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뻥튀기 소년 이명박>
[가난한 가족]
[담임선생님]
[뻥튀기 소년]
[동지상고 전교1등]
[청계천 헌책방 주인]
[이태원 시장사람들]
[군대에서 쫓겨나다]
[6.3 항쟁]
[어머니]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현대건설]
[샐러리맨 성공신화]
[김윤옥]
[현대건설 사장]
[경제왕 이명박]
<라봉봉>
[가난한 가족]
이명박은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였기에 한국인들은 일본으로 일하러 많이갔던 시대였고
이명박은 아버지 이충우와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어머니 채태원씨 사이에서
4남3녀중 다섯째로 태어났습니다
이명박의 어머니는 보름달이 치마폭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밝을 명 , 넓을 박자를 지어 이명박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이명박 아버지 역시 다른 조선인 노동자들처럼
조선에서의 삶이 너무 어려워 일본에 건너갔고
일본에서 노동을 하는 노동자였습니다
이명박이 4살때
이명박 가족은 해방이 된 1945년 포항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해방후 이듬해까지
시모노세키 등지에서는 160여만명의 한국인들이
귀국선을 타고 돌아왔는데
수많은 한국인들이 10t 미만의 작은 어선을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다 배가 침몰해 목숨을 잃기도 했고
일본정부가 제공한 4730톤급 군함 우키시마호에 탔다가
원인모를 폭발로 수천명의 한국인이 목숨을 잃은 사건도
있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9살이던 이명박은 미군의 오인폭격으로
눈앞에서 누나와 동생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명박의 집은 어려서부터 너무 가난해서
술집에서 술지게미(술만드고 난 찌꺼기) 를 받아
끼니를 때우거나 굶을때가 많았고
이로인해 영양실조도 걸리고
이명박 주위에만 가면 술냄새가 나서
이명박은 학교에서 술냄새가 난다고 놀림받았습니다
[담임선생님]
초등학교때부터 이명박은 안해본 일 없고
밀가루 떡을 팔러 다녔고
군부대 철조망 밖에서 군인들에게 김밥과 밀가루 떡을 팔다가
헌병에게 붙잡혀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역시 띵박이형 근본ㅋㅋ)
중학교때는 어머니의 풀빵장사를 돕기위해 길거리로 나섰습니다
이명박의 친형 이상득은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 몸이 안좋아 자퇴하고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수재였기에
이명박 집안에서는 이명박이 아닌 이상득에게 자원을 몰빵한 상태였고
이로인해 이명박은 동지중학교를 졸압하는 것을 끝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어머니>어머니는 둘째 형 등록금 마련이 최대의 과제여서
이웃을 만나면 한숨을 짓곤 했다.
나는 말이라도 꺼내보자는 생각으로 담임선생님이 오신다고 어머니께 전했다.
어머니는 국화빵을 굽다 말고 먼데로 눈을 돌렸다.
'우리 형편에 너를 고등학교에 보낼 수 없다는 것은 네가 더 잘 알 것이다.
형이 대학에 떨어진다면 몰라도..
꼭 가고 싶으면 국비로 공부시키는 체신고등학교에 가볼 수는 있겠지만 ,
그러면 장사를 도울 사람이 없지 않으냐 ,
이 장사 어미 혼자는 못한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너무 강하게 할 수 없다고 하시자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가난과 형들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
이명박의 담임선생님은 이명박 집안 사정을 듣고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담임선생님>나는 네가 서울 1류 고등학교(경기고 , 경복고 , 서울고)까지는
아니더라도 경북고는 갈 줄 알았다.
너무 아깝구나.
무슨 수가 없을가 ?
그래 , 포항에 동지상고라는 야간고등학교가 있는데
거기라도 가라.
네가 지금 어려서 모르겠지만
생을 살아가는 데는 중졸보다는 고등학교 졸업장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이에 이명박은 동지상업고등학교 야간부에 진학하여
3년간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습니다
(전교 1등)
[뻥튀기 소년]
이명박은 야간에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아침과 낮에는 여고 앞에서 과일장사를 했습니다
수줍음 많은 소년이었던 이명박은
가난때문에 여고에서 노점상을 하는 자신이 너무 창피했습니다
<이명박>나는 여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뻥튀기와 과일 장수를 하게 되었는데 ,
여학생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밀짚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있었다.
어느 날은 리어카에 과일을 싣고 가다가 리어카가 차에 부딪혀
과일이 쏟아진 일이 있었다.
차 주인은 나에게 뭐라고 고래고래 소리쳤고 ,
지나가던 여학생들은 나를 보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나는 너무나도 창피하여 쓰고 있던 밀짚모자로
내 얼굴을 가린 채로 과일을 주워담았다...
그럴때마다 어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어머니>손님과 눈을 안마주치면서 무슨 장사냐
이명박이 여학교 앞에서 뻥튀기 장사하는 것이
창피해 한겨울에 밀짚모자를 쓰고 장사를 하다가도
어머니는
<어머니>네 힘으로 살기 위해 당당하게 일하는데
무엇이 부끄러우냐
하며 호된 꾸지람을 했습니다
[동지상고 전교1등]
하여튼 어렵게 고학했음에도
이명박은 동지상고 3년내내 주 , 야간을 합쳐 모두 1등 ,
전교수석을 3년내내 한번도 놓치지 않았고
수학 , 특히 기하학을 좋아했고
특기란엔 '영어' , 장래희망은 '관리' 라 적었습니다
<동지상고 동기 김창대씨>
그때를 생각하면 명박이가 늘 들고다니던 단어장이 떠오른다.
영어 단어와 숙어 사전을 가지고 다녔는데
궂은 날 장사를 하면서도 볼 수 있도록
표지를 비닐로 두껍게 입혀 놓은 것이었다
이명박은 대체적으로 대부분 수 성적을 받았고
잘 먹지도 못하고 몸도 약한 명박이는
체구가 작고 내성적이었고
학급 반장도 해본적이 없었습니다
이명박 가족은 형 상득의 뒷바라지를 위해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청계천 헌책방 주인]
1959년 고등학교 졸업식을 앞두고
막노동 일자리를 찾아 이명박도 상경해
서울 거리를 헤매었고
대학다닐 형편이 안되니
'대학 중퇴라도 하자'
라는 마음으로 이명박은 대입준비를 시작합니다
이명박은 이웃사람에게서 청계천 헌책방에 가면
참고서를 싸게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이태원 시장에 나가 번 일당을 모은 돈을 들고
청계천에 향했습니다
대학교가 문과인지도 , 이과인지도 모르는 명박이는
헌책방 주인에게
그저 대학교 다니는것도 아니고
대학교 중퇴자가 되려는게 목표라했고
그말을 듣고 명박이를 불쌍하게 여긴 헌책방 주인은
책을 일일이 골라 주면서
<헌책방 주인>등록금 걱정은 지금 하지 마라.
다니고 안다니고는 합격후에 고민해라.
지금은 합격할 생각만 하면 된다.
,
이 책들로 공부하면 대학에 갈 수 있을거다.
있는 돈만 주고 가져가.
내마음 변하기 전에 빨리 가,
이 촌놈아
하고 이명박의 등을 떠밀었습니다
이명박은 이때 교훈을 얻었습니다
<이명박이 얻은 교훈>
도전하기 전에 희망이 없다고 미리 포기해서는 안되며 ,
도전하는 자만이 꿈을 이룰 수 있다
이명박은 일당노동자로도 일하고
아침저녁엔 이태원 시장에서
생선장사하는 부모님 일손을 돕고
시간쪼게서 입시공부를 했고
얻은 참고서로
고향친구 김창대의 자취방에서
책과 씨름했습니다
<김창대>맨밥에 마가린과 간장을 비벼 먹으며 공부했다.
명박이는 잔병치레가 잦았다.
축농증이 심해 연습장 이면지를 휴지로 썼다.
코를 심하게 푸느라 코주위가 늘 시커맸다
그러다 합격자 명단에 이명박의 이름이 있었고
이명박은 1961년 한국에서 서울대 다음의 명문대였던
고려대학교 상대에 입학합니다
<이명박>나는 꿈을 이룬 것이었다.
드디어 '대학 중퇴자' 가 되는 것이었다
이태원 시장 사람들도 기뻐하며
등록금은 마련되었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등록금이 필요 없습니다
합격만 하면 대학중퇴니까 됐습니다'
'무슨소리야 ,
최소한 한 학기는 다녀야 중퇴지 ,
합격하고 등록을 안하면 아무 소용없는거야'
알고보니 등록을 해야만 중퇴자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대학 중퇴자도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었다.
포기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이태원 시장사람들]
이명박 어머니는 형에만 집중한 점도 있고
명박이를 엄격하게 키우긴 했지만
지금 기준으로도 독특한 세계관이 있는 여성이었고
독실한 크리스천이자
성실 , 봉사와 솔선수범한 모습으로
이태원 시장의 민심을 얻고 있었기에
(가난한 부모라도 부모노릇은 아무나 하는게 아님)
이명박의 사정을 알게 된 이태원 시장 사람들이
고맙게도 일자리를 하나 주선해주었고
새벽 통행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시장 쓰레기를 갖다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이명박은 쓰레기를 리어카에 가득 싣고
한참을 끌고 내려가 미군부대를 오른쪽으로 끼고
공터에 가서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오는 일이었습니다
<이명박>쓰레기를 리어카에 가득 싣고
미군부대 옆 공터에 버리는 일을 하루 여섯 번이나 반복했다 ,
쓰레기 리어카는 오르막도 힘들었지만
내리막이 더 힘들고 위험했다
,
1학기 등록금만 벌자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
나는 쓰레기를 치우며 2학년이 되었고 ,
3학년 때에는 학생회장에 출마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대통령 이명박을 만든 사람들은
대단한 부자도 , 권력가지고 힘가진 사람도 아니었고
중학교 선생님 , 청계천 헌책방 주인 ,
이태원 시장 상인들 , 그리고 장사하는 어머니
였고
그렇게 이명박은 그런 서민과 이웃들로 인해
성공할 수 있는 길이 트이게 된 것이었고
대통령이 되고서도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을 잊지 않은
'서민대통령'
이었습니다
이 여러 도움은 훗날 이명박이 서울시장과 대통령이 되어
교육정책과 복지정책을 수립하는데
정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군대에서 쫓겨나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시장을 청소하고 리어카를 몇번씩
끌고 청소가 끝난후 대학교에가서 수업시간에
이명박은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고
잘먹지도 못해 몸이 만신창이가 된 이명박은
군대 가면 삼시세끼 밥은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가난의 탈출구로 이명박은 대학 2학년때 군입대를 희망했지만
논산훈련소 군의관은
이명박의 영양실조와 병약한 몸을 보고 면제 판정을 내렸습니다
<군의관>군대가 병든사람 치료하는 곳인 줄 아느냐
하고 이명박을 쫓아냈고
이명박 어머니는
<어머니>내 자식이 이렇게 될때까지 방치한
내가 잘못
이라며 눈물흘렸습니다
훈련소에서 귀가조치된 후
이명박은 시립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극빈자로 분류되 무료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이명박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고
이후 서울시장이 되어 서울시립병원과 보건소 지원을
확대하는 계기가 됬습니다
[6.3 항쟁]
이명박은 대학 3학년때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에 뽑혔고
4학년때는 박정희 정부의
한·일회담 반대 시위 . 6.3항쟁을 주동했고
이로인해 이명박은
1964년 6월 내란선동죄로 징역 5년을 구형받고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습니다
고려대생 이명박은 어려서부터 시장행상을하며
가난과 빈부격차같은 사회문제에 일찍 눈을 뜬 청년이었고
학생운동에 관심이 끌렸고
독재와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발해 주동했지만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감옥에 간 것이었습니다
이명박을 면회온 어머니는 이명박에게
<어머니>나는 네가 별 볼 일 없는 놈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너야말로 대단한 놈이다.
소신대로 행동하거라
평생 형만 예뻐했던 어머니가
드디어 이명박을 인정한 순간이었고
이명박의 어머니는 이명박이 석방된지
한달만에 겨울에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명박이의 형에만 집중하느라
이명박에 모진 어머니이기도 하였지만
어머니는 어머니였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새벽 4시마다 자녀들과 어김없이 새벽기도를
함께 했고
이웃집을 돕되 절대 음식을 얻어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어머니가 눈물흘린 것은 이명박이
군대에서 쫓겨났던 그날
'네 몸이 군대에도 못갈 정도였구나'
했던게 유일했습니다
이명박이 여학교 앞에서 뻥튀기 장사를 할때에도
어머니는
<어머니>너 왜 사내가 그렇게 부끄러워 하느냐 ?
네가 네 힘으로 살기위해 노력하는데 ,
니가 남을 속이느냐.
동정을 받으려고 비굴하게 사느냐 ?
무엇이 창피하냐 너는 당당해야 한다.
했고
이명박에게 어머니는 엄격한 어머니이자 평생의 큰 스승이었습니다
다른 운동권 학생들이 정치권에 투신하는 것과 달리
정치권에 투신하지 않고 기업에 취직을 택한 것도
결국 어머니의 가르침이 밑바탕이 됬고
학생운동을 정치인이 되기위한 '경력쌓기' 로 이용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당당히 살겠다고 다짐한 결과였습니다
(성실하고 엄격했던 어머니가 이명박에게 보수적인 가치를 심어주셨음)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그렇게 취직하려는 이명박은 그런데 대학졸업후
학생운동 경력으로
중앙정보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있어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고
필기시험엔 합격했지만 면접에서 번번이 떨어졌고
몇번의 실패 끝에 그 이유가
자신의 학생운동 전력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절망에 빠져있던 중 이명박은
신문 한 귀퉁이에 작은 광고를 발견합니다
'해외 건설현장에 나갈 역군 모집-현대건설'
국내기업에 취업하지 못하게 된 이명박은
해외건설현장은 가능할까 싶어 현대건설에 지원하려했고
혹시 정부가 알까 두려워 지인에 부탁해 남몰래 원서를 냈고
필기시험에 합격합니다
면접보는날 한국 경제의 거인인
현대 정주영 사장이 직접 이명박에게 물었습니다
<정주영>건설이 무엇이냐고 생각하냐 ?
이에 이명박은 얼떨결에
<이명박>건설은 창조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명박의 회고>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건설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정주영 사장은 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후 공개석상에서 자주 쓰곤 했습니다
근데 문제는 그렇게 현대건설 면접 분위기도 좋았는데
결과는 불합격이었고
현대건설 인사과에 있는 지인을 통해 알아보니
예상대로 학생운동 전력때문이라 했습니다
이에 사정을 들은 둘째형 이상득은
동생 명박을 위해 자신이 가정교사로 있던
국영기업체 사장의 신원보증서를 받아주었고
그럼에도 신통치 않아보였던 이명박은
결국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서
자신의 전력을 밝히고
학생운동의 순수성과 (나라를 위해했다는) 충정을 토로한 뒤
사회의 진출을 막는 당국의 처사를 강도높게 비판합니다
며칠 뒤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민정담당 이낙선 비서관이 와서
<이낙선>국가체제에 도전한 자가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
고말했습니다
이에 이명박은
<이명박>한 개인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길을
국가가 막는다면 ,
국가는 그 개인에게 영원한 빚을 지는 것
이라 항변했습니다
이에 이낙선씨를 만나고 며칠후 현대건설로부터
합격 통지를 받았습니다
현대 정주영 회장은 훗날 회고했습니다
<정주영>청와대에 들어갔더니 박정희대통령께서
'이명박이라고 있지요.
아주 고약한 녀석인데 정치권에 기웃거릴 줄 알았는데
현대로 갔더군.
인간 좀 만들어보세요'
라는 얘기를 해주었다
[현대건설]
이명박은 현대건설 입사후
경남 진해 공사현장에서 잠시 근무한 후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현장에
경리로 파견되었고
나라티왓 고속도로는 한국건설사상 최초의 해외공사로
일개 중소기업이던 현대가 대기업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경험도 없이 의욕만으로 달려든 공사였기에
공사가 잘 진척되지 않았고
첫 1년동안 예정된 공사비 70% 를 쏟고도
공사는 겨우 30% 밖에 진척되지 않았고
위기는 결국 한국인 근로자들의 폭동으로 번집니다
폭동이 일어나자 회사 간부들과 현장직원들은
모두 폭도들을 피해 달아났고
폭도들은 현장사무실로 몰려들었고
말단 경리사원이던 이명박 혼자 사무실에 남아
금고를 지키며 폭도와 맞서게 됩니다
이명박은 대검으로 위협받고 각목으로 폭행당하면서도
금고를 얼싸안고 엎드려 버텼고
한참을 폭행당하다 경찰에 의해 구조됬고
이 일이 서울 본사에 알려지며 말단사원의 무용담이
샐러리맨(봉급생활자 , 직장인) 신화로 증폭되게 됩니다
<이명박>신화는 없다
폭동이 진압된 후에도
태국공사는 적자가 누적되었고
그럼에도 현대건설은 최초의 해외공사라는데서
들뜬 분위기로 현실파악을 못하는 상황이었고
말단 경리직원 이명박은 이에 현장자료를 총동원해
냉철하게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가 심각한 적자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서로 작성했고 이 보고서를 받은 정주영회장이
현장으로 급히 달려오고
정주영 회장은 현장에 부정이 있다 생각하고
부장 , 과장 , 말단경리 이명박까지 탈탈 심문했고
이 과정에서 보고체계의 문제점등이 밝혀지고
이 일들로 이명박은 대리로 승진하고 현장책임자가 됩니다
입사 2년만의 빠른 승진이었고
이때 첫승진도 전설적인 신화를 남기며 승진한 것이었고
이후에 승승장구해 이명박은 초고속 승진이 시작됩니다
[샐러리맨 성공신화]
태국공사는 끝났지만 적자는 예상보다 컸고
그나마 월남전 호황에 현대건설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하며
이때 적자를 만회할 수 있었고
이명박은 귀국후 서빙고에 있는
중기사업소 관리과장으로 발령받았는데
이명박이 본사의 관리부 등 노른자 부서로 배치될 줄 알았던
사원들은 이명박이 유배지로 가는 줄 알고 의아해했습니다
중기사업소는 건설현장에 투입되는 장비를
수리 ,관리하는 곳이었고
대졸사원이 갈만한 곳이 아니었고
당시 유배지 같은 개념이었는데
정주영 회장은 경부고속도로 공사 건설을 하며
앞으로는 사람의 노동력이 아닌 장비가 일하는 시대에
돌입한 것이기에 이명박을 그곳에 보낸 것이었고
따라서 점차 중기사업소 역할이 갈수록 막정해졌고
이명박은 그곳에서 장비를 알기위해 불도저를 해체하고
청와대의 지시에 맞서 도로를 파해치는 등
수만은 신화같은 일화를 남기며
서빙고로 배치된지 5년만인
1970년 27살의 나이에
현대건설 이사로 진급하여 본사로 들어갑니다
[김윤옥]
가난한 뻥튀기 소년 이명박이 결국 성공해
현대건설 이사로 승승장구할때
이명박은 중매로 1970년 12월 19일 김윤옥과 결혼하였고
이명박은 결혼날짜를 잡으며 일부로 자신의 생일
12월 19일을 결혼식날로 택했고
그 이유는 그래야 서로 잊지않고 챙겨준다는 논리였습니다
김윤옥은 이화여대 메이퀸 출신으로 한창때의 미처녀였던
인물이었습니다
<김윤옥>남편이 일하다가 곧장 결혼식장에 왔는데 ,
신랑화장이 없던 때라 그냥 이발소가서 머리만 깎고
식장에 나타났다.
일하다가 회사에서 곧장 와 옷만 갈아입고 결혼식을 올려서인지
새신상때보다 지금의 남편이 더 잘생긴 것 같기도 하다.
결혼식 후에는 갑자기 긴장이 풀린 탓인지
열이 40도 까지 올라 남편 병간호를 하며 첫날밤을 지새웠다.
김윤옥은 쉬지않고 일하는 워커홀릭 남편을 만났고
이명박은 인정받고 잘나가는 성공한 샐러리맨이었지만
자주 아프고 열정 , 과로와 몸돌보지 않고 일하며 몸사리지 않는 타입의
이명박이었기에 남편이 죽어버리면 앞으로 아이들과
어떻게 살아야하나 하며 몇날 며칠을 울며 지새우기도 했습니다
이명박은 현대건설 부사장때에도
과로로 간염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당시 김윤옥 여사는
<김윤옥>
당시 진료를 했던 의사는
지금 쉬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했어요.
그때 제 나이 스물일곱 ,
셋이나 되는 아이들과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는 생각에 앞이 캄캄해 몇 날 며칠을 눈물로 보냈는지 몰라요.
아침에 쌀을 씻다가도 ,
아이들 옷을 입히다가도 ,
길을 걷다가도 갑자기 눈물이 흐르더군요.
앰뷸런스 소리가 나면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고요.
그때부터 남편을 위해 몸에 좋은 것이라면
뭐든지 다 해서 먹였어요.
남편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건 휴식이었지만
남편은 병원에서 출퇴근할 정도로 손에서 일을 놓지 못했어요.
이명박은 김윤옥에게
<이명박>일하다 죽겠다
며 고집을 피웠고
그걸 말리다 지친 김윤옥은 주변에서
야생장어가 간염에 좋다는 소문을 듣고
한탄강에 가서 장어를 잡아왔는데
무섭고 징그러웠지만 그때는 남편을 살려야겠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한 김윤옥이었고
그 때문인지 이명박은 기적적으로 완치가 됩니다
초고속 승진을 한 남편을 둔 덕에
젊은 나이에 대기업 중역부인이 된 김윤옥은
매사에 조심하며 이명박을 내조하였고
젊은 새댁이 사장부인이라니
사장의 세컨드라는 소문 등 이상한 소문에 시달리기도 했고
김윤옥 아버지도 현대건설 사장이
세컨드를 두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진상조사를 해보니
알고보니 그런저런 사연이구만 했다고도 합니다
이명박은
근데 그럼에도 아내에게 선물한번 사준 적이 없는
'나쁜남자'
였고
외국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비행기에서 공짜로 주는
칫솔 , 치약 , 빗을 가져다준 경제적이고
'알뜰한남자(+가성비 남편)'
였습니다
(제가보니 이명박이 사람들에게 구타당하거나
사람들이 싫어한 이유가 좀 있어 보입니다)
두 부부는
장녀 주연 , 차녀 승연 , 삼녀 수연 , 막내아들 시형
3남 1녀를 두었고
이명박 부부는 아들이라고 더 귀하게 여기는 것도 없지만
딸들도 그걸 용납하지 못한다며
일로 바쁜 와중에도 아이들을 차별없이 키웠습니다
[현대건설 사장]
이명박이 입사할때 직원 100명수준의 중소기업이었던 현대건설은
1970년대 들어 현대자동차 , 울산조선소 , 단양시멘트 등
굵직한 계열사를 거느린 한국 최고의 대기업으로 변모하고 있었고
정주영 회장은 창립멤버를 현역에서 퇴진시키고
젊은 멤버로 세대교체를 하며 경영혁신을 달성하려 했고
정주영 회장은 그 최선봉에 이명박을 사용했고
이명박은 이사가 되어 본사로 들어온지 2년만인
1972년 상무로 진급 , 2년뒤엔 전무 ,
다음해인
1975년 부사장으로 초고속 진급합니다
그러자 회사 안팎에서는
'박정희가 이명박 뒤를 밀어주고 있다'
는 소문이 퍼졌고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도
박정희 대통령은 정주영 회장을 만나며
<박정희>이명박을 잘 지켜봐
(학생운동 출신이니 잘 지켜보고 감시하라는 뜻)
라고 말했는데
그 이야기가 고속승진과 맞물리며
뒤를 잘봐주라는 말로 와전되었습니다
실제로 정주영 회장은 이명박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정주영>(명박이는) 내가 진급시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진급했다
1973년 10월 ,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기습공격하며
제1차 오일쇼크가 발생하자
원유가는 1년만에 4배가 폭등했고
세계경제는 패닉에 빠졌는데
전쟁의 폐허속에 겨우 기지개를 펴던 한국경제는
외하가 바닥나 부도직전까지 몰린 상황이었고
위기의 정주영 회장은
역발상을 해서
오일달러를 역류시켜 위기를 기회로 삼겠다는 생각을 시작했고
현대건설은 1975년을
'중동진출의 해'
로 삼고 중동진출을 적극모색합니다
이명박은 정주영 회장을 도와 조선소 입찰을 추진했고
바스라 아랍 수리조선소 건설을 추진한 현대건설은
예정보다 공기를 앞당겨 마무리지었고
시공에 대한 평가도 대만족이었습니다
중동의 가장 상징적 공사는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건설공사였고
현대건설은 철구조물을 울산조선소에서 블록으로 제작해
바지선에 싣고 아라비아반도까지 운송하는 대담한 전략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고
1977년 정주영의 중동진출 구상을 실체화 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던 이명박은 현대그룹의 모기업이자
가장 핵심부서였던 현대건설의 사장으로 추대됩니다
이때 그의 나이 35세였고
대한민국 초일류 기업 현대건설의 사장이 된 이명박은
그렇게
'샐러리맨의 신화'
를 쓰게 됩니다
[경제왕 이명박]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수주하는 과정에서
선진국 건설업체의 견제로
현대건설 현지사장과 지점장이 구속되는 사태가 일어났고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일로 현대에게 1억달러의 벌금을 물리고
자국 공사입찰자격을 2년간 박탈해버렸는데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이명박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수차례 드나들었지만
돌파구를 찾기 어려웠고 결국 이명박은
새로운 시장을 찾기로 마음먹고
이라크로 눈을 돌립니다
당시 이라크는 새로운 혁명정부가 들어서
개발에 박차를 가할 때였고
이명박은 국교도 없는 이라크에 들어가
혁명정부 실세들과 친분을 쌓으며
7억 2천만달러짜리 알무사이드 화력발전소 공사와
8억 2천만달러짜리 사마라 팔루자 주택단지 공사 등을 따내며
사우디아라비아를 대신할 시장을 확보합니다
이명박이 길을 뚫어주자
한국 종합상사들도 밀물처럼 이라크로 몰려갔고
건설업도 제2차 중동특수를 꿈꿨는데
하필 1980년 9월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며
한국기업들은 공들여 닦아놓은 건설시장을
서둘러 탈출해야 했습니다
1982년 이명박은 정주영 회장과 함께 포화속에 이라크를
방문한 후
<이명박>전쟁이 가져온 고난은 우리에게 절망이 아닌
극복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였을 뿐
이라며 회상합니다
1970년대 말 말레이시아는
총연장 14.5킬로미터의 세계에서 세번째로 긴 다리 건설을
계획중이었고 페낭대교는 총공사비 3억달러가 넘는
대역사로 말레이시아의 숙원사업이었습니다
페낭대교 수주를 원한 이명박은
말레이시아를 자주 방문하며 고위층과 교류를 트려 했고
그러나 일본업체가 말레이시아 정권을 구워삶고 있어
어려움을 겪었고
(현재도 동남아나 대만 경제 등은
일본기업이 장악하고 있음)
그러던차에 이명박은
마하티르 부수상을 만나게 됩니다
마하티르는 직위만 부수상이지
별다른 힘이 없는 민심수습용 수상이었는데
이명박은 그런 마하티르와 깊은 친분을 맺었고
1981년 초 ,
말레이시아 정부는 페낭대교 공사입찰을 시작했고
프랑스 회사 , 일본 회사 , 한국 현대건설이
최종 물망에 올랐는데
말레이시아 정부 실세와 친분을 가진 일본회사의 공세로
입찰이 쉽지 않았고
그러던 중 말레이시아 후세인 수상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마하티르가 수상직을 승계하게 되었고
개혁바람이 불며 후세인정권 관료들의 각종비리가 드러나고
그 과정에서 일본회사의 로비의혹이 부각되며 밀려났고
남은것은 프랑스회사인데
프랑스회사는 현대건설보다 낮은 입찰가를 올렸지만
공기(공사기간) 는 길었고
이명박은 현대의 공기단축이
더 큰 경제적 이익을 가져온다는 논리로
마하티르 내각을 설득했고
그결과 현대건설이 페낭대교에 최종낙찰됩니다
<라봉봉>제가 한국대통령사 쓰면서 읽어보니
대한민국 대통령들이 다들 그냥 조용히 공부만하다 대통령된줄 알았더니
알고보니 다들 왠만한 힙찔이들 처바를 수준으로 열심히 살았고
역시 이명박 대통령도 괜히 대통령 해먹은게 아닙니다
이명박 같은 타입이 뭔가 인색한 구석이 있어서
전 기분이 뭔가 별로 안좋았던거 같긴한데
인간 자체는 근면하고 성실했던 인물이고
항상 부지런한게 이명박의 큰 장점이었다 생각합니다
제가 한창 중고등학생때 대통령이 된 인물이고
이명박 대통령이 그시기동안
막 명비어천가마냥 서민 , 뻥튀기 , 국밥 , 오뎅
이런거로 감성팔이를 많이했기에
별로 안좋아했고 쇼인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진짜 감동실화였고
이명박 대통령이 그저 나쁜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괜히 기업가 출신 인물이 아니고
제가 나이먹고 보니 효자였고
다시보니 선녀였던 면도 많고
어린시절 가난했던 경험이 좋은 대통령 , 유능한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값진 경험이 되었다 생각됩니다
저도 편의점 알바만 3년정도 했기에
어린 이명박이 어떤 심정인지 그의 심정을 대략 잘알수 있는거 같고
근데 솔직히 이명박이 장사를 부지런하고 깔끔하겐 했을법해도
인색한 느낌도 있고
좀 맹구느낌에 막 살갑게 하거나 친절하게 한거같진 않아서
장사하는데 계속 뭔가 트롤링 자주했을거 같아서
어머니가 옆에서 계속 호통치고 조인트 오지게 까긴 깠을거같고
그런거때문에 계속 인정안하고 형만 이뻐하다가
명박이가 고려대가고 나라를 위해 뜻있는 일 하다가 구속된거 보고
형보다 더 크게 되겠구나 싶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당시 보통 운동권 학생들처럼 시위경력을 이용해 정치판에 기웃댄거보다
어머니의 가르침을 본받아 기업에 간건 정말 잘한 선택이라 생각하고 있고
근데 부인한테 한거보면 인색한 구석이 있기에
노무현처럼 막 잘 퍼주고 착한 성향이 아니라
좀 주변사람들에게 주먹마려운 인물이었을법 하고
개인적으로 유능하긴 진짜 유능한데
솔직히 좀 정은 안가고 짠내가 심한 인물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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