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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정치인 김대중>

[해방정국]

[조선신민당]

[상식이 통하는 사회]

[청년사업가 김대중]

[한국전쟁]

[정치에 대한 열망]

[계속되는 낙선]

[고생만 하다 죽은 아내]

[국회의원되자마자 국회해산]

[정치활동정화법]

[이희호]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

[회유]

[야당 대변인]

[동교동계]

[목포에서 금배지]

<라봉봉>

 

[해방정국]

그렇게 일제강점기 ,

언제 일본군 징병으로 끌려갈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새신랑 김대중은

1945년 8월 15일 갑작스럽게 해방을 맞았고

너무 기쁜 나머지 거리로 뛰어나가

일본인 패망했다는 포스터를 붙이며 돌아다닙니다

 

광복의 기쁨에 만세하는 대한인들

 

그러나 ,

해방후 정국(해방정국)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그전까지 독립운동가 , 국민들은

일제라는 거악에 맞서기 위해

정치 , 신분 , 사상에 관련없이 하나가 되어 맞서왔지만

막상 일제라는 거악이 사라지자

이번부턴 그전부터 조금씩 고름이 터져나오던

좌우갈등 , 사상문제가 엄청나게 커져갔고

해방된 한국은 그렇게

 

소련 ,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좌익들과

미국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우익들이 격렬한 투쟁 , 테러활동을 전개합니다

 

38선 , 소련과 미국으로 분단된 한반도

 

일제에 맞서싸우다

돌아가신 순국선열 , 독립운동가들이 보면 통탄할 일이었지만

하여튼 ,

그때부터 전라도 청년 김대중은

우리민족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데 기여하기 위해

여운형이 이끌던 건국준비위원회에 가입합니다

 

진보적 민족주의자 여운형

 

그러나 김구 선생과 조민식 선생까지 합류했다던

건국준비위원회의 발표는 허구였고

이후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의 신탁통치 ,

외세가 다시 한국을 지배하겠다는 결정이 내려지자

분노에 빠진 한반도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격렬히 요동치게 됩니다

 

신탁통치반대운동

 

김대중은 좌우지도자들이 이런 소용돌이속에서

서로 화의 , 화합하길 기대했지만

들려오는 소식은 싸움소식뿐이었고

그러던 와중

 

1946년 ,

이승만은 남한단독정부 수립 가능성을 말했고

김구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남한단독정부수립 역시 반대했고

국론은 사분오열로 갈려 아우성이 됩니다

 

해방정국 혼란속 암살당하는 여운형 , KBS 1TV 대하드라마  서울 1945 (2006)

 

해방정국 혼란속 암살당한 김구 , 민족의 큰별이 지다

 

[조선신민당]

김대중은 어떻게든 나라가 분열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고

그러던 와중 조선신민당이 좌우합장을 표방했기에

김대중은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조선신민당에 가입합니다

 

근데 알고보니

조선신민당은 공산당 노선을 지지했고

좌우합작의 아름다운 명분에 현혹되 가입했지만

공산주의를 찬성하지 않았던 김대중은 곧 탈퇴합니다

 

더 정확한 이야기로는 ,

김대중은

1946년 초 ,

조선신민당 목포시지부 조직부장이 되었는데

소련 추종세력과 갈등을 빚게 되며 여름에 탈당하게 됩니다

 

<김대중>나는 1946년까지

이른바 좌익이 지도하고 있던 인민위원회

또는 그 당시의

신민당(새로운 민주주의라는 뜻으로 이름 붙여진 것으로서

현재의 신민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등에 참여했었다.

나는 짧은 기간 동안에 여러가지 조직에 들어갔다가는

기대와 실망만을 되풀이 해서 겪었다.

그러다가 공산주의자들과 회합을 가지게 되었는데 ,

나는 한때 공산주의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적이 있었다.

공산주의가 참으로 우리 나라의 독립과 국민의 행복을 위한

유익한 주의(사상) 인가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윽고 공산주의와는 깨끗이 결별하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나는 무엇보다도 민족의 독립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데 ,

당시 접촉하고 있었던 공산주의자들 가운데는

민족의 독립보다도

소련에 대해 충성을 다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해방 직후의 공산주의는 그런 면이 두드러졌다.

때때로 그들의 입에서

 

'우리의 조국 소비에트 만세'

 

라느니 ,

 

'붉은 깃발만이 우리의 진정한 깃발'

 

이라느니 하는 따위의 말이었는데 ,

그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나의 민족주의적인 감정은 자극되었다.

나의 반발심이 자연히 표면에 나타나게 되자

그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

급기야는 그들로부터 점차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나의 공산주의에 대한 의혹은 이처럼 소박한 곳에서부터 생겨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공산주의 조직 자체가 인간의 자유와 인간성을 무시한

강압적인 존재라는 것에 관해서도 반발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그때부터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인가 하는 점을

진심으로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다.

 

 

김대중은 국가의 분열을 막기위해

정말 순수하게 조선신민당에 가입하고 곧 탈퇴했지만

이때부터 김대중은 이 전력때문에 오랫동안

'빨갱이' 라는 누명을 써야했고

이 전력은 주홍글씨가 되어

군부독재정권 역시 그의 사상을 문제삼을 때마다

이때 경력을 물고 늘어집니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

그해 10월 1일 ,

김대중의 첫딸이 태어나는 날이었는데

처가에서 아내가 출산하는 것을 보고 밖으로 나가는 길에

누군가 김대중을 체포했고

좌익세력이 저지른 목포 남교동 파출소습격사건에 가담했다는 혐의였습니다

 

그러나 처가에서 아내의 출산을 지켜보던 시간에 일어난 사건인데

연루된건 말도안되는 일이었고

10여일간 감금되어 무참한 폭행을 당한 이후에서야

김대중은 목포에서 세금 가장많이낼정도로 소문난 부자였던

장인어른의 보증과 증인으로 겨우 풀려날 수 있었고

억울한 사람을 죽도록 때리고 나서도 사과한마디 없는 경찰에게

김대중은 기가막혔고

이때부터 김대중은

상식이 통하고 법과 질서가 바로서는 세상이 되야한다는 생각을

깊게 하게 됩니다

 

하여튼 ,

그렇게 첫딸을 낳안는데

첫딸 소희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뻤다'

 

고 합니다

그러나 2살이 되었을때 딸은 세상을 떠났고

겨우 22살의 감성적인 아버지는 너무도 슬프고 서러워

죽은아이를 앞에두고 하염없이 앉아있었고

결국 친구가 대신 와서 죽은 아이를 데려다 묻었습니다

 

 

[청년사업가 김대중]

23살의 청년 김대중은

배를 한 척 사서 목포해운공사를 설립했고

사업은 번창하여 자기손으로 집도 마련하고

배도 한 척 더샀고

 

청년 김대중 , 1954년 사진

 

청년사업가 시절 김대중(1951년)

 

부인이었던 차용애의 집안은

목포에서 인쇄소를 운영하던

목포 제일가던 부잣집이기도 했고

 

김대중의 첫부인 차용애

 

창창한 청년사업가 김대중의 인생은

더이상 가로막을 장애물이 없을 듯이 보였습니다

 

 

[한국전쟁]

그러나 ,

1950년 6월 김대중은 거래처에서 수금도하고

새 사업을 구상하려 서울에 와있었는데

그때 6월 25일 ,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사수' 를 외친 다음날 북한군이 서울에 들이닥쳤고

수금한 돈을 맡겨두었던 회사에 돈을 찾으러 갔더니

금고는 이미 인민군의 손에 들어와있었고

북한군 진로를 막기위해 한강철교가 폭파되어

고향 돌아가는 길도 막혔습니다

 

끊어진 한강 인도교

 

김대중은 결국 입고있던 양복과 시계를 팔아

며칠을 살다가

간신히 배를 구하여 한강을 건너고

굶주림과 피로로 온갖 고생을 하며 이십여일을 걸어

목포로 돌아왔는데

목포마저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북한군)

 

아내 차용애 역시 부잣집 딸 , 사업가 남편을 두었기에

우익분자로 몰려 집까지 뺏았기고

일제가 전쟁에 대비해 파놓은 방공호에서 둘째아들을 낳았고

다행히 자신의 회사에서 일하던 부하직원이 

아내와 아이들을 돌봐주던 상황이었습니다

 

목포 일본영사관 뒷편에 있는 방공호

 

가장이었던 김대중은 아내와 아이들을 먹여살리려

일거리를 찾으러 나오다

인민군에 잡혀 형무소에 갇혔고

그사이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남쪽의 인민군은 고립되었고

인민군들은 퇴각하며 붙잡힌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는데

김대중은 천만다행으로

사람들을 처형장으로 실어나르던 트럭이 고장나며

죽음을 면하고 탈출하게 됩니다

 

 

[정치에 대한 열망]

인민군이 물러난 이후 김대중의 사업은 다시 번창합니다

 

청년 사장 김대중은 만약 종업원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방공호에서 출산해야했던 아내와 아이들이 보살펴줄 사람이 없어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던 것을 깨달았기에

 

사업을 하며

경제흐름 파악 , 적당한 모험 , 종업원들과 좋은관계 유지라는

세가지 원칙을 세우게 되었고

이후 김대중은 목포일보를 인수하여 사장으로 재직하기도 합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전쟁중에도 정신 못차리고

청년들을 국민방위군에 모집해놓곤 밥도 안주다 대규모로 굶겨죽이기도 했고

 

(국민방위군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1952년엔 정권연장을 위해

 

'부산정치파동'

 

을 일으켜 깡패들을 동원해 국회의사당을 포위하고

야당의원들을 공산혐의로 체포하는등

독재자가 되어가던 상황이었습니다

 

부산정치파동 , 국회의원들이 탄 버스를 연행하는 헌병들

 

이런 상황들을 지켜본 김대중은

다시금 정치에 대한 열망이 생겨났고

위정자들의 거짓말이 나라를 위기에 몰아가고 절망에 빠뜨린다는 사실에

스스로 정치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김대중의 결심

 

[계속되는 낙선]

1954년

30살의 김대중은

목포에서 처음으로 3대 민의원(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하는데

 

김대중의 첫 정치도전 , 3대민의원 출마시기 김대중(1954년)

 

자유당에 가기는 싫었고 야당 공천도 거절했기에

사장으로서 노동자들의 인심을 잃고있지 않았던 김대중은

노조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노조들이 무소속 후보인 김대중을 지지한다는 것을 자유당이 알자

자유당은 가만두지 않고 경찰을 동원해

노조간부를 체포 , 협박해 김대중이 아닌 다른 후보를 지지하게 했고

결국 김대중은 첫번째 낙선이 있었습니다

 

1958년 봄,

다시 국회의원선거가 펼쳐졌지만

당시 김대중은 야당 민주당에 입당한 상황에서

이미 민주당은 폭포에 다른 후보를 냈기에

결국 강원도 인제에서 출마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자유당의 협박과 후보등록 방해로 출마도 못하게 됬고

 

결국 김대중은 후보등록방해사건을 법원에 제소 ,

재판에서 승리해

선거결과는 무효처리가 되어 재선거가 실시되는데

 

그곳에 자유당 후보는 경찰서장 출신으로서

강원도에 아무 연고도 없는 김대중에게 표를 주면 안되고

김대중이 공산당이라는 흑색선전까지 해댔는데

 

 

최전방이자 군인의 도시답게

군인과 군인가족이 80% 였던 강원도 인제는

공산당 소리만 들어도 몸서리가 났기에

결국 김대중은 또다시 낙선해

세번째 낙선하게 됩니다

 

강원도 인제군

 

강원도 인제 선거 당시 거리유세하는 김대중(1959년)

 

[고생만 하다 죽은 아내]

국회의원 선거에서 3번이나 낙선하니

그동안 사업하며 번 돈은 다 사라지고

김대중 집안은 먹을거리도 없을 정도로 폭망하게 되었고

평생 부잣집 딸로 살아온 김대중 부인 역시

거듭되는 김대중 낙선에 친정재산을 탕진하며 생고생이 시작됩니다

 

좆망해있던 김대중에게

자유당에서는 돈과 자리를 줄테니 입당하라는 유혹을 했는데

당시 야당에서는 탄압과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자유당으로 입당하는 사람도 많았고

김대중 역시 가장으로서 그 유혹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았다 회고합니다

 

그러나 김대중은 무엇이 되기보단 의미있게 사는 것을 우선시했기에

유혹을 이겨냈고

 

부잣집 아들로서 보수적 성향이 있었던 김영삼이

자유당은 꺼림직했지만

형편과 동네 지주들의 권고로

시작부터 자유당에 입당해 초선의원이 되고

곧 자유당에 칼을 꽂고 민주당에 입당 ,

이후 다시 보수계 정당과 야합한 것과 달리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서 자수성가를 하고

끝까지 자유당에 입당하지 않고

평생 반대자 , 민주당원으로서 투쟁가의 삶을 우직하게 걸었던

김대중의 차이점이고

민주계 정당이 김영삼을 버리고

김대중을 유일한 근본으로 삼는 이유입니다

 

하여튼 ,

자유당과 손잡지 않은 폭망한 사업가 김대중 일가는

고통의 삶이 시작되었고

계속되는 낙선과 생활고때문에 아내 차용애가 앓기 시작했습니다

 

연거푸 낙선을 거듭할때도 용기를 북돋아 주던 차용애는

병든 몸으로 파산한 김대중을 지원하기 위해

미용실을 열었는데

 

(원래 193~40년대 미용실은

요즘 카페마냥

좀 사는

인텔리 , 부잣집 출신 여성들이 하는 거로 추정된다 하고

한국전쟁으로 전쟁미망인들이 폭증하자

생계수단으로 여성들이 미용업에 나섰기에

가난한 직업 , 억척여성의 이미지가 됬고

이렇게 이미지가 변화하던 시기 차용애도 남편을 내조하려 미용업에 뛰어듬)

 

병든몸으로 집에 미용도구를 갖춰놓고 미용실까지 운영하던 차용애는

과로에 독한 파마약품에 많이 노출되던게 쌓여 탈이 났고

 

어느날 가슴앓이를 심하게 하다

약을 먹고 잠들었는데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고

32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김대중이 회고한 차용애의 죽음>과로사에 가까운 병사

 

당시 김대중의 나이는 35살 ,

김대중은

아내를 가슴에 묻고 차용애가 낳은

두 어린아들 김홍일과 김홍업의 손을 잡고 피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큰아들 김홍일의 회고>아버님은 35살이셨는데

젊음과 그때까지 가지고 계시던 에너지를

몸속에서 모두 빼내듯이 그렇게 울고 우셨다.

나는 그때 열두살이었지만

아버님의 슬픔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국회의원되자마자 국회해산]

1960년 ,

드디어 썩고 썩은 이승만 정부는 완전히 폭발하게 되었고

4.19 혁명이 일어나 시민혁명으로 이승만 정부는 무너졌고

당시 민주당이 전국적으로 압승하던 시기여서

이제부터는 전국 어느 지역이던

민주당으로 나오면 당선인 개꿀인 상황이 되버렸는데

 

안타깝게도 김대중은 지역구도 자신과 전혀 연관없는 강원도였고

인지도도 없던 정치신인이었기에

젊은이들 위주로 인기는 있었지만

선거법이 개편되며 부재자 투표가 도입되며

강원도에 근무하던 청년군인들은 다들 부재자투표로 자기 고향에 표를 주게 되어

경험미숙한 청년 정치후보 김대중은 또다시 낙선합니다 (ㅠㅠ)

 

근데 김대중을 이기고 당선된 사람은

경찰서장 출신이었는데 3.15 부정선과와 관련있는 인사임이 밝혀져

의원자격을 박탈당했고

결국 보궐선거(재선거) 가 실시되어

김대중은 끝내 첫 당선의 기쁨을 얻었고

7년동안의 고생끝에 당선된 김대중은 좋은 정치를 하겠다는 의욕에 차있었습니다

 

당시 민주당 김대중은 정치적 노선은 장면계열에 속했는데

당시 민주당은

구파출신 대통령 윤보선과

신파출신 총리 장면으로 분열되있었고

 

윤보선(왼쪽) 대통령과 장면 총리

 

김영삼은 윤보선계의 구파라인 ,

김대중은 장면계의 신파라인으로서

 

김대중은 부인 차용애 친정이 천주교 집안이었고

장면과 같은 천주교 교인이었기에

명동성당에서 장면을 자주 만나고

깨끗한 이미지였던 장면과 인연을 맺고

장면 추천으로 민주당에 입당한 것이었습니다

 

하여튼 ,김대중은 1961년 5월 14일 당선이 확정되

민의원(국회의원) 당선증을 받아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김대중>나는 1961년 5월 14일 당선이 확정되어 ,

군선거관리위원회에서 민의원 당선증을 받았다.

그걸 받아 든 순간 이 한장의 증서를 위해

내내 고생만 하다가 이승을 하직한 아내 차용애가 떠올라

연민에 못이겨 나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제 곧 서울로 올라가면 이른바

'금배지' 를 받게 되리라

 

국회의원을 상징하는 '금배지' , 금배지를 달다=국회의원이 되다

 

근데 며칠만에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고

일으킨 주역은

김대중이 3년전 부정선거에 참담함을 느끼며

허심탄회하게 논의하려 찾아간 인제지역 사단장 박정희 ,

그사람이었습니다

 

5.16 군사정변 당시 박정희 소장

 

반란군은 5월 16일 해병대 , 공수단 , 제23사단에 출동해

서울에 입성했고

중앙청 , 서울중앙방속국 등 목표지점을 일거에 점령하고

혁명공약을 국내외에 선포했고

군사혁명위원회 포고령으로 전국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장면정권을 인수한다 밝혔습니다

 

 

김대중 입장에선

5.16은 날벼락이었고

순식간에 군사 쿠데타 세력은 국회와 정당을 해산시켜

국회의원들은 전부 실업자가 됬고

김대중은 박정희가 정권욕에서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보면서

또한 자신의 여당이었던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의 무능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정치활동정화법]

김대중은 그렇게 7년간 고생고생해서 겨우 국회의원이 되어

당선의 기쁨을 누린지 2일만에

국회가 해산당해버려 실업자가 되었고

집에 틀어박혀 알궂은 운명에 한탄하고 있었는데

곧바로 쿠데타 세력의 포고령에 의해

당대변인이자 국회의원 당선자 김대중은 구속되었고

김대중은 '구정치인' 으로 분류되어

박정희가 선언한 '정치활동정화법' 에 발을 묶여

정치활동이 규제되었고

 

정치활동을 위해서 신문사와 사업체를 정리하고 정계에 진출한 김대중에게는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되게 됩니다

 

아내없는 집에는 노령의 부모님과 어린 두아들 ,

심장병을 앓는 누이동생까지 셋집에서 살고 있었고

 

김대중 역시 군인들에게 3개월이나 붙들여가서

온갖 고초를 겪느라 몸도 만신창이가 된 상황이었고

김대중 인생은 온갖 고생이 많았지만

이때가 진짜 답도 없고 가장 헬이었던 시기였습니다

 

[이희호]

하여튼 김대중은 무혐의로 풀려났고

이후 아내 차용애를 잃은지 3년만인

1962년 5월 10일 이희호와 재혼합니다

 

김대중과 이희호 여사의 결혼

 

이희호는 김대중이 사업상 부산에 이주해 살고 있을 시기

독서서클에서 만나 알게 된 여성이었는데

이희호는 서울대 사범대학을 졸업한 이후

부산에서 대한여자청년단 국제부장으로 일하고 있었고

당시 사업가였던 김대중은 청년들과 독서 토론을 하며

여러 주제에 대해 토론하고 전쟁상황이나 국가장래에 대한

활발한 의견교환을 하곤 했는데

이희호와 의견일치가 되는 때가 많아서

더 가까이 지냈고

더러는 얘기에 취해서 부산 감천의 오솔길을 함께 걷기도 했습니다

 

 

휴전 직후 이희호는 미국에서 4년간 유학하고 귀국하여

YWCA 전국연합회의 총무이사를 맡아 일했는데

그무렵 김대중과 이희호는 우연히 다시 만나서

무척 자연스럽게 지내다가

그해 5월에 결혼합니다

 

<김대중>1962년 5월 10일에 나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였다.

지금껏 내 반려가 되어주고 또한 정치적 동지이며 친구이기도 한

이희호와 결혼한 것이다

 

이희호 여사 역시 다음과 같이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이희호>내가 결혼한다고 하자 주위 사람들이 놀랐다.

YWCA 동료이사가 놀랐을 뿐 아니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반대했다

 

'지금까지 결혼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그런 사람(애둘 아빠 , 무직청년 김대중) 하고 하느냐 ?'

 

하며 결사반대했다.

분명 지금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런 모험을 했는지 모르겠다

 

당시 김대중은 정치정화법때문에 정치활동도 못했고

'2일동안'

전직 국회의원이었을뿐

 

무직으로 장래 희망도 없었고

셋방살이를 하는 초라한 가장이었고

같이사는 가족은

몸안좋은 어머니 , 심장병 앓던 누이동생 ,

어린 사내아이가 둘이나 있었습니다

 

<이희호>물론 훗날 내 결혼상대자가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 후보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처음엔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가 결심한 이유는 역시 그 인물됨에 끌렸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곁으로 가기로 했다고

모두에게 설명한 기억이 난다

 

김대중은 실의와 절망에 빠져있을때 이희호를 만나 결혼함으로써

절망속에서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찾게 되었고

김대중에게 이희호는 아내이자 동지이고 정치적 동반자가 되었고

어려웠던 가정살림은 국내 의사면호 4호인 의사집안에서 태어난

이희호의 도움으로

어려운 가정살림을 꾸려갈 수 있었고

김대중은 새 부인의 격려로 새 출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희호>부산 피란 시절 우연히 부산 광복동의 한 다방에서 그의 가족을 본 적이 있다.

차용애씨는 그가 첫눈에 반해 결혼을 했다는 소문이 빈말이 아니구나 싶게 매력적이었다.

아이들은 또 얼마나 귀여웠던가.

나는 홍일이, 홍업이 두 형제의 어머니가 되면서 차용애씨에게 기도했다.

 

'당신이 사랑한 사람들을 내가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당시 홍일이는 배재중학교 2학년이고 홍업이는 이화여대 사범대학 부속중학교 1학년 이었다.

둘 다 예민한 사춘기 소년이었다.

나는 두 아이를 보면서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셨을때

그 또래였던 나의 남동생들

상호 , 철호 , 성호 생각을 많이 했다.

엄마가 얼마나 그리울까 싶었다.

 

하지만 나는 덤덤한 사람이어서 인위적으로 잘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이(이희호가 김대중과 낳은 유일한 자식 김홍걸)와 편애하지도 않았다.

남편은 정치 활동을 재개해서 무척 바쁘기도 했지만

아이들의 교육과 용돈 관리 모든 것을 내게 맡겼다.

바쁘게 바깥 활동을 하는 아내 대신 어머니에게 살림과 양육을 일임했을 법도 한데 ,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의 현명한 처사였다.

일상이 분주하고 피곤한 가운데서도 아이들은 새어머니와 모든 일상사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점차 가족이 되어 갔다. 

 

결혼 다음해 홍걸을 낳은 이희호 여사와 김대중 일가 가족사진

 

이희호는 

병원장 아버지 딸로서 매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고

 

'여자도 공부 많이 해야한다'

 

라는 어머니 뜻에따라

서울에 올라와

1936년 이화여자고동보틍학교 ,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고

이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다

전공을 옮겨 1950년 교육학 학사학위를 취득합니다

 

이화여고 시절의 이희호

 

부창부수라고

역시 이희호 역시 김대중과 같은 부류의 인물이었고

서울대 시절 여학생이었기에 여러 시선에도

총학생회 사범대학 대표 , 사범대 학도호국단 부단장을 맡았고

여성운동에도 관심이 많아

자신을 감추고 남편을 내조하려는 전통적 여성상에서 탈피하려 노력한

대한민국 1세대 '페미니스트' 였습니다

 

이희호는 18살때 어머니가 사망해 큰 충격을 받는데

이때 여성의 삶을 고민하다가

3가지 결심을 하는데

 

<이희호의 결심>

첫째 , 결혼하지 말자

둘째 , 건강하자

셋째 , 공부를 많이하자

 

였습니다

 

사회참여활동 , 여성운동에 관심이 많아

여성운동 , 페미니스트로 활동한 이희호는 

대한여자청년단에서 활동하던 무렵

1.4 후퇴로 피난민들을 배로 후송하기 위해 인천에 있던

해운회사 사장 김대중의 도움을 받았고

이때 처음 둘이 만났고

 

이희호는 대학생 공부 모임등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는데

김대중이 간헐적으로 참석하며 교우하게 됬고

곧 1954년 미국 유학 ,

귀국후 YMCA , 한국여성단체협의회 , 이화여대 사회사업학과 강사로

강단에 서는등 

ㄹㅇ 불꽃페미 1세대로 활동했고

 

1세대 여성운동가로 잘나가던 도중

사별한 김대중과 결혼하는데

여성계 선배들은 부잣집 딸에

미국유학을 다녀온 초엘리트 여성운동가 이희호가 너무 아깝다고

통탄했고

눈물흘리며 왜 소중한 인생을 초라한 삶에게 맡기냐 물었지만

이희호는 이후

김대중이 '잘생겨서' 결혼한 것이라 합니다

 

 

 

더 정확히는 원래 이희호 역시

사귀었던 서울대 출신 사회 , 민주화운동가 계훈제와 결혼할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계훈제가 폐결핵에 걸렸고

자신도 미국유학을 갔기에 관계가 깨졌고

각기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된 것이었고

 

하여튼 ,

이희호도 많은 리스크가 있었기에

엘리트 신여성 이희호가

고졸에 ㅆㅎㅌㅊ 남자를 만나서

엄청 손해를 감수했다는 썰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김대중은 이희호와 결혼 전에도

짧은 기간일지언정

엄연히 자수성가 사장 겸 국회의원 출신 고급백수였던 것은 팩트였고

그녀 역시 41세의 늦은 나이로 초혼한 것이었고

41세의 이희호는 2살연하의 39세 정치낭인 김대중을 잡아

이후 남편이 캐떡상할때까지 정치적 동지로서

내외적으로 엄청난 내조를 퍼부어주게 됩니다

 

(괜히 결혼은 결국 끼리끼리라는 말이 나오는것도 아니고

걍 누가 엄청 손해본거도 없고

수준 비슷비슷한 사람끼리 만난거임)

 

하여튼 ,

김대중은 이희호 도움으로 위기에서 탈출해

다시 새출발을 시작할 수 있었지만

결혼 10일만에 김대중은 반혁명 죄명으로 체포되었고

그렇기 이희호 여사는 거물 정치인 김대중의 아내가 되어

평생동안 옥바라지와 가택연금의 연금바라지 등을 도맡으며

김대중의 정치 가시밭길을 함께한 정치적 동지와 동반자가 됩니다

 

박정희에게 납치됬다 겨우 집에 돌아온 김대중에게 약발라주는 이희호

 

보수계의 국모급인 육영수(박정희 부인)와 쌍벽을 이루는 민주계의 국모급인 이희호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

민주당 정부의 부패를 명분으로 쿠데타를 감행한 군사정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민주당 정부의 부패와 똑같이 부패하기 시작했고

 

부패의 대명사인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나

썩어버렸던 윤보선-장면 민주당 정권 ,

박정희 군사정권이

 

성향이 셋다 다를지언정

셋다 똑같이 쓰레기 수준으로 부패한이유는 ,

셋의 공통점은 바로

견제할 권력이 없었고

다들 자신만의 정의를 외치지만 실제론 고만고만했다는 점입니다

 

부정부패척결을 외치고 일어나지만 다 똑같은 모습을 보인 한국정치인들

 

박정희 역시 민주당과 같이 견제세력이 없었고

고금의 말대로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하게 됩니다

 

또다시 과거를 반복한 보수계정당 , 박근혜 탄핵이후 자유한국당의 반성표어 , 한국일보

 

이 시기 김대중은 여러 시련을 겪으며

박정희 정부 , 군사정권의 동향을 예리하게 지켜보고 있었는데

 

불법으로 권력을 잡은 군인들답게

장면정권과는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 부패가 시작되고 있었고

정치자금을 모으기위해 재벌 , 대기업들 중심으로

사업이 커지고 정치자금이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회유]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금지되었던

1963년 1월 1일부터 정치활동이 재개됬는데

군복을 벗고 민간정치인으로 나선 박정희는

자신의 정당인 민주공화당 창당을 앞두고

구 정치인들을 회유 , 포섭하려 나섰고

 

민주공화당 사전조직에 나선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여러 채널을 동원해 여야의 '선별작업' 을 벌이며

김대중을 여당조직에 끌어넣으려는 명단에 넣었고

김종필이 보낸 중앙정보부의 정보부 국장 역시 김대중을 불러 위협했습니다

 

중앙정보부장시절 김종필 , 박정희의 브레인

 

<중앙정보부 국장>이번이 마지막 기회요 ,

만약 때를 놓치면 앞으로 다시 8년동안 묶일 것이오

그건 이미 예정된 수순이오

 

<김대중>그래도 할 수 없는 노릇이지요

 

<중앙정보부 국장>도대체 왜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는 거요 ?

다른 사람들은 다 협력하는데

 

<김대중>그들과 나는 다릅니다.

나는 민주당의 대변인이었습니다.

민주당 정권이야말로 가장 좋은 정부라고 국민들에게 말해왔지요.

그런데 어찌 손바닥 뒤집듯 돌아서서

공화당이 제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

 

설사 내가 돌아선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나를 가르켜 변절자라고 손가락질 할 테니까

당신들에게도 오히려 손해가 될 것이오.

그러니 나를 움직일 생각일랑 않는 게 좋을 거요.

 

그럼에도 그는 온갖 수단을 써서 김대중을 회유하려했지만

무산되버리자 그는 결국 심한 욕설과 함께

이제 곧 두고보라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사후 결국 친구가 된 김대중과 김종필 , 중앙일보

 

[야당 대변인]

민주당 신파계열이었던 김대중은

윤보선 등 민주당 구파계열이 추진하는 민정당에 참여하지 않고

민주당의 재건에 나섰고

박정희에 맞서는 대다수가 윤보선의 깃발아래 범야당으로 몰려드던 판국에

김대중은 남다르게

합헌정권인 민주당 정권이 군사쿠데타로 탈권당했으니

민주당을 재건하여 국민의 심판을 받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결국 신파출신들과 민주당 재건세력은

1963년 7월 18일 서울에서 창당대회를 열었고

김대중은 다시 민주당 대변인으로 임명됩니다

 

원래부터 말빨이 ㅆㅅㅌㅊ였던 김대중은

민주당 대변인으로서 뛰어난 공격력을 나타내주었고

어느날도 김대중은 박정희를 공략할 자료를 찾다가

그들이 헌법을 초월한 '국가재건특별조치법' 이란 것을 발견해

즉각 국민들에게 공개했고

여당은 크게 당황해서 부랴부랴 특별조치법을 개정하는 소란을 피우기도 했고

하여튼 박정희와 여당 간담을 서늘하게 한 김대중이었고

이때부터 박정희는 김대중을 미워하게 됩니다

 

<김대중>일설에 의하면 박대통령이 나를 평생 그토록 미워하게 된

최초의 계기가 바로 이사건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게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걸로 인해 내 존재가 그에게 깊이 각인된 것만은 분명했다

 

김대중은 명대변인 소리를 들으며

 

'말 잘하는 김대중'

 

이라는 소리도 이때부터 나왔고

 

선동력 ㅆㅅㅌㅊ였던 김대중

 

김대중은 말을 생각없이 내뱉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생각하고

항상 성명발표나 강연할때면 꼼꼼히 자료를 챙기고

문장을 정리해 요점을 밝히고 상대의 정곡을 찔렀고

김대중 반대당이나 김대중 정당에서도

이런 김대중의 논리정연하고 예리한 모습을 존경 , 두려워했고

자연히 카리스마가 형성되게 됩니다

 

 

민주당 말빨 아웃풋 최강자답게

 

김대중은

1분에 불과한 성명을 위해

5시간을 준비하는 것은 예삿일이었고

자료찾기 , 국정현안 살피기 등 자료조사도 꼼꼼해서

김대중이 국회 발언대에 설때마다

정부각료는 물론 여야의원 , 국회출입 기자들도

긴장하면서 김대중의 말을 경청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형성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공손한 모습의 의원들

 

민주당은 대선에서 박정희를 저지하기 위해

대(큰 정치)를 위한 마음으로 대통령 후보를 내지 않고

야당 단일대표로서 윤보선을 지지하기로 결정했고

김대중 역시 그래도 본질은 하나였던 윤보선 지원을 위해

당대변인 역할을 통해

군정 2년 7개월의 실정과 공화당 문제점을 파헤쳤고

획일적이고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던

박정희 정권의 자세를 비판하며

여러 활약을 하게됩니다

 

[동교동계]

점차 거물로 떠오르던 김대중은

1963년 4월 ,

국회의원 출마를 앞두고 찾는 손님들이 많아지자

셋방살이를 청산하고

동교동 국민주택 한 채를 전세내어 입주했고

1년뒤 은행 융자를 보태 이집을 구입해

김대중의 동교동집이 되었고

 

서울 서대문구 동교동은

그렇기 김대중의 나와바리가 되었고

김대중 인맥들은 자연히 동교동에 모여들며

 

'동교동계'

 

라고 불리게 되었고

김영삼이 사는 상도동의 '상도동계' 와 라이벌로 불리게 됩니다

 

이젠 원로가 된 동교동계 의원들

 

김대중은 부부동등 , 남녀평등을 주장하며

집안 명패에 남자 이름만 달던 관례와 달리

대문에 김대중 , 이희호 두 부부의 이름의 문패를 전부 붙였습니다

 

김대중-이희호 문패

 

당시 서울 변두리였던 동교동은

도로포장도 안된 변두리였지만

김포공항이 생기고 제2한강대교가 개통되 도로가 포장되며

마을같은 마을이 됬고

동교동은 그렇게

김대중 부부가 한때 경기도 일산과 청와대 살때를 빼곤

40여년동안 살아온 보금자리이자 한국 정치의 한 축이되었고

군사독재정권에겐 불온동네 딱지도 붙고

군사정권에 맞서던 야당의 계엄사령부처럼 인식됩니다

 

동교동 김대중 자택 봉쇄한 전두환 정권

 

6.10 항쟁때도 동교동에 갇혀있었던 김대중 부부

 

동교동 지붕에서 김대중 감금해제 요구를 외치는 시민

 

[목포에서 단 금배지]

하여튼 그러나 ,

대선에서 박정희에게 패배한 야권은 분열된 상태로

이해 1963년 11월 26일 6대 국회의원 총선에 대비했고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에서 다시 자신의 토향이었던

목포로 선거구를 옮겼고

 

핍박과 여러 사정으로 고향에서 떠나간 뒤

혈혈단신으로 강원도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는 점에

안쓰러움을 느낀 고향 , 목포사람들은

이때부턴 김대중을 적극 지지해주었고

 

당시 선거구도는 의외로 동서구도가 아닌

남북구도로서 박정희가 농촌에서 인기가 많고

윤보선이 서울 , 도시에서 인기가 많았는데

 

김대중은 당시 박정희가 인기 많았던

목포에 선거 나간게 불리하기도 했지만

공화당이 김대중 낙선목적으로

이승만 정권시절을 연상시키는 부정행위를 하다 걸리자

목포 민심이 들끓었고

 

결국 김대중은 22513표로

목포유지출신 공화당 차문석 10973표를 

2배차이로 캐쳐바르고 아주 무난하게 고향이나 다름없는 목포에서

당선되었습니다

 

드디어 국회에 진짜로 입성한

대한민국 6대국회의원 김대중 의원은

지난 잃어버린 세월을 보상이나 하듯이

의정활동에 전념했고

피끓는 목포시 민주당 국회의원

김대중 의원은 세치혀로 본격적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여당을 궁지에 몰아넣기 시작합니다

 

6대 국회의원 시기 대정부발언하는 김대중 의원 , 1966년

 

<라봉봉>김대중은 정치인 인생 평생동안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었는데

오늘날에도 김대중을 비꼬는 별명으로

 

'전라도 예수'

 

라는 표현이 있지만

이건 보통 전라도에서 너무 신격화시키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나온 조롱용 별명이긴 하지만

실제로 예수님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서

평생 고난의 길을 걸으셨듯이

 

김대중 역시 전라도 외딴 섬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교육을 받지 못했고 주류와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이고

그랬기에 실제로 김대중의 대권도전은 가난한 사람들의 열망과 희망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기도 했습니다

 

한국 지배엘리트라는 , 

소위말하는 주류계층들은

대체로 친일파 , 독재 권력의 수혜를 받은 사람들과 관계가 깊었고

이승만은 외교독립운동가출신이었지만 본인 스스로가 독재자가되어 군림해

친일청산 실패 등 첫단추를 잘못꿰고 시작한 대한민국이었고

 

2번째 대통령 윤보선 역시 독립운동가 출신이지만

집안이 1급친일파 , 친일파 핵심집안으로 친일 본가덕에

물정모르는 부잣집 도련님으로 자랐고

 

3번째 대통령 박정희는 가난한 농가출신이지만

결국 청년시기 권력에 타협해 일본군 장교가 되고

일제패망 이후 한국군에 입대한 후 쿠데타로 집권했고

 

4번째 대통령 최규하는

뚜렷한 친일행적은 없다지만

만주국 공무원을 지낸 전형적 친일관료 출신이었고

 

5번째 대통령 전두환은

말할 것도 없이 군부독재자 박정희의 핵심부하 ,

 

6번째 대통령 노태우는

말할 것도 없이 전두환의 핵심부하 ,

 

7번째 대통령 김영삼은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자유당 초선의원으로 무난한 정치생활 ,

이후 민주투사로 활약하나 이후

노태우 부하로 들어가 대통령이 된 인물이고

 

김대중 이전 대통령들은

모두가 다 제도권 고등교육을 받았고

독재권력에 결탁하거나 연관이 있는 인물이었고

김대중은 진짜 출신적으로 순수한 면이 있는

순수 한국형 지도자긴 했습니다

 

광복 이후에도 친일 자손들은 일류대학 , 외국유학등을 통해

대한민국 주류로 자리잡게 되었고

군 , 경은 물론 

학계와 예술계까지 마수를 뻗었는데

 

섬에서 서자로 태어나 주류와는 거리가 멀었던 김대중은

최초로 자수성가해서

독재권력에 타협하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통해 뚜벅뚜벅 대통령직에 오른 인물이기에

국내외적으로도 평가가 높을 수밖에 없는 인물입니다

 

조선 지배계급의 이상 , 조국근대화라는 소망이

풍운의 혁명가 김옥균에게 뭉쳐졌는데

김옥균은 실패하고 그 뜻을 박정희가 이뤘는데

 

조선 피지배계급의 이상 ,

민주 , 평등사회 건설이라는 소망은

가난한 농민출신 녹두장군 전봉준에게  뭉쳐졌다

전봉준 역시 실패하고 그 뜻을 김대중이 이뤘다 생각하고

 

가히 김대중은 전봉준이 못다이룬

전라도의 꿈이 되버린 인물이라 생각됩니다

 

박정희에겐 김옥균이 ,

김대중에겐 전봉준이 보이고

그들이 실패한 이상들이 수대가 지난 이후 이뤄진 것이고

 

또한 박정희와 김대중이 한계를 보였거나

실패한 이상들 역시

이후 세대가 이루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

차용애 역시 너무 슬픈 이야기라 생각되는데

김대중식 낭만을 거두고 냉정히 생각해보면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라는데

과연 집안이 무너져가는데도 정치에 투신하며 식솔들 고생시키는게

옳은 일일까라는 생각도 들고

오늘날에도 자기 집안도 건사하지 못하는 정치인이 많다는 것이 안타깝고

그렇기에 저는 그런 정치인들에게는 보통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 편입니다

 

그리고 ,

참 인연이니 운명이니 하는 것이란게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고

김대중과 이희호 여사 이야기를 보면

별생각 없이 스쳐갔던 사람과 결혼을 한다는것도 참 신기하고

역사나 사람일이라는게 참 신비로운 구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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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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