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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강왕 6년

2월 봄 금성이 달을 범했습니다

시중(오늘날 국무총리직) 예겸이 사직하자

이찬(신라 2등벼슬) 민공이 시중이 되었습니다


8월 가을

웅주 熊州 (오늘날 충청남도 공주시) 에서

상서로운(좋은 조짐의) 벼이삭을 바쳐 왔습니다


9월 9일

헌강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월상루 月上樓 (신라시대 누각) 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니

서울(=수도, 서라벌) 에

민가(백성들의 집) 가

즐비(빗살처럼 줄지어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하고

노래 소리가 연이어 들렸습니다

헌강왕이 시중 민공을 돌아 보면서


<헌강왕>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짓는다 하니 과연 그러한가?


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민공이


<민공>저도 일찍이 그렇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이어서


<민공>왕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바람과 비가 순조로워서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며

변경이 안정되고 시정 市井 (사람이 모인 거리, 시장,

사람이 모여사는 곳) 이 즐거워하니

이는 왕의 어진 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헌강왕이 즐거워하며


<헌강왕>이는 그대들의 도움 때문이지

나에게 무슨 덕이 있겠는가 ?


라고 말했습니다


헌강왕 7년

3월 봄

헌강왕이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술기운의 오르자 헌강왕은 거문고를 타고

신하들은 각각 가사를 지어 올리면서

마음껏 즐기다가 헤어졌습니다


<헌강왕>노랫소리 즐겁구나

태평성대 太平聖代 (태평한 세상, 평화) 로다 !


헌강왕 8년

4월 여름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서

황금 3백 냥과

명주 明珠 (고운 빛이 나는 아름다운 구슬, 혹은 진주) 10 개를 바쳤습니다


12월 겨울

고미현 枯彌縣 (오늘날 전라남도 영암군) 여자가

한번에 삼형제를 낳았습니다


헌강왕 9년

2월 봄

헌강왕이 삼랑사 三郞寺 (경상북도 경주시 성건동에 있었던

절) 에 행차하여

문신 文臣 (문관인 신하) 들에게 시 한 수씩을 짓게 했습니다


헌강왕 11년

2월 봄

호랑이가 대궐에 들어 왔습니다


<호랑이>어흥 어흥


<신라 신하들>으악 도망가자 !


3월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돌아왔습니다


<최치원>아아 고국의 냄새 ~

당에서 급제하고 이름알린 이몸

이번엔 조국에 내뜻 펼쳐 봉사하고 싶구나 ~~


<진골귀족 1>치원이 쟤

6두품이잖어 ?


<진골귀족 2>신분도 낮으면서 너무 건방진거 아닌가 ?


10월 겨울

임자일에 금성이 낮에 나타났습니다

.

당에 사신을 보내서 황소의 난을 평정한 것을 축하했습니다


<신라 사신>황소 역당을 토벌한 것을 축하드리는 바입니다


<당나라 인들>말도 마시오 난이 평정됬어도

이미 기운 나라요,,


헌강왕 12년

북진 北鎭 (신라 때 동해안 북쪽 변경지역에 설치한 군사행정구역) 에서


<북진 사람>적국(발해 같습니다) 사람이

진에 들어와서 판자쪽(나무판자 조각) 을

나무에 걸어 놓고 돌아갔습니다


고 상주(임금에게 말씀을 아뢰다) 하면서

그것을 가져다 바쳤습니다

그 판자쪽에는


<판자쪽>보로 寶露國 (한국 동북방에 살던

여진족 소국) 국과 흑수국 黑水國 (흑수말갈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신라국과 화친하고자 한다


는 열 다섯 글자가 씌여 있었습니다


6월 여름

헌강왕이 병으로 편치 못하자

전국의 죄수들을 석방했고

또한 황룡사에서

백고좌 百高座 (사좌좌 [부처님을 모시는 자리] 백 개를 만들어서

고승들을 모셔다 설법하는 큰 법회)

를 열어서 불경을 강론했습니다


7월 5일 가을

헌강왕이 붕어(사망) 했습니다


시호를 헌강 憲康 (법 헌 , 편안 강)이라 하고

보리사 菩提寺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남산 미륵골에 있는 사찰)

동남쪽에 장사지냈습니다


<라봉봉>잠시 헌강왕대 기록에는

민가들이 빽빽히 들어서있으며

백성들은 기왓집에서 살며 숯으로 밥을 짓는다는 기록이 있고

잠시간에 태평성대가 있었던 신라 말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태평성대는 수도인 서라벌 일대와

주요 귀족들에게만

집중된 것으로 보이고

지방 백성들의 삶의 고난은 변함없었다고 핤 수 있는

위태위태한 신라의 마지막 평화적 모습을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름 총명한모습을 보인 인물이지만

23~26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인물로

후삼국 시대에 들어가기 직전

그나마 신라가 왕권이 존재하고,,

국가로서의 모습을 보였던 마지막 모습이라 할 수 있으며

헌강왕 사후 얼마후부터 곧 대혼란기이자 후삼국 시대가 펼치지며 난세,

현실 서바이벌 생존게임, 후삼국 시대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후삼국 시대는 국가는 이미 지방에 영향을 끼치지 못해갔고

백성들도 나라가 아닌 지역 힘있는 강자에 붙어야 했던 시기)


그나마 통일신라 마지막 왕다운 왕이라 하면

헌강왕을 이야기 할 수 있고

이 다음부터는 왕이 왕이 아닌,, 그런 시대가 펼쳐졌고

헌강왕대 신라는 그렇게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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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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