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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초 김대중>

[분열된 야권]

[여소야대정국]

[제1야당총재]

[김대중 VS 노태우]

[3당합당]

[김대중 죽이기]

[정계은퇴]

[영국생활]

[정계복귀]

[DJP연합]

[4수끝에 당선]

[민중의 승리]

[IMF 국란극복]

[노벨평화상]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라봉봉>

 

[분열된 야권]

1987년 뜨거웠던 6월 ,

6.10항쟁의 결과로 전두환 대통령은 결국 시민들에게 항복을 했고

6.29 선언이 발표되며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수용됬고

제5공화국은 무너지고

오늘날 문재인 정부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제6공화국(1988년~)이 시작되게 됩니다

 

6.29선언을 발표하는 노태우

 

30여년간의 군사독재를 종결시키고

첫번째 제6공화국 대통령을 뽑는 선거로

민주진영은 신이 났고

당시 독재자 전두환에 대한 국내외적 반발감이 매우 컸던 상황이라

누구던 나오면 당선이라는 이미지가 생겨났고

 

나이가 들며 조급해진 야권의 두 슈퍼스타

김대중과 김영삼은 나가면 당선이라는 호재속에서

누구도 양보하지 않으려했고

결국 민주진영은 대권후보단일화에 실패하고 각각 따로나와서

크게 분열했고

 

대선직전 김대중과 김영삼의 갈등을 보여준 사진

 

전두환 핵심부하이자 제5공화국의 2인자로서

마지막 신군부의 불꽃이었던 육군대장출신 노태우 후보는

 

두 김씨들이 단일화하는 일이 없도록

선거전략을 잘 짜게 되었고

 

노태우는

찬조연사와 당홍보물 등을 통해

김영삼 후보는 여자문제와 능력문제 ,

김대중 후보는 신뢰성과 과격이미지 문제에 집중하며

네거티브 전략을 펼쳤고

선거 막바지에 북한에 의한 KAL 기 폭파사건까지 터지며

전두환은 일부로 노태우 당선을 위해

선거전날 폭파범을 전격 압송해 분위기를 바꾸었고

특히 가장 오랫동안 용공(공산주의 용인 , 협력) , 빨갱이 누명이 씌어져왔던

김대중 후보가 가장 큰 타격을 입었고

선거 결과 노태우는

36.6% 라는 ㅆㅎㅌㅊ 득표율로

김영삼 28% , 김대중 27% 득표율을 겨우 앞지르고

당선되게 되었고

 

환호하는 노태우 당선자

 

원래 김영삼과 김대중은 이전 같은 신민당 동지였기에

만약 둘이 단일화됬다면

민주화운동 대표로서 국민적 인기도 높았고

무조건 당선이 따놓은 상황이었는데

서로 각도기 잘못재고 욕심부리다

뜬금없이 군부에서 나왔기에 듣보잡이었던 노태우에게 

첫번째 민주화 직선제 대통령 자리를 헌납하게 된 것입니다

 

 

[여소야대정국]

이때부터 두 야당의 거두였던

김대중과 김영삼은 서로 반목하게 되었는데

 

무엇보다 실망한 것은 국민들이었고

5월 광주나 6월 항쟁처럼 목숨결고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국민들은

또다시 전두환 부하인 노태우가 당선되자 고배를 마셔야했고

대권은 뺏겼지만 그럼에도 제5공화국 심판론은 변하지 않아

불행중 다행으로 

1988년 4월 26일 실시된 13대 국회의원총선거에서

역대 최초로 집권여당이 과반수 의석확보에 실패해

노태우 대통령의 민정당은 299석중 고작 125석을 가져가며

야당에게 따이게 되었고

 

김대중은 대선패배의 아픔속에서도

총선에 전력해서

김대중은 일부로 당선이 확실한 앞순위 비례대표는 다른 인물들에게 양보했고

당대 국회의원후보중 국민적 인지도가 가장 강했던

자신을 비례대표 11번에 등록하는 도박을 거두었음에도

결국 김대중을 믿고 지지하며 김대중의 평화민주당(평민당)에게

표를 던져준 국민들로인해

평민당은 비례대표(전국구) 에서 16석을 가져가며

김대중은 또다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3대 국회는 

 

여당 민정당(노태우)이 125석 ,

평화민주당(김대중) 70석 ,

통일민주당(김영삼) 59석 ,

신민주공화당(김종필) 35석

 

이 되며

노태우 정부 , 13대 국회는

여소야대가 펼쳐지고

정치 거물들의 4국지가 펼쳐지며

노태우 정부는 역대 가장 무력화된 정부가 되었고

 

13대 총선 의석수

 

여소야대시 일어날 수 있는 일

 

신군부 타도를 외치며 일어났던 국민들은

겨우겨우 이간질 , 분열책으로 당선된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은 분위기였기에

노태우는 집권 초기부터 날라다녔던

선배 군인독재자 박정희와 전두환에 비해서는 일단 조용히 지내야 했고

결국 표가 몰린 야당은 본격적으로 군부독재 , 5공청산작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제1야당총재]

특히 그 최선봉에 서있던 인물이 바로 김대중이었고

김대중의 평민당은 원내 제1야당으로서

김대중은 제1야당 총재로 떠올랐고

1972년 40대의 나이에 유신독재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한지 16년만에

64세의 노인이 된 13대 국회의원 김대중은 다시금 국회로 돌아왔고

패기넘치던 40대 대권후보 김대중은 

어느덧 원로가 되어 김대중은 동료 의원들의 존경을 받는

의원중의 의원이 되어있었습니다

 

제1야당이 확정되자 축하받는 김대중

 

1989년 노태우는 평민당의 북한관련설 등

루머를 퍼트리며 다시 공안정국을 조성하다가

거센 비난을 받게 되었고

 

노태우 정부는 검찰과 안기부를 통해 소환장을 발부했고

김대중 총재가 거부하자

검찰은 여의도 평민당 당사에서 김대중을 강제구인하고

15시간동안 조사했는데

제1야당총재가 강제 구인된 것은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1989년 8월 4일 새벽3시 중부경찰서에 강제연행되어 14시간만에 조사를 마치고 나와 당원과 시민들에게 환호하는 김대중 총재

 

일단 직선제로 당선되긴 했던 군부출신 노태우 대통령이 다시

군부식 정치를 부활시키려는 기미를 보이자

빡돈 김대중은 성명을 통해

 

<김대중>노정권은 5공청산과 민주화를 할 것인가.

아니면 중간평가를 받을 것인가

양자 택일을 하라

 

며 강조하면서

 

<김대중>지금 시국이 정처없이 5공시대로 역진하고 있다

 

라며 공안정치를 비난했습니다

 

근데 뭐 이미 발톱과 이빨이 다빠진채 집권한

노태우도 별 수가 없었고

제1야당 수장으로서 한창 강성했던

노련미의 김대중은 대충 점프 몇번하면서

노태우가 던진 낡은 사법적 올가미를 벗어나며

노태우에게 엿을 먹여주었고

 

정치9단 김대중

 

(노태우는 아무것도 못하쥬 ? 타격 1도 없쥬 ? ㅋㅋ)

 

결국 노태우와 수구세력들은

김대중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고자 했고

 

당시 김대중과 사이가 나빠지고

노태우에게도 치이며 이도저도 아니게 된

김영삼 역시 김대중이 눈엣가시였고

 

김종필 역시 박정희의 2인자출신이자 군부출신인사로서

김대중이 거슬렸기에

 

대통령이 되고싶었던 야당 거물 김영삼과 김종필까지도

차기 대선주자로 확실시되는

제1야당 총재인 김대중이 띠꺼울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아다리가 맞아떨어진

노태우 대통령 , 김영삼 , 김종필은

위기에 빠진 보수계를 대통합해

김대중을 3VS1로 다굴하기로 결심했고

본격적으로 김대중 고립 , 김대중 죽이기에 돌입합니다

1990년 1월 22일에 있었던 3당합당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김대중 VS 노태우]

낌새를 느낀 정치9단 김대중은

기자회견을 가지며 정계개편 작업을 중지하라 촉구했습니다

 

<김대중>보수대연합을 위한 정계개편 주장에는

여소야대를 거꾸로 역전시키고 야당으로서 충실하겠다고 다짐한 인사들이

하루아침에 여당으로 변신하겠다는 것이며 ,

이는 대의정치 원리에 어긋난다

 

김대중의 이같은 경고에도

위기에 몰린 노태우 , 김영삼 , 김종필은 아랑곳하지 않고

 

'구국의 결단'

 

을 명분으로

합당을 선언했고

 

민주자유당(민자당)

 

을 창당해

3당합당을 실시해

초거대여당을 창설합니다

 

노태우는 대구와 경북 ,

김영삼은 부산과 경남 ,

김총필은 충청도를 배경으로 했기에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물량의 거대정당이 창당됬고

이로인해

김대중과 호남(전라도) 지방은 더욱 고립 , 분리되며

지역정치는 더욱 고착화되게 됩니다

 

사실 더 웃긴 사실이 있는데

맵고 독한맛이었던 박정희 , 전두환에 비해

물탄 맛이었던 노태우 대통령은 군부출신임에도

왔다리 갔다리 하며 원래 좀 흐릿한 성향이 있었고

 

(그래서 별명이 물태우임)

 

노태우 대통령은 원래 김영삼 , 김종필과 합당하기 전에

김대중과 합당을 바라고 있었고

노태우 자신 나름의 이상으로서는

군부세력의 핵심인 자신이

민주세력의 핵심인 김대중과 당을 함께하여

지역갈등을 극복하고 안정적 정국운영을 하는 구상을 해보기도 했고

 

노태우 대통령은 한번은 김대중과 만남에서

둘만 남게되자

김대중 총재에게 

 

<노태우>김총재 ! 이제 고생은 그만 둘 때가 되지 않았나요 ?

우리가 힘을 모아 정치를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라며 갑자기 민정당과 평민당의 합당을 제안해왔고

 

김대중과 노태우 대통령 , MBC

 

평생 군부와 싸워왔던 김대중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군부출신 대통령의 뜬금없는 질문에

그저 어안이 벙벙해 졌고

곧 마음을 진정시킨 김대중 총재는

 

<김대중>그건 안 될 말

 

이라며 노태우 대통령에게 말했습니다

 

노태우도 나름 보수와 진보를 전부 통합시키려는

ㅈㄴ 이상적인 완벽한 독재를 꿈꾼 것이었고

노태우도 업보가 많았기에 그게 될리가 없었지만

퇴임 , 실각 이후에도 민주화세력으로 세탁하며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기위해

김대중에게 발을 한번 걸쳐보려다 빠꾸맞은 것이었고

 

무엇보다 김대중은

그나마 박정희나 전두환보단 온건했던 노태우에게 잠시

다른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을 구호하기 위해 신군부에 맞서다 피흘리며 쓰러진

광주시민들과 시민들을 배신할 수가 없었고

노태우 역시 신군부 총책임자였기에

도저히 노태우에게 협력할 수 없던 것이었습니다

 

<김대중>국민이 선택한 결과로 오늘의 여소야대가 탄생하지 않았는가 ?

노대통령 자신도 여소야대 체제에 대해 하늘의 뜻이며 ,

국민의 뜻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

지금 여기서 민정당과 평민당이 합당한다는 것은

선거를 통해 보여준 국민의 의사에 역행하는 것이며 ,

국민 앞에서 말한 것을 어기는 행위이다.

노대통령이 민주주의를 표방한다면 지금까지 협력을 아끼지 않았듯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을 뽑아 국민을 배신하는 합당에는 도저히 협력할 없다

 

김대중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한 뒤

노태우 대통령에게 합당에 대한 강한 경고를 주었습니다

 

<김대중>들은바에 의하면 다른 야당과도 합당을 진행시키고 있다고 하는데 ,

그것만은 그만뒀으면 한다.

그것은 국민을 배신하는 행위이다.

앞으로 반드시 후회하게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아무리 첫번째 민주화 직선제 대통령이었음에도

신군부대장출신으로서 전두환과 육사동기에 고향도 같고

12.12 사태에 함께한 관계였기에

집권내내 민주화와 군부의 관계라는

딜레마가 가장 큰 정치적 부담이었고

 

특히 야당과 국민의 눈치를 보며

실권이 가장 적었던 대통령이었기에

4당체제의 여소야대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컷기에

수단 방법가리지 않고

김대중 , 김영삼 , 김종필 아무나 일단 되는대로 손잡고 싶은 욕망이 컸던 인물이고

 

3당합당 당시 노태우 세력 역시 김대중과 이야기를 나누며

민주주의를 위해 평생 투쟁해온 거물 정치인의 강한 의지와

의외로 김대중이 상당히 논리적이고 치밀한 두뇌의 소유자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끝내 김대중 회유 , 설득에는 실패합니다

 

<노태우의 김대중 평가>'다른 야당 지도자들과는 다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수없는 난경을 겪어오면서 얻은 경험이 몸에 배어 있었다.

관찰력이 예리한 것은 물론이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대목도 놓치지 않았다.

'어쨌든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의 총명함이 많이 흐려지는 것을 느낄 있었다.

(1992 대선 ) 총재가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것으로 오판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연민의 정마저 일었다.

 

[3당합당]

결국 노태우는 차선책으로

김영삼+김종필과 합당하게 될 수 밖에 없었고

 

1990년 1월 22일 집권여당 민주정의당(노태우)과

야당 통일민주당(김영삼) , 신민주공화당(김종필) 이

3당합당을 하여

초거대 맘모스정당인 민주자유당이 탄생하는데

 

3당합당 , 왼쪽부터 김영삼과 노태우와 김종필

 

국회 299석 중 218석을 점유하는 초거대 정당이 됬지만

김영삼도 근본이 원래

김대중 친구이자 평생 군부독재에 맞선 민주투사로서

자존심과 고집이 황소고집이었던 인물이라

노태우 말을 ㅈㄴ게 안들었고

거대함에 비해 단합은 잘 안됬던 정당이었습니다

 

무근본 정당이었던 민주자유당

 

[김대중 죽이기]

제5공화국을 심판하려던 13대 총선의 민의는 

3당합당으로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고

인위적 정계개편이 이루어졌고

민자당은 결국 김대중 죽이기에 돌입했고

민자당과 보수계에서는 차기 대선에서 김대중을 이길만한

전국적 인지도를 가진 인물이

민주투사 출신 김영삼밖에 없었기에

결국 우여곡절끝에 김영삼을 후보로 내보냈고

 

13대 대선부터 갈라진 김대중과 김영삼 두 김씨는

14대 대선에서 결국

여야로 갈라져 제대로된 1대1 진검승부를 펼치게 되었고

 

14대 대선 포스터 , 기호3번은 정치권의 탄압에 지쳐 출마한 현대그룹 재벌 정주영 회장

 

이전부터 김영삼은 인맥도 많고 의원계를 장악해오던 상황이었기에

언론인들도 YS장학생이라 불리는 언론인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군부출신들과 노태우 대통령 역시 퇴임후 감옥가지 않기위해

일단 김영삼에게 돈을 영혼까지 끌어다 모아 주었고

민주투사 출신 김영삼은 노태우 , 군부 보수계와 야합한 대가로

막대한 천문학적 자금지원과 부자들의 지원사격을 받았고

 

당시 김대중은 오랫동안 군사독재에 억압받은 민중과

각종 비리에 분노하는 청년들과

성장에서 소외당해온 빈민층들을 믿고 있었고

 

결국 14대 대선부터는

지역갈등 이외에도

본격적으로 계층갈등도 선거에 그대로 반영됬고

대체로 부자동네에서는 김영삼을 ,

가난한 동네에서는 김대중에게 표를 던져주는게 선거에 그대로 나타났고

 

김대중은 나름 해볼만한 선거라 판단했는데

투표결과는 예상과 크게 달랐고

김영삼 41.4% , 김대중 33.4% 로

김영삼이 조금 앞질러서 당선되었고

평생동안 군부에 맞서 싸워온 김대중은

이번엔 아예 같은 민주화 동지출신인 김영삼에게까지

대선에서 져버리자

완전히 절망에 사로잡힙니다

 

1990년대 김대중 죽이기라는 책이 출판될 정도로

보수계는 민주계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김대중 조지는데 열성이었고

 

화제가 된 도서 김대중 죽이기

 

당시 김대중도 워낙 고생을 많이해 지친 상태였기에

 ㄹㅇ 절망해왔는데

당시 김대중의 회고로는 ..

 

<김대중>1992년 12월 18일 , 제14대 대선이 나의 패배로 끝났다.

투표 다음날인 19일 새벽 3시경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계은퇴를 결심할 때가 왔음을 절실히 느꼈다.

그리고 우선 예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아내에게 나의 심경을 밝혔다.

그동안 나는 40년에 걸쳐 대통령이 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다.

다섯 번이나 죽을 고비도 넘겼고 ,

6년간의 감옥생활도 보냈고 ,

10년간의 연금과 망명생활마저 사양하지 않았다.

 

나라에서 민주주의와 정의와 통일을 위해

이상으로 희생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당신도 것이다.

그런데 행운의 여신은 번째에도 나를 저버린 듯하오.

내가 일은 여기까지인 모양이오.

나는 결연하게 정리하려고 하는데 당신은 동의해 주겠소 ?

 

김대중 부인 이희호 역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벌써눈가에 이슬이 맺혔는데

김대중은 뜨거운 사랑과 존경을 담아

그동안 헌신적으로 뒷바라지 해준 동지이자 벗이었던

아내를 힘껏 껴안아 주었고

아내에게 정계은퇴 의사를 밝히며

쓸것을 가져오라 하며

자기가 말하는 은퇴문을 작성해달라 부탁합니다

 

이희호 역시

흐르는 눈물속에서 그 내용을 받아 적었고

김대중의 비장한 결정에 할말을 잃은 이희호는

결국 김대중이 말하는 내용을 받아적는데

정서(글씨를 바르게 쓰다) 하는데

이희호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종이 위에 떨어졌고

한번 시작된 눈물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고

고개를 숙이고 우는 이희호가 처연해진 김대중은

이희호의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김대중>여보 , 우리 1980년 사형선고 받았을 때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웃을일 아니오 ?

 

김대중은 오히려 이희호를 위로해주었고

이희호는 잠자리에 누워서도 눈물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정계은퇴]

6선의원을 지내고

군부독재에 맞서 가택연금 , 사형선고 , 옥살이까지 하며

파란만장 정치인생을 지낸 한국 정치인 고생 끝판왕 김대중은

결국 40여년의 정치생활을 청산하기로 했고

 

김대중은 떠나면서 내건 슬로건이

 

'새로운 시작'

 

으로서

의원 , 당간의 송별회에서

앞으로 통일운동가로서 길을 가겠다며

새시작의 방향을 제시했고

지쳐있었던 김대중은 정계은퇴하고 미련없이 영국으로 떠났습니다

 

정계은퇴 기자회견하는 김대중

 

출국전 기자회견하는 김대중

 

정치 안해요 제가 안해요 이건 내문제니깐 내가 안하는거요 누가 나를 강제로 시키는 거요 , 라는 말을 해서 정치합성밈이 된 김대중 '정치안해요' 발언

 

김대중의 해외출국은 국내외적 큰 충격이었고

대선패배이후 갑자기 ㅈㄴ 뜬금없이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제1야당 총재 김대중이 떠나버리자

국민들은 그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것을 떠나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되었고

 

(단식투쟁이나 은퇴도 한국정치사에서 처음엔

매우 독특한 것이었고

이후 정치인들이 어설프게 반복하면서

쇼정치 , 구정치의 상징이 됨)

 

특히 웃겼던게 김대중에게 용공좌경으로 빨갱이 색깔론을 퍼부었던

보수언론들이 김대중 은퇴소식에

앞장서서

 

'거인퇴장'

 

이라며 칭찬해주었습니다

 

(아직 한국보수언론들도 김대중 선생님의 '기술' 을 잘 모르던 상황ㅋㅋ)

 

[영국생활]

김대중은 영국에서 교수나 민주주의 연구자 등과 교류하며

영국의 학문적 분위기에 흠뻑 젖어들었고

감옥생활과 망명당시 틈틈히 익힌 영어로 의사소통에 별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영국시절 이웃에 살던 스티븐 호킹 박사와 친해진 김대중 (김대중 대통령이 ㄹㅇ 뜬금없는 인맥 ㅈㄴ많으신분ㅋㅋ)

 

또 당시 김대중은 독일도 3번이나 방문해

동서독 출신 지도자와 만나 통일과정을 살펴보고

남북통일의 방법과 교훈을 얻고자 노력했습니다

 

(근데 정치 은퇴라 말해도 행보는 정치인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당시 김대중은 어짜피 김영삼 대통령 퇴임후에 대권가면

매우 유리한 입장이었기에 실제로 진심으로 은퇴한다기 보단

오랜 정치생활에서 잠깐 외국도 놀러다니며 휴식을 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이고

진짜 은퇴할거면 노무현 대통령처럼 퇴임후 농사짓는게

진짜 은퇴가 아닐까 싶습니다)

 

6개월만에 영국에서 귀국해서 환호하는 김대중 , 1993년 7월 4일

 

[정계복귀]

한편 1995년 6월 27일 광역 지자체 선거에서

민자당은 참패를 당해 민심이 민자당을 떠났다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주었고

시장 , 군수 , 구청정 , 시도의원 선거가

실시되자 김영삼의 민자당은 ㅈㄴ 조금 당선됬고

김대중 없는 민주당은 어마어마하게 싹쓸이하고

서울에서는 시장을 비롯해 시의원 133명중 122명을 당선시키는

기염을 통하며 완전히 김영삼 대통령을 앞뒤로 강간하고 있었고

특히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 아무리 전통적으로 친민주당 지역이어도

7:3이나 6:4면 모를까

워낙 격차가 비정상적으로 컸기에

김영삼 정권에 대한 민심이반이 심상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결과였습니다

 

당시 정계은퇴한 김대중은 금기를 깨고

정계에 복귀하지는 않았지만 민주당 후보를 적극 지원유세를 했고(??)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 ?)

 

하여튼 김영삼 대통령이 갑자기 캐뚜두려 맞을 각이 보이자

김대중은 갑자기 6.27 지방선거에서 압승한 직후인

1995년 7월 18일 정계복귀와 신당창당을 선언했고

2년 8개월만에 정계은퇴를 번복하고 다시 정계복귀합니다

 

국민우롱행위 은퇴약속지켜야ㅋㅋ , 경향신문

 

정치인은 책임감이 큰 자리고

중대사에서 함부로 말을 고무줄 잡아당기듯이

번복하면 안되는 법인데

김대중이 정계은퇴했다가 복귀한 것으로

반대자들에게 김대중은 죽어서도 두고두고 까이고 있고

차라리 은퇴선언보단 그냥 잠깐 지쳐서 쉬거나

책보면서 휴식하겠다하면 됬을 것인데

신뢰가 생명인 정치인이 이러는 것은

약점을 자초한 것이고

훗날 김대중을 존경하는 민주당 정치인들이

김대중식 정계은퇴번복을 그대로 모방한 것을 보면

김대중의 실책중 하나라 생각됩니다

 

논리왕 김대중

 

당시 김대중 역시 다음 대통령이 될거 같은 느낌 +

은퇴번복에 이때 심적갈등이 오졌던 상황이었고

 

하여튼

김대중의 정치복귀선언은

정계에 큰 태풍이 되었고

김대중은 당내분란이 있던 민주당에 들어가기 보단

신당창당의 길을 택했고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단독회담을 갖고

DJP(김대중=DJ , 김종필=JP) 연합을 결성했고

김대중은 본격적으로 대권행보를 보이며

취약지역인 영남 , 충청 , 강원지역을 순회하며

약점을 보완하려 했고

특히 대학생 , 청년들과 많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DJP연합]

당시 김대중과 김종필의 연합은 큰 충격이었는데

 

김종필은 박정희 대통령의 세자라 여겨진 인물이며

군부독재와 공화당 설계자 출신으로서

김영삼이나 김대중보단 딸려서 대통령이 되긴 어려웠지만

충청도 민심을 장악하고 있어 킹메이커로서는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정치 거물이었고

 

(왕이 되긴 어렵지만 타고난 재상감이랄까 ?)

 

어느덧 고령이 된 김대중이 막판에 대통령이 되기위해

급하게 김종필과 손을 잡아버리자

김대중계 내에서도 김종필과 단일화에 찬성할 수 없다며

제동이 걸렸고

김대중은 안팎의 도전에 시달리며

대권행보를 밟게 됩니다

 

김대중은 당시 이번 대선은 그 어느때보다

집권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고

김대중은 김영삼 정권의 실정을 파헤치고

한보사건 같은 권력형 비리 척결에도 노력했고

이에 외국 언론들도 대한민국의 정권교체 가능성을 보도하기 시작했고

 

박정희의 경제적 부하이자 한국 철강왕 , 포항제철 사장 박태준 역시

김대중의 날개 밑으로 합류해

김대중 + 김종필 + 박태준의 3자연합이 결성되었고

 

김종필+김대중+박태준의 연합

 

김종필과 박태준은 박정희가 가장 아낀 최핵심부하였기에

김대중은 보수계의 지원사격도 얻어내게 되는데

 

포스코 설립자이자 대한민국 철강왕 박태준

 

김영삼이 노태우 , 김종필과 손잡으면 야합이고

김대중이 박태준 , 김종필과 손잡으면 연합이냐는 말도 있기에

 

당시 유행하던 유행어인

 

'내가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

 

과도 맞아 떨어지는 상황이 됬고

의외로 이후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고나서 전두환이랑 친하게 지낸거만 봐도

정치인들의 행보는 참 거시기한 부분이 있습니다

 

[4수끝에 당선]

또 그동안 평생 투쟁가이자 카리스마 이미지였던 김대중은

국민들에게 존경은 받았지만 좀 무서운 이미지였는데

3번의 대선 낙방끝에 이때부터 이미지 , 쇼정치의 중요성을 알게 된 김대중은

TV프로그램에 나오며 그동안 폄훼되거나 왜곡되어진 김대중 이미지에서

인간적 김대중 이미지를 국민 , 대중들에게 보여주었고

 

체험삶의현장에 나와 신선한 모습을 보여준 김대중 , 이 시절에도 MLB 모자를 쓴 시대를 앞서간 쌉인싸였던 김대중ㅋㅋ

 

오랜 시간동안 갈고닦고 여러 풍파를 거친

경륜과 언변의 인간 김대중이 TV 속에서 서민들과 함께하며

국민들에게 신선하고 친근하게 다가오게 됩니다

 

김대중은 계속되는 TV토론에서

 

'준비된 경제대통령'

 

'IMF 국난을 해결할 대통령'

 

등 이미지를 굳히며 여론조사에서도 앞서갔고

김종필과의 연합에 비난받기도 하지만

도중에 나온 이인제 후보가 보수계와 영남권 표를 갉아먹어줘서

김대중의 최대 적수였던 이회창은 보수계 표가 분열되어

 

김대중 40.3% ,

이회창 38.7% ,

이인제 19.2% 

 

를 얻으며

김대중은 간신히 이회창을 누르고

4수끝에

대한민국 15대 대통령에 당선되게 됩니다

 

대한민국 15대 대통령 김대중

 

김대중 대통령 공식 초상화

 

티비에서 김대중이 당선됬다는 소식이 나오자

김대중의 일산 집 안팎은 삽시간에 환호성과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였고

지지자들의 환호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만세!'

 

'행동하는 양심 만세!'

 

'인동초 만세'

 

김대중 당선에 기뻐하는 당시 김대중 일산자택앞의 사생팬들

 

지지자들은 더러 부둥켜 안기도 했고

김대중은 4수 끝에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야간의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루어냅니다

 

<이희호>하의도에서 청와대까지 가는 길은 참 멀고도 험했다

 

근데 김영삼이 IMF 라는 거대한 똥을 싸질렀고

김대중이 국민과 세계적 존경을 받는 민주화운동가였음에도

막 정치에 입문한 보수계의 이회창을 1퍼센트 차이로

분열끝에 겨우 이긴 것을 보면

 

그만큼 김대중에 대한 불신도 상당했음을 의미했고

전통적으로 한국 보수계가 독재는 했어도

경제는 잘해왔기에 경제에 취약했던

진보 , 민주계를 극렬 반발한게 아무 이유없이

나온 것은 아닙니다

 

[민중의 승리]

하여튼 ,

김대중의 승리는 일반적 대선승리나 정권교체가 아닌

한민족 5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지배계급 , 기득권이

민중계급 , 피기득권에 의해 평화적 합법 정권교체가 되었다고 여겨질 정도였고

 

그만큼 김대중은 일반적 기득권 출신 정치인이 아닌

철저한 아웃사이더 출신 전라도 외딴섬의 고졸출신 대통령이었기에

대한민국 피지배계층 , 서민과 빈민 , 약자와 민중을

대변하는 이미지였고

 

오랫동안 대한민국 기득권 , 지배계층은 

조선시대 양반가로서 탐관오리로 있다가 망국을 불러오고

일제를 추종하며 친일파가 되어 독립운동세력을 탄압 ,

일제시대때 친일로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영미권이나 해외 대학에 자녀들을 유학보냈고

그 자녀들은 해방이후에 미군정과 이승만 자유당 독재에 붙어

기득권을 유지했고

일본군 장교 출신의 대통령이었던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며 완전히 핵심세력이 되고

박정희와 정경유착으로 성장하여 한국사회의 지배엘리트 , 핵심메인파워가 되었고

양반옷-일본귀족옷-양복-군복 등

옷만 살짝 갈아입으며 기득권을 유지해왔고

 

이완용 총리대신의 친일내각

 

군사정권

 

뿌리깊은 대한민국 정경유착 , SBS

 

(이는 보수계에서도 양심적으로 인정하는 역사적 사실로서

민주계 윤보선 대통령 일가의 윤씨집안이 A급 친일집안이거나

보수계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군 수석장교 출신이기도 해서

좌우 할거 없이 한국 엘리트층이 그만큼 부패하고 썩어있다는 것을 보여줌)

 

그만큼 철저한 비주류이자 탄압을 받으며

제도권 교육도 받지 못한 김대중은

한국 민중 , 피지배계층의 희망이었고

가히 녹두장군 전봉준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룬

전라도의 꿈이었다고도 할 수도 있습니다

 

김대중에게 큰 기대를 걸었던 대한민국 민중들 , 오직 국민을 위한 정치

 

그만큼 김대중 당선 당시

김대중에 대한 국민적 희망과 기대가 컸고

김대중의 당선으로 친일파들이 전부 청산되거나

갑작스러운 통일이 된다거나

막 별별 국민적 상상과 활력들이 많아졌는데

 

첫 남북정상회담후 김정일 신드롬이 일어나 남한에서 잠시 발매되기도 했던 김정일 티셔츠

 

한국은 짧게 나치독일에 점령당하고

전통적 강국이었던 프랑스에 비해

일본과 국력차이가 너무도 심하게 났고

35년이라는 세대가 몇번 바뀌는 긴 기간동안 점령당해

한국어도 잃어버릴 지경에서 해방을 맞았기도 해서

친일전범청산이 불가능하거나 쉽지 않았고

 

군부독재 역시 30년간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던 터라

김대중 역시 당선을 위해 막판에 김종필 , 박태준같은

박정희 부하들과 손을 잡았던 것이었기에

김대중 정권 당시는 그러한 변화가 급격하게 일어나지는 않았고

오늘날까지도 이런 문제는

여러 우리민족사적 숙제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출신이나 경력이 워낙

독특하고 유례없던 인물이라

확실히 이전정권 , 이후정권과는 달랐고

IMF 위기에서 단기간에 한국을 구하는데 성공한

아주 유능한 지도자였다고 생각됩니다

 

한국 보수계가

 

일제-미군정-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로 이어졌다면

 

한국 진보 ,민족세력은

 

홍경래의난-동학농민운동-의병전쟁-독립운동

-4.19혁명-5.18민주화운동-6월항쟁

 

등으로 이야기 되고도 있고

피지배층을 대표했던

김대중 당선은

길게는 5천년이나 300년 , 혹은 50년동안 기득권을 유지해온

극우 보수세력으로부터

민족 , 민주세력이 첫 승리를 거둔 역사적 사건이라고도

이야기 될정도로 한국역사에서 큰의의가 있었던 것입니다

 

김대중은 온갖 탄압과 불리함에서도 계속 일어났고

점차 노련미를 갖추며

자신의 약점을 언더독 효과(약자가 성공하길 바라는 심리)로서도 잘 이용하기도 했고

 

골리앗(독재)에 맞선 다윗 이미지였던 김대중

 

자신 나름의 국정철학이 존재한다는 점과

국제적으로도 큰 인망이 있고

초강대국 미국을 잘활용하고

국민들을 궐기시키는 재능을 가진 능력이 있었던 인물이었고

가히 한국 대통령중 얼마 안되는

대통령다운 대통령 중 한명이었습니다

 

미국 국회에서 연설하는 김대중 대통령

 

 

현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도 친했던 김대중 대통령 (파면 팔수록 기괴한 인맥이 많은분임ㅋㅋ)

 

김대중의 당선을 두고

세계 주요 27개국 121개 매체는 엄청난 사설 , 논평을 냈고

한국 국민이 자유선거를 통해 50년만에 역량있는 야당후보를

대통령에 선출 , 첫 정권교체를 이루고

민주주의가 성숙했음을 과시했다 논평했고

 

김대중은 일반적 야당후보가 아닌

역량이 있는 야당후보였고

세계 각국 언론에 긍정적으로 한국문제가 이렇게 보도된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미국>김대중의 승리는 경제위기를 초래한 현 지도층에 대한

유권자의 경멸을 반영한 것이며 ,

이는 한국 헌정사상 최초의 여야간 정권교체이다

 

김대중 당선은 그만큼 한국 역사에 의의가 있는 사건이었고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자신의 당선은 국민 전체가 대동단결할 수 있는

역사적 전환점으로 기억될 것이라 말하며

정치보복이나 지역차별 , 계층차별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습니다

 

<김대중>국민에게 국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겠다.

부패를 철저히 척결하고 정경유착의 고리를 완전히 끊겠다.

국민이 참여정치의 주역이 되도록 것이며

위대한 한국인의 시대를 여는 저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

 

김대중은 당선자 신분으로서

IMF 신탁통치에 대처해야하는 위치가 되었고

나라 경제가 외국에 넘어간 상황이었기에

당시 국민들은 거의 당시 IMF 상황을

제2의 일제강점기나 한국전쟁 수준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김대중은 국가부도의 위기상황속에서

IMF 경제체제에서 나오기 위한 노력에 전념합니다

 

IMF 극복을 위해 금모으기 운동을 독려하는 김대중 대통령

 

김대중이 당선되버리자 50년간 한국 지배엘리트로 군림해온

보수계는 가장 큰 위협을 느꼈는데

일단 김대중 당선자는 12.12 쿠데타와 5.18 광주학살 , 비자금 문제로

수감되 있던 전두환 , 노태우 전 대통령을 화해와 용서를 이유로 석방시켰고

특히 자기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온갖 박해를 자행한

전두환을 풀어준 것은

특히 보수계에서는 정치보복이 없고 큰정치를 하겠다는 것을

김대중이 직접 보여준 아름다운 일화로도 이야기 되고 있고

 

반면 당시 민주주의를 짓밟고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수천억 비자금을 만든 국사범들을 용서하는 것들을 보고

희생자 유족들은 김대중에게 심한 반발을 보였습니다

 

김대중이 IMF 대처와 독재자들을 용서 , 화해 조치를 취하고 있을때

한국독재정권의 최고핵심부서였던

안기부(중앙정보부와 국가정보원 사이에 있었던 정보권력조직) 는 

새로운 김대중 시대에 대처하기 위해

독재정권 시절의 국내정치 , 각종 기밀서류를 조직적으로 파기하여 물의를 일으켰고

독재정권 시절의 각종 공작관련 자료들이 이때 대부분 파기되었고

김대중 납치사건이나 정치사찰 뒷조사 파일도 상당부분 훼손됬습니다

 

민주화 전까지 대한민국 권력핵심기구로 군림해온 안기부(현 국정원)

 

[IMF 국란극복]

하여튼 ,

김대중은 좌우를 떠나 '유능한 대통령' 이었고

IMF 극복을 위해 고강도의 경제개혁을 발표하며

108개 공기업 민영화 ,

14만명의 공공부분 인력 감원(공무원 감축)

일본과 협상해 돈가져오기 ,

해외투자 유치영업 ,

30대 기업 구조조정했고

 

특히 2000년대부터

IT 산업과 문화산업 장려로 한류를 일으키며

한국 경제를 공장국가에서 지식 정보국가 , 문화국가 이미지로

탈바꿈 시켰다는 큰 업적이 있었고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통해 경제 내부에 자유로운 기풍을 불러왔고

진보적 인물이지만 괜히 사업가출신이 아닌것 답게

공무원 감축 등의 의외의 업적을 놀랍게 보았고

 

고연봉에 비해 창의 , 생산 , 문화적인 일을 하지 못하는 공무원 감축문제는

당시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큰 주요 화두였고

김대중과 동시기 대통령인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도

정부기관의 상당부분을 전자화해 공무원 30만명을 해고하던 시기였는데

김대중도 전국 도로에 무인단속카메라를 설치에

단속 인건비와 물류비를 줄였을 정도로

그만큼 김대중의 안목을 알 수 있고

 

국가 경제는 결국 민중 개인 한명한명이 부유해야 부국이 되는 것이고

공무원 집단이 큰 나라일 수록 국민들이 불행하고 가난한 것은 필연이기에

저도 민간기업을 살리고 국가는 최대한 여러 사업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게

역사적 논리에 의거한 제 생각이고 

 

오늘날에도 공무원들 눈치를 필요 이상으로 보는 정치인들이 많은 현실이고

특히 한국 , 동양은 과거부터

과거시험 , 관료제 , 연공서열제 , 종신고용 , 양반문화때문에

공무원을 서비스직 개념으로 여기며 쉽게 해고할 수 있는 서구문화와 달리

관료나 공무원을 존경 , 우대하는 문화도 있기에 민중적 정서도

공무원에 대해 높여주고 상전으로 여겨주는 문화가 있어온 전례도 있었기에

특히나 정서적으로도 공무원 개혁이 어려운 실정이고

이에 역대 정부중 김대중 정부빼고 작은정부 , 공무원 감축이 없었다는 말도 있고

 

좌우할거 없이 유일하게 공무원 줄인 김대중 대통령 , 과연 보통 사람이 아니었음 , 조선일보

 

오늘날 다시금 공무원이 필요 이상으로 증가하며 시대가 거꾸로 가고있음에

안타까움을 느끼는건 비단 저만의 생각이 아닐거라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은 현재 사실상 공무원 집단이나 다름없는

공기업들 규모도 너무 크다하고

학교 강의나 동사무소도 같은 단순 노동도 전부 컴퓨터 , 전자화 시키면 

공무원 엘리트 인재들을 민간기업으로 돌릴 수 있고

수십조나 절반 이상의 국세와 인건비를 절약할 수 있는데 아무도 안함 ,

못하는 걸수도)

 

하여튼 , 김대중 정부 당시

스티브잡스 , 빌게이츠 등

미국 IT 천재들이 한창 세계산업구조를

IT 구조로 개편하던 시기라

 

시대를 보는 눈이 뛰어났던 노련한 정치9단 김대중 대통령은

이 시대를 잘타고 미국 바로 다음으로 

IT , 문화계에 한국 경제를 선점 , 진입시킬 수 있었고

 

빌게이츠의 IT 도움을 받은 김대중 대통령

 

선점효과가 크게 중요한 IT 에서 한국은

오늘날까지 미국 바로 다음의 입지를 차지하고 있고

김대중은 한국을 개발도상국중 강소국 , 중견국가에서

선진국 , 강대국에 진입시킨 의의가 있는 인물이기도 했으며

여러 논란과 보수계의 공격속에서도

김대중이 그만큼 경제에서도

지금 국민의 힘이나 더불어 민주당 정치인들보다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같은 노력으로 김대중은

2001년 8월 IMF 구제금융 195억달러를 전액 상환했고

초고속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하며 성공적인 대통령이 되었고

2001년과 2002년에는 이자율을 낮추고 물가를 잘 관리하며

안정적 경제정책을 유지했고

2002년에는 한일월드컵 특수에 힘입어 경제성장률이 7.2% 가 되었습니다

 

 

[노벨평화상]

김대중은 외교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는데

대체적으로 지나치게 이상적인 평화주의자였던 김대중은

한때 적국이나 우호국 할 것 없이 모두가 잘 지내자는 식의 평화외교를 진행했고

잘 보면 대국적이지만 앞뒤 안가리고 지나친 낙관적 성향도 있어서

큰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대표적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으로

남북관계가 있는데

국제 냉전이 끝난 이후에도 오랫동안 적대적 관계를 유지했던 남북관계는

김대중 대통령 시기에 이르어서야 처음으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게 되었고

2000년 6월 15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처음실시되자

국내외가 크게 놀랐고

당장 통일이 될거 아니냐는 분위기도 감돌았습니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김대중 대통령은 이때 북한 지도자 김정일과 함께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며

남북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선언하였고

서로가 흡수나 무력통일 대상이 아닌 동등하고

공존 , 협력 , 대화상대로 여기겠다는

의미있는 평화선언이었습니다

 

아시아 민주주의 확립과 독재종식에 기여 ,

남북문제의 긴장해소라는

이 업적으로 김대중 대통령은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2000년 수상이기에

역사적인 21세기 첫 수상자이기도 해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의미있는 수상이었습니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김대중 대통령

 

그러나 지나친 평화주의 , 이상적 사상으로

김대중은 북한에 조건 , 대가없는 일방적인 지원을 펼쳤고

무엇보다 국민 동의나 여부를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북한에 불법적으로 세금을 송금한 대북송금 사건이 터지며

큰 비판을 받게 되었고

 

결국 이런 성향의 김대중 정부를 만만하게 본 북한도

한국 정부에 연평해전이라는 무력도발을 펼쳤고

김대중은 평화적 무드에 이 사건을 묻어가려 하며

애써 연평해전을 외면하며 또한 더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김대중 정권 말기엔

'홍삼 트리오' 라 불리는 김대중의 세 아들 (김홍일 , 김홍업 , 김홍걸)

이 권력형 비리에 모두 휘말리며

김대중 대통령은 큰 곤혹을 치뤘고

김대중 대통령은 2002년 월드컵 당시 자신의 아들 3형제가

교도소에 이송되는 것을 보았기에

대한민국의 4강 진출 쾌거에도 유일하게 영 밝은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김대중의 불분명하고 모호한 지나치게 낙관적인고 이상적인 성향은

이전부터 보수언론 , 정권이 집요하게 공격한 부분으로서

김대중이 대통령이 당선된 후 결국 터질게 터닌 것이었고

여러 논란속에서도

일단 대체적으론 성공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긴 대한민국 대통령이었고

여야 ,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대정치가로서

퇴임 이후에도 인기도 높아 민주계 정당은 정권수성에도 성공해

김대중은 자신의 후임자인 노무현 대통령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정치적 조언자로서 활동했으며

원로 정치인으로서 활동하며 이명박 정부의 강경한 대북정책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이명박 대통령 시기때 전임 대통령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조사를 받다 자살하는 일이 일어났고

김대중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의 사망에 큰 충격을 받고

건강이 급격히 악화 , 노무현 대통령 서거 3개월정도만에

폐렴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고

전직 대통령이었던 김영삼과 전두환이 문병을 왔고

평생을 민주주의를 위해 독재와 싸워온 인동초(겨울을 견디는 나무) 김대중 대통령은

그렇게 국민들의 우려속에 2009년 8월 18일

병세가 악화되 서거합니다

 

김대중의 일기장에는 

 

<김대중의 일기장>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라는 그의 글귀가 있었고

이는 그의 유언이 되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일기장 , 내가 살아온 길에 미흡한 점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

 

생전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김대중 대통령 장례는 국장으로 치뤄졌고

대한민국 역사상 국장으로 장례가 치뤄진 대통령은

박정희와 김대중밖에 없고

 

대통령이라고 아무나 국장을 치뤄주지는 않는데

평생 맞서 싸워온 두 대통령이 나란히 유이하게 국장으로 치뤄졌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와 민주화라는 뛰어난 업적이 있는

큰 시대의 거인이었다는 의미이고

 

영결식장이

박정희는 군사쿠데타와 연관이 있는 중앙청 ,

김대중은 평생 그가 몸담아온 국회의사당에서 치뤄졌고

 

그가 평생 몸담은 국회에서 진행된 김대중 대통령 국장

 

김대중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치되었고

차후 이희호 여사가 사망한 후 합장되었습니다

 

김대중은 20세기 독재로 얼룩진 한국정치에서

타협하지 않는 우직한 반대자였고

모진 시련과 역경을 이겨낸 인동초이자

한시대의 영웅으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여러 논란도 있지만

대통령이 되고 칼자루를 쥐고 나서도

자신을 박해한 세력에 단죄명분이 확실했음에도

단죄대신 화해와 통합이라는 큰정치를 선택한 모습은

좌우 , 여야 정치인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으며

가히 큰 정치인 , 선생님(호남 사투리로 슨상님) 이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인물이었고

기성 정치인들과는 달리

인간의 행복에 대해서 고민한 철학자이기도 했다는 생각이 들며

국란에서 위기의 대한민국을 구한 대통령 다운 대통령이기도 했습니다

 

<라봉봉>김대중 이야기를 읽어보니

국격이란 나라가 돈이 많고 적음이 아니라

결국 인물이 있냐에서 결정되는 것이라 생각되고

김대중 시대가 참 크고 굵직한 사건이 많았던거로 기억됩니다

 

제가 너무 어릴때지만 제가 사는 일산에 김대중 생가가 있기도 하고

옛날에 김대중 대통령이 제 모교 일산 한수초등학교 방문했던거로도 기억하고

월드컵 분위기도 있고 각종 국제문화도 많이 들어온 시기였고

뭔가 세련되고 선진적인 느낌이 있던 시기였는데

 

지금같은 코로나 시대에 김대중 대통령이 살아있었더라면

금방 위기가 극복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고

참 대단했던 인물이라 생각됩니다

 

대한민국 대통령 되기 전

가장 고생을 많이 한 사람답게

고생한 사람들의 심정을 잘 아는 인물이었고

근성이 있던 인물이었고

조금만 노력하고 겁먹거나 포기하지 않고

김대중같이 칠전팔기 근성있는 인물들이

정말 멋있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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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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