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고려는 이자겸의 난 이후
문벌귀족 사회가 크게 동요했고
고려 인종은 이자겸의 난 진압 이후부터
서경(평양) 출신 인재들을 키웠고
이에 고려 조정의 문벌 귀족들은
개경파와 서경파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개경파 귀족의 대표 주자는 김부식이었고
서경파 귀족의 대표 주자는 묘청, 정지상 등이었습니다
(묘청은 승려출신)
묘청은 서경 출신 승려로 인종에게
개경의 운은 쇠했으므로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
강성한 금나라에 대항하자 주장했습니다
어느날 묘청은 인종을 대동강(서경)에 데려갔는데
대동강에 기름이 둥둥 떠다녀 햇빛에 무지개 빛으로 반짝였고
이에 묘청은 인종에게
좋은 징조라며 수도를 서경으로 옮겨야 한다 주장했습니다
이에 개경파는 묘청을 의심해
잠수부를 시켜 강물속을 뒤지니
강물 안에는 기름떡이 발견됬고
이런 저런 이유로 묘청의 잔꾀들이
개경파 관리들에게 막혀
서경 천도가 실패로 돌아갈 위기에 처하자
묘청은 서경을 수도로 삼고
'대위국' 이라는 나라를 건국하고 연호를 천개로 정하며
황제국임을 선포합니다 (묘청의 난)
묘청은
그렇게 묘청과 서경 사람들이 일어나자
곧바로 김부식을 필두로 개경파 관료들은
묘청의 반란을 진압하려 나섰고
결국 김부식과 고려군의 포위공격에
묘청의 난은 진압되고
묘청의 난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일제 강점기 한국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은
묘청의 난을 상당히 의의있는 사건으로 여기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신채호 선생님의 묘청의 난에 대한 의견>
서경 전투는 곧
낭·불 (낭가와 불가 , 낭가는 한국 고유 사상이고 불가는 불교)
양가 대 유가(유교 , 개경파의 김부식이 대표적 세력)
의 싸움이며
국풍파(민족 , 자주) 대 한학파(중국 , 사대)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쟁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였으므로
조선 역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인 유교 사상에
정복되었으니
이 전쟁을 어찌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묘청의 난 사건을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 즉 천년 역사에서 가장가는 대사건이라
의의있는 사건이라 말씀하셨고
이때부터 민족의 진취적인 사고방식이
보수적 + 속박적으로 변하셨다고 여기신거 같습니다
하여튼 묘청의 난 진압 이후부터는
개경파가 득세하고 서경파는 힘을 잃었고
특히나 묘청의 난을 진압한 개경 문벌귀족 출신 김부식은
고려 최고벼슬 문하시중에 임명되고
엄청난 권세를 가진 권신이 되었습니다
이후 김부식은 나이도 들자 점차 세력의 힘이 약화됬고
김부식의 뛰어난 문필적 재능을 알아본 인종은
김부식에게
'우리의 없어진 역사를 복원'
하는 일을 시켜
고구려와 백제 , 신라의 역사를 하나로 모으는
'삼국사기' 를 집필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인종의 명령 요약>요즘 우리 고려 신하들이
중국 역사는 잘 아는데
정작 우리나라 역사는 잘 모르니 매우 안타깝다
신라와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솥발같이 대립하며
중국과 교류했던 문명국이었음에도 역사가 잘 남아있지 않아
상당히 안타까우니
김부식 그대는 여러 인재들과 역사서를 완성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주어 해와 별처럼 빛나도록 해야 하겠다
이에 늙은 명재상 김부식은 다른 고려 관료들과
고려에 남아있던 역사책들을 모아서
자신의 넋(정신)이나 붓잡는 힘이 있건 없건
혼신의 힘을 다해 한국의 역사를 복원하려 했고
1145년 그의 마지막 걸작 '삼국사기' 50권을 편찬해냅니다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사대주의라는 오명을 썼지만
그는 유교적 합리주의 사상을 가진
현실주의자였다고도 하며
여러 논란도 있지만 오늘날 한국의 삼국시대 역사는
많은 부분이 그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김부식대에 이르러 서경세력도 진압되고
개경문벌귀족들의 사치는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이후에도 왕과 문벌귀족들은
평화로운 치세에 자주 놀러다녔는데
항상 왕과 문벌귀족들의 시중을 드는 사람들은
다름아닌 무신(장수 , 무인) 들이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과거시험의 도입 등 점차 관료제가 확립되면서
문벌귀족들이 일어났고
고려 조정에서도 옛날 삼국시대같이 귀족들이 군사권과 관련있으면
반란이 자주 일어날까봐 일부로 문신(문인)들을 중시하고
무신(무인)들을 그 다음으로 차등대우했습니다
실제 고려 문신(문벌귀족) 들은 저마다
집안이 대대로 고위 귀족 출신이었고
무신(무인) 들은 전쟁에서 활약해 공을 세워 장수가 된
천민이나 평민 출신이 많아 글도 잘 몰랐습니다
또 고려 지휘관들은 대대로 문신에 임명했는데
귀주대첩으로 거란의 침입에서 나라를 구한
강감찬 장군이나 여진정벌을 한 윤관 역시
실제로는 문신 출신이었습니다
김부식 역시 문신 출신으로
지휘관으로 나서 묘청의 난을 진압했고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큰 공을 세우는 등
고려는 건국초부터 여러 문신들이 활약하자
김부식대의 문신들의 권력은 절정에 달했고
무신들도 당시는 별불만 없이 조용히 지냈습니다
그러나 김부식 사후부터 차차 문신들은 구심을 잃어가고
방만에 빠져있었고
고려 의종때에 이르러서는
의종은 문신들과 자주 놀러 나갔는데
이때마다 호위 군사들로 무신들을 데려갔고
무신들은 의종과 문신들의 호위를 한다거나
그들의 앞에서 장기자랑등을 하며 흥을 띄우는 일들을
도맡아 해야했고
이에 점점 무신들의 불만은 쌓여갔습니다
이런 일들은 의종 전인 인종때부터 있었는데
하루는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의례잔치중 무신들을
우습게 여기고는 무신 정중부의 수염이 멋진 것을 보고
촛불로 수염을 지져버렸습니다
이에 정중부는 분노해서 김돈중에게 욕을 하며 때렸는데
그 소식을 들은 김돈중의 아버지 김부식은
오히려 아들을 혼내지 않고 화를 내며
인종에게 정중부를 혼내주라 요청했고
인종은 정중부를 불쌍히 여겨 대충 어찌어찌 넘겼습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김부식은 당대 권신이자
뛰어난 학자였음에도 분명 문제가 있는 인물이었음)
정중부는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고
이후 의종대에 이르러도 문신들은 역시
무신들을 차별하거나 천대했고
어느날 의종은 보현원에 문신들과 같이 놀러가려 했는데
역시 무신들을 호위하게 했고
갑자기 의종은 보현원에 가기전 무신들의 불만을 느끼고
무신들을 격려하기 위해
무신들끼리 즐기고 상을 나눠주려고
한국 고유의 맨손 격투기인 '수박(수박희)' 를 열었고
이에 59세의 고령의 대장군 이소응이 나서 젊은 무신과
수박 경기에 참여했다가 몸이 늙어 오래 버티지 못했고
그러자 갑자기 젊은 문신인 한뢰가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관작도 높았던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리며 조롱하며
모욕했습니다
<한뢰>(찰싹) 대장군이나 되어서 수박경기에도 지는
너같은 놈이 어찌 폐하를 모시고 나라를 지키겠느냐 ?
이에 술에 취한 의종과 문신들은
깔깔되며 박수를 치며 웃었고
분노한 정중부는 큰 소리로 한뢰를 꾸짖었습니다
<정중부>이소응은 무관이나 벼슬이 3품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심한 모욕을 주는 것이냐 !
이에 의종은 한뢰를 질책하지 않고
왜 이런거로 화내냐라는 식으로 한뢰를 비호했고
이에 그것을 지켜보던 무신들은 모두 폭발했고
분노를 삼키다가
이후 의종이 보현원에 도착하자
무신들은 저마다 칼을 뽑아들어
문신들을 학살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뢰역시 의종이 앉는 의자 밑에 숨었지만
끌려잡혀 사망했고
한때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지지며 희롱한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 역시 정중부에 잡혀 몸이 절단되어
저잣거리에 매달렸고 당시 이미 죽어있었던
김부식의 무덤은 파헤쳐져서
부관참시(시체훼손) 당합니다
개경에 입성한 무신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신들>문관의 관을 쓴 놈은
말단 관리라도 모조리 죽여라 !
이에 소수의 문관을 제외하고는 문관(문신)들은
무신들에게 학살당했고
이 사건들을 통틀어 '무신정변' 혹은 '정중부의 난' 이라고
부릅니다 (무신정변 1170년)
이 사건으로 인해 고려 초기부터 고려의 핵심세력이었던
문벌귀족(문신) 들은 힘을 잃었고
무신들은 새로운 고려의 핵심세력으로 떠올라
'무신정권' 혹은 '무인시대' 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지막 문벌귀족의 대표격인
김부식의 시대는
정중부와 무신들의 시대로 변화하였고
권력을 독차지한 정중부와 무신들은
무신정변의 원인을 제공했던 의종을 폐하고
의종의 동생(명종) 을 왕위에 앉혔고
명종은 허수아비 왕이되어
실제 권력은 무신들이 독차지 하고
고려는 무신들의 세상이 되는데
이후에는 무신들도
문벌귀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자겸 혹은 개경파와 서경파)
저마다 권력다툼을 했고
고려국왕(허수아비)은 존재했으나
실제 권력을 쥐고 있던
'무신 권력자' 들이 교체되는
'무신정권 (1170~1270)' 시대가 시작됬고
고려의 무신 권력자들은
일본 쇼군의 원조격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무신정권은 보통 정중부와 같이 일어난 이의방이 1대라고도 하지만
(혹은 정중부 1대 + 이의방)
실질적인 무신정변의 주도는 정중부가 했고
정중부는 한국사에서
'무단정치 武斷政治 (무력에 의한 정치) 정중부'
라고 불리는 인물입니다
<라봉봉>고려 정치는 상당히 격동적이고 역동적인데
조선 정치가 물같다면 고려 정치는 불같은 느낌입니다
먼저 묘청의 난(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은 고려 내에 개경파와 서경파의 대립은
보수파와 진보파의 대립이라고도 이야기 되고 있고
북한에서는 특히 묘청이 자주적 , 주체적 인물이고
김부식은 사대적 , 보수적 인물이라 여기고 있고
특히 묘청은 현재 북한 수도인 평양에 수도를 옮기자 주장했기에
특히나 더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 사건을 매우 중요하게 이야기 한다고도 합니다
하여튼 이 사건으로 인해 문벌귀족내에 큰 피바람이 불었고
이후에도 문벌귀족 세력은 김부식의 삼국사기 집필 등으로
절정기를 찍다가
위에서 쓴 글과 같이
점차 무신들을 차별하다가 무신정권이 일어나
몰락하게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실제 한국 고대 삼국시대에는 잦은 전쟁들로
장군 , 무인들이 우대받았던 시기였지만
그로 인해 반란들도 자주 일어났고
이러한 부작용때문에 고려는 건국초부터
문인들을 대우해 문벌귀족 시대가 시작되는데
결국 이번에는 무신들도 차별에 대한 불만 등
그 부작용 역시 나타났고
결국 조선시대대에 이르러서야
문반(문신)과 무반(무신)은 동등히 대우받아 둘을 통틀어
'양반' 이라 불리게 된 것이고
대신 문치주의 국가 조선이었던 만큼
그럼에도 문신의 대우가 더 높기는 했지만
형식적으로나마 조선대에는 문신과 무신이 동등히 여겨져
이순신 장군 같은 인물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하여튼 무신에 대한 차별로 폭발해 무신정변이 일어났고
고려의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문벌귀족은 무신으로 교체되자
무신 정권기는 반대로 문신들이 차별받았고 (;;)
무신 정권은 무식한 방식의 정치나 문제들도 있기는 했지만
대신 천민이나 평민 출신이 많았던 무신이었던 만큼
이로 인해 경직되지 않는 개방 , 자유로운 분위기가 고려에 흘렀고
일반 백성들도 저마다 무신들처럼 출세해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열망이 생기던 시기기도 해서 왕은 허수아비였고
무신들이 정권을 운영하는 기형적인 방식의 운영체계였음에도
꽤나 길게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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