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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어린시절>

[봉하마을]

[가난과 학교]

[소년의 우상]

[백지동맹]

[부산일보와 정수장학회]

[부산상고]

[고시공부]

[만기전역]

[권양숙]

[노건평]

[사법고시 합격]

[고졸판사]

<라봉봉>

 

[봉하마을]

대한민국 16대 대통령 노무현 ,

노무현은 1946년 9월 1일(양력)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빈농 가정에서

아버지 노판석과 어머니 이순례의

2녀 3남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노무현 일가 , 노무현재단

 

노무현의 아버지 노판석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없었지만

일제강점기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타이어 매매업을 하며 돈을 모으다

어머니가 친척에게 사기를 당해서 전재산을 날려먹었고

 

이전부터 아버지는 내성적이고 온순한 성격에

가장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는데

 

반대로 어머니는 동네에서 소문날정도로

야무지고 말잘하는 똑순이로 통했기에

 

이후부터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구박받으며

무기력하게 지냈고

집안 주도권이 어머니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노무현은 어머니가 40살이 넘은 나이에 낳기도 하고

난산(순조롭지 못한 출산) 으로 태어났고

노무현이 태어난 날 집에 먹을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노무현의 누나가 옆집에 가서 

 

<노무현 누나>우리 엄마가 아이를 낳았는데

먹을 것이 없다

 

말해서 이웃사람이 쌀을 조금 주었습니다

 

노무현 아버지는 일본인 마름을 하던 동네 유지와

이웃사람들 사이에  땅 분쟁이 일어날때 약자인 이웃을 도와주다

곤란을 겪기도 했고

 

노무현 어머니는 워낙 가난에 한이 맺혀있어

아들이 출세해서 집안을 일으켜 주기를 바랬습니다

 

가난했던 환경적 요소로

노무현은 무엇을 해도 지기를 싫어했고

반항적이고 자의식 강한 소년으로 자라납니다

 

[가난과 학교]

학교에서도 가난한집 아이와 부잣집 아이가 대놓고 차별됬는데

학교 정문은 괜찮은 옷차림과 학용품을 가진 읍내아이들이 들어다녔고

노무현같은 가난한 아이들은 10리길을 걸어

학교 뒷문으로 다녔습니다

 

 

대창초등학교시절 노무현 (노무귀엽ㅋㅋ)

 

노무현은 가난했기에

초등학교 시절에도 크레파스가 없어서

미술시간에 꿀밤을 맞고 꾸중을 듣거나

회비를 내지 못해 여러번 교실에서 쫓겨났고

이유없이 친구의 새가방을 망가뜨리는 등

가난한 환경속에서 노무현의 반항아 기질이 싹트게 됩니다

 

 

그러나 노무현은 연설을 잘하는 어린이었기에

초등학교때 좋은 담임선생님을 만나서

1958년 4월 25일 대창초등학교 6학년때

전교 회장으로 뽑혔고

이때부터 어린 노무현은 자신감을 가지고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대창초 6학년 담임교사 신종생>

전교회장선거에 나가보라 권유했더니

처음엔

 

'안나간다'

 

고 했다그래

 

'자기 성취에 좋은 동기가 된다'

 

고 설득했다

운동장에서 회장 출마 소견 발표가 있었는데

 

'내가 이래 고추가 작아도 맵습니다'

 

고 좌중을 웃기면서 연설했다 (ㅋㅋㅋㅋㅋ)

웅변을 아주 잘했다

 

 

[소년의 우상]

어린 노무현에게는 

존경하는 우상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마을에서 유일한 대학생이었던

큰형 노영현이었고

 

노영현은 부산대 법대에 다닌 엘리트였는데

부모가 가난한 살림에서도

논밭을 팔아 학비를 댈 정도로 집안의 희망이었고

외모도 훌륭하고 성품도 온화해서

노무현의 정신적 지주이자 아버지처럼 존경하는 친형이었습니다

 

노영현은 집에 친구들을 데려와 시국토론을 하곤 했는데

노무현은 어려운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막연히 대단한 느낌을 받았고

 

 

노무현의 잔트가르(최강의 남자 , 영웅)였던 노무현의 큰형 , 육룡이 나르샤 명장면

 

초등학교 졸업후

노무현이 중학교 입학을 하려했는데

너무 가난해서 중학교 입학 등록금 낼 형편이 안됬기에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가

복숭아 농사를 지어 입학금을 낼테니 우선 입학을 시켜달라 간청했지만

거절당했고

어린 노무현은 이때 굴욕과 모멸감에

교감선생 앞에서 원서를 찢어버렸는데

화가난 교감선생은

 

<교감>이런 놈 공부시켜봐야

깡패밖에 안된다

 

며 더욱 거절했고

다음날 큰형 노영현이 학교에 찾아와

교감의 비교육적 언사에 대해

항의에 겨우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백지동맹]

중학시절 소년 노무현은

아파서 결석도 많이했고

친구들과 학교 땡떙이 친날도 많있지만

나름 공부는 잘했고

 

진영중학교시절 노무현 , 사람사는세상

 

당시는 이승만 자유당 독재 정부 말기였고

이승만 대통령 생일을 앞두고

학교에서 대통령 찬양 글짓기 행사를 열었는데

 

(이승만 자유당정부때는 이승만이 신성시되는

사회상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화임)

 

이승만 자유당시절 남산에 있던 25m 이승만 동상

 

노무현은 급우들을 선동하며

백지를 내며 백지동맹을 선동했고

 

행사가 부당하다는 항의표시로

 

'택도 없다'

 

는 의미로

 

'우리 이승만 택통령'

 

이라는 제목만 적어냈고

두달뒤 4.19 혁명이 일어나

학생과 시민들의 분노속에

이승만 정부는 완전히 산산조각나게 됩니다

 

4.19 혁명으로 시민들에게 철거되는 이승만동상

 

하여튼 ,

그러나 노무현은 당시 괘씸죄에 걸려서

교무실에서 하루종일 벌을 섰고

그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 박사가 미국에서 사망했다는 뉴스가

신문에 나자

선생님이 신문을 보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역시 이승만 대통령은 운을 타고난 사람이고

하늘이 내신 분이야

 

이에 더 반감이 생긴 노무현은

반성문도 쓰지 않고 집으로 도망쳤는데

큰형님에게 꾸지람 듣고

다시 학교로가서 사건을 유야무야되었습니다

 

[부산일보와 정수장학회]

중학교 3학년 ,

노무현은 시험을 잘봐서

부산일보 주최의 부일장학금에 선발되었고

그러나 ,

돈이 없어서 노무현은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고

공무원 시험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큰형님은

 

<큰형님>부산상고에 가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으며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도 할 수 있다

 

고 해서

가난한 수재소년 노무현은

1963년 부산상고에 입학하게 됩니다

 

부산상고 시절 노무현

 

운이 매우좋게도

부산상고 동창회 회장은

이전 노무현에게 장학금을 준 

부산일보 김지태 사장이었고

 

덕분에 부산상고에 진학한 노무현은 또다시

부산상고 동창회 장학금을 받게 되었고

이로인해 노무현은 평생동안

부산일보 김지태 사장을 존경하게 됩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으로 군사독재정부가 들어서며

언론의 자유에 제약이 가해졌고

 

5.16 쿠데타 거사 자금을 주지 않았다는 보복으로

부산일보와 문화방송 등이 거의다 빼았겨 버리고

부일장학재단도 5.16 장학재단으로 넘어가며

이는 이후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이름을 딴

 

'정수장학재단(정수장학회)'

 

이 됩니다

 

정수장학회

 

정수장학회는

박정희-박근혜 부녀와 연관있는

유명한 재단이고 

현재까지도 MBC(문화방송) 지분 30%와

부산일보 지분 100% 를 보유하고 있는 재단으로서

한국 사회각계의 유명인들과 연관이 있는 조직입니다

 

노무현은 이후 대통령이 되고나서도

정수장학회에 뺐긴 재산을 환원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방법을 찾아봤지만 권한과 절차가 없었고

더구나 정수장학회의 실질적 주인은

박정희의 딸 박근혜였는데

 

당시 박근혜는 야당대표 핵심인물이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야당대표 탄압으로도 비춰질 수도 있어 쉽지가 않았고

군사정권이 남의 재산을 강탈해

사회의 기득권을 장악해온 대표적 사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노무현>세상이 바뀌긴 했는데 이상하게 바뀌었다.

군사정권은 남의 재산을 강탈할 권한을 마구 휘둘렀는데 ,

민주정부는 장물을 되돌려 권한이 없었다.

과거사 정리가 제대로 권력만 민주화되어 힘이 빠진 것이다.

부당한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한테 좋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억울하지만 이것이 우리 역사의 한계일 것이다.

정수장학회 문제만 그런 아니다.

지난날 잘못된 역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

장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소유자가 정권까지 잡겠다고 했다.

그런 상황까지 용납하고 받아들이자니 너무나 힘들었다

 

오늘날에도 친일재산 , 군사독재자와 연관있는 재산

 

(박정희일가나 전두환 , 노태우 일가의 비자금 등)

 

, 과거재산 , 과거사정리가 제대로 안된 채

민주화를 맞은 대한민국이며

괜히 나쁜놈들이 더 잘산다는 풍조가 유행한게 아닌

대한민국인 만큼

 

이것이 언론이나 교과서에서 쉽게 말해주지 않는

우리사회의 진짜 불공정하고 어두운 현실입니다

 

(물론 보수계 말고 민주계 역시 친일 의혹이 많고

역사문제나 위안부 할머니를 이용한 장사 등

부당수익이 어마어마한 것으로 알고 있음)

 

실제로 제 친척들 이야기도 있고 전혀 영화나 허구의 소설이 아니고 실제로 존재하는 정치인 비자금 , 영화 돈의 맛

 

[부산상고]

하여튼 ,

부산사나이 그 자체였던 노무현에게

부산은 영원한 고향이었고

부산상고생 노무현은 부산상고는 평생 따라오는 결정적 이름이었고

 

사법고시에 합격했을때에도 ,

국회의원 , 대통령이 되었을때에도

 

최종학력 부산상고는

언제나 함께였고

부산상고는 노무현에게

평생을 컴플렉스에 시달리게한 주홍글씨가 됬을 수도 있고

대한민국 상류사회에서 노무현은

목포상고 출신 김대중과 더불어 유일한 고졸이었기 때문에0

최종학력 부산상고는

고졸성공신화의 언더독 효과(약자를 응원하는 심리)로 작용해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2002년 부산상고 후배들을 격려하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대한민국 건국초는 일제강점기와 전쟁으로

모두가 가난해 사실상 부자가 거의 없던 시대였는데

시대가 발전하며 점차

한국학생들은 

부모수준에 따라 계층도 나뉘게 되어

 

부잣집-중산층-가난한집 학생들은

 

명문고(부자)-평범한학교(평민)-실업계(서민)

 

으로 나뉘는 구도가 더 뚜렸해졌고

물론 5~60년대에도 경기고-서울대를 뜻하는

KS 마크 등

명문중고등학교 출신이 중요시 되었지만

나라가 워낙 가난하고 계층분화가 뚜렷하진 않았던 시기며

 

실업계 학교를 천시하는 오늘날 사회상과 달리

건국초나 군사정권 당시는 물론 그때도

땜장이 학교라던가 실업계학교 비하어는 있었지만

정부에서 실업계 장려정책도 펼쳤기에

지금과 달리 공부 잘해도 실업계를 가는 가난한 수재들이 여럿 존재했고

 

김대중 , 노무현도 실제론 여러 사회 , 환경적 요인에

상고를 다녔을 뿐이지

실제론 학교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고

괜히

 

대구공고 전두환-노태우 ,

목포상고 김대중 ,

부산상고 노무현

 

등 대통령도 오지게 배출한게 아닌만큼

초기 실업계 출신들은 오늘날과 달리

실제로 공부잘하는 학생들이

여럿 진학하기도 했기에

부산상고생들 역시 많이 정재계에도 포진하게 됩니다

 

그러나 노무현은 항상 가정형편에

무리하게 학교를 다닌만큼

부산상고 시절에도 방황을 많이 하였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담배를 하고

결석도 자주했는데

 

어린시절부터의 우상이자 아버지같은 존재였던

엘리트 부산대 법대생 큰형 노영현은

사법고시에 번번이 낙방하다 중도포기하고 오랫동안 실업자 생활을 했고

 

환갑이 훨씬 지난 부모님은 산기슭에서 고구마 농사를 지으며

영세민 취로사업장에서 일한 대가로 주는 밀가루와 

몇푼 안되는 돈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때

소년 노무현은 여름방학때 집에 가니

가족들이 메밀죽으로 저녁을 때우고 있었고

당시 경상남도 진영읍은 3년연속으로 수해가 나서

농사가 다 망했던 상황이었습니다

 

퇴임후 봉하마을에서 농사짓는 노무현-권양숙 부부

 

노무현의 두 형님은 취직을 하지 못한 실업자 신세였고

청소년 노무현은 취직을 하지 못한 형님들을 원망하면서

자신이 부모님을 모셔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공부를 시작합니다

 

노무현은 부산상고시절 3년내내 너무 힘들었고

한푼이라도 싼 곳을 찾아 하숙 , 자취 , 빈공장 숙직실을 전전했고

너무 서럽고 힘들어 눈물을 흘린 날도 많았습니다

 

 

졸업을 앞둔 초겨울에도 갈곳에 없어

학교교실에서 두 밤을 혼자 지내기도 했습니다

이를 악물고 공부했지만

1966년 2월 19일에는

농협 입사시험에서 낙방했고

2월 23일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됩니다

 

노무현이 고등학교 다니던 1960년대는

대한민국국민들이 대부분 어렵고 못살던 시기라

고등학교 졸업하면 대부분 대학을 가지않고

취업에 뛰어드는게 대부분이었고

막 고등학교 졸업한 청년 노무현도 그 대부분중 한명이었습니다

 

원래는 상고를 졸업하면 흔히 은행에 취직됬지만

노무현은 가난과 방황탓에 농협 낙방 , 은행입사가 좌절되고

삼해공업이라는 어망회사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고

 

삼해공업에서 그물짜는 여공들 , 부산역사문화대전

 

첫월급은 실습기간이라 하숙비도 안되는 2700원을 받았고

업무외에도 공장청소며 사소한 심부름을 다해야했기에

자존심 상하고 미래가 보이지도 않아

그해 4월에 다니던 삼해공업을 한달반만에 퇴사했고

 

노무현은 회사를 그만두고 받은 급여 6000원으로

헌 고시책 몇권과 술마시고 영화보든데 돈을 다써버리고

고향 진영으로 낙향합니다

 

[고시공부]

고향의 부모님은 아들이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여

곧 은행에 취직할 것이라 믿고

미리 동네에 자랑을 다해놨는데

무일푼의 거지꼴 모습으로 귀향한 아들을 본 순간

억장이 무너지는듯 했고

 

노무현은 실직해서 집에서 놀고있는 작은형 노건평과

경남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들판 뱀산 자락에

 

'마옥당'

 

이라는 토담집을 짓고 고시공부를 시작하였고

 

공부하는 노무현 , 변호사시절

 

한국문화에

김유신 열전에서도 막 김유신이 소년시절 굴에서 수련하고

백제 왕인박사가 책굴에서 공부했다거나

이율곡이 금강산에서 공부했다거나

하는 그런 풍류 문화때문에

옛날사람들은 이렇게 고시나 시험공부를 이런 토굴속에서 공부하기도 했고

 

사관학교 나오신 제 친척도 그시절 토굴 파놓고 공부했다 하시고

민주당 대권주자인 정치인 이재명도 절에서 사법고시 공부했다거나

하는 것을 보면

 

지금과 달리 옛날 사람들이 시험공부할때 그런 문화가 존재했고

그시절엔 대부분 집도 좁고 단칸방에 여러명이 뒤섞여있기에

소음이나 기타 등등문제로 이렇게 토굴 파놓고 공부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 옛날 사람들 사이엔 여럿 존재합니다

 

(물론 그냥 집에서 평범하게 공부해서

입시 성공한 사람들도 많기에

그런거랑 성적이 그렇게 관계있을지는 모르겠고

집안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학교공부 안할애들은 또 안함)

 

노무현은 일단 대한민국에서

괜히 대통령 해먹은거 아닌것도 있고

평생 승부사 기질이 있던것답게

고등학교 시절 하위권인 성적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어려운 시험인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예전엔 공부좀 잘해서 수재소리 듣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사법시험봐서 판검사되라'

 

라는 덕담을 건내던 시대였고

가난한 고학생이 골방에 틀어박혀 법전과 씨름한끝에

시험에 합격한후 사회정의를 구현하며 분투하려는 모습은

흙수저 성공신화라거나

한국의 개천에서 용난 성공신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이야기기도 했고

 

서울 신림동 고시촌의 한 고시생 , 경향신문

 

막 20살된 청년 노무현은

존경하던 법대생인 큰형을 어깨너머로 보며 영향을 받은 것도 있었을테고

찢어질듯한 가난과 세상에 대한 울분으로

한번 완전히 뒤집어 엎어보자라는 심정으로

시험중 대한민국에서 가장 어렵고

합격시 가장 특혜와 이권이 많은 시험인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공무원시험 메카 노량진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 서울경제

 

오직 로스쿨이라는 법학대학(로스쿨 , 법학전문대학원)을 나와야

법조인이 될 수 있는

오늘날과 달리

 

당시는

법조인이되려면 사법고시(사법시험) 에 합격해야했는데

 

당시 사법고시는 지금 로스쿨과 달리

대학을 안다녀도 응시할 수 있었고

일단 노무현이 사법고시 보던 당시는

대학을 다니지 않는 사람이 사법고시 응시자격을 얻기위해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

 

을 통과해야했는데

집안이 워낙 가난한 탓에 노무현은 공부할 여건이 되지 않았기에

곧바로 막노동을 시작합니다

 

노무현은 친구와 함께 울산에 있는

한국비료공장 건설공사에서 일당 180원의 막노동을 하였고

 

이것이 노무현식 스웩

 

훗날 체험 삶의현장에서 노가다하는 노무현 해양수산부 장관 (쇼였지만 실제로 과거 경력때문에 진짜배기였음)

 

합숙소 시멘트바닥에 가마니를 깔고자며 이악울고 일했지만

세끼 밥값 제하면 남는 것이없었고

일자리가 없어 공치는 날도 많아

밥을 굶기도 합니다

 

그러던중 발에 큰 못을 잘못밟기도 하고

결국 노무현은 친구와함께 밀린밥값 2천원을 값지 못하고

몰래 집으로 도망쳤고

또다시 집에 돌아온 노무현은 먹고살궁리를 하다

과수원을 만들기로 하고

과수묘목이 없어 작은형님과 함께 김해 농업시험장에가서

감나무 묘목을 훔쳤는데

 

묘목을 싼 신문지에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 공고가 눈에 들어왔고

노무현은 부랴부랴 공부를 해서 시험을 쳤고

결과를 마냥 기다릴 수 없어 그 기간동안

다시 밀린 밥값을 갚기위해

울산에가서 밥값을 갚고 4천원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작업을하다 목재에 맞아

이빨 두개가 부러지기도 했고

모아놓은 돈을 병원비로 날리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그러던중 친구가 신문에 난 예비시험 합격자 명단을 보여주었고

합격을 한 것이 보여집니다

 

[만기전역]

청년 노무현은 근데 군대가야했고

1968년 3월 육군에 입대했는데

당시는 군대가 복무기간이 36개월 , 3년이었기에

1971년 노무현은 인제 12사단 을지부대에서

상병으로 만기전역합니다

 

군시절 노무현

 

ㅋㅋㅋ

 

징병국가인 대한민국에서 20대 남자라면

대부분 한번씩 거치는 일이기에

별로 중요해보이지 않는 기록일 수 있지만

대한민국 정치인들의 군면제율이 높은 상황에서

이 평범한 이력은 노무현을 빛나게 해주었고

 

대통령사이에서도

 

이승만 미필 ,

윤보선 미필 ,

박정희 장교출신 ,

최규하 미필 , 

전두환 장교출신 ,

노태우 장교출신 ,

김영삼 학도병(한국전쟁) ,

김대중 목포해상방위대(한국전쟁당시나 기록이 없어 의용대 성격이라 함) ,

이명박 미필(면제) ,

박근혜 미필(여자)

문재인 군필(병사 , 특전병)

 

인데 오늘날까지도

병역문제 중 가장 논란이 없는 인물이 노무현이고

박정희-전두환-노태우는 육군사관학교출신으로

평생 군에서 있었지만

쿠데타를 일으킨 인물들이기에

 

제대로 군생활 만기전역 한 인물이 대한민국은

노무현과 문재인밖에 없고

두 인물다 정책에서는 논란이 많지만

군문제에서는 병사들의 애환을 알고있었던 인물이었고

 

물론 꿀보직일지언정 '내가나온 부대' 가 가장 힘들지만

노무현과 문재인중에서도 노무현이 더 빡셌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문재인은 대학생때 민주화시위하다 군대에 잡혀갔지만

애초에 명문대인 경희대 문과수석이라는 본적때문에

군내에서 암암리에 엘리트라 존중받았을 것인데

부산상고 노무현은 딱봐도 사이즈가 ㅈㄴ게 힘들게 군생활 뺑이치며

가장 고생했을게 눈에 보입니다

 

같은 일반병사들도 대우가 다르고

연예인들은 병사로 가도

팬과 기자 , 장성들까지 와서 보호해주는데

지잡이나 고졸들이 최전방가고

명문대생들은 특히 비밀스런 행정이나 꿀보직으로 빠지는 것으로 알고 있고

 

실제론 명문대생 출신 장교 , 병사들보다

노무현같은 빽없고 연줄없는 병사들이 국민 , 군내에서 다수기에

사람들이 노무현에 많은 공감을 한 것이고

그렇기에 국민들이 대통령중에서도

인간 노무현에게 가장 친근함을 느낀 것입니다

 

(또 괜히 노무현이 대통령되고 연설할때 뺑뺑이 얘기하며 빡돈게 아니라 생각함)

 

보통 썰들에서는

군대다녀오니 집안 망해있었다는 암울한 썰들이 많은데

다행히 노무현은 전역했을때

집안 사정이 많이 좋아져있었고

형님들이 세무공무원으로 취직해서 월급이 나와

형편이 점차 피게 됩니다

 

[권양숙]

이시기 노무현은 고향마을처녀 권양숙과 사귀기 시작했고

시골총각처녀 두 사람은 자신들이

미래의 대통령과 영부인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치도 못했을 것입니다

 

노무현과 권양숙

 

당시 권양숙 아버지는

밀양공립농잠학교를 졸업하고

일제강점기 창원군 진전면의 서기로 일했고

광복후 남조선로동당에 가입 ,

막걸리의 도수를 높이려 메탄올을 넣어 친구와 마시다

실명하여 장님이 되었고

한국전쟁시기엔 인민군에 협력 ,

이후 체포되어 교도소에서 복역하다

1971년 옥중사망했는데

사망할때까지 전향하지 않은 비전향 장기수였고

 

이런 상황에서 석방과 재수감을 거듭하다

세딸과 막내아들을 남겨두고

감옥에서 사망한 인물이 노무현의 장인이었고

 

둘째딸인 권양숙은 비극적인 가정사로 고통스러운 유년을 보내다

역시 가난으로 고통스러운 유년시절을 보낸 노무현과 만나

서로를 의지하게 되었고

어린시절부터 잘 아는 사이였지만

20대초반에 다시만나 서로 책을 빌려주고 돌려받는 것을 구실삼아

자주 만나게되어 자연히 연애를 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노무현의 회고 ,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중에서>

2년 동안 커피 한 잔 값 들이는 일 없이 맨입으로 연애를 했다.

밤이 이슥하도록 화포천 둑길을 함께 걸었다.

밤하늘에 쏟아질 듯 은하수가 흐르는 여름날 ,

벼 이삭에 매달린 이슬에 달빛이 떨어지면

들판 가득 은구슬을 뿌린 것 같았다.

우리는 그 사이 논길을 따라 걷곤 했다.

 

아내는 그때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에 빠져 있었다.

안나 카레니나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두꺼운 소설을 끼고 살았다.

동네에 둘이 사귄다고 소문이 났다.

우리 말고는 처녀 총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소문이 나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돌아보면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게 행복한 시간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치만 상고나와서 사법고시공부한다고 책붙들고 있던

노무현은 좋은신랑감이 아니었고

당시는 사법고시를 전국에서 60명뽑던 시대기에

서울대 법대를 나와서도 실패하는 경우가 허다하던 시기였고

 

서울대 법대는 당시 공부 제일 잘하는

경기고 출신들이나 전국에서도 공부를 가장 잘해서

입시에서 전국 1등을 한다거나 가는 그런 학교였기에

전국에서 시험공부 가장 잘하는 애들도 떨어지는게 사법시험이고

하여튼 ㅈㄴ 어려운 시험이었는데

그걸 경상도 지방의 어느 곳에서

계속해서 공부하고 있던 상고출신 노무현이었습니다

 

양측 부모님들 생각도 엇갈렸는데

권양숙 어머니가보기엔 노무현은 딱 귀한딸 밥굶기기 좋은남자였고

 

노무현 집안에서는

무현이가 재주가 좋아 고시에 합격할 것이라 믿었기에

나중에 만약 합격이라도 한다면 부잣집 처녀에

장가들거라 확신했기에

권양숙과 노무현 집안에서도 심리전으로 티격태격하고 있었고

그러다 결국 사랑해

1973년 1월 둘은 결혼식을 올려 부부의 연을 맺게 됩니다

 

노무현과 권양숙의 결혼식

 

노무현 권양숙 부부

 

[노건평]

노무현이 사법고시 공부하던 시기

노무현이 존경하던 큰형 노영현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무기력하던 아버지를 대신해

아버지같이 굴었던 큰형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노무현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노무현>형의 죽음 이후 마음속에서는

삶과 죽음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생각들로 가득찼다

 

이런 상황에서 작은형 노건평이 가장 역할을 하게 되었고

노건평은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는것부터

노무현의 책값과 용돈 , 아들의 우윳값까지

어느하나 빼놓지 않고 다 보살펴 주었고

 

노무현을 평생 뒷바라지했던 작은형 노건평

 

1968년부터 세무직 9급공무원이 되어

10년간 지방세무서에서 근무하던 노건평 역시

노무현이 희망이라 믿고

머리좋은 막내가 반드시 사법고시에 합격할 것이라 믿고

한마디 불평도 없이 그 모든 일들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봉하대군' 이라 불리며 부정부패에 연루된 노건평 , 큰형과 함께 고생하며 노무현을 키운것도 사실이고 훗날 노무현 발목을 잡은것도 사실임

 

[사법고시 합격]

노무현은 7년이라는 길고긴 시험기간동안

독학한 끝에 결국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작은형 노건평과 아내 권양숙의 지극한 정성과 도움으로

1975년 제17회 사법고시에 합격해버렸고

당시 고졸 합격자는 노무현 단 한명밖에 없었습니다

 

년수로는 7년 ,

군복무를 마치고 공부를 시작한지 4년만에 합격한 것이었고

 

조선시대로치면 양반가가 아니라 노비 , 평민출신이 장원급제를 한것이나

다름없었기에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나름 큰 충격적 사건이었고

 

합격소식을 들은 노무현의 아내 권양숙은

노무현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눈물범벅이 되어 엉엉 울었습니다

 

<노무현>아내가 무릎에 얼굴을 묻고 눈물범벅이 되어 엉엉 울었다.

내가 사법고시에 합격한 것은 벌레가 사람이 것만큼이나 사건이었다.

돼지를 잡고 풍물을 치면서 ,

일주일 넘도록 마을 잔치를 벌였다

 

장원급제한 후 금의환향하는 급제자 , 조선시대 재현행사

 

마을에 내걸린 사법고시 합격 현수막

 

합격하고난뒤는 그저 씩 웃고 자랑삼아 넘길 고생한 추억정도겠지만

막상 준비생인 시기엔 10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ㅈㄴ 심각한 문제이고

고시나 시험공부란건

단순히 공부해서 합격하는것 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자금원도 확보해야하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편견 등 정치질도 작용해야하는데

 

보통 서울대 법대다닌다하면 대부분 당연히 합격하겠지라는

주변의 기대도 있고 하루종일 법전을 보던

방에서 딸딸이를 치던간에

아무도 신경 안쓰고 방안에 과일 가져다준다거나 그냥 냅둘텐데

 

부산상고나온 노무현은 취직해야한다는 압박도 있었을테고

그걸 ㅈㄴ게 힘든게 한 것이기에

권양숙이나 노무현 주변 사람들도 엄청난 감동이자

거의 우리 민족설화속에서 나오듯이

이무기가 천년만에 용이 되어 승천한 격이었고

 

시골답게 이미 무현이가 사법고시 공부하러

몇년간 잠적한 것도 소문도 다났을 것이고

 

동네 힘쎈 청년 무현이가

사법시험에 합격해 갑자기 장원급제한 이몽룡이 되버리자

마을에서도 잔치분위기였고

돼지를 잡고 풍물을 치며 일주일 넘도록 마을 잔치를 벌였는데

그럼에도 기쁨을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퇴임후 봉하마을에서 마을잔치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

 

[고졸판사]

노무현은 7기 연수생으로 들어갔는데

부산상고 , 대학다닌적 없음이라는

워낙 말도안되는 유일한 스펙이었기에

금방 연수원에서도 노무현에 대한 소문이 나버렸고

 

정장입은 동기들 사이에서도 혼자 허름한 점퍼입고있는 노무현 , 사법연수원 시절

 

힘을 숨기던 고졸봉하일찐짱이 전학와버렸다는 소식에

대학생들로 가득한 사법연수원이 웅성댔고

대부분 사법연수원생들은 서울법대 출신이라거나

명문대 출신 동료 , 선후배 사이였기에

 

이미 연수원 전에도 알고지낸 사이였지만

노무현은 연수원에 아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고

그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밥을 하며 점심시간이 괴로울 지경이었습니다

 

(역시 혼밥시대도 노무현 대통령이 최초시고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셨군)

 

노무현은 꿈에 그리던 엘리트가 됬음에도

엘리트 집단의 주류 네트워크에 어울리지 못하는

아웃사이더 엘리트였고

 

사법연수원시절 노무현 , 근데 글과는 달리 사진으론 쌉인싸임 ;;

 

노무현은 경상도 시골 봉하마을에서는 일진짱이었지만

막상 사법연수원 가보니

전국 부잣집 자녀들 , 서울법대출신들이 ㅈㄴ게 많아

시골쥐 , 우물밖을 나온 개구리는

그들과의 힘의 차이를 느껴버리게 되었고

 

사법고시를 합격하는거 자체가 어렵지만

그 합격생들을 모아놓은 사법연수원에서도

성적에 따라

상위권은 판사 ,

중간따리는 검사 ,

하위권은 변호사로 임명되는데

 

<어느 변호사>판사 임용 성적이 되면 반드시 판사에 지원한다.

150등까지 검사 지원자가 명도 없는 것은 오래된 얘기다.

오히려 김앤장 같은 대형 로펌 지원자는 있다.

성적대로 차례로 판사를 채우고 ,

다음 성적부터 검사와 대형 로펌 변호사가 된다.

연수원은 판사에게 우월감을 ,

변호사에게 좌절감을 주는 곳이다.

 

노무현은 성적이 중간에도 못들었음에도

판사에 임용되었고

 

그럼에도 고졸이라는 이력이 워낙 특이해

성적이 중간에도 못들었음에도

윗분들의 비호속에

고졸쿼터제 , 언더독(약자를 응원하는 심리) 버프를 받고

판사로 임명된게 아닐까 싶습니다

 

노무현은 대전지방법원에서 판사생활을 했지만

모범적 법관도 , 우수판사도 아니었고

노무현 판사는 생계형 범죄에는 무척 관대했습니다

 

<노무현>나는 이른바 생계형 범죄에 대해서는 무척 관대한 판사였다.

닭서리를 하다가 잡혀온 젊은이나

소액의 '촌지' 를 받았다가 기소된 하급공무원들에게는

무죄나 집행유예를 주려고 애썼다.

사연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도무지 남의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입견에 사로잡혀 구속영장 서류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대충 영장을 발부한 일도 있었다.

판결을 내릴 법원직원의 청탁 때문에 영향을 받은 적도 없다고는 없다.

결국 1년도 채우지 못하고 판사직을 그만두었다.

계속했더라도 훌륭한 판사가 되지는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라봉봉>노무현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정치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모두가 가장 친근하고 인간적인 대통령으로 기억하고있고

반대세력들도 노무현의 인간미는 까지 못하고 있습니다

 

쓰면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하다 생각된게

노무현은 사법시험 합격이라는 이력이 없이는 설명이 안되는 인물인만큼

 

흙수저+고졸로서 가장 정부기관 , 사법시험제도의 혜택을 본 인물이고

또 그로인해 대통령까지 한 인물인데

 

정작 대통령이 되고나서 미국식 입시제도(입학사정관+수시제도) 나

로스쿨을 확대 , 도입시켰는데

 

실제로 세계에서 가장 잘난나라인 미국식 정치제도와 경제는

전부는 아니어도 대체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선진적인 형태이기도 해서

미국이 방구라도 뀌면 다들 흉내라도 내는게 세계적 실정인데

 

그렇다고 미국이 한다고 다 옳은식으로

그 나라의 풍토나 현실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따라한다는것은

옳다고 보지 않으며

따라할거면 제대로 따라하던가

딱 노골적으로 기득권을 지키기위해 구색만 따라하는

헬반도식 형태로 따라하는 경우가 많아

비판받고 있고

 

대표적으로 수시나 로스쿨 역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악용되고 있거나 악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여러 비판이 있으며

사실 저는 수시던 정시던 로스쿨이던 사법시험이던

원래같으면 ㅈ도 관심이 없지만

문제는 이것들의 최종도착지는 결국 공무원이고

 

공무원은 국민(라봉봉)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것인데

본인들은 공정한 방식으로 공무원 , 기득권이 되었으면서

기득권이 된 자들이 멍청한 자식에게 세습시키기 위해

방식을 계속해서 불공정하게 바꾸고 있기에

문란한 방식으로 제도를 꼬아가고 있다는 생각이고

 

한국식 로스쿨은

미국식 로스쿨과도 근본적으로 다르게 운영되고 있고

기존 사법시험보다 못하다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군사정권 시절이

제도권 교육들이 투명 , 심플하고 공정하게 돌아갔고

민주정부들어서부터는

계속해서 제도들을 복잡하게 꼬아가고 있다는 생각이고

 

특히나 법 , 의학 , 허가정원이 국가적으로 인원이 제한되어

실력과 상관없이 국가허가만 얻으면 단가가 강제로 높아지는

독과점형 직업군에서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고

특히 이런 직업군은 연봉 1억이나 그이상의 사회적 직위가 강제로 보장되기에

20대가 아닌 30 , 40대들 역시 도전하는게 다른 직업군에 비해 많은데

그들의 재기회가 사실상 박탈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무현은 자기가 고생해서 올라간 계층사다리를 대통령이 되고 걷어 찼다고 생각됩니다

 

시험성적 줄세우기가 문제가 있다지만

학생들이 뭐 실무나 현장경험이 있는것도 아니라

무슨 이력 요구하는게 말도 안되는 것이기에

 

사실 모든 입시과정이

운전면허처럼 시험성적 100%로 뽑을 경우 

금수저던 흙수저던 연예인이던 불공정이라는 말이 싹 사라지게 되어

불공정이라는 말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데

 

로스쿨은 솔직히 제가 잘 몰라서 그렇다쳐도

한국 현실은 변호사가 길에 채이는 미국과 현실이 다르기에 느낌이 쎄하기에

성적앞에서 금수저든 흙수저든 말이 아예 나오지 않는 사법고시가 가장 공정하다는 느낌이고

 

(인구 1만명당 변호사수는 미국 41명 한국 4명 일본 3명 ,

그리고 미국은 공교육을 사실상 버린 상황이고 사교육과 자본주의가 주도하고 있는데

기득권 자녀에게만 유리하게 판을 짜는 헬반도식 모방이 너무 지나침)

 

무엇보다 대학입시를 경험한 저로서는

노무현때부터 확대된 수시는 진짜 말도안되는 제도라 생각하고

 

만약 평생 역사서를 읽어서 이미 교수나 박사 논문급 글을 쓰고있는

제가 지금 역사학과를 간다 치면 저는 지금 나이가 있고 학교다닐때

17살에 한국사 능력검정시험 1급을 별다른 공부없이 기초상식수준으로 땄지만

학교공부를 역사(국사 , 한국근현대사 , 세계사) 빼고 그닥 잘한 학생은 아니었기에

무조건 정시로 갈 수밖에 없게 되는데

정시를 뽑는 인원은 지금 수시의 반도 안되는 것으로 알고 있고

진짜 저처럼 청소년 시기 역사공부만 제대로 해도

부모빽없이 수시로 역사학과를 간다는 거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지잡 제외)

 

역사학과도 100% 비리가 작용할수밖에 없고

그냥 학생이 진보성향이던 보수성향이던 흙수저던 금수저던간에

입시나 시험제도에서 만큼은

아무말 안나오는 운전면허식이나 군사정권시절식 성적 100% 줄세우기가

가장 공정하다는 생각됩니다

 

다행히 역사나 문학 , 철학 , 연예계 , 치킨집 등의 분야는

법학이나 의학처럼 국가에 의해 허가된 사람만 하는게 아니기에

그닥 상관은 없는데

이게 국가에서 강제로 이익을 보장하는 독과점형 이권에 관련된거기에

지금도 논란이 심한 것이고

지금 현실적으로 대한민국 현실상

제글을 읽는 사람들 역시 본인이거나 분명 주변에 고시생 , 입시생 , 재수생 , 공무원준비생들이 ㅈㄴ게 많을텐데

 

제가 수능보던 2012년 당시에도 공부잘하는 학생들 역시 

옛날같으면 서울대나 연고대 갈애들이

정시정원이 줄어 다들 1~2등급 맞고도 듣보잡 인서울로 밀려

잘했는데도 재수한다거나 학벌신분제 사회 대한민국에서 주홍글씨로 낙인되듯이

 

잘하는 애들 역시 잘하는대로 억울할거고

가난때문이나 학창시절에 공부를 못해서 재수하는 사람들 역시 자리가 없어 억울할텐데

그렇기에 제 생각이 맞다 생각되고

 

물론 잘하는 애들은 기어코 1등급이나 백점찍고

어느 대학이던 정시로 다 뚫겠지만 사람은 사람이기에 실수하거나

미끄러질 수가 있고

실제로 수능 만점자나 3~4개 틀린 사람들은 다 교과과정수준은 마스터했기에

실력차가 나지 않는데

입시에서 사람들은 수능 만점자 , 서울대만 기억하는 현실이고

 

70점 이하 학생들은 솔직히 입시공부 많이 안한게 맞지만

입시공부제대로한 95점~100점 사이의 학생들도

가끔 ㅈ같은 문제 나와 틀린다거나

찍은게 맞는 뽀록도 터지고 아니면  실수로 마킹 실수할수도 있는데

문제는 계속 정시가 계속 축소되면 여유가 계속 줄어들어

옛날에는 10개 틀려도 서울대를 합격하면

지금은 5개틀려야 합격한다거나

이런식으로 계속해서 학생들의 기회가 줄어드는 것이고

 

점차 이러면 서울대나온 기성세대보다 인서울 평범한 대학 나온 애들이

성적수준이 비슷할 것이고 부모빨 뒷구멍 수시로 들어온 자질미달 서울대애들보다

정시로 들어온 인서울 대학생들이 수준이 훨씬 높을 수도 있고

이런거때문에

누구는 노력없이 ㅈㄴ 꿀빨고 누구는 노력했는데도 ㅈㄴ 뺑이쳐야하는 현실이 될수도 있습니다

 

(이미 현재 현실이기도 하겠고)

 

그렇기에 그냥 노무현이랑 이후 대통령들이

자기자식들에게 이권세습하고 이후세대들 못올라오게하는 법안들을

생각없이 받아들여 ㅈㄴ 문란하게 꼬아버린 점도

분명 있다는 생각입니다

 

음모론이라기보다 분명 대통령 주변 공무원들 , 법조인들도 자녀들이 많기에

노무현이나 대통령들이 자기자식 제도적 세습시키려 그랬다기보다

대통령 주변 사람들이 그러려고 선동 , 설치는것을

대통령이 통제하지 못한거였고

그런 세력들에게 처참하게 길을 열어줬다고 보고 있습니다

 

인간 노무현 , 친근한 이웃 노무현 이미지 뒤에

엄연히 사법고시라는 제도가 만들어낸 인물이 노무현이었고

 

(문재인도 마찬가지)

 

노무현이 사법고시 합격 안했으면 과연 정치계에 갔다거나

그런 인간적 매력 하나만으로

김영삼 , 김대중이 노무현을 데리고 갔을지도 의문이고

 

잘나가는 게임들은 과금구조가 단순 , 확실한데

망겜들이 계속해서 자잘하고 불투명하고 말도안되게 캐시질 유도해서 유저들 돈 빨아먹듯이

 

군사정권 시절 단순 , 확실한 제도로 제도권에 편입한 기성세대들이

계속해서 연줄없는 일반인들의 제도권 진입을 복잡하게 꼬고있다는 생각이고

물론 이미 제도권에 편입한 기성세대들의 자녀들에게는

점차 단순 , 확실해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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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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