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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회 스타 노무현>

[김영삼 VS 김대중]

[김영삼의 영입]

[노무현 VS 반란군 총잡이]

[초선의원 노무현]

[청문회 스타]

[3당합대 반대]

[꼬마 민주당]

[노무현 VS 조선일보]

[노무현 VS 충직한 군인]

[김대중 없는 민주당]

[정치 1번지]

[하로동선]

[김대중 대통령]

[종로 당선]

[바보 노무현]

[노사모]

[해양수산부 장관]

[계란으로 바위치기]

[정몽준과 단일화]

[노무현 대통령]

<라봉봉>

 

[김영삼 VS 김대중]

돈 잘버는 세속적 변호사에서

군사정권의 인권탄압사건이었던 부림사권을 계기로

사회정의에 눈 뜬 노무현 변호사는 그렇게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고

 

부유하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음에도

기득권을 버리고 고난의 길을 간 노무현을 주변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

그 결과는 결국

1987년 11월 변호사 업무정지 명령이었습니다

 

1987년은 어둠과 빛이 교차하던 시기였는데

성공한 시민혁명이었던 6월항쟁으로

그토록 바라던 민주화와 대통령 직선제가 이루어졌지만

 

민주진영의 두 거물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열로

단일화가 실패하고 둘은 각기 단독출마하여

13대 대선에서 전두환의 부하인 신군부 대장출신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버렸고

군부불법정권을 물리치고 힘들게 민주화를 이루어낸 시민들은

합법정권을 가리는 직선제 대선에서도

군부출신의 노태우가 당선되자 고배를 마셔야만 했습니다

 

13대 대선 포스터

 

 

그럼에도 민심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한때 민주화동지였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이 일 이후부터는

서로 앙금이 생겨 각기 다른 길을 걷게되는데

 

김대중(왼쪽) 과 김영삼

 

김영삼과 김대중은 대선 패배에도

노태우가 전두환의 설계와 양김의 분열로 당선된 것이지

그가 결코 민심으로 대통령이 된게 아닌 것을 잘 알고있었고

민심을 믿고 있었기에

대통령을 뽑는 대선에서 패배했을지언정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에서 승리하고자 주력했고

대선패배후 양김은 민주화운동 출신 인사들을 영입하는데 주력합니다

 

 

[김영삼의 영입]

대학시절에도 정치학을 부전공했고

어린시절부터 대통령이 되고싶은 꿈이 있었던 김영삼은

한국 최초의 의회주의자 정치인으로서

인재를 보는 눈이 있었던 인물이었고

 

1988년 초 ,

한창 부산에서 활약했던 노무현 변호사에게

영입제안을 하게 됩니다

 

노무현을 정치계에 영입한 김영삼

 

당시 노무현 일가는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노무현 변호사는 잘나가다가 갑자기 돈벌기를 중단하고

민주화운동에만 매진해 생활비를 제대로 가져다 주지 못할정도로

가정형편도 기울던 상황이었습니다

 

<노무현>아내는 머리를 싸매도 반대를 했다.

돌이켜 보면 아내가 나보다 현명했다.

아내는 정치를 몰랐지만

남편이 정치를 하면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직관으로 알았다.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돈이었다.

생활비를 제대로 가져다주지 못한 것이 벌써 여러 해가 되었다.

형제자매와 친지들에게 출세한 변호사의 아내로서 해야 할 도리가 많았지만 ,

나는 아내가 그 도리를 할 여건을 만들어 주지 못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김영삼 총재의 영입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원래같으면 더 진보적인 김대중 총재의 노선에 관심이 있었지만

김대중은 전라도 정치인으로서 경상도와의 지역감정이 있던 인물이었고

부산에서 국회의원이 되려면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노무현은 복잡하게 생각치 않고 그저

 

'국회의원이 되면 노동자를 돕는데 유리할 것이다'

 

라고 단순 소박하게 판단했고

당선되기 쉬운 지역구를 고르라는 김영삼 총재의 배려를 사양하고

모두가 기피하던

전두환 대통령의 왼팔이자 쓰리허중의 하나인 허삼수 후보가 출마한

부산 동구를 선택합니다

 

[노무현 VS 반란군 총잡이]

승부사 기질이 강했던 노무현은

이왕이면 쎈캐와 대결해보고 싶었고

그기 특히나 제5공화국 전두환 독재의 상징인물이자 거물급 인사였기에

민주화운동 세력을 대표해서 그를 이겨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88년 4월 13대 국회의원 선거당시

김영삼 총재는 허삼수를 상대로 출마한 노무현을 지원하기 위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김영삼>허삼수 후보는 반란의 총잡이입니다.

총잡이는 국회로 보낼 것이 아니라 감옥으로 보내야 합니다

 

김영삼 총재의 이 한마디는 큰 도움이 됬고

당시 제5공화국 , 전두환 심판론까지 힘을 업고

노무현은 4월총선에서 당선 ,

1988년 4월총선은 야당이 압승합니다

 

부산의 자부심 인권변호사 노무현

 

 

재밌는 사실은 김영삼은 그로부터 꼭 4년이 지난

1992년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의 총재가 되어 국민들에게 허삼수를 뽑아달라 이야기했습니다

 

<김영삼>허삼수씨는 충직한 군인입니다.

허삼수씨를 뽑아 주시면 제가 중히 쓰겠습니다.

저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도

허삼수씨를 국회의원으로 뽑아 주십시오.

 

(영삼이가 대통령 되고싶은 집념이 매우 강했던 인물임)

 

[초선의원 노무현]

하여튼 ,

당선된 초선의원 노무현은

정치인으로서의 자신 나름의 포부를 글로 정리했습니다

 

<노무현의 포부>

사회정의와 민족정기 수립 ,

재벌해체와 민주노조 육성 ,

재벌과 부정축재자들의 토지징발 ,

불로소득 억제 ,

군사작전권 환수와 미군 핵무기 철수

 

(보기엔 이상적이게 보일 수 있지만

사회정기와 민족정기 수립도 전두환도 이런류의 발언을 했기에

그런것을 지도하는 지도자가 청렴결백하지 않고서는

나만의 정의 , 자신들만의 정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고

노조를 함부로 탄압해서도 안되겠지만

국가에서 육성하려는 생각도 위험하다 생각되고

등등 현실정치와도 괴리가 있는 발언이라 생각됩니다)

 

노무현 의원은 전국 노사분규현장을 다니며

몸으로 부딪혔고

오라는데는 어디든 다 갔고

노동자들에게 호랑이처럼 군림하던 경찰서장이나 노동부 고위관리들도

노무현 의원 앞에서는 꼼짝도 못했습니다

 

노동자와 맞담배피는 노무현

 

부산지방노동청을 찾은 노동자들과 만나 대화하는 노무현 의원

 

당시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산업안전조차 보장받지 못하던 시기였고

여러 부조리가 많은 시기였는데

노무현 의원은 현장조사를 나가 회사를 추구하고

합의서를 받아내기도 했고

희생된 노동자를 구하지 못한때는 큰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 당시는 노동현실이 매우 열악했던 시기였고

노무현 의원은 1988년 7월 임시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을 하며

참담한 노동현실에 분노를 그대로 터뜨립니다

 

<노무현>국무의원 여러분 ,

아직도 경제발전을 위해서 ,

케이크를 더 크게 하기 위해서

노동자의 희생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저는 그런 의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니네들 자식 데려다가 죽이란 말야 !

춥고 배고프고 힘없는 노동자들 말고

바로 당신들 자식 데려다가

현장에서 죽이면서 이 나라 경제를 발전시키란 말야 !

 

 

이말에 감동받은 수많은 사람들은

국회의원 사무실로 격려전화를 걸어왔고 그럼에도 당장 현실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청문회 스타]

1988년 가을은 국회 청문회의 계절이었고

5공 비리 특위 청문회와 광주특위 청문회가 있었고

TV에서는 청문회를 생중계했습니다

원래 노무현 의원은 노동현장을 가야겠다는 생각에

청문회에 안나갈려 했는데

 

하필 노무현이 조세 전문 변호사 출신이라 (돈벌레 수전노 시절ㅋㅋ)

하필 돈문제에 밝았던 인물이기에

주위의 요청에 억지로 나갔고

노무현 의원은 청문회 다음날 눈떠보니 하루아침에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되어버렸습니다

 

원래 당시 노무현은 ..

 

<노무현>난 안갈랍니다

 

<비서들>안됩니다 , 의원님 ,

국회의원이 국회 일을 해야지 무슨 농성입니까

 

몇차례의 실랑이가 벌어졌지만

옷가지와 이불 챙길 궁리까지 하던 노무현 초선의원은

결국 고집을 꺾었고

왠만해선 자신을 따라주던 비서들이 처음으로 강경하게 반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노무현>그럼 딱 첫날 한번입니다 ,

별 볼일 없으면 나 농성갑니다

 

그렇게 하는 수 없이 청문회에 나갔던

노무현 초선의원은 청문회 당시

한국 경제계의 최고 거물이었던 

현대 정주영 회장을 심문했는데

 

청문회 당시 노무현과 정주영

 

당시 청문회는 총선승리로 강성했던 야당이

5공청산 명분을 내세워

이제는 이빨빠진 사자가 된 군부독재 정권을 두들겨 패는 자리였고

독재정권에 불만 많았던 국민들에게

생중계되며 욕하고 두들기고 단죄하는것이 그렇게 통쾌할 수 없다는

분위기로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여튼 ,

2000년대 전까지만 해도 현대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나가는 회사였고

2000년대 이후부터는 삼성이라 보면 되고

하여튼 당시 현대는 한국 경제발전사를 상징하는 가장 크고 의미있는 기업이었고

정주영회장은 그런 기업을 가난속에서 맨손으로 일군 한국경제의 거인이었기에

당에서는 정주영 회장이 고령인데다가 업적이 많은 기업인이니

노무현 의원에게 함부로 다루지 마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이봐 해봤어 ? 현대 정주영

 

다른 증인들에게 고함을 치거나 욕설을 했던 국회의원도

정주영에게는

 

'회장님 !'

 

이라 예우를 할 정도였고

문을 열어주며 과잉친절을 베푸는 의원도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

우리의 노무현 의원은 정주영 회장이라고 특별히 봐주지 않았고

 

당시 정주영 회장도 시대의 거인답게

그냥 순순히 전두환이 돈달라해서 냈다고

국회의원들이 원하는 대답을 너무 쉽게 줘버렸습니다

 

<정주영>안주면 재미 없을거 것 같아서 줬다

 

정주영은 너무 쉽게 결국 독재 권력자의 강제모금에 참여했고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공감을 유도했고

국회의원들도 질문자료를 산더미처럼 준비했는데

이 거물기업인이 너무 쉽게 시인해버리자 입이 뻥지게 되었고

 

그럼에도 무언가 불편했던 노무현 의원은

정주영 회장이 강제모금의 희생양이 아니라

'정경유착' , 정권과 유착해 이익을 보는 것으로 초점을 바꾸었고

 

대통령이 강제모금을 했다면

재벌회장들은 피해자가 되지만

재벌이 대통령에게 뇌물을 바치고 사업의 특혜를 받는 정경유착이라면

전두환과 재벌회장은 공범이 되고 국민들은 피해자가 된다는 논리를 내세웠고

 

함부로 대하지 마라는 당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예리하고 날카로운 질문을 하게 됩니다

 

<노무현>이렇게 순응하는 것이 ,

힘이 있을 때는 권력에 붙고 없을 때에는 권력과 멀리하는 것이 ,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가치관의 오도를 가져오게 하고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양심적인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켰다고 보지 않겠습니까 ?

 

 의원이 증인과 맞대서 대등한 관계에서 질문을 있는 기회는 흔치 않습니다.

사회적 영향력에 있어서

의원은 증인의 100분의 1 따라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비애를 느끼면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노동자들의 피눈물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함께 가슴이 녹아내리는 느낌을 받으면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결국

온 국민이 보는 가운데 사과했습니다

 

<정주영>우리는 그러한 용기를 가지지 못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천하의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도

한 이름없는 초선의원에 말문이 막혀버리자

그 순간 TV 생중계를 지켜보던 국민들은

오랜 체증이 뻥 뚫려버렸고

노무현 의원은 청문회 질의를 너무나 잘해서

하루아침에 패기와 용감함에 청문회가 낳은

전국적 인기스타가 됩니다

 

노무현은 훗날 자서전 '운명이다' 에서

이때의 일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노무현>모금의 강제성만 따지면 재벌 회장들은 피해자가 된다.

그러나 뇌물을 바치고 사업의 특혜를 받는 정경유착이라면

전두환 정권과 재벌 회장들은 가해자 공범이 되고 국민이 피해자가 된다.

(중략) 나는 '정경유착' 의 실상을 파헤치고 비판하는  초점을 맞추어

증인 심문을 했다. 

정주영 회장이라고 해서 특별히  주지 않았다

 

청문회 당시 노무현

 

청문회 이후 노무현은 전국적 인기스타가 되어

집과 사무실 전화는 아예 불통이 되버렸고

노무현 의원의 기사가 실리지 않는 신문과 언론은 하나도 없었는데

 

이전 이야기했던데로

하필 노무현의원이

고졸에 사법고시를 패스한 입지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이 국민들에게

알려져 인기는 더욱 폭발하기 시작했고

 

'집이 가난해서 대학도 못간 사람이 사법고시에 붙어 국회의원이 됬고

청문회 스타가 되었다'

 

는 식의 언론보도가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노무현이 원한 자신의 기사는 사회구조의 부조리와

산업현장과 노동자들의 인권문제에 대한 기사였는데

언론사들은 노무현이 가난끝에 고생해서 성공한 영웅담에 집중해

신나게 떠들어 댔습니다

 

 

노무현은 청문회 스타 그 자체였고

노무현은 청문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분노해

명패를 집어던진 것도 유명합니다

 

 

 

[3당합대 반대]

노무현 의원이 있었던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총재는 근데

대통령이 되고싶은 마음이 강했고

야당 거물이었던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를 크게 질투하고 있었고

 

당시 노태우 대통령도

여소야대 정국이 흘러가

자신의 여당 민주정의당이 고작 125석에 불과해

과반수도 못먹는 상황이 되자

불안감을 느꼈는데

 

김영삼 총재와 노태우 대통령은 둘다 불안하고

김대중 총재가 두려웠기에

결국 아다리가 맞아떨어져 합당을 강행했고

 

노태우 대통령(신군부 출신) ,

김영삼 총재(민주화운동 출신) ,

김종필 총재(구군부 출신)

 

은 서로 각기의 야심을 품고 안정을 이유로

뜬금없이 '3당합당' 을 실시해 불편한 동거를 시작하게 되는데

 

3당합당

 

사실상 민주화운동가 김영삼이 차기 대통령이 되기 위해

군부출신 노태우 대통령의 부하로 들어가게 된 것이고

많은 국민들이 김영삼을 변절자 , 배신자로 여길 정도였고

김영삼은 김영삼 나름대로 안정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변명합니다

 

결국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합당으로

1990년 1월 22일 국회 개헌선을 확보한

거대 맘모스 정당 민주자유당이 출범합니다

 

 

거대함에 비해 단합은 잘 안됬던 민주자유당

 

국회의원 되기 전부터

사실상 곡기를 끊고 민주화운동에 전념해온 노무현 의원은

김영삼 총재의 부하였기 때문에

노태우의 민주자유당에 들어간 김영삼을 따라

민주자유당에 합류해야했는데

자신이 맞서왔던 군부출신들의 부하로 들어가는게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고

 

노무현은 통일민주당 합당결의 대회장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습니다

 

<노무현>의견 있습니다.

반대토론 합시다.

 

그러나 정당 내부에는 민주적 절차 , 토론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저 보스가 결정하면 나머지는 우르르 따라가는 구조였고

모두가 노무현을 떠나가고 김영삼을 따라 민주자유당에 합류했고

이때 노무현은 정치를 그만두리라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노무현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소수 존재했고

통일민주당에 있다가 3당합당을 거부한  8명의 사람들은

서로를 다독이며 민주당을 창당했습니다

 

[꼬마 민주당]

사람들은 옛 통일민주당과 구분하려

이 정당을 '꼬마 민주당' 이라 불렀는데

민자당에서는 어짜피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에 갈 사람들이라며

꼬마 민주당을 공격했고

70석의 평화민주당 사람들은 유일야당론을 내세우며

8석따리의 꼬마 민주당을 무시하다 끝내 야권통합이 벌여졌고

노무현은 처음으로 김대중 총재와 정치를 하게 됩니다

 

[노무현 VS 조선일보]

1991년 9월 17일 노무현은 김대중 총재의 배려로

통합민주당 대변인에 임명됬는데

 

노무현이

보수적인 김영삼 밑이 아닌

진보적인 김대중 밑으로 들어가자

보수언론 조선일보는

노무현을 견제하는 인물 프로필을 냈습니다

 

<조선일보 노무현 프로필>

고졸변호사 , 의원직 사퇴서 제출 촌극을 빚는 등

지나치게 인기를 의식한다는 지적과 함께

한때 부산요트클럽 회장으로

개인요트를 소유하는 등 상당한 자산가

 

 

노무현도 인권변호사시절엔 돈도 못벌고 고생 많이했기에

막 엄청난 호화자산가로 부풀려지며 네거티브를 당한것이지만

실제 인권변호사 전에는 

악덕수준의 수전노 변호사 생활을 하기도 했고

당시 워낙 못살던 시기라

기준을 일반서민들로 잡으면 부산에 얼마안되는 변호사였던

노무현은 상당한 자산가였던 것도 사실이기에

 

노무현의 요트이력은 이때부터 흑역사가 된 것이고

조선일보는 이때부터 노무현을 조지며

노무현과의 악연이 시작되는데

노무현이 명예훼손 소송하겠다하니

신문사랑 싸우면 손해볼 일밖에 없다고

모두가 참으라 말렸고

이때부터 조선일보와 노무현은

서로가 서로를 ㅈ같이 여기기 시작합니다

 

노무현과 조선일보의 대결에 정점을 장식한 노무현 대통령 탄핵당시 조선일보 읽는 민주당 추미애 의원 사진(본인편 대통령 탄핵시키고 비장한 표정으로 남의편인 조선일보 읽고있는 모습에서 화제가 된 사진입니다)

 

[노무현 VS 충직한 군인]

노무현은 

1992년 14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다시 자신의 지역구 부산 동구에 출마했는데

비록 청문회 인기스타가 된 노무현이었지만

노동현장과 중앙정치무대를 뛰어다니느라

지역구를 돌보지 않아 조직이 다 무너진 상황이었고

부산사람들은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을 밀어주던 상황이어서

더더욱 노무현에게 불리한 상황이었는데

 

서울에 출마하라는 만류에도

부산을 버릴 수 없었던 노무현은 결국 다시 부산동구에 출마합니다

 

또다시 부산동구에는 허삼수 후보가 나왔는데

이번엔 허삼수는 김영삼 민주자유당 총재의 부하로 출마했고 (ㅋㅋ)

4년전만해도 김영삼 밑의 노무현과 맞서며 김영삼을

 

'대통령병 환자'

 

라고 비난했던 허삼수후보는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 김영삼총재님을 모시고

부산발전을 위해 이 몸을 바치겠다'

 

고 말했고

 

4년전 허삼수 후보를

 

'반란군 총잡이'

 

라 규정하고 국회가 아니라 감옥을 보내야했던 김영삼 총재 역시

4년뒤엔 허삼수를 자기 부하로서 지원유세하며

 

'허삼수씨는 충직한 군인입니다.

뽑아주시면 중히 쓰겠습니다.

저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주시려면

허삼수씨를 국회의원으로 뽑아주십시오'

 

라고 외쳤고

그만큼 내로남불 , 기회주의 , 철새주의가 팽배했던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는 일화였습니다

 

 

당시 노무현은 선거구호로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날고 ,

살아있는 물고기는 거슬러 헤엄친다'

 

라는 구호를 내놓았고

 

 

그럼에도 바람을 거스를만한 큰 새가 아니었던 노무현은

허삼수 후보의 절반밖에 표를 얻지 못하고 낙선했는데

노무현은 오히려 홀가분했고

이로써 김영삼과 결별하게 됩니다

 

김영삼 총재를 2년가까이 모시며 정치생활을 처음할때 노무현은

김영삼의 상도동 측근들이 시샘할 정도로

자주 김영삼과 독대(단둘이 이야기) 하며 매번 두툼한 봉투를 받았고

노무현도 자신을 영입한 김영삼 총재를

 

'조직의 탁월한 보스' ,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어 부하로 만드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

 

'머리는 DJ(김대중)에게서 , 행동은 YS(김영삼)에게서 배웠다'

 

이라 말할 정도였고

하여튼 이후부터는 각기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게 됬고

노무현은 원래부터 생각해왔던

김대중의 부하로 들어가며 민주당과의 인연을 시작하게 되는것입니다

 

1992년 12월 14대 대통령선거가 다가오자

 

김영삼 VS 김대중

 

이라는 두 민주화운동가 거물들이

1:1로 진검승부를 펼치게 되었고

총선에서 떨어진 후 야인이나 다름없었던

노무현 역시 부산에서 김대중의 선거유세를 펼치게 됩니다

 

14대 대선 김대중 후보 지원유세하는 노무현 , 사람사는세상

 

근데 ,

김대중 후보는 노태우와 야합한 대가로

어마어마한 지원사격을 받은 김영삼에게 패배해버렸고

 

오랫동안 군부독재에 싸워왔는데

같은 민주화운동가인 김영삼에게까지 져버리자

김대중도 당시 멘붕이 와서

홀연히 정계를 은퇴해버립니다

 

[김대중 없는 민주당]

야당에서는 김대중이 떠나버리자

당권을 둘러싼 투쟁이 펼쳐졌고

 

1993년 3월

김대중 없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노무현은 최고위원 선거에 출마하는데

애초에 민주당은 오랜 김대중의 부하였던

동교동계 세력들이 장악한 상황이었고

정치적 입지가 약했던 노무현이었는데

김정길 의원은 노무현 후보를 별도로 소개하며

지원해주었습니다

 

<김정길>품안의 자식만 귀한게 아닙니다.

새어머니 등쌀에 구박을 받고 나가서

얻어먹고 다녀도 나중에 효도하는 수가 있습니다

 

이에 동정표를 얻은 노무현은 5등으로 최고위원에 당선됬습니다

 

정당정치를 하며 조직을 관리하고 여러 당원들과 교류해야함을

알게 된 노무현 최고위원은

당시 돈도 없고 실세도 아니어서 여러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에

 

'참여시대를 여는 지방자치 실무연구소'

 

라는 연구소를 만들었고

현역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회비도 받았고

노무현은 이때 안희정 등 새로운 참모들을 얻었고

이때 축적된 역량을 바탕으로 훗날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때 큰 힘을 받았습니다

 

1995년 2월

노무현은 민주당 임시전당대회에서

부총재로 선출됬고

6월엔 민주당 부산시장 선거에 출마하기도 합니다

 

1995년 부산시장 출마당시 노무현

 

당시 정계를 떠나 영국에 갔던 김대중 총재가 돌아와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을 맡자

김대중 정계복귀설이 떠돌았고

부산시장 여론조사에서는 노무현 후보가 1위로 나왔지만

여권 김영삼당인 신한국당 후보 지지율도 높았습니다

 

근데 슬슬 김대중이 복귀하며 지원유세하기 시작하자

다시 노무현은 김대중의 그늘에 가려

김대중 부하 , 김대중 후보로 곧바로 인식되었고

김대중 지역주의를 싫어했던 부산시민들은 점차

노무현에 등을 돌렸고

우세였던 여론조사 지지도에서 갈수록 역전되어

결국 노무현은 부산시장 선거에서 패배합니다

 

갑자기 김대중이 복귀하자

노무현이 엉뚱하게 직격탄을 맞고

부산에서 나가리 된것이었고

 

그럼에도 부산시민들은 당시 노무현에게

37%라는 많은 표를 주었고 많이 노무현을 응원해주었습니다

 

[정치 1번지]

1995년 7월

김대중 이사장은 새정치국민회의라는 당을 창당하겠다 했고

민주당 주류들도 집단탈당해 새정치국민회의 , 김대중 부하로 합류합니다

 

민주당에 남은 사람들은

1996년 4월 11일 15대 총선에서 대참패했는데

당시 노무현은 부산이 아니라 서울 종로에 출마했고

 

'정치 1번지'

 

라 불리며 이름이나 얼굴알리기에 애쓸 필요가 없는

각당의 간판스타들이 출마하는 서울 종로구에

 

노무현은 새정치국민회의가 아닌

민주당으로 출마했고

 

당시 15대 총선 종로가 엄청난 별들의 싸움이었는데

 

현대신화의 주역 이명박 ,

4선의 이종찬 ,

청문회스타 노무현 ,

독립투사의 후예 탈렌트(당시 연예인을 부르던 말[옛날식 발음]) 김을동 

 

이라는 유명한 각당의 간판스타들이 출마했고

특히 이명박과 노무현은 훗날 대통령이 됬다는 점에서

두 인물의 대결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3파전 구도였던 당시총선

 

선거 결과는

 

신한국당 후보 이명박 41% 

새정치국민회의 이종찬 33%

통합민주당 노무현 17%

 

라는 어마어마한 표로

바보 노무현은 명박이한테 발려버렸고

 

노무현 현수막 앞의 당시 이명박

 

정권교체를 바라는 국민들 역시 김대중을 밀지

미약했던 노무현을 미는 상황은 아니었기에

국회는 신한국당과 새정치국민회의 양당체제로 재편됩니다

 

노무현은 이당시

조선시대 이후 기회주의 역사가 600년이었다며

권력에 편에 서야만 하는 기회주의 역사는 안된다 생각했고

이런 역사를 마감하고 양심과 신념의 세상을 만들려면

정권교체가 반드시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하로동선]

15대 총선에서 패배한후 현실의 벽을 느낀 노무현은

한동안 방황하다

우스갯소리로

 

'음식점이나 차리자'

 

라는 말에 동의해

서울 역삼동에 

 

'하로동선'

 

이라는 고깃집을 차립니다

 

하로동선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추고 요리도 잘했던 노무현 대통령

 

하로동선은 여름화로 , 겨울부채라는 뜻으로

쓸모없는 것을 뜻하며

여름화로나 겨울부채 ,

여름 전기장판과 겨울 에어컨처럼

쓸모없게 되버린 낙선 의원들이

다시 쓰일날을 기다린다는 의미였습니다

 

노무현과 낙선한 전 의원 등 20여명은

서울 강남구 역삼 전철역 부근에

한우고기 식당 하로동선을 개업했고

공동출자 , 운영 , 분배원칙에 따라

4억원을 출자해

2층 단독건물을 빌리고

질좋은 한우고기를 제공해 맛으로 승부한다 계획했고

 

스타정치인 노무현 , 풀무원 식품창업자 원혜영 등이

운영한다는 것에

이건 못참았던 사람들이 금새 입소문을 타고 몰려들어

하로동선은 핫플레이스가 됬고

 

하루씩 돌아가며 사장노릇을 했는데

노무현은 사장 맡은 날은 못먹는 술도 먹어야 했고

나름 노무현에게 재밌는 경험이었습니다

 

근데 아무래도 전문요리사가 아닌

낙선한 정치인들의 패션식당이었기 때문에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

다들 몸값이 비싼 정치인들이기에 식당운영보단

금배지와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고 하로동선 역시

사실상 관리 1년만에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김대중 대통령]

1997년 가을

IMF 금융위기가 터져

대한민국 경제주권은 외국 IMF 의 관리하로 뜰어갔고

금융위기가 터지자 기업은 연쇄적으로 무너지고

국민들은 대규모 실업사태에 자살하는 

한국전쟁이후 최악의 환란이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인기짱이었던 김영삼 대통령은

IMF 사건 책임을 지고 한없이 추락해

완전히 나가리 되었고

 

미안

 

여권 대통령 후보 이회창은

인기가 없었던 김영삼 대통령을 인격적으로 모욕하며

차별화했지만 곧 이회창 아들 병역비리 사건이 터지며

지지율이 급격히 하락합니다

 

결국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IMF 사태라는 대국민적 분노와 정권교체의 바람을 타고

당선되었고

 

대선한달전 노무현은 어찌어찌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는데 성공하고

김대중 선거운동도 열심히 했고

 

15대 대선 김대중 찬조연설하는 노무현

 

기적같이 박빙의 승리를 거두며

정권교체에 성공한 김대중은

노무현이 오랫동안 생각한

 

'조선시대부터 600년간 이어진 기득권 권력'

 

에 대한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김대중을 통해 직접 보게 되었고

정치입문후 오랫동안 겪은 고생과 방활을 다 보상받은 기분이었습니다

 

[종로 당선]

1998년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이 대한민국 1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당시 종로구 국회의원은 이명박 의원이었는데

이명박이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당선무효 확정 판결을 눈앞에 두고

국회의원직을 자진 사퇴하였고

 

보궐선거를 했는데

노무현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공천을 받아

종로구에 나섰고

1998년 7월 21일

정치1번지 종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됩니다

 

1998년 종로 당선에 기뻐하는 노무현 부부

 

오랜 낙선들 끝에 10년만의 승리였고

정치는 나혼자만 하는게 아니고 당과 같이 움직이기도 해야하는데

노무현은 그동안 너무 자기자신만의 논리로 정치해온 것에

반성하게 됩니다

 

이시기 보수야당 한나라당은

김대중 정부를 공격하며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일으켰고

 

'호남이 다 해먹는다'

 

'영남의 공장을 뜯어 전라도로 옮기고

중장비도 다 호남으로 갔다'

 

며 지역감정을 부추기기도 했고

노무현은 결국 지역감정을 타파하기 위해

다시금 부산으로 출마합니다

 

[바보 노무현]

2000년 4월 13일 16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노무현은 부산북·강서(을) 에 출마해

한나라당 후보에게 졌고

부산에서만 3번째 낙선이었습니다

 

노무현은 애써

선거사무소에 들려 눈물흘리는 지지자들을 위로했고

쓰라린 마음을 다독이며 잠이 들었는데

그런데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노무현 홈페이지에 낙선에 대한 울분에 찬 글을

소나기처럼 올려놓았고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밀물처럼 들어옵니다

 

인터넷 세상에서 노무현은

 

'바보 노무현'

 

이라 불렸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종로를 버리고

지역감정 타파를 위해 미련하게 또 부산으로 가서

또 떨어진 것이었고

점차 이런것들로 바보 노무현은 그의 애칭이 되며

청문회스타 이후 또다시 국민적 사랑을 받게 됩니다

 

 

사실 재밌는게 바보 노무현 어린시절 별명은

6살에 천자문을 완벽하게 외우고 머리가 똑똑해서

 

'노천재'

 

였다 합니다

 

실제로 사법고시 패스하고

금전적으로 성공한 유능한 변호사이자

전국구급 인지도 국회의원 노무현이

바보일리는 없었고

 

노무현은 생각했습니다

 

<노무현>나는 바보가 아니다.

내가 바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다만 눈앞의 이익보다는 멀리 볼때 가치있는 것을 선택했을 뿐이다.

당장은 손해가 되는 일이 멀리보면 이익이 될 수가 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모두 '바보처럼' 살면

나라가 잘 될것이다

 

그립읍니다

 

[노사모]

점차 바보 노무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홈페이지에서 따로 모이자 제안을 하며

2000년 6월 6일 조그만 PC방에서 60명이 모여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

 

즉 노사모를 만들었고

학생 , 가정주부 , 아이를 데리고온 40대 직장인들까지 있었고

여고생도 있었습니다

 

노사모와 노무현을 상징하는 노란색

 

그 여고생은 대학에 들어가고나서도

노무현을 지지하는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합니다

 

순수 시민들로 구성된 노사모는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라 했고

점차 회원들이 몇천명 수준으로 늘어나며

노사모는 노무현의 또다른 뒷배가 되주었고

 

노무현이 거대보수언론(조선일보 , 중앙일보 , 동아일보 줄여서 조중동) 과

싸울때 노사모들은 십시일반 돈을 거두어

늘 돈에 쪼달리던 노무현에게 후원금을 쏴주었고

노무현에게 노사모는 큰 힘이 되주었습니다

 

노사모는 노무현처럼 지역주의를 싫어했고

기성세대의 전유물인 신문방송이 아니라

신세대들이 사용하는 인터넷 뉴미디어를 활용했고

 

실제로 컴퓨터를 잘했던 노무현

 

반칙과 권위주의를 싫어했고

그 가수에 걸맞는 그 팬들이었습니다

 

노무현 역시 대한민국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 노사모가 주는

행복한 특권을 즐겼습니다

 

[해양수산부 장관]

김대중과 노무현은 서로를 거북하기도 , 안쓰럽게도 바라보는

정치적 동지였고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8월 7일 노무현을

해양수산부 장관에 임명합니다

 

(근데 노무현도 원래 대권을 위해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 장관을 희망했고

차라리 사법고시 패스하고 조세변호사했으니

법무부 장관이나 기획재정부 장관에 임명하지

노무현이 해양수산부랑 무슨상관이 있는지 의문이고

 

외국도 이런 사례가 있어 보통 차관들이 실무하고

장관들은 대충 정치인들 키우려 시킨다고도 본거같습니다)

 

노무현은 8개월도 안되는 짧은기간동안

정부조직 수장을 지내보며 국정운영 전반을 보고 배울 기회를 얻었고

 

2001년 5월 기자간담회에서 차기 대통령 선거에 나간다 밝혔습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2001년 김대중의 국정수행 지지도가 떨어지자

국민여론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에게 쏠렸고

집권민주당은 이인제를 밀었지만

이인제는 모든 여론조사에서 이회창에게 뒤졌고

그때 이회창은 이미 대통령이 다 된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이회창과 노무현

 

이때 노무현은

 

이회창은 지벽분열의 상징 ,

이인제는 기회주의의 화신

 

으로 간주하며

일어났고

 

민주당 경선이 시작되자

노무현도 본격적으로 움직이며

정책팀을 만들고 인터넷 선거준비도 맡았고

노사모와 부산상고 동문회등이 스스로 자금을 모아 움직였고

유시민 , 안희정 등이 노무현을 지원합니다

 

<16대 대통령 민주당후보 국민경선 노무현 출마연설>

조선 건국 이래로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꾸어 보지 못했고 ,

비록 그 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 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다.

패가망신 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척하고 고개숙이고 외면했어요.

눈 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어머니가 제게 남겨 주었던 가훈은

 

' 이놈아.

모난 돌이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보며 살아라.'

 

80년대 ,

시위하다가 감옥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고만 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있다 !!

 

이인제 , 김근태 , 정동영 등이 민주당 경선에 나왔는데

노무현 후보 캠프가 가장 초라했는데

이때 노사모가 활약하며

수십만 선거인단 참여신청서를 모았고

호남노사모와 영남노사모가 연합했습니다 (ㅋㅋ)

 

결국 노사모의 활약에

노무현이 1위가 되었고

돈과 조직의 불리함에도 인터넷 팬클럽 노사모의 활약이 엄청났던 것이었고

이때부터 정치에서도 인터넷의 중요성과 힘이 중요시 되는 것입니다

 

부산출신 아싸 정치인 노무현이 민주당 경선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고 압승을 거두자

노무현 지지자들과 자원봉사자들은 서로 끌어안고 엉엉 울었고

 

노무현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자

갑자기 이회창 대세론은 자취를 감추고

둘다 대등히 맞다이 뜰 기류가 형성됩니다

 

[정몽준과 단일화]

한나라당은 이회창을 대통령 후보로 확정했는데

정몽준 의원이 대선출마의사를 보였고

 

한국축구 , 2002년 월트컵 책임을 맡은 정몽준은

2002년 한일월드컵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지지율이 올랐고

민주당에서는 정몽준 의원을 포함해 재경선을 하자는 주장도 올랐는데

 

대한민국 월드컵 4강신화를 이끈 정몽준

 

노무현은 여당 대통령 후보임에도 존재감이 점차 떨어졌고

단독출마한 정몽준이 갑자기 급부상해버리는데

대선은 갑자기 3파전으로 흘렀고

 

민주당 의원들도 정몽준 후보 진영으로 간다는 소문이 퍼지는 등

절체절명의 위기가 감돌게 됩니다

 

그때 수많은 시민들이 노무현의 홈페이지에 접속해

10만원 내외의 소액 후원금을 보냈고

다시금 분위기가 반전되며 지지율이 상승흐름을 탑니다

그럼에도

노무현은 정몽준 후보에게 뒤쳐지는

3위라는 상황이 됬는데

이대로 가면 선거 승리확률 0% 였고

결국 노무현은 정몽준과 단일화를 하기로 결심 ,

둘은 다행히 단일화했고

그순간 다시 판세는 뒤집어집니다

 

단일화 성공한 정몽준과 노무현

 

단일화가 순조롭게 되었고

노무현은 선거 마지막날인

12월 18일 서울 전역을 돌며 유세했는데

단상에 노무현 후보와 그를 지원하는 정몽준 대표가 있었고

선거 마지막날이기에 노무현은

밑에있던 정동영 , 추미애에게도 한번 올라와보라 손짓했고

노무현 후보는 정동영 , 추미애 의원이 단상에 오르자

이렇게 좋은 정치인들이 많아서 얼마나 좋으냐 덕담을 했는데

 

 

문제는 원래 유세장에 단일후보인

노무현과 정몽준만 오르기로 되있었고

또 어떤 사람이 

 

'차기 대통령은 정몽준'

 

이라는 피켓을 보이자

 

노무현은

 

<노무현>너무 속도위반하지 말자

정동영 , 추미애 최고위원도 있다

 

하고 말했고

이때 정몽준이 캐빡돌게 됩니다

 

정몽준이 단일화 안해줬으면 노무현은 바로

이회창에게 따이던 상황이었는데

정몽준은 보수계 인사임에도

나름 민주당 김대중 정부때 자신의 현대그룹 일가가 줄을 대기도 했고

그때 본인 스스로가 월드컵 영웅이 되었기에

민주당을 지원해 노무현 다음엔 본인이 대통령 하겠다는 마음으로

한때 월드컵 바람을 타고

여론조사 대선지지 1위까지 갔던 대통령 자리 양보하고

노무현 지원유세에 나선것인데

노무현이 고마움은 커녕 대선 후보에도 못끼던

정동영 , 추미애를 치켜세우자

심각하게 빡돌 수밖에 없었고

그날 저녁 정몽준은 단일화 철회를 선언했고

쓸데없는 말을 해 빌미를 준 노무현에게 원망과 탄식이 흘러갑니다

 

노무현 후보는 정몽준을 달래러 정몽준 대표의 평창동 자택을 갔지만

정몽준은 문열어주지 않았고

문전박대는 전국에 생중계됩니다

 

조선일보 역시

 

'정몽준 , 노무현을 버렸다'

 

라는 제목으로 1명을 장식한 신문을 냈고

투표당일 오전엔 노무현 후보 집 골목은 텅 비었고

기자와 방송차는 모두 이회창 후보 집 골목에 몰렸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근데 오후가 되자 방송차들이 모두 노무현 집으로 옮겨왔고

이때 온종일 집을 지키던 노무현 아내 권양숙은

창밖으로 그것을 보며 

 

<권양숙>우리가 이겼음을 알았다

 

했습니다

 

투표당일 젊은이들은 정몽준의 노무현 지지철회 소식을 듣고

휴대전화와 문자메세지로 서로 투표를 독려해

전국적 물결이 일어났고

그들이 기적을 만들어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48.9%

한나라당 이회창 46.6%

 

라는 근소한 득표율로

노무현이 승리했고

 

 

정몽준 역시 하루만 참았으면

국무총리 + 다음 대선 유력후보였는데

거의 제갈량이 촛불기도할때마냥 딱 하루를 못참아서

이후엔 정치판에서 점차 밀려나게 됩니다

 

하여튼 노무현의 대선승리는

특히나 기괴한 것이었는데

이전 김영삼 , 김대중은 대선에 낙방하다

보수계와 타협해서 겨우겨우 붙은것인데

노무현은 그냥 한방에 팍 붙어버렸고

 

아이조아

 

김대중이 당권에 약해서 실력으로 밀고나간 케이스라면

노무현은 당권에 약해서 노사모 , 국민적 인기로 밀고나간 케이스였고

 

(김대중이 귀족적+카리스마 성향이고

자신 나름의 논리와 국제인맥질로 민 케이스인데

 

노무현은 서민적+친근한 성향이고

김대중에겐 없던

'표의 확장성' 이 어마어마 했다 합니다)

 

고졸이 갑자기 사법고시 붙은거마냥

비주류 정치인에게 여러 조건들이 맞아떨어져

근소하게 당선 된 굉장히 매니아틱한 승리였고

 

대한민국 감성 정치인 , 스타정치인의 등장이었습니다

 

대한민국 16대 대통령 노무현

 

노무현 대통령 공식 초상화

 

<라봉봉>노무현 대통령도 정말 많은 우여곡절끝에 대통령이 된 인물이었고

저도 예전에 본 이야기도 있고 쓰면서도 알게된 것인데

정치라는게 양쪽이 골고루 나눠먹는게 아니라

제로섬 게임 , 이긴 한쪽이 독식하는 구조라

 

(득표율이 51% 대 49% 여도 2% 차이로 낙선하면 49% 표를 얻어도 아무것도 얻지 못함)

 

일반인들에게는 잘 공개되지 않는 정치인들끼리의 공천 경쟁도 심하고

심지어 그시절에도 몇억씩 주고 사고 팔거나 했다하고

정치하다가 낙선을 계속해 패가망신한 케이스도 있는거로 알고 있습니다

 

국회의원 연봉 1억이 많아보이지만

실제로 국회의원 하는 사람들에겐 1억은 푼돈급이기도 하고

무슨 선거니 뭐니할때마다 몇억씩깨지기에

어마어마하게 리스크가 많은 것이었고

 

이에 정치에도 수많은 협잡 , 철새 , 쇼들이 등장하게 되고

이런 것들에 노무현 가족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정치인 가족들 역시

정치하겠다하면 말린다는 이야기들이 괜히 나오는건 아닐겁니다

 

참 정의롭고 용감한 정치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좀 노무현 대통령의 역사관이 기득권=악 수준으로 보고있다는 점이 놀랍고

기득권이 된 사람들은 다 그 이유가 있으며

기득권들 역시 찬탈이나 반정 , 쿠데타를 맞지 않으려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선 항상 공부하고 정의와 선을 행하여야 했는데

좀 역사를 너무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편이었다 생각하고

 

또 권력을 승자는 죽이고 패자는 죽임당하고 이런식으로 봤다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노무현같은 케이스나

공부를 많이 한사람들도

제가 많이 봐도 많이 느낀게

공부 많이한게 꼭 역사공부를 많이했음을 의미하지는 않고

 

역사도 제대로 파면 인간적인 아름다운 이야기가 많은데

막 승자의 기록이냐는 둥 전쟁과 정복 이런거만 얕게 보고

역사를 평화주의가 아니라 부정적이게 보는 시각이 있는 경우가 있고

 

이런 것들때문에

정치인들도 내편은 선 , 상대는 악 이런식으로 나가거나

너를 죽여야 내가 산다는 식의 말도 안되는 정치관을 가진다거나

하는게 한국 역사에서 많이 있어왔다 생각하고

 

노무현 역시 참 재밌고 인간적인 대통령이었다 생각하는데

이런 역사관들때문에 항상 갑자기 급발진한다거나

주변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참 감성적이고 인간적인 대통령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 대통령이었는데

정몽준과 단일화때도 정몽준이 양보한게 컸기에

정몽준 많이 챙겨줬어야 했는데 뜬금없이 자기편 추켜세우질 않나

(양심무엇?)

 

어릴땐 별 생각없었는데 괜히 지지율 5% 나온 인물이 아니고

미화도 심했고 참 빌어먹을 그리움이 드는 인물이고

참 울렁거리는 인물이었다 생각됩니다

 

그리고 노사모니 그런건 정치인이라기보다

거의 아이돌이나 록스타같은 느낌이고

 

노무현이 대단했던게 기성세대임에도

독학으로 프로그래밍도 배운 진짜 특이한 인물이고

컴퓨터랑 인터넷을 실제로 잘했던 인물이기에

기존에 없던 신개념 정치인이기도 했고

 

고졸-사법고시 합격부터

뭔가 찐따나 아싸들의 가슴을 뛰게하는

미묘한 포인트를 잘 알고 즐기던 인물이라

 

우리가 흔히 알법한 이야기들과 달리

진짜 좀 특이해서 대한민국 대통령 중에서도

인기 말고도 컬트적 인기도 가장 많은 인물입니다

 

아 노무현 대통령 살아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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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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