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초기 인물들>
[주몽의 부하들]
[오이 , 마리 , 협보]
[재사 , 무골 , 묵거]
[개국공신 오이 , 마리 , 협보]
[신생국가의 공신들]
[송양]
[부분노]
[유리왕의 왕자들]
[괴유와 마로]
[을두지의 꾀]
[추발소의 지혜]
[호동왕자]
[모본왕을 죽인 두로]
[충신 고복장]
[명림답부의 쿠데타]
[국상 명림답부]
<라봉봉>
[주몽의 부하들]
이전 동명성왕 고주몽의 고구려 건국 이야기는
여러번 쓴 바가 있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 처럼 ,
항상 주인공 위주로 기록되긴 하지만
주인공을 보조해준 조연들이 있었기에
주인공이 힘을 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어린시절부터 역사책을 읽으며 꾸준히 생각했던게
'왜 한번뿐인 인생에서 주인공이 아닌 조연으로 살은 것이지 ?'
이런 생각들이 여럿 있었는데
인간은 모든 것을 다할 수가 없는 것이고
그렇기에 내가 주연이지만 나도 누군가에겐 조연이고
너무 뻔한 말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연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주연들이 빛날 수 있었고
또한 주연들 역시 뛰어난 노력으로
하마터면 그냥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 법한 조연들을 발굴해
빛나게 할 수 있었던 것이고
인간관계나 역사를 무조건 계급적 , 수직적 관계만으로 생각해서도 안되고
신분제가 있었던 고대 역시
인간의 본능이나 사회 나름의 도덕적 규칙이라는게 있었기에
무조건 사회가 계급적으로 돌아갔다고 보는 오류를 범해서도 안됩니다
(역사에선 아무리 계급이 높아도
찐따나 ㅂㅅ왕들은 부하들에게 뚜드려 맞았음)
하여튼 ,
이번 라봉봉 어린이 한국역사 3집이 그런 조연들 위주의 이야기고
옛날 MBC 사극 주몽(2006) 드라마를 봤다거나
고구려 건국시 한번쯤 들어본 오이 , 마리 , 협보 등 여러 조연들이
주몽을 보좌하며 고구려 건국을 도왔습니다
[오이 , 마리 , 협보]
주몽은 부여를 탈출할때
오이 , 마리 , 협보 세 사람과 벗이 되어
부여군의 추격을 피해 압록강 동북방의 엄호수를 건넜고
천제의 손자이자 강의 신 하백의 외손자였던 주몽은
강의 신 하백의 도움으로
강을 건널때 자라와 물고기가 다리를 만들어 주어
주몽 , 오이 , 마리 , 협보 넷은 같이 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재사 , 무골 , 묵거]
강을 건너자마자
주몽일행은 모둔곡에 이르러
또다시 세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한명은 삼베옷을 ,
한명은 장삼(납의 , 승려복 혹은 낡은 헝겁으로 만든 누더기 옷)을 ,
한명은 수초로 만든 옷을 입었고
주몽은 그들에게 이름을 묻자
삼베옷을 입은사람은
재사였고
누더기옷 입은사람은
무골이었고
수초로 만든 옷입은사람은
묵거였습니다
주몽은 그 셋에게 각각 성을 지어주었고
재사는 극씨를 받아 극재사가 됬고
무골은 중실씨를 받아 중실무골이 됬고
묵거는 소실씨를 받아 소실묵거가 됬습니다
참고로 성이 두글자라는 것은
'복성' 이라고 하며
백제가 부여씨를 삼았듯
고구려 역시 백제와 같은 부여계 국가라
이렇게 부여계 국가들이 복성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부여 역시 조선계 국가지만 유목계 국가였고
반대로 순수 조선계 , 농경계 국가인 신라는
성이 박 , 석 , 김씨 등 외자였고
오늘날 우리 한국은
삼국통일한 신라 영향을 받아
복성체계가 아닌 외성체계로 이어졌고
백제 영향을 받은 일본은 오늘날까지 복성체계임)
주몽은 재사 , 무골 , 묵거의 재능을 헤아려
각각 일을 맡기고
그렇게
주몽은 오이 , 마리 , 협보 , 재사 , 무골 , 묵거와
(북방의 7공주 , 고벤져스)
졸본천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습니다
별건 아니지만
보통 주몽의 부하들은
기존 주몽의 벗이었던
오이 , 마리 , 협보와
건국시 얻은 동료였던
재사 , 무골 , 묵거로 나뉘어 보고
줄여서 오마협 , 재무묵이라고도 불립니다
[개국공신 오이 , 마리 , 협보]
주몽은 그렇게 고구려 1대 동명성왕 임금이 되었고
오이는 동명성왕의 명을 받들어
기원전 32년 10월
부분노와 함께 태백산 동남쪽 행인국을 쳐서
그 땅을 빼앗고 성읍으로 삼았고
14년에는 고구려 2대왕 유리왕의 명을 받들어
마리와 함께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진군해
양맥을 정벌해 멸망시키고
한나라 현도군의 고구려현을 습격해 점령했습니다
오이 , 마리가 좀 오이처럼 날렵하고 새끈한 이름이라면
협보는 뭔가 털보나
우직한 곰같고 털이 많을거 같은 느낌의 이름인데
(당연 알 수는 없지만 실제로 고구려 창작작품들에서 그렇게 묘사됨 ㅋㅋ)
의외로 협보는
무관 , 장수로 활약한 오이 , 마리와 달리
문관 , 학자로 활동했던 인물이고
주몽의 아들 유리왕대에도 역시 신하로 활약해
유리왕에게
<협보>정사를 소홀히 하니 바로잡으소서
하고 간하자
분노한 유리왕이 협보를 대보 , 재상직에서 추방하고
정원 가꾸는 일을 맡게 했습니다
한때 개국공신이었던 협보는
실망하여 고구려를 떠나서 남한으로 떠났습니다
[신생국가의 공신들]
이렇게 오이 , 마리 , 협보(오마협)는 유리왕때까지 활약한
동명성왕 주몽의 벗이자 고구려 개국공신들이었고
또다른 세 신하
재무묵 ,
재사 , 무골 , 묵거는 어떻게 됬냐면
딱히 기록이 없어
이후에도 활동한 오마협보다는
재무묵은 기존 토착귀족세력으로 보고 있다고도 하고
제 생각에는 건국초다보니
고구려도 나중엔 대기업화 되지만
초기엔 신생국가 , 좋소기업이었고
주몽이 남하한 지방의 세력가라기 보다는
좀 동네강력한 일진 , 건달들이 주몽에게 붙은게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중국건국자인 한고조 유방의 부하들이
힘깨나 쓰던 무식한 동네 건달들이었고
역사에선 원래
건국초엔 정치 , 중앙집권화보다는
무조건 말위에서
그지역 일짱 , 쎈놈을 가리고 병사들을 이끌고 그러기 때문에
머리 좋고 먹물 많은 인재들보다는
동네 힘깨나 쓰고 술 많이 먹고 이런게 더 중요인재기 때문에
초한지 유방의 부하 번쾌가
동네 개백정이었고 (무식한데 힘은 캐쎔)
삼국지 유비의 부하 장비도
유비 동네 친구나 백정같이 묘사되고 있고
조선건국 태조 이성계의 핵심부하 장수 이지란도
여진족으로서 조선 중기엔 꿈도꾸지 못할 출세였고
국가가 안정되면 과거시험이나 명문가 , 귀족 세력이 중요시되어
이런 동네 건달 인물들이
관료나 장수로 등용되긴 힘들지만
신생국가나 초기때는 당연 건국 왕들도
동네 힘깨나 쓰는 일진정도에 불과하기에
주변 인재풀도 이런 부류의 인간들이 많고
재사 , 무골 , 묵거도
옷차림새가 막 비단옷 , 날개옷 이런 귀족자제들 묘사가 아니라
삼베 , 누더기 , 수초옷 이기에
가난한 동네 일진들인데
아무래도 주몽이 신궁소리 듣던
싸움의 천재 이런 인물에
힘이 ㅈㄴ게 쎄다보니까
동네 산적들이 주몽에게 뻑가서
부하로 받아달라 했었을 확률이 높고
정복국가나 약탈경제 수준이었던
고구려 건국초 분위기상
재무묵은 토착 귀족세력이라기 보단
그지역 산적이나 동네건달들일 확률이 높다 생각됩니다
주몽 원래부하인 오마협이
부여때부터 알던 주몽의 벗 , 친구들이라면
재무묵은
부여를 탈출하고 받아들인
동네 산적들이 아닐까 싶고
세 인물들은 주몽이 부하로 받아들였단거 이외엔 별다른 기록이 없고
유목민족 특성이 있었던 고구려였는데
아무래도 돈많은 세력가 , 시에 능한 명문가보다는
유목민족들은 생존문제특성상 활쏘기 , 말타기 , 소와 말 기르기 등이
더 중요했고 고구려는 남쪽의 백제나 신라와 달리
문보다 무를 중요시하는 유목민족의 특색인 상무적인 기풍이
건국 초부터 멸망때까지 쭉 이어진 나라였고
주몽의 여섯 부하
오마협 , 재무묵은
그렇게 뛰어난 관료나 학자계층이라기 보다는
각각 부여와 부여 남부에서 힘깨나 쓰던 동네 일진들이었을 확률이 높고
주몽 역시 일찐짱 ,
일진두목대장이었다 보면 될 것입니다
(무슨 중2병 이런게 아니라
북방유목민족 특성이 다 그렇고
주몽 , 대조영 , 아골타 , 징기스칸 , 이성계 , 누르하치도
다 힘이 정의인 북방지역에서 가장 힘센 Strongest , 잔트가르 , 일진들이었음)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주몽은 아주 옛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건국왕이기에 능력이 매우뛰어나서
기록이나 주변인재풀 , 인물들이 풍부합니다
[송양]
동명성왕은 고구려를 건국한 이후
이웃나라 비류국의 왕 송양에게
자신은 하늘의 자손이라 말하다 서로 세력을 두고 다투었고
결국 둘은 활쏘기 대결을 했는데
동명성왕의 궁술이 매우 뛰어났기에 송양은 처발렸고
결국 송양은 동명성왕에게 나라를 바치며 항복합니다
동명성왕은 비류국을 다물도라 개칭했고
송양을 그곳 군주로 봉했는데
다물은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 을 뜻하는 말이었고
사극 주몽에서는 이에 작가가 고조선 부흥군을 다물군이라 지었고
역사문학에서도 다물이라는 표현이 간혹 나오기도 합니다
이후 다물후가 된 송양은
다행히 항복후에도 잘풀려서
고구려 2대왕 유리왕에게 딸을 시집보내
송양의 딸은 고구려 왕비가 되었습니다
(부여계 고주몽과 원래 남쪽에 살던
소서노세력 , 송양세력의 결탁으로 고구려 건국이 이뤄짐)
[부분노]
오마협 , 재무묵 , 송양 이외에도
또다른 주몽의 부하가 한명 더 있는데
바로 '부분노' 로서
부분노 역시 뭔가 협보처럼 이름이 쎈캐같아보이고
약간 뭔가 맹렬하고 분노한 곰상의 사내가 생각되는 이름인데
비류국 송양이 항복전에
신생국가 고구려 국왕인 동명성왕을 업신여기자
동명성왕의 신하 부분노는
<부분노>신이 대왕을 위하여 비류의 북을 가져오겠습니다
했고
부분노 등 세 명은 태연하게 비류국에 가서
북을 가져왔습니다
동명성왕 6년 10월에는
부분노는 오이와 함께 왕명을 받들어
태백산 동남쪽 행인국을 쳐서 땅을 빼앗고 성읍으로 삼았고
유리왕대에는
유리왕 10년 선비족이 고구려를 침입해오자
부분노는
<부분노>선비는 험하고 견고한 나라이며
사람들이 용감하지만 어리석으므로 꾀로 굴복시킬 수 있다
며 선비에 거짓 배반자를 보내서
선비족을 유인했고
선비족이 낚여서 오자
산림에 숨어있던 부분노가 진격하여 선비족을 무찔렀습니다
동명성왕 주몽임금은
그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40세의 나이에 눈을 감았습니다
고구려 동명성왕 주몽은 짧은 생애였지만
조선 태조 이성계와 더불어 한국사 최고의
'신궁' 이라 불리는 인물로서
활을 매우 잘 쏘고 용감한 인물이었고
뛰어난 인물밑에 뛰어난 부하있듯이
오이마리협보 , 재사무골묵거 , 부분노 , 송양(?) 등
여러 부하들이 많았고
개국공신인
이들은 동명성왕 사후에도 유리왕대에 활약하며
신생국가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사실 워낙 옛기록이라
부하들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고 별건 아닐 수 있어 보이지만
이후에도 건국자들이 나라를 건국할때
이런 개국공신 , 주요 부하들이 계속해서 나오는 패턴이고
그 패턴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고
이런것들은 소년물 만화 , 무협지 등에도 정형화된 패턴이 되어
아주 강려크한 주인공과 그 주인공을 따르는 재간둥이 , 재기발랄 부하들의
페턴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고
사극에서도 이런 감칠맛 나는 조연들도 매우 중요하고
주몽임금과 여러 부하들의 이야기는
원피스나 나루토마냥
주인공이 계속해서 친구와 동료들을 늘려가며
나라를 건국하는 그런 것의 원조격이라 보면 됩니다
[유리왕의 왕자들]
고구려 다음왕 유리왕대는
별다른 인물은 없고
2대왕 유리왕은
고구려 기틀을 다진
3대왕 대무신왕과
건국왕 1대왕 동명성왕의 사이에 낀 왕으로서
유리왕은 수도를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바꾼 인물이기도 하지만
태자를 두번이나 바꾸고
아들을 자결시키고 신하들과 불화를 일으키는 등
여러 혼란스런 왕이었고
유리왕은 일찍 남쪽 졸본에 가서 왕이 된 아버지와 달리
부여에 어머니와 남아살다 이후 장성한후 아버지가 남긴 증표를 가지고
남하해 아버지가 재혼해서 얻은 아들인
비류와 온조(백제건국) 를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라
왕이 된 뒤에도 기존 토착 졸본세력과의 갈등 ,
당시 DNA 검사가 없던 시대기에 혈연적 정통성 시비문제등에
영조 임금마냥 엄청나게 트라우마가 많았던 임금이라 생각되고
이에 아들들도 막 구박하고 갈구고 신하들에게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던 인물이라 생각되고
그런 아버지 밑에서 겨우 살아남은 무휼이
왕위를 이어
3대왕 대무신왕이 되었고
아버지의 의심에서 살아남은 대무신왕은
동명성왕과 더불어 고구려 초기 명군이었고
역시 동명성왕처럼 부하들도 유명한 편입니다
[괴유와 마로]
고구려 3대왕 대무신왕 무휼은
아버지는 당연 유리왕에
어머니는 다물국왕 송양의 딸 송씨 왕후였어서
부여에서 아버지 없이 따로 자라서
충분히 졸본신하들에게 혈연적 의심을 받을 수 있었던
유리왕과 달리
대무신왕 무휼은 혈연적 정통성도 쭉쭉빵빵했고
게다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장성해서는 호걸의 풍모를 갖추고 지략이 많아서
유리왕도 다른 아들들과 달리 무휼은 다르게 대했습니다
건국초부터 있었던
부여와 고구려세력의 갈등은
결국 대무신왕때 터졌고
대무신왕은 결국 부여를 정벌하러 원정군을 이끌고 친정하는데
대무신왕이 길을 떠나려 할때 키가 9척(2.1m)인 사내가 나타났는데
그 사내는 얼굴이 희고 눈에서 광채가 빛났습니다
그는 대무신왕에게 절을 하고 이르기를
<괴유>저는 북명사람 괴유입니다
듣건대 대왕께서 북쪽으로 부여를 친다하니
제가 따라가서 부여왕의 머리를 베어 오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이에 대무신왕은 기뻐하며 허락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도 와서 이르기를
<마로>저는 적곡사람 마로입니다
긴 창을 들고 길을 인도하게 허락하여 주십시요
이에 대무신왕은 또한 허락했고
부여원정길에 괴유와 마로는 그렇게 대무신왕의 부하가 됬습니다
고구려군과 부여군이 격돌할때
부여군이 진흙수렁에 빠져서 이도저도 못가게 되자
대무신왕은 괴유를 출동시켰고
키 2m 의 거인 괴유가 고함치며 공격하니
부여 1만군졸들이 넘어지고 쓰러져 버틸 수 없었고
이때 괴유가 곧바로 전진해 부여 대소왕을 붙잡아 목을 베었습니다
고구려의 승리로 부여는 멸망했고
괴유는 그렇게 군공을 세웠는데
이후 괴유는 병에 걸렸고
대무신왕이 직접 가서 문병하자
괴유는
<괴유>저는 북명의 미천한 사람으로서
왕의 두터운 은혜를 여러 번 입었습니다
비록 죽더라도 살아서와 같이
은혜에 보답할 것을 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사망했고
대무신왕은 그를 북명산 남쪽에 장사지내고
관리를 시켜 철에따라 제사지내게 했습니다
이렇게 넥슨 온라인게임 '바람의 나라' 게임을 해본분들은
한번쯤 들어본 괴유(괴유서버 , 테스트 서버로 유명ㅋ) 였고
실제로도 대소왕 목을 벤 인물이라
유명한 대무신왕의 부하이고
[을두지의 꾀]
괴유와 마로 이외에도
또다른 대무신왕의 인재가 있었는데
바로 을두지로서
을두지는 우보 , 고구려 재상으로 군사와 국정일을 맡았는데
한나라 요동태수가 고구려를 공격해오자
대무신왕과 고구려 신하들은 모아서 의기를 다졌고
이때 을두지는
<을두지>지금 한나라 군사가 멀리와서 싸우니
그들의 서슬을 당해 낼 수 없습니다
대왕은 성문을 닫고 우리의 군사를 튼튼히 하여
적군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린 후에
나아가 공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에 대무신왕은 옳다싶어 그렇게 했고
위나암성에 들어가 수십일을 수비했지만
한나라군은 포위를 풀지 않았고
다시 대무신왕은 두지에게 (을씨임) 계책을 물었고
을두지는
<을두지>그들은 , 우리가 암석지대에 처하고 있으므로
물있는 샘이 없다고 생각하여
오랫동안 포위하여
우리가 곤궁에 처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못의 잉어를 잡아서
수초로 싸고 또한 약간의 맛좋은 술을 준비하여
한나라 군사에게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에 대무신왕은 을두지의 말을 따랐고
한나라군은 고구려군이 물이 풍부하다 생각코는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습니다
[추발소의 지혜]
그렇게 을두지는 대무신왕의 지혜로웠던 신하였고
이외에도 명군밑에 명신하 있듯이
대무신왕에겐 추발소라는 신하들이 있었는데
대신 구도 , 일구 , 분구 세사람이
비류의 부장으로 있을때 남의 처첩과 소와 말 , 재물을 함부로
빼앗으며 욕심대로 행동했고
이에 백성들이 분개했는데
대무신왕은 동명성왕의 옛 신하들을
함부로 처벌할 수도 없었고
관직에서 쫓아만 내고 추발소를 보냈는데
추발소는 그들과 같은집에 머물었는데
그 셋은 죄인이라 하여 마루에 오르지 못하게 했고
부끄러워진 구도는
<구도>우리들은 소인이라 왕법을 위반하였으니
그 부끄럽고 뉘우치는 심정이야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원컨대 공이 우리들의 죄과를 용서하여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해준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했고
추발소는 그들을 마루에 오르게 하며
<추발소>사람이란 잘못이 없을 수 없으니
잘못하고서 능히 고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
하고는 그 셋을 벗을 삼았고
구도 등은 수치심을 느끼고
다시는 나쁜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무신왕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대무신왕>발소는 위엄이 아닌
지혜로서 악한 사람을 바로잡았으니
유능하다 말할 수 있다
하고는 추발소에게
대실씨라는 성을 주었습니다(대실발소)
[호동왕자]
그렇게 대무신왕은 할아버지 주몽임금처럼
뛰어난 명신하들을 데리고 고구려 초기 기틀을 다진
'명군' 이었는데
그럼에도 유리왕의 아들로서
피는 못속이는지 유리왕이 해명태자를 죽인것처럼
대무신왕은 아들 호동왕자를 죽여버렸고
대무신왕은 아들 호동을 이용해
호동을 시켜 호동과 사랑에 빠진 낙랑국의 낙랑공주를 이용해서
낙랑국을 멸망시켰고
낙랑공주가 고구려의 낙랑국 정복전쟁에서 사망하자
아내를 잃은 호동왕자 역시 삶의 의지를 잃게됬고
둘째왕비의 아들인 호동을 미워한
첫째왕비는 호동이 자신을 간통하려 했다고
대무신왕에게 거짓으로 고했고
이에 삶의 의지가 떨어진 호동은
끝내 자결하여 먼저 간 낙랑공주의 곁으로 갔습니다
결국 포악한 첫째왕비는
둘째왕비의 아들이지만 총명했던 호동왕자를 죽여버렸고
결국 대무신왕의 뒤를 이어 첫째왕비의 아들 해우가 왕위를 잇는데
(해우 나이가 너무 어려 일단 대무신왕 동생이
잠시 왕위를 이어 4대왕 민중왕이 됬고
곧 5대왕 모본왕 해우가 즉위)
대무신왕은 해우를 맏아들임에도
호동왕자 사후에야 태자로 책봉할 정도로
해우를 탐탁치 않아한듯 하고
(아무리 열손가락 다 아픈 자기 아들이어도
태종 이방원에게 속썩이는 패륜의 양녕대군과
총명한 효자 충녕대군 왕자가 있었듯이
자기 아들이어도 또라이 새끼와 착한 새끼가 나뉠 수가 있음)
그만큼 호동왕자의 억울한 죽음은
고구려의 재앙으로 다가오게 되었고
해우는 잠깐 너무어려 삼촌에게 왕위를 줬고
이후에서야 왕위를 이어
고구려 5대왕이 됬는데
고구려 최초의 무능한 폭군이었습니다
[모본왕을 죽인 두로]
2대왕 유리왕도 폭군기질은 있었지만
나름 2대왕으로서 불안정한 신생국가의 기틀을 다지려했고
본인 스스로 정통성 논란에 시달리면서도
국가를 위해 총명한 아들 무휼에게 왕위를 이어주려
여러 노력을 했다 보여지는데
5대왕 모본왕 해우는 완전히 폭군에 무능한 암군이었고
모본왕은 앉을때는 사람을 깔고 앉고
누울때는 사람을 베고 누워서 백성들을 인간베개로 썼고
만약 베개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용서없이 죽였고
신하들 중에 간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쏘았습니다
이에 모본왕의 신하 두로는
모본왕이 자기도 언제 죽일지 몰라 통곡했고
어떤 사람은 울고있는 두로에게
<어떤사람>대장부가 왜 우는가 ?
옛 사람말에
'나를 사랑하면 임금이오
나를 학대하면 원수'
라고 하였다
이제 왕이 포악한 짓을 하여 사람을 죽이니
이는 백성의 원수이다
그대는 왕을 처치하라
했고 두로는 칼을 품고 왕앞으로 갔고
모본왕이 그를 베개로 쓰려고 앉게 했고
두로는 칼을 빼어 모본왕을 죽였습니다
[충신 고복장]
모본왕 이후 고구려 6대왕 태조왕은 고구려 초기 명군인데
7살에 즉위해
무려 93년을 즉위하며 고구려 초기 기반을 닦았고
온화하고 여러업적을 남긴 명군 태조왕인데
그럼에도 태조왕대 신하들의 활약은 별로없고
그나마 고복장이라는 인물이 있었고
태조왕이 무슨 산신령마냥
너무 오래살고 오래재위하자
왕이 너무 안죽으니(?) + 또 정치도 무난해 딱히 흠잡을것도 없어
몰아낼 명분도 없고 찬탈도 안되는 상황이라
슬슬 후계자들이 지쳐서 킹받고 있던 상황이었고
낌새를 눈치챈 우보(재상) 고복장이
태조왕에게 말하기를
<고복장>수성(태조왕의 동생) 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니
청컨대 먼저 그를 처형하소서
이에 태조왕은
<태조왕>내가 이미 늙었고
수성은 나라에 공이 있으니
내가 그에게 왕위를 주려한다
그대는 염려하지 말라 !
고복장은
<고복장>수성은 사람됨이
잔인하고 어질지 못합니다
아마도 오늘 대왕의 왕위를 물려 받는다면
내일은 대왕의 자손을 해칠 것입니다
대왕은 다만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만 알고
죄없는 자손들에게 후환이 미칠 것을 알지 못하니 ,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살피소서
그러나 끝내
태조왕은 동생 고수성에게 왕위를 넘기고
별궁으로 물러났고
엄청나게 오래 살은 태조왕의 동생 고수성 역시
야심이 있긴있었는데
친형 태조왕이 그의 야심을 알고
태조왕에게 양보받아 왕이 됬을때도
어느새 나이 76세였습니다
(차대왕이 친형님 왕위를 빼앗은 인물이라
수양대군처럼 무슨 30~40대 청년정도 되는 야심가같지만
형이 엄청 오래살아서 76세까지 야심을 키움 ;;)
고수성은 그렇게 고구려 7대왕 차대왕이 되었고
차대왕은 이전 고복장이 자신을 험담한 것 때문에
왕이 되자마자 우보 고복장을 죽였습니다
복장은 죽을때 탄식하며 말하길
<고복장>슬프고 원통하다
내가 전일에 선왕의 근신이었으니
어찌 반역을 도모하는 자를 보고도
묵묵히 말을 하지 않으랴
전 왕이 나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 한스럽다
이제 임금이 왕위에 올랐으니
마땅히 새로운 정치와 교화를
백성에게 보여야 할 것인데도
정의에 어긋나게 한 사람의 충신을 죽이려한다
내가 이와같은 무도한 시대에 사느니
차라리 빨리 죽는 것이 낫겠다
고복장이 죽자
사람들이 곧 분노하고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차대왕은 수양대군 세조가 왕이되고 자기 친구인
한명회나 신숙주에게 벼슬을 줬듯이
자기 옛 친구들에게 벼슬을 주었고
결국 고복장의 말대로
차대왕은 자신의 형님 태조대왕의 맏아들이자
조카인 막근을 죽였습니다
막근이 죽자 막근의 동생 막덕 역시
두려워서 스스로 목매어 자결했습니다
[명림답부의 쿠데타]
차대왕은 폭군이었고
사냥할때 흰여우가 나타났는데
차대왕이 무당에게 묻자
무당은 불길하니 덕을 닦으라 조언했고
이에 차대왕은 그 무당을 죽였습니다
보다못한 연나부 조의 명림답부는
백성들의 고통을 보다 못하여
차대왕을 죽였습니다
차대왕이 죽자
태조대왕의 막내동생 백고가 왕위를 이어
고구려 8대왕 신대왕이 되었고
백고는 차대왕이 재위할때
자신에게도 해가 미칠까 두려워
산골짜기로 도망했고
차대왕이 명림답부에게 살해되자
좌보 어지류가 여러 대신들과 논의해
사람을 보내 백고를 모셔오게 했고
백고가 돌아오자
어지류는 무릎을 꿇고 옥새를 바치며
<어지류>선왕이 불행하게 돌아가시고
비록 그 아들이 있으나
나라를 맡길 수 없으며
인심이 인자하신 당신에게 돌아가므로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오니
청컨대 존위에 오르로서
백고는 이에 엎드려 세 번 사양한 뒤 즉위해
신대왕이 되었고
이때 나이 77세였습니다
신대왕 백고는 차대왕의 태자 추안을 용서하고 땅을 주었고
(원래 이전왕에 대해 반정이 성공됬을경우 연좌제로 인해
그 왕의 태자도 죄인임)
반정에 성공한 답부(성이 명림 임)를 국상으로 임명했습니다
[국상 명림답부]
신대왕 8년 겨울 11월
한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해오자
신대왕은 공격과 수비 어떤게 좋을지 물었고
계속 숨으면 또 쳐들어올테니
겁쟁이가 되지 말고 싸우자는 의견이 있었고
명림답부는 이를 반대하며
<명림답부>한나라는 천리길이나 되는 먼 곳에서
군량미를 수송해야 하므로 ,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성밖에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으며 ,
성밖의 들판에 곡식 한 알 , 사람 하나없이 비워놓고 기다리면(청야전술)
그들은 반드시 열흘 혹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림과 피곤으로 인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이 때 우리가 강한 군사로서 육박하면
뜻대로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신대왕은 명림답부의 뜻을 따랐고
한나라 군사들은 과연 굶주리다 퇴각했고
이때 명립답부가 수천 기병으로 추격하여
좌원에서 전투를 벌이니
한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신대왕은 크게 기뻐하며
답부에게 좌원과 절산을 식읍으로 주었습니다
신대왕 15년 가을 9월
국상 명림답부가 죽으니
113세였고
신대왕이 직접가서 애통해 하며 애도를 표하고
7일간 조회를 중지했고
예를 갖추어 질산에 장례를 지내고
20여 호의 묘지기를 두었습니다
3개월 뒤 신대왕 역시
사망하였습니다
그렇게 신대왕대는
명림답부의 시대였다 보여지고
명림답부는 차대왕을 살해하고
신대왕을 왕위에 올리고
신대왕대에 국상(재상)으로서
나라의 군사와 행정을 좌지우지했다 생각됩니다
신대왕 역시 덕이 있어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명림답부를 신하 겸 정치인으로 존중하며
같이 천수를 누리다 사망했다 보여지고
원래 명림답부의 연나부는
왕족 계루부와 과거 왕을 배출한 소노부(비류부) 정도에
밀린 상황이었는데
연나부 출신의 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제거하고
신대왕을 옹립해 국정을 장악하자
연나부는 대대로 왕비를 배출하는 왕비가문으로 급부상합니다
명림답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차대왕을 살해하고 한나라의 침입을 막은 인물로
이전 차대왕이 폭군이긴 했기에
함부로 역적이라하기에도 어려운 인물로서
연개소문의 원조격 인물이 아닐까 싶고
그가 전쟁때 사용한 청야전술은
고구려 멸망때까지 주로 사용한 전술로서
광활한 평야 , 산악이 공존한 고구려는
외적이 쳐들어오면 이렇게 들판 , 밭을 불태우고
험준한 곳에서 버티는 전술을 사용했고
멸망때까지 청야전술을 사용하다
점차 말기엔 청야전술의 부작용으로 국력이 소모되기도 했습니다
<라봉봉>우리는 보통 고구려 , 백제 , 신라 이런 순서로 알고있지만
실제로 삼국사기는 신라계 고려대학자인 김부식이 썼기에
신라 , 고구려 , 백제 순으로 써져있고
그럼에도 가나다 순 혹은 한국인들 정서상 고구려 , 백제 , 신라기에
저역시 이전부터 항상 고구려 , 백제 , 신라 순으로 글을 썼습니다
고대 인물들도 열전 , 왕이 아닌 개개인의 이야기가 존재하긴 하나
극초기 고대는 워낙 자료가 부족해 열전의 내용이 깊거나 길지는 않고
그런 인물이 있었다 정도로 해석하면 됩니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여러 찬탈 , 반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오늘날 유교식으로 정형화된 조선시대식 역사관으로
고구려 , 백제 , 신라를 보아서는 안되고
특히 고구려는 부여처럼 반유목 반농경 체제로 성장한 국가기에
유목민족적 정서관 , 기풍이 강했던 나라라
적장자 중시 , 유교식으로 보기엔 큰 문제가 있고
사실 그런 역사관은 조선중후기때부터 고착화된거지
고려시대는 기풍이 더 자유로웠고
조선도 사실 임진왜란 전까지는 우리가 아는 한국 , 조선이랑 좀 다릅니다
힘이 정의지만 또 그러면서도
개개인간의 자존심도 중요시되고 선은 존재했던
그런식으로 봐야하는게 고구려입니다
고구려인물들을 보면 대체적으로
되게 진취적인 모습이 강한데
신라의 사대주의랑은 거리가 멀었던 나라라
부조리나 강함에 굴복하거나
고개숙이지 않았던게 고구려인의 정신이었고
고구려 초기의 이런 인물 , 신하들의 패턴은
멸망때까지 반복되서
계속해서 찬탈 , 왕보다 강한신하 이런게 멸망때까지도 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보수적이었던 신라나 조선식 사관으로 보면
왕 살해 , 귀족권력이 강함 , 찬탈이 자주 있었던
고구려나 백제 , 고려정치계가 되게 혼란스러워 보일 수 있는데
이시기 역시 나름 룰은 존재했고
다르게 보면 되게 고구려 , 백제 , 고려는
자유분방한 기질이 강했던 나라고
실제로 이런 진취적 나라는 정치가 혼란스러워보여도
신라 , 조선처럼 신분적으로는 계급화 , 고착화되지 않았기에
누구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힘이 강할경우 실력으로 인정받거나
천민에서 최고권력자가 된다거나
귀족가문이 쇼군처럼 왕을 대놓고 좌지우지한다거나
이런 이야기들이 꽤 존재합니다
고구려사는 한국인들에게 특히나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게
중국은 근본부터가 황하강에서 황하강의 범람과 투쟁하며 시작한
농경민족이었기에 말 , 소보다는 진흙 , 벽돌 , 농경 이런쪽과 연관이 깊고
보통 유목민족은 여진족이나 몽골족을 떠올리지만
우리 한국역시 부여 , 고구려에서 나왔기에 근본적으로
유목민족이기도 해서 중국과는 확실히 근본이 달랐고
이후 상업을 버리고 농경에 몰빵한 조선시대를 거치며
한국은 농경민족 이미지가 고착화되지만
그렇기에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면 할 수록
우리도 되게 여진족이나 몽골같은 느낌의 이국적 느낌을 받아
더 신비롭고 흥분되는 것이고
실제로 고구려는 농사가 잘되는 지역인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는
막 국가자체가 되게 상무적이고 거친 무력국가 , 유목국가적 특색이 강했고
주몽의 건국당시 오마협 , 재무묵 여섯부하역시
징기스칸의 사준사구 , 네마리 말과 네마리 개같은 신하들이 생각나고
징기스칸보다 주몽이 더 먼저이니 유목민족적 기풍 역시 한국이 원조고
몽골과 여진이 오히려 고구려 , 발해의 후배였고
한국인들의 통제를 받던 북방 유목민족들이 고구려 , 발해 멸망후
중국대륙으로 눈을 돌려 세계 역사가 바뀐 점도 있다 생각됩니다
우리가
남방 적도지방 , 달콤한 망고에 에메랄드빛 바다속 거북이 ,
엉덩이 춤추는 여인들 , 나무위의 집 , 카누타는 사람들 등
남국에 대한 로망이 있듯이
분명 말과 활 , 투박하게 솥에 삶아지는 거대한 소고기 ,
오랑캐 , 법보다 주먹 , 광활한 벌판과 매서운 추위 , 독한 술
등 북국로망도 분명 있다 생각되고
고구려가 북국 로망 끝판왕개념이라
한국인들에겐 고구려 , 고려가 상당히 인기가 많은 나라이고
고려(고구려)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뛰는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국가인 한국 근본국가였고
위 글처럼 고구려 백성들 역시 되게 당차고 자주적인 인물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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