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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삼미집을 펴낸 아이]

[나귀에 책을 실은 소년]

[실학을 접하다]

[정조 임금의 스승이 되다]

[정조가 총애한 정약용]

[거중기를 발명하다]

[암행어사때 살핀 백성들의 삶]

[실학서적 마과회통]

[정조의 죽음과 신유박해]

[귀양길에서도 백성을 생각한 대실학자]

<라봉봉>

 

다산 정약용 표준영정

 

정약용 초상화

 

[삼미집을 펴낸 아이]

1762년 (영조 38년) 8월 5일 (음력 6월 16일)

경기도 광주군 마현 (오늘날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아들이 태어났습니다

 

<넷째 아들>응애 ~ 응애 ~

 

<사람들>아기 울음소리가 참으로 크군 ~ !

 

이 아이가 훗날 조선시대 근대학문인 '실학'을 연구하고

백성들을 위한 책 '목민심서' 를 펴낸

조선의 대실학자 다산 정약용 선생입니다

 

정약용은 어린시절 천연두를 앓았는데

천연두는 수많은 조선시대 어린이들을 사망에 이르게한

무서운 질병이었기에 사람들은 천연두를

'마마' 라 높여부르며 병이 물러가기를

바래서 '마마' 라고도 불렸고

정약용은 천연두 치료로 이름이 높았던 이헌길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오른쪽 눈섭에

마마 자국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 나뉘어서

'삼미 (셋 삼 , 눈썹 미)' 라고 불렸습니다

 

약용이는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는데

4세에 천자문을 익히고

7세에 한시를 지었으며

10세에는 스스로 지은 시들을 모아

시집을 펴냈습니다

 

<정약용>시집 이름을 뭐로 짓지 ?

 

<정약용의 큰 형 정약현>너는 눈썹이 세개니까

시집 이름을 '삼미집' 으로 지어야지 !

 

그렇게 시집이름은 '삼미집' 이 되었고

정약용은 어린 나이에 시집을 펴냈을 정도로

영특한 아이였습니다

 

[나귀에 책을 실은 소년]

하루는 조선시대에 글잘하는 정치가로 유명한

강산 이서구라는 사람이

시골에 볼일이 있어 길을 가는데

한 소년 즉 어린 약용이가 나귀의 등에 책을 가득 싣고

북한산 쪽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10일 뒤

이서구는 시골에서 볼일을 다 마친 뒤 서울로 올라오는데

어린 약용이가 이번에는 나귀 등에 책을 가득 싣고

산을 내려오고 있어서 문득 궁금해진 이서구는

어린 약용이에게 물었습니다

 

<이서구>얘야 넌 뭐하는 아이니 ?

 

<어린 정약용>저는 이위의 절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이입니다

 

<이서구>며칠전에도 네가 나귀등에 책을 싣고가는 것을

봤는데 너는 책을 읽지도 않고 싣고만 다니는 게냐 ?

 

<어린 정약용>저는 이 책들을 벌써 다 읽었습니다

 

이서구는 어린 소년 정약용의 말에 깜짝놀라

나귀 등에 실린 책들을 보았는데

'강목' 이라는 매우 어려운 책들이었고

어린 소년 정약용이

이 책들을 10일만에 다읽었다 해서 깜짝 놀라

이서구는 이 소년이 거짓말을 하는것이라 생각해

나귀 등의 책 한권을 뽑아서 말해 묻는 말에 대답해보라 했는데

어린 소년 정약용이 척척 대답하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서구>아아 !

열심히 공부해서 이 나라의 큰 일꾼이 되어다오 !

 

이서구는 어린 소년 정약용의 머리를 쓰다듬어

칭찬해주었습니다

 

[실학을 접하다]

14세의 정약용은 결혼을 했는데

매형 이승훈을 만났고

이승훈은 조선 최초의 천주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인물이며

매형 집안은 실학자 성호 이익의 후손들로 실용적인 학풍을

계승하고 있었기에

정약용은 이때부터

실학(실용적인 학문) 사상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정약용>기존 성리학적 유교 사상말고도

실용적인 사상도 중요했군,,

 

이승훈(이승훈 베드로) 초상화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 소장

 

조선 학문의 계보 - 출처 중앙일보

 

[정조 임금의 스승이 되다]

정약용은 22세에 과거시험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고

성균관에서 공부할때 열심히 공부하며

이때부터 당시 조선 정조 임금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정약용은 정조 임금님의 학문 스승이 됬습니다

 

조선 후기의 명군 정조

 

정조는 조선의 유능한 임금이었기에

어질고 젊은 선비들을 모아 학문을 연구하고 강의하게 하며

개혁정책을 펼친 인물이었고

정약용의 뛰어난 지식과 지혜에 감탄했습니다

 

정조의 학문 스승이 된 정약용은

정조를 이해하기 쉽게 가르쳤습니다

정조는 기뻐하며 정약용을 총애하며

여러 신하들에게 정약용을 칭찬했습니다

 

이당시부터 조선에는 천주교가 점차 알려지고 있었고

정약용의 형제 정약전과 정약종도 세례를 받았습니다

23세의 정약용 역시 천주교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정약용은 부지런히 학문에 임하며

천주교 이외에도 서양학문과 서양과학,

천문 ,지지학(땅을 정치적[인문적] , 과학적 등 여러 입장에서 연구하는 학문) 등을 공부했습니다

 

천주교인들은

조상에 대한 제사지내기를 '우상숭배' 라며 거부했고

이런 모습들에

당시 유교사상에 젖은 관리들은

천주교도들이 나라를 혼란에 빠트린다며

천주교를 싫어했습니다

 

조선에서 널리 퍼진 천주교

 

[정조가 총애한 정약용]

이후에도 정약용은 학문에 열중해서

28세에 대과에 2등으로 합격해 벼슬에 나갔고

정약용 28세부터 정조곁에서 일했습니다

정조는 정약용을 크게 신뢰하며 지극하게 총애했는데

그러나 이런 모습들로 인해

시기한 신하들이 생겨났고 그들은

정약용을 모함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약용을 시기하는 신하들>정약용은

임금도 조상도 모르는 천주교를 믿으니

벌해야 됩니다 !!!!!!!!!!!!!!!

 

결국 정조는 정약용이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잠시 11일동안 귀양을 보내 화를 피하게 했습니다

 

[거중기를 발명하다]

이후 정약용이

1792년 홍문관 수찬(책읽고 글쓰고 연구하는 직책) 일때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에게 뒤주에 갇혀 죽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수원에 자주 행차하려

수원화성을 쌓기로했는데

당시에는 사람의 힘이나 소나 말을 이용해 성을 쌓았기 때문에

힘이 많이 들고 성을 쌓다가 백성들이 자주 다치게 되었습니다

이에 정약용은 백성들을 위해 밤새 연구했습니다

 

<정약용>좀더 쉽게 안전하게 성을 쌓을 수가 없을까 ?

 

이때 정약용은 정조가 전해준 서양학문책 '기기도설 을 보고

연구해 이를 바탕으로 서양학문에서 본 도르레의 원리를 이용해

'거중기' 를 만들어냈습니다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 -화성성역의궤 수록

 

복원한 거중기

 

거중기를 이용해 만든 수원화성 ,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입니다

 

수원화성을 쌓은 백성들은 도르레 원리가 있는 거중기를 이용해

수원화성을 적은 인원에 짧은기간에 건설했고

정약용은 효심이 깊어 수원화성 건축에 관심이 많았던

정조의 깊은 신임을 얻게됬습니다

그러나 얼마후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암행어사때 살핀 백성들의 삶]

1794년

32세의 정약용은

임금의 명령을 받고 몰래 전국을 돌아다니며

관리들의 부정부패 , 백성들의 민심을 살피는

암행어사가 되서 조용히 장사꾼 차림을 하고

경기도로 내려갔습니다

 

암행어사가 사용하던 '마패'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당시 관리들은 백성들을 수탈하며 고혈을 쥐어짜내고 있었고

정약용은 이곳에서 고통받는 백성들과 실상들을 보고

'굶주린 백성들' 이라는 이름의 시를 남겼습니다

 

<정약용의 시 '굶주린 백성들' >

마른 목은 길쭉하여 따오기 같고

병든 살갗 주름져 닭살 같구나

팔다리는 아직도 움직일 때련만

걸음을 혼자서 옮기지 못하네

 

관가의 돈 궤짝 남이 볼까 숨기기 바쁜데

우리들 굶주리게 한 것이 바로 그것 아닌가

관가 마구간 살찐 저 말은

다름 아닌 우리들의 피와 살이네

 

슬피 울며 고을 문 나서고 보니

아득하고 캄캄하여 앞이 안보이네

많고 많은 백성들 태어나서는

여위고 말라서 곤궁에 빠졌네

 

갈대처럼 마른 몸 가누지 못해

거리마다 만나느니 유랑민뿐

이고 지고 나섰으나 갈 곳이 없어

어디로 가야 할 지 아득할 뿐이네

 

고통받은 조선시대 백성들의 삶

 

당시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의 횡포에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을 찌를듯 하고 있었고

정약용 민심을 살핀후 다시 조정에 돌아와

암행어사의 임무로 본 실정들을 낱낱이

정조 임금에게 보고했습니다

 

<정조>아아 ! 백성들의 삶이 이러한가 !

 

정약용이 대답했습니다

 

<정약용>가장 심한 것은 환곡이었습니다

관가에서는 봄에 양곡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약간의 이자를 붙여 거두어 들이는 것인데

부패한 관리들이 이 제도를 나쁜게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즉 몇 배의 이자를 붙여 거두어들인 후 

자기들의 배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고통받은 조선 백성들 (=삼정의 문란)

 

이에 화가 난 정조는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와 그 밑의 관리들을

쫓아내거나 멀리 귀양을 보냈는데

이때부터 서용보는 정약용에게 큰 앙심을 품었고

기회가 날때마다 정약용을 모함하게 되었습니다

 

<정약용의 정치 명언>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외침 外侵 (외부의 침략) 이 아니라 

공직자의 부정부패에 의한

민심의 이반 離反 (돌아섬) 이다

 

[실학서적 마과회통]

정약용은 정조가 키운 학자인 '초계문신' 으로서

정조의 곁에서 일하며

배다리 만들기 , 수원화성 건축 ,암행어사 일 등을 했고

뛰어난 그의 실력에도 정약용을 모함하는 신하들이 늘어나자

 

1797년 정조는 다시 정약용을 지방직인

황해도 곡산부사로 내보내서

1799년 까지 약 2년간 봉직하게 했습니다

이때 정약용은 어린시절 자신을 천연두에서 치료해

목숨을 구하게 해준 이헌길의 '마진방' 과

조선 , 외국 서적들을 연구해 '종두법' 내용이 담긴 실학, 과학서적

'마과회통' 서적을 펴냈습니다

 

정약용의 '마과회통' - 출처 : 다산 정약용선생 유물 특별전

 

<정약용의 과학기술 명언>

기술을 천히 여겨서는 안 된다

기술이 인간의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은 대단히 크다

이를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

 

인간과 짐승을 구별하는 것은

인륜을 가진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소유하고 그걸

발전시켜 나가는 데 있다

 

우리는 낙후된 실정을 직시하고

어서 빨리 서양의

근대 과학 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

 

[정조의 죽음과 신유박해]

이후 황해도에서 다시 조정으로 돌아온 정약용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얼마 후인

1800년 6월

정약용 자신을 감싸주고 아껴준

정조 임금이 갑자기 사망했고

정조임금이 갑자기 세상을 뜨자

11세의 어린 임금 순조가 왕이됬습니다

 

당시 순조가 나이가 어려서

순조의 친척들이 정치에 관여했는데

특히 순조의 장인 김조순과

김조순의 안동김씨 가문의 중심으로 나라 정치가 운영됬고

이를 '세도정치' 라고 합니다

 

이때부터 천주교 믿는사람 감옥에가두거나 사형당했고

1801년 천주교인들을 탄압하는 '신유박해' 가 일어났는데

끝가지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던

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조과 매형 이승훈은

사형장에서 죽음을 당해 순교했습니다

 

특히 정약용을 시기하는 무리들은

애초에 정약용을 천주교와 관계없이

이를 빌미로 죽이려 했지만

정약용 역시 둘째형 정약전과 잡혀 고문받다가

정약용과 정약전은 아직 젊어 간신히 고문을 버텨냈고

둘 다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 약속한 후

귀양길에 올랐습니다

 

[귀양길에서도 백성을 생각한 대실학자]

정약용은 결국 우리나라 남쪽 땅끝이라 할 수 있는

전라남도 강진으로 가서 의연하게

무려 18년간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그의 둘째 형 정약전 역시 선비로서 초연함을 잃지 않고

유배기간동안

물고기의 생태를 기록한 '자산어보' 라는 유명 서적을 남겼습니다

 

정약전의 자산어보

 

정약용은 유배생활에서도

나라와 백성들 생각에 열중했습니다

 

정약용이 유배됬던 전라남도 강진에는

만덕산이 있었는데 정약용은 이곳의 초당에서 거주했고

만덕산에는 차나무가 많았고 정약용은 이곳의 차맛에 반해서

자신의 호를 만덕산의 별칭인 다산 茶山 (차나무 산) 이라

정했습니다

차를 사랑한 정약용은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정약용>다 茶 (차) 를 마실 줄 모르는 민족은 망한다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한 전라남도 강진군의 '다산초당'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고증을 거쳐 제작한 다산 정약용 영정

 

정약용은 유배생활을 하며 백성들의 삶과

나라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국정, 제도 , 법규 개혁 책인 경세유표라는 책과

지방 수령이 지켜야할 지침 , 백성들을 사랑하는 정신이 담긴

그의 대표작 '목민심서 牧民心書' 를 지었습니다

 

다산 정약용이 집필한 경세유표, 목민심서 , 흠흠신서

 

목민심서는 계몽서적(계몽 = 이성을 통해 사회 무지 타파와

현실을 계혁 하자는 사상) 으로서

목민은 목축민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목민은 소나 양을 돌보듯 (목자같이) 백성들을

잘 보살펴 안녕한 삶을 누리도록 한다는 뜻이며

심서(마음 책)는 귀양살이를 하느라 목민할 마음은 있었지만

마음으로밖에 할 수 없기에 목민할 마음을 담은

다산 정약용 책이라 볼 수 있습니다

 

목민심서에는 특히나

백성과 나라를 사랑하는 정약용의 애민정신과

깊은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정약용은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이후에도

백성과 나라를 위해 힘썼습니다

 

조선 대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1836년 4월 7일 (음력 2월 22일) 7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날때까지

500여권의 책과 수많은 시를 남겼고

그가 연구한 실학 사상 , 남긴 책들은

후세에 큰 모범이 되어 빛나고 있습니다

 

<정약용의 명언>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은

재물을 절약해 쓰는 데 있고

아껴 쓰는 근본은 검소한 데 있다

 

검소해야 청렴할 수 있고

청렴해야 백성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검소하게 하는 것은

목민관이 된 자가

가장 먼저 힘써야 할 일이다

 

<라봉봉>조선의 대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이야기였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삶과 자신의 책들에서

조선의 개혁을 주장했지만

그는 시기와 질투 , 무시 등에 유배되는 고초를 겪게 되었고

유배 생활동안 백성들을 위한 책까지

남겼음에도 끝내 그의 개혁안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아

이러한 이유들로 조선이 멸망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 , 그는 거중기를 발명한 조선의 대실학자이자

실학을 연구한 대학자였고

특히 그가 남긴 목민심서는

그의 평생의 사상의 중심 서적이라 할 수 있으며

백성을 사랑하는

그의 깊은 애민정신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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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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