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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정승>

[누렁소와 검은소]

[두문불출]

[태종의 신임을 받다]

[성군과 명재상]

[청백리]

[신분을 차별하지 않은 재상]

[김종서를 아낀 황희]

[현실 정치인 황희]

[삽살개와의 눈싸움]

<라봉봉>

 

황희 정승

 

[누렁소와 검은소]

조선의 청렴결백하고 근면검소한

재상중의 재상이었던 황희정승 이야기입니다

 

황희는 고려시대 말기인 공민왕 12년인

1363년 3월 8일 고려 개경에서

고위 관료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황희는 14세에 음서(고위관료 친인척에게 하급 관리직을 주는 제도) 로

관직생활을 시작했고

27세에 과거시험에 합격해서 문과 대과에 급제하고

1390년 성균관 학록(학생들 훈육과 학습활동 독려직) 이 되었습니다

 

고려와 조선의 학문 교육기관 '성균관'

 

어느날 한여름의 황희는 휴가를 얻고 집에 가던 도중

날이 더워 나무그늘에 앉아 쉬었습니다

 

황희는 시원한 그늘에 걸터앉아

저 앞의 밭에서

한 나이 든 농부가 누렁소와 검은소 두마리로 밭을 갈고 쟁기질하는걸 보았습니다

 

김홍도의 그림속 쟁기질하는 누렁소와 검은소

 

농부는 힘겹게 두마리 소를 이끌며 쟁기질하다가

지쳐서 소를 매어두고 황희가 쉬는 그늘로 저벅저벅 왔습니다

 

심심한 황희는

누렁소와 검은소를 가르키며

 

<황희>두 소중 어느 놈이 더 일을 잘합니까 ?

 

이에 늙은 농부는 얼른 대답하지 못하다가

황희의 귀에 소곤거리며 대답했습니다

 

<늙은 농부>누렁이가 더 힘이 세고 일도 잘합니다

 

깜짝 놀란 황희는 농부에게

왜 귓속말로 말하시는지 물었고

 

이에 농부는

 

<늙은 농부>아무리 짐승이라 하더라도

자기 흉보는 소릴 들으면 싫어한답니다 껄껄

 

이에 황희는 놀라서 늙은 농부에게 공손하게 인사을 올리고

길을 떠났습니다

 

<황희>소들도 사람들이 흉보면 기분이 나쁠텐데

하물며 사람이라고 어찌 덜하겠는가 ?

 

황희는 이 농부의 말을

평생의 가르침이라 여기고

자신의 얕은 학문을 반성하며 글공부를 더욱 열심히 했고

이에 주위에는 황희의 깊은 학문을 따라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누렁소와 검은소 이야기

 

[두문불출]

그러나

한창 나라가 망해가던 고려는 결국

1392년 이성계 장군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게 됩니다

 

수많은 고려신하들이 힘이 강한 태조 이성계의 조선건국에 합류했지만

이전부터 이성계에 반발해 이성계에 맞서다

선죽교의 피가 된 고려 충신 정몽주도 있었고

 

나라잃은 고려 충신 72명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조선조정에 참여하지 않고 세상과 접촉을 끊고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기슭 두문동에 숨어 살았습니다

72명의 고려충신에는 젊은 선비 황희도 끼어있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그들의 학문과 능력이 아깝다고 생각하며

관리를 보내서

그들에게 자신을 돕도록 타이르고 또 위협했습니다

 

<조선 관리들>그대들은 두문동에서 나와서

조선에 충성하도록 하시오 !

만일 그러지 않겠다면

여기 불을 놓아 모두 불태워 죽이겠소 !

 

이에 나이든 고려 충신들은 회의를 열어

끝까지 두문동에서 살다 충절을 지키다 죽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고려 노신(늙은 신하들)들은

아직 젊은 선비인 황희는

재능을 썩히기 너무 아깝다 생각해서

두문동에서 내보냈습니다

 

<고려 노신들>우리는 이미 늙었지만

황희 자네는 아직 죽기 이르네

나가서 우리들을 기억해주고

뛰어난 학문을 백성들을 위해 쓰게나

 

결국 황희는 눈물을 흘리며 두문동을 나왔고

두문동은 불태워져 고려 충신들은 모두 타죽었습니다

 

불타는 두문동

 

이로인해 두문동에서 나오지 않는다 ,

속세와 인연을 끊고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다는

'두문불출 杜門不出' 이라는 사자성어가 나오게 되었고

 

황희는 눈물을 흘리며

결국 조선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태종의 신임을 받다]

황희의 성품과 능력을 알고있던 조선 관리 동료들과

조선 왕실은 그를 다시 중히 여겼고

 

태종 6년 1406년 황희는 도승지(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장)가 되어

태종의 큰 신뢰를 받았습니다

 

조선 초기 명군 '태종 이방원'

 

황희는 주변 사람들과 두루 잘 지내며

외교에 크게 뛰어나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큰 활약을 했습니다

 

태종의 신임을 받은 황희는

이조 , 호조 , 예조 , 형조 , 공조판서직을 모두 역임하며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게 됬고

이는 황희의 능력을 깊게 신뢰한 태종임금이

황희에게 조선의 인사와 국정에 관한 모든 직책을 다 맡긴것과 다름없었습니다

 

<태종임금의 말>이 일은 나(태종) 와 경(황희) 만 홀로 알고있으니

만약 누설된다면 경이 아니면 곧 내가 한 짓이다

 

태종임금도 나라를 무척 잘 다스렸지만

그에게는 큰 고민이 하나 있었고

바로 첫째아들인 세자 양녕대군이 온갖 비행과 나쁜짓을 서슴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태종임금과 양녕대군

 

반대로 셋째아들은 충녕대군은 항상 학문을 좋아하고

어질고 올곧았기에

 

태종 임금은 큰 근심이 생겼고

그렇다고 첫째를 왕위에 앉혔다가는 나라가 망할거 같아서

결국 신하들과 의논 후

태종 임금은 양녕대군 대신 왕세자를 충녕대군으로 교체하려했습니다

 

모든 신하들이

매일같이 사고만 치던 양녕대군을 폐세자하고

어진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는 것에 찬성했지만

원칙주의자였던 황희는 그래도 첫째가 왕위를 이어야 한다며

홀로 반발하다 태종의 큰 실망과 노여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당시 황희에게 분노한 태종>내가 죽으면 따라 죽을 사람은 그대라고 생각했거늘..

 

미움을 산 황희는 결국 관직에서 파직되고

지방에 귀양갔습니다

 

귀양가는 황희

 

[성군과 명재상]

1419년 충녕대군이 

태종임금의 선양을 받아

조선 4대 왕 세종대왕이 되었습니다

 

한글을 만드신 한국사의 위인 '세종대왕'

 

세종대왕은 모두의 기대처럼

뛰어나고 어진 정책을 펴서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성군 聖君 , 어질고 덕이 뛰어난 임금이라 불리며 큰 존경을 받았는데

 

상왕이 된 태종임금은

세종대왕에게 그래도 황희가 강직하다며 다시 불러쓰길 권했습니다

 

이에 세종은 황희를 다시 불러들였고

황희는

1426년 우의정이 되었고

1431년 69세때에는 황희는 조선 최고벼슬인

재상 , 영의정이 되었습니다

 

영의정은

 

'일인지하 만인지상 (一人之下 萬人之上)'

 

이라 불리며 왕 바로 아래 모든 사람들 위에 있는

조선 최고의 벼슬이며

큰 학문적 견해와 식견이 있어야 했는데

조선 신하들 중 지혜와 경륜많은 황희가 영의정의 최적임자였습니다

 

조선 마지막 영의정 김홍집의 행차 그림

 

정승(영의정) 이 된 황희는 세종대부터 영의정을 18년이나 지내며

어진 정치를 베풀었고

이전 젊은시절 본 검은소와 누렁소처럼

신하들 사이에서 두루 잘 지내며

임금과 백성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청백리]

어느날 세종대왕은 황희 정승이 사는 모습이 궁금해

평복을 입고 황희의 집에 불쑥 찾아왔습니다

 

황희의 집은 초라한 단칸집에 담도 없었고

세종은 놀라며 방안에 들어갔는데

집 지붕에서는 비가 새고 있었고

살림도구는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청백리 황희정승

 

방바닥은 멍석바닥이었는데

세종대왕은 놀라며

 

<세종대왕>선생의 집 자리는

가려운 등을 긁기 좋겠습니다 ^^

 

라며 농담을 했습니다

 

멍석

 

(근데 세종대왕도 괜히 성군이 아닌게

즉위초부터 경회루 옆에 초가집을 짓고

가난한 백성들의 삶을 살아야겠다며

허름한 초가집에서 살았고

황희보다 더 검소하면 검소했던 인물입니다)

 

황희 정승은 밥을 먹을때도

멍석을 깐 채 누런 보리밥과 된장 ,

고추(고추는 임진왜란 이후 한국에 들어오는데 나물로 보면 됩니다)

만으로 식사를 해서

황희의 집에 방문한 손님들도 놀랐고

이는 도저히 영의정의 삶이 아니었습니다

 

한국 청백리 , 명재상들의 식사인 보리밥과 풋고추 , 퇴계 이황의 식단으로도 유명합니다

 

검소한 황희는 조복(벼슬아치들이 입는 옷) 도 단 한벌뿐이어서

어느날은 세탁을 하기 위해 옷을 빨았는데

갑자기 입궐하라는 세종대왕의 명을 받고

급하게 젖은 옷을 입고 입궐했고

 

대궐 안에서 정승의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자

사실을 안 세종대왕은 옷을 하사했지만

황희는 받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관복 (흥선대원군의 관복 사진)

 

황희의 부인 역시 속옷이 없어서

나들이할때는 시어머니와 옷을 바꿔입었습니다

 

황희의 막내딸이 결혼하려는데

혼수를 마련하지 못할 정도였기에

그 소식을 들은 세종대왕은 혼수를 대신 마련해주기도 했을 정도로

 

매우 검소한 황희는 도저히 영의정 , 정승의 삶이 아니었고

청렴결백한 황희 정승의 삶은

오늘날까지 여러 정치인들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황희 정승은 오랫만에 호조판서였던

아들 황치산의 집에 놀러갔는데

아들집 대문에 이르자 황희는 말없이 발길을 돌렸습니다

 

아들이 허겁지겁 달려오며

 

<황치산>아버지 ! 왜 그냥 발길을 돌리십니까 !

 

이에

황희는 무서운 얼굴로 아들을 꾸짖었습니다

 

<황희>네가 무슨 돈으로 이리 큰집을 지니게 되었느냐 !

깨끗한 관리는 이럴 수 없느니라 !

 

이에 부끄러워진 아들은

그날로 큰집을 버리고 작은집으로 이사갔습니다

 

평생 청렴검소하게 살았던

황희정승은 이후에도 조선신하들의 모범이자

청백리(청렴결백한 관리) 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신분을 차별하지 않은 재상]

황희는 평생동안 검은소와 누렁소 이야기를 잊지 않았고

사람들을 흉보거나 차별하지 않으려 노력했으며

자기집 머슴이나 노비도 하늘이 내린 백성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느날은 자신의 집 노비의 아들딸들이 책읽던 황희정승에게 다가와

수염을 잡아당기고 매달려 놀았고

이에 사람들이 달려와 아이들을 혼내려 했지만

황희는 그저 수염을 쓰다듬으며

 

<황희>허허 ~ 내버려 두게나 ~

 

하고 웃을 뿐이었습니다

 

 

황희는 항상 노비들에게도 허허 웃으며 친절하게 대해

'허허 정승' 이라 불렸고

황희는 신분이 낮더라도 능력이 뛰어나면

관리로 뽑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높은 벼슬을 지닌 관리들 앞에서는

굽히지 않고 옳고 바른 것을 말하는 무서운 명재상이었습니다

 

[김종서를 아낀 황희]

세종대왕때 북방을 개척한

조선의 큰 호랑이 , 대호라 불린 김종서 장군은

두려움없는 용맹한 장군이었지만

유독 황희정승은 무서워했고

 

북방의 호랑이 김종서 장군 흉상 , 전쟁기념관

 

황희정승은 김종서의 올바른 성품을 알고있었기에

자신이 죽으면 김종서가 뒤를 이어 나라를 위해야 할 것을 알고

일부로 김종서에게만 매우 엄격하게 대했습니다

 

처음에 김종서를 눈여겨본 황희는

그의 급한 성품을 고쳐야겠다 생각했고

하루는 북방을 호령하다 조정에 돌아온 김종서의 앞에

황희 정승이 나타났는데

 

김종서는 황희가 들어왔음에도

모르는 척 삐뚫어진 자세로 의자에 걸쳐앉아 있었고

이에 황희는 무서운 목소리로

 

<황희>저놈 의자 다리가 한 쪽이 망가진 모양이니

고쳐줘라

 

라고 말했고

이에 김종서는 깜짝 놀라서

곧바로 똑바로 각잡고 앉았고

이후에도 김종서가 황희에게 음식상을 차려 보내자

황희는 왜 일반관리가 마음대로 월권행위를 하냐며

김종서를 호되게 혼냈습니다

 

<다른 조선 신하들>아니 정승께서는 왜이리

김종서에게만 모질게 구시는 것입니까 ?

 

<황희>종서의 인물됨은 이미 알고 있기에 그러는 것이오

늙은 우리들이 떠나면

종서밖에 재상이 될 인물이 없지 않소 ?

 

[현실 정치인 황희]

성군아래 명재상 있듯이

성군이었던 세종대왕의 큰 신임을 얻은 명재상 황희는

항상 관리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며

올바른 선정을 펼쳤고

 

<황희의 명대사>네가 옳다 , 그래 너도 옳다 . 부인 말도 옳소

 

항상 감수성과 창의력이 풍부했던 세종대왕(=한국사의 위대한 천재) 이

가끔씩 무리수를 둘때마다

엄격한 현실주의자였던 황희 정승은

그 정책들을 조율하며 대국적으로 정책을 처리했습니다

 

황희정승도 현실 정치인으로 비리에 연루되기도 했고

나이가 들어 은퇴하려 세종대왕에게 상소를 자주 올렸음에도

그의 능력을 포기할 수 없는 세종대왕은

죽을때까지 황희 정승을 부려먹었습니다

 

황희의 은퇴러쉬와 세종의 방어전

 

[삽살개와의 눈싸움]

황희 정승은

1449년 87세가 되서야 영의정자리에서 18년만에 물러났습니다

 

항상 강직했던 황희는 눈빛이 매우 강렬해

그가 째려보면 어린아이건 동물이건 다 겁을 먹었고

심지어는 죽어버리는 일도 있었는데

 

은퇴한 황희는 말년에 삽살개와 눈싸움을 했는데

삽살개가 쫄기는 커녕 가만히 있자

 

<황희>나도 갈 때가 되었구나

 

하고 한탄합니다

 

귀신잡는 개로 유명한 한국의 토종견 '삽살개'

 

황희정승은

1552년 90세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황희정승은 청백리의 대명사였고

세종대왕을 도와 조선의 태평성대를 이끈 인물이자

막시작한 조선 기틀을 잡은 재상중 재상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조선 관리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황희 정승에게 제사지내는 황희의 후손들

 

<황희를 평가한 '용재총화'>

아침저녁 식사를 할 때마다 아이들이 모여들면 밥을 덜어주며 ,

떠들썩하게 서로 먹으려고 다투더라도 공은 웃을 따름이었으니 ,

사람들이 모두 그 도량에 탄복하였다.

재상된 지 20년 동안 조정은 공을 의지하고 중히 여겼으니

개국 이후 재상을 논하는 자는 모두 공을 으뜸으로 삼았다

 

<라봉봉>요즘들어 잡스러운 사치스러운 풍조가 유행하는 듯한데

항상 검소하고 굶주려 죽을지언정 더럽게 살려하지 않은

한국의 선비정신 , 얼을 상징하는 인물이 청백리 황희정승이었고

 

부정부패와 뇌물로 썩어있는 한국 정치인들도 각성하고

현명한 조상들의 뜻을 이어 올바른 풍조가 유행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황희정승 역시 여러 논란이 있고

아무래도 세종대왕에게 가려진 인물이기도 하지만

참 괜히 한국 위인전에 들어간 인물이 아니라 생각되고

우리는 참으로 훌륭한 황희정신을 본받아야 한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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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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