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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 東宮 을 지은 문무왕>


그렇게 기벌포 전투를 끝으로 신라는 당군을 축출하고

통일 신라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문무왕 17년

3월 봄

강무전 講武殿 (경주 궁궐 안에 있던 전각[궁궐]) 남문에서

문무왕이 활 쏘기를 구경했습니다


처음으로 좌사록관을 설치했습니다


소부리주(옛 백제수도 사비, 오늘날 충청남도 부여군) 에서 흰 매를 바쳤습니다


문무왕 18년

정월(1월) 봄

선부령 船府令 (선박, 항해 관련 업무를 관장하던 부서의 장관,

오늘날 해양수산부 장관)한 명을 두어 선박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게 했습니다


좌우 이방부경 각 1명을 증원했습니다 加左右理方府卿各一員


북원 北原 (오늘날 강원도 원주시)을

소경 小京 (작은 서울, 신라는 왕경 王京 인 경주 이외에

5개의 부수도를 만들었음, 일종의 지방특별시) 으로 하고

대아찬(신라 5등벼슬) 오기로 하여금 그 곳을 수비하게 했습니다


3월

대아찬(신라 5등벼슬) 춘장을 중시 中侍 (오늘날 국무총리)로 임명했습니다


4월 여름

아찬(신라 6등벼슬) 천훈을 무진주 武珍州 (오늘날 전라도 광주광역시) 도독으로 임명했습니다


5월

북원(오늘날 강원도 원주시)에서 이상한 모양의 새를 바쳤는데

깃털에 무늬가 있고

정강이에 털이 나 있었습니다


문무왕 19년

정월(1월) 봄

중시(오늘날 국무총리) 춘장이 병으로 사직하자

서불한 舒弗邯 (=각간, 이벌찬으로 신라 1등벼슬) 천존 天存 을 중시로 임명했습니다


2월

사신을 보내서 탐라국(제주도)을 경략(정복)했습니다


(군사도 아니고 사신을 보내서 탐라국을 신라 영역으로 편입하게 된거 같고

당대 신라 군사력이 매우 강력했기에 가능했던 일 같습니다)


궁궐을 다시 수리했는데 매우 웅장하고 아름다웠습니다


4월 여름

화성 火星 Mars 이 우림 羽林 (황제를 수비하는 군사, 근위병) 을 지키고


(음,, 화성이랑 근위병이랑 무슨상관인지 모르겠으나

우주가 신라를 지켜준다는 당대 동양철학적인 해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6월에

금성이 달에 들어가고

유성이 삼대성을 범하였습니다


8월 가을

금성이 달에 들어갔습니다


각간(=이벌찬, 신라 1등벼슬) 천존이 사망했습니다


동궁 東宮 (신라의 별궁, 대한민국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동궁과 월지를 통틀어 안압지로 유명)을 처음으로 짓고

안팎의 모든 문의 현판 이름을 지었습니다


<동궁 東宮 과 월지 月池 ,보통 통틀어 '안압지 雁鴨池'라 하나

안압지는 조선시대부터 쓰인 말이고

신라인들은 이곳을 월지 月池 라 불렀습니다>


사천왕사가 낙성(완공)되었습니다


남산성을 증축했습니다


<신라 귀족 1>왕께서 요즘 궁궐짓는데 열심이시군


<신라 귀족 2>전쟁이 끝나니 왕권의 위엄을 내보이시려는거 같음


<신라 귀족 1>ㅇㅇ 


(문무왕 당시 신라 왕권은 매우 강력했습니다)


<누이를 보덕국왕에게 시집보낸 문무왕>


문무왕 23년

2월 봄

이찬(신라 2등벼슬) 김군관을 상대등(신라 귀족 수장직)으로 삼았습니다


3월

금은기 金銀器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 및 잡채 雜綵 (가지각색 비단) 백단을

보덕왕(보덕국은 고구려 유민들이 백제땅 전라북도 익산시 지역에 세운 괴뢰국,,)

안승(고구려 왕족출신)에게 주고

드디어는 왕매 王妹 (왕의 누이) 를 그의 아내로 삼고


<김부식>혹은 잡찬(신라 3등벼슬) 김의관의 딸이라 한다


교서를 내려 말하기를


<문무왕>인륜의 근본은 부부의 도리가 먼저 앞서고

왕화 王化 (임금의 덕화 德化 [덕화=덕행으로써 교화]) 의 기본은

계사 繼嗣 (자손이 대를 잇는 것)가 주가 되는 것이다 爲主

(교화의 기초는 자손을 잇는 것이 중요하다)


왕(보덕왕 안승)은 왕비의 자리가 비어

어진 아내의 내조를 얻을 마음이 있을 것이니

내조할 자리를 오래도록 비워두어

가문을 일으킬 도리를 영원히 없애는 것은

옳지 않다


이제 좋은 때 길한 날을 맞이하여 !

옛법을 좇아

나의 매녀(妹女 누이) 로서 짝을 삼으려고 하니

(보덕)왕은 마땅히 마음과 뜻을 돈독히 하여

종사를 받들고 자손을 번성하게 하여


영원히 지반을 풍부하게 하시오

이 어찌 성대한 일이 아니며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랴


라고 했습니다


이에 5월

고구려왕(보덕왕)은 대장군 연루 등으로 하여금 글을 올려 말했습니다


<보덕왕 안승>신 안승은 아뢰나이다


대아찬(신라 5등벼슬) 김관장 金官長 이 와서

교서를 받들어 전하고

동시에 교서를 내리시어

동시에 혈육되는 분을 하읍 下邑 (최하등급 마을, 여기서는 이런 촌구석에,, 로 해석 가능,,)

의 안주인으로 삼게 하시려

4월 15일 이 곳에 도착하였으니 기쁘고 두려운 생각이 교차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생각하건대 요임금은 자기의 딸을 순에게 시집보내고

주나라 왕은 딸을 제나라에 시집보냈으니본래 성덕 聖德 (성스러운 덕)을 드러내어

평범한 인재라도 가리지 아니하심이었사오나


신 臣 (신하) 은 평범한 류(의 사람으)로서

행실과 재능이 보잘 것이 없사온데

다행히 창운 昌運 (탁 트인 좋은 운수, 번영할 운명)을 만나

성화 聖化 (임금의 덕화[덕행으로 교화])를 입게 되고

매양 특수한 은택을 받았으나

그 은혜를 보답할 길이 없었사온데


거듭 천총 天寵 (임금의 총애,사랑[직역하면 하늘의 은총])을 베푸시어

이렇게 인친 姻親 (사돈) 을 강가 降嫁 (왕족의 딸이 신하의 집으로 시집감) 하시고

드디어는 곧 번화하게 경사를 표하시어

화목한 덕을 이루고 길월영신 吉月令辰 (좋은달 좋은날)의 좋은 때에

폐관(나쁜 집 즉 자기 집을 겸손의 의미로 낮춰 이르는 말,

여기서는 '이런 누추한 곳에' 라 해석가능할거 같습니다)으로 오게 하시니

영원히 만나기 어려운 일을 일조 一朝 (하루 아침)에 얻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처음부터 바라던 바는 아니오나

기쁜 마음을 못이겨 이 뜻을 표하나이다


어찌 오직 저의 한두 사람의 부형 父兄 (아버지와 형)만이

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겠습니까 ?

선조 이하 모두를 총애하고 기쁘게 하신 것이옵니다


신은 아직 교지를 받지 못하여

감히 곧 입조하지는 못하오나

지극한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대장군 태대형 연무(고연무)를 보내 글을 바쳐 아룁니다


라고 했습니다


가야군에 금관 소경(작은 수도)을 설치했습니다


<라봉봉>나당전쟁이 끝나고 신라에 평화가 찾아왔고

이제는 전시체제나 전쟁기록이 아닌

평범한 사무,행정적 기록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문무왕은 궁궐을 웅장,화려하게 지으며

왕권의 위엄을 과시하려 했던거 같고

대규모의 토목 사업을 벌이는데

문무왕의 입장에서는 중국을 본따 수도를 리모델링 하려 했던

의도로 이야기 되거나

혹은 문무왕이 전쟁기간동안 마음졸이고 살다가 전쟁이 끝나자

반작용으로 무리한 궁궐공사를 했다고도 이야기됩니다


그리고 문무왕은 옛 백제지역에서

나당전쟁에 (신라편으로) 동원된 보덕왕 안승에

누이를 혼인시켜 우호를 돈독히 하고

사실상 보덕국 자체가 신라에 의해 만들어진

고구려 유민이 백제땅에 세운 되게 말도안되는 나라였지만

고구려 왕족,유민들을 포섭하기 위한

문무왕의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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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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