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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초기 인물들>

[김유신의 헤르메스 열기와 구근]

[고슴도치같은 화살 소나]

[한국식 이름 소나]

[문무왕의 삼국통일]

[문무왕의 유언]

[내가 문무왕을 존경하는 이유]

[만파식적]

[불국사를 지은 김대성]

[한국위인+원효대사의 아들+이두와 화왕계 설총]

[반굴의 아들 김영윤]

<라봉봉>

 

[김유신의 헤르메스 열기와 구근]

그렇게 신라와 백제는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

결국 신라 김춘추가 외세 당나라를 끌어들이며

나당동맹의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는 660년 멸망했고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끝내 삼국통일의 끝을 보지 못하고

백제멸망 후 1년후인 661년 사망했고

그의 뒤를 이은 맏아들 문무왕 김법민이

고구려마저 멸망시키며 삼국통일을 완수하게 됩니다

이때에도 여러 신라인물들의 활약이 있었는데

먼저 열기입니다

 

먼저 헤르메스란 제목이 특이하다 느끼실 수 있겠지만

초딩때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신화' 보신분들은

그 녹색옷 네이버같은녀석이 바로 떠오르실거고

 

추억의 어린이 만화속 헤르메스 , 만화로보는 그리스 로마신화

 

요즘 애들은 모를법한 옛날 초창기 네이버 로고의 헤르메스 모자 , 진짜 헤르메스 모자에서 따온 로고임ㅋㅋ

 

심부름꾼 , 신들의 전령 역할인 그리스 신 헤르메스

 

지금이야 문자나 톡으로 곧바로 원하는 말을 전달하는 무선통신의 시대가 되었지만

불과 300년 전만해도 혹은 개발도상국들은 오늘날까지도

직접 보고 말하는 형식으로 소통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말을 전하는 심부름꾼이 필수였는데

전쟁 상황과 실황을 알리는 '전령' 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있었고

발빠르고 체력좋고 지구력 좋은 사람들이 보통 이 역할을 담당했고

올림픽의 꽃 마라톤도 원래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그리스 병사가 승리를 알리려

42키로미터를 뛰어 그리스 도시에 갔다는 것에서 유래되었고

전기통신 , 무선통신 발명 전까진

전령들이 잡히거나 죽음으로서 전쟁의 판도가 바뀌는 등

수많은 사건들이 역사에 있어왔습니다

 

당연 삼국통일전쟁기에도 이러한 헤르메스 같은 전령이 있었고

다행히 삼국사기 열전에라도 남아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신라의 헤르메스 !

열기는 역사기록에 집안내력과 성씨가 전해지지 않는 인물입니다

나당연합군은 백제멸망후 곧 북진해

고구려를 치게되는데

문무왕 1년(661년) 

당황제가 소정방 장군을 보내 고구려를 토벌하려 평양성을 포위하자

함자도 총관 유덕민이 국왕에게 국서를 전하여

군수물자를 평양으로 보내게 했습니다

 

신라의 고구려 평양성 공격

 

문무왕이 대각간 김유신에게 명하여 쌀 4천 석과 벼 2만 2천2백5십 석을 수송하게 했는데

김유신이 장새에 이르렀을 때 풍설이 몹시 사나워서 사람과 말이 많이 얼어 죽었고

고구려인들은 신라 군사가 지쳐있음을 알고 요격하려 했습니다

 

당나라군 진영까지의 거리가 3만여 보였는데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편지를 보내려 해도 적당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때 열기가 보기감보행으로서 나아가 말하기를 

 

<열기>제가 비록 노둔하나 가는 사람의 수를 채우고 싶습니다

 

라 하고 , 

마침내 군사 구근 등 15명과 함께 활과 칼을 가지고 말을 달려 나가니

고구려인들이 바라만 보고 막지 못했고

 

 

이틀 만에 그들이 소정방 장군에게 사명을 전하니 

당나라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위로하고 회신를 보냈습니다

 

영화 황산벌에 나오는 전령들 , 보통 사극에선 등에 깃발꽂고 헐레벌떡 와서 그랬구만유 ㅠㅠ 하는듯 묘사됨

 

열기가 다시 이틀이 지나서 돌아오니(옛날 톡임,,)

김유신이 그의 용맹을 가상히 여겨 급찬의 벼슬을 주었습니다

 

군사가 돌아오자 김유신이 문무왕에게 말하기를 

 

<김유신>열기와 구근은 천하의 용사입니다. 

신이 편의에 따라 급찬의 벼슬을 허락하였으나 공로에 맞지 않사오니 

사찬의 벼슬을 더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했고

문무왕은

 

<문무왕>사찬의 벼슬은 너무 과분하지 않은가?

 

라고 대답하자

김유신이 재배(절)하고 말했습니다

 

<김유신>작록은 공기로서 공로에 대한 보수로 주는 것이온데 어찌 과분하다 하겠습니까 ?

 

문무왕이 이를 허락했습니다

뒤에 김유신의 아들 김삼광이 정권을 잡았을 때, 

열기가 찾아가서 군수 자리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열기가 지원사의 승려 순경에게 말했습니다

 

<열기>나의 공로가 큰 데도 군수의 자리를 청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삼광은 아버지가 죽었다 하여 아마도 나를 잊어버린 것이리라

 

순경이 김삼광에게 이를 말하였더니 김삼광이 삼년산군 태수직을 주었습니다

 

이외에도 열기의 친구 구근도

열기 열전에 같이 실려있는데

그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구근이 원정공(김유신 셋째아들 김원정)을 따라가 서원술성을 쌓았습니다  

그 때 원정공이 , 구근이 일을 태만히 하였다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그에게 곤장을 쳤고

구근이 말하기를 

 

<구근>내가 일찌기 열기와 함께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지역에 들어가 

대각간의 명을 욕되지 않게 하였으며 , 

대각간도 나를 무능하다고 여기지 않고 국사로 대우하였는데 , 

지금 허황된 말을 믿고 나에게 죄를 주니 

평생의 치욕 중에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라고 했고

원정공이 말을 듣고 죽는 날까지 부끄러워하며 회개했습니다

 

즉 열기와 구근은 전쟁시기 김유신의 전보를 전하는 심부름꾼이었고

지금같이 전자통신이 안되던 시절 직접 말을타고 전장에서 포위를 빠져나와

편지를 전하는 굉장히 중대한 업무를 수행하는 두 용사들이었습니다

 

[고슴도치같은 화살 소나]

태종 무열왕을 이은

문무왕 시기에도 신라인들은 매우 용감히 활동하였는데

백성군 사산(백성군=경기도 안성시 , 사산=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사람

소나의 이야기입니다

 

소나(혹은 금천)의 부친 심나(혹은 황천)는 힘이 세고 몸이 가볍고 날래었고

사산(천안)은 경계가 백제와 연이어 있있었기 때문에 상호 간에 노략질과 싸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심나는 그 때마다 나가서 싸웠는데 ,

그가 가는 곳마다 견고한 적의 진지가 무너졌습니다

 

인평 연간(634년∼637년 , 선덕여왕시기)에 백성군(경기도 안성)에서 군사를 내어 백제의 변경을 치자

백제도 정예병을 보내 갑자기 공격해왔으므로 우리 사졸들이 혼란스럽게 퇴각했습니다

 

그러나 심나는 홀로 서서 칼을 뽑아 들고 성난 눈으로 크게 꾸짖으며

수십여 명을 베어 죽이니 ,

적이 두려워서 감히 덤벼들지 못하고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도주했습니다

 

백제인들이 심나를 가리켜 '신라의 비장' 이라 하고

서로 말하기를

 

<백제군들>심나가 아직 살았으니 백성에 가까이 가지 말라 !

 

고 했습니다

 

심나의 아들 소나도 영웅스럽고 호걸스러움이 아버지의 풍모를 지녔기에

백제가 멸망한 뒤에 한주 도독 유공이 대왕에게 청해

소나를 아달성(강원도 이천군)으로 보내 북쪽 변방을 방어하게 했습니다

 

675년 상원 2년 을해년 봄

아달성 태수 급찬 한선이 백성들로 하여금 어떤 날

모두 나가 삼을 심게 하고는 이 명령을 어기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말갈(고구려)의 첩자가 이를 탐지하고 돌아가 자기 추장에게 보고했고

그 날이 되어 백성들이 모두 성에서 나와 밭에 있는데 ,

말갈이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갑자기 성으로 들어가서 성 전체를 노략질하니

늙은이 어린이 할 것없이 모두 낭패하여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이 때 소나가 칼을 휘두르며 적진을 향하여 크게 외쳤습니다

 

<소나>너희들은 신라에 심나의 아들 소나가 있는 줄을 아느냐 ?

나는 실로 죽기가 두려워 살기를 도모하지는 않는다

싸우려는 자가 있으면 왜 나오지 않느냐 ?

 

그가 곧 분격하여 적진으로 돌진하니

적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다만 그를 향하여 활을 쏠 뿐이었습니다

소나도 활을 쏘았는데 날아 오는 화살이 마치 벌떼와 같이 많았고

진시(오전 7~9시)로부터 유시(오후 5~7시)에 이르자

소나의 몸에는 화살이 고슴도치의 털처럼 박혀

마침내 쓰러져 죽었습니다

 

소나

 

소나의 아내는 가림군의 양가 여자였고

처음에 소나는 신라 북쪽국경지대인 아달성이 적국에 인접하여 있기 때문에 혼자 가고

자기 아내는 집에 머물러 있게 했습니다

그 고을 사람들이 소나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조문하니

그의 아내가 울면서 대답했습니다

 

<소나의 아내>나의 남편이 항상 말하기를

 

'장부는 마땅히 싸우다가 죽어야 한다

어찌 침상에 누워서 집안 사람의 손에 죽을 수 있으랴 !'

 

하였습니다.

그의 평소의 말이 이러하였으니 지금의 죽음은 자기의 뜻대로 된 것입니다

 

대왕이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면서 말했습니다

 

<문무왕>부자가 모두 국사에 용감하였으니 ,

가히 대대로 충의를 이루었다고 하겠다

 

대왕은 그에게 잡찬을 추증했습니다

 

신라 골품제 3등 벼슬인 '잡찬'은

신라 골품제 1등 , 2등 벼슬인 이벌찬과 이찬 다음 벼슬로서

현 군대로 치면 투스타 , 소장에 해당하는 관직으로서

장성 , 장군급 벼슬이고

차별이 극심한 골품제 사화였던 신라에서

소나는 지방출신 + 진골(왕족) 이 아닌 일반 신라인 중

'유일하게' 장성이 된 인물이었습니다

 

이벌찬 이찬 잡찬 파진찬 대아찬까지는 성골과 진골 즉

신라 왕족만이 오를 수 있는 직위였고

보라색 옷을 입을 수 있었는데

다른 신라인들도 삼국통일전쟁기동안 용맹히 싸우다 전사했지만

전사해도 엄격하게 급찬(9등벼슬 붉은색옷)~사찬(8등벼슬 붉은색 옷)정도 벼슬만 주었고

붉은색옷이 그 유명한 '6두품 계급' 으로서 왕족이하 신라사회의 일반인들이 전사해도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관직이었는데

 소나는 신라인중 유일하게 신라사회에서 전사후 '왕족대우' 를 받게 된 것입니다

 

죽어서야 보라색옷을 입게된 소나

 

삼국통일전쟁기 당시 신라사회는 무열왕 , 문무왕이 깨어있던 임금이긴 해서

임전무퇴로 용맹히 싸운 장수들이 전쟁터에서 전사만 하면

남은 가족들 보상을 상당히 해주고 대우는 엄청나게 해주었는데

이례적으로 왕족 관직을 준 경우는 소나밖에 없고

 

당시 심나-소나 가문이 백제 사비성 근방이었기 때문에

백제계 출신 장수일 가능성도 큰데

무열왕때 백제를 합병한 이후에

문무왕 역시 백제계 유민들을 달래기 위해

문무왕이 2대에 걸쳐 신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소나에게 왕족 대우를 해줌으로서

신라에 충성만 하면 출신이 어떻든 확실히 보상해준다는 그런 의도로

소나가 특별히 뽑혀서 죽어서 고위대작을 받은게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식 이름 소나]

또 별개로 소나의 이름은 소나이자 금천이라고 하며

소나의 아버지 심나(=침나) 는 황천이라고 하는데

'금천 金川' 은 쇠금자에 내천자니 우리말로 '쇠내' 인데

이는 고대 한국어를 표기할때 오늘날 일본어처럼 한자를 음차 , 훈차해서

썼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록이라 국어연구에도 중요한 인물로 소개되는 인물이고

소나 아버지 심나의 이름 '황천 煌川' 역시 빛날 황 , 성할 황자인데

우리말로 '성내' 이런 이름이었을듯 싶고

고대 한국어 이름이 생각보다 상당히 아름답고 예쁜이름이 많은데

거의 인디언식 이름짓기같은 느낌이 날정도로

삼국사기에는 순박하고 토속적인 아름다운

고대 한국명칭들이 많이 쓰여있고

이것도 우리말인가 싶을정도로 아름다운 고대한국어 , 한국이름이 참 많고

이름이 두가지일 경우 한자 훈차로 한국 고유어를 썼다 보면 되는데

 

박혁거세의 다른이름 '불구내(붉은 해 , 밝은 세상)' ,

세종의 다른이름 '노리부'

박이종의 다른이름 '이사부' 등

우리가 오늘날 그대로 쓰는 신라어 말고도

잊혀진 신라식 이름도 굉장히 아름다운게 있고

 

백제식 이름은 복성이 굉장히 특이한데

2글자성인 복성제도는 일본에 그대로 전해졌고

(부여 , 목리 , 진모 , 사택 , 연비) 

 

고구려식 이름은 태양을 해라고 해서

고구려 왕족의 성씨를 고씨 이전에 해씨로 정했고

연개소문의 연씨가 연못의 연씨라거나 하는 것을 보면

해나 연못같은 순수 우리말 이름이 고구려어에서 비롯되었음에

참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 토종 성이 연못이나 지붕위의 박[박]이나 황금의 금[김] 같은

자연물 성을 따왔다는게 참 인디언같고 아름답다는 느낌임)

 

이런것 때문에 남방계 어족인 중국인들은 북방계 어족인 한국과 완전히

다른 문화 , 언어습관을 가졌고

이런것 때문에 특히 국풍문화가 엄청나게 강했던

고구려에서는 밝은신인 '해' 를 섬기고

백두산 신을 믿고

고구려 종교도 아예 '수두교(신수두)' 라 해서

중국 유교나 도교와는 완전히 달라

음악 , 미술까지 그 고유의 국풍으로 발달해 '제국' 을 형성했기에

중국에서 당대 제국이 2개임을 시기하여 고구려를 계속해서 멸망시키려했고

사실상 고구려가 연개소문을 필두로

고대한국어 , 고대 한민족문화를 마지막까지 지키며 저항했고

 

신라 역시 고구려의 조선문화를 받아 고유의 아름다운 한국어를 존속시켰는데

신라가 김춘추때부터 당나라에 굴욕적인 사대외교를 시행해

백제 ,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

동아시아에 '제국' 은 중국 단 한 개만 남게 되었고

당나라의 도움을 받은 굴욕적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 이후인

신문왕부터 신라는 '한화정책(중화정책)' 을 시행해

고대 순수 우리말들이 전부 한자로 표기되어 고대 한국어가

이때를 기점으로 완전히 바뀌어

~고려 , 조선초 훈민정음 창제전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이고

문무왕 이후부터는 점차 한국에서는

불구내 , 김지대로 , 노리부 , 이사부 , 심나 , 소나 같은 개성있는 이름은 사라지고

김 , 박씨같은 고유 성만 남고

통일신라시대부터는 철저히 김OO 박OO 이런 단조로운 중국식(한족식)

외성 및 세 글자 이름으로

바뀌게 됩니다 (중국 유교식 이름의 시초가 '김춘추' , '김유신'이고

더나아가 중국 유교를 받은 김유신 가야계 집안임)

 

신라가 삼국통일 이후 적극적인 한화(중국화) 정책을 시행하며

점차 고유어가 사라지고 한자식 , 중국식 체계로 바꾸게 됩니다

 

[문무왕의 삼국통일]

여튼 , 삼국통일 전쟁기 이야기는

이전에 많이 썼으니 생략하겠고

이렇게 신라인들의 용감한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삼국통일을 이뤄냈고

또한 당대 신라 왕실에서도 당대에도 가장 선진적인 군인 복지시스템이 존재했기에

신라인들이 골품 , 신분이 달라도 다 같이 똘똘 뭉쳐서

백제 , 고구려 , 당나라와 삼중 전쟁을 벌여 전부 승리할 수 있을만큼의

상당한 보상체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그렇게 문무왕은 백제를 멸망시킨 아버지 태종 무열왕에 이어

고구려 , 당나라까지 물리치며 삼국통일전쟁을 끝내고

'통일신라'라는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고

통일신라 역시 '고대' 에 속하긴 하지만

삼국시대라는 고대시대를 완전히 끝내고

거의 매년 전쟁을 벌였던 삼국백성들은 아예 전쟁이 없는 유래가 없는

'평화시대' 혹은 '황금기' 를 맞게 되며

신라는 합병한 백제와 고구려의 문화와 기술을 습득하여

동아시아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삼국통일전쟁기 말기

백제와 신라의 전투나 신라인들의 분전 기록들을 보면

굉장히 잔인하고 고어한 기록이 많은데

통일신라시대가 시작되자 이런 기록들이 뚝 끊기기에

본능적으로 당대 삼국인들도 삼국이 서로 문화와 언어를 공유하고 있었기에

이 전쟁만 끝나면(통일되면) 역사에 유래가 없는 대평화시대가 찾아올 것을

짐작하고 있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문무왕의 유언]

또한 문무왕은 아버지 테종무열왕의 그림자에 가려

중요도는 아버지나 김유신보다 떨어지는 삼국통일의 주인공인데

어찌보면 아버지보다 더 나을 수도 있을정도로

대를 이은 명군의 탄생이었고

 

문무왕 이야기는 이전에 다루었고

문무왕의 유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문무왕이 태자에게 남긴 유언>

과인은 어지러운 때에 태어난 운명이어서 자주 전쟁을 만났다.

서쪽을 치고 북쪽을 정벌해 강토를 평정했으며 ,

반란자를 토벌하고 화해를 원하는 자와 손을 잡아 마침내 원근을 안정시켰다.

위로는 선조의 유훈을 받들고 아래로는 부자의 원수를 갚았으며 ,

전쟁중에 죽은 자와 산 자에게 공평하게 상을 주고 안팎으로 고르게 관작을 주었다.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천수를 다하도록 했으며 ,

납세와 부역을 줄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게 해

백성들은 자기의 집을 편하게 여기고 나라에는 근심이 사라지게 했다.

창고에는 산처럼 곡식이 쌓이고 감옥에는 풀밭이 우거졌으니 ,

가히 선조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고 백성들에게도 짐진 것이 없었다고 할 만했다.

 

내가 풍상을 겪어 드디어 병이 생겼고 , 정사에 힘이 들어 더욱 병이 중하게 됐다.

운명이 다하면 이름만 남는 것은 고금에 동일하니 ,

홀연 죽음의 어두운 길로 되돌아가는 데 무슨 여한이 있으랴 !

 

태자는 일찍부터 덕을 쌓았고 , 오랫동안 동궁(태자)의 자리에 있었으니 ,

위로는 여러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낮은 관리에 이르기까지

죽은 자를 보내는 의리를 어기지 말고

산 자를 섬기는 예를 잊지 말라.

종묘사직의 주인은 잠시라도 비어서는 안 될 것이니

태자는 나의 관 앞에서 왕위를 계승하라.

 

세월이 가면 산과 계곡도 변하고 세대 또한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

오왕(吳王: 오의 손권)의 북산 무덤에서 어찌 향로의 광채를 볼 수 있겠는가 ?

위주(魏主: 조조)의 서릉에는 동작(銅雀)이란 이름만 들릴 뿐이로다.

옛날 만사를 처리하던 영웅도 마지막에는 한 무더기 흙이 돼 ,

나무꾼과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다.

그러므로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역사서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요 ,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더라도 나의 혼백을 구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조용히 생각하면 마음 아프기 그지없으니 ,

이는 내가 즐기는 바가 아니다.

 

숨을 거둔 열흘 바깥 창고 앞에서

나의 시체를 서국(西國: 印度 인도) 법식으로 화장하라.

상복의 경중은 본래의 규정이 있으니 그대로 하되 ,

장례의 절차는 철저히 검소하게 해야 것이다.

변경의 성과 요새 주와 군의 과세 중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은 살펴서 모두 폐지할 것이요 ,

법령과 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시 바꾸고 ,

원근에 포고해 백성들이 뜻을 알게 하라.

다음 왕이 이를 시행하라.

 

문무왕 표준영정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역사 유언 중 하나고

현대인이 보기에도 굉장히 멋지고 가슴에 울리는 명문이라

고대 신라시대의 문무왕의 교양수준이 어떠했는지를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고

왜 김법민(문무왕)이 고대 한국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의

마지막 키잡이가 되었는지 ,

왜 당대 신라인들이 그렇게 잔혹한 전투속에서 김춘추와 김법민을 위해

기꺼히 자랑스럽게 전사하는 분위기가 있었는지를 알 수 있을거 같습니다

 

제가 옛날부터 제가 느끼거나 역사책에서 본

결혼식과 장례식의 폐혜를 잘 알고 있는데

중국 성군 한문제 역시 

 

<한문제>만물은 소생했다가 죽는 법이니 무엇을 슬퍼하겠는가 ?

나의 장례는 소박하게 치루라.

묘지를 크게 만들지 마라.

진주도 함께 매장하지 마라.

장례기간을 너무 길게 하지 마라.

전국의 백성들과 관리들은 3일만 상복을 입는것을 허락하겠다.

간소하게 처리하라.

 

라 했는데 문무왕이 한문제의 영향을 받은게 있지 않을까 싶고

태조 왕건 역시 죽기전 한문제를 언급했는데

 

943년 몸이 편치 못하여 마침내 정무의 처리를 중단한 왕건은

대신 염상과 왕규 그리고 박수문을 곁에 두고

 

<왕건>한나라 문제는 말하기를

'천하 만물이 생겨나서 죽지 않은 것이 없으니

죽음은 천지의 이치요 만물의 자연이다. 어찌 너무 슬퍼하겠느냐'

고 하였으니 옛날 명철한 왕들은 마음을 이렇게 먹었던 것이다.

내가 병에 걸린 지 벌써 20여일이 지났다.

죽는 것을 돌아가는 것처럼 생각하노니 무슨 근심이 있으랴 ?

한문제의 말이 곧 나의 뜻이다.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안팎의 중요한 일들은

그대들이 태자 무와 함께 처리하고 나서 나에게 보고하라

 

그날부터 아흐레가 흘렀고 왕건의 병이 몹시 위독하여 지자

왕건은 학사 김악에게 명하여 유언을 받아 적게 했고

그 초고가 이루어진 뒤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자

좌우의 신하들의 큰 소리로 목메어 울부짖자,

왕건은

 

<왕건>이것이 무슨 소리냐

 

신하들이

 

<고려신하들>성상께서 백성의 부모가 되었다가

오늘 갑자기 여러 신하들을 버리고 가려 하시니

저희들이 슬픔을 참을 수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왕건의 남긴 마지막 말은 ,

 

<왕건> 덧없는 인생이란 엣날부터 으레 이런 것이다...

 

하고 사망했고

중국 한문제 , 신라 문무왕 , 고려 태조 왕건이

백성들 조세부담 줄이려 죽을때까지 노력했고

전부 유언이나 삶이 일맥상통한게

굉장히 현자 기질이 있었던 명군 오브 명군이었던 인물이라 생각하고

 

문무왕에게 문자 칭호가 붙은게 유약했던 조선 문종과 달리

진짜 머리좋은 임금에게 당시 줄 수 있었던 최고의 칭호였고

게다가 문무왕은 지적 , 철학적 소양 외에도 고구려 멸망 , 나당전쟁 승리라는

당대 G2를 둘다 꺾어버린 군사적 업적도 있어서

무자도 붙어서 문과 무를 모두 이룬 왕이라는 한국사 시호중 굉장한 시호를 받은

인물입니다

 

한국사에 오늘날까지 대왕이라 불리는 인물이

단 두명 ,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이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오늘날 우리들에게 문무왕도 문무대왕으로 예우를 받고 있고

광개토대왕 , 세종대왕급 압도적 이미지는 아니지만

조용히 대왕소리 들으며 무탈하고 좋은 이미지로 꿀빠는 인물이 문무대왕이고

대한민국 해군함 문무대왕함 , 문무대왕릉 등 공식 명칭에 꼭 대가 들어가는 인물이며

태조왕건이나 문무왕 같은 인물은 우리가 당시 백성으로 살아도

진심으로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이례적인 성군들이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한문제나 문무왕은 또한 제사의 폐해를 정확히 인지한 현군이었고

고대보다 몇십배는 더 발전한 근세 조선시대에도

이런 교통정리가 되지 않아 예송논쟁같은 희대의 상복 논쟁으로

국가의 발전이 저해되었음을 보면

또한 오늘날 대한민국도 국민들 민생과 전혀 상관이 없고 폐만 끼치는

김대중 노무현이나 박정희 전두환 묘소 , 동상 논쟁이

끊이지 않음을 보면 유언장에 자신 제사를 검소하고 짧게하라고

후임한테 대놓고 못박고 갈 정도로 죽을때까지 민생을 살핀 대왕들이었고

 

개인적으로 결혼식이나 장례식 성대한건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 생각하는 사람이라

괜히 퀴리부부가 결혼때 신혼여행으로 자전거로 동네 호수공원 한바퀴 돌고

다시 연구하러 가거나

문무왕이 제사로 백성들 부담주지 말라하거나 하는거 보면

 

역사에서도 머리 좋은 사람들일 수록 허례허식에 돈을 쓰지 않고

싸구려 웨딩복 하나 입고 조용한 작은 교회에서 대충 가족 몇명만 불러 결혼하고

죽으면 태워서 자연에 뿌렸고

 

기본적으로 피라미드같은 세계 고대무덤들이나

한국 고대 왕실무덤이 삼국 다 인력소모가 큰 양식인데

고구려랑 백제는 굴식돌방무덤 , 신라는 돌무지덧널무덤이라

다 백성들이 왕죽으면 묘지만들려 돌 오지게 날라야했고

묘에 그림도 예쁘게 그려넣고 금은보화도 쑤셔 넣어야했는데

우린 교과서로 아름다운 한국 문화적 유산이다 배우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사실 다 당대 백성들한테 징탈한것이고

그런것때문에 노답인걸 알았던 문무왕도

그냥 바다 바위에 뿌리라 유언한듯 싶고

 

하여튼 한국사 통일의 두 주역

문무왕이나 태조왕건도 죽을때까지 허례허식이 노답인거 알고

그게 백성들 피해로 돌아간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문무왕 유언도

본인이 어지러운 때를 타고난 운명이었음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그럼에도 전쟁때 죽은자와 산자에게 공평하게 상을 주고 논공행상을 고르게 했고

전쟁이 끝나고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게하고

납세와 부역을 줄였음을 밝혔고

본인의 장례는 철저히 검소하게 하고 백성들 세금중 필요하지 않은 것은

모두 폐지하라 할 정도였기에

 

아버지 후광 거르고도 굉장히 명군이고

어찌보면 아버지보다 더 나은구석도 있기에

비굴하고 흑화한 영웅 이미지가 있는

아버지(김춘추) , 외삼촌(김유신)에 비해

가장 이미지는 좋은 삼국통일기 마지막 영웅이었습니다

 

[내가 문무왕을 존경하는 이유]

문무왕은

백제계 출신이어도 파격적으로 왕족 관작을 내릴만큼 포용력이 굉장해

나당전쟁 당시 백제 , 고구려 유민들의 지원을 받아낼 수 있었고

세금깎아줬다는 것이 굉장히 인상적이라

 

개인적으로 보기에 한국사에서

대놓고 세금깎아준 왕이

문무왕(문무왕 유언) , 태조왕건(십일조) 등으로 손에 꼽을 정도라

문무왕과 태조왕건이

이전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시대(통일신라 , 고려)를 열었다는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음을 보면 명군을 넘어 성군 소리 들을만한 얼마 안되는 인물이었고

문무왕이나 태조왕건은 세금 낮춰줬다는 점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진짜 존경하는 한국 임금들이며

임금이 된 자가 자기 백성을 위해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지한 , 오늘날 기준으로도 굉장히 깨어있는 인물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전세계가 선진국일수록 출산율이 떨어지는 이유가

다른 이유 없고 대부분 '높은 세금' 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역사적으로도 현대 이전에도 역시 세금이나 부역이 과해서

백성들이 자기 재산을 모아 자립할 수 없는 사회가 되면

도적이 들끓고 나라가 해체되었고

국가 멸망테크를  타서

다시 새로운 국가가 건설되고 그 국가는 낮은 세율로 시작해 전성기를 누리다

다시 후대 지도자가 하나둘 세금을 올려 망조가 들고 멸망하고 반복하는게

한국사 , 세계사에 무한반복 패턴으로 나오고

개인적으로 미국 , 유럽 , 일본 같은 선진국이나 막 선진국 딱지를 달긴 단 우리나라같은

나라들 공통점이 대부분 소득의 50프로씩 세금을 뜯기고 죽어도 상속세도 50프로씩 뜯긴다는 점이고

그런것때문에 겉모냥은 선진국이지만 G10에 들어가는 선진국들 모두 속은 이미 곯을대로 곯고

선진국들 자국민들은 겨우 아기를 평균 1.X 명대로 낳아 이미 국가를 유지할 수 없는 수준이며

 

자국민들은 세계최강국이었던 고대 로마인들이 말기에 출산을 포기하고

야만의 바바리안들에게 나라를 내주었듯이

세금이나 행정력이 없다싶이해 아기를 무제한으로 싸재끼는

아프리카나 중동 , 동남아 ,인도계 , 개도국들의 이민러쉬로 계속 장악당하고

현지 자국민들은 소수의 상위권 시민을 제외하고는

중산층이 무너지고 빈민이나 서민들이 부를 쌓기 어려워 대가 끓기는 실정이라는 생각입니다

 

코미디인거 같지만 눈물나는 대한민국 현실세금임ㅋㅋ(상속세 제외ㅋㅋㅋㅋㅋ) , 삼쩜삼

 

개인적으로 현재 대한민국은

상위 10% 이상 엘리트들은 굳이 별다른 정책이나 조언 안해줘도

설사 나라가 공산화나 극우화되어도 명석한 두뇌와 자본과 전문기술이 있는 사람들이라

어떻게던 윗대가리로 잘먹고 잘살고 꼬우면 이민가도 미국이 땡큐하며 환영해주지만

문제는 중위권이나 하위권 국민들이 무너지는 순간 곧바로 안보위기에

국가 멸망이라 출산율과 세금에 대한 대책이 절실히 필요하다 생각하는데

 

<탈세의 세계사 , 오무라 오지로>

국가가 쇠퇴할 때에는 세금이 크게 관련되어 있다.

부유층과 특권계층이 세금을 회피하고

부담이 서민에게 전가되어 빈부 격차가 확대되고

서민의 생활이 어려워지면 국력이 쇠퇴하게 된다.

그런 와중에 타국으로부터 침공을 당하면 국가가 붕괴하게 된다.

세계사에 등장하는 강대국들이 쇠퇴할 때에는 대략 이런 패턴으로 몰락했다

 

혁명&전쟁&국가멸망... 역사를 움직인 '세금 폭탄' , 경남신문

 

문무왕이나 태조왕건 같은 강력하고 서윗한 지도자가 나와서

세금 , 잡세 , 상속세 싹 삭제하고

10% 이하 과세로 시작해야

국민들이 신바람 나서 열심히 일해 저축하고 자식들 집이랑 땅 물려주고

기업들도 안정된 고용승계로 탈세나 국부이탈을 막을 수 있어

경제환경이 개선되고 대한민국 출산율이 상승한다 생각하고

 

옛날부터 현명한 군주들은 세금 낮추고 초막살이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고

문무왕때 괜히 의상법사가 문무왕에게 초막살이를 하면 했지

성쌓아서 국민들 피해주면 그게 더위험하다 조언해준게 아니고

 

문무왕이나 왕건이 당대 백성들에게 일반적인 왕이 아닌 산신령이나 예수님같은 이미지였음을 보면

인간 역사는 그만큼 세금과 굉장히 연관이 있는데

국민들이 깨어있어야

대한민국의 나쁜 정재계 풍토가 바뀐다 생각하지

이대로가면 출산율 0%로 자연소멸해버리는 나라고

여야 할 것없이 당파싸움을 그만하고 조세감면과 민생처리에 힘써야한다는 생각입니다

 

문무왕이 위대한 임금인 이유는

단순히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삼국통일을 해서가 아니라

문무왕이 만든 통일신라는

이전 삼국 신라와 완전히 다른 ,

한국사내 최초의 통일국가의 새로운 건국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인데

새로운 건국을 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을 포용하고 통합해야하는데

문무왕은 세금감면 외에도 차별하지 않고

백제 , 고구려 유민들에게 적절한 포용책을 구사해

태조왕건보다 먼저 그 일을 이루어냈고

 

문무왕 이미지가 너무 젠틀 + 조용조용해서

전설도 많은 인물임에 비해

태조왕건이나 태조 이성계같이 위인전도 딱히 없고

고구려 , 왜 , 당나라에 온갖고생하며 외교전을 펼친

아버지 무열왕처럼 화려한 인생을 산것도 아니라

업적과 인물됨에 비해 굉장히 묻히는 감이 있고

 

신라의 삼국통일은 고려의 삼국통일보다

민족의 통합에는 실패했다는 안좋은 이미지는 있지만

문무왕은 최초로 통일한 인물치고는

나당전쟁시기 백제 , 고구려 유민의 지원과 통합을 이끌어낼 수 있을 정도로

백성들을 위했으며 오랜 전쟁으로 혼란스런 시대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생각이고

죽을때까지도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보호하려 했던 것을 보면

개인적으로 문무왕이 태조 왕건 급 성인같은 인물이라 생각하는데

 

지증왕이나 문무왕같이 진짜 국민들 발전시키고 보호한 인물들은

위인전이나 사극으로 잘 다루지 않고

신라 임금들이 진흥왕 , 선덕여왕 , 무열왕과 김유신 같은

업적이 화려하거나 특이(여자)한 인물들만

조명되는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문무왕은 원래 왕이기 때문에

이렇게 길게 쓰지 않으려했는데

문무왕 유언과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쓴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만파식적]

문무왕 김법민의 아들 태자 김정명은

문무왕 사후 왕위를 신라 31대왕 신문왕이 되었고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며 아버지를 기리려했습니다

 

문무왕은 죽어서도 동해바다의 해룡이 되어

왜적을 막아주겠다 공언했고

신문왕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 문무왕을 불교식으로 화장해 유골을 동해에 안장했고

이로인해 문무왕릉은 한국사에서 굉장히 특이한 형태고

동해바다의 암석속에 있는 '수중릉' 으로 오늘날까지 남아있습니다

 

문무대왕릉 , 대왕암

 

신문왕은 즉위하자마자

부왕인 문무왕을 위해 동해바닷가에 감은사라는 절을 세워서

문무왕을 기렸고

이듬해 임오 5

해관(海官) 파진찬 박숙청이 아뢰기를 ,

 

<박숙청>동해 중의 작은 하나가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는데 ,

물결을 따라서 왔다 갔다 합니다

 

라고 했고

신문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일관(日官) 김춘질에게 점을 치도록 했습니다 

그가 아뢰기를

 

<김춘질>돌아가신 부왕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三韓) 수호하고 있습니다

김공유신(金公庾信) 33천의 아들로서

지금 인간 세상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성인이 덕을 같이 하여 나라를 지킬 보배를 내어주려 하시니 ,

만약 폐하께서 해변으로 나가시면

값으로 계산할 없는 보배를 반드시 얻게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신문왕이 기뻐하여 그달 7일에 이견대로 행차하여 산을 바라보면서

사자를 보내 살펴보도록 했더니

산의 형세는 거북의 머리 같고 ,

위에는 줄기 대나무가 있는데 ,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자가 와서 그것을 아뢰니 , 신문왕은 감은사로 가서 유숙했습니다

 

이튿날 오시(낮 11시~1시) 대나무가 합하여 하나가 되고 ,

천지가 진동하며 비바람이 몰아쳐 7 동안이나 어두웠고

16일이 되어서야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도 평온해졌습니다

 

신문왕이 배를 타고 산에 들어가니 ,

용이 검은 옥대(玉帶 옥 허리띠) 가져다 바쳤고 

신문왕이 영접하여 함께 앉아서 묻기를

 

<신문왕>이 산과 대나무가 혹은 갈라지기도 하고

혹은 합해지기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

 

라고 했고 

용이 대답하기를

 

<용>이것은 비유하자면 ,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아서 ,

대나무라는 물건은 합한 후에야 소리가 납니다

 

성왕(聖王)께서는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좋은 징조입니다

대왕께서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할 것입니다

이제 대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다 속의 용이 되셨고 ,

유신은 다시 천신(天神) 되셨는데 ,

성인이 같은 마음으로 ,

이처럼 값으로 따질 없는 보배를 보내

저를 시켜 이를 바치는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신문왕과 용

 

안압지 신라 용머리 장식

 

신문왕은 놀라고 기뻐하여

용에게 오색 비단과 금과 옥으로 보답하고

사자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서 바다에서 나오자 ,

산과 용은 갑자기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신문왕이 감은사에서 유숙하고 ,

17일에 기림사 서쪽 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습니다

태자이공  효소왕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소식을 듣고는 말을 달려와서 하례하고 천천히 살펴보고 말하기를 ,

 

<태자>이 옥대의 여러 쪽들이 모두 진짜 용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신문왕이 말하기를

 

<신문왕>네가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

 

라고 했고 태자가 아뢰기를

 

<태자>쪽 하나를 떼어서 물에 넣어보면 아실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에 왼쪽의 둘째 쪽을 떼어 시냇물에 넣으니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

그곳은 못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못을 용연(龍淵)으로 불렀습니다

 

신문왕이 행차에서 돌아와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天尊庫 신라 왕실 창고) 간직했습니다

피리를 불면 ,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는 개며 ,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이 평온해졌습니다

 

만파식적

 

이를 만파식적(萬波息笛)으로 부르고 국보로 삼았습니다 

효소왕대에 이르러 천수 4년(693년) 계사에 실례랑(부례랑)이 살아 돌아온 기이한 일로 해서

다시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했습니다 자세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천수 3년(692년) 임진 9 7일에 효소왕은 대현 살찬의 아들 부례랑을 국선(國仙 , 화랑)으로 삼았고

 낭도(화랑을 따르는 무리)가 명이었는데 중에서도 안상과 더욱 친했습니다

 

천수 4년 즉 장수 2년 계사 늦은 봄

부례랑은 낭도들을 거느리고 금란(金蘭 강원도 통천) 으로 출유(유람 , 여행)하여

북명(강원~함경쪽 , 원산만) 지경에 이르러 적적(狄賊 북적 , 말갈) 들에게 붙잡혀 갔는데

문객들은 모두 어찌할 줄을 모르고 돌아왔으나

안상만이 홀로 그것을 추적하였는데 이는 3월 11일(693년)의 일이었습니다

 

효소왕이 이 소식을 듣고 놀라고 놀라면서 말하기를

 

<효소왕>선왕께서 신적(神笛 신의 피리)을 얻어서 짐에게 몸소 전하여

지금 현금(玄琴 거문고)과 함께 내고(內庫 궁궐창고)에 간직해 두었는데 ,

무슨 일로 국선이 갑자기 적의 포로가 되었는가?

이 일을 어찌하여야 좋단 말인가 ?

 

라고 했습니다

때마침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天尊庫 만파식적이 있는 창고) 덮었고 

효소왕은 더욱 놀라고 두려워서 사람을 시켜 조사해보니

창고 안에 있던 거문고와 피리 보물이 없어졌습니다 

이에 효소왕이 말하기를

 

<효소왕>내 어찌 복이 없어 어제는 국선을 잃고 거문고와 피리를 잃게 되었는가 ?

 

라고 하면서 창고를 지키던 관리 김정고  다섯 명을 가두었습니다 

4(693)에는 국내에 현상(현상금)을 모집하여 말하기를

 

<효소왕>거문고와 피리를 찾는 자는 1년의 조세를 상금으로 주겠다

 

했습니다

 

5월 15일 부례랑의 두 분 부모님이 백율사의 대비상 앞에 나아가서

여러 날 저녁 천제에게 기도를 드렸더니 ,

갑자기 향탁(香卓 향로탁자) 위에 거문고와 피리 두 보물이 놓여져 있고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도 불상 뒤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부례랑의 두 부모님은 너무나 기뻐서 돌아오게 된 이유에 대해서 물으니 ,

부례랑은 말하길

 

<부례랑>저는 붙잡혀 간 뒤부터 그 나라 대도구라(말갈족 이름)의 집에 목동이 되어서

대오라니(말갈족 이름)의 들판에서 방목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홀연히 모습과 용모와 뜻이 단정한 한 스님이 있었는데 ,

손에 거문고와 피리를 들고 와서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스님>고향생각을 하느냐 ?

 

고 하기에, 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부례랑>임금과 부모님을 그리워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

 

라고 했습니다. 이에 스님이 말하기를

 

<스님>그렇다면 나를 따라오라

 

고 하고는 저를 데리고 해변가에 이르렀는데, 또한 안상도 만났습니다

이에 피리를 두 쪽으로 나누어 두 사람에게 주면서 각기 한쪽씩 타게 하고

자신은 그 거문고를 타고 둥둥 떠서 돌아왔는데 잠깐 사이에 이곳까지 왔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에 모든 일을 급히 알렸더니 , 효소왕은 크게 놀라며 사람을 보내어 부례랑 맞아들이고 ,

거문고와 피리도 대궐 안으로 옮기게 했습니다

효소왕은 무게 50량으로 금과 은으로 만든 다섯 개의 그릇 벌과

마납가사(승복) 다섯 필과 , 대초(비단) 3 , 1 경을 절에 시주하여

대비의 은덕에 보답했습니다 

또한 국내에 크게 사면을 내리고 사람들에게는 관작 3급을 올려 주고 ,

백성들에게는 3년간의 조세를 면제해주었습니다 절의 주지를 봉성사에 옮겨 살게 했고

부례랑을 봉하여 대각간으로 삼고, 그의 아버지 대현 아찬을 태대각간(신라 최고벼슬)으로 삼았습니다

어머니 용보부인은 사량부 경정궁주로 삼고

안상법사를 대통으로 삼았으며 ,

창고 관리 다섯 명은 모두 석방하여 관작을 각기 5급씩 올려주었습니다

 

6 12일에 혜성이 동방에 나타나고 ,

17일에는 서방에 나타나므로 ,

일관(日官) 아뢰기를

 

<일관>거문고와 피리의 상서에 대하여 관작을 봉하지 않아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라고 했고 이에 신적(神笛 만파식적) 책호하여 만만파파식(萬萬波波息)이라고 하니

혜성이 이내 물러갔습니다 

 

즉 만파식적은 한 번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이후

이름을 업그레이드해서 만만파파식적으로 뭔가 이름이 더 쎄졌다 하고

통일신라를 지켜주는 국보이자 신의 피리로 여겨졌습니다

 

만파식적은 이후 효양의 가문이 대대로 보관하다 아들 김경신에 물려줬고

김경신이 원성왕으로 즉위했는데 이때 일본이 2차례 만파식적을 노려

원성왕이 창고 더 깊은 곳으로 만파식적을 숨겼고

 

신라 멸망후에도 살아남아

고려 광종이 경주객사에 동경관을 지으며 보관했고

1592년 임진왜란때 화재로 유실되어

광해군때 경주부윤이 신묘한 피리가 없어진게 안타깝다며

다시 옛 모습을 상고해 만들라했고 

 

광해군때 만든 노란피리

 

그러다 조선 숙종 1690년에

동경관에서 근무하던 향리 김승학이 폭우로 무너진 동경관의 담장을 보수하다

전란중에 누가 감춘것으로 보이는 옛 옥피리를 찾아냈고

그는 피리를 집으로 가져가 죽을때까지 보관했고

1707년 그가 죽자 관아에 그 사실이 알려져 진품 만파식적으로 추측하고

다시 압수해 경주 동경관에 보관했고

 

(위사진의 노란피리 위가 옥피리)

 

이 두 옥피리는 1909년 일제통감 소네 아라스케가

경주 동경관에서 서울 창경원 어원박물관에 옮기라했고

서울에 있다가 국립경주박물관이 세워지자 다시 경주로 옮겨 수장고에 보관했고

비공개로 하다 2011년 특별전시회에서 임시진열됬고

특별전 이후 다시 비공개 상태라 합니다

 

너무 소중한 유물이라 경주인 , 조선인들 할 것없이

오랫동안 만파식적이라 여기며 소중히 보관해온 피리고

신라 국보급 전설템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이어져오는게 참 다행스런 일입니다

 

막 통일신라를 시작한 신문왕대는 이렇게 전설이야기가 많은데

원래 예쁜 여자에겐 뒤에서 여러 오해와 소문이 많은 법이고

못생긴 여자에겐 뒤에서 아무런 말이 없듯이

 

'전설이 많다=나라가 현재 전성기를 지나고있다'

 

라고 생각해보시면 되고

이번엔 통일신라를 가장 대표하는 전설 김대성 전설 이야기입니다

 

[불국사를 지은 김대성]

모량리의 가난한 여자 경조에게 아이가 있었고

머리가 크고 정수리가 평평하여 성 (Castle) 같아서 ,

이로 인하여 이름을 대성(大城)이라 했습니다(큰 성 Big Castle) 

 

김대성

 

대성이네 집은 가난하여 대성을 키우는 것이 불가능하여 ,

이로 인하여 부자인 복안의 집에서 품팔이를 했습니다

집에서 묘를 나누어 주어 , 입고 먹는 비용으로 했습니다

 

고승 점개가 6륜회를 흥륜사에서 베풀려고 하여 ,

복안의 집에 와서 감화시키고자했습니다

복안이 50 필을 시주하니 ,

점개가 축원하여 말하길

 

<점개 스님>시주께서 보시를 좋아하니 ,

천신이 항상 보호하고 지킬 것이며 ,

하나를 보시하여 배를 얻을 것이고 ,

안락하며 수명이 장수할 것입니다

 

했습니다

대성이 그것을 듣고 뛰어 들어가 , 어머니에게 일러 말하길

 

<대성>제가 문에서 스님의 외우고 노래하는 것을 들으니 ,

하나를 보시하면 배를 얻는다 합니다

생각건대 저는 지난 세상에서 닦은 착한 행실이 없어

지금 이로 인하여 모자란 것인데 ,

지금 보시하지 않으면 내세에 어려움을 얻을 것입니다

품팔이 밭을 법회에 보시하여 ,

뒷날의 응보를 도모함이 어떻습니까 ?

 

했고 이에 대성의 어머니는 말하길

 

<대성맘>좋다

 

하여 ,

이에 밭을 점개 스님에게 보시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성이 죽임을 당하였는데

이날 재상 김문량의 집에 하늘에서의 소리침이 있어 이르길 ,

 

<하늘>모량리 대성(大城)이란 아이가 있어 지금 너의 집에 의탁한다 

 

했고 그 집의 사람들이 놀라서 사람을 시켜 모량리를 조사해보니 ,

대성이 과연 죽었는데 , 날이 소리친 것과 같은 때였습니다

김문량의 아내가 임신하여 아이가 태어났는데 ,

손을 쥐고 펴지 않았다가 7일째에 펼쳤는데 ,

금으로 만든 쪽지가 있어

 

'대성(大城)'

 

이라는 자가 새겨져 있어 ,

이것으로 이름하고 ,

어머니를 맞이하여 집에서 함께 봉양했습니다

 

이번엔 재상아들로 태어난 김대성은 그렇게 장성하여 사냥을 좋아했는데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서 , 마리를 잡고

밑의 길에서 잤습니다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하여 꾸짖으며 말하길

 

<곰 귀신>너는 어찌 나를 살해하였는가 ? 내가 도리어 너를 먹겠다

 

했고 대성은 두렵고 부끄러워 용서하기를 청했습니다

곰 귀신이 말하길

 

<곰 귀신>나를 위해 절을 창건할 있겠느냐 ?

 

하였고 대성이 맹세하여 말하길

 

<김대성>그렇게 하겠다

 

했고 이윽고 깨니 땀이 이불을 적셨습니다 

뒤로는 김대성은 들판을 나가는 것을 금하고 ,

곰을 위하여곰을 잡았던 땅에 장수사를 창건했습니다

 

이후부터 대성은 이로 인하여 감동된 바가 있어 ,

자비의 대원(悲願 중생구제의 소원) 두터워졌습니다

 

(대충 불심이 깊어졌단 소리)

 

이에 현생의 양친을 위해 불국사(佛國寺) 창건하고 ,

전세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 석굴암의 옛 이름) 창건하고 ,

신림(神琳 의상의 제자)·표훈(表訓 의상의 제자) 성스러운 스님을 청하여

각각 머물게 하고 ,

거대한 불상을 설치하고 ,

양육한 노고를 갚았으니 ,

몸으로 세상의 부모에게 효도한 것은

옛날에도 또한 듣기 드물었습니다

 

불국사

 

신라 유물 마스터피스 '석굴암'

 

착하게 베푼 효과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는데

김대성이 석불을 조각하려고 하나를 감실의 뚜껑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

돌이 갑자기 셋으로 깨졌고 대성은 분노하여 아무렇게나 잠들었습니다

그러자 밤 중에 천신이 내려와서 , 만들고는 돌아갔습니다

 

(톨스토이 '머슴 예밀리안과 빈 북'에서도 착하게 산 예밀리안을 위해

하나님이 하루만에 교회 만들어주는 이야기가 나옴ㅋㅋ)

 

대성은 잠자다가 일어나서 남쪽 고개로 쫓아가 ,

향나무를 불에 태워 천신에게 바쳤습니다 

이런 까닭에 땅의 이름을 향령이라 하였고

불국사의 사다리와 석탑은 돌과 나무에 새긴 업적이

경주의 여러 사찰 이보다 더한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김대성이 건설한 불국사와 석굴암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역사성이 짙고

가장 아름다운 사찰로 유명하고

대한민국 화폐인 10원 동전의 불국사 다보탑 역시 불국사에 있습니다

 

다보탑

 

개인적으로 예전부터 일본 호류사나 동대사 같은 고대 삼국시대양식 백제식 건축물이

그대로 보존되있는게 부럽다고 생각했고

우리나라 황룡사나 황룡사 구층목탑이 소실된걸 안타깝다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불국사와 석굴암은 불행중 다행으로 오늘날에게도 우리에게 그대로 보존되있고

생각보다 그나마 신라가 수도가 경주라는 한반도 끝자락에 위치해 있어서

외적(북방민족) 침입이 덜해서 그나마 유산이 많이 남아있고

생각해보니 고대문화유산이 대부분 파괴된 한국이면서도

불국사와 석굴암 하나라도 건져서 그나마 불행중 다행인거 같습니다

 

또한 원래는 불국사는 법흥왕때부터 지었다는 말도 있어

김대성이 기존 절을 증축 보수한 중건자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불국사는 경덕왕대에 김대성이 짓기 시작해 혜공왕대를 지나

774년 12월 2일 김대성이 죽자 나라에서 이를 완성해 끝마쳤다 할 정도로

대공사였고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은 본캐가 스님이라

김대성을 찬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일연스님>

찬하여 말한다.

모량의 봄이 지나 세 묘를 보시하니,

향령에 가을이 들자 만금을 얻었네.

어머니는 오랜 세월 가난과 부귀를 누렸으니,

괴정(槐庭 조정) 꿈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일세.

 

[한국위인+원효대사의 아들+이두와 화왕계 설총]

통일신라는 평화기를 맞이했고

신라백성들은 난세던 평화기던 국교였던 불교에 의지하며

부처님에게 공덕을 빌며 평화를 기원했습니다

이로인해 통일신라때 불교문화 역시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는데

또한 신라는 유학도 받아들이며 유교문화도 점차 꽃피워나고 있었는데

이전부터 강수 같은 유학자가 있었다면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유학자 '설총' 또한 등장하는데

설총은 유교가 국교였던 조선시대에까지 한국 유학자의 시초이자

유교성인급 인물로 여겨졌고

한자로 한국어를 표기하는 체계인 '이두' 를 발명해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전까지 두고두고 써서 순우리말 보존에도 기여한 인물입니다

 

불교와도 연관깊은 특이한 인물인게 한국위인이자

한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명망높은 스님인 '원효대사' 의 친아들이었고

일단 스님이 자식을 낳은 케이스도 흔치 않은데

 

(재밌는건 부처님 싯다르타도 출가전 아들이 있었음ㅋㅋ)

 

스님의 아들인데 위인이 된 케이스도 흔치 않은격이고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불교와 유교를 접수해버린

한국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란게 참 특이합니다

 

설총은 자가 총지이고, 조부는 담날 나마이며 부친은 원효입니다 

원효는 처음에 중이 되어 불서에 통달하였으나 

얼마 후에 속인으로 되돌아와 스스로 소성 거사(마음 작은 사람 , 별볼일 없는 사람)라고 불렀습니다 

 

원효대사 , 한국위인

 

원효대사는 본래 이름이 '설사' 였고 똥의 설사가 아니고 설씨 성에 이름이 사였고 ㅎㅎ;; 

원효의 아들 총은 성질이 총명하고 예리하며 , 나면서부터 도술을 알았습니다

 

설총은 총명하여 우리말로 9경을 해독하여 후생을 훈도하였으므로 

후대까지 학자들이 그를 종주로 삼게 됩니다 

 

신문왕이 중하월에 높고 밝은 방에 거처하면서 총을 돌아 보면서 말하기를 

 

<신문왕>오늘은 오래 내리던 비가 처음으로 개고 , 

훈풍이 시원하니 비록 맛있는 음식과 애절한 음악이 있다할지라도 , 

그것은 고상한 담론과 재미있는 이야기로 울적한 마음을 푸는 것만 못하구나. 

 

(똑똑한) 그대는 필시 색다른 이야기도 알고 있을 터인데 

어찌 나를 위하여 이야기해 주지 않는가 ?

 

라고 했고

총이 말했습니다

 

<설총>그렇습니다.

신이 들으니 예전에 화왕이 처음 들어 왔을 때, 

향기로운 꽃동산에 심고 푸른 장막으로 보호하였는데, 

봄이 되어 곱게 피어나 온갖 꽃들을 능가하여 홀로 뛰어났습니다. 

이에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에 이르기까지 곱고 어여쁜 꽃들이 빠짐없이 달려와서 

혹시 시간이 늦지나 않을까 그것만 걱정하며 배알하려고 하였습니다. 

홀연히 한 가인(미녀)이 붉은 얼굴 , 옥 같은 이에 곱게 화장하고 , 멋진 옷을 차려 입고 

간들간들 걸어 와서 얌전하게 앞으로 나와서 말했습니다. 

 

<장미>첩은 눈 같이 흰 모래밭을 밟고, 거울 같이 맑은 바다를 마주 보며, 

봄비로 목욕하여 때를 씻고, 맑은 바람을 상쾌하게 쐬면서 유유자적하는데, 

이름은 장미라고 합니다. 

왕의 훌륭하신 덕망을 듣고 향기로운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시고자 하는데 

왕께서는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 

 

또한 한 장부가 베옷에 가죽 띠를 매고 허연 머리에 지팡이를 짚고, 

힘없는 걸음으로 구부정하게 걸어와서 말했습니다. 

 

<할미꽃>저는 경성 밖의 한길 가에 살고 있습니다. 

아래로는 푸르고 넓은 들판의 경치를 내려다 보고, 

위로는 우뚝 솟은 산색에 의지하고 있는데, 

이름은 할미꽃이라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컨대 , 비록 좌우의 공급이 풍족하여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할지라도, 

상자 속의 준비물에는 반드시 양약이 있어서 기운을 돋우고, 

극약이 있어서 병독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옛 말에 생사와 삼베 같은 좋은 물건이 있다해도, 

왕골과 띠풀 같은 천한 물건을 버리지 않아서, 

모든 군자들은 결핍에 대비하지 않는 일이 없다 하오니, 

왕께서도 혹시 이런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어떤 이가 말했습니다.

 

<어떤 이>두 명이 왔는데 어느 쪽을 취하고 어느 쪽을 버리시겠습니까 ?

 

화왕이 

 

<화왕>장부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어여쁜 여자는 얻기가 어려운 것이니 

이 일을 어떻게 할까 ?

 

라고 말했습니다. 

장부가 다가서서 말하기를 

 

<할미꽃>저는 대왕이 총명하여 사리를 잘 알 줄 알고 왔더니 ,

지금 보니 그렇지 않군요. 

무릇 임금된 사람치고 간사한 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정직한 자를 멀리하지 않는 이가 적습니다. 

 

이 때문에 맹가는 불우하게 일생을 마쳤으며, 

풍당은 낭서에 잠기어 흰 머리가 되었습니다. 

 

옛날부터 도리가 이러하였거늘 저인들 어찌 하겠습니까 ?

 

라고 말하니 , 

화왕이

 

<화왕>내가 잘못했노라 , 내가 잘못했노라

 

라고 대답했습니다

 

설총의 화왕계

 

이에 신문왕이 안색을 바로 하며 말하기를 

 

<신문왕>그대의 우화는 진실로 깊은 뜻이 담겨 있도다. 

기록해두어 왕자의 경계로 삼게하기 바란다

 

하고 마침내 총을 높은 관직에 발탁했습니다

 

한국 위인 설총

 

<김부식>우리(고려) 현종이 왕위에 있은 지 13년(1021년)인 건흥 원년 임술에 

설총에게 홍유후를 추증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설총이 일찌기 당에 들어가서 유학하였다고 하나 

사실 여부는 없다.

 

[반굴의 아들 김영윤]

신문왕은 아버지가 문무왕 , 할아버지가 무열왕이었기에

3대에 이러 절대왕권을 누리고 있었는데

막 통일신라가 개막하고 삼국통일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된시기라

관료층 , 장군들이 아직 썩지 않은 상황이었고

화랑의 세속오계 계율도 잘 지켜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다음은 황산벌로 유명한 '김반굴' 의 아들 '김영윤' 의 이야기입니다

 

김영윤은 사량 사람으로서 급찬 반굴의 아들입니다

조부는 김흠춘(김흠순)각간이니 진평왕 때 화랑이 되었던 인물이자 김유신 동생이고

그 때 , 김흠순은 인덕이 많고 신의가 두터워 인심을 크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김흠순이 장성하자 문무대왕이 재상으로 올려주었는데 , 

임금을 충심으로 섬기고 , 인자한 자세로 백성을 대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어진 재상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일본 덴지 덴노>전해지는 말에

대당에는 위징이 있고 ,

고려에는 개금(蓋金 연개소문) ,

백제에는 선중(善仲 성충),  

신라에는 짐순(鴆淳 김유신 혹은 김흠순) 있다.

이들은 각자 일방을 맡아 이름을 10,000리에 떨쳤으니

이들은 모두 당세의 준걸로 지략이 사람들을 뛰어넘었다.

 

660년 태종대왕 7년 경신

당 고종이 대장군 소정방에게 명하여 백제를 공격하게 했을 때 ,  

김흠순은 왕명을 받들어 장군 유신 등과 함께 정예병 5만을 거느리고 이에 호응했습니다

가을 7월

황산벌에 이르러 백제 장군 계백과 마주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김흠순은 아들 김반굴을 불러 말했습니다

 

<김흠순>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이 으뜸이요 , 아들이 되어서는 효성이 으뜸이니 ,

위급함을 보면 목숨을 바쳐야만 충성과 효성이 모두 온전해진다

 반굴은

 

<반굴>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적진으로 돌입하여 힘껏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이후 반굴에 뒤를 이어 관창 역시 자살돌격함으로서 신라군의 비분강개함이 증폭되어

김유신의 신라 5만군은 국가의 마지막 존망을 걸고 맹렬히 저항하던

계백장군의 5천 백제 결사대를 황산벌에서 무너뜨리고

백제를 멸망시키게 되었고

반굴은 관창보다 먼저 죽었음에도 약간 관창보다 이미지가 밀리는

안습한 감이있는데 두 인물다 똑같이 용감히 싸우다 죽은 신라 최상위층 자제들이었고

 

반굴은 대신 아들 김영윤과 같이 삼국사기 열전에 이름이 오르게 됩니다

반굴이 황산벌에서 죽기 전 낳은 아들 김영윤은

명문세가 출신(김유신 집안) 답게 명예와 절개를 지켰습니다

 

신문왕 때, 고구려의 잔적(남은 적) 실복이 보덕성에서 모반하자 

신문왕이 그의 토벌을 명령하고 ,

김영윤을 황금서당(고구려인으로 구성된 신라중앙 9서당 중 한 군단) 보기감으로 삼았습니다 

김영윤은 떠날 때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김영윤>내가 이번에 가면

가족이나 친구들로 하여금 악명을 듣지 않도록 하겠다.

 

그가 출정하여 실복을 보니 ,

그는 가잠성 남쪽 7리 지점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어떤 사람>

이제 이 흉악한 무리들은 제비가 장막 위에 집을 짓고,  

물고기가 솥 안에서 노는 것 같은 형세로서,  

만 번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워야 하루 사는 목숨 밖에 안됩니다

 

옛 말에 이르기를 '궁지에 몰린 도둑은 쫓지 말라' 고 하였으니 ,

후퇴하여 적이 극도로 피로해진 틈을 타서  

공격하면 칼날에 피도 묻히지 않고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모든 장수들이 그 말을 옳게 여겨 잠시 후퇴하려고 했는데

유독 김영윤만은 이를 수긍하지 않고 싸우려 했습니다

그의 종자가 말했습니다

 

<김영윤의 종자>지금 모든 장수들이 구차하게 살 길을 찾는 것이 아니며 ,

죽기를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전의 의견이 옳다고 여긴 것은 ,

기회를 보아 이익을 얻고자 함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만이 혼자 앞으로 나가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자 김영윤이 말했습니다

 

<김영윤>적진에 임하여 용기가 없는 것은 예경에서 경계한 것이니, 

 전진이 있을 뿐 후퇴가 없는 것이 사졸로서 지켜야 할 당당한 본분이다. 

대장부가 일을 당하면 스스로 결정할 것이지, 어찌 꼭 여러 사람의 의견만을 따르겠는가 ?

 

그는 말을 마치고 드디어 적진으로 달려가서 싸우다가 죽었고

 

 

신문왕이 이 소식을 듣고 몹시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습니다

 

<신문왕>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로다.

그의 의롭고 장렬함은 가상히 여길 만하다.

 

신문왕은 후하게 상을 주고 , 작위를 추증했습니다

 

<라봉봉>이제부터 신라 후반전(통일신라)이니 벌써 신라이야기가 절반 왔군요

이전 삼국 신라시대와 다르게

통일신라는 백제+고구려+신라인들의 나라였기에

통일 이후부터는 국력 , 문화력 등이 급성장한 신라의 상황이었고

당장은 막 전쟁이 끝나고 전성기 , 평화기를 누리기 바빴던 신라인이었고

문무왕이 명군으로서 통일신라 첫 스타트를 잘 끊어주었기에

골품제니 조세의 문란이니 하는 것은 아직 폐해가 드러나지 않고 건전한 기풍이 흐르던 시기였고

신문왕 이후에도 동아시아와 통일신라는 오랜기간 긴 전성기 , 평화기를 유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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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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