반드시 이긴다는 교훈을 믿습니다.

그리하여 ,

우리는 머지 않은 장래에 우리들은

이겼노라 ,

승리했노라 ,

자유민주주의 만세 ,

민권 만세

국민과 함께 부를 날이 때까지 참고 나갑시다.

 

1979년은 유독 불안정한 정국이 펼쳐지며

박정희 부하들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던 상황이었고

박정희 정권이 붕괴하던 시기였습니다

 

[YH 사건]

박정희는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우며

국가부흥 , 경제대통령을 자처했지만

정작 가장 경제발전의 최대 공로자이자 최대 희생자였던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과 궁지에 몰리던 상황이었고

 

1979년 8월 9일 회사의 일방적 폐업조치로 생존권을 잃은

YH여공들은 신민당사에서 무기한 농성에 돌입하였고

 

YH무역사건

 

신민당은 대책위를 구성해 정부와 교섭을 시도했지만

박정희 정부는 이 사건을 해결할 의사가 없었고

 

폐업철회 구호는 유신철폐로 바뀌었고

이에 박정희는 신민당사를 기습 ,

무력진압에 나서게 됩니다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는 YH여공들 ,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YH여공들을 격려하는 김영삼 총재

 

신민당사에서 농성중인 여공들을 끌어내는 경찰들

 

당시 YH여공들과 같이 끌려나오는 김영삼 총재

 

 

[김영삼의원 제명파동]

한발더 나아가

박정희 대통령은 김용삼 총재의 총재직을 직무정지시키고

의원직을 박탈하였고

 

국회 본회의장에서 '김영삼 총재 제명 오늘강행' 신문을 읽고있는 김영삼 총재 , 1979년 10월 4일

 

<의원제명 즈음 의원총회에서 김영삼 1979년 10월 2일>

 지금 신민당과 나의 명제는

 

'오늘 죽고 영원히 사느냐 , 오늘 살고 영원히 죽느냐'

 

선택이 있을 뿐입니다.

나는 비굴하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떳떳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워가겠습니다.

길만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우리의 배후에는 3,700 국민의 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공화당보다 많은 지지를 받은 야당입니다.

지금도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참된 야당의 길을 가느냐 ,

국민의 저주 속에 잠시나마 평안히 가느냐 ,

오로지 국민의 지지를 받들어 참다운 용기를 갖고 싸워야 시기입니다.

...

나는 결코 승복하지도 않을 것이며 또 승복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공화당 정권 19년간의 장기 집권은

완전한 부정 ,

완전한 부패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고 ,

이제 최후 발악적인 수법을 쓰고 있습니다.

그들로부터 이제 민심은 완전히 떠났습니다.

권력과 돈만 갖고 정치가 되느냐 ,

아무도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우리 신민당은 이번 이 계기를 통해 함께 뭉칩시다.

공화당이 총부리를 나의 등에 대고 있는 이 때 ,

오직 단결로써 싸워나가야 하며 ,

그렇게 할 때 민주 투쟁이라는 우리의 목표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정의가 우리 편이며

하나님의 보호가 우리와 함께 하며

국민의 지지가 우리에게 있을 때

민주주의는 성취되고야 말 것입니다.

나를 제명한다고 해서 민주회복이라는 나의 신념까지 말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단합해서 싸워나갈 때 그 승리의 날이 ,

그 위대한 승리의 날이 온다는 것을 믿으면서 ,

오늘 이처럼 한자리에 모여 난국 타개를 의논하게 된 데 대해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분명히 공화당 정권에 대해 충고합니다.

이와 같은 엉뚱한 짓을 계속할 무서운 국민의 저항이 있을 것입니다.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제1야당 총재 제명사건은 

박정희의 말년의 치명적인 악수였고

야당과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었던 김영삼이 국회의원에서 제명되버리고 쫓겨나버리자

국민들은 드디어 공화당 , 유신정권의 폭거에 폭발하게 됩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이 사건으로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김영삼을 따라 전원 사표를 제출했고

이로인해 빚어진 정치파동은

야당이 전부 국회에서 사라지는 결과로 나타나며

유신체제의 종말을 앞당기게 됩니다

 

<1979년 제명 이후 김영삼>

아무리 닭의 목을 비틀지라도 새벽이 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

 

 

[부마민주항쟁]

1979년 10월 17일

김영삼총재 제명 취소와 유신조치 철폐를 외치며

부산대학생들이 시위를 시작하였고

4.19 혁명의 진원지였던 마산시민들이 봉기하며

부마사태(부산마산사태) , 부마민주항쟁이 전개되었고

전국이 반정부 시위로 들끓게 되었고

박정희 군사정권의 최대 본거지였던

군부 역시 이번만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부마민주항쟁

 

[10.26 사건]

이 사건들에 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평소 쌓여온 박정희의 견제에 대한 불만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유신체제에 대한 한계 ,

이런 심상치않은 정국에 흥분하여 우발적으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궁정동 술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했고

 

10.26 사건

 

대한민국에서 초법 , 불법적으로 군림하던 18년 독재자는

자신의 최측근 부하의 총탄에 허무하게 사망하며

유신체제는 완전히 끝나게 됩니다

 

10.26 사건으로 철권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자

김영삼 총재의 직무정지는 철회됬고

김영삼은 다시 신민당 총재로 복귀하며

민주화를 위한 꿈에 부풀어 오르게 됩니다

 

<라봉봉>실제로 전체적인 역사의 흐름이나 큰틀에서 본다면

실제로 김영삼은 박정희보다 정치적 역량이 부족한 인물이었고

당시 큰 비중은 없는데

 

한국 정치사 , 정당사에서 본다면

당시 김영삼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고

계속해서 독재정권이었던

박정희 정부를 침몰시키기 위해 투쟁했던 민주투사였습니다

 

큰 틀에서보면 박정희의 야망이나 행보 역시 의의나 변명거리 등이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위해 정당정치를 무시하고 인권을 유린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군부와 전혀 관련없는 순수정당정치인 , 민간정치인으로서

대통령이 되려고 했던 김영삼 입장에서는

박정희는 매우 문제가 있는 인물이었고

그렇기에 박정희와 김영삼의 관계는 더이상 타협이 불가능한 관계였고

이후 나타난 신군부의 전두환 , 노태우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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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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