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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VS 박정희>

[도서관 다니는 국회의원]

[필리버스터]

[한일수교에 합리적 찬성]

[투쟁이 아닌 정책]

[신민당]

[목포의 선택]

[3선개헌 반대투쟁]

[40대 기수론]

[김대중 VS 김영삼]

[김대중 VS 박정희]

[장충단공원 유세]

[선거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

<라봉봉>

 

[도서관 다니는 국회의원]

김대중은 온갖 고생끝에

결국 고향 목포에 돌아와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이전 국회의원 당선 2일만에 5.16 군사정변으로

국회가 해산 , 국회의원직을 빼앗긴 이래

9년만에 고향과 다름없는 목포에서 당선되며

본격적으로 국회의원활동을 시작하게 되는것입니다

 

6대 국회시절 대정부발언하는 김대중 의원 , 1966년

 

목포시민이 선택한 국민의 대표가 된 김대중 의원은

본격적으로 박정희 정부와 맞서기 시작하였고

이때에도 다독 , 애독 성향은 변하지 않아

김대중 의원은 국회도서관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의원이 되었습니다

 

국회도서실(구 국회도서관) 개관식 , 1952년 2월 20일

 

 

김대중은 이전 야당 대변인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충분한 자료를 준비해서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정부 각료들을 상대로 

일문일답 형식의 질의전을 전개했고

 

그전까지 대충 서로 이야기하며

싸바싸바 넘어가는 형태의 국회였는데

김대중 의원의 예리한 질의와 구체적 수치의 자료제시를 하자

국무총리와 장관들이 쩔쩔매고

동료 의원들 사이에서도 김대중의 평가가 높아졌고

 

김대중 의원 , 1964년 6대국회시절

 

홀홀단신 세치혀로 여당과 정부를 궁지에 몰아넣는 모습에

박정희 대통령 역시 김대중 의원을 주목하게 됩니다

 

[필리버스터]

막 민주당 소속 초선이었던

(이전 당선 2일만에 의원직 강탈당한거 제외)

김대중 의원은

이때 한국 정치계 레전드 썰을 남기게 되는데

 

김대중 의원은

1964년 4월 20일(혹은 21일이라 함)

필리버스터 , 합법적 의사진행방해를 통해

야당 자유민주당 김준연 대표가 구속되는 것을

지연하는데 성공합니다

 

김준연 대표는 한일협정 비밀회담때

박정희 정권이 일본 정부에게

1억 3천만 달러를 미리 정치자금으로 받았다 폭로했는데

 

분노한 박정희 대통령은

지 잘못을 반성은 안하고 독재자답게

김준연 의원을 조져부리려 해부렸는데잉

박정희도 형식적으론 민주정을 따랐기 때문에

일단 의원 불체포 특권부터 뚫어야 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삼권분립에 의거해

국회의원은 수사기관에 체포를 당하지 않는 특권 ,

불체포 특권이 존재하고 있고

 

이 국회의원 불체포 특권을 무력화 시키려면

대통령 엄마 , 검사나 판사 할아버지가 와도 안되고

 

만약 문제가 있는 국회의원을 체포하려 할 경우

오직 국회에서 체포동의를 받아야 하고

이 의원이 우리 국회에서 나가리 시켜야할 놈인지

데리고 있어야 할 놈인지

국회의원끼리 투표를 해서 정한후

국회의원들의 동의가 있어야지만

의원불체포 특권이 뚫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

부패와 세금도둑의 대명사인 국회의원을

방탄국회의원으로 만들어버려

체포도 못한다는 그런

좀 쓰레기같은 법같아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이전 영국 의회민주주의가 처음 발달하던 시기

영국 국왕이 의원들을 체포하며 의회를 무산시키려 하자

의원들은 함부로 국왕이 의원들을 체포 , 구금할 수 없게

만든 것에서 유래가 된 유서깊은 제도이며

 

의원들이 '체포 멈춰 !' 하면 진짜 멈춰야함

 

오늘날에도 국회의원들이

입법부의 국민의 대표로서

행정부의 대통령이나

독재권력에 저항할 수 있고

자유로운 의원활동을 보장하는 법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박정희와 공화당은 6대 총선에서

175석중 110석을 가져간 초거대 여당이었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공화당 의원들을 데리고

6석따리 자유민주당의 김준연 의원을 조져버리려

김준연 의원의 구속동의안을

본회의에 상정해 구속시키려 했는데

 

분노한 김대중 의원은 

김준연 의원의 구속을 막기 위해서

'필리버스터' 에 돌입합니다

 

필리버스터란 의회에서

다수당이 수적 우세를 이용해

법안을 통과시키는 상황을 막기위해

소수당이 법률이 정한 범위내에서

의사진행을 방해하는 행위를 말하고

 

주로 무제한 토론을 통해

매우 긴 시간동안 발언하며

시간을 소모시켜서 표결을 고의적으로 방해하는 형태이며

필리버스터는

고상하게 말해서 무제한 토론 등으로

국회활동을 방해하는 거지

쉽게 말하면 국회에서 드러눕는거라 볼 수 있고

 

소수당이 쓸 수 있는 최후의 발악 ,

궁지에 몰린 쥐가 무는 격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김대중 의원은

 

<김대중>우리가 구속 동의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 우리 무덤을 파는 것이고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형무소에 가두는 것과 같다

 

라 하며 김준연 의원의 구속동의안 상정을 반대했고

국회 조사가 진행중인데

여당이 구속동의안을 낸 것에 대한 잘못과

도주나 증거인멸우려가 없는데도

구속하려는 것이 부당하다는 점을 지적했고

 

대한민국 최초의 필리버스터 김대중

 

여당과 국회의장은 김대중을 저지하고

구속동의안을 상정하려했지만

틈을 찾지 못했습니다

 

김대중 의원은 필리버스터로

국회에서 5시간 19분동안 오지게 오랫동안 발언을 했고

결국 이효상 의장은 이날 오후 8시가 넘어가면서

국회 본회의를 일방적으로 폐회시켰고

 

이날 발언은 차후 기네스북 국회 최장발언으로 기록되었고

이 일로 김대중은 주목받는 국회의원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다음날에도 여당과 이효상 의장은

구속동의안을 재상정하려 시도했지만

 

결국 야당의원들이 김준연의 구속 동의안을 몸으로 막아섰고

 

<당시 국회 속기록(의원들 발언을 타자로 글로 기록한것)>

장내소란 , 이게 뭐요 뭐요 ,

장관 내려와요 ,

법을 어기고 어떻게 국회를 운영할 수 있어요

 

결국 여당과 의장은 구속동의안 상정에 실패했고

김준연의 구속은 지연되게 되었습니다

 

필리버스터

 

[한일수교에 합리적 찬성]

김대중은 이때부터

정치 거물 , 대권후보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박정희와 진검승부를 실행하게 되는 것인데

 

특히 김대중 의원은 박정희 정권이

전국적 반발을 불러 일으킨

한일 국교정상화에서도 큰 마찰을 빚었습니다

 

굴욕외교였던 한일수교

 

김대중은 박정희의 한일국교정상화는 찬성하나

방법에 대해선 극렬 반대했고

명분도 , 실리도 잃은 회담이라는 지적을 했습니다

 

<김대중>나는 우선 일본에 청구하기로 했다는

3억달러에 불만이었다.

액수는 역대 정부가 주장하던 액수에도 크게 미치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 때는 20 달러였으며

장면 정권도 국교 정상회를 위한 조건으로

28 5천만 달러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국회에서 주장했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일본으로부터 단돈 1전도 받지 말자.

우리는 아직 가난한 나라지만 그런대로 살아갈 있다.

일본에게서는 진실한 사과를 받으면 된다.

그래서 과거를 청산한 다음 재출발하자

다만 우리가 1전도 받지 않는

대신 한일 무역을 1 1 공평하게 하자고 한다면

일본 국민들도 감동할 틀림없다.

무역 불균형의 시정은 우리로서는 실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국내 산업도 크게 부흥시킬 있는 계기가 것이다.

 

현재 한일 무역수지는

3 달러로도 메울 없을 정도로

우리측은 해마다 거액의 적자를 내고 있지 않는가 ?

3
달러의 무상 협력금도

10년에 걸쳐 매년 3천만 달러씩 나누어서 지불한다고 한다.

그러나 무역 불균형에 의해서

우리가 10 동안 손해보게 적자를 예상해 보면

오히려 30 달러가 넘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일본제국이 식민지 한국에서 수탈해간 자원과

조상들 핏값이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정도인데

무조건 거액을 받아내야 하는게 이치에 맞았기에

여기 발언에서 무슨 한푼도 받지 말자는 등

김대중의 말도안되는

지나친 이상주의적 성향이 드러나긴 하지만

 

김대중이 이전 정권도 20억 달러를 넘게 요구했는데

3억달러라는 똥값에 굴욕외교를 전개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은 아주 구체적 수치를 들며

논리정연한 반발이었고

당시 국민들의 심정이 모두 김대중과 같았고

이로인해 엄청나게 격렬한 한일수교 반대시위가 일어납니다

 

한일수교 반대시위하는 경기고 학생들 , 6.3항쟁

 

6.3항쟁 참여로 재판받는 고려대생 이명박 , 오른쪽에서 세번째

 

박정희의 한일수교는

엄연히 굴욕 , 사대외교였고

특히나 불과 얼마전까지 식민지배하며

한민족을 말살하려 했던 일본이었기에

3억달러로 보상금을 퉁치자는 것은 ,

그것도 국민 허락도 없이 대통령 혼자서 밀실에서

논의 , 통과시킨 것은 엄연히 독재이자 매국외교였습니다

 

밀실굴욕외교였던 한일협정

 

당시 한일관계나 사정들을 잘 모르던 미국은

빨리 아시아 정책으로 동아시아 반공망을 구축하기 위해

한일수교를 바라던 상황이었고

한국 역시

바로 옆나라 일본과 교류를 피할수만은 없던 상황이었기에

 

야당 역시 굴욕한일수교 당시

차라리 한일수교 무조건 반대보다는

타협안 제시 , 불이익 시정요구를 제안하거나 했으면

여야 모두 좀더 나은 정치적 소득이 있었을 것인데

 

대게 박정희 정부에

합리적 반발이나 타협책 제안보단

한일수교 무조건 반대에만 고수하며

오히려 한일외교를 부분찬성하는 김대중마저

사쿠라(내부의 적) , 공화당 돈받은놈 수준으로 여겼기도 했기에

야당도 별다른 답이 없었고

 

당시 유행했던 정치용어 사쿠라(내부의 적을 뜻하는 정치용어)

 

결국 박정희는 이번에도 또다시

국민과 야당의 반발을 뚫어버리고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극복한 것을 계기로

자신감을 얻어 권력을 확장시키게 됩니다

 

(이때부터 매번 이렇게 국민 반발을

힘으로 뚫어버리면 된다

생각한 박정희는

결국 유신독재자가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됨)

 

[투쟁이 아닌 정책]

야당 역시 마땅한 지도자 , 인물도 없었고

경제제일주의를 내걸며 국론을 통합해가며

강성하게 일어나던

박정희 앞에서 맥을 못추리고

움추려 들며 서로 분열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김대중은 야당 , 민주당 내에서도

유달리 '다른' 의원이었고

야당이 무조건 박정희 정부에 반대하며

오직투쟁 , 드러눕는 것을 기본으로 한게

초기 한국 야당사였다면

갑자기 나타난 김대중은 여당에 부분적 동의 ,

합리적 반대 , 강경한 정부비판을 하면서도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잊지 않는

합리적 , 온건 정치인의 모습을 보였고

 

평범한 야당 의원들과는 달랐던 김대중

 

죽거나 죽이거나 ,

투쟁과 투쟁 ,

모아니면 도만 나오던 한국정치계에서

 

진짜 '정책' 을 제시해버리는

김대중식 정치가 정착되는 것은 매우 어려웠지만

김대중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계속해서 넓혀갔습니다

 

(이때 민주당도 민주주의 수호는 커녕

진짜 꼴통정당이었고

당시 괜히 국민들이

나쁜놈이어도 그나마 능력이나 있던 박정희를 지지해준게 아님)

 

[신민당]

하여튼 ,

국회의원 김대중이 합리적 노선과 정책으로

자신의 입지를 늘려나가던 시기

 

대통령 박정희는 논란속에서도 계속해서 

경제발전을 성공시켜나가며

자신의 입지를 늘려가고 있었고

 

승승장구하는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공화당)의 초강세에

위협을 느낀 야당들은 연합을 결성했고

 

1965년 6월 14일

제1야당 민정당과 제2야당 민주당이 통합하며

민중당이 출범하게 됩니다

 

'말잘하는 의원'

 

이었던 김대중은

곧바로 민중당 대변인에 임명되었고

민중당 정책을 총괄하는 위치가 되었는데

 

민중당은 야권대통합에도 불구하고

구 민정 , 민주당 계열의 노선갈등으로

분열하던 상황이었습니다

 

민중당은 창당 2년도 안되

신민당으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김대중과 김영삼이 환상의 듀오로 활동하며 군부와 맞섰던 제1야당 신민당

 

김대중은 이런 상황에서도

박정희 정권의 실정을 파헤치면서

정책대안을 제시했고

국회도서관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공부하는 의원' 이었던 김대중은

차분한 의정활동과 노력을 기울여

야당의 중견 정치인으로 성장했고

거물화되기 시작합니다

 

[목포의 선택]

1967년 6월 8일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은 재선을 위해 다시 목포에서 출마했는데

대통령 박정희는 다른 지역에서 20명 여당후보가 낙선하더라도

김대중 한명만큼은 꼭 당선되지 안도록 하라고

중앙정보부 , 간부들을 모아놓은 회식자리에서

직접 지시할 정도로

김대중은 박정희의 집중타겟이었고

 

 

박정희 역시 무식한 군인 독재자이미지와 달리

실제로 지식인에 야망과 패기가 강한 인물이었기에

감각 , 정치본능이 뛰어난 인물이었고

장차 자신과 대선에서 맞서 싸우게 될 인물이

이미 이름알려진 구정치인 당수 등이 아니라

파릇파릇한 김대중이 될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상 , 통찰하고 있었기에

 

(당시도 김대중은 여야에서도 유별난 인물이었고

박정희 거수기에 불과한 여당의원 ,

박정희 무조건 반대에 불과한 야당의원에 비해

진짜 '정책' , '대안'을 제시할 줄 아는 인물이었고

역시 공화당내에서 유일하게 '정책' 을 제시할줄 알았던

박정희는 김대중을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었음)

 

여당이 좆될지언정

김대중은 무조건 낙마시키려 했습니다

 

아무리 봐도 앞으론 대중이가 젤 문제얌

 

그만큼 목포 국회의원 선거는 숙명의 라이벌

박정희와 김대중의 또다른 진검승부였고

중앙정치의 초대형 관심이 집중되는

사실상 미니대선급이었습니다

 

신민당 간부들은 김대중을 걱정하며

테러나 못볼꼴을 당할 수도 있기에

전국의 주목을 받는 서울에서 출마하거나

비례대표를 택하라는 권고를 했지만

김대중은 신민당 후보로서 목포에 결국 다시 나서게 되었고

박정희 역시 관권을 목포에 집중동원하며

눈엣가시 김대중 낙마에 애쓰게 됩니다

 

박정희의 김대중 사랑(?) 은 엄청났는데

박정희는 자신의 라이벌이 될만한 인물들은

중앙정보부를 통해

어떤 인물이던 빠지지 않고 감시 , 보고받았고

이중에서도 자신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들어오며

또한 일반 정치인들마냥

떼쓰기 , 감성적인 공격이 아닌

논리적이고 대안이 포함된

김대중의 공격을 가장 두려워하던 상황이었기에

김대중은 특별관리 대상이었습니다

 

박정희는 목포선거에서

김대중에 맞설 공화당 후보로

전남 진도출신이자

육군소장 출신 전 체신부(정보통신부의 옛말) 장관

김병삼을 내세웠고

 

박정희 폐하의 부르심을 받은 김병삼은

목포발전을 약속하며 유권자들에게 호소하게 됩니다

 

목포는 해방 전까지만 해도

전국 10대 도시일정도로 번창한 지방도시였지만

박정희 정권의 지역차별정책으로 크게 낙후됬고

김병삼과 공화당은 이점을 이용해

김대중이 당선되면 지역발전이 될 수 없지만

김병삼이 당선되면 크게 발전할 것이라 무지개빛 공약을 내걸며

목포시민들을 회유 , 협박하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또한 김대중을 극도로 견제하던 박정희 역시

선거기간동안 직접 두번이나 목포에 지원차 내려와며

공화당 후보 지원공약을 발표했고

김병삼이 '당선되면' 목포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국립대학을 세우겠다는 공약을 남발하게 됩니다

 

예비대선급이었던 당시 목포총선때 김대중과 목포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사진

 

대통령이 지나치게 선거에 개입하는건데

당시 선관위 역시 대충 상관없다 했고

그렇게 무법천지가 된 목포는

7대총선 중 최대 격전지가 되며

개싸움이 시작됩니다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결 실화냐 ? 가슴이 웅장해진다

 

목포시민들 역시

 

목포발전을 위해 박정희가 대놓고 지원해주는

김병삼을 찍어주어야 한다 

VS

차기 대통령감으로 성장하는 김대중을

우리가 키워주어야 한다

 

라는 여론으로 갈라졌고

 

당시 목포의 공식선거비용이 750만원 ,

김대중이 500만원 정도를 모은 것에 비해

공화당 측에서는 2억을 선거자금으로

쓰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그시기 중소도시 목포에서는 온갖 돈지랄이 시작되고

밤마다 각 가정에 돈봉투가 뿌려진다거나

경찰과 중앙정보부가 눈을 번득이고 있었기에

목포시민들 역시 겉으로는 전혀 김대중 후보를 지지한다고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과유불급 ,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했던가..

 

박정희 정부의 돈지랄과 강요가

너무 지나쳤기에

빈민 , 시장상인 , 학교선생님들까지

내심 김대중을 지지하고 있었고

목포시민들은 어떤 보복을 당할 지 알 수 없었기에

내놓고는 김대중을 지지하지 못했어도

마음으론 김대중을 지지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아무리 

돈을 뿌리고 지원을 해주어도

인간은 양심이 존재하고

정의감이 있기 마련이기에

결국 김대중이 똑똑하고 말잘한다는 여론이 모아졌고

대세가 조금씩 바뀌어갔는데

당시 목표선거는 거의 혁명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개표결과 김대중은 2000여표차이로 승리 ,

7대국회에 입성하며 재선에 성공합니다

 

7대 국회의원시절 목포에서 귀향 의정보고 강연을 하는 김대중 의원 , 1967년

 

거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는데

압도적인 부정선거속에서도

민의는 결국 김대중의 손을 들어주었고

생사에 기로에서 겨우 살아나며

목포에서 총력을 기울인 박정희를 격파하고 당선된 김대중은

또다시 대한민국 대표로서 7대 국회에 입성해

7대국회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증폭시켰고

대선주자화 됩니다

 

[3선개헌 반대투쟁]

한편 ,

대통령 박정희는 장기집권을 위해

3선개헌을 추진하고 있었고

 

이승만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기도하다가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쫓겨난지 9년만에

박정희 역시 그 수순을 밟아가고 있었습니다

 

7대 국회의원 김대중은 

박정희의 3선개헌 반대 최선봉에 섰고

김대중은 신민당과 재야 , 종교계 인사들로 구성된

3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주최한

전국유세에 참가해 지방도시를 돌아다니며

개헌반대 연설을 했고

김대중의 연설이 끝나면 젊은이들이 연단 주변으로 몰려와

사인 공세를 벌였고

김대중은 전국적인 스타정치인으로 부상했고

 

효창공원에서 3선개헌 반대연설하는 김대중 , 1969년

 

박정희의 욕심이 늘어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신인정치인 김대중의 인지도가

전국적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꼴이 되게 됩니다

 

[40대 기수론]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은 강행되고야 말았고

대세를 따른 언론사들 역시 박정희 정부와 유착하는

형태까지 보이며

3선개헌 저지에 실패한 후

무력화된 신민당은 점차 미궁으로 빠져들었고

 

이 과정에서 신민당 유진오 총재 역시 병이나서

일본으로 요양을 떠나는등

야당은 무력화되고 있었고

 

이런 시기 1969년 11월 8일

42세의 신민당 원내총무 김영삼은

갑자기

 

'40대 기수론'

 

을 제창하며

 

지금 박정희 하나도 못막고 상황도 좆망했는데

늙은 신민당 틀딱들 다 꺼지시고 40대 젊은 의원들이

한번 대통령 후보로 나서보자 주장해보았고

 

40대 기수론을 선언하는 김영삼 , 1969년 11월 8일

 

40대 기수론

 

그전까지 민주계 정당은 늘 나이든 대표가

강력하거나 젊은 보수계 정당에 맞서다가

패색이 있으면 병걸리거나 도망치고하는 모습을 보여왔기에

 

젊고 패기있던 김영삼의 주장은 매우 신선하게 받아들여졌고

결국 신민당에서도

이미 다 망했는데 에라모르겠다 싶어서

OK 하며 김영삼이 대선후보로 나서는 것을 허락해주었는데

이때 40대의 김대중 역시 40대 기수론에 편승하며

대선후보로 출마를 선언합니다

 

40대 젊은 청년 의원

김영삼과 김대중의 대선도전은

신민당 내에서 큰 모험이었는데

당시 신민당은 늙다리 정당으로서

그렇다고 지혜나 경륜도 없는 찐따틀딱정당이미지였고

 

오히려 박정희의 공화당이 젊은 인사들이 많아

진보 , 혁명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계속 얻어맞고 폭망하던 신민당은 결국

젊은 김영삼과 김대중을 대선후보로 올리는 모험을 해보았고

신민당 구파계열의 김영삼과

신민당 신파계열의 김대중은 그렇게 대선후보자리를 두고

당내 경선을 시작합니다

 

[김대중 VS 김영삼]

김영삼은 (김대중보다) 대중적 인기는 낮았지만

젊었음에도 당내에서도 고인물이었기에

원내 지지그룹을 확보해놓은 상황이었고

 

김대중은 민중적 인기는 높았지만

몇차례 낙선과 견제 등으로 뒤늦게 원내 진출한 것이

약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워낙 말빨이 ㅆㅅㅌㅊ였기에

김대중이 연설을 할때마다

사람들은

 

'이번 선거에 김대중을 내보내면 해볼만 할 것 같다'

 

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일단 당시 신민당도 당해체상황까지 몰리던

워낙 위급상황이었기에

김영삼이던 김대중이던 빨리 아무나 당선되서

정권교체를 하는 것만이 가장 중요한 희망이라 생각했습니다

 

일단 당시 신민당내 주류는 김영삼이었고

김대중은 지원세력이나 변변한 학력도 없고

그저 '능력' 만 있었기에

사람들은 신민당은 김영삼을 대권후보로 올릴 것으로

예측했는데

지명대회결과 결국 능력이 있는

김대중이 역전승하며 판세가 뒤바뀌었고

김대중은 대통령 후보에 지명 ,

박정희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해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이 제일 견제하던

야당의원 김대중과 대선에서 맞붙게 됩니다

 

신민당 대선후보 지명전에서 김영삼에게 승리한 후 환호하는 김대중

 

김대중은 대선출마선언 당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김대중>우리가 만일 1971년에

또다시 박정희씨의 당선을 허용한다면

이 나라는 영원히 선거 없는 총통시대가 올 것이다

 

비록 지지기반이 취약한 약점이 있었지만

이미 이전부터 출중한 논리와 언변으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은 김대중이었고

가장 중요한 국민적 지지가 높다는 점 ,

경선에서 패배한 김영삼 역시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김대중 지원에 노력했다는 점 등

김대중의 여러 컴플렉스는 결국 '능력' 으로 극복됩니다

 

경선에서 승리한 김대중에게 축하인사하는 김영삼

 

라이벌이기 전 동지였던 김대중과 김영삼

 

[김대중 VS 박정희]

결국 김대중은 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며

상대 후보에 대한 비난보다 자신의 정책과 대안을 제시하려 했고

기자회견에서 5개의 정책과제를 제시합니다

 

<김대중의 5대 정책과제>

1.정치적 국민총화(총화=전체의 화합)

2.대중경제

3.사회개혁

4.정예국방

5.민족외교

 

김대중은 자신의 이름을 딴 말이자

중의적 의미인

 

'대중'

 

이라는 민중을 뜻하는 말을 평생동안 즐겨 사용했고

이때에도 '대중의 시대' 를 열겠다고 선언합니다

 

이때에도 치졸왕 박정희는

김대중의 유세를 방해하기 위해

관권으로 찍어누르려했고

김대중이 김포에서 강연할때에도

가죽잠바를 입은 괴한 5명이 있었는데 권총을 찬자도 있어 보니

김포경찰서 경찰관이었고

 

박정희는 노골적으로 공권력을 사용해

초강세를 보이는 야당후보 김대중을 탄압합니다

 

7대대선은 바로

대한민국사 대통령계 끝판왕인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결 ,

둘다 어디가서 지적능력으로 꿀려본적 없는 인물들이었기에

둘의 대결은 마치 방패와 창의 대결처럼

매우 심오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자강두천(자존심 강한 두 천재의 대결) 급이었던 7대대선 포스터

 

둘의 선거유세 최절정은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벌어진 두 후보의 유세전이었습니다

 

장충단 유세의 김대중

 

장충단 유세의 박정희

 

박정희 후보는 

 

'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찍어달라고 나서지 않겠다'

 

선언했고

 

김대중 후보는

 

'이번에 정권교체를 이루지 못하면

총통제가 실시될 것'

 

이라 단언하며

국민적 관심이 커져갔고

 

이시기 김대중은 박정희가 대만에 사람을 보내서

총통제 연구를 해온 정보를 알고 있었습니다

 

(박정희가 영향을 받은 독일 히틀러 총통은 말할거도 없고

대만은 장제스가 총통으로 수십년해먹음)

 

이후 둘의 말은 둘다 현실이 되고

박정희는 언행일치대로 이후 진짜 선거제도를 없애버려서

더이상 국민들에게 표를 찍어달라 나서지 않게 되었고

영구집권을 시작합니다

 

[장충단공원 유세]

김대중의 서울 장충단공원 유세에는

정부의 갖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100만 인파가 모여들었고

이날 박정희는 시민들이 김대중 유세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예비군 소집 , 고궁과 공원 무료개방 , 극장 무료개방 등

온갖 치졸한 방해공작을 했지만

박정희 독재에 눌린 민중들은 김대중을 희망이라 여기고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박정희 역시 그런 파도같은 100만 민심을 막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사자후 하는 김대중

 

 

장충단 100만인파 앞에 포효하는 김대중

 

비록 ,

좀 민주나 진보계열이 인구수 부풀리기하는게

하루이틀일이 아니라지만

이땐 ㄹㅇ 엄청나게 많이 왔다 하고

일본신문은 70만명 , 미국신문은 90만명이라 보도했고

그만큼 어마어마하게 왔고 그만큼

박정희를 반대하고 김대중에게 희망을 건

민심이 어마어마했다는 뜻이고

충격적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서울 뿐만 아닌 김대중의 전국주요도시 연설회에서도

수십만명 청중이 모여들었고

부산이나 박정희 고향인 대구 등 영남지방도 마찬가지였고

전국적 김대중 열풍이 일어났고

 

당시 지방유세하는 김대중

 

여당인 공화당에서는 김대중에 대해

용공조작(공산당 용인 , 빨갱이로 몰아넣기) 한다거나

중상모략 , 김대중 출신과 가계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트렸고

가장 무시무시한건 노골적 지역감정을 조장합니다

 

국회의장 이효상은

 

'신라 천년만에 다시 나타난 박정희 후보를 뽑아서

경상도 정권을 세우자'

 

며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촉발시켰고

 

신라금관 앞의 박정희 대통령 ,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가 경상도가 본거지였던 신라로 지역감정을 일으킨건 큰 실책이었음

 

이에 맞서 점차 전라도 역시 김대중 지키기모드로 돌입하고

점차 한국정치는 이전까지는 없었던

전라도 VS 경상도 등 뿌리깊은 지역감정의

악연이 시작됩니다

 

[선거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

뜨거운 관심속에

1971년 4월 27일 ,

우여곡절끝에 치러진 7대대선은

투표 당일에도 온갖 부정선거 시비가 일어났고

박정희는 634만여표 ,

김대중은 539만여표를 얻으며

 

박정희는 김대중을 94만여표 차이로 겨우 앞질렀고

특히 서울에선 박정희 80여만표 ,

김대중 119만여표를 얻어 박정희는 수도 한복판에서

김대중에게 처참히 털렸고

그나마 민도와 경제수준이 높은 서울은

투개표 부정이 쉽지가 않기도 했습니다

 

김대중은

 

'선거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

 

라는 말이 나올만큼

박정희의 어마어마한 규모의 부정선거로

패배의 쓴잔을 맛보았고

 

온갖 맵핵키고 돈치트 쓰고 대항하는 박정희를

그냥 홀로 갈고닦은 순수 실력으로 맞선 김대중은

시작부터 이길 수 없는 게임이기도 했습니다

 

동서구도였던 6대대선

 

또한 박정희 역시 박정희대로

자존심 상해서

그리 돈을 오지게 쏟아부었는데도

근접하게 김대중에게 승리한 것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고는

곧바로 유신독재를 준비하게 됩니다

 

 

선거 2일후인

4월 29일 김대중은 성명을 통해

 

<김대중>공화당 정권이 600만표 이상 조작했으며 ,

부정선거를 묵인할 수 없다.

하느님과 양심 앞에 부끄럼 없이 싸웠다.

어처구니 없게도 대통령후보인 나와 아내가 찍은 표조차

무효가 처리되는 ,

그런 가공할 부정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하고도

94만여표 차이밖에 나지 않자

박정희 대통령이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던 것은

혹시 아니었지는지...

 

<라봉봉>김대중과 박정희의 대결은

가슴이 웅장해지는 세기의 대결이었고

거의 전성기 바르셀로나 VS 맨체스터유나이티드급의 레전드매치였습니다

 

김대중은 박정희처럼 별다른 권력가나 인맥줄도 없는 상황이었고

그런 40대의 청년에 불과했던 그가

박정희 턱밑까지 위협할 수 있는 계기는

바로 부지런한 독서였고

담배는 백해무익하다지만

독서는 백익무해하다 할 정도로

다다익선 , 많이 읽으면 많이 읽을수록 좋은게 책이고

다독가인 김대중은 현재까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모범적인 국회의원이었다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독서인들의 로망이 원래 국립중앙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인데

독서인인 저도 옛날에 국회도서관 가보려다가 집에서 너무 멀어서

지역도서관에서 만족했는데

김대중은 정말 대단한 인물이고

지금 국회의원들이 맨날

논란만 일으키고 빻은 소리만 하는 이유는 극심한 독서력 부족이라 생각되기에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 정치인들이 제발 독서왕이었던 김대중의 반만 닮았으면 하는 소망입니다

 

또한 아무리 금권정치 , 돈으로 표를 매수해온다 한들

결국 진심과 양심이 승리한다는 것을 김대중은 직접 보여주었고

 

제가 개인적으로 무슨 쟁 , 경쟁 전쟁 투쟁 이런 쟁으로 끝나는걸

극심히 싫어하기에

김대중은

정치인으로서 투쟁이 아닌 진짜 생산적인 정책을 제시한

'정치가' 였으며

김대중은 당시 똑똑했던 박정희에 맞설 유일한 대안이자

시대의 귀감이었다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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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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