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위기간 8년 924~927년
경애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의 이름은 위응이며
경명왕의 동복(같은 어머니) 아우입다
경애왕 원년(1년)
9월
태조(고려 태조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 예방했습니다
10월 겨울
경애왕이 직접 신궁 神宮 (시조를 제사하던 성소) 에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했습니다
경애왕 2년
10월 겨울
고울부 高鬱府 (오늘날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장군
능문이 태조(왕건) 에게 투항(항복) 했습니다
태조(왕건)가 그를 위로하고 타일러서 돌려 보냈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이 신라의 서울(=수도 , 서라벌) 과 가까웠기 때문이었습니다
( '적당히 먹기' 의 중요성을 아는 매너남 태조왕건이었습니다,,
괜히 동양에서 왕들이 즉위할때 짐짓 안하겠다는 시늉[연기] 를
했듯이 아무리 신라가 약했어도 오랜 전통의
발해를 제외하면 삼국을 통일한 정통성있는 한국 왕조였고
아무리 신라보다 힘이 강했어도
견훤같이 대놓고 오랜 역사의 신라를 위협하면
왕건 스스로에게도 독이 됬다 할 수 있습니다)
11월
후백제 군주 견훤이 그의 조카 진호를
고려에 인질로 보냈습니다
경애왕이 이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태조(왕건) 에게
<경애왕>견훤은 변덕스럽고 거짓말을 많이 하므로
그와 화친해서는 안된다
고 말했습니다
태조(왕건) 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상당한 정치감각이 있었던 태조왕건 입니다)
경애왕 3년
4월 여름
(고려에 인질로 갔던 후백제 견훤의 조카) 진호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견훤은 고려 사람들이 고의로 죽였다고 생각하고
분개(몹시 분하게 여김) 하여
군사를 동원해서
웅진 熊津 (오늘날 충청남도 공주시) 까지 진군했습니다
태조(왕건)가 모든 성에 명령해서 방비를 굳게 하고
나가지 않도록 했습니다
경애왕은 사신을 보내서
<경애왕>견훤은 약속을 위반하고 군사를 일으켰으므로
하늘이 반드시 돕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대왕이 진격하여 위풍을 보인다면
견훤은 반드시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점점 후백제를 멀리하고 고려와 가까히 하려는
경애왕이고 이는 강자에게 붙고 힘을키우는 신라의
기본적 외교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로인해 견훤도 신라에 화가 나게 된거 같습니다,,)
태조는 (신라)사신에게
<태조 왕건>내가 견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죄악이 넘쳐서 자멸하기를 기다릴 뿐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왕건의 견훤에 대한 자신감이 있는 발언으로
이미 고려 태조 왕건이 짜놓은 판으로
당대 후삼국의 질서가 형성되고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분열된 시기의 난세의 영웅으로서는
삼국지의 중국 제갈량이 유명하지만
그는 삼국통일에는 실패한 인물이었고
그렇다고 삼국지 시기 당시
삼국통일을 주도했던 위,진나라의 조조나 사마의는 힘만 강했을 뿐
정당성이나 매력은 없는 나라였다 생각되고
하여튼 제갈량은 정당성은 있지만 삼국통일에 실패한 인물이라면
한나라 건국자 유방이나 고려 태조 왕건같은 경우는
매력, 정당성 뿐만 아닌 분열된 나라를 하나로 만든 인물이라는 점에서
큰 매력으로 다가오는 인물입니다)
경애왕 4년
정월(1월) 봄
태조가 직접 백제를 공격하자
경애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그를 도왔습니다
<후백제군>분하당께,,
아따 왕건이도 왕건이지만
항상 강자에게 붙어먹었던 신라놈들은 더 비겁하당게 !!
2월
병부(오늘날 국방부) 시랑(차관급 벼슬) 장분 등을
후당(중국 왕조) 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후당에서는 장분을 검교공부상서로 임명하고
부사 副使 (부 , 보좌 사신)인 병부 낭중 郞中 박술홍을
겸어사중승으로 ,
판관 判官 (절, 사찰 담당 벼슬 혹은 도움 관리) 인
창부 倉部 (오늘날 기획재정부 [재정경제부]) 원외랑 이충식을
겸시어사로 임명했습니다
3월
황룡사 탑이 흔들리다가 북쪽으로 기울었습니다
태조(왕건)가 직접 가서 근암성 近巖城 (오늘날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 지역) 을 격파했습니다
후당 명종이 권지강주사 權知康州事
왕봉규(후삼국시대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했던 지역 호족) 를 회화 대장군으로 삼았습니다
4월 여름
지강주사 知康州事 왕봉규가 사자 임언을 후당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후당 명종이 중흥전에서 그를 접견하고 선물을 주었습니다
강주 康州 (오늘날 경상남도 진주시) 관하의
돌산 突山 등 네 고을이 태조에게 귀순(적이었던 사람이
반항심을 버리고 스스로 돌아서서 복종하거나 순종함) 했습니다
9월 가을
견훤이 고울부 高鬱府 (오늘날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에서 우리 군사를 공격하므로
경애왕이 태조(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태조가 장수에게 명령해서
정병(강한 군사) 1만 명을 출동시켜서 구원하게 했습니다
견훤은 이 구원병이 도착하지 않은 틈을 이용해서
11월 겨울에 서울(=수도, 서라벌) 을 습격했습니다
이 때 경애왕은 왕비 및 후궁과 친척들을 데리고
포석정 鮑石亭 에서 연회를 베풀며 놀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적병(후백제군) 이 오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갑자기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후백제의 신라 수도 서라벌로 가는 관문인
대야성 함락 이후부터
이미 구멍이 뚫린 서라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애왕은 왕비와 함게 후궁 後宮 (별채) 으로 뛰어 들어가고
친척과 공경대부 및 사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고 숨었습니다
적에게 붙잡힌 자들은 귀한 자 천한 자 할 것 없이 놀라고
진땀을 흘리며 엎드려 노복 奴僕 (사내종, 노비)이 되겠다고 빌었으나
화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후백제왕 견훤의 의도는 백제 마지막왕 의자왕의 원한을 갚겠다는
신라에 대한 보복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잔학했던 후백제군을 보여주는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견훤은 또한 군사들을 풀어서
공공의 재물이나 사사로운 재물을 거의 모두 약탈하고
대궐에 들어 앉아 측근들로 하여금 경애왕을 찾게 했습니다
<견훤>하하하하하
신라의 왕궁도 별게 아니구나 !
수많은 백제왕들도 , 성왕도 , 의자왕도 못해냈던 일을
짐은 해냈도다 하하하하하
경애왕은 왕비와 첩 몇 사람을 데리고
후궁(별채) 에 있다가 군영으로 잡혀 갔습니다
견훤은 경애왕을 협박해서 자살하게 하고
왕비를 강간하고
그의 부하들로 하여금 비첩 妃妾 (첩)들을 강간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경애왕의 아우뻘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임시로 국사를 맡게 했습니다
이 사람이 (신라 마지막왕이자 신라 56대왕) 경순왕입니다
<라봉봉>워낙 혼란스럽게 사망한 인물이라
시호를 '경애라고 하였다' 이런 기록도 없고
후대 경순왕에 의해 별, 햇빛 경 景 자에 슬플 애 哀 자가 붙어
경애왕 景哀王 으로 불리게 된 거 같습니다
그렇게 신라 말기에는
외국 군대에 의해 서라벌 왕궁이 점령되
왕이 피살당하고 왕비가 강간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고
이로인해 온 신라 백성들이 견훤을 두려워 하고
왕건에 더욱 깊게 의지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포석정은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연회장소로
물길이 있어 그곳에 술을 흐르게 하고
흐르는 술위에 잔을 동동 띄어 연회를 했던
신라 사치와 향락의 결정체이자
경애왕이 피살당한 비극의 장소로 유명합니다
그렇게 마지막 박씨왕 신라 55대왕 경애왕 박위응으로
신라 박씨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고
이제 천년사직 신라 마지막 왕 신라 56대왕 경순왕 김부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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