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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부흥운동 인물들>

[고구려의 멸망]

[고구려 부흥운동]

[검모잠과 안승]

[전라도의 고구려]

[고연무와 신라군의 요동공격]

[신라 괴뢰국가 보덕국]

[명예를 지킨 보장왕]

[보덕국

[대조영의 발해건국]

[신라의 불안정한 삼국통일]

[태조왕건의 고려건국]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한 고려]

[고구려계 인물들]

<라봉봉>

 

[고구려의 멸망]

비록 고구려는 멸망했지만

고구려는 그 역사가 900년 , 정사로는 700년인 왕조였고

동아시아 강대국임과 동시에

중국과 대등했던 문명국가였기 때문에

주변 국가들 역시 고구려를 따르며 고구려 천하관이 형성되며

동아시아 질서가 형성된 것이었고

옛날부터 북방 유목민족들에게 신성시된

바람의 나라였습니다

 

고구려 장군총

 

그만큼 수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고구려는

잊을 수 없는 향수같은 나라가 되었고

특유의 자유분방하고 자신넘치는 패기와 천손의식 등으로

오늘날까지도 한국인들의 기억속에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자리잡은 국가기에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구려시대를 그리워했고

 

고구려의 영광을 잇고자 결국 훗날 고려 건국으로 이어지게 되고

오늘날 한국의 영어 명칭이 코리아(KOREA) 로서

고구려가 어원이 되었고

앞으로 통일한국이 이루어지면

북한식 통일방안인 고려연방제 이런 것과 무관하게

민족 통합의 의미로 고려라는 국호가 유력하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그만큼 고구려는 한민족에게 너무나 소중한 이름이고

 

조선과 고려(고구려) 는 그만큼 한민족에게 큰 의미가 있는 이름이라

이후에도 여러 한국인들의 단체 , 국가명칭으로

계속 주구장창 우려먹기가 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멸망후 천년이 넘게도 지난 오늘날에도 이럴 지경인데

당연 고구려가 멸망할 당시

고구려인들의 충격과 비분강개는 말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컸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가 실제 중화민족이 세운 국가가 아니라

선비족이 세운 국가기에 이전 고조선을 멸망시킨 순수중화민족 국가인

한나라와 달리 개방적이고 고구려 유민들에게도 관직문을 열어주었지만

 

그럼에도 당나라는 고구려가 가장 두려운 적수였기에

고구려 민족을 없애기 위해

고구려인들이 자긍심을 가지고 다시 일어날까 두려워

고구려 역사서부터 불태웠고 (ㅠㅠ)

 

중국의 오랜전통 분서갱유

 

고구려 유민들을 삼국지에 나오는 파촉땅 등이나

중국 내륙 깊숙히 대거 이주시키며 고구려 땅을 황폐화 시켰고

이후에도 고구려땅은 당나라 , 중국에게 철저하게 파괴되

고구려 후신인 발해마저도

옛날 고구려만큼의 영광과 문화력을 더이상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고구려 부흥운동]

하지만 ,

그럼에도 고구려인들의 자부심은 매우 강했고

고구려 멸망 후 곧바로 고구려인들은 당나라에 맞서 싸우는

 

'고구려 부흥운동'

 

을 전개하며

다시 고구려인들의 나라를 재건하려 노력합니다

 

고구려 부흥운동 지도

 

당나라군들은 고구려를 점령한 후

고구려 지역의 5부 , 1백 76성 ,

69만여 호(호=집으로서 대충 고대시대 한집에 5명 가족이라면

350만 인구로 추산하고

고구려 인구가 넓은 땅에 비해 생각보다 적은 이유는

북쪽지방이라 곡식생산력이 떨어져서 인구밀도가 낮았음)

 

를 나누어서

9도독부 , 42주 , 1백 현으로 만들고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해서 이들을 통치하게 했고

수많은 고구려 백성들을 당나라로 끌고갔습니다

 

 

이때 ,

고구려 마지막 태왕 보장왕의 서자 고안승이

그래도 신라와 당나라가 같이 연합해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말도 안통하고 민족의식도 없었던 당나라보단 

말도 통하고 같은 조선민족 , 삼한의식을 공유하고 있던 신라가 나았기에

4천여 호(2만명 가량 ?) 를 인솔하고

신라에 투항했습니다

 

[검모잠과 안승]

부흥운동 대표인물인 고구려 장수 검모잠이

고구려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보장왕의 외손자

안승

 

(안승이 보장왕 서자 , 외손 , 연개소문 동생 연정토 아들 등

여러 기록으로 섞여 나오는 인물이고

대충 고구려 왕실과 연개소문 가문 혈통의 후손이 아닐까 보이고

오늘날 역사학계에서도

고구려 멸망후 고구려를 대표하는

고씨 왕통의 적임 인물이라 해석하고 있습니다)

 

을 임금으로 세웠습니다

 

 

 

검모잠은 수림성 출신 사람으로

대형 벼슬을 지내고 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

670년 고구려 유민들을 결합해

당나라 관리와 당나라 승려 법안을 죽이고

패강 남쪽으로 이동했고

 

왕족 안승을 만나서

한성(황해도) 에서 안승을 왕으로 추대했고

 

검모잠은 우군을 만들려 소형 다식 등을 신라 문무왕에게 보내서

문무왕에게 애처롭게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검모잠>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왕대를 잇는 것은

천하의 공의이니

오직 대국(신라) 이 이를 허락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나라 선왕이 도를 잃어 멸망하였으나

이제 저희들이 고구려 귀족 안승을 찾아

임금으로 모시고 ,

신라의 속국이 되어

영원히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이에 문무왕은 안승과 고구려 부흥세력들을

서쪽지방 금마저(전라북도 익산 ;;) 에 살게 해주었습니다

 

신라가 세운 고구려 괴뢰국 보덕국(금마저 지역)

 

[전라도의 고구려]

당시 신라가 백제를 합병한 지 얼마 안된 상황이었기에

일부로 고구려 세력을 백제 핵심지역인 전라북도 익산으로 보낸 것이었고

익산은 백제 마지막 명군 무왕의 세력지로서

백제가 말기에 천도를 계획했을 정도로

백제의 부산격인 백제의 2대 도시였고

 

어짜피 신라 문무왕도 백제를 삼키긴 했지만

당장 백제땅 관리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고구려 유민들을 포용하는 모습등을 보여주며

생색이라도 내기 위해서

생색과 견제와 분열의 일환으로

북방의 고구려 세력을 전혀 연고도 없는 ,

막 합병하고 백제 2대도시라 치안이 불안정한 지역인

금마저(익산) 으로 이주시킨 것이었고

이후 문무왕은 안승을 고구려왕에 책봉해주었습니다

 

안승이 고구려왕에 봉해졌다는 소식을 들은 당고종은

대장군 고간에게 대군을 주어

고구려 부흥세력을 토벌하게 했고

이 시기에 검모잠은 안승과 의견이 대립하다가

안승에게 피살당했고

안승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도주했습니다

 

시기가 뒤죽박죽한데

대충 고구려 부흥운동 스타트를 검모잠이 끊었고

검모잠이 부흥군을 이끌다

왕통이었던 안승을 앉혔는데 내분으로 검모잠이

안승에게 살해당했고

안승은 신라에 도주해서

금마저(익산) 땅을 받고 살았고

 

신라역시 삼국통일 이후 곧바로 당나라의 야욕을 보고

당나라와 전쟁을 준비하게 됬고

신라 역시 당장은 고구려 유민들의 힘이 필요했기에

안승과 고구려 유민들을 회유하며

삼국통일전쟁 마지막 전쟁인 나당전쟁을 준비하며

고구려 유민들에게 당나라군에 맞서싸울 정보 , 지리 등을 받게 됩니다

 

나당전쟁 기록화 , 나당전쟁으로 한데 뭉친 한민족

 

[고연무와 신라군의 요동공격]

이때 신라는 안승의 부하였던

고연무 장군과 연합해 고신연합군을 꾸렸고

 

신라는 백제 ,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가 백제 , 고구려 , 신라를 전부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내자

당나라와 전쟁을 준비하다가

아예 먼저 당나라에게 기습선빵을 날리기로 결심했고

 

(신라가 비굴하고 사대주의 이미지도 있지만

옛날부터 통수전략 오지던 신라였고

괜히 최종승자가 아닌 것처럼 당시 신라도 깡따구 ㅈ됬음)

 

고연무는 신라군과 협력해

670년 3월 신라의 설오유 장군과 함께

압록강 건너 요동 개돈양을 선제공격합니다

 

신라 설오유 장군은 

고구려 토박이 장군인 고연무 장군의 도움을 받아

신라 사찬 설오유 1만 ,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 1만으로

총 2만 고신연합군을 이끌고

비밀리에 북진해 기습적으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격했고

 

신라가 요동의 오골성을 선제공격함으로서

나당전쟁이 시작되게 됩니다

 

고신연합군의 오골성 선제공격

 

여름 4월 4일 고구려신라 연합군이 맞서 싸워 크게 이겨

목베어 죽인 당나라군 숫자를 가히 헤아릴 수 없었고

당나라 군사가 계속 증원되지 고신연합군은 물러나서 성을 지켰습니다

 

신라가 요동을 점유하는건 쉬운 일이 아니었고

몇달간의 일시적 점유였지만

이 공격으로 신라는 초기 나당전쟁 주도권을 가져오고

북쪽에서 시간을 번 동안

671년까지 당나라군이 지키던 백제땅을 대부분 영토화했습니다

 

[신라 괴뢰국가 보덕국]

신라는 670년 3월 설오유 , 고연무부대를 요동으로 보내고

그해 7월 옛 백제땅을 정복해가며

당나라에 본격적으로 맞서기 시작했고

나당전쟁이 시작되게 됩니다

 

670년 8월 1일엔

신라 문무왕은 금마저에 있는 안승을

'고구려 왕' 에 책봉해서

형식적으로나마 옛 백제땅에

고구려 괴뢰국(허수아비 국가 , 외국의 조종을 받는 국가) 을 세워서

신라의 신하국으로 삼았고

이후 안승의 고구려인 집단은

신문왕 시대까지 고구려 관직체계를 그대로 따르며

금마저(익산) 에서 나름대로 자치국가 형식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명예를 지킨 보장왕]

원래같으면 고구려 , 백제 , 신라 삼국이 계속 서로를 물어뜯는 형세였지만

고구려 , 백제의 멸망 이후

당나라의 한국지역 전체지배의 야욕을 드러내자

고구려 , 백제 유민과 신라인들은 삼조선 , 삼한의식을 공유해 뭉치며

대당연합군을 형성하게 되었고

 

과거 고구려 중심지였던 요동지방에서도 고구려부흥운동이 거세지자

당나라는 677년 항복한 고구려 마지막왕 보장왕을

'요동주도독 조선왕' 에 봉하고

안동도호부로 부임하게 해서 고구려 부흥운동을 무마시키려 했습니다

 

비록 보장왕이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에 의해 세워진

꼭두각시 , 허수아비 왕이었지만

고구려 멸망후에도 고구려 마지막 태왕이었다는 자부심이 있었던 보장왕은

요동에 도착한 후 당나라에 대항하고자

고구려 부흥을 위해 비밀리에 말갈과 내통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해서

보장왕은 681년 중국 촉 땅에 유배당한후 머나먼 중국에서 사망했습니다

 

일본 사이타마현 히다카시에 고마신사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 보장왕의 아들 고약광이 유민 1700여 명을 데리고 정착했고

현재까지도 그 후손이 고려촌을 이루며 산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보장왕 아들 약광을 수호신으로 모시는 일본 고마신사

 

실제로 백제 , 고구려 멸망 이후 수많은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이

일본으로 대규모 이주러쉬가 있었습니다

 

보장왕이 죽자 고구려 백성들은

신라로 도주하거나

남은 사람들을 흩어져 말갈과 돌궐로 갔고

마침내 고씨의 왕통이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보장왕은

오늘날 연개소문에 세워진 허수아비 왕이라는 한계에도

멸망후 마지막 고구려 태왕이라는 자존심을 지킨 인물이라 이야기 되고 있고

고구려 고씨 왕통은 끊어졌지만

당나라에 항복한 연개소문 후손들이 당대 영화를 누릴지언정 혈통이 끊어진 것과 달리

실패할지라도 한국에서 자주성을 지키려했기에

오늘날에도 보장왕의 후손들은 살아남아

대한민국(횡성 고씨)과 일본(고마씨)에서 그 혈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동명성왕 64대손 횡성고씨 고준환(왼쪽)씨와 보장왕 61대손 일본의 고마 후미야스

 

[보덕국]

한편 신라에 투항해 금마저 땅에 정착한 안승은

674년 문무왕에게 '보덕국왕' 에 봉해졌는데

졸지에 고구려왕에서 신라에 만들어진

전라도 고구려인들의 괴뢰국 '보덕국' 이라는 괴뢰국가 왕이 되었고

 

보덕국왕은 왕인데 신라왕의 지배를 받는 왕이었고

나름 안승은 이후 10여년 간 보덕국을 통치하며

태대형 등의 고구려 관직체계를 사용했고

일본에 고려의 이름으로 사신을 보내는 등 나름 통치를 했습니다

 

신라가 안승에게 전라도에서 국가세우기를 허락한 것은

백제 견제 목적이었고

676년 나당전쟁이 신라의 승리로 끝나고

한반도 정세가 점차 안정되자 문무왕의 뒤를 이은 신라 신문왕은

고안승을 불러들여 김씨 성을 주고 진골귀족으로 삼아서

경주의 큰 저택에 머물게 했고

익산에 있는 보덕국과 격리시켰고

 

684년 보덕국에서 안승의 조카뻘 친족이었던 장군 대문이

안승이 신라 중앙귀족에 편입된 것을 불만을 품고

신라조정 상대로 모반하다 대문은 처형되고

고구려 유민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보덕국의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군에게 진압됬고

신라의 여러 목적으로 만들어진 괴뢰국가 보덕국은

해체되고 신라는 보덕국 자리에 금마군을 설치해 신라 행정구역으로 편입시킵니다

 

한편 안승의 형 인승은 횡성에 살기 시작하며

횡성고씨의 시조가 됬고

횡성고씨들은 고구려 왕족 후손을 자처한다 합니다

 

[대조영의 발해건국]

이렇게 고구려 부흥운동은 안승하게 아니 안습하게 끝나게 되었고

단지 백제는 부흥운동에 실패한 것과 달리

고구려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라가 부활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발해였습니다

 

고구려 후신 발해

 

발해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한국 마지막 요동을 점유한 북방 민족국가로서

우리 조영이 형(대조영)이 세웠고

자세한 이야기는 이후 발해사에서 따로 다루겠습니다

 

발해 1대왕 고왕 대조영

 

[신라의 불안정한 삼국통일]

한민족 최초의 국가였던 고조선인들의 문화와 문명은

만주와 한반도 구석구석 퍼져서

멸망 이후에도 삼한 백성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고구려의 조선고토수복의식 , 광개토대왕때 삼국통일의식으로 자라났듯이

 

고구려가 멸망한 후 한민족에게 그 충격은 너무나도 컸고

멸망 이후에도 실패한 검모잠과 고안승 뿐만 아닌

걸걸중상 , 걸사비우 , 대조영 같은 새로운 영웅들이 등장해

발해를 건국하게 되어 고구려의 영광을 이을 수 있었고

 

통일신라때도 신라인들은 오랜 통수기질때문에

백제 , 고구려 지역 백성들을 전부 통합 , 포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골품제를 강화시키며 더욱더 차별을 하며

백제 , 고구려 지역 유민들에게

신라인이 아닌 백제인 , 고구려인이라는 자긍심을 더욱 심어주었고

 

통일신라 행정구역 , 옛백제 웅주전주무주와 옛고구려 한주백성들은 끝까지 신라에 동화되지 않았음

 

결국 신라 북방 패서지역 사람들은

멸망때까지도 계속해서 고구려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전라도 지역 역시 마찬가지라

신라가 말기 어지러워지자 곧바로

북방(개성)과 서방(전라도)지역은

 

북방 궁예의 후고구려 ,

서방 견훤의 후백제 건국으로 이어지며 후삼국시대가 열리게 됬고

결국 한국 위인 고려 건국자 태조왕건의 등장으로

고구려의 뒤를 이은 민족국가 고려의 등장으로

오랜 혼란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후삼국 시대 지도

 

[태조왕건의 고려건국]

신라가 삼국을 육체적으로 통합했지만

정신적으로는 통합하지 못해

백성들이 통일 이후에도 저마다 백제 , 고구려 , 신라 백성이라며

따로 놀던 상황에서

 

태조왕건이 고구려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고려를 건국하며

삼국 백성들은 고려백성이라는 이름아래로

완전한 민족통합을 이뤄내게 됬고

 

태조왕건 어진과 동상

 

태조왕건의 고려건국

 

광개토대왕이 꿈꾸던 한민족 ,

연개소문이 꿈꾸던 조선 세나라의 제휴는

후삼국시대 영웅이자 한국 위인인

고려 태조왕건에 의해 완전한 민족통합이 이끌어내졌고

그 시기 발해 역시 멸망하며 고려 태조왕건에게 투항했고

고려 태조왕건은 북방의 발해역시 그대로 끌어안으며

옛날 고구려의 영광이 고려 왕건때 와서야 그대로 계승되게 됩니다

 

제가 한민족 역사지도자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을 뽑자면

훈민정음 창제라는 넘사벽의 업적을 남긴 천재임금 세종대왕이나

순장을 폐지한 신라 지증왕을 제일로 뽑지만

민족적으로 볼땐 광개토대왕이나 태조왕건이 포용력이 엄청나고

우리민족끼리 전략을 잘 시전해서

부동산시장에서 땅을 뻥튀기 수준으로 불린 성공한 정말 대단한 인물이고

 

(무슨 포용이 누구나 할 수 있어 보여도

지 맘에 안들면 항복한 상대를 금방 마음바꾸고

통수치고 단물만 뽑아먹고 숙청하는게 허다한게 역사였고

진짜 당대 사람들도 ㅂㅅ들도 아니고

충분히 광개토대왕과 태조왕건의 인품과 뒷통수 없는 성향으로

항복하면 무조건 살려줌과 명예와 가문의 종속보장을 신뢰할 수 있었기에

마음깊이 머리를 조아리고 고구려 , 고려 천하에 편입된 것임)

 

특히 태조왕건은 제 조상이기도 하지만(언양김씨)

인덕이 강해서 적국 대표였던 견훤까지 끌어안고

상보(아버지 같은 신하) 벼슬까지 주며

죽을때까지 안위를 보장해주었고

항복한 천년제국 신라 경순왕에게 큰 예우를 내리며

신라계들이 평화롭계 고려신하계로 편입됬고

통일후 숙청이나 뒤통수 치지도 않고 진정한 민족통합을 이룩했고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는 고려 태조왕건과 뒤에 있는 고려상보 견훤 , KBS 사극 태조왕건

 

덕분에 고려는 땅덩어리만 크게 회복하고 문화력이 부족해

고구려의 문화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내부적으로 말갈한테 먹히고

외부적으로 거란에 빠르게 흡수되 부실하게 무너진 발해와 달리

 

고려는

옛 백제땅의 농경기술과 문화기술력 ,

신라의 정치 외교력까지 전부 흡수할 수 있었고

고려인들은 고구려땅에서 일어났다는 개경인들의 자부심과 더불어

요동에서 일어난 발해 유민들까지 흡수하게 되며

고구려 특유의 호전적 , 정복적 유목민족성향도 갖추었고

고려라는 깃발아래 진정하고 완전한 민족통합을 이뤄냈다는 점이

한국사에서 특히 의의가 있고

 

오늘날에도 특히 민족주의 학계에서 신라 , 조선에 대한 까 , 호불호들이 많은 현실에

고구려와 고려는 민족주의 학계나 일반적 학계에서도 딱히 불호가 없다는 점에

고려가 특히 대단한 나라였고

한민족의 성향에 가장 적합한 국가가 아니었을까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태조왕건은

그시절 수준에선 굉장히 평화적 통일을 이뤄낸

너무 대단한 인물이고

이 인물이 등장하지 않았으면

한국은 후삼국시대를 짧게 끝내지 못하고 길게 이어가며

삼국시대가 재부활해서 또다시 수백년간 분열하다

중국의 견제책으로 무너졌을 수도 있고

 

역시 한국위인인 대조영이 발해를 세웠지만

남쪽에 통일신라가 강성해서 발해와 신라는 계속 서로 경쟁했기에

결국 진정한 민족통일이자

고구려의 부흥을 최종적으로 이끌어 낸 인물은 태조 왕건이기에

참 대단한 인물이고 

 

창조적이고 천재적 지도자를 뽑으라면 당연 세종대왕을 뽑겠으나

인간 세종대왕도 실제역사에선 아버지 그대로 닮아

좀 현실정치인 구석으로 잔혹한 면도 없지 않았고

진짜 동화속 덕성있는 이상적 임금님이나

국부개념의 인물을 뽑으라면 태조왕건이 참 1순위의 인물이라는 생각이고

오늘날 남북분단이 된 후 어느새 분단세대들이 다 노령으로 사망해가며

통일이란 말도 잊어버리고 있는 이 현실에서

우리 한민족에게 필요한 건

바로 고구려인들의 부흥정신과

태조왕건의 리더십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한 고려]

고구려 , 고구려 , 고구려 !!!(빼애액)

한민족이 가장 가슴뛰는 이름의 전설이 된 국가였고

이후에도 수많은 국가들이 고구려를 계승한다 했지만

태조왕건이 건국한 고려야 말로

고구려의 정신을 가장 정통으로 계승한 국가였고

고려를 건국한 태조왕건은 북진정책을 국가정책으로 표방하며

옛 고구려 땅을 수복하는 것을 국시로 정하였고

고려는 고구려의 고구려 천하관을 그대로 계승해

'해동천하관' 을 열어서 만주 , 한반도를 하나의 영역으로 묶었고

오늘날 연구결과 고려가 한국사 교과서 나오는 한반도 이남의 영토와 달리

실제로 만주일대를 주기적으로 경영했다는 이야기도

실제 학계에서 틈틈히 있는 형편입니다

 

고구려 천하관 영역

 

고려 해동천하관

 

그리고 결국 고려는 멸망 전 공민왕시기 잠깐 요동을 수복하기도 했고

 

원명교체기를 이용해 잠깐 했던 고려 공민왕의 요동수복

 

멸망도 결국 요동을 수복하려 요동정벌군을 꾸리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멸망했기에

시작부터 끝까지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고

고려는 건국부터 멸망때까지 고구려식 외교를 사용해

중국에 사대하는 외교가 아닌

북방 유목민족과 연대하는 외교를 구사했고

외교력 , 경제력과 문화력도 강성해서

국가 사상과 풍조도 고구려와 가장 닮아있었던 국가가 바로 고려였습니다

 

비록 검모잠과 안승 , 대조영의 꿈은

허망하게 무너졌지만 ,

그나마 태조왕건으로 인해 고구려인들의 꿈은 부활할 수가 있게 되었고

고구려 재건에

실패했던 , 성공했던 간에 , 역사에 이름도 남기지 못했던 간에

 

고구려 부흥세력들은

당나라에 나라를 팔고 역사에 오명을 남긴 연남생 부자와는 질적으로도 달라

우리 역사에 의미있게 새겨졌으며

조상들에게 부끄럼 없는 후손이 되려 노력했던

고구려 부흥세력이었고

그들의 희생 덕분에 태조 왕건이 그들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아름다운 나라를 물려준

자랑스러운 선조가 되었습니다

 

[고구려계 인물들]

이외에도 고구려 멸망이후

고선지 같은 고구려계 당나라 명장도 있지만

결국 고선지는 부흥운동에 참여한 인물로 남지 않고

고구려계 중국인이 되길 선택한 인물이라

세계사 영역에서 흥미롭게 볼 순 있어도

한국사에 실리기엔 적합하지 못한 인물이고

 

서역정벌한 고구려계 장군 고선지

 

(쿠팡 김범석이나 필즈상 허준이 같은 인물이

한국과 가깝고 대단하지만

엄연히 한국국적을 포기한 한국계 미국인이라 한국사에 실릴 수는 없고

반대로 롯데 신동빈은 일본에서 자라나고 의뭉스럽지만

일본국적을 포기해 국적은 한국이라 엄연히 한국 기업인임 ,

 

물론 우수한 한국계 외국인들의 한국 재귀화 , 국적재회복 문도 열어놔야 하고

법보다 외국인일지라도 내면적 정서적 친밀감이나 국가애정도도 중요하겠으나

국적을 최종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오랜 고민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결국 최종 껍데기를 무시못함)

 

이외에도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산동지역에서 제나라를 건국한 이정기도 있지만

발해나 고려처럼 고구려 계승의식을 뚜렷히 표방한 나라는 아니었고

또 제나라는 고구려 중심지역에 일어난 것도 아니고

발해의 당나라 견제로 발해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 자치국가 성격이었고

여러 국제정치적 의도로 존립한 국가에 역사도 너무 짧았고 ,,

 

이정기의 제나라(치청번진)

 

이번 이야기에선 멸망한 고구려계 인물을 전부 다뤘다기 보단

고구려의 영광을 부흥하려했던 인물 위주로 다루었습니다

 

<라봉봉>백제 , 고구려의 부흥운동 정신은

계속 이어져 외세의 침입이 있는 시기의 한국의 특유의 '의병' 정신 으로 이어진게 아닐까 싶고

멸망한 나라에도 외세를 물리치려는 한국식 독립운동 정신의 시초가 되었다 생각합니다

 

백제 부흥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백제가 고구려와 같은 부여계 국가고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아들 온조가 세운 국가이며

백제 말기에 고구려와 동맹도 맺었고

다시 옛 부여 , 고구려 정신으로 동화됬기에

옛 백제인들도 훗날 고려건국 시기

고구려계 주도의 민족운동에 거부감 없이 합류했다 생각하고

 

장수왕때부터 고구려는 고려로 국명을 변경했는데

고려때 삼국사기가 편찬되며 혼란을 피하기위해 옛 고려를 고구려로 부르고

현재 고려를 고려로 구분하기로 정하였고

그렇기에 원래 고구려 실제국명이 고려기에

고구려 부흥의 꿈은 오늘날 한국이 영어로 고려(KOREA) 고

남북한이 모두 오늘날 정식 영어명칭으로

대한민국도 , 조선도 아닌 고려를 사용하기에

나름 현실로 이어졌다 생각됩니다

 

계속해서 후손들이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던 이유가

고구려가 일반적인 수렵 , 호전적 정복국가 이미지와 달리

실제론 굉장한 문화 , 문명국가였고

신라도 원래 고구려 빵셔틀 국가에 불과했기에

주신라고구려군의 보호를 받으며

고구려 문화 , 문물을 받으며 성장한 나라였고

당장 벽화 , 그림만 봐도 대부분 고구려 벽화 , 그림만 남아있다는 거 자체가

삼국중 가장 문화적 위엄이 강한 나라였다는 의미이고

오늘날에도 삼국시대 고증 연구할때 대부분 고구려 그림밖에 남지 않은게 현실입니다

 

고구려가 굉장한 철갑기병 , 개마무사에 대륙을 호령한 거친 무인같은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론 군사 외에도

과학 , 종교 , 문화 , 외교 , 정책 등 여러분야에서 동아시아 최선봉에 선 선진국이었기에

중국이 국가 총력전을 펼쳐가며 멸망시키려 한 것이었고

그만큼 일반적인 나라가 아니었고

우리 역사를 바로 알려면 결국 고구려 바로알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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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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