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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럴 셔먼호 사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1866년 8월 21일 ~ 9월 4일 동안 조선 평양에서 일어났습니다

당대 조선은 오랜 쇄국정책을 하며 중국과 일본과 달리 서구 세계와의 문을

닫고 살았지만

중국 청나라를 다녀온 학자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서구 문명 문물에 대한

지식들이 조금씩 유입되던 시기였습니다

 

조선 후기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실학자 '박제가'

 

서구 세계는 대항해 시대와 산업혁명으로 세계에 식민지와 시장들을 넓혀가며

큰 부를 축적하고 있었고 지구 정반대의 동아시아 세계에도 개항을 요구하던 시기입니다

 

중국은 1840년 영국과의 아편전쟁 패전후 서구 사회에 개항을 하게 되었고

일본은 1853년 미국 페리제독이 군함을 끌고와 앞바다에서 무력시위를 벌이는

쿠로후네 사건(검은 배 사건 , 검은배=증기기관선=석탄선) 을 일으키자

증기기관선이라는 신문물에

겁먹은 에도막부에 의해 개항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국 청나라의 아편전쟁

 

일본 에도막부 쿠로후네 사건 , 일본인이 그린 증기선 그림으로 서구 증기선에 대한 일본인들의 공포감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슬슬 조선 역시 서구사회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던 시기이고

서양 역시 이익을 얻기위해 조선을 개항시키려 했고

결국 1866년 8월 미국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 호' 가

평양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 수교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1866년 1월 병인박해가 일어나 서양 프랑스 선교사와 천주교인들이

대규모로 처형당한 사건이 있었고

조선 내부의 반외세 감정이 높았던 시기였기에

조선 정부는 거절합니다

 

이에 제너럴 셔먼호는

식량이 떨어졌다고 식량을 달라 요구했고

평양군민들은 제너럴 셔먼호에 소고기 쌀 채소등을 전해주었고

이는 조선 정부가 조선 바다로 표류되거나 온 이양선(서양배) 에 대한 기본적인

정책으로서 수교는 안하지만

먹을것이나 필요한 물품은 전해주고 청나라로 송환시킨다는

기본 방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제너럴 셔먼호는 장마로 불어난 대동강을 더 거슬러 올라와

대포를 쏘며 조선군졸과 백성들을 살상했고

조선 역시 대응포격을 했지만

서양식 포에 비해 거리가 짧아 효과가 없었습니다

 

결국 평양 감사 박규수(실학자 박지원의 손자임)는

중군 이현익을 보내서 물러가라 요구했지만

제너럴 셔먼호 선원들은 이현익을 잡아 감금하고 통상을 요구합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당시 책임자였던 평양감사 박규수

 

이에 평양군민들은 돌팔매질 ,활 , 화승총등 재래식 무기로

제너럴 셔먼호에 대항했고

겁먹은 제너럴 셔먼호 선원이 풀어준 이현익을 구출해냅니다

 

계속 대치하던 제너럴 셔먼호와 평양군민들이었는데

다시 장마가 끝나고 대동강 물이 평상시 수위로 변하자

제너럴 셔먼호는 양각도 서쪽 모래톱에 걸려

옴짝달싹 못했고

그런 상황에서도 제너럴 셔먼호 선원들은 대포를 발생하며

평양 사람 7명을 죽이자

평양 감사 박규수는 작은 수백척 배에 식용유를 싣고

불을 질러 흘려보내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웠고

 

불타는 배안에 있는 제너럴 셔먼호 선원들이 튀어나와

도망쳤지만

분노한 평양부민들이 달려들어 때려죽어

남은 제너럴 셔먼호 생존자들도 전원 사망한 사건입니다

 

<요약>

1.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 평양에 통상을 요구함

 

2.평양 거절

 

3.제너럴 셔먼호가 해적질을 자행함

 

4.마침 제너럴 셔먼호가 모래톱 사이에 껴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분노한 평양부민들에게 배는 불태워지고 승무원 전원 사망

 

1866년은 조선이 서구세력과 충돌한 중요한 해로

당대는 흥선대원군의 집권기였는데

흥선 대원군은 조선 집권자로서 나라 문을 닫는

'쇄국정책' 으로 일관한 인물이었습니다

 

흥선 대원군

 

1866년 1월

흥선 대원군은 천주교를 탄압하는 '병인박해' 를 일으켜

프랑스 선교사 9명을 죽이고 국내 천주교 신도

8천명을 처형시켰고

이에 조선 내부에서는 반서구 감정이 높았던 시기였고

1866년 이 한해는

1월에는 병인박해 ,

8~9월에는 미국 상선과의 제너럴 셔먼호 사건

10~12월에는 프랑스군의 강화도 침공인 병인양요가 일어나는

격동의 한해였고

제너럴 셔먼호 사건와 병인양요는 중국의 아편전쟁같은

국가적 큰 전쟁이었다기 보다 소규모 지역전이었다 할 수 있었고

이에 조선은 이 사건들을 계기로

서양에 크게 당한 중국이나 서양을 일찍부터 잘 알고있었던 일본과 달리

더욱 반외세 감정이 높아지며 더욱 쇄국정책을 일관하는 사태로 이어졌고

통상수교거부정책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또 당대 미국은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얼마 안되

혼란스러운 시기였기에 당장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고

결국 5년 후 1871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때 자국민을 살해한 것에 대한 항의와

다른 서구열강들처럼 조선을 강제개항 시키려는 의도로

강화도를 침공한 '신미양요' 를 일으킵니다

 

신미양요 민족기록화

 

한편 조선 정부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심각하게 인지해

뛰어난 서양 배의 성능에 놀라

가라앉은 제너럴 셔먼호를 건져내서

증기기관을 복제하려 했고 나름 복원을 하기는 했지만

땔감으로 석탄이 아닌 숯을 쓰고 기술이 부족해

흐지부지해 졌습니다

 

제너럴 셔먼호는

한국 역사상 첫 서구 이양선(서양배)와의 무력충돌이었고

서구 기술에 비해 후진적인 조선 기술 등이 점차 조선 내에

인식되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라봉봉>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 라 불린 조선도

점차 동아시아로 오는 서구 열강의 개항 요구에

휩쓸려 가기 시작했다 볼 수 있는 사건입니다

 

여러 창작물에서도 나온 사건같은데

안타깝게도 당시 서구 열강들이 느낀 조선은

서양 배가 동남아시아나 폴리네시아 섬에 상륙해

미개한 원시부락 부족의 습격을 받는 그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싶고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국가적 침략도 아닌

일개 해적 상선의 습격에 큰 위기감이 생긴 조선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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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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