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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VS 전두환>

[서울의 봄과 12.12 사태]

[5.17 쿠데타]

[고문]

[5.18 광주민주화운동]

[제안]

[김대중 사형]

[청주교도소]

[미국 망명]

[민주화추진협의회]

[목숨을 건 귀국]

[신민당 부활]

[사면복권]

[김대중 VS 김영삼]

[결별]

[4자 필승론]

[단일화 실패로 인한 패배]

<라봉봉>

 

[서울의 봄과 12.12 사태]

박정희가 죽자

칠흑같은 어둠이 끝나고 서울에는 봄이 왔고

민주화의 열기가 뜨거워지며

사람들은 박정희가 죽고 1979년말부터

1980년 5월 18일 광주학살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반년동안의 짧은 기간을

 

'서울의 봄'

 

이라 부르게 됩니다

 

1980년 5월 15일 민주화를 열망하며 서울역에 모인 10만 시민 , 서울의 봄

 

급하게 박정희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국무총리 최규하 역시

민주헌법에 의한 선거를 약속했고

국민들의 기대가 끓어올랐는데

 

그때 신군부 세력의 전두환은

권력의 공백기를 틈타

1979년 12월 12일 쿠데타를 감행해

'12.12 사태' 가 일어났고

 

전두환과 신군부는 군권과 정권을 장악한후

서울의 봄으로 민주화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을 제압합니다

 

12.12사태 주역들 , 가운데 전두환과 노태우

 

정치 9단이었던 김대중은

당시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있었는데

 

박정희 사후 서울의 봄은

4.19 혁명직후 계속 시위만 일어나며

혼란한 상황이 전개되는 것과 동일한 양상으로 일어나고 있었고

즉각 기자회견을 열어 거듭 자제를 촉구했지만

신문은 그의 발언을 귀퉁이에 작게 취급하였고

 

전국적인 격렬한 시위는 1980년 5월 15일에도 이어져

서울역 광장에는 학생 10만과 시민 5만이 집결했고

계엄령 철폐와 유신잔당 퇴진을 요구하며 격렬 시위를 전개합니다

 

 

이 과정에서 전경대원 1명 사망 , 경찰과 학생 다수가 부상을 입고

학생 600여명이 연행 , 차량 7대가 파손되었고

노동운동도 격렬하게 전개됩니다

 

[5.17 쿠데타]

점차 국회의 신민당과 공화당 역시

뜻을 모아 국회에서 계엄령 해제 결의를 할 분위기였고

 

12.12 쿠데타 성공 이후 군부안에서 조용히 짜져서

시민들의 동향을 지켜보던 전두환 장군은

계속되는 시민의 약진에 무장해제 당할까 조급해지며

민주화 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안정을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1980년 5월 17일 , 5.17 쿠데타를 일으켰고

5월 18일 0시를 기해 비삼계엄 전국확대조치를 감행합니다

 

 

이날 전두환과 신군부는

가장 걸림돌이었던 김대중 집을 덮쳤고

17일 밤 10시쯤 무장군인들은 동교동 김대중집 대문을 부수고 들어와

김대중 가슴에 장총을 겨누고 비서들을 폭행했고

영장도 없이 집에 있는 물품과 자료를 쓸어갔습니다

 

체포된 김대중은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갔고

이날부터 지역계엄은 전국계엄으로 확대 ,

모든 정치활동 중지 , 시위 금지 , 언론 사전검열 ,

각대학 휴교령 , 태업과 파업금지 등을 시행했고

 

김대중을 시작으로 김종필 등 26명의 정치인들이

부정축재 혐의 등으로 연행되었고

 며칠 뒤 김영삼은 가택연금당하며

야당 거물정치인들은 전부 손발이 묶입니다

 

김대중 , 김영삼 , 김종필 소위말하는

'3김' 중이서

전두환이 가장 위협을 느낀 인물은

'김대중' 이었고

김대중 가족과 측근까지 잡혀갈 정도였습니다

 

20세기 후반기를 풍미했던 대한민국 거물정치인 3김 , 왼쪽부터 김종필 김대중 김영삼

 

[고문]

김대중은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끌려가

팬팃바람으로 발가벗긴 채

등 뒤로 돌린 두손에 수갑이 채워졌고

수사관들은 각목을 휘두르며 혹독한 조사를 시작합니다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취조실에서 조사받는 김대중을 신군부가 촬영해놓은 필름 , 김대중평화센터

 

또 도찰왕이었던 전두환은 곧 간부들을 대동하고

지하실 위층에서 앉아 TV 카메라로 발가벗겨진 김대중을 감시하고 있었고

마치 야생호랑이를 잡아다 희롱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예전 일제강점기때 형사들이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할때 쓰던 수법처럼

김대중 옆방에서는 같이 잡혀온

김대중의

 

아들 , 동생 , 동지 , 측근 , 비서 , 경호원까지

 

동교동 사람들의

참혹한 고문소리와 비명이 들려왔고

수사관들은 김대중을 압박하기 위해 일부로 옆방에서 조져대며

'자백' 을 강요했습니다

 

<수사관>김대중은 빨갱이다 ,

김대중의 지시로 이북에 몇번 갔다왔는가 ,

밤에 이북방송을 듣고 김대중에게 어떻게 보고했는가 ,

재야와 학생들에게 자금을 얼마나 주었는가

 

참혹했던 중앙정보부의 고문

 

측근들이 버티면 버틸수록 고문이 심해져

각목을 입속에 쑤셔넣고 집게로 혓바닥을 잡아당겼고

몽둥이로 머리를 맞아 핏줄기가 솟았습니다

 

 

또한 ,

수사관들은 고문 기술자들이기도하고

거물 김대중이 고문받다 뒤지면 좆되기도 하기에

 

김대중 측근은 피떡이 되며 죽어가던 와중

일부로 김대중은 매질을 하지 않고

욕설과 폭언으로 김대중의 기를 꺾으려했고

전두환 역시 바로 위층 안전국장실에서

TV 모니터를 통해 이 모습을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수사관>당신이 부인하면 다른 사람들이 더 고통을 받는다

 

전두환은 야당의 가장 큰 거물이었던

김대중을 집중적으로 조지며

김대중이 학생과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사회혼란을 부추기고 북한에게 불순자금을 받았다는 것으로

내란음모사건을 엮으려 했고

측근들을 혹독하게 고문하고 자백을 받으려했습니다

 

김대중 동교동 집에 방문하다 김대중이 부재중이어서 만나지 못하고

방명록에 이름을 남겼던 38세의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도 잡혀들어왔는데

살인적 고문으로 정동년은 견디다 못해 자살까지 시도까지 했고

대충 정동년이 김대중에게 자금을 받아

폭동(광주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조작합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신군부가 김대중을 체포한 사실이 알려지며

1980년 5월 18일 광주학생 , 시민들이 봉기하였고

군인들은 광주학살을 시작해

민중항쟁을 가혹하게 진압해 많은 시민들이 사상됩니다

 

광주시민들은 자위수단으로 인근 경찰서에 들어가

총기 , 실탄 , 수류탄을 빼앗아 무장했고

시민 궐기대회를 열어

 

'전두환 퇴진' ,

'김대중 석방' ,

'구속자 석방'

 

등 구호를 외쳤고

시민들의 질서있는 시위에도 계엄군의 유혈진압에

5월 광주 민주화운동은 참혹한 학살로 끝나게 됩니다

 

김대중 석방 피켓을 들고있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시민들

 

참혹했던 광주학살

 

전두환은 모든권력을 보유하기위해

국가보위비상대책위를 설치했고

국보위는 초법적 권력기관으로서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에 돌입합니다

 

[제안]

당시 김대중은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매일같이 혹독한 취조와 동지들이 고문받는 것을 보며

광주에서 어떤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있었고

혼미해진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김대중이 버텨가자 이번엔

합동수사본부 권력가가 와서 김대중에게 솔깃한 제안을 합니다

 

<권력가>당신이 우리에게 협력해 준다면

대통령직 이외의 어떤 직책이라도 제공하겠다.

만약 협조하지 않겠다면 우리는 당신을 살려 둘 수 없다.

재판은 어디까지나 형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당시 김대중은 여기서 죽고싶지 않았고

의식도 희미해져있었는데

뭐라 대답할지 몰라 가만히 있자

그는 정중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갑작스러운 얘기니 결정할 수 없을거같으니 3일후에 다시 오겠다했고

그가 돌아간 후 직원이 김대중에게 신문을 가져왔고

김대중은 비로소 광주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았습니다

 

시민들이 민주화와 자신의 석방을 요구하며 일어서고

광주가 계엄군에게 제압당했고

희생된 시민 중 100명이상의 사상자가 포함됬다는 것을 알고

김대중은 갑자기 혈압이 올라가고 의식이 멀어져 기절하게 됩니다

 

 

김대중은 깨어난 뒤

죽고싶지 않았기에 어떻게하면 살까 ,

오스트리아같은 곳에서 가족과 조용히 살까도 고민해봤는데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온 사람으로서

자신을 열렬히 지지해주고 광주에서 김대중 석방을 외치며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협력할 수 없다 생각했고

 

<김대중>역시 죽어야 한다.

여기서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하고 생각을 정리하고 죽을 결심이 서게 됩니다

 

2일후 그가 다시 왔는데

김대중은 각오를 했기에 그의 회유를 단호히 거절했고

결국 그가 말한대로

 

'형식에 불과한 재판' 

 

이 시작됩니다

 

[김대중 사형]

김대중을 비롯한 37명은 7월 4일 

내란음모 , 반공법 , 외환관리법 , 계엄포고령 위반 등 혐의로

구속되었고

김대중과 추종일당은

복학생을 행동대원으로 내세워

 

학생선동-대중규합-민중봉기-정부전복-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권수립

 

등의 목표로 비합법적 투쟁과

내란선동에까지 이르게 됬다고 발표됩니다

 

이 내용은 언론에 대서특필됬고

김대중은 내란수괴 이미지화 됬고

북한 공산주의 앞잡이로 포장됩니다

 

국민들은 어마어마한 발표에 충격을 받았고

평소 존경하는 인물들이 내란음모라니 믿기지 않았지만

언론은 검찰들 발표만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한편 전두환은 체육관선거에서 단일후보로 나와

1980년 9월 1일 11대 대통령에 셀프취임하였고

 

9월 11일 공판에서 검찰관 정기용은 김대중에게 사형을 구형했고

1981년 1월 김대중은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됩니다

 

 

<김대중 최후진술>나는 먼저 죽지만

먼저 죽은 나를 생각해서  땅에서 다시는 정치보복이 없도록 해달라

 

당시 재판받는 김대중 ,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

 

전두환은 김대중 사형을 집행할 기세였지만

국제사회는 김대중 구명을 촉구하며 전두환을 압박했고

그당시 김대중은 동아시아의 만델라 , 동아시아 민주화운동의 거부로

알려져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미국 역시 김대중 동정론이 확산되었고

전두환 정권에 김대중에 대한 고발이 억지스럽다 경고를 했습니다

 

(더 정확히는 1980년대 미국은

FM 국가답게

당시 상황을 매우 민감하게 바라보며

국익과 북한상황때문에 전두환 정권을 인정하면서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인권유린과 독재를 허용할 수는 없었기에

김대중은 보호하려 했음)

 

[청주교도소]

김대중은 2년여동안 청주교도소에서 

독서와 꽃밭에 꽃을 가꾸는 일을 즐겼고

이런 상황에서

전두환은 절대권력을 누리며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상황이었고

김영삼은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가택연금상태였습니다

 

 

옥중의 김대중은

점차 귀가 울리는 이명증과 무릎관절염 증세로 고통을 겪고 있었는데

청주교도소 담당관은 염려하다 김대중에게

 

'미국으로 치료하러 가지 않겠느냐 ?'

 

고 물었고

김대중은 자신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여러명 더 남아있고 그 사람들보다 자기가 먼저 나갈 수는 없다 생각해서

출국을 거절하고

 

'한국에서 석방시켜 달라.

국내에서 치료받고 싶다'

 

고 단호히 말합니다

 

수인번호 9번 , 청주교도소 겨울 , 1981년

 

아내와 두 아들의 면회 , 1981년

 

옥중독서

 

이에 정부당국은 전두환 대통령과 김대중 부인 이희호 여사를 만나게해

부인을 통해 설득하도록 했고

 

이희호는 청주로 내려가 미국에 가자고 남편을 설득했고

남편은 내내 옥중 동지들이 있는데 어떻게 그곳에 갈 수 있냐했고

수술비와 생활비도 없는데 어떻게하냐며 완강히 거절합니다

 

이에 안기부직원은 김대중 부부가 미국으로 떠나야

같이 구속됐던 분들도 나오게 된다고 말해주었고

김대중 일가는 고심끝에 반강제적으로 비행기에 태워져 미국에 갑니다

 

전두환 대통령 역시 불법권력자에 국민적 인기도 낮고

지지기반이 매우 취약했기 때문에

국내외의 눈치를 오지게 보던 상황이었고

특히 미국 레이건 정부의 압력과 유럽국가 정상 , 국제인권단체의

압력을 이중삼중으로 받았고

당시 한국 내부에서는 반미 저항운동이 강했기에

결국 전두환은 김대중을 미국으로 보냈습니다

 

[미국 망명]

1983년 12월 23일

정부는 이희호 여사에게 김대중 직계가족 전부가

미국으로 출발하라 통보했고

장남 김홍일은 끝까지 출국을 거부하며 동교동에 남기로 했고

김대중 부부는 둘째 김홍업과 셋째 김홍걸을 데리고

김포공항으로 향했고

미국시각으로

23일 오후 10시 45분 워싱턴DC 국제공항에 도착합니다

 

미국행하는 김대중과 막내아들 김홍걸

 

전두환은 김대중을 2~3년동안 미국에서 병치료를 하라하고

보낸 것이었는데

 

김대중은 다음해인

1983년 6월부터 워싱턴을 민주화운동 기지로 삼고

재미인권문제연구소를 설립해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이는 한국에서 정치활동금지약속에 위배될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김대중은 한국으로 귀국하면 책임지겠다 각오하고

미국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합니다

 

<당시 김대중>

나는 결심을 했다.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와 인권신장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고...

그리고 언젠가는 귀국하겠지만 이같은 나의행동이

정치활동 않겠다는 약속에 위배된다고 하여

귀국후 또다시 감옥에 집어넣는다면 이를 달게 받겠다고...

 

김대중은 미국에서 일주일에 한번꼴로 강연을 하고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재미교포들을 만나고

미국 저명한 학자 , 정치인들과 한반도와 한국 인권문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고

땅도 넓고 개인주의 국가여서

사람모이기가 쉽지 않은 미국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1만여명의

청중들이 김대중의 강연을 보기위해 몰려들었고

김대중은 전두환 정권의 인권탄압을 강경비판하며

한국의 민주화를 촉구 ,

망명 2년동안 맹렬한 정치활동을 벌였습니다

 

감옥에서 부활한 김대중이 참아온 말들을 쏟아내며

미국에서 다시 봇물터지듯이 전두환 디스랩을 시작하던 시기

 

<워싱턴 교포모임에서 김대중의 전두환 디스랩>

항상 과거의 징역살 때(박정희때 진주교도소)나

이번 징역살 때나(전두환때 청주교도소)

내가 생각하기를 박정희 대통령이나 전두환씨를 놓고 내가 생각합니다.

당신들이 지금은 물리적으로 나한테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역사에서 보자.

 

(대중이형 꽤 쳤음)

 

김대중의 신민당 동지였던 김영삼 역시 국내에서

전두환과 군부독재 디스전을 시작했는데

1983년 5월 18일 광주학살 3주년을 추모하며

김영삼은 독재에 항거하는 뜻에서 단식투쟁에 돌입했고

 

국내에서의 김영삼의 단식투쟁 소식을 들은

미국에서의 김대중 역시 5월 24일 김영삼 단식투쟁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6월 4일에는 교포들과 함께 워싱턴에서

 

'김영삼을 구출하라'

 

피켓을 들고 한국대사관~국무부~백악관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민주회복을 외치며 워싱턴 시위하는 김대중 , 1983년

 

1984년 미국 피플지 표지에 실린 김대중 부부

 

[민주화추진협의회]

워싱턴(김대중)과 서울(김영삼) 의 두 신민당 민주투사들은

국내외로 분주하게 움직였고

둘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를 결성하기로 했고

1984년 5월 17일 광주민주항쟁 4주년을 기념하며

서울 외교구락부(구락부=클럽)에서 민추협이 결성됬고

두 김씨는 공동의장이 되어 전두환과 맞서기 시작합니다

 

[목숨을 건 귀국]

국내정세를 살피며 김대중은 결국 귀국할 것을 결심했고

김대중은 1985년 1월 18일 워싱턴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2월 6일 귀국한다는 성명을 발표합니다

 

독재자인 전두환 대통령 역시 미국응딩이 뒤에서 숨어서

전두환 대머리 디스랩을 난사했던 김대중에 대해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었고

 

미국 망명 775일만인

1985년 2월 6일 김대중은 목숨을 건 귀국길에 올랐고

누가봐도 귀국하면 좆될게 뻔했기에

미국 하원의원과 저명인사들 37명은

김대중의 신변안전을 위해 김대중과 같이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김대중과 같이 귀국길에 오르는 미국형들

 

공항에 김대중이 도착하자

김대중의 환영을 위해 민주협 공동의장인 김영삼이

공항에 출발하려하던 직전

자택에 연금되었고

 

1985년 2월 8일 김대중 귀국환영하려다 실패했지만 심금을 울리는 희대의 킬링벌스를 남긴 김영삼 , 전두환이가 뺏지는 못해 !!

 

일단 전두환도 미국 압력에 귀국한 김대중을

감옥에 가두진 않았지만

김대중 부부는 김포공항에 내린순간부터

사복경찰들에게 에워싸여

일행과 격리 ,

동행했던 미국인들이 귀국하자

곧바로 김대중 동교동 자택은

경찰기동대 4 , 5대와 300여명의 전경이 집주위를 에워쌓고

24시간 철통감시체제에 들어갑니다

 

김포공항 귀국하자마자 경찰에 격리된 김대중

 

[신민당 부활]

전두환도 원래  2월 12일에 열리는

12대 국회의원 총선거이후에 귀국하면

김대중에게 대충 귀국해도 봐준다는 입장이었지만

김대중은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민주화운동가와 시민들의 결집을 끌어내려

2월 6일에 귀국하는 모험을 강행한 것이었고

그의 생각은 맞아떨어져

유권자들은 김대중 귀국에 큰 관심을 보이며 결집했고

 

정치활동 규제가 풀리자

김영삼계와 김대중계 등

구 신민당 , 민추협 인사들이

제5공화국 헌법에 의해 폐지된 신민당을 부활시키기 위해

신한민주당을 창당하는데

 

신한민주당을 줄이면 똑같이 신민당이 되는 언어유희였고

그만큼 야당인사들에게 신민당은 민주당의 적통이며

독재자 박정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제1야당이자

오랜 추억과 자부심 , 빛나는 이름의 상징이었습니다

 

신한민주당은 창당 10일도 안되서 총선거에 맞이했고

전두환 정권에 폭압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낀 대도시 유권자들과

야당 지지자들 , 민주화운동가들이 부활한 신민당에 결집하기 시작하였고

정치 거목 김대중이 선거 4일전인 2월 8일에 미국에서 귀국하며

전두환 정권을 심판하려는 야당 표심이 결집하기 시작합니다

 

선거결과 서울에서 전두환 정당 민주정의당(민정당)은 27.3% 표를 받았고

급조된 신민당은 43.9% 표를 받으며 압승했고

전국구 역시 여당 민정당은 야당과 거의 대등했었기에

결과적으론 148석을 가져간 민정당이었지만

숨죽이던 민심은 이미 전두환 정권에서 등을 돌린것이었고

신민당은 67석을 가져가며 부활에 성공해서

신당돌풍에 성공해 야당다운 야당이 다시 생겨났습니다

 

2월 12일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고 기뻐하는 김대중과 김영삼

 

비록 신민당이 전두환과 민정당의 정치공학에

대등한 의석까지는 얻어내진 못했지만

또한 워낙 당시 전두환 정부가 쓰레기였기에

국민들 역시 점차 신민당이 무조건 승리해야한다고 결집한 것이었고

84.6% 투표율이라는 엄청난 투표율이었고

전두환 독재정권이 위기감을 느끼게 되며

무소불위로 군림했던 전두환의

레임덕(정권말기 대통령 힘이 빠지는 현상) 시작이었습니다

 

[사면복권]

1987년 ,

평생 독재정권과 투쟁하던 김대중은 어느덧 62세의 노인이 되었고

6월항쟁의 결과로 6.29 선언이 발표되며

전두환정부 , 제5공화국은 침몰되었고

민주애국시민들의 희생으로

김대중은 사면복권을 받았고 다시 마음껏 정치활동을 할 수 있게 됩니다

 

1987년 5.18 망월동 민주영령 묘지에 처음 방문하며 죄책감에 오열하는 김대중

 

6.29 선언으로

민주화가 시작되며 전두환 정부는 끝났고

다시 직선제가 부활하고 체육관선거가 아닌

국민들이 대통령을 뽑는 시대가 다시 오게 되었고

김영삼과 김대중은 드디어 군부독재가 끝났고

자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희망에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독재자 전두환 대통령은 시민들의 항쟁과 미국의 압력에

결국 항복하고 직선제를 허락했지만

호락호락 야당에게 당할 생각이 없었기에

직선제에서 승리해 자신의 부하인 노태우를 당선시키기로 계획하였고

 

전두환 핵심부하였던 노태우

 

김대중의 사면복귀 역시 전두환의 꾀였고

전두환은 듣보잡인 노태우를 그냥내보내면

당연 김대중이나 김영삼에게 패배할게 뻔했기에

민주계의 두 정치거물 김대중과 김영삼을 분열시켜

3파전 구도로 가서 노태우를 당선시키려 계획합니다

 

[김대중 VS 김영삼]

결국 13대선은 전두환 꾀대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는데

어느덧 고령의 김대중은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생각해서

대선에 도전했는데

 

야당인사들은 김대중이 몇년동안 미국 망명생활을 할동안

국내에서 김영삼이 민주화운동을 이끌며 고생 많이 해주었고

김영삼을 따르는 야당의원 숫자도 훨씬 많았기에

야권에서는 김대중에게 양보를 권유하는 분위기가 상당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마저도 김대중이 당선되버리면

김대중을 인정하지 않는 군부가 또다시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생각해

이번엔 그나마 보수적 성향도 있던 김영삼에게 양보해주자 권유할 정도였고

 

당시 김영삼이 김대중보다 민중적 인기는 적었어도

박정희 말년에 제대로 한방 날려주었고

전두환때는 목숨을 건 단식투쟁으로 국민적 결집을 끌어냈기에

ㄹㅇ 인물이긴 인물이었고

이전 김대중에게 깔끔하게 대선 양보한 전례도 있었기에

김대중은 진짜 이번만은 양보했어야 했는데

 

김대중도 머리가 똑똑한 인물이었기에

김대중도 이런 사정을 잘알았기에

김영삼이 대선후보에 , 김대중이 당권을 맡는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갑자기 김영삼이 이러면 힘이 분리되니 손발이 안맞기에

대선후보와 당권도 자신이 전부 가져가겠다했고

김대중 역시 빡돌아서

 

<김대중>그렇다면 나더러 발가벗고 무조건 항복하라는 거냐 ?

 

라고 나왔고

단일화는 성사 몇시간전에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둘은 평생 같이 독재정권에 목숨걸고 싸워온

야당의 상징 신민당의 대표이자 동지였고

존경받는 민주화운동 지도자였는데

 

당시 전두환도 사형대로 올라갈 위기감에

손가락만 빨며 당선가능성이 0% 수준이었던

부하인 노태우 당선에 물떠놓고 기도하던 상황이었고

 

야당은 사실상 4.19 혁명 승리후의 민주당과 같은 분위기였고

상황이 워낙 좋았기에

김대중이나 김영삼 둘중 누구던지 나가면 무조건 당선이라는

캐꿀인 상황이었기에

김대중과 김영삼 역시 뭔가 생각이 많아졌는데

 

일단 두사람은 경쟁하다 싶이 양보의사를 밝히기도 했고

서로 선의의 양보를 보여주며

국민들의 감동을 이끌어냈는데

 

1987년 5월 둘은 손을 맞잡고 훈훈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물밑에선 신경전이 치열했고

 

김대중계는 야당이 모두 김영삼계가 주도하고

김대중계가 일부 가담하는 형식이었기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김영삼 역시 김대중의 지분요구에 회피하는 모습을 보이며

갈등이 커지는 상황이었습니다

 

[결별]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김대중과 김영삼이 단일화 합의를 할 것이라 믿었고

두 사람은 10월 25일 고려대학교 시국토론회에 함께 참석하며

기대를 모았고

 

국민들은 이자리에서 두 후보가 역사적인 단일화 발표가 나올까 기대합니다

 

그런데

이날 토론회 주인공인 둘은 단상에 같이 앉아서도

서로 외면한 채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1987년 10월 25일 매우 싸했던 김대중과 김영삼 , 역사적 단일화대신 역사적 갈등사진이 남게 됨

 

김영삼이 연단에 오르자

갑자기 청중사이에서

 

'우~'

 

하는 야유소리가 나왔고

 

'사퇴하라 ! 사퇴 ! 사퇴 ! 사퇴 !'

 

외침이 터져나왔습니다

 

 

이전부터 김영삼은 당권장악에서는 강점을 보였지만

민중의 인기는 약점을 보였고

김대중은 당권장악에서는 약점을 보였지만

민중의 인기에서는 인기짱이었기에

강연회 , 토론회에서는 김대중 지지자가 많이

모여 들 수밖에 없었고

 

김영삼을 지지하는 소수 청중들이 항의하려했지만

야유하는 사람들이 너무많아 기세에 압도됬고

김영삼은 정치인생 30년만에 처음듣는 굴욕감에

부들부들 떨며 고려대학교를 떠났습니다

 

반대로 김대중이 연설대에 오르자

사람들은

 

'김대중 ! 대통령 !'

 

을 연호했고

 

 

김대중은 거대한 자신의 지지자들에 감동해버려서

 

<김대중>여러분 !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저는 어떤 결단을 내려야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

 

하고 외쳤고

이때 김대중은 지지자들에게 도취되어

자신이 단독출마해도 김영삼을 이길것이라는

환상을 품어버렸고 결국 강연회 다음날

자신을 따르는 동교동계와 함께

김영삼이 장악한 통일민주당(신민당 후신) 을 전격 탈당한다 선언했고

 

당시 통일민주당이 노골적으로 김영삼 상도동계가 장악하던 상황이기에

김대중 동계동계들 역시 불만이 상당했던 시기라

김대중과 동교동계는 김대중과 함께 일제히 탈당해

평화민주당에 창당해

김대중은 단독출마하며 

 

선거는 두 김씨들을 분열시켜 듣보잡인 노태우를 당선시키겠다는

전두환의 계략대로 흘러가게 되었고

전두환은 노태우를 당선시키기위해

천문학적 선거자금 살포 , 정부의 관권개입 등을 시작합니다

 

[4자 필승론]

당시 김대중 역시 희망을 품고있었는데

김대중은 4자 필승론을 주장했고

아무리 김영삼과 따로나오지만

김영삼은 노태우와 함께 영남출신이기에

영남에서 두 인물의 표가 갈릴 것이라 생각했고

 

여러 후보들이 출마했던 13대 대선

 

김대중은 자신의 연고지 전라도에서 일단 몰표받고

기존부터 자신을 지지해준 수도권에서 승부를 점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판단했고

 

김대중 , 김영삼 , 노태우 , 김종필

 

이 네명이 모두 선거에 나오면

각자 표가 갈리고

일단 김종필은 절대 안될게 뻔하고

경상도 출신 김영삼과 노태우는 경상도 표를 나누어먹기에

김대중이 어부지리로 당선되겠다는

4자 필승론은 나름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졌고

이는 평민당과 김대중 후보의 구상이었습니다

 

[단일화 실패로 인한 패배]

네 후보는 모두 치열한 선거전을 개시했는데

갑자기 선거를 2주 앞두고

1987년 11월 29일 북한에 의해

대한항공 KAL기가 폭파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KAL기 폭파사건 , 압송되는 북한공작원 김현희

 

수많은 국민들은 경악하며

야권 후보였던 김대중이나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면

야권 출신 인사라는 한계때문에

군부를 제대로 지휘할 수 없기에

북한 도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것 아니냐는 걱정이 나오며

'북풍' 이 시작되었고

특히 군사정권과 보수언론에 종북몰이에 심하게 당해온 김대중은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결국 안정이 우선이라는 신군부출신 노태우 후보에게 표가 모이기 시작했고

분열한 김대중과 김영삼은 민주계 표를 둘다 갈라먹어서

노태우는 36.64% 라는 최저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 ,

 

2위 김영삼은 28.03% ,

3위 김대중은 27.04%

 

표를 받으며

두후보가 만일 단일화만 됬어도

55퍼로 무난한 승리였는데

이 선거는 평생을 민주화 운동을 같이하며 연대해온

두 김씨가 서로를 원망하게 된 것은 물론

뿌리깊은 지역갈등 , 지역선거의 시작이라는 나쁜 사례를 남겼고

이후부터 한국은 지역감정이 악화되기 시작합니다

 

결국 오랫동안 군부독재에 싸워온 국민들은

제5공화국 멸망후 첫번째로 이뤄지는 국민직선제 대선에서

김대중과 김영삼이 분열해

뜬금없이 전두환 부하인

신군부 육군대장출신 노태우가 당선해버린 것에 대해

분노와 쓰라림을 맛보게 되었고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장 부부의 기념사진

 

노태우는 일단 당선은 됬는데

오랫동안 정치짬밥 먹어오며 국민의 존경을 받은 거물 김대중과 김영삼에 비해

뜬금없이 신군부에서 최후의 발악으로 쥐어짜내 나온 인물이어서 입지도 ㅎㅌㅊ였고

워낙 국민들 분노가 심해 조용히 사리며 눈치보던 상황이었고

 

당선에 기뻐하는 노태우 당선자

 

노태우 당선 당시 걸린 현수막 , 민주화 첫번째 대통령자리를 군부출신 듣보잡에게 NTR 당한 김대중과 김영삼

 

김대중과 김영삼은 이렇게 된이상 총선이라도 이겨서

국회(입법부)에서 대통령 전두환과 노태우를 심판해버리자는 생각이었고

다행히 그건 성공했지만

 

그럼에도 이때부터 시작된

김대중과 김영삼의 갈등 , 전라도와 경상도의 갈등은

김대중이 죽을때까지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라봉봉>참 김대중 대통령도 정치사가 파란만장했고

박정희때에 이어 전두환 시절에도 연속으로 감옥에 가며

오랜 고생을 한 인물이었고

고생을 많이 한 상태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기에

젊을때는 고생을 많이했지만

그래서인지 다행히

퇴임후엔 , 노년엔 명예롭게 예우를 받다 편안하게 사망한 인물입니다

 

전두환이 김영삼보다 김대중을 특별히 더 조진이유는

일단 당대에도 김대중이 '깜' 이었다는 것을

여야할것 없이 본능적으로 전부 알았고

역량적 면에서는 박정희와 동급이었기에

전두환 역시 두려워 거의 야생호랑이를 대하듯이

무리해가면서까지 김대중을 조진 것이었고

김대중 역시 이때부터 전두환과의 인연을 악연으로 시작한 것이었고

1980년대 초는 오직 전두환만을 위한 폭압정치로 얼룩진

광폭적인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전두환 역시 국내외에 시선속에 김대중을 미국에 보낼 수밖에 없었고

다행히 미국으로 보내져서

김대중은 미국에서 선진자본주의와 자유주의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의외로 김대중은 당시 반미주의가 유행한 1980년대 대한민국과 달리

미국에서 잘 교류하며 인맥을 쌓고 있었고

좀 앞서간다거나 남다른 인물이긴 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대선에 출마할때는

김영삼이 좀 얍삽한 구석은 없지않더라도

김영삼은 고집이 황소고집이었기에

당시 분위기상 절대 양보할 양반이 아니었고

 

김대중은 이번만큼은 주변말 잘 듣고

그냥 전부 당권까지 양보했으면

어짜피 다음 대선 주자도 없기에

다음대선 무난하게 가져갈게 뻔했는데

당권이니 대권이니 하며 티격대다가

둘다 잃고 민주세력이 거대하게 분열되는 파란이 일어난 것이었고

 

아무리 당권이니 파벌이 있더라도

결국 같은 당이고 같은팀은 한 배를 탄 운명이기에

한명이 망하면 한명도 자연히 망하는 

순망치한의 관계일 수 밖에 없고

 

이는 이후 보수정당인 이명박-박근혜때도 반복됬는데

이명박도 박근혜 탄핵 찬성하다가

박근혜 탄핵이후 본인도 폭망해버렸고

아무리 내부갈등이니 뭐니 하더라도

결국 한배를 탄 운명은 같이 이끌어주는게 맞다 생각되고

 

이런면에선 최대부하였던 노태우를 평소 견제했지만

대선때만큼은 의리있게 의심없이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퇴임후 권력을 완전히 양도했던 전두환이 차라리 나았다 생각됩니다

 

워낙 당시 군사독재정권이 악행이 컸기에

민주세력은 선이고 군사독재 정권과 그 후신인 보수계 정당은 악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졌지만

민주계 정당들 역시 오랜 파벌다툼과 현실정치를 외면한 무능을 반복했고

이때 역시 마찬가지여서 결정적 순간에 비참하게

아무런 인지도도 없던 노태우라는 군부인사에게 또다시

대권을 내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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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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