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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문민대통령 김영삼>

[야합]

[하나회 숙청]

[역사바로세우기]

[금융실명제]

[사고 공화국]

[IMF 외환위기]

[퇴임후의 김영삼]

[통합과 화합]

[대한민국 대통령을 꿈꾼 소년]

<라봉봉>

 

[야합]

김영삼은 평생을 독재와 군부독재와 투쟁하다가

끝판에 힘이빠져서 신군부 마지막 독재자였던 노태우와 손을 잡게 되었고

신군부의 지원사격을 받고 편안 , 무난하게 대한민국 14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대한민국 14대 대통령 김영삼

 

김영삼 대통령 공식 초상화

 

김영삼은 자신의 야합 , 신군부와 손을 잡은것은

안정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야기했지만

국민들은 평생 목숨걸고 독재와 싸워온 그가 끝판에 독재세력과 결탁 , 야합한 것에 대해

큰 실망을 느꼈고

그로인해 마지막 남은 민주화에 대한 기대는

마지막 남은 거물정치인이었던 '김대중' 에게 걸리게 되었습니다

 

한때의 동지였지만 점차 다른길을 가게 된 김대중과 김영삼

 

김영삼 대통령은 하여튼 어찌됬던 

32년간의 군부독재이후 다시 문민정치가 부활해

최초의 민간 정치인출신 대통령이 나온것때문에

큰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일단 김영삼 당선 초기는 국민들도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고

김영삼이 당선되는 1993년은

점차 국가도 개도국이나 신생국에서는 벗어나던 시기였기에

어느새 대한민국엔 기득권 세력 , 빈부격차가 생기던 시점이었기에

김영삼은 오랜 기득권이었던

노태우 , 신군부와 결탁했기에

새로 형성된 대한민국 보수층 , 기득권 세력의 지원사격을 얻어낼 수 있었고

 

3당합당 , 김영삼(민주투사)+노태우(신군부)+김종필(구군부)

 

(보수 VS 진보나 기득권 VS 비기득권 , 부자 VS 빈자간의 갈등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고속경제발전이 종료되던

이 시기부터는 정치 표심으로 그대로 나타남)

 

김영삼도 평생 길바닥에서 민주화 투쟁을 전개했지만

태생이 부잣집 아들이라

귀족적 성향 , 반공 , 안보 정서도 있었기에

 

나름 국민들은 어찌됬건 당선된 김영삼에 기대를 걸게 되었고

이로인해 보수적 성향 + 민주투사 이미지가 공존했던 김영삼은

집권초기엔 국민들에 대한 인기가 엄청났고

평소 김영삼이 통쾌한 한방을 보여주는 성질머리가 있었기에

32년간의 군부독재에 지친 국민들은

최초의 민간 대통령 김영삼에게 기대를 걸기도 했고

인기가 엄청난 수준을 넘어서 폭발할 지경이었습니다

 

김영삼 같은 케이스 인물이

한자로 용두사미(용의 머리지만 뱀의 꼬리) 라고 생각되는데

초반엔 폭풍간지였다가 마지막에 의문을 남기는 인물들이고

 

오오..응?

 

김영삼은 초중기엔 민주투사로 격렬한 투쟁을 하며

폭풍간지 모습을 보이다가

마지막엔 결국 대통령이 되기위해 군부세력과 손을 잡으며

국민들에게 허탈감을 안겨준 인물이고

 

대통령이 되고나서도

임기 초반엔 군부청산 , 화끈한 모습으로 국민들을 열광시키다

막판엔 IMF 책임을 지고 온갖 욕을 먹으며 물러나게 됩니다

 

일단 김영삼 대통령은 자신의 정부를 문민정부라 명명하며

1990년대 초반 , 자신의 시대를 열었는데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기위해

군부세력으로부터 자금지원을 엄청나게 받으면서 시작했기에

시작부터 썩어있었고

 

노태우 , 민자당은

비록 민자당에 참여했지만

태생적으로 민주투사이자 야당대표였던  김영삼을 띠꺼워했지만

일단 그가 대선후보가 된이상 

군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를 당선시키려

나랏돈을 어마어마하게 조달했고

 

14대 대선 시기

노태우는 3000억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액수를

김영삼에게 퍼부어줍니다

 

<노태우 회고록>김영삼에게 3천억원을 모아서 줬다

 

우리가 남이가 ㅎㅎ

 

김영삼은 실제론 취임후 정치자금 수수를 하지는 않았고

전반적으로 볼때는 청렴한 인물이었다는 평가가 있지만

결국 결탁한 세력이 세력들인지라

같이 똥통에서 놀다가 서로 똥물이 뭍거나

슬쩍 콩고물이 들어갔던 것은 사실이고

전반적으론 본인은 청렴 ,

주변인들이 상당히 부패했다고 보면됩니다

 

근데 ,

노태우 대통령은 나름 김영삼을 당선시키려 

기업들 엉덩이 때리면서 돈을 뜯어서 김영삼에게 자금을

영혼까지 끌어모아주었는데

노태우 본인이 대통령인 시절 ,

자기 밑에 있을땐 김영삼이 나름 고분고분하다가

막상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이

취임사부터 통수의 기질을 보이자 움찔하게 됩니다

 

선서하는 김영삼 대통령

 

<노태우>1993 225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여

정권과 한국 현대사의 정통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그의 취임사를 듣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없었다 ,

 

나와 함께 2년간 얼굴을 마주하면서 국정을 논의하고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고 포부를 피력할 때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김영삼의 취임사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김영삼 취임사>

국민 여러분.

흐트러지고 있는 국가기강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부정한 수단으로 권력이 생길 때 ,

국가의 정통성이 유린되고 법질서가 무너지게 됩니다.

목적을 위해서 절차가 무시되는 편법주의가 판을 치게 됩니다.

땅에 다시는 정치적 밤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있어야 권위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유는 공동체를 위한 자유여야 합니다.

백범 선생의 말처럼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꽃을 심는 자유여야 합니다.

땅에 떨어진 도덕을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교육은 미래를 준비하는 과학기술교육과 함께

사람다운 사람 ,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인간교육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교육입니다.

 

하여튼 김영삼이 취임사부터 부정부패 척결 , 국가기강을 바로잡아야한다고

울부짖자

노태우 전 대통령은 흠칫 깜짝 놀라게 되었고

국가기강흔든녀석+부정부패의 타겟이

쿠데타를 일으킨 자신과 전두환일게 뻔하기에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하나회 숙청]

하여튼 ,

김영삼은 자신의 당선에 큰 도움을 준 노태우의 계산과 의도와 달리

정반대로 주행하기 시작했고

군부의 전두환+노태우의 친위조직인 하나회는

취임초 김영삼 대통령을 길들이기 위해

군인사를 자신들이 맘대로 결정해 김영삼 대통령에게

도장찍어달라고 부탁했지만

김영삼은 빡돌아서

취임 일주일만에 대장 , 중장 , 소장 상관없이

하나회 소속 장군들의 별을 40개 넘에 떨어트리며

숙군작업을 시작합니다

 

하나회 숙청

 

이에 하나회 소속 군장성은

 

<하나회 장군>군을 너무 홀대한다.

무신의 난이 왜 일어났는지 아는가 ?

 

할 정도로 반발을 했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김영삼>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

 

하며 하나회를 뿌리뽑았고

군내 불법사조직 , 반란세력이었던 하나회는

해체되었고

군부세력은 국회의사당이 아니라 다시 군대로 돌아갑니다

 

[역사바로세우기]

또한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은

역사 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전두환과 노태우 전직 두 대통령을

반란죄 , 횡령 , 살인죄로 체포하고 사형에 구형하였고

결론으로 전두환은 사형 , 노태우는 징역 22년에 선고되어 수감되었다가

모두 김영삼 임기말기 특별사면됩니다

 

역사의 심판을 받는 두 전직대통령

 

 

[금융실명제]

또한 1993년 8월에는

대통령령으로 금융실명제가 발표되었고

 

금융실명제

 

불법자금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김영삼 대통령명에

국민들은 큰 지지를 보내주었으며

다음해 여론조사에서는 공식 지지율이 90% 수준에

김영삼은 인기짱 대통령이 되었고

여대생들도 가장 만나고 싶은 인물 1위로 김영삼 대통령을 택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만났다 , 이화여대생들과 대화하는 김영삼 대통령(1994년 5월 11일) , 국가기록사진

 

이게 권력이고 남자지.. 부럽다

 

[사고 공화국]

군부독재 청산 , 부패 척결

참 아름다운 김영삼의 업적이었는데

 

김영삼 시대가 들어서자 

대한민국은 급속도로 빨리빨리 , 군대식 경제발전을 한 

부작용 , 고름이 터지던 시기였고

 

박정희정부~제5공화국 시절 날림으로 부실하게 건축된 구조물들이

수십년이 지난 김영삼 정부대에 계속해서 무너지기 시작했고

성수대교 붕괴사고 ,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일어나며

수많은 인명피해가 있었고

 

끝나버린 빨리빨리 한국경제신화를 상징하는 성수대교붕괴사고와 삼풍백화점

 

또한 그외에도 안전 문제에 서홀한

항공기 추락사고 ,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 ,

대구가스폭발 사고등

 

유독 김영삼 정부는 사고가 많아서

'사고 공화국' 이라고도 불리게 됩니다

 

[IMF 외환위기]

하여튼 ,

쓰다보니 이전 김영삼 정부 이야기에서 쓴 이야기들이 반복되기에

자세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만하기로 하고 ..

 

김영삼 대통령은 그렇게

임기초기엔 국민적 인기가 폭발하고 점차 그럭저럭한 모습을 보였지만

1997년 나라가 빚에 휘말려 나라에 외환(외국돈)이 급격히 부족해지게 되었고

IMF 외환위기를 맞으며

김영삼은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고

 

대한민국 경제는 외국세력인 IMF 관리하에 운영되게 되며

경제주권이 외국에 넘어가게 되었고

6.25 전쟁에 이후 최대 위기인 경제위기를 겪으며

김영삼 정부는 완전히 침몰합니다

 

<김영삼 대통령>시급한 외환 확보를 위해 국제통화기금(IMF) 자금 지원체제를 활용하겠습니다.

이에 따른 다방면에 걸친 경제 구조조정 부담도 능동적으로 감내해 나가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은

1997년 12월 3일부터 2001년 8월 23일까지

IMF 관리 체제 기간을 겪게 되었고

당시 국민적 분위기는 IMF 관리체제를

국가 멸망급으로 여겼기에

기업부도 , 자살자도 속출하던 시기였고

사실상 제2의 일제강점기 이런 느낌이었다 보면 됩니다

 

IMF 외환위기로 급등한 자살률

 

임기 초기 적절한 개혁으로 역대 대통령중 최고의 지지율을 기록한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말기 IMF 외환위기 대실책으로 퇴임때는 최악의 지지율을 기록했고

이런 격차는 아직도 전무할정도입니다

 

[퇴임후의 김영삼]

퇴임 2년뒤에도 김영삼의 수난은 끝나지 않아

빨강 페인트가 주입된 페인트 계란을 시민에게 맞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고

2000년에는 강연을 위해 고려대에 들어가다가

분노한 대학생들에게 막혀 10시간 넘게 대치하다 돌아가기도 합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퇴임후에도 국가원로로서 나름 활동하며

가끔씩 정치발언을 했고

 

김영삼은 이외에도 현직 대통령인 문재인과도 인연이 깊은데

노무현 , 문재인은 민주변호사로 정치권 거물이었던 김영삼에게 추천되기도 했고

 

노무현은 김영삼 제의로 통일민주당에 입당해

국회의원이 됬고

 

김영삼과 노무현

 

정치에 별관심없던 노무현 친구 문재인은 정치권입문에 거절했지만

이후 노무현 대통령때문에 정치를 시작했기에

노무현 , 문재인 대통령과도 인연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문재인과 김영삼

 

또한 김영삼은 한국 정치권 정당정치 1세대 원로중의 고인물 끝판왕이었기에

오늘날에도 그의 계파는 그가 거주한 상도동을 따서

상도동계라 불리며

좌우 할거없이 현재 정치계에 엄청나게 포진해있고

 

김영삼의 영향을 받은 정치인들 , 매일경제

 

노무현(민주계 대통령) 뿐만 아닌 이명박(보수계 대통령) 까지도

김영삼쪽 인사기에 김영삼의 아이들 ,

속칭 'YS키즈' 들은 자라나서 대통령 , 

오늘날 거물정치인으로 성장하게 됬고

민주계 정당이나 보수계 정당 가릴것 없이

오늘날에도 김영삼이 뿌려놓은 씨앗이 많고

한편으론 정치계에 김영삼이 분탕치고 떠났다는 악평도 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2007년 대선때는 이명박을 지지했고

2012년 대선에서는 박근혜를 음,,

 

김영삼과 박근혜의 관계는 엄청나게 껄끄러웠는데

일단 김영삼은 국회의원시기 박정희에게 초산테러도 당하고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되기도 해서 악연이 깊었고

박정희의 딸이었던 박근혜 역시 껄끄러울 수 밖에 없었는데

 

어색

 

 

일단 김영삼은

아버지와 딸은 다른법이라며

박근혜에게 젠틀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막상 대선이 다가오자 박근혜를

 

<김영삼>유신시대의 퍼스트레이디로서

사실상 유신의 2인자 역할을 했던 사람으로, 대통령이 되기에는 결격사유가 있다

 

며 혹평했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2012년 7월 11일에는 서울 상도동 자택에 만나러온 김문수 경기지사에게

 

<김영삼>박근혜는 아무것도 아니다 ,

(박근혜는) 사자가 아니다. 아주 칠푼이다. 사자가 못돼

 

라며 극딜을 넣었고

일반인보다 지능이 70%밖에 안된다는 뜻의

박근혜 칠푼이 발언은

크게 회자되기도 했고

 

김영삼이 대통령 재임시절 IMF 때문에 이미지가 워낙 씹창나있던 상황이라

칠푼이 발언은 그냥 사람들은 별생각없이 웃어넘기고

야당에서 박근혜 깔때 사용하는 말이 됬지만

 

칠푼이 발언은

박근혜 탄핵당시 박근혜-최태민간의 부적절한 관계가 드러나며

재조명 되게 됩니다

 

[통합과 화합]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후

고열을 겪다가 서울대학교병원에서

2015년 11월 22일 0시 22분 32초 향년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죽기전에 아들 김현철씨에게 

 

<김영삼>통합과 화합

 

이라는 말을 종이에다 써냈고

김현철이 이것이 무엇이냐 묻자

 

<김영삼>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이라 대답했고

이것은 그의 유언이 되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마지막 모습

 

김영삼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고

자신이 평생 얽히고 엮여온

이승만 , 박정희 ,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4번째로 안장되며 영원한 안식을 취하게 됩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을 꿈꾼 소년]

젊은 시절부터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야겠다'

 

꿈꾼 김영삼 ,

거친 바다의 파랑속에서도

결국 그의 생각대로 인생은 흘러갔고

이 땅의 역사 역시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을 뿐입니다

 

 

<라봉봉>김영삼은 만화로 치면 나루토와도 비슷한 인물이 아닐까 싶고

제가 그 만화는 많이는 안봤는데 주인공 나루토가 계속

 

'나는 호카게(대통령)가 될거야'

 

하고 소리치는 모습이 김영삼의 소년시절 다짐과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은 누구나 직업을 선택할 자유가 있고

대통령을 꿈꾼 김영삼도 참 대단한 생각을 가진 인물이라 생각되지만

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본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 라는 개념으로서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인이라면

출신이 시골어촌의 부잣집 아들이던

거지던 , 대통령 아들이던간에

누구든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있고

이전 조선왕정시대에는

꿈도 못꿀 일들을 김영삼은 사실상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 합법적으로 실행한 인물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출신에 상관없이

고위직 직업을 가질 수 있는게 자유 , 민주주의 국가이고

그게 비민주적이유로 제한되는 것은 독재이기에

김영삼은 자신의 앞길을 막았던 이승만 , 박정희 , 전두환과 계속해서 싸운 것이었고

그들의 능력과는 별개로 비민주적 방법을 동원해 민주주의를 말살시키려 한 것도 맞기에

김영삼의 싸움은 충분히 가치있었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

결국 어떤 직업이던 되는 것은 어찌보면 쉬운일이고

문제는 되고나서 유지하는게 어려운 것이라 생각하는데

대한민국 개천용 , 성공신화들보면 자기가 어찌어찌 고생하고 투쟁해서

이 자리를 가졌다고 자랑하는 글들이 많지만

정작 되고나서의 행보는 존재감도 없고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 많고

결국 세금 빨아먹는 녀석들일 뿐이고

자신만의 영달과 사리사욕을 위한 것일뿐이라는 것에 허탈함을 많이 느꼈고

 

김영삼 역시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감동실화지만

막상 대통령이 되고나서는 적도 많이만들고 시작했고 국정운행에도 실패해

IMF를 겪으며 오욕의 죄인으로 퇴장한 인물입니다

 

한국 정치인이던 무슨무슨 준비생이던지

누구나 야당일때나 힘을 가지지 못할때는 멋있고 대단하지만

정작 권력을 얻고나서는 아무런 비전제시도 , 이끌 능력도 없는자들이 참많고

지 잘났다고 나오는 녀석들보면

눈에 희망이라곤 보이지도 않고

대게 하나도 안잘났으니까

무슨무슨 성공신화좀 그만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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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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