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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VS 유신독재>

[김대중 VS 박정희]

[의문의 교통사고]

[10월 유신]

[김대중 납치사건]

[가택연금]

[장준하 의문사 사건]

[유신의 어둠]

[진주교도소]

[10.26 사건]

<라봉봉>

 

[김대중 VS 박정희]

김대중은 그렇게 7대 대선에 박정희에 맞서

야당대선후보로 나왔는데

 

대중적 인기는 높았지만

김영삼에 비해

신민당 당권도 장악하지 못한 상황이라

홀로 불리한 선거를 전개하였고

압도적인 자금과 물량으로 승부를 본

박정희 정권의 조직적 불법부정선거의 벽을 넘지 못하고

대선에서 패배했고

 

그럼에도 그렇게 불리한 상황에서도

540만표를 받으며

박정희가 받은 630만표와 겨우 90만표 차이밖에 없었고

부정투개표가 쉽지 않은 수도 서울에선 김대중이 초강세였습니다

 

도토리 키재기 수준으로 삐까떴던 김대중과 박정희의 대결

 

즉 박정희는 온갖 맵핵 , 치트키까지 다 썼음에도

김대중을 턱걸이로 이겼고

부정선거가 없었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기에

김대중 역시 '선거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 는 말을 하였고

 

박정희는 민심이 자신에게 떠났기에

더이상 정상적인 선거로 집권할 수 없음을 알고

유신독재를 준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박정희의 질투

 

[의문의 교통사고]

일단 선거에서 패배했음에도 민심이 김대중이라는 것을 파악한 신민당은

8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승리하여

박정희를 견제하고 4년후를 대비해야한다는 것을 생각했고

 

언론 역시 신민당이 낡은 정치체계를 청산해야하고

김대중 같은 국민적 지지를 받는 참신한 인사 ,

젊은 40대 인사들이 당권을 맡아야한다고 떠들었습니다

 

박정희도 두려워할정도로 거물로 성장한

신민당 슈퍼스터 김대중은 8대 국회의원 총선때

당의 요청을 받아 비례대표 2번으로 등록한 후

전국을 한바퀴 순회하며 유세지원을 나갔고

마지막에 목포에 들리러 했습니다

 

<김대중 부인 이희호>

남편은 대통령 선거 때도 초인적인 강행군을 했는데 ,

틈도 없이 다시 국회의원 선거 운동에 나섰어요.

당직도 없이 백의종군했지요.

몸이 상하지 않을까 ,

테러를 당하진 않을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김대중은 전국을 돌며 박정희의 개헌음모를 막으려면

야당을 살려야한다 역설하였고

이번에도 정부가 부정선거를 되풀이하면

4.19 혁명 시즌2 찍어야할것이라고 사력을 다해 외쳤고

공화당은 김대중의 시민혁명 궐기 경고에 밀려

대선때처럼 대놓고 부정을 저지르지는 못하는 상황이었고

신민당 열세지역도 김대중이 지나가면

엄청난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판세가 뒤바뀔정도로

인기짱 김대중은 화염과 폭풍을 몰고다녔습니다

 

김대중의 심야유세를 보기위해 횃불을 든 서울 서대문 시민들

 

그런데 ,

8대 국회의원 총선거 하루전인

1971년 5월 24일

김대중은 상경길에 목포와 광주의 무안군 지점에서

느닷없이 자동차 사고가 났습니다

 

김대중이 탄 차가 도로를 달리던 중

신혼부부 일행 다섯명을 태운 택시 한대가

김대중을 보려고 끼어들었고

이후 차가 무안국도에 접어들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때

맞은편에서 14톤 트럭이 달려오다 느닷없이 급커브를 틀며

중앙선을 넘어 돌진했고

 

 

운전사는 달려드는 트럭에 깜짝놀라 사정없이 핸들을 돌렸고

그순간 대형트럭은 김대중 탄 차의 뒤쪽 트렁크를 들이박았고

김대중이 탄 차는 공중으로 튕겨 올랐다 떨어집니다

 

 

김대중이 탄 차는 가까스로 트럭을 피했지만

뒤딸아오던 택시는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 ,

세사람이 즉사했고

 

김대중은 이 사고로 골반 관절을 다치고 오른손에 깊은 상처를 입어

평생 절름발이 , 지팡이 신세를 지게 됩니다

 

김대중 트럭사고

 

천만다행으로 살아났지만 이후가 더 문제였는데

바로전 대선에도 야당 대표로 나선 이런 거물 정치인이

죽을뻔한 대형사고를 당했는데도

중앙정보부가 보도를 틀어막어 언론보도는

경향신문 1단기사가 전부였고

검사는 트럭운전자를 살인혐의로 조사하자

즉시 다른검사로 교체되고

사건은 단순 교통처리로 끝났고

세사람이나 죽었는데 운전자는 구속도 안됬고

 

트럭소유자는 공화당 국회의원 아들이었기에

교통사고로 위장해 박정희의 가장 큰 정적을 죽이려

의심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측의 주장에 의거해 기술했으며

여러 구체적 증거와 함께 진짜 우발적 사고였다는 말도 있는데

박정희 정적들이 의문사 , 테러당한게 한두개가 아니고

김대중은 이후 박정희에게 일본에서 납치까지 당했기에

충분히 의심할 상황이었고 당시 공포에 질려 과장됬을 가능성도 있음)

 

박정희는 2년전 ,

1969년에도 김영삼에게 초산테러를 한 전력이 있었기에

김대중도 죽을뻔한게 박정희 소행이 심각하게 의심되는 상황이었고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의 신변위협을 느끼며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해 평생 오른쪽 다리를 절게 됩니다

 

김대중을 상징하는 '지팡이'

 

응급수술을 마친 김대중일행은 서둘러 열차를 타고

오른쪽 팔목에 붕대를 감고 이마에 피멍이 솟은 채로

개찰구에 빠져나와

영등포앞 유세장으로 향했습니다

 

김대중이 나타나자 1만여명의 청중들이 천둥같은 함성을 질렀고

김대중은 청중들 앞에서 사고 경위를 설명한 뒤 열변을 토했습니다

 

<김대중>나는 쓰러지면 열한 일어나고 ,

쓰러지면 일어나서

땅에 민주주의를 세우고 대중이 잘사는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교통사고 이후 깁스한채 영등포에서 열변을 토하는 김대중

 

김대중이 팔을 다친채 연설하는 장면은

투표일 아침신문에 일제히 실렸고

김대중의 부상투혼은 표심에 영향을 주어

신민당은 대약진하여

7대 국회보다 의석수가 2배로 불어났고

204석가운데 89석을 얻으며

113석을 얻은 공화당 가슴팍까지 치고 올라오게 됩니다

 

신민당의 승리를 이끈 김대중

 

또한 가장 심각한게

서울 전체 19곳중 18곳에서 신민당이 승리했고

관권과 부정이 활개치던 당시 사정을 고려하면

사실상 야당의 대승이었고

독재자 박정희는 슬슬 사형대로 올라갈 위기감이 감돌게 됩니다

 

 

[10월 유신]

박정희는 김대중을 오지게 질투하기 시작했고

김대중을 그대로 두고서는

정상적 선거방식으로 겨뤄서는 정권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고

그의 마지막 발악이자 정치쿠데타 , 

10월 유신을 일으키게 됩니다

 

김대중은 1972년 10월 13일 ,

9일간일정으로 고관절 치료차 일본으로 갔는데

김대중이 대한민국을 떠나자마자

 

10월 17일 박정희는 기습적으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합니다

 

박정희는 이날 군대를 동원해 헌법기능을 마비시키고

야당의 정치활동을 전면 봉쇄하는 친위쿠데타를 감행했고

이날 저녁 7시부터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해산 , 정당 및 정치활동 중지 , 비상국무회의 설치 등

비상조치를 단행했고

반대운동이 금지된 일방적 개헌안의 국민투표를 펼쳐

91.5% 에 이르는 찬성을 얻어 유신헌법을 통과시켰고

임기 6년의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으로 선출토록하고

국회의원 3분의 1도 이곳에서 자체적으로 뽑는

비민주적 유신독재를 시작하게 됩니다

 

10월 유신

 

박정희는 이때부터 대통령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그냥 자기가 선거없이 죽을때까지 해먹겠다는 의미였으며

김대중이 한국을 떠난후 며칠만에 감행한 것을 보면

우연일 수도 있고 박정희의 셈법일수도 있지만

그만큼 박정희가 김대중을 질투하고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총통이 된 박정희

 

김대중은 일본에서 고관절 치료를 받고 있는데

이런 급작스런 상황이 되자

혼자서 해외망명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비상계엄으로 언론이 통제되고

특히 김대중에 관한 보도는 일체 금기시 되었고

일본에서 미국으로 거처를 옮겨

유신독재를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합니다

 

[김대중 납치사건]

1973년 7월 10일

김대중은 미국에서 일본으로 재입국했는데

대한민국 중앙정보부는

주일파견관에 김대중 집중동향감시 지침을 하달습니다

 

1973년 8월 8일

무더운 날의 도쿄의 오전 8시 ,

김대중은 도쿄 그랜드팔레스호텔에서

통일당 당수와 점심약속이 있어 택시를 타고 팔레스 호텔로 갔는데

 

11시경에 호텔에 도착한 김대중은

경호원과 22층까지 엘레베이터로 올라갔고

사람을 만나 2212호실에서 대화를 나누며 점심을 먹고

김대중은 오후 1시 15분경 자민당 의원과 만나기로 되었기에

먼저 방에서 나왔는데

 

도쿄 그랜드 팔레스 호텔

 

그때 2210호와 2215호에서 건장한 남자 6명이 뛰쳐나와

김대중의 무릎뼈와 턱을 치고

마취수건으로 입을 틀어 막았고

김대중은 크게 소리를 질렀고

괴한들은 김대중의 입을 막고

2210호실로 끌고갔고

김대중에게 마취제를 적신 손수건을 코에 대고 눌렀는데

마취제가 그리 독하지는 않아 김대중은 완전히 정신을 잃지는 않았고

괴한들은 김대중에게

 

<괴한>조용히해라.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하고 한국어로 협박합니다

 

 

김대중은 곧 엘레베이터에 태워져 내려져서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에 실렸고

괴한들은 김대중의 얼굴을 상의로 씌우고

헝겊조각으로 폭행과 마취를 거듭하며

어딘가로 끌고갑니다

 

호텔 주차장을 빠져나온 납치차량은

5~6시간을 계속 달려

오후 7~8시경 저녁 오사카 근처의 큰 차고같은 건물에 도착했고

김대중은 팬티와 런닝만 빼고 전부 벗겨진 상태로

양복 주머니에 있던 현금 20만엔과 신분증명서 , 로렉스 시계들을

삥뜯기게 되었고

 

(박정희 부하들도 그와중에 금품갈취ㅋㅋ)

 

 

이후 다시 끈으로 묶여 얼굴과 코만 남기고

강력테이프로 몸전체를 둘둘감고

방안에 쳐박히게 됩니다

 

이후 김대중은 다시 자동차에 태워져서

1시간이상가다 바닷가에 이르렀고

보자기에 씌워진후 모터보트에 옮겨져

1시간쯤 가다가 큰 배에 옮겨졌고

 

김대중은 바다에 던져질것이라 생각해

각오를 하며 십자가를 그었더니

요원들에게 폭행당했습니다

 

한편 당시 일본에선 난리가 났는데

대한민국 거물정치인 김대중이 도쿄 호텔한복판에서 납치되자

이날 오후부터 일본경찰과 언론에 곧 알려져

일본기자들이 그랜드팔레스호텔에 찾아와 취재를 벌였고

 

곧바로 미국정부에도 알려졌고

필립 하비브 주한미국대사는

곧바로 청와대의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강력희 항의했고

미국 CIA 서울지부장 도널드 그레그도

직접 중앙정보부에 전화를 걸어

 

'김대중을 죽이지 말라'

 

고 경고합니다

 

한편 그러던 와중 김대중은

묶이고 입에 재갈을 물린채로

오른팔과 왼쪽 손목에는 30~40KG 추를 단 상황이었고

 

김대중은 속으로 바닷속에 던져지면 고통이 어떨까

상어에게 먹힐까 등 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

김대중의 눈앞에 돌연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ㄷㄷ)

 

김대중은 기도할 생각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매달렸습니다

 

<김대중>살려 주십시오..

아직 제게는 할 일이 남아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을 위해서 하지 않으면 안될 일들이 있습니다.

죽으면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게 됩니다.

구해주십시오

 

하고 매달렸고

 

예수님의 사랑

 

그말이 끝남과 동시에 감고있던 눈에 붉은 빛이 번쩍 비쳤고

선실 안 사람들은

 

'비행기다'

 

하고 동시에 일제이 갑판으로 뛰쳐나갑니다

 

비행기 엔진소리 같은 소리가 터져나오며

미친듯이 배가 요동쳤고

 

(미국이 보낸 비행기라 함)

 

이후 배는 10여시간 달렸고

항해를 계속해 11일 오전 한국연안에 이르러

모터보트에 옮겨 상륙했고

상륙전 배위에서 의사가 와서 김대중을 치료해주었고

혈압이 낮다고 혈압 올려주는 주사 두 대 놓아줍니다

 

김대중은 우여곡절끝에 대한민국에 내려졌고

육지에서 자동차를 두번 갈아타고

어느집에 도착해서 집이 누추하지만 며칠 있으라는 말을 들었고

김대중은 납치 6일만인 13일 오후 8시경

서울 동교동 자택근처에 풀려났고

납치범들은 사라졌습니다

 

김대중이 나타나자

집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외치며 우르르 대문으로 몰려갔습니다

 

'오셨어요 !'

 

'의원님이 오셨어요 !'

 

김대중은 안방에 들어서며 이희호의 손을 잡고

맨 먼저 예수님을 보았다했고

김대중 부부와 사람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꿇어 엎드려

감사기도를 바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집에 돌아와 눈물흘리는 김대중

 

김대중 납치사건

 

김대중을 납치한 것은 중앙정보부였고

박정희의 지령이었으며

태평양 바닷속에서 수장될뻔하다 미국의 경고로 살아난 사건이었으며

역사에 '김대중 납치사건' 으로 기억되게 되었고

이는 박정희 정권 몰락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이전부터 의심쩍은 짓을 한 박정희 , 중앙정보부였지만

이번만큼은 누가봐도 중앙정보부짓이었고

더 문제인건 대한민국내에서 일어난게 아닌

외국인 일본수도 한복판에서 일어난 국제분쟁까지 갈 수 있는

심각한 사건이었으며

 

박정희는 김대중 납치의 한국정부 부인설을 완강히 부인했지만

여러 증거등에 일본내에서는 주권침해에 대한 비난여론이 대두되

한일관계가 극도로 악회됩니다

 

박정희는 이것을 덮으려 숙적 일본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안겨주고 국무총리를 보내 사죄토록 했고

자신의 라이벌을 납치하려 일어난

민족사적 굴욕과 동시에 극심한 국고낭비였습니다

 

[가택연금]

피해자였던 김대중은 납치이후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급속도록 움츠려들었고

박정희가 암살당하는 1979년까지 6년여동안

본인 집에서 가택연금의 상황이 되었고

 

박정희 정권시절 시위벌이다 경찰연행되는 김대중

 

평생 꾸준히 함께한 가택연금 , 가택연금 당시 김대중 사진으로서 달력에 X표시가 포인트(ㅋㅋ)

 

마포경찰서장이 동교동 자택에 찾아와

방문자들을 모두 쫓아내고 방하나를 차지해

사복경찰을 상주시키고

형제와 친인척들까지 출입을 금지시키고

아무도 못만나게하고 전화도 받지 못하게 했고

김대중집은 말이 집이지 사실상 감옥이 되었습니다

 

박정희와 중앙정보부는 김대중을 거의

알카포네 취급을 해주었는데

집에 감시하는 초소 2개를 설치시키고

필요에 따라 감시요원 2~300명 , 어떤때는 3천명에 이르렀고

김대중에게 집에 도둑들 걱정이나 안전걱정 없는

ㅆㅅㅌㅊ 대우를 해주게 됩니다

 

이때 김대중은 정신적 안정을 찾기위해

역시 독서를 하였고

집을 회사처럼 여기며

매일같이 양복을 차려입고

서재로 출근하고

밤에는 침실로 퇴근하였습니다

 

 

[장준하 의문사 사건]

어느날은 김대중 자택에 장준하가 방문했는데

장준하는 재야지도자들이 연대해 유신체제에 타격을 가하자는

논의를 위해 동교동을 찾았고

 

시국논의를 마친 후 나가는 장준하에게 김대중은

산행이나 지방여행때는 혼자 다니지 말라고 각별히

조심하라 당부를 했습니다

 

김대중과 마지막 만남을 가진 후 이 해

1975년 8월 17일 ,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 바위 밑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됬고

광복군 출신의 장준하는

일본군 장교출신 박정희와 목숨을 건 투쟁을하다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게 됩니다

 

박정희와 장준하

 

일본제국 장교복을 입고있는 박정희와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복을 입은 장준하 , 의문사한 장준하

 

[유신의 어둠]

박정희의 유신시대는

대한민국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어둠의 시대였고

 

유신독재에 반대하면 의문사 당하거나

거물정치인이었던 김영삼 , 김대중 역시

온손과 발이 묶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암흑의 시대였고

당시 야당 지도자들에겐 도통 별 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김대중과 윤보선 , 함석헌 , 문익환 , 함세웅 등 신민당과 재야인사들은

1976년 3월 1일 ,

3.1절을 맞아 명동성당에서 유신독재 반대시위를 펼쳤고

3.1 민주구국선언 낭독을 하였습니다

 

1976년 3월 1일 민주구국선언 발표이후 촛불시위하는 김대중 (촛불시위 원조셨네 ?)

 

3.1 민주구국선언(명동사건)

 

이로인해 김대중 등 재야인사등은 정부전복선동혐의로 기소되었고

김대중은 서울지방법원에서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고

서울형사지방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선고공판정에서

김대중은 유신체제에 대한 견해와 자신의 정치사상과 철학에 대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김대중>오늘의 유신체제는 통일을 위해서가 아니고 ,

안보나 반공을 위해서도 아니요 ,

박정희 한 사람의 영구집권을 위한 것입니다

...

이 사실은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르는 것과 같이 명백합니다.

이 체제 아래서는 ,

민주주의 인권과 자유의 보장은 불가능해요.

 

<박정희>긴급조치 발동 ! 유언비어 금지맛좀 볼래 ?

 

김대중은 징역 5년과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에서 수감생활한지 1년 2개월이 지난

1977년 4월 14일 진주교도소에 수감되었고

독방에 수감되어 혹독한 수형생활을 하게 됩니다

 

[진주교도소]

김대중 좌우 맞은편 방은 모두 공실로 비워져있었고

주변 인기척도 못나게 간수들이 감시했고

변호사 면회도 금지시키고 인권탄압이 자행되

옥중의 김대중은 이에 항의해

5월 7일부터 단식투쟁에 들어갑니다

 

3.1 명동사건 이후 김대중 석방운동을 벌이는 이희호 여사

 

야당 슈퍼스타인 김대중이 감옥에서 옥사라도 하면

곧바로 4.19 혁명 시즌 2가 일어날게 뻔하기에

단식 6일만에 교도소측은 가족과 변호사의 면회를 허용해주었고

교도소측은 신경통이 있는 김대중에게 목재 책상과 의자도 만들어주고

겨울에 난방도 넣어주며 통중을 덜게 해주었지만

중앙정보부의 간섭으로 이런 편의도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이희호>진주교도소는 서울에서 가장 먼 교도소였다.

진주에 도착해 하룻밤을 자고나서 다음 날 첫 면회를 해야 했다.

남편은 기결수라 행형 규칙상 머리를 빡빡깎고 푸른 수의를 입고 있었다.

꼭 머리카락을 모두 밀어버려야 하는 규칙은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

 

뽀얀 머리가 드러난 남편의 모습이 무척 슬펐다

게다가 전하는 말은 더 비감했다. 

 

진주라 천리길 ,

경상도 감옥에 독방도 모자라

좌우와 맞은편 방을 모두 비운 완전하 격리 수용이라 했다.

그즈음 나는 화급하게 법전을 독학했다.

남편이 법에 보장된 정당한 처우를 받을 있도록 하려면 길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병상조회 의뢰 신청서' 와 '교도소 처우개선 건의서' 

등을 법무부 뿐만 아니라 대통령에게도 청원했다.

남편 또한 변호사와 직계 가족만으로 면회를 제한하는 처사에 항의해

단식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김대중은 젊은시절 천주교 신앙인이 되었지만

바빠서 돈독한 신앙생활을 못해오다가

옥중에서 신앙심을 두터히 하게 됩니다

 

<김대중>나는 진주교도소 생활에서 기독교 신앙을 굳건히 할 수 있었다. 

교도소에서 생활하기까지의 신앙은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불충분한 것이었다.

아직도 내게 신앙이란 어렴풋한 것이었지만 ,

신에게 가는 길을 식별 있게 것은

교도소 생활 덕분이었다.

교도소에서 나는 우리나라의 훌륭한 신학자들의 책이나

외국 신학자들의 저작에도 손을 있었다.

 

옥중의 김대중은 아내 이희호 여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김대중>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다.

 

자신의 십자가란 무엇일까 ?

 

그것은 신의 사랑을 통해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며 ,

그것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바친 예수님의 길을 걷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큰 실패자였다.

마지막 처형 때는 믿었던 제자조차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다.

또한 그의 교훈은 그의 생전에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2천년이 지난 오늘날 ,

예수님만큼 성공한 사람도 없다.

그의 희생은 눈부신 공적이 되었다.

현세에 성공한 거장들 ,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

이집트의 이그티온 ,

중국의 진시황 등은

지금 예수 앞에 서면 너무나도 초라해지고 빛을 잃는다.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패자의 운명속에서 생겨났다.

왜냐하면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리 안에서 죽는 사람만이 진리를 통해 자기를 나타내고 ,

자기를 완성한다.

진리는 우리의 양심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길일 것이다.

양심의 길이란 남을 사랑하는 길이며 ,

우리를 창조하고 우리를 사랑하고

독생자까지 보내주신 하느님의 길일 것이다.

하느님의 길을 위해 십자가를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승자이며 ,

지상의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다.

물론 길은 험난하고 고난의 길이지만

그것은 결코 불행한 길도, 불가능한 길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주교도소에서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진 김대중

 

김대중이 갇힌 서울대병원 특실병동을 24시간 감시하는 교도관과 정보부원들

 

서울대병원 수감시절 못으로 글자를 써서 아내와 비밀쪽지를 주고받은 김대중

 

한편 라이벌들이 전부 사라진 유신독재자 박정희는

1978년 7월 6일 제9대 대통령선거를 맞아

체육관에서 선거에 단독 입후보하여

셀프당선을 하여 5선대통령이 되었고

썩을대로 문들어져버려

더이상 실리나 명분도 없던 박정희의 추악한 말년이 가까워지고 있었고

마치 옛날에 왕이 즉위하고 죄수들을 사면해주는 이벤트를 벌인것을

따라한 것인지

김대중은 대한민국 황제 박정희 폐하의 사면을 받아

1978년 12월 27일 형집행정지조처로 풀려났고

3년을 감방에서 보낸 김대중은

청년이 훌쩍 지나 어느새 50대의 장년이 되었습니다

 

[10.26 사건]

점차 양심이 바닥을 기던 박정희 정권에 대해 민심이 끓어올랐고

1979년은 유독 심상치 않은 일들이 일어나며

박정희 정권에 이상기류가 큰 해였는데

그런 와중

1979년 10월 26일 ,

박정희 대통령은 궁정동 안가에서

대한민국 권력서열 2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맞고 사망하였고

18년의 박정희 독재가 막을 내리게 됩니다

 

10.26 사건 ,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

 

박정희 사후 1979년 12월 8일 263일만에 연금이 해제된 김대중 , 달력에 X표시가 포인트(ㅋㅋ)

 

김영삼은 야당지도자였지만

같은 경상도 라인이기도 하고

온건 , 보수성향도 있었기에

이전 박정희와 단둘이 독대하며 회담을 하기도 하였지만

 

나름 김영삼을 조지면서도 같이 얘기는 했던 박정희

 

김대중은 박정희의 최대 정적이었음에도

단둘이 한번도 말한마디 해보지 못했고

김대중은 이후 자신을 죽이려한 정적 박정희 죽음 앞에서

용서와 화해를 빌었습니다

 

<김대중>나는 나를 죽이려 했고 감옥에 보내고 연금시킨

박정희씨의 무덤에 찾아갔습니다.

그가 죽은 뒤에나마 화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박정희씨가 죽을 때까지 생전에 한번도 그와 대화를 갖지 못한 것을

가장 큰 아쉬움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라봉봉>박정희는 자신의 가장 큰 라이벌인 김대중을 죽이려함으로서

국제사회에 독재자로 낙인찍히고 큰 망신을 당한 것이었고

김대중은 유신독재에 최선봉에 서서 맞선 시대의 거인이었습니다

 

김대중 납치사건때 예수님 목격일화는 크게 논란이 되긴 했는데

저도 기독교인이지만 비과학적인걸 좋아하지는 않기에

모직 고통과 극심한 공포속에서 예수님 형상의 환각이 보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고

그만큼 죽기직전 김대중의 간절한 믿음과 신앙심을 보여주는 일화라 할 수 있습니다

 

의학에서는 무속적 개념을 떠나서 영적건강개념을 가르치긴 하는데

김대중은 영적 에너지가 뭔가 있는 느낌이라

사람들이 그의 연설에 구름처럼 모여들때

정치인보다는 거의 종교 지도자급 강연느낌도 나고

개인적으로 장면총리나 김대중 대통령 같은 인물은

신앙심이 깊었던 인물로 보여

정치인보다 종교인을 했어도 참 어울렸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고

 

김대중은 계속해서 모진 탄압과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며

종교적 탐구와 믿음이 상당히 강해진 인물이라 생각됩니다

 

감옥에서 인간은 패자의 운명에서 태어난다는

김대중의 생각은 참 공감이 간게

누구던 인간의 신체적 생명은 한계가 있고

결국 사람은 모두가 패자로 시작하나 진리와 양심을 통해서

의미있는 삶을 살아간다는 개념은 참 공감도 가고

아름다운 그의 역사관이라 생각되고

정말 생각이 깊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의외로 김대중은 박정희와 단 한마디도 얘기해본적 없다하고

만약 둘이 단둘이 독대를 했더라면

서로 오해를 풀었다거나

무슨 이야기가 있고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도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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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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