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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과 40대 기수론>

[김영삼의 세계일주]

[원내총무]

[김영삼 초산테러 사건]

[40대 기수론]

[김영삼과 김대중]

<라봉봉>

 

[김영삼의 세계일주]

그렇게 5.16 군사정변 이후

군복을 벗고 공화당으로 출마한 박정희 후보는

5대 대선에서

이전 민주당 대통령 출신이었던 윤보선 후보를 아슬아슬하게 누르고 당선되며

정통성까지 확보해가고 있었고

 

날개를 단 호랑이

 

형식적으론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모습을 띄고 있었지만

허울뿐이었고

30년간의 군사독재가 시작됩니다

 

대한민국 무신정권 시대였던 제3공화국 , MBC 제3공화국(第三共和國) (1993) The Third Republic

 

박정희 정부 초기 ,

긴박하고 불투명한 정치 분위기가 중압할 무렵 ,

김영삼의 정치활동은 발이 묶여있었는데

그런 김영삼은 미국무성의 초청으로 미국 시찰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처음에 김영삼은

어려운 시기 야당의 정치인으로서 현실도피적 외국여행을 떠나서 되겠냐 자책했지만

차라리 이 기회에 넓은 세계를 둘러보고 견문과 지혜를 넓혀

새로이 조국에 봉사하는 길이 있지 않겠냐는 생각에서

기어코 미국으로 떠나게 됩니다

 

얘들아 내가 미국 상황좀 배워올겡~

 

많은 인사들의 환송을 받으며 김포공항을 떠난 김영삼은 그로부터

120일간 서울 , 일본 , 미국 , 영국 , 프랑스 , 덴마크 , 서독 , 스위스 , 이탈리아 ,

인도 , 타일랜드(태국) , 필리핀 , 홍콩 , 대만 , 일본 , 서울로 가는

120일간의 세계일주를 하게 되었고

 

120일간의 세계일주 , 땡삼이의 모험

 

자유 우방들을 지켜본 김영삼은

남들이 잘 살며 발전해가는 모습을 볼때마다

 

'우리는 왜 못사는가 ?'

 

하며 혼자 울기도 해보고 자책도 해보았고

 

'어떻게 해야 잘 살수 있을까 ?'

 

하고 생각하는 시간도 가지게 됩니다

 

1960년대 한국 마트

 

1960년대 미국 마트

 

짧은 시간동안 여러곳을 다녔기에

겉핥기 관찰이기도 했지만

젊은 정치인 김영삼에겐 큰 감명을 받게되는 충격적 사건이었고

 

당시 김영삼은

자신이 가본 나라들은 모두 잘 살고 있고

인도를 제외하고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가 한개도 없었기에

이렇게 생각합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잘 살며 ,

유럽은 미국에 비해 너무 가난하며 ,

일본은 유럽에 비해 너무 가난하며 ,

한국은 일본에 비해 너무 가난하다'

 

김영삼은 우리나라를 원조하는 미국은

여전히 사상 최고의 번영을 누리지만

언젠간 우리에 대한 원조를 끊으려 하고 있고

그밖의 자유세계 나라들도

모두가 약삭빠른 실리에만 눈이 어두워져 있기에

우리는 누구에게도 기댈 생각을 말고

우리 스스로가 살길을 찾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용기를 잃지 말고

이를 악물고 일어서서 경제를 향상시키고

정치의 능력을 길러 공산주의에 이겨나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미쿡에 가보니 이렇더라구~

 

또한 한국이 웅장한 유산과 넓은 영토가 많은 서구선진국들에 빈약하지만

그럼에도 세계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며 한국의 장점 역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김영삼>어디로 가도 자연조건이 우리나라 만한 곳은 없었다.

맑은 하늘 ,

따뜻한 기온에 땅도 비옥한 편이다.

조물주가 우리에게 가장 좋은 땅을 배정했는데도

땅을 제대로 가꾸지 못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잘못이다.

 

김영삼은 특히 세계 초강대국 미국에 가며

많은 감명과 감사를 느꼈고

에어컨으로 더위와 추위를 모르고

고도의 생활수준을 누리며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려하는

미국시민들에게 감명을 받게 됩니다

 

 

또한 ,

김영삼은 미국 국회를 방문하며

미국 국회의원들이 입법활동이나 정책연구를 할 수 있는

시설과 분위기가 갖추어진것에 감명을 받았고

당시 군대에 의해 좆되버린 한국 국회에 비해

민주적 질서가 잡혀있는 미국 국회에 큰 감명을 받게 됩니다

 

<김영삼의 세계일주 후기>

끝으로 나를 미국으로 초청해준 국무성에 감사드리며

여행중이나 그밖에 여러 모로 친절을 베풀어준

여러 나라의 인사들의 호의에 대해 심심한 사의를 표해 마지않는다.

 

김영삼이 청년정치인 시절 세계일주했다는 이야기는

나무위키에도 안나오는 듣보기록이긴 하지만

 

패권국가 미국답게 이전부터 젊고 패기있는 세계청년들을

각각 미국에 초청하여 미국물좀 맥이고 돌아가게하는 풍습이 있었고

 

(이런건 로마도 그랬고 당나라도 그랬고 미국도 그랬음)

 

김영삼 역시 미국의 압도적 경제 , 정치 , 시민문화에 큰 충격과 감명을 받고

돌아갔다는 일화로 보면 됩니다

 

[원내총무]

1965년 박정희 정부는

한일회담과 월남파병 문제로 야당+시민+학생들과 다투고 있었고

야당은 박정희 정부와 효과적 투쟁을 위해

단일 야당인 민중당을 결성합니다

 

이 시기 36세의 김영삼 의원은 민중당 원내총무로서

 

'야전 총사령관'

 

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김총무는 젊은 나이었지만 계속해서

민중당~신민당을 거치며

5차례나 원내총무로 활동하며

야당의 젊은 기수로 성장해나갑니다

 

1967년

어느새 박정희 정부도 임기가 끝나며

다시금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있었고

 

선거를 얼마 앞두고 벌어진 야권 재통합 작업의 결과

신민당이 출범했고

이전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에게 아슬아슬하게 패배했던

윤보선씨는 다시금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결정됬지만

 

1967년 6대 대선에서는 

시민들이 군인출신 정치가에 대한 우려와 불신때문에

윤보선 후보에게 표를 결집시켜주며

박정희에게 1.5%로 아슬아슬하게 패배했던

5대대선과 달리

 

생각보다 박정희 정부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진행시키며 경제를 잘 살려내고

안정적인 국정수행을 해내자

그전 정권에 대한 성적표로서

6대 대선에서는 윤보선은 10%가 넘는 격차를 보이며

또다시 박정희 후보에게 패배하게 되었고

 

6대대선 포스터

 

위기를 느낀 신민당의 구시대 정치인의 상징이었던

윤보선은 점차 입지가 좁아지기 시작합니다

 

박정희는 결국 재선에 성공했고

같은해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 선거(총선) 이 열리자

김영삼 총무는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됩니다

 

그러나 ,

전국적으로 6.8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가 확산됬고

김영삼 의원 역시 신민당 의원들과 함께

선거 174일만인 11월에야 국회에 등원(출석)하게 됩니다

 

[김영삼 초산테러 사건]

1969년 1월

박정희의 공화당에서는

 

'개헌을 검토중'

 

이라는 발표를 하며

3선개헌의 공작이 다시금 펼쳐지고 있었고

 

이번엔 여권에서도

이전 이승만 대통령의 3선욕심때문의

사사오입 , 하야 , 당이 공중분해되는

악몽을 겪었기 때문에

이번만은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인 공화당내에서도 반발이 심했고

 

근데도 역사에서 교훈을 찾지 못한 박정희는

선배였던 이승만 테크를 그대로 밟게되며

이승만이 그랬던것처럼 여당 , 부하들과도 점차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공화당내의 반대파 의원들을 회유 , 제명시켰고

야당 의원들에게도 압력을 가했는데

 

이에 맞서 신민당은

개헌반대 대책을 위한 의원총회를 열었고

김영삼 총무에게 모든 대책을 위임 ,

 

이에 김영삼은 3선개헌 반대투쟁에 돌입할 것을 선언합니다

 

1969년 여름 3선개헌 반대시위에 나서는 신민당 의원들과 김영삼

 

1969년 6월 20일

3선개헌 반대투쟁을 논의하고 귀가하던 김영삼 총무는

상도동 자택 앞길에서

 

'초산 테러'

 

를 당하게 됩니다

 

김영삼 초산테러 사건

 

이 사건 직후 생명의 위협을 받은 김영삼은

다음날 위축되기는 커녕 화가 폭발해

중앙정보부를 공개비판 ,

박정희 정권과의 정면대결을 선언했고

 

<김영삼>김형욱 정보부장이 배후에서 테러를 조종했다.

테러의 궁극적인 책임은 박정희 대통령한테 있다.

대통령이 3 개헌을 하고 무모한 독재를 계속하려 하면

다른 모든 독재자가 걸었던 비극의 길을 가게 것이다.

나라도 불행해지고 대통령 자신도 불행해질 이런 일을 하지 말도록 경고한다.

 

중앙정보부를 규탄하는 국회본회의 신상발언하는 김영삼

 

초산테러 다음날 김영삼

 

이에 점차 김영삼은 두려움을 모르는

용기와 결단의 지도자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워싱턴 포스트지 및 세계 유력 언론들은

김영삼을 박정희에 맞설 유일한 라이벌이라 보도하며

점차 김영삼은 야당 대표로서 국제사회에도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1969년 6월 28일 3선개헌 저지 시국강연회 연설모습

 

그러나 야당과 시민들의 반대투쟁에도 불구하고

3선개헌안은

9월 14일 새벽 2시 30분 국회의사당 제3별관에서

6분만에 날치기 통과됬고

 

신민당은 점차 무력감과 좌절감에 빠져

박정희를 저지하겠다는 확신과 투지를 잃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미 4선의원이자 

제1야당 원내총무를 5번이나 한 김영삼은

가만히 좌절하고 있을 수 없었고

 

정치인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박정희 장기집권 반대와 정권교체를 갈망하는 국민들에게

민주화의 희망을 보여줘야만 했습니다

 

[40대 기수론]

1969년 11월 김영삼은 빈사상태에 빠진 민주주의를 회생시키기 위해서는

신민당이 구정치인 , 구식정치의 이미지를 벗어야하고

 

(오늘날 보수 대통령 이미지의 박정희와 다르게

당시는 오히려 박정희가 가난한 출생과 남로당 전력등으로

김옥균마냥 혁명가 냄새를 풍기며

농어민 , 진보층을 대변하던 상황이었고

신민당쪽은 도시민 , 중산층 , 먹물든 사람들이 지지하는 정당이었음)

 

당이 젊고 활기찬 지도체제로 변화해야한다는 주장을 내놓았고

향후 정국을 대전환 시키는

 

'40대 기수론'

 

을 제창하게 됩니다

 

1969년 11월 8일 40대 기수론을 선언하는 김영삼 , '우리는 박정희씨의 3선의 길을 트는 개헌을 막는 데 실패했지만 , 3선 자체를 막을 수 있는 기회는 유보하고 있습니다. ... 모든 일에는 결단과 용기가 중요합니다. 결단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김영삼은 당시 갓 40세로서

40대같은 젊은 정치인이 나서야

신선한 매력으로서

젊고 혁명적인 이미지의 박정희를 저지할 수 있다 했고

 

김영삼의 획기적인 40대 기수론 주창은

처음엔 신민당내의 보수파 원로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지만

새로운 변화를 원하던 국민들과 소장파(노장파의 반대 , 젊은 파) 당원들의

자극과 기대를 받았고

 

김영삼의 40대 기수론이

국민적 공감을 불러 일으키자

신민당내 분위기가 급변 ,

곧이어 김대중 의원 등도 김영삼을 따라 대권을 향한 경쟁에 뛰어들게 됩니다

 

40대 기수론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제창한 이유>

첫째 ,

5.16 군사 쿠데타로 등장한 현 집권세력 ,

다시 말해서 71년 총선거에서 싸울 상대 세력(박정희 부하들)이

야당의 평균연령보다 훨씬 젊다는 사실이다.

 

둘째 ,

해방 25 간의 야당의 법통을 이어온 오늘의 야당은

국민적인 지지를 받는 훌륭한 지도자를 내세워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려 했으나 ,

지도자들의 노쇠에서 신체상의 장애로

차례나 평화적 정권 교체라는 민족적 과업이

일보 직전에서 좌절하고 쓰라린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김영삼과 김대중]

김영삼이 주창한대로 판이 깔리기 시작했고

신민당내 대통령 후보 경선이 시작되는데

대의원 885명 중 김영삼 421표 , 김대중 382표 , 무효82표가 나와

김영삼이 최고 득표를 했지만

접전으로서 과반수 확보에는 미달했기에

2차 투표가 실시됬고

 

이때 이철승이 김대중 지지로 돌아서며

김영삼은 김대중에게 역전패를 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김영삼은 당시 쿨하게 김대중에게 패배를 인정했고

대인배 , 대정치가로서 면모를 드러냅니다

 

<김영삼>김대중 씨의 승리는 나의 승리요 ,

나는 김대중 씨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

멀리 무주구천동에 이르기까지 있는 힘을 아끼지 않겠다

 

경선에 승리한 김대중에게 축하인사하는 김영삼

 

김대중과 김영삼

 

당시 당내 경쟁보다는

독재자 박정희에 맞서는게 시급했기에

두 청년의원 김영삼과 김대중은 연합하여

국민들의 지지를 끌어올리는데 주력하고 있었고

당시까지 두 민주화 동지 , 거목들은 훗날 갈라서게 될지는 몰랐고

 

하여튼 ,

당시는 김영삼은 김대중 후보를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열성을 다해 지원유세를 했는데

 

1971년 4월 27일 7대 대선에서

신민당 김대중 후보는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에게

53.2% VS 45.3% 라는 아슬아슬한 득표차로 패배했고

 

당시 선거는 부정선거나 이런저런 말이 많았는데

박정희는 표확보를 위해 나랏돈을 국가예산 1/7 규모로 뿌렸고

매우 불공정한 부정선거기도 했기에

김대중 , 신민당 역시 말이 많았고

 

박정희 역시 자신이 비록 논란이 있지만

그럼에도 오랫동안 국가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하며

이름알려졌고 선거에 돈도 오지게 뿌렸는데

처음 대선에 나선 40대 청년 정치인에게

아슬아슬하게 패배해버리자

자존심이 팍 상해부렸고 

당시 국민들의 박정희에 대한 반발도 극심했기에

이때부터 박정희는 더이상 정상적 선거로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위기감을 느껴 유신독재를 준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여튼 ,

당시 김영삼은 김대중이 박정희에게 패배하자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려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기에

아쉬워합니다

 

<라봉봉>지금 보면 식상한 것들이나 무슨투쟁 이런거 원조가 김영삼이고

그만큼 김영삼은 한국 정치계 1세대로서

한국 정당정치의 틀과 판을 짠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ㅈㄴ게 멋있는 시기가 있는데

김영삼은 바로 이때였고

박정희에 목숨걸고 맞서는 야당정치인의 모습은

한국 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참 대단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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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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