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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러더퍼드>

[뉴질랜드의 노력파]

[러더퍼드와 감자]

[케임브리지 대학 캐번디시 연구소]

[톰슨의 수제자]

[캐나다 맥길대학 물리학 교수]

[반감기]

[맨체스터 대학]

[노벨 물리학상이 아닌 노벨 화학상 수상]

[알파입자 산란실험]

[캐번디시 연구소 소장]

[캐번디시 정신]

[위대한 교육자 러더퍼드]

[전문연구요원 제도]

[소련과의 교류]

[악어]

[핵물리학의 아버지]

<라봉봉>

 

어니스트 러더퍼드

 

[뉴질랜드의 노력파]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1871년 8월 30일 뉴질랜드의 넬슨에서

12남매(7아들 + 5딸) 가정에서 넷째 자녀이자 둘째 아들로 태어납니다

 

러더퍼드의 생가

 

뉴질랜드의 100달러 러더퍼드 지폐(최고액권임 ;;) , 쌍문동의 자랑이아니라 ㄹㅇ 뉴질랜드의 자랑 케임브리지대 천재임

 

러더퍼드의 아버지 제임스 러더퍼드는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의 수레바퀴 수리공이었고

1842년 어니스트의 아버지는 어니스트의 할아버지와 함께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습니다

 

러더퍼드의 아버지 제임스는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해서

제분업자로 일하며 대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어니스트 러더퍼드도 아빠닮아서 과학자수입으로 가족 부양하려 전세계를 떠돎..)

 

러더퍼드의 어머니 마르타는 학교 교사였는데

어머니는 '아는 것이 힘' 이라고 믿고

자녀 교육에 힘썼습니다

 

러더퍼드의 가족들은 어릴때부터

방과후에 대부분 시간을 소젖을 짜거나 가족들 농장에서 허드렛일을 도우며 보냈는데

주말에는 형제들과 함께 개울에서 수영을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돈이 부족했던 러더퍼드는 가족의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연날리기 기구를 살 돈을 벌기 위해 새 둥지 집을 짓는 일도 했고

특유의 러더퍼드의 좌우명은 이때 생겨납니다

 

<러더퍼드의 좌우명>우리에게는 돈이 없으니 생각해야 한다

 

러더퍼드는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지만 어린시절부터 무척 열심히 노력해서

장학금을 받아 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게 뛰어난거라고 !!)

 

10세때 러더퍼드는

폭스힐 학교에서 첫번째 과학서적을 받았는데

이 책은 러더퍼드의 삶을 바꾼 계기였고

 

1887년 러더퍼드는 사립 중등학교 넬슨 대학에 다닐 수 있는 장학금을 받았고

1890년 러더퍼드는 또 다른 대학 장학금을 받아서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 있는

뉴질랜드 대학의 캔터베리 칼리지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합니다

 

캔터베리 칼리지 교수들은 과학적 실험으로 구체적 증거를 찾고자하는

러더퍼드의 열정에 불을 지폈고

뉴질랜드 각지에서 상경한 우수한 인재가 모이는 이 칼리지에서

러더퍼드는 그리 특출난 편은 아니었고

성적은 좋은 편이었지만 특별한 천재라는 인상은 없었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한 가지 목표를 정하면 절대 양보하지 않는 고집이 센 아이'

 

라는 평을 받았고

이런 고집때문에 그는 훗날 악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됩니다(뒤에서 이어 씀)

 

악어고집이었던 러더퍼드

 

러더퍼드는 그곳에서 문학사 학위와 석사 학위를 모두 취득하고

1893년 러더퍼드는 수학과 물리에서 이중 수석(전교 1등) 을 합니다

 

러더퍼드는 이곳에서

'굴 (The den , 왕인박사 책굴 비슷한 느낌인듯)' 이라 애정담아 부르는

차가운 지하 저장실에서 초기 연구를 시행했는데

이때 가장 뜨거운 주제인 전자기파를 연구하는데

굴 , 헛간 이라 부르는 연구실 등에서 러더퍼드는 자성이 띤 철선코일을 사용해서

전자기파를 전송하고 감지했고

나중에 이 실험을 발전시켜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 대학 첨탑 사이에서 신호를 전송하게 됩니다

 

암울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러더퍼드는 점차 예리한 연구자로 나아가고 있었고

1893년 말 첫번째 연구 논문을 발표합니다

러더퍼드는 1893년 석사학위를 받는데

그는 그해 뉴질랜드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14명중에 하나 였습니다

 

1894년 러더퍼드는 여전히 캔더베리에 있으면서

고주파 정기방전이 철을 자화시키는 능력에 대해 독립적인 연구를 했습니다

 

같은 해 러더퍼드는 집주인의 딸 메리 뉴턴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이후 러더퍼드는 뉴질랜드에 메리를 두고 유학을 가는데

우여곡절끝에 둘은 1900년 결혼해서 외동딸을 한 명 낳았고 이름을 아일린이라 짓게 됩니다

아일린은 물리학자 R.H 파울러와 결혼합니다

 

당시 뉴질랜드의 촉망받는 인재였던 러더퍼드는 제일 선호하는 직업인 '교사' 를 하려 했는데

교사자리를 구할 수 없어서 결국 장학금을 받아 유럽에서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러더퍼드와 감자]

여튼 당시 본토이자 초강대국이었던 영국에서도

영국 본토에선 한창 인류의 과학정신이 집대성되는 굉장히 중요한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었기에

새로운 젊고 싱싱하고 새끈한 뉴비 과학자 없나 고민이 많았는데

뉴질랜드 대학을 최고성적으로 졸업한

총명한 러더퍼드의 야한 냄새가 영국 본토에까지 퍼지기 시작했고

 

야 어니스트야 오늘 연구실 왜 안왔어...?

 

러더퍼드는 뉴질랜드에서 인상적인 젊은 실험가임을 증명했고

수천 마일 떨어진 영국에선 인상적인 젊은 연구자가 필요했는데

형식화된 교수법과 시험 , 이론 위주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는

실용적인 연구기술이 부족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런던의 왕립학회는 1891년 런던 대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장학금으로

전세계의 연구자를 모집할 수 있는 장학금을 만들었고

영국 , 아일랜드 , 캐나다 , 호주 , 뉴질랜드 학생들에게 세계 어느곳에서 공부하던지

2년간 1년에 150불씩 주는 프로그램을 열었고

여기서 '국제과학' 이 시작됩니다

 

(좋던 싫던 영국이 현대 문명의 아버지답게

오늘날 미쿡의 하바드 , MIT , 스탠퍼드가 전세계 다인종 인재들 흡수하는게

여기서 나옴ㅋㅋ)

 

뉴비들 계속 뽑아야 게임이 돌아가지 크하하하 , 뉴들박 만화

 

가난한 러더퍼드 역시 영국본토에서 야한냄새를 풍겨오자

고등학교때부터 꿈이었던 물리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러더퍼드는

냄새를 맡고 곧바로 장학금을 신청했는데 (걸려들었쓰)

 

지역별 할당제가 있었고

뉴질랜드엔 단 1명만이 배정됬는데

오클랜드 대학의 다른 후보자가 1등으로 후보에 올랐는데

그는 매력적인 일자리 제안을 받고 포기했고

2등이었던 러더퍼드는 결국 대기순번으로 추가합격을 해부렸고

 

이때 러더퍼드는 집에서 어머니를 위해 감자를 캐고 있었는데 (이게 바로 전설의 러더퍼드 감자 사건임 ㅋㅋ)

어머니는 러더퍼드에게 달려가서

 

'울아들 ~ 니가 영국 케임부리진지 뭔지에 장학금에 합격했어부러 ~'

 

를 외쳤고

러더퍼드는 그렇게 케임브리지 대학에 합격해부렸고

 

허언증 짤인데 러더퍼드는 찐임ㅋㅋ;;

 

러더퍼드는 마음속으로 '씨팔세팔좆까뉴질랜드촌놈씨팔련들아~!!!~!~!~!섹섹스스'

를 외치며

 

<러더퍼드>이게 내가 캐는 마지막 감자이다

 

라고 외치며 마지막 감자를 캐고 영국갈 짐을 싸게 됩니다

 

좀 병맛인데 실화임

 

결국 러더퍼드는

1895년 가을 뉴질랜드 전국1등 자격으로

세계 최고의 대학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공부하려 영국으로 떠납니다

 

이전에 쓴 패러데이 이야기에서

패러데이가 험프리 데이비의 과학강연티켓을 받고 운명을 바뀌었다거나

어린이 소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찰리의 골든티켓 이런게 진짜 실화라거나 현실 기반에서 나온거라

순박하고 부지런한 연구자였던 러더퍼드 역시 그런 인생에서 골든티켓을 받은 셈이었고

 

라봉봉의 '특수역사기술' 을 발휘해 좀 딴길로 빠져보자면

제가 카라의 한승연 누님을 덕질하다가 가슴아픈 카라의 예능출연들을 많이 봤는데

이 누님들 관상이 좀 일진상이긴 한데 그거랑 별개로

참 무서울 정도로 열심히 살았구나 싶고

사실 카라면 전국민이 다 알고 한번쯤 다 전국민 엉덩이 흔들게 했던

1군 아이돌이고 한국에서도 1위 싹쓰리하고

일본에서 대성공하고 무난히 강남에 건물올리는 행복테크 탔지만

카라 예능이 WWE 라기보다는 UFC 하는것마냥 좀 과격한게 많던데

시발 걸그룹 몽키런 사건이 계속 생각나서 

 

'뜨지 못한 걸그룹의 설움 전설의 걸그룹 몽키런 사건'

 

이라는 짤을 봤는데

다들 성공한 사람들 , 연예인들 화려하고 응딩이 잠깐 흔들거나 CF 딸깍하고 몇억씩 들어오고

강남 건물에서 수천만원 월세받고 존경받고 막 그런거를 생각하는데

그 밑바닥은 시발 심연으로 가득하고

근데 또 이 심연이라는게 다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공감이 되는 그런게 있고

 

근데 여튼 러더퍼드 감자이야기 볼때마다

저도 참 너무 공감가는게 많은게

저도 주식 없었으면 지금 그냥 노가다하는 중산층이거나

별로 아무것도 아닌 가난한 청년이었을텐데

 

러더퍼드 형님도 그시절에 뉴질랜드에서 감자캐다가

골든티켓을 받은 셈이고

사실 서울대 교수들이나 군 장성들도

노력도 했지만 운좋게 사회에서 교수나 지휘관 자리하나받고 꺼드럭 거리는 것이지

 

이마에 추노 낙인처럼 교수 , 장군 이렇게 문신을 새기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 강의실이나 병영에서는 산도 옮길 수 있는 존귀한 존재이지만

일반인들이 길거리에서 보기엔 그냥 평범한 아저씨에 불과한 셈이고

이 사람들도 교수에 안뽑히거나 장군진급심사에서 뽑히지 않았더라면

그냥 시발 러더퍼드처럼 감자캐러 갈 아저씨들이고

승우 돼지불백드립이 농담이지만 농담이 아닌게

 

제가 보영이 누님 덕질할때도 그렇고

승연이 누님 덕질할때도 보면 연예인들 CF 딸깍 하고 몇억씩 벌고

광대딴따라들 강남에 건물올리는게 불공평하다느니

일본처럼 연예인들 수익 공무원화시켜야한다 어쩌구 하는

ㅈㄴ 발광하는 판녀 , 갤러들 ㅈㄴ많은데

그건 전국민이 다 아는 그런 정도의 연예인 극소수의 이야기고

 

제가 노가다하면서 B급 연예인 , 연예인 매니저 , 유흥업소 건달(?)

이런쪽 형님들과도 많이 일해봤는데

이 바닥이 여기도 ㅈㄴ 심연이 오지고

진입장벽이 높지 않은만큼 레드오션이라

지금도 단역 전전하면서 쿠팡 , 배달하는 남녀연예인들 ㅈㄴ많고

몇 년동안 지하 연습실에서 썩었는데 데뷔도 못하고 정산도 못받는 그런 연예 지망생들도 ㅈㄴ많고

눈물의 몽키런이나 패왕별희에서 장국영이 어릴때 경극단에서 채찍으로 ㅈㄴ 쳐맞으면서

다리찢고 울면서 연습하거나 그런게 있고 

제가 살아가면서 느낀게 전국민이 아는 연예인들은 굳이 연예인질 안하더라도

다른거 해도 이정도는 벌 정도로 노력을 한 사람이란 생각이고

 

사실 저도 28살에 영어공부전까진 주식의 주자도 몰랐는데

그냥 일하고 열심히 저축하고 연장사고 공부하고 쓸거쓰고 그러고 있었고

제가 살아오면서 흔들어 재끼는 일(딴따라)들이나 연애에 대한 자신감은 거의 종범이었는데

이상하게 돈에대한 자신감은 어릴때부터 흘러넘쳤던거 같고

이미 이전부터 사업을 해도 몇 억은 벌지 않을까 이런 생각은 많았습니다..

 

여튼 주식도 제가 돈벌면서 느낀게

제가 먹고 빠지는동안

누구는 잃고 상심해서 가족들과 함께 일가족 자살하거나

월가나 여의도 빌딩에서 투신자살하거나 그런 사람들도 있다는 점이고

그래서 제가 주식하고 나서부터는 사회적 책임감같은게 생겼고

저에게 이게 하나님의 축복이라면

역사를 통해 사회에 위로가 되고 건강하고 이로운 글을 써야한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고

 

여튼 이런 기회나 황금티켓 , 유리구두는 모두의 인생에 언제 어느순간 올 줄 모르는 것이고

근데 그걸 잡으려면 미리 준비를 하고 노력을 해놔야된다는 생각입니다

 

(진짜 역사인물들도 중요한 사건에서 결정이 안됬으면 큰일났지만 결정이 됬으니 역사에 남는듯..)

 

러더퍼드도 이미 영국본토에서 장학금 준다할때 이미 뉴질랜드 공부 1짱 먹을 수준으로

과학공부 , 실험을 심각하게 하던 상황이었기에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카라의 한승연이 누님도 이미 유딩때부터 연기를 해서 6~70 작품에 단역 , 엑스트라로 출연해

연예짬밥을 먹던 고인 상황이었고

카라 데뷔전엔 틈틈히 공부도 열심히 해놔서 뇌섹 , 지성돌 이미지도 구축해놔서

데뷔이후 선진국이자 잘난체 심하고 까다로운 일본시장을 점핑스텝으로 뚫을 수 있었고

 

저도 진짜 철봉갯수 늘리듯이 매일 무식하게 책을 몇 권씩 몇 천 권 읽어대면서 무지성 독서를 많이 해놔서

부족한게 많지만 대충 어느정도 지식과 지혜를 갖추고 미국몽 버핏 할아버지 응딩이 졸졸 따라다니며

꿀받아먹는 형편인 셈이고..

 

여튼 다 노력해놔야 나중에 기회가 와도 기회인걸 인지할 수 있고

확실히 고정시킬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케임브리지 대학 캐번디시 연구소]

여튼 1895년 케임브리지에 도착한 러더퍼드는 그렇게

케임브리지 대학 장학생이 되버부렸고 (니가하면 허언 , 내가하면 역사)

케임브리지 대학의 첫번째 국제 대학원생이었는데

 

러더퍼드는 고된 농사생활에서 벗어났지만 그가 걱정하는 것이 있었는데

뉴질랜드에서 자유분방하게 연구했던 러더퍼드에게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들은 왠지 '꼰(Old school)' 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고 (러더퍼드는 화석이라 했음)

 

러더퍼드는 계속해서

 

'아 케임브리지 교수들 꼰이면 어떡하지 시발'

 

이러고 있었는데

마치 그 걱정을 확신으로 바꿔주는 것 마냥

당시 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 소장 J J 톰슨 (이전에 어린이 개인이야기에 쓴 물리학자) 은

러더퍼드가 도착하자마자 그를 골프경기에 초대했고 (꼰대냄새 진동ㅋㅋ)

 

조지프 존 톰슨 , 캐번디시 연구소 소장 , 전자발견 1906년 노벨물리학상

 

러더퍼드는 이후 J J 톰슨의 수제자가 되긴 하지만

이때부터 러더퍼드는 자신이 화석화된 교수 , 꼰대교수가 되는 것만은 피하려 노력했고

또한 최초로 국제과학무대에 뛰어든 러더퍼드는

뉴질랜드 출신이라 순혈 케임브리지 인사가 아니었는데

러더퍼드는 케임브리지 학위가 없는 최초의 연구원으로 연구소의 '외계인' 이었고

세계과학의 중심지였던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만난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환영해 주지는 않는 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러더퍼드>마오리 전쟁 춤 (뉴질랜드 원주민 춤ㅋㅋ) 을 추고 싶은 조수가 한 명 있다

 

고 회고 합니다

 

마오리춤 하카 , 러더퍼드 형님도 신입생때 견제나 그런거에 오지게 시달린듯ㅋㅋㅋ

 

대충 '여자들만 아는 표정' 짤

 

근데 나름 러더퍼드는 잘 적응하려 했고

결국 나중엔 그들과 마찬가지로 케임브리지 친구들과 정기적으로 골프를 쳤는데

러더퍼드는 유머감각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러더퍼드는 평생 골프와 자동차 운전을 취미로 즐겼습니다

 

(스승들이 화석인데 너도 화석이 되어야지..)

 

Before : 저 그냥 골프안치고 과학연구만 하면 안되요..?

 

After : 뉴비 과학자 왔구나 같이 골프치러 갈래 ? , 엉덩국 만화

 

결국 성실한 열정의 러더퍼드는 순혈성골출신이 아님에도 케임브리지에서 인정받았고

원래 캐번디시 연구소는 들어가려면 학부부터 모두 케임브리지 출신이어야한다는

매우 배타적인 집단이었는데 러더퍼드는 최초의 시골출신(그래도 시골에서 도내 전교1등찍음) 이방인이었음에도

새로운 동료 앤드류 밸푸어는 러더퍼드에게

 

<앤드류 밸푸어>여기 안티포데스(뉴질랜드)에서 온 토끼 한 마리가 왔는데

그 토끼가 아주 깊은 곳에 굴을 파고 있다

 

라고 킹정해줍니다

 

[톰슨의 수제자]

러더퍼드는 전자를 처음 발견하고 확인한 물리학자 J J 톰슨 밑에서 공부했고

이후 능력을 인정받아 톰슨의 수제자가 되어

그의 전세계에서 단 한 개 뿐인 전설의 캐번디시 연구소장 자리를 물려받습니다

 

톰슨 교수는 이전에 쓴대로 천재였는데

38살의 나이에 전세계 최고의 연구소 소장을 단 사람이었고

오늘날 교과서에 원자모형에 푸딩모형으로 1빠따로 등장하는 인물이며

'전자 발견'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인물로 유명하고 (업적 : 전자발견. 개깔끔ㅋㅋ)

 

전 세계에서 모인 천재들이 톰슨의 지휘아래

일사분란하게 원자연구에 매진합니다

 

잠시 원자에 대해 얘기하면

초기에 전자모형을 푸딩이라 주장한 톰슨과 달리

그의 제자 러더퍼드는 이후 전자모형은 태양계와 비슷하다 제안을 했는데

 

전자가 푸딩의 건포도처럼 곳곳에 박혀있다 주장한 톰슨과 달리

러더퍼드는 스승의 견해에 한 발 더 나아가

전자는 태양 주위의 행성과 유사하게 핵을 공전한다 주장했고

이를 오늘날 고등학교 과학교과서에도 필수적으로 배우는

원자를 상징하는 대표 심볼이 되버린  '러더퍼드 원자 모형' 이라 합니다 (뒤에 설명)

 

원자 모형의 변천사

 

여튼

처음에 러더퍼드는 JJ톰슨 교수의 초청으로 X선 연구에 협력했는데

러더퍼드는 뛰어난 느낌은 없었지만 한번 목표를 정하면 뚝심있게 밀어붙여

톰슨은 점차 러더퍼드를 인정하기 시작했고

 

당시에 독일 물리학자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은 러더퍼드가 캐번디시에 도착후 2달 뒤

X선을 발견했고 X선은 당시 과학자들에게 오늘날 AI 나 챗지피티 지브리 못지않은

뜨거운 감자같은 혁명적인 주제였고

 

(ㄹㅇ 지금 계속 지브리 뇌절하듯이 첨발명될때

계속 X레이 뇌절하듯이 오지게 찍어댔을듯)

 

현대 의학에도 대사건이었던 엑스선의 발명 , 엑스레이

 

지금으로 치면 서울과학고-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청운의 꿈을 안고 미국에 건너가 실리콘밸리에 엔비디아에 입사했는데

입사 두달만에 AI 가 발명된 셈이라

 

하나님이 짜맞추기라도 한 것마냥 러더퍼드가 캐번디시 연구소에 도착하자마자

X선 혁명이 일어나고 있던 시기였고

당시 물질이 원자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지만

내부 구조는 아직 미스테리였고

톰슨은 유리관에 가스를 주입한 가스관에 X선을 쬐면

전기가 강하게 흐르는 현상이 원자 내부구조를 밝히는 힌트가 되라라 생각하고

러더퍼드에게 가스관 연구를 지시했고

 

톰슨과 러더퍼드의 연구팀은 1897년 가스관 내부에서 전기를 운반하는 물질을 발견하고

'전자' 라 이름붙히고 전자발견에 공헌한 러더퍼드는 이 일로 박사학위를 받고

톰슨에게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습니다

 

러더퍼드와 톰슨은 함께 X선이 기체의 전도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서

원자와 분자를 이온으로 나누는 것에 대한 논문을 썼고

 

톰슨이 훗날 '전자' 라고 불리게 될 것을 조사하는 동안

러더퍼드는 이온을 생성하는 방사선을 자세히 연구합니다

톰슨은 기체에 의한 전기전도에 관한 실험적 연구와 전자발견으로 1906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합니다

 

러더퍼드는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핵물리학' 이라 불리는

분야를 열게 될 실험 물리학자로 거듭나는데

러더퍼드는 우라늄에 초점을 맞추며

우라늄을 호일 근처에 놓으면 한 종류의 방사선은 쉽게 흡수되나 차단되는데

다른 종류의 방사선은 같은 호일을 투과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발견했고

러더퍼드는 두 가지 방사선을 '알파' 와 '베타' 라고 명명했고

밝혀진 바에 의하면

알파입자는 헬륨원자의 핵과 같았고

베타입자는 전자나 양전자와 같았습니다

 

[캐나다 맥길대학 물리학 교수]

톰슨은 새로운 맛도리였던 러더퍼드를 눈여겨 보며

러더퍼드에게 캐나다 몬트리올에 있는 맥길대학 교수자리를 제안했고

당시 맥길대학 물리학 교수 캘런더가 캠브리지 대학으로 오면서 자리 하나가 비었는데

러더퍼드에게 짬처리 시켰는데

 

러더퍼드는 세계최고의 연구환경을 갖춘 캐번디시 연구소를 떠나는 것에

마음내켜하지는 않았지만

학자이기 전에 사회인으로서 결혼도 하고 생활을 꾸려야했기에

결국 러더퍼드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뛰어난 일류 연구자임에도

뉴질랜드 출신의 가난한 과학자였던 러더퍼드는

경제적 문제로 캐나다로 유배가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러더퍼드는 1898년 27살의 나이에

맥길대학교 물리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캐나다로 떠납니다

 

교수자리를 받고 경제적 기반을 잡은 러더퍼드는

안정적 직장을 가지게 되자 뉴질랜드에서 약혼한 메리 뉴턴과 1900년 결혼을 했는데

1895년부터 러더퍼드는 휴가때만 메리와 만났고

원래 러더퍼드도 결혼하려 오지게 노력했는데

케임브리지 대학 다닐때 결혼자금을 모으려 무선통신장치개발에 몰두하기도 했고

 

(위대한 업적 = 결혼자금 모으려 하는 수 없이 이뤄짐 ;;)

 

여튼 메리도 이때부터 5년간 참을성 있게 뉴질랜드에서 러더퍼드를 기다리다가

 결혼하게 된 것입니다

 

맥길대학에서 러더퍼드는 오웬스와 함께

토륨에서 방출되는 방사성기체에 대해 연구하며 토론으로 알려지는

라돈의 방사성 동위원소를 발견했고

1900년 뉴질랜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됩니다

 

맥길대학의 러더퍼드 , 맥길대학 아카이브

 

[반감기]

당시 캐나다는 물리학 연구 중심지인 유럽에서는 동떨어진 곳이었지만

운좋게 러더퍼드는 그곳에서 뛰어난 화학자 소디를 만나게 됬고

1907년까지 러더퍼드는 옥스퍼드 출신의 소디(1921년 노벨화학상)와

맥길대학교 연구실에서 방사성 금속들에 대해 공동연구를 했고

 

프레더릭 소디

 

당시까지 돌턴의 원자의 불변성(원자는 사라지거나 쪼개지지 않고 다른 원자로 바뀔 수 없고 새로 생기지 않음)

을 믿고 있었는데

1901년 그들은 우라늄과 토륨이 방사선을 방출해서 붕괴할때

다른 중간원소로 전환되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해서

돌턴의 원자의 불변성을 깨트렸고

 

처음으로 알파선을 방출하며 자연 핵변환을 관찰한 소디는 이를 깨달은 순간

 

<소디>러더퍼드 이것이야 말로 원자변환(Transmutation) 이예요

 

하고 소리를 질렀는데

러더퍼드도

 

<러더퍼드>하나님 맙소사 !!

소디 ! 원자변환이라 부르지 말게

그들이 연금술사라고 우리의 머리를 베어버릴 것이네

 

라고 대꾸했고

이 실험결과로 소디는 동위원소의 존재도 밝히게 됩니다

 

이때 원자가 막대한 에너지를 저장하고 있다 결론을 내렸고

특정 방사성 물질이 방사성 붕괴에 의해 질량이 반으로 줄어드는데 걸리는 시간이

핵종에 따라 고유한 값을 가진다는 것을 발견해

러더퍼드는 나중에 이를 '반감기 (half-life) 라고 불렀습니다

러더퍼드는 반감기의 발견으로 방사능 물질을 통해 지구의 나이를 측정할 수 있겠다 예견합니다

 

반감기

 

러더퍼드의 발견으로 당대 대부분의 학자들은 깜놀했는데

원자는 결코 파괴될 수 없다 생각해서

이같은 원소의 변환을 주장한 러더퍼드의 주장은 많은 학자들의 비난을 받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5년 미국의 B. 볼트우드는 방사성을 사용하는 측정법을 개발해

지구의 나이는 최소 22억년 , 태양계의 나이는 50억년이라는 결론을 얻었고

 

원래 당시 사람들은 지구 나이가 대략 6천년이라 생각했는데

이는 성경의 창세기로부터 추정한 기간과 비슷한데

러더퍼드의 발견으로 훨씬더 오래되었음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고

 

(반대로 지구나이 46억년은 지금은 상식의 영역이지만 백여년전만해도

6천년으로 알고있던 개 미개한 그런게 있음 ;;)

 

여튼 당대의 근대 과학자들은 러더퍼드와 소디를 비난하며

원소가 변한다는 그들의 이론은 중세의 연금술과 다를 바 없다 비웃었습니다

 

러더퍼드의 이  반감기에 대한 발견은 이후 지질 , 유물의 탄소를 조사해 연대를  방사성 탄소연대측정법 개발로 이어졌고

오늘날 고고학에서 뼈나 유물의 제작년도등을 과학적으로 밝힐 수 있는 마법같은 발견으로 이어졌고

미국 화학자 리비는 러더퍼드의 가설들을 더 높은 차원으로 받아들여

방사성 탄소연대측정법 개발로 1960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합니다

 

1902년 러더퍼드와 소디는

 

'방사성의 원인과 본질'

 

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그동안의 연구결과를 발표했고

방사능은 원자내부현상이며 원소가 자연붕괴함을 증명하는 현상이라 밝혀

기존의 돌턴의 원자설 , 물질관을 깨트렸고

 

주위 동료 학자들은 물리학의 근본을 뒤흔들 내용이라 불안하게 여기며

학교의 명예를 생각해서 발표하지 않도록 권유했지만

러더퍼드와 소디는 발표했고

 

1904년 러더퍼드와 소디는

 

'방사능'

 

이라는 보고서를 출판하고 이 둘의 연구결과는 전세계적 인정을 받게 되고

그 공로로 같은해 럼퍼드 메달을 받습니다

 

그렇게 캐나다에서 생활이 안정적이고 행복하고 결혼도 해서 해피해피였긴 한데

문제는 아직 미국 , 아메리카 대륙이 돈은 엄청나게 많은데 과학연구 중심은 아니던 시기라

유럽 본토에서 과학은 주도되고 있었고

결국 유럽과학의 본류와 단절됨을 느낀 러더퍼드는

예일대학의 교수제의를 거절하고

1907년 뛰어난 연구장비를 갖춘 맨체스터 대학 물리학과 교수로 영국에 금의환향합니다

 

[맨체스터 대학]

뉴질랜드 대학에서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캐나다 맥길대학을 거쳐서 다시 영국 맨체스터 대학으로..

러더퍼드 전기를 읽어보면 다들 하는말이

 

'되게 열심히 산 사람'

 

이라는 평이 일치적인데

농어촌전형 1등으로 장학금받고 영국간것도 그렇고

결혼하고 가정꾸리려 수많은 대륙을 오갔고

한곳에서 고상한 학자질만 하려하는게 아니라 진짜 생계를 위한 학자로서 노력했던 인물입니다

 

[노벨 물리학상이 아닌 노벨 화학상 수상]

여튼 러더퍼드는 맨체스터 대학에서 알파선에 대한 연구를 시작해

독일출신 물리학자 한스 가이거와 함께 알파선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고

 

1908년 맨체스터 실험실에서 한스 가이거(왼쪽) 과 함께

 

가이거의 도움을 받아 알파입자 개수를 정확히 세는데 성공 ,

알파입자는 라듐에서 방출된 방사선을 담은 유리관을 진공상태에 놓으면 목격되는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입자였고

이로인해 알파입자의 성질이 헬륨원자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러더퍼드는

알파입자가 전자를 포섭하면 헬륨원자로 변한다 발표했고

이 공로로

1908년 러더퍼드는

 

'원소들의 붕괴와 방사물질의 화학에 대한 연구'

 

업적으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는데

 

과학 최고의 상 노벨상

 

당연 노벨상수상은 전국민 , 전세계적 영광이고

러더퍼드는 뜬금없이 

'화학상' 이라는 것이 걸렸고

 

평소 물리학자라는 자부심이 엄청났던 러더퍼드에게는 굉장히 뜬금없는 일이었고

 

<러더퍼드>물리학이야말로 유일하게 진정한 과학이고 나머지는 모두 우표수집에 불과하다

 

할 정도로 극물리계 성향이었는데 (ㅋㅋ)

 

결국 노벨화학상 수상식에서 언짢은 러더퍼드는 수상소감에서

 

<러더퍼드>방사능에 관한 내 연구에서 많은 변화들을 관찰했는데

물리학자에서 화학자로의 나 자신의 변환보다 더 빠른 변환은 본 적이 없다

 

(요약 : 한림원 씨팔새끼들)

 

근데 보통 노벨상은 그 과학자들에 대한 최정점 , 최절정 연구에 대한 업적으로 수여되는데

보통 노벨상 형님들 전통이 수상 이후 상금으로 맛집좀 탐방하고 찌랭이들한테 순회강연 하면서

용돈벌이하다가 현자타임이와서 골골대다 죽는게 일반 테크인데

노벨상 수상이후에도 폼이 안죽은 러더퍼드 형님은 또다시 역사에 남을 레전드를 찍게 되는데

 

심심할땐 노벨상 동문회도 나가준 러더퍼드 형님 , 1911년 솔베이 회의 사진 , 중간 러더퍼드 러더퍼드에서 오른쪽으로 두번째 아인슈타인 러더퍼드 밑에 퀴리부인 ㅋㅋ

 

[알파입자 산란실험]

원자가 붕괴한다는 것을 밝혀낸 러더퍼드는

이번엔 원자 내부의 구조를 밝혀내기 위해

금속판에 알파입자를 부딪히는 충돌실험을 했고 

 

1909년 가이거와 말스덴은 러더퍼드의 지도아래

전하가 +2가이고 질량이 전자에 비해서 7500정도 무거운 알파입자 빔을

두께가 원자 몇 층 밖에 안되는 매우 얇은 금박에 쏜 다음

입자의 궤적을 추적하는 교과서에도 나오는

 

'알파입자 산란실험'

 

을 시작했고 (산란 : 파동이나 입자선이 물체와 충돌해서 여러방향으로 흩어지는 현상)

이 실험은 원자핵 발견 및

1911년 러더퍼드가 발표한 원자모형 , 이후 보어가 발표한 보어 모형으로 이끈

매우 중요한 실험이고

 

얆은 금박조각으로 알파입자 산란을 실험하기 위해 사용된 실험장치 , 원자핵 발견

 

러더퍼드의 알파입자 산란실험

 

당시 러더퍼드는 어떤 원자이론에서도 예상되지 않는 유형의

매우 높은 산란각을 갖는 알파입자들을 찾으려했고

실험결과 대부분 알파입자들은 금박을 통과했는데

1/20000 확률로 아주 적은 입자들은 90도 이상으로 산란됬고

어떤 것은 곧장 똑바로 되돌아 옴을 관찰합니다

 

원래 돌턴의 원자모형에서는 원자가 그냥 공모양 알갱이라했고

1897년 전자를 발견한 톰슨은 1904년 원자는 양전하가 널리 퍼져있는 속에

전자가 마치 건포도처럼 박혀있다는 건포도 푸딩모델(건포도 빵)을 발표했고

 

근데 톰슨의 원자모형대로라면 모든 알파입자는 1도도 안되는 아주 작은 값으로 산란되야하는데

예상과 달리 몇 개는 금박에 충돌한 후 마치 테니스공이 콘크리트 벽에 부딪힌 것처럼 곧장 되돌아 왔고

러더퍼드는 이 실험결과에 놀라며

 

<러더퍼드>이것은 마치 당신이 15인치 포탄을 한 장의 화장지에 쏘았더니

포탄이 도로 튕겨돌아와 당신을 때린 것처럼 믿을 수 없었다

 

그냥 쭉 통과하는 톰슨모형(좌) 와 달리 원자핵 맞고 팅기는 러더퍼드 모형(우)

 

즉 금박에 알파 레이저를 쐈는데

대부분 무난히 얇은 금박을 통과했는데

아주 극소수는 팅 하고 뒤로 튕겨져나왔고

이로인해 인류는 '원자핵' 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알파입자 산란실험에서 가끔씩 원자핵맞고 팅겨나가는 알파선

 

러더퍼드의 계산으로는

핵의 반경이 최소한 원자의 반경보다 10000배는 작아서

원자부피의 대부분은 텅 빈 공간임을 생각하게 됬고

 

<러더퍼드>원자핵의 반지름은 원자의 반지름보다 매우 작아야하며

그 비는 약 10⁴ 이다.

다시말하면 원자의 대부분은 빈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따

 

이로인해 톰슨의 푸딩모형과 달리

1911년 러더퍼드는 양전하가 원자의 중심의 밀집되어 고밀도의 핵을 이루고

전자는 핵에서 떨어진 공간에서 핵을 중심으로 원운동을 한다는 원자모형을 발표합니다

 

(대충 태양이 원자핵이고 전자는 행성인 모형)

 

오늘날 과학의 심볼이 되버린 러더퍼드 원자모형

 

이 위대한 발견 이후 톰슨의 푸딩핵모형은 깨졌고

근데 러더퍼드가 제안한 태양계식 원자모형은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돌면서 전자파를 방출하느라 에너지를 잃기 때문에

오랜기간동안 안정된 상태로 존재할 수 없다는 문제를 지녔고

 

러더퍼드의 제자 보어는 러더퍼드의 제안에 따라 새로운 원자모형 연구에 착수해

1913년 보어는 러더퍼드의 원자모형처럼 전자는 원자핵 주위를 원회전 하고 있지만

양자화 가설을 도입해 전자는 선택된 궤도에서만 회전한다는 러더퍼드-보어 원자 모형을 발표합니다

 

보어 원자모형

 

러더퍼드-보어 원자모형으로 러더퍼드는 그토록 바라던 노벨 '물리학' 상을 받을 정도로의

위업을 이뤄냈는데

보어만 1922년 원자구조와 원자에서 나오는 복사에너지 발견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합니다 (ㅋㅋ;;)

 

[캐번디시 연구소 소장]

야한냄새나는 따끈따끈한 뉴질랜드출신 뉴비에서

어느덧 그랜드슬렘 삼관왕을 달성한 고인물이 되어 물리학 레전드가 되어버린 러더퍼드는 

그와 같은 교육자 성향이 농후했던 그의 스승 톰슨의 레이더에 딱 걸렸고

1917년 스승 톰슨의 짬처리를 받아서 세계 최고의 물리학연구소 '캐번디시 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톰슨과 러더퍼드 , 같이 늙어가는 두 거인의 뭔가 짠한사진

 

왠만한 근현대 노벨상 수상자들은 다 톰슨이나 러더퍼드와 엮여있고

톰슨이나 러더퍼드가 쉐프로 요리할때 옆에서 설거지하던 찌랭이들이었고 (??)

여튼 뉴질랜드 시골에서 감자캐다가 엄청난 명성을 얻은 러더퍼드는 어느덧

대영제국의 제 1과학자가 되서 뉴턴 , 패러데이 , 톰슨 급이 되어

'득천하영재교육' 의 영역으로 나서는 상황이었고

1918년 러더퍼드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남작 작위를 받았고

영국학사원 원장 역임 , 국회 상원의원까지 겸임하며

공적인 영역에도 들어갔고

계속해서 후대과학자들에게 영향을 주려 노력합니다

러더퍼드는 기사작위 , 왕립학회 회장직도 받았고

이런 수많은 명예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건

러더퍼드는 그의 스승 톰슨의 뜻을 이어서

수많은 천재물리학자들을 가르치고 교육했다는 점이며

독일의 한스 가이거나 덴마크의 닐스 보어라는

러더퍼드의 제자들은

 

'국제적 거대 과학'

 

이라 할 수 있는 그의 가장 위대한 유산을 대표합니다

 

[캐번디시 정신]

러더퍼드는 캐번디시 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캐번디시 정신' 을 심었는데

캐번디시 정신이란

실험 물리학자라면 실험에 필요한건 그게 무엇이든 직접 만들어 써야한다는 것 ,

유리관이 필요하면 유리에 열을 가해 직접 불어서 만들어야하고

장치를 밀봉할때는 직접 손으로 장치에 왁스를 발라야하고

전자회로도 필요하면 직접 만들어서 써야하는게 캐번디시 정신이었습니다

 

(출처 : 김현철 세 개의 쿼크의 뒷 이야기)

 

캐번디시 연구소

 

또한 러더퍼드는 마음만 먹으면 수백~ 수천개의 특허도 신청할 수 있었지만

그는 퀴리부부가 라듐을 추출하던 방법을 특허로 내지 않았듯이

물리학에서 얻은 건 모든 이들이 누려야한다 생각해서

단 한 번도 특허를 신청하지 않았고

이 또한 그가 남긴 '위대한 유산' 들입니다

 

러더퍼드는 1895년 케임브리지에 도착할때는

제 1기 국제 대학원생 중의 한 명이었지만

그가 그렇게 성장하면서 국제과학의 중요성 ,

세계 전역에서 온 학생들을 가르치고 발전시키는 것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고

그가 사망할 무렵에도 그는 그러한 것의 가치를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러더퍼드는 왕립학회 회원이자 회장이 되었을때

장학금을 수여하는 위원회의 위원이었는데

누군가 장학금에 가치에 이의를 제기할때마다 러더퍼드는

 

<러더퍼드>해외 장학금이 없었더라면 러더퍼드 장학금도 없었을 것이라는 사식을 기억하십시오

 

라고 말했고

해외 장학금 , 국제 장학금을 통해 과학계는 더욱 더 새롭고 다양한 인재 ,

다른 견해외 다양한 연구경험을 가진 인재를 끌어들일 수 있게 됩니다

 

(대충 미국의학계도 한국한의사들 받아들여서

양방과 한방을 잘 조화시키는 연구도 많이 하는 것과 비슷)

 

[위대한 교육자 러더퍼드]

러더퍼드는 스승 톰슨처럼 일반적인 과학자가 아닌 '교육자' 였는데

물리학을 함꼐 연구하는 동료의 국적(러시아 독일 유대인 포함) , 인종 , 성별 , 정치성향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고

러더퍼드의 제자들은 모즐리 , 채드윅 , 블랙켓 , 콕크로프트 , 윌튼 등 엄청난 노벨상 수상자 , 레전드들을 배출했고

중성자 발견 , 가속기 발명 , 인공 핵반응 등

러더퍼드의 지도아래 캐번디시 연구소는 최전성기를 보냈고

러더퍼드의 연구팀은 노벨상을 받은 사람을 10명 넘게 배출했고

 

그가 아끼는 제자 헤리에트 브룩스는 여자였고

가장 아끼던 애제자 표트르 카피차는 국적이 소련이고 공산주의자였음에도

러더퍼드는 별 문제삼지 않았고

러더퍼드는 그당시 유행과 달리 좌파우파 이런거 중요치 않고

그냥 함꼐 자연의 진리를 탐구하는걸 중요시 여겼고

단 러더퍼드는 과학이 사악한 목적으로 악용되는 것을 경계했고

과학이 사악한 목적으로 쓰이는 것을 '매춘' 이라 할 정도로 혐오했습니다

 

[전문연구요원 제도]

러더퍼드의 제자중 가장 유명한 제자는 역시 헨리 모즐리인데

1887년생인 헨리 모즐리는 이틀 칼리지를 졸업후 옥스포드 대학에 입학 ,

옥스퍼드를 졸업한 뒤 물리학자 러더퍼드의 연구팀에 들어가 연구를 시작했는데

헨리 모즐리는 그냥 쌉천재였던 차기 영국 과학을 대표하는 영국과학계의 샛별이자 희망이었고

 

요절한 천재 헨리 모즐리

 

연구시작 3년만에 원자량으로 원소를 나열한 멘델레이프의 주기율표를 수정하는 업적을 남겼는데

 

모즐리는 원자번호가 원자핵의 양성자 개수와 동일하다는

 

'모즐리의 법칙'

 

을 발견했고

이를 통해 4개의 원소를 제외한 주기율표상의 모든 원소를 채우고 순서를 정립하는 업적을 세웁니다

 

영국인들 , 과학자들은 다들 모즐리에게 차기 과학에이스로의 희망을 걸었고

이 업적으로 모즐리의 노벨상 수상은 확실시 되었는데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씹엘리트였던 모즐리는 당시 근대식 인물답게 사회지도층에서 자원입대해야한다는 분위기에 동참해

영국 육군 공병장교로 자원입대했고

1915년 갈리폴리 전투에 투입되서 그곳에서

27세의 나이에 전사합니다 (처칠의 흑역사로 그 위대한 처칠도 가불기걸리는 부분임)

 

모즐리 유서에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과학의 발전에 써달라한 것이었고

이로인해 전세계 과학계는 큰 충격에 빠졌고

적국이었던 독일마저도 모즐리의 죽음에 충격을 받게 됩니다

 

(영국군이 독일 민가를 폭격했는데 아인슈타인 집이였고

우리가 아인슈타인을 죽였어.. 이런 격임..)

 

비단 모즐리 뿐만 아니라 당시 '대학' 을 나오는 것 자체가

귀족이나 명문가 , 부유층 자제들의 전유물이었는데

근대식 노블리스 오블리주 전쟁관과 더불어

귀족가문에서는 당당히 나가서 싸우는 것을 애국 , 멋으로 여기는 풍조가 강해서

1차 세계대전때 수많은 과학자(부잣집 도련님 , 귀족) 들이 전쟁에서 전사했고

이때 영국 최고 명문학교인 이튼칼리지 (이튼스쿨 , 영국의 경기고 or 서울과학고) 는

수많은 과학자 , 정치인을 배출했던 영국의 김나지움 , 제1엘리트 학교인데

1차 , 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많은 전사자가 나온 학교로 유명하고

 

모즐리의 죽음에 크게 상심한 그의 스승 러더퍼드는

젊은 과학자들이 전장에서 죽으면 안된다고 주장하며

전장으로 투입되는 대신 전시군사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연구를 해야한다 주장했고

이는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이공계 대체복무제도' ,

'전문연구요원제도'

 

의 시초가 됩니다

 

당시 캐번디시 연구소 소장인 러더퍼드는 캐번디시 소장답게 이미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였고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영국은 막대한 피해를 보았고 러더퍼드 연구소도 물질적 손해가 컸고

당시 최고의 물리학자들도 예외없이 징병테크를 탔는데

전쟁통에도 러더퍼드는 적국 물리학자와 중립국을 통해 편지를 주고받을 만큼 물리학 연구를 우선했고

 

(이게 원래 전쟁중 적국과 교류가 하면 안되는 것이긴 한데

러더퍼드나 당대 각국의 최고 과학자들도 본능적으로 과학에서는 협력해야한다는 것과

자국 정치인들이 병신인걸 알고 있어서 그냥 몰래 씹고 교류한듯..

그리고 하다 걸려도

'내가 적국 물리학자랑 교류해도 니가 뭘 할 수 있는데' 로 나가면 되는 국가권력급 과학자고

정치인들도 다 빡대가리라 어짜피 터치 못함..)

 

여튼 이런게 ㅈㄴ 잔인한데 맞는 말일 수 밖에 없는게

평생 수학과학만한 부잣집 전교1등 수능 1등급 도련님들은 후방으로 빼주고

 가난한집 전교 10등 이하 수능 2~9등급 김평범 , 박굳건들은 다 군대로 투입해서 전장으로 보내는 격이라

ㅈㄴ 불공평한거긴 한데

문제는 근대전부터 점차 과학전이고 현대에 오면서 핵무기 , 전자전까지 일어나며

더 전쟁이 첨단화되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2~9등급 가난한집 , 평범한집 병사들이 그걸 만들어낼 수는 없고

 

(ㄹㅇ 영어 원어민 수준으로 해서 외국 기술서 번역해야하고 공업수학 기본으로 술술 풀어야함)

 

대부분 부유층에서 좋은 교육받고

돈걱정없이 넉넉하게 시간쏟아가면서 전과목 1등급찍은 부잣집 도련님들이 무기 만들어주면

그거 공장에서 양산해서 전장으로 나가는 셈이고

 

누구는 전쟁터에서 핀업걸 아이돌 사진 , 엄마사진 대충 지갑에 붙여놓고

굶고 추위에 굶주리며 잠도 못자고 약맞아가면서 처절하게 전투하는데

누구는 최후방에서 과학연구하면서 예쁘고 토끼같은 와이프 자식이랑 매일 ㅍㅍ섹스하면서 무기연구하고

정부에게 우쭈쭈하면서 여러 자원받고 상대적으로 호화롭고 편하게 지내는 법이며

 

(보통 패전해도 학살등에 직접관여 아닌이상

기술자들은 승전국에 끌려가서 연구만 시키지 왠만해선 전범으로 사형은 안당함 ;;)

 

그래서 전쟁이 더 잔인한 그런게 있는데

그렇다고 도련님들을 최전방으로 보내면 무기는 누가만들고 공급은 누가하는 셈이며

전쟁 끝나도 미국 2차대전 참전용사들은 승전을 했음에도

대부분 농촌으로 돌아와서 팔다리 하나 날라간채 절뚝거리며 트랙터 몰거나

정부 배급 받으면서 다시 농삿일 했는데

후방에서 오펜하이머나 소수 핵무기 만든 과학자 , 맥아더와 아이젠하워같은 지휘관들은 떵떵거리며

역사에 길이길이 존경받은 셈이고

 

전시가 아니라도 평시에도 보통 비슷한 판국이라

교육수준이 높은 부잣집 엘리트들이 다 케임브리지 , 서울대가서 연구개발하고 있고 그런데

이게 평시에는 표면으로 잘 안드러나다가 전시에 더 심해지는셈이고

 

그래서 제가 축협보면 정몽규가 박근혜~윤석열 탄핵될때까지도 계속 버티고 있는게

저도 처음엔 정몽규 욕 엄청했고 차범근이나 박지성같은 축잘알이 축협회장 해야한다 생각했는데

정몽규가 현대가 배경도 적당히 있고

원래 스키 , 수영 , 모터사이클 등 스포츠도 적당히 좋아하고 고려대 경영학과 나와서 먹물도 적당히 먹었고

그런 배경이 겸사겸사 엮여서 본인이 의도한것도 있지만

어찌저찌하면서 반강제적으로 축협회장 해먹고 있는 점도 있음을 생각하게 되었고

 

정몽규도 지금 본인이 계속 하려는 의지가 강한 상황인데

만약 정몽규가 불법적으로 회장자리를 연임하려고

사람을 써서 누구를 담구거나 드럼통에 넣거나 찢어버렸다면

그땐 끌어내리는게 맞고 법정에 세우는게 맞는데

그게 아닌 이상 축구인들 내부에서 정몽규에 정면도전해서

자기 힘으로 선거에서 정정당당하게 이겨서 끌어내리는 수밖에 없는데

그 인물이 없으니 정몽규가 제일 최선이니 장수하고 있는 셈이고

축구인들도 어느정도 돈도 벌고 공부도 해서 정치력을 갖춰야

정몽규를 합법적으로 끌어내리던가 할 수 있고

정몽규도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 나오면

우리 축구 미래를 위해 안심하고 물러날거란 생각이 들고

스포츠가 축구만 있는건 아니니 국대 축구를 불매하면 불매했지

정몽규나 축협 욕만 하기에도 그런 셈을 깨달았고

 

역시 이게 대체복무제나 전문연구요원도 여러 편법논란도 있는데

원래는 이런 의도로 과학자들 보호하려 만든 셈이고

화살과 검으로 싸우는 냉병기 시대때만 해도

과학자보다는 주몽 , 이성계 , 징기스칸 , 누르하치 같은

뛰어난 장군 , 무력지도자가 전장을 지배했고 과학보단 아무래도 훌륭한 식스펙 바디나 전술이 갑이었지만

열병기 시대로 진입하며

과학자들 죽으면 전쟁은 100퍼센트 지는 셈이라

과학자 한 명 한 명이 이성계 , 이순신인 셈인 시대이고

여튼 결국 대체복무 , 전문연구요원 제도 수혜자는 대부분 잘배운 부잣집 , 귀족자제인건

예나 지금이나 같다 생각하는데

러더퍼드의 제안은 결국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모두가 인정할만한 제안이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다들 부자들 , 재벌 , 정치인들 욕하다가도

위기가 오거나 살기위해선 좋던싫던 그들 말 듣고 갈 수밖에 없는 그런게 있다는 점이고

 

(극단적으로 예를들어 선장이 연쇄살인범 + 아동성범죄자인데

선장을 죽이면 해도읽기나 배 조종이나 측량 , 배수리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그런 경우랄까)

 

이게 골아픈 그런게 있고 이런게 평시보다 전쟁때 더 극심해지기때문에

전쟁 자체를 하면 안됩니다..

 

[소련과의 교류]

러더퍼드가 가장 좋아했던 제자 표트르 카피차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당시 케임브리지에는 순수연구에 집중하면서

실용적인 실험기술자에 대한 공백이 생겼는데

러더퍼드는 실험을 구성하는데 필요한 엔지니어링 분야에서 숙련된 사람이 필요했고

 

(러더퍼드 : 실험기구 만들어줄 공돌이 , 도라에몽 급구욧)

 

한때는 본인이 뉴비에서 이젠 뉴비들 뽑아야하는 상황이 됨ㅋㅋ

 

마침 카피차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폴리테크닉 대학에서 엔지니어 교육을 받았고

아내와 자녀들이 독감으로 사망하자 슬픔을 극복하려

카피차는 과학무역사절단의 일환으로 러시아를 떠나 영국으로 가는데

당시 러시아도 과학기술이 필요하던 상황이라

카피차같은 똑똑한놈 유학 보내서 영국에서 기술을 배워오게 해야하던 상황이었고

 

표트르 카피차

 

이렇게 서로 아다리가 맞는 상황이었고

1919년 카피차는 맨체스터에서 돌아온 러더퍼드가 소장으로 있는 캐번디시 연구소에 왔는데

관대한 스승이었던 러더퍼드는 카피차가 캐번디시에서 연구를 수행하는 것을 동의하긴 했는데

러시아 사람을 약간 의심하고 있긴 했고

너무 연연친 않았는데 카피차의 임무중 일부가 소련의 과학정책을 홍보하는 것도 있어서

결국 러더퍼드는 다만 카피차에게 그가 캐번디시로 온 첫날부터

 

<러더퍼드>연구소에서 공산주의 선전은 용납되지 않을 것

 

이라고 간단히 말했습니다

 

카피차는 자기 자리에서는 열심히 연구했는데

러더퍼드에겐 실망스럽게도 카피차는 자신의 조국에 대한 임무를 잊지 않았고

카피차는 틈틈히 러시아로 돌아와 가족을 방문하고 동료들을 만나서 그간 겪고 배운것을 토해냈고

카피차는 나름 영국과 러시아의 복잡미묘한 관계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며

소련 당국으로부터 소련방문후 케임브리지로 돌아갈 수 있다는 서면 진술서를 요구했고

몇몇 복잡함을 제외하고는 카피차의 이런 생활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근데 카피차는 시간이 날때마다 레닌의 정치에 대한 자신의 지지를 숨기지 않았고

1917년 혁명으로 러시아의 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이 쫓겨난 사태를 매우 통쾌해했고

공산당에 입당하진 않았는데 공산당의 목표를 항상 지지합니다

 

<카피차>나는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사회주의 건설과 소련정부가 공산당의 지도하에 실천하는

광범위한 국제주의를 전적으로 공감하며 지지한다

 

카피차는 매년 소련으로 되돌아갔는데

가족과도 재회해야했고

레닌의 후계자 스탈린이 추진중이던 공업화 계획에 자문도 해줘야했는데

이는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는데

 

카피차가 러시아로 가서 트로츠키한테 조국 전기화 계획에 대해 조언할 거라고 얘기한 뒤인

1925년 10월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아내에게

 

<케인스>조만간 그가 붙잡혀 오도가도 못할 거라고 봅니다..

그는 무모하고 사심이 없고 자만심이 강하고 야만적이기까지 한 피조물입니다

천성적으로 과격파가 딱 어울리는 거죠

 

수정자본주의 그 케인스 형님임ㅋㅋ , 빨갱이 싫어싫어~

 

그래서 카피차가 반드시 케임브리지로 돌아오겠다고 굳게 약속을 해도

케임브리지 사람들이 조마조마했다 합니다

 

러더퍼드도 국제과학의 이런 복잡하고 어두운 측면에 대해 극도로 당황했는데

소련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러더퍼드는 런던 주재 소련대사에게 편지를 써서

카피차의 구금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소련의 움직임을 비판하는 탄원서를 조직해서 저명한 과학자들이 서명하기도 했고

 

빡친 소련 역시 대응을 했는데

1935년 런던 주재 소련 대사관에서는

 

<소련 대사관>케임브리지는 의심할 여지 없이

소련이 러더퍼드 경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과학자들을 모두 자신의 실험실에 두기를 원할 것이다

 

라 대응했고

이는 이당시부터 과학이 얼마나 국경이 없이 국제화됬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라 볼 수 있습니다

 

땅딸막한 체구의 카피차는 활기가 넘치고 외향적 성격이었는데

카랑카랑한 고음으로 명랑하게 떠들면서 동료들과 카드장난을 즐겼고

자신의 사상과는 별개로

러더퍼드를 우상처럼 숭배했고

러더퍼드는 제자들에게 적절한 질문을 던져서

자연의 비밀을 토해내게 만드는 신묘한 능력이 있었는데

 

카피차는 이런 러더퍼드를 존경해서

러더퍼드가 안보이면 카피차는 러더퍼드를 '크로코다일(악어)' 이라 불렀는데

그당시 젊은 소련인이 제일 좋아하는 동물이 악어였기 때문이고

러더퍼드도 역시 카피차를 양아들이나 다름없게 생각하며 카피차를 애제자로 아껴줍니다

 

[악어]

이로인해 러더퍼드의 별명은 '악어' 가 되었고

러더퍼드를 기리기 위해 현재 캐번디시 연구소 로고는

악어가 사용되고 캐번디시 연구소의 몬드연구소 건물의 외벽에는 러더퍼드를 기리며 악어조각이 새겨집니다

 

<사람들이 악어와 러더퍼드를 묘사하는 말>

악어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목이 뻣뻣하고 강하며 그들은 직진합니다

 

캐번디시 연구소의 몬드 연구소는

카피차가 자기장 연구를 하기 위해 왕립학회의 지원을 받아 설립했는데

러더퍼드가 자기 머리를 뜯어먹을까봐 혹은 러더퍼드가 큰 키에 목소리가 너무커서

피터팬에 나오는 시계를 삼킨 악어처럼 러더퍼드가 오기 전 소리만 듣고도 알 수 있어서

제자들은 러더퍼드를 악어라 놀렸고

그 별명을 짓고 제자 카피차는 악어조각을 의뢰해서 건물 외벽에 악어조각까지 했습니다

 

몬드 연구소 외벽에 카피차가 러더퍼드를 위해 새긴 악어

 

카피차는 러더퍼드의 제자로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10년이상 연구하며

강력한 자기장 생성기술을 개발하고 금속의 저항률과 자기장의 관계를 발견하였고

1934년 소련으로 돌아와 액체 헬륨의 초유체 현상을 발견해서

197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합니다

 

카피차는 정치적인 갈등에도 러더퍼드를 존경하여

러더퍼드가 만든 물리학에 대한 국제적 견해를 퍼트리려 노력했습니다

 

[핵물리학의 아버지]

1937년 10월 13일

러더퍼드는 아내 메리의 부탁을 받아 정원의 나무를 손질하고 있었는데

나무에 올라 가지를 치다가 떨어졌고

높은 높이도 아니였는데 그는 떨어진 뒤 통증을 느꼈고

떨어지며 심한 복통과 구토를 느꼈는데

아내 메리가 동네 안마사를 불러 배를 마사지했지만 효과가 없었고

결국 의사를 불렀는데 의사들도 할 수 있는게 없었는데

 

러더퍼드는 작위를 받은 물리학자였고

작위를 받은 사람의 수술은 작위를 받은 의사만이 할 수 있었고

 

(;; 이래서 이전에 패러데이가 작위 거절하고 정계에 안나대고 조용히 살다간듯 ;;)

 

결국 런던에 있는 저명한 외과의사 토머스 던힐 경이 연락을 받고

급히 케임브리지로 왔는데 배꼽탈장을 수술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시간이 너무 지체되는 바람에 러더퍼드의 상태가 악화되있었고

수술이후에도 러더퍼드의 상태는 더 나빠졌고

결국 죽음을 느낀 러더퍼드는 아내 메리에게

 

<러더퍼드>내가 죽거든 넬슨대학에 100파운드를 기부하시오

 

라는 말을 남기고 1937년 향년 66세로 숨을 거두었고

그가 죽는 순간 떠올린 곳은 자신의 고향 뉴질랜드의 넬슨이었습니다

 

러더퍼드가 죽자 뉴질랜드의 총리는 통렬한 논평을 남겼습니다

 

<뉴질랜드 총리>우리는 그를 어니스트로 알고 있었고

해외에서 그의 멋진 경력을 지켜봤습니다

 

러더퍼드가 죽은 날 러더퍼드에게 물리학을 배운 닐스 보어는

이탈리아의 학회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스승의 죽음에 보어는 정신이 멍해졌고

보어는 학회에서 사람들에게 그 소식을 알리며 눈물을 터트립니다

 

소련의 카피차 역시 고국 러시아에서 이 소식을 듣고

추도식에서 칠레 , 중국 , 덴마크 , 프랑스 , 독일 , 인도 , 일본 , 폴란드 , 소련 등에서

캐번디시에 온 학생들을 언급하며 캐번디시에서 만났던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핵물리학의 아버지 러더퍼드는 1937년 10월 25일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 뉴턴이 묻힌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에 묻혔고

 

뉴턴은 한때 연금술에 깊이 심취해서

금을 만들 수 있는 돌 , '현자의 돌(마법사의 돌ㅋㅋ)' 을 찾으려 찾아다녔는데

러더퍼드는 맥길대학교에 있을때 프레데릭 소디와 함께 다른 물질을 변환시켜 금을 만들 수 있음을 보았고

핵물리학에서 핵변환이라 불리는 것을 최초로 찾아낸 사람이 러더퍼드였고

러더퍼드가 핵변환을 발견한 것은 마법사의 돌을 찾아낸 것과 다름 없었다 합니다

 

또한 러더퍼드는 일반적으로 원자의 구조를 밝혀낸 과학자가 아닌

'거대과학' 의 세계를 연 위대한 학자였는데 이 거대과학이

단지 돈과 폭탄에 관한 연구를 하는 과학이 아니라

전세계의 연구자들이 원자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거나 우주 바깥을 응시하려 협력하는 것이었고

러더퍼드는 이 협력을 조직하고 옹호했던 위대한 참과학자였습니다

 

한국계 미국인 핵물리학자로 유명했던 이휘소 박사

 

그리고 러더퍼드의 사후 2년뒤 원자력의 가능성이 발견됬는데

원자안에 숨은 막대한 에너지를 발견한 것도 러더퍼드와 그의 연구팀이었는데

원자안의 에너지가 원자력 발전과 원자폭탄으로 활용될 수 있음이 명백히 밝혀진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였고

 

1차세계대전중 전황과 관계없이 적국의 물리학자들과 물리학 연구를 계속한 러더퍼드의 제자는

핵폭탄 개발에 핵심적 역할을 했고

러더퍼드도 1차 세계대전때 영국해군에 복무했지만

물리학 성과를 적극적으로 무기개발에 응용하려하진 않았고

러더퍼드의 물질의 구조를 알기위한 연구는 결국 그의 사후 핵무기 군비경쟁에 씨앗이 됬고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의 과학적 성과는 결국 핵무기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역시 캐번디시 출신인 핵무기 제작자 오펜하이머 , 이론물리학쪽인 오펜하이머는 원래 러더퍼드한테 배우려했는데 실험물리학쪽인 러더퍼드의 거절로 톰슨밑에서 배움ㅋㅋ.. ,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러더퍼드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뉴턴 경 무덤 가까이에

영국 최고의 과학자들과 나란히 누웠고

그를 기념하기 위해 원소 104번 이름을 1997년 '러더포듐' 으로 명명합니다

 

인공적으로 합성해낸 '러더퍼듐'

 

러더퍼드는 오늘날 '핵물리학의 아버지' 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원자력 발전소로 싸게 전기 쓸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니스트 선생님~)

 

<러더퍼드가 후배과학자들에게 준 격려>

여러분들이 청천벽력같은 갑자기 예기치 못한 발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항상 그 발견은 한 사람 또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 성장된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과학발전의 엄청난 가능성은 상호간영향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과학자들은 단 한 명의 과학자의 아이디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문제를 생각하고 있는 수 천 명의 과학자들의 결합된 지혜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조금씩 자기 일을 함으로써 지식의 위대한 구조를

점진적으로 세워 가는 것입니다

 

(대충 스타 뒤의 조연과 백댄서 , 매니저 , 카메라맨들도 다 스타를 빛내주고 한류에 헌신하고 있다 이런 느낌)

 

<라봉봉>우선 제가 그림그리는 툴을 바꿔서

좀 그림을 실험적인 발퀄로 올린듯한데 양해부탁드리고..

 

본론으로는..

원래부터 톰슨-러더퍼드-보어 순으로 글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쓰면서 러더퍼드 업적이 생각보다 더 소름돋았고

뉴질랜드 최고액권에 박혀있다는 점에서 한 번 더 소름이 돋았고

 

비록 갈릴레이 , 뉴턴 , 아인슈타인 , 퀴리부인 정도만 어린이 위인전에 올라온 형편이고

이런 인물들은 보통 고등학교 교과서부터 나오는 인물이긴 하지만

참 근본이 넘치는 인물들이고 배울점이 참 많은 인물인데

왜 어린이 위인전에선 패러데이도 그렇고 톰슨이나 러더퍼드 같이

점잖고 온건한 교육적 과학위인은 ㄹㅇ '듣보' 취급인줄 모르겠군요..

 

2000년전도 그랬고 워낙 '요즘 애들이 버릇이 없어서'

좀 사고뭉치 과학자들 위주로 밀어주는 로리 위인전 카르텔같은게 있는듯하고

로리 위인전은 은근 사고뭉치형 위인들 좋아하고 밀어주는 그런게 있습니다

 

여튼 저도 글쓰기전엔 러더퍼드에 대해 쓸 말이 참 많았는데

다쓰고나니 뭔가 순수하게 정화되는 느낌이 들어서 할말이 많이 없고

참 강원도 깡촌에서 감자캐다가 서울대 수석합격하는 감동실화를 일어낸 인물이 러더퍼드인데

보통 서울대 합격에서 감동실화가 끝나는 놈들이 태반인데

러더퍼드는 더 나아가 노벨상 싹슬이 밑 제자들한테 노벨상 떡밥 한 두개씩 던져줘서

노벨상 떠먹여준 인물이고 ㄹㅇ 이게 과학 찐 카르텔입니다

 

근데 진짜 톰슨이 원자연구부터

'이제 물리학과 화학의 경계는 제거되었다' 라고 말한게 괜히 말한게 아닌게

러더퍼드의 이론들은 화학교과서에 실리는 형편이고

노벨위원회 한림원에서 러더퍼드 화학상 준게 오해도 있는데

사실 괜히 준게 아니고 감동 화학적 실화여서 그런 것도 있고

저도 쓰면서 이게 물리학을 쓰는지 화학을 쓰는지 헷갈릴 정도로

현대로 가며 학문이 통합됨을 느껴졌고

과학도 좀 신기한 그런게 많습니다

 

근데 전 그래도 문과는 문과라 과학을 너무 깊게 이해하려면 머리에 쥐날거 같고

그래도 전 역사가 정실이라 정실에 집중해야한다는 생각인데

나봉쓰들도 과학에 꿈이있다면 , 과학이 정실이라 느껴지는 나봉쓰들은

톰슨이나 러더퍼드 형님의 이론 열심히 계승해서

학맥을 잘 찾아가면 한국도 노벨상 충분히 나올 수 있을거란 생각입니다

 

대한민국의 과학 나봉쓰들 파이팅~~ (뜬금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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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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