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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 대신 보리를 깐 정주영>


그렇게 고향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가출하고

인천에서 막노동을 하던 정주영은

서울에 들어오게 됬고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용산역근처 풍전 엿공장(오리온)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고 합니다


<정주영 회장의 명언 1>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그러다 신당동의 쌀가게 복흥상회에서 점원으로 일했는데

23살에 그는 복흥상회를 인수해 '경일상회'로 이름바꾸고

사업가(옛날말로는 실업가)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복흥상회 인수때에 청년 정주영에게는 상당한 운도 있었는데

더 정확히 말하면 노력, 실력이고

처음에 정주영은 복흥상회 배달원으로 취직했는데

자전거 타는 법을 몰랐던 그는 자전거로 부지런히 연습해서

4일만에 자전거를 타고 쌀한가마니를 배달했고

나중에는 두가마니씩 배달했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은 한가마니)


전심전력하며 열심히 일한 결과 취직 6개월만에

복흥상회 쌀가게 주인으로부터 가게 관리를 맡게 되었고

이후 쌀가게 주인의 아들이 여자에 빠져 가산을 탕진해서

주인은 아들이 아닌 정주영에게 가게를 물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청년 정주영은 23세에 신당동에 쌀가게 경일상회를 열게 됬고

정직한 거래로 신용을 차곡차곡 쌓아서

그의 사업은 날로 번창했습니다

또 트럭을 한대 구입해서 농촌으로 다니며 직접 쌀을 구입하는

도매도 겸했다고 하고 (자동차와의 첫 인연)


근데 얼마후 중일전쟁으로 일제가 쌀배급제를 실시하며

가게가 자연히 문을 닫았고

그냥 주저앉을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의 트럭을 수리해주던

경성모터스에서 일하던 정비사 이을학씨의 권유로

아도 서비스 (아트 서비스 ART SERVICE) 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하게 됩니다

(평소 성실하고 정직한 인품으로 살았기에

망한 상황에서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도 서비스는 개업 20일만에 고리대금업자에게 빌린 돈을

갚을 정도로 되게 잘됬다고 하나

개업 25일만에 종업원이 물을 데우려다

불에 시너를 잘못뿌려 화재가 일어나서 공장이 불타게 됬고

공장만의 문제가 아니라 수리중이었던 트럭 3대와

고가의 차량까지 불태웠다고 합니다

정주영은 다시 고리대금업자를 찾아가 통사정을 했고

평소 정주영의 신용과 사람됨을 신뢰했던 고리대금업자는

다시 돈을 빌려주었고 정주영은 다시 재기에 성공하게 됩니다


그러나 또 1942년 5월 일제의 기업정리령에 의해

공장을 빼앗기다 싶이했고

그는 홀동광산(황해북도)에서 광석 운반일을 하다가

1945년 5월 광복 직전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고 얼마후 소련군은

광산 사람들을 소련군 포로로 잡아갔기ㅔ

극적으로 피랍을 모면했다고 하고


그렇게 조선, 한국은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광복을 맞게 됩니다


광복후 미군정때 그는 현대자동차공업사(현대그룹의 모체)를

설립하고 건설업에 돈이 몰리는 것을 파악한 그는

1947년 5월 현대토건사를 설립해서

건설업에도 진출합니다 (이후 1950년 1월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해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

일제강점기때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할 때에도

다른곳보다 2배이상 빨리 고치고 완벽하게 고쳐냈던

정주영 회장은 건설업에서도 성실함등으로

10년만에 현대를 전국 10대 건설사로 성장시키게 됩니다


1950년 한국전쟁, 6. 25 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간 그는

동생 정인영이 미군사령부 통역장교로 일하던 덕에

미군 관련 사업을 독점하게 됬고

당시 가장 유명한 그의 이야기는

1952년 12월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방한하는데

그의 일정 중에는 부산 대연동에 있는

유엔군 묘지를 방문하는 것이 있었는데


미군은 어지러운 묘지를 단장하려 입찰을 했고

묘지 단장 공사는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한겨울에 푸른 잔디를 깔아달라는 요구가 있었는데


이 때 현대 정주영 사장은 미군 장교에게 찾아가


<정주영>대통령이 지나가면서 보기에 풀만 파랗게

나 있으면 되는거 아닌가 ?


라고 물었고


이에 미군 장교는


<미군장교> Of course  푸르스름하게만 보이면 된다


라고 말했고


<현대 직원들>사장님 이 추운 겨울에 잔디를 어디서 구합니까 ?

무리입니다 !


<정주영>이봐 책임자 해보기나 해봤어 ? 한번 해보자고 !


정주영 사장은 농사짓던 시절 경험을 생각하며

낙동간변의 보리밭에서

새파랗게 자란 보리밭을 사서

(보리는 겨울에 초록색입니다)

30대의 트럭으로 옮겨 심어서

묘지를 단 5일만에 녹색 바다로 만들었습니다


<정주영>보리를 공수해서 잔디처럼 보이게 깔으라 !


(눈속임이라 할 수 도 있고

창의적인 그의 일처리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리>


유엔 사절단은 묘지위의 푸른 식물이

잔디인지 보리인지도 알지 못하고 헌화한 후 돌아갔고

미군은 대만족과 함께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정주영 회장은 공사비 입찰금액의 3배를 받았고

이후부터 미 8군 공사는 모두 젊은 정주영의 것이 됬다고 합니다


이는 현대건설의 전설적 이야기이기도 하고

젊은 사장 정주영의 초기 건설 사업이 급격하게 성장하는데

매우 중요했던 사건이라고 합니다


<신용을 생명처럼 여긴 정주영>


한국전쟁 기간중 미군이 발주한 큰 공사들을 잇따라 따내며

큰 돈을 번 정주영은

1953년 휴전후 미군이 서서히 일본으로 철수하자

미군을 대체할 새로운 발주처를 확보해야 했고

정부가 발주하는 공사에 적극 뛰어들기로 했습니다


1954년 따낸 것이 낙동강 '고령교' 공사였고

이 고령교 공사는 정부가 발주한 공사중 최대 규모이며

대구와 거창을 잇는 다리였는데

공사시한은 24개월이었고

물살도 빨랐고 물가가 착공때 700환이었던 기름단가가

2300환으로 급등했고 업친데 덥친 격으로

1953년 수주한 조폐공사 관련 공사도 7000만환의 적자가 나서

현대 재정은 금박 바닥을 드러냈고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였으며

사무실은 빚쟁이들이 몰려들어서 돈을 갚으려고

아우성이 됬습니다


<정주영의 측근 1>이 공사는 포기해야 합니다 ;;


<정주영의 측근 2>손을 뗍시다,,


<정주영>(도망칠 힘도 없는데,,)

우리 최선을 다해서 다시 한번 해보자


눈앞이 캄캄했던 정주영은 고령교 공사를 어떻게든

완공시키겠다는 결심을 굳혔고

결국 1955년 막대한 적자에 고령교를 완성시킵니다

다시 빚쟁이들이 달려들었고 경쟁업자들은


<현대 경쟁업자들>소학교(초등학교) 밖에 안나온 친구라

공사기간이 2년이나 되는 장기공사를 수주하면서

인플레 계산을 빼고 일괄계약을 한 것이 실수


라고 빈정됬다고 합니다

(개인적 생각으론 사업은 단순히 계산만 한다고 되는게 아니고

직관적인 그런게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정주영은 이런 계산보다 직관력이 뚜렷했던 인물 같습니다)


<정주영의 회고>일생에서 가장 쓴 맛을 안겨준 공사가

고령교 공사였다,

(고령교 공사에서) 기업인 삶에서 가장 큰 교훈을 얻었다


정주영은 고령교 공사로 진 빚을 갚는 데만 20년이 걸렸고

인플레 계산과 장비의 중요성을 깨달은 값비싼 수업이었다고 하고

대신 그는 보통 '전투에서는 졌으나 전쟁에서 승리했다' 라는 비유같이

당장엔 큰 적자를 봤으나 끝까지 그가 생명처럼 여겼던

'신용'을 지켜내는데에 성공해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1957년 한강 인도교 공사당시 대형건설사등에 비해

규모가 훨씬 작았던 현대(현대 올챙이 시절,,)가 공사를 맡게 됬고

현대건설은 이 공사에서 큰 흑자를 내며

5대 건설사로 성장하게 됩니다


<정주영 명언 2>기업인의 신용이라는 건

그 사람의 전부다

사업은 망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인간은 한번 신용을 잃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라봉봉>전국 경제인 연합회(전경련)에서

조사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내 경영인의 기업가 정신을 드러내는 '최고의 한마디'에

정주영 회장의


'이봐 해봤어 ?'


가 1위를 차지했다고 하고

위기의 순간마다 그의 도전자, 숭부사 기질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왔다 할 수 있고

오늘날 그는 '이기는 정주영' 이라고도 이야기 됩니다


한국 경제발전기, 건설사에서 정주영 회장의

행보는 신화적이며 성실함,끈기를 바탕으로

이후에도 상당히 창의적인 행보를 보였고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는 말 같이

꼭 고정관념에만 얽매있지 않았던 그였고

그는 건설업은 즉각적인 결정이 중요하며

시간이 곧 돈이기 때문에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결정에 주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수많은 기초적인 인프라등이

정주영 회장과 현대건설 주도로 깔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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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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