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말기 인물들>
[고구려 말기 국제정세]
[강이식 장군]
[이문진의 신집]
[고구려 말기 당시 수나라 상황]
[고구려 VS 수나라 백만대군]
[고건무 VS 내호아]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오열홀 성주 VS 수양제]
[화의파 고건무와 주전파 을지문덕]
[고구려의 중국침공 논의]
[영류왕의 친중정책]
<라봉봉>
[고구려 말기 국제정세]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시기 이후부터 전성기를 누리며
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다가
평강공주의 아버지 평원왕대 이르러 국제정세가 급변하는데
바로 중국의 통일이었습니다
한국삼국시대 당시
중국역시 위진남북조 시대 , 오호십육국 시대를 맞아
여러 나라로 분열되있었고
(한국 삼국시대때가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였는데
위진남북조 시대를 오호십육국 시대라고도 하고
중세 송나라 등장전의 오대십국시대랑 헷갈리니 주의)
그런 중국이 통일되자
고구려 평원왕은 대단히 두려워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신라는 한창 신라 진흥왕이 백제 성왕을 전사시키고
고구려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고 더 나아가 함경도지방까지 점령하는 등
고구려는 서로는 중화제국 , 남으로는 신라의 발호로 큰 위기를 맞고 있었고
고구려의 위세가 위축되자 거란의 일부가 수나라에 투항하는 등
국제 정세가 급변했던 시기입니다
평원왕은 중국의 통일소식을 듣고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비축하며 국방대비책을 세웠고
수나라 초대황제 수문제는 중국이 통일되고
자주 풍년이 들어 나라가 넉넉해지자
평원왕에게 조서를 보내서
고구려가 스스로 번방(제후의 나라) 라 하면서도
성의와 예절을 다하지 않는다 책망했고
곧바로 고구려 왕을 길들이려 했습니다
이전 중국이 분열됬을때는 이런 일은 없었는데
중국의 통일은 결국 고구려에 큰 암운으로 다가왔고
자주적이고 민족적 기상이 강했던 고구려는
곧바로 중화제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게 됩니다
(참고로 후기 고구려가 단순히 민족적 자부심과 기상이 강해서
통일 중국을 공격하거나 그러려 한게 아니라
당시 고구려 지리상 남쪽의 백제 신라는 서로 원수기에
별다른 안보적 위협이 덜했고
중국은 통일하는 순간 바로 옆에 맞닿아 있는
고구려와 양립하려 하지 않을게 뻔했기에
중국의 혼란을 틈타 공격을 가하려는 시도들이 있었고
훗날 만주나 북방지역 유목민족들도 대부분 고구려처럼
어짜피 들어가고 나오기 어려운 한반도는 대체로 내버려두고
항상 중국을 견제하며 중국을 치려했음)
[강이식 장군]
평원왕이 사망하자
평원왕의 맏아들 고원이 뒤를 이어
고구려 26대왕 영양왕이 되었고
영양왕은 수나라에게 당한 모욕으로 크게 노했던 상황이었는데
여러 신하들은 수나라에게 어떤 화답을 보낼까 의논하다가
강이식은
<강이식>이같이 오만무례한 글은 붓으로 화답할 것이 아니요
칼로 화답할 것입니다
하고 곧바로 개전하기를 주장했고
영양왕은 그의 말을 좇아 강이식을 병마원수로 삼아서
정병 5만을 거느리고 임유관으로 향하게 하고
먼저 말갈 군사 1만여 명으로
요서를 침공해 수나라 군사를 유인하고
거란 군사 수천 명으로 바다를 건너
지금의 산동을 치게 하니
고구려와 수나라 두나라의 전쟁이 시작됬습니다
(고수전쟁이 조선상고사에 더 디테일하게 기록되 있음)
이듬해 고구려 군사가 요서에 침입해
요서총관 위충과 접전을 벌이다 거짓 패해서 임유관에서 나오니
수문제가 30만 대군을 일으켰고 한왕 양왕이 행군대총관이 되었는데
수나라 장수 주나후를 수군총관으로 삼아 바다로 나아갔는데
주나후는 평양을 친다는 말을 퍼뜨렸지만
실제론 양식 실은 배를 인솔해 요해로 들어와 양양의 군량을 대주려 함이었고
고구려 강이식 장군은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 가운데 들어가
수나라 주나후의 수군을 격파하자
수나라의 군사는 양식이 없고 6월의 장마를 만나
굶주림과 전염병에 사람들이 계속 죽자 퇴군했고
강이식 장군이 이를 추격해 전군을 거의 섬멸하고 무수한 군기를 얻어서
개선했습니다
<신채호>수서에는
'양양의 군사는 장마에 전염병을 만나고 ,
주나후의 군사는 풍랑을 만나 퇴각하였는데 ,
죽은 자가 열에 아홉이었다'
고 하여 불가항력의 자연의 힘에 패한 것이고
고구려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고 기록하였으나
이는 중국의 체면을 위해 치욕을 숨기는
저들의 이른바 춘추필법(역사를 완곡어법 , 과장하게 쓰는 중국식 기록법)
에 의한 것이니
임유관 싸움은 물론이고 다음 장에서 말할
살수 싸움(살수대첩) 의 기록에도 그러한 투의 기록이 많다
아무튼 임유관 싸움 이후 수의 문제가 고구려를 두려워하여
다시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피차 휴전 조약을 맺고 상품의 무역을 다시 시작하여
두 나라 사이에 10여 년 동안이나 아무 일이 없었다
[이문진의 신집]
영양왕 11년 봄 1월 ,
영양왕은 태학박사 이문진으로 하여금
옛 역사서를 요약해서 '신집' 이라는 역사서 5권을 만들도록 명령했고
원래 건국초기에 처음 문자를 사용했을 때
어떤 사람이 사적으로 기록한 책 1백권을 쓰고
'유기' 라고 이름붙였는데
영양왕때 와서 이를 정리(요약)하고 수정했습니다
익산 이씨들은 이문진을 시조로 한다하고
익산이씨들은 이문진이 577년에 출생해
24세에 신집을 편찬하고
642년에 죽었으며
영양왕때 태학박사 , 문부전서 , 오경박사로 공신후가 되고
백제공주와 혼인해 백제로부터 익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합니다
당나라 장수 이적(이세적) 은 고구려 수도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고구려의 자랑스런 역사를 보고
고구려인들이 또다시 일어날까 두려워
고구려 역사서부터 불태워버렸다 하고
안타깝게도 고구려 역사서 유기와 신집은
오늘날 단 한권도 전하질 않습니다
단지 삼국사기에서 고구려 본기가 나름 백제보단 방대한 편이기에
고구려 역사가 알음알음 통일신라 , 고려로 계승됬고
이때 유기와 신집의 내용도 어찌어찌 전해져서 삼국사기로 흡수됬을 거라고도 하고
현재는 삼국사기 정도가 사실상 유일한 고구려 왕실 정식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 말기 당시 수나라 상황]
수나라 초대황제 수문제는
한나라 말기 황건적의 난 이래로
삼국지를 찍다가 360여 년간 분열된
대혼란기 위진남북조시대를 마무리하고
황위에 올라 현대 중국의 기틀을 다진
중국사 최고 명군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데
실제로 명군에
굉장히 검소해서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시켰음에도
수나라 재정 , 경기가 좋았다 하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처벌 ,
과거제도 도입 , 균전제 , 조세정비 , 군사정비를 하며
이후 중국사에도 크나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고
하여튼 굉장한 명군이었습니다
근데 그의 아들 양광 , 수양제는 개차반이었는데
수양제는 그런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설(패륜) ,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는 말도 있을 정도고
하여튼 아버지가 성군 , 명군 소리를 듣던것에 비해
초 쓰레기 황제였는데
수양제는 곧바로 아버지 수문제가
힘들게 중국을 통일시키고 안정시킨 것을 말아먹게 되었고
검소했던 아버지와 달리
크고 화려한 것을 좋아했던 수양제는
대운하를 건설하는 업적을 남겼고
이건 세계사 책에도 잠깐 나오는 수양제의 업적이긴 업적이지만
이것도 원래 아버지 수문제가 하다가 부담이 커서 중단했는데
양제는 백성들을 쥐어짜서 화려하게 대운하를 건설하였고
사치와 향락에 빠졌던 양제가 지나다니는 곳 마다
해골이 땅바닥에 널렸고 (양재앙)
이런 양제의 실책중 가장 최악은
역시 고구려 정벌이었고
양제는 원래같으면 아버지 문제가 굉장히 뛰어난 황제기도 해서
한나라 정복군주 무제정도 포지션에 있을 법할 인물로 남을 수도 있었는데
당시 고구려는 이전 고조선의 실패사례를 알고서는
방비를 철저히 했던 상황이었고
고구려는 수나라가 중국남북을 통일하니
이를 두려워하며 우리도 빨리 신라와 백제를 토멸해서
조선을 통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자주 남쪽 정벌의 군사를 일으켰늗네
남쪽의 신라와 백제는 서로 싸우는 와중에도 북쪽의 고구려마저 침공해오자
국력이 피폐해져 견딜 수 없으므로
두나라 모두 제각각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서
고구려 공격을 종용했습니다
(삼국사기엔 간략히 있고
조선상고사에만 나오는 소름돋는 당시 국제정세 기록)
또 당시 고구려는 수나라 주변국들과 달리
유일하게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입조(조정에 들어감)와 조공을 거부했고
격분한 수양제는 아버지 수문제가 축적한 부를 모두 탕진해서
고구려를 침공하려 했고
결국 113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합니다
[고구려 VS 수나라 백만대군]
당시 수나라 군사의 총 수는
1백 13만 3천 8백명이었고
수양제는 200만 대군이라 부풀렸는데
실제로 군량 수송을 맡은 자의 수는 배가 되었다 하고
중국사 100만대군이 거의 부풀리기라 하지만
역사학자들도 이때 113만 대군은 진짜 사실로 본다 하고
현대전에서도 113만은 어마어마한 것인데
그 옛날 고대에 113만은 세계 역사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고
고수전쟁은 동아시아 , 더 나아가서 세계사가 바뀐 대사건이었습니다
기세등등한 수나라 백만대군은
고구려 요동성에 당도했고
수양제는 고구려 요동성을 치게 했는데
요동성은 방비가 갖추어져서 수시로 나와서 항거하고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고건무 VS 내호아]
한편 10만 수군을 이끌고
바닷길로 들어온 수나라 장수 내호아와 수나라 수군은
대동강 어귀로 들어와 평양 근처로 들어왔고
고구려 군사는 짐짓 지는 체 하고
수나라 군을 유인했고
수나라 장수 내호아는 정병(정예병) 4만을 뽑아서 돌진해서 백성들을 사로잡고
고구려 군이 미리 뿌려둔 재물을 약탈하느라 정신팔리고 대오가 무너졌고
그때 숨어있던 고구려 영양왕의 이복동생 고건무는 결사대 5백명을 뽑아서
고구려 군사들이 돌격하고 숨어있던 고구려 수군도 일시에 함께 공격하니
내호아는 대패했고 내호아가 가져온 양식 실은 배들은 모두 바다 속에 가라앉아서
내호아는 혼자 조그만한 배를 타고 도망합니다
<신채호>양식 실은 배가 다 없어지니
이미 평양성에 침입해 있던 우문술 등의 대군이 무엇을 먹고 싸우랴 ?
고구려가 이때에 이미 이길 지위를 차지하였으니
만일 전공의 차례를 따진다면 왕제 건무가 을지문덕보다 앞섰다고 할 것이다.
왕제(왕의 동생) 건무의 공이 이같이 컸지마는
역사를 읽는 사람들이 흔히 을지문덕만 아는 것은 무슨 연고인가 ?
사마온공의 통감고이에
내호아가 양식 배를 잃지 아니했더라면
우문술의 살수의 패전이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대개 옳은 말인가 한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내호아의 보급선 , 수군이 전멸하자 수나라군 상황이 매우 안좋아졌는데
한편 당시 수나라 육군은 대오를 정비해서
압록강 서쪽에 집결하였고
수나라 장수 우문술은 군사와 말에게 각각 백일분의 식량을 주고
갑옷 , 짧은 창 , 긴 창 , 옷감 , 전투기재 , 장막을 주었고
이에 따라 군사들은 각각 3섬(200~300kg 인듯) 가량 짐을 지게 되어
그 무게를 감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수나라 대장 우문술은
<우문술>도중에서 곡식을 버리는 자는 참수한다
하고 명령하였고
수나라 군졸들은 그 많은 짐을 지고 행군하다 죽으나
곡식을 버리다 죽으나 죽는 것은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모두 장막 밑에 구덩이를 파고 짐들을 파묻었습니다
이에 따라 겨우 중간 쯤 행군했을 때
군량은 이미 거의 떨어졌고
이때 영양왕은 대신 을지문덕을 보내서
수나라 군영으로 나아가 거짓으로 항복하게 했는데
실제로는 그들의 허실을 살펴보려 한 것이었습니다
이보다 앞서 우문술과 함께 출정한 수나라 장수 우중문은 수양제로부터
만일 고려왕이나 을지문덕이 오는 기회가 있거든
꼭 사로잡으라는 비밀지시를 받고 있었기에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우문술 등은 을지문덕의 용모와 체구가
위엄있고 건장함을 보고 놀랬고
이를 말리는 사람이 있어서
우중문은 결국 을지문덕을 돌아가게 했고
을지문덕이 돌아갈때 쯤 우중문은 곧 을지문덕이 고구려 대왕이나
대대로인가 보다 하고 사로잡지 못했음을 후회하여
사람을 보내서 을지문덕에게 거짓으로 말했습니다
<우중문>다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또 와도 좋다 !
그러나 을지문덕은 이미 패강에서 고건무가 내호아의 보급선을 끊음을 듣고
우문술의 군사들이 모두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눈치챘기에
<을지문덕>반드시 이길 기틀을 잡았는데
어찌 다시 범의 굴에 들어가랴 ?
하고는 뒤돌아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넜고
수나라 장수 우중문과 우문술은 을지문덕을 놓치고
내심 불안했고
우문술은 군량이 떨어졌다 하여 돌아가려 했습니다
우중문과 우문술은 추격과 퇴각으로 서로 다투었는데
다툼끝에 결국 우중문과 우문술은
여러 장수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을지문덕을 추격했고
을지문덕은 우문술의 군사가 굶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피로하게 하기 위해 싸울 때마다 도주했습니다
우문술은 하루에 일곱 번 싸워서 일곱 번을 모두 이겼고
그들은 여러번 싸워 이겼다는 것으로 자신감을 가지게 됬고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밀려서 동쪽으로 진군해 살수(청천강)를 건넜습니다
우문술 , 우중문의 수나라군 30만 5천대군이 결국 살수를 건너서
평양성 30리 떨어진 곳에 이르러 산을 의지하고 진을 쳤고
평양에 이른 수나라군은 성안과 성밖의 인가가 고요하여
사람의 그림자란 볼 수도 없고
개소리 , 닭소리도 들리지 아니하자
우문술은 의심이 나서 바로 나가지 못하고
사람을 보내서 닫힌 성문을 두드리니 성문에서 답하기를
<평양성>우리가 곧 항복하려고 땅과 인구의 문서와
장부를 조사하는 중이니 대군은 성 밖에서 닷새만 기다리시오
했고 당시 우문술과 수나라군은 내호아의 수군이 패전해서
보급이 끊긴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상황이라
내호아가 오기를 기다려서 함께 공격하려고
성 안에서의 요구를 승낙하고 성 부근에 진을 쳤고
군사들이 시장하여 약탈하려고 집집을 털었으나
다 텅비어 아무것도 없었고
닷새가 지나 열흘이 되어도 성 안에서는 아무런 동정이 없어서
우문술이 군사를 지휘해 성을 공격하니 성위에서는
고구려의 깃발이 일시에 꽂히고 화살과 돌이 비오듯이 쏟아졌습니다
을지문덕은 통역으로 하여금 큰소리로
<을지문덕>너의 양식 실은 배가 바다에 가라앉아
먹을 양식은 끊어지고 평양성은 높고 튼튼하여
넘어올 수 없으니 너희들이 어떻게 하겠느냐 ?
외치게 하고 포로로 한 수나라 수군 장졸들의 도장과 깃발을 던져주자
수나라군은 그때서야 내호아가 패했음을 알고
군심이 갑자기 소란해져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시를 지어 보냈습니다
<을지문덕의 시>
신통스런 계책은 천문을 뚫었고
묘한 계산은 지리를 다했도다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
만족한 줄 알아 그만두라 말하시오
우중문은 답서를 보내서 을지문덕을 달래었고
을지문덕은 다시 사람을 보내서 거짓 항복하는 체 하고
우문술에게 청하기를
<을지문덕>만일 군사를 거두어 돌아 간다면
왕을 모시고 황제가 계신 곳으로 가서 직접 예방(방문) 하겠습니다
고 말했고
우문술은 자기 군사들이 피로하고 고달파함을 보고
또한 , 평양성이 험하고 견고해
다시 싸울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고구려의 거짓항복을 핑계삼아 돌아갔는데
우문술은 방진을 치면서 퇴각했는데
그 때 , 우리(고구려) 군사가 사면으로 공격했고
우문술은 싸우며 행군했습니다
우문술의 군사가 살수에 이르렀는데
당시 을지문덕은 미리 사람을 보내서 모래 주머니로 살수의 상류를 막고
정병 수만 명을 뽑아서 천천히 한가롭게 수나라 군사를 뒤쫓게 했고
살수에 이르니 배가 하나도 없고 우문술 등이
물의 깊고 얕은 데를 알지 못해서 머뭇거리는데
돌연 일곱 명의 고구려 승려가 다리를 걷고 물에 들어서면서
<고구려 승려>오금(무릎) 에도 차지 않는 물이오
하고 건너가니
수나라 군사들이 크게 기뻐하며 물에 들어섰고
강을 절반쯤 건너지 못했을 때
상류의 모래주머니로 막은 물을 터놓아 물이 사납게 내리닥칠때
고구려 군사가 후방에서 그들의 후속부대를 맹렬히 공격했고
그러자 여러 부대들이 한꺼번에 무너져서
걷잡을 수 없었고
수의 군사는 거의가 칼과 화살에 맞아 죽고
물에 빠져죽어
살아남은 장수와 군졸이 뛰어 도주하는데
하루낮 하룻밤 사이에
압록강까지 4백 50리(176km)를 행군했고
우중문과 우문술의 수나라 30만 5천대군은
돌아갈때는 다만 2천 7백명 뿐이었고
수만에 달하는 군량과 군사기재들이 사라졌고
고구려의 노획품이 되었습니다
한편 요동에 있었던 수나라 황제의 어영군(황제의 군) 과
10여 군단 수십만 명 군사들은
오열홀과 요동 각지의 성들을 공격했지만 하나도 함락시키지 못했고
3~7월 4 , 5달동안에 고구려 사람들의 화살에 맞아 죽어서
성 아래에는 해골이 산을 이루었고
양식을 얻지 못하여 장졸들이 굶주리다가 우문술이 패해서 돌아오자
더욱 싸울 생각이 없었고
수양제는 그럼에도 최후의 일격을 가해보려
모든 군사들을 오열흘 성 아래에 집합시켰는데
을지문덕이 이를 깨뜨려 사람과 말을 수 없이 죽이고 노획한 물건이
한없이 많았습니다
결국 수양제는 패잔병들의 보호를 받으며
살수대첩 패장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어서
수나라로 겨우 돌아갔습니다
삼국사기를 집필한 김부식은
고구려를 지킨 을지문덕 장군을 아주 높게 평가하였습니다
<김부식>양제가 요동전쟁에 보낸 군대는
이전에 유례없이 많았다
고구려는 한 귀퉁이의 작은 나라로서
능히 이를 막아내어
스스로를 보전하였을 뿐 아니라 ,
그 군사를 거의 다 섬멸한 것은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경전에 이르기를
'군자가 있지 않으면
어찌 능히 나라를 유지할 수 있으랴'
하였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반대로 조선상고사를 집필한 신채호는
을지문덕 단 한사람의 공이라기보다
을지문덕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고건무가 수나라 보급을 끊었던 것에 있고
역사 읽는 사람들이 수나라 수군 내호아를 물리치고
수나라 보급을 끊은 고건무를 기억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 평가했습니다
[오열홀 성주 VS 수양제]
수나라 양제는 패해 돌아가서는
그 패전의 죄를 우문술 등 여러 장수들에게 돌려 파면해서 옥에 가두고
패전의 치욕을 씻으려 이듬해 정월 다시 전국의 군사와 말을
탁군으로 소집해서 요동의 옛성을 수축해서 군량을 저축해놓게 하고
저번 전쟁은 군량이 모자라서였지 싸움을 잘못한 죄가 아니라 전국에 알리고
다시 장군들을 복직시켜서 고구려 칠 계획을 했는데
수양제는
<수양제>작년에 요동을 평정하지 못하고
평양을 공격한 것이 실책이었다
하며 먼저 오열홀을 쳐서 이를 함락시키고 차차
각 주군을 평정하며 평양까지 내닫자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수는 이미 크게 패한 뒤라
국고가 텅 비고 군대의 수효가 줄어 많이 모자라고
백성의 힘이 고갈하여 인심이 물끓는 듯하여
반란 노래가 유행하였고
양제는 이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 재물을 강탈하여 군량을 마련하고 남자들을 징발해 군사로 삼아
훈련 몇달만에 요동으로 향하게 하고
우문술 등 장수에게 명해서 오열홀을 공격했는데
수양제는 이동하는 누각 , 높은 사닥다리 , 땅굴 , 토산 등
성 공격하는 방법을 모조리 다 써봤지만
오열홀 성주는 그때그때 알맞은 방어전을 벌여서
서로 대치한 지 수십일 만에
수나라 군사가 수없이 많이 죽었습니다
수나라군은 그렇게 또 패하고 돌아갔습니다
[화의파 고건무와 주전파 을지문덕]
이후에도 수양제가 고구려 공격문제를 의논하자
수일동안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고
수양제는 또다시 전국 군사를 소집하여
모든 방면의 길로 일시에 진공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수나라는 이미 나라전체가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혼란하여
소집한 군사들 대부분 기일을 어기고 오지 않았고
수나라 백성들의 원한이 극도에 일으렀고 반란도 일어납니다
수나라 군들은 이전 두번의 패전으로 인하여
고구려에 가면 죽을 줄을 알으므로
도중에 도망하는 자가 많고 이미 반란을 일으킨 지방은
징집에 응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당시 고구려 역시 피폐해진 상황이었습니다
수양제는 싸우기가 어려움을 깨닫고 중지하려 하다가
그러면 더욱 온 나라안의 웃음거리가 되서
반란을 진압하기 어렵다 생각해
어떤 구실이라도 잡아서 휴전을 하려
고구려에 대해 반란한 신하 곡사정의 인도를 유일한 조건으로
화의를 제출했고
곡사정은 양현감의 무리로서 고구려에 투항한 사람인데
이때 고구려의 국론이 두 파로 갈렸는데
한 파는 남쪽의 신라와 백제를 토멸하기 전에는
중국에 대해 말을 낮추고 후한 예물로 화평을 유지하는 것이 옳다 했고
전에 중국에 대한 교제가 너무 강경해
여러 해 전쟁을 일으켰으니
오늘부터라도 다시 정책을 변경해 수나라와 화의하자 했습니다
한 파는 신라와 백제는 산과 내가 몹시 험하여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우며
또 백성들이 굳세어 좀처럼 굴복하지 않는데
중국의 대륙은 이에 반하여 넓은 들이 많아서
가장 군사를 쓰기가 좋고
백성들이 전쟁을 두려워 하여
한 쪽이 무너지면 다른 쪽이 동요하므로
장수왕의 북수남진책(북쪽은 수비하고 남쪽으로 진격하는 정책) 은
원래 잘못된 것이고 오늘부터라도 이 정책을 버리고
남족은 방어만 하고 정병을 뽑아 수를 치면 비록 많은 군사가 아니라도
성공하기 쉬우며 성공한 뒤에 백성을 위무하고 인재를 채용하면
전 중국을 통일하기가 용이하다고 했습니다
앞서의 중국과 화친을 주장한 일파는 왕의 동생 건무의 일파였고
많은 호족들이 이에 속해있었고
뒤의 중국 정벌을 주장한 일파는 을지문덕의 일파이니
일부 무장들이 이에 속해 있었습니다
건무와 을지문덕 모두 다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서
나라사람들의 신망이 다 같이 높았기에
두 파의 세력도 거의 비슷하였고
영양왕은 을지문덕의 주장에 찬동했지만
고구려는 호족의 나라였으므로 왕의 또한 건무파의 의견을 꺾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수양제가 곡사정의 인도를 조건으로 화의하자 하자
나라 안이 건무파에 많이 붙어서 우세해져서
결국 망명해온 가련한 곡사정의 인도를 허락하는 동시에
사자가 국서를 받들고 수양제의 군영으로 갔는데
어떤 장사가 이를 몹시 분개해 소뇌(석궁)를 품고
사자의 수행원으로 변장하고 가만히 사자의 뒤를 따라들어가서
양제의 가슴을 쏘아맞히고 달아났고
그럼에도 고구려 , 수나라 간의 화의는 계속진행됬고
곡사정의 인도 역시 이행됬지만
양제의 넋을 빼앗고 고구려의 사기가 왕성함을 보기엔 충분했습니다
수양제는 이후에도 고구려 영양왕에게
수나라 조정에 들어와 예방하라 했으나
영양왕은 끝내 듣지 않았고
양제가 장수들에게 엄밀히 대비할 것을 명하고
다시 공격할 것을 기도했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수양제는 화살을 맞고 수나라로 돌아간 이후부터는
병도 들고 부끄럽고 노여워서 울분을 참지 못하며
술에 빠져 지내다
나라 안이 크게 어지러워져서 몇 해 안가
암살당하고 수나라는 마침내 나라가 망했습니다
조선 역사학자 안정복 선생님은
고구려-수전쟁을 논평하다가
영양왕의 살수승전의 위세로 수양제가 아비 죽인 죄를 성토하고
을지문덕 장군을 호령해서 수나라를 합병하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하고
마치 중원을 도모했던 금나라나 몽골제국마냥
한국 고구려가 중국 수나라를 합병하려 했다는 기록은
기존 역사학계에서는 잘 이야기 되지 않지만
엄연히 한국 근본 역사서에 기록된 굉장히 특이한 기록입니다
[고구려의 중국침공 논의]
실제로 한반도와 중원(중국본토) 의 관문격인 요동 , 만주일대는
넓고 거대한 지역으로서 이곳을 먹는 순간 곧바로
한국 압록강이나 중국 만리장성으로 가는 관문이 열리는 것이었고
동아시아 안보와 균형축의 핵심지대였고
만주는 예로부터 넓은 땅에 비해 인구 밀도도 낮았기에
목축 , 수렵을 하거나 벼농사가 어렵고 콩이나 수수정도나
키워야했기에 만성적인 경제난 , 식량난에 시달렸고
(참고로 벼 , 쌀농사가 따뜻한 기후와 물을 매우 많이 필요하기에
가장 농사중 어렵고 노동력이 많이 들어가서 가격도 가장 비싸고
쌀이 밀이나 옥수수보다 칼로리가 높고
단위 면적당 얻는 칼로리가 가장 높은 작물이라
경기 , 충청 , 전라도 곡창지대가 있었던 백제가 땅이 좁아도 인구가 엄청났음)
만주를 먹는 순간 곧바로 경제위기 , 식량난을 탈피하려
풍요로운 한반도나 중국 곡창지대를 털어야 했는데
한반도는 산으로 쌓여있고 땅이 너무 좁아
전쟁에 힘을 쏟는 것에 비해 얻는 것이 너무 적었고
중국이 거대평야지대라 자원이 엄청나게 많아서 약탈하기도 좋고
많은 인구에 비해 군사력이 한반도에 비해 굉장히 약했기 때문에
결국 대부분 고구려 멸망 이후부터는
만주를 영유한 민족은 곧바로 중국을 침공하는 패턴이 생겼을 만큼
을지문덕 장군의 중국침공주장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생각됩니다
실제로 중국 입장에서도 만주는 중국의 관문이자 위험지대였기에
이전부터 꾸준히 동진해왔고
반대로 한반도는 산악지형이 대부분인 천혜의 요새라
방어가 쉽지만 반대로 나가기도 어려워서 만주에 자리잡은 민족은
대체적으로 한반도보단 중국에 칼을 겨누었고
만주 입장에서도 중국이 분열 , 혼란할때 털어주지 않으면
곧 중국인이 통일 , 결집하다간 곧바로 만주의 위기를 초래했기에
무슨 고구려인들이 전쟁광이라기 보다는
이후 만주를 영유한 민족들이 다 그랬듯이
안보적인 이유에서 중국 침공을 논의했던 것입니다
단지 고구려는 고조선 , 부여의 후신으로서
농경적 성향도 강했던 반유목 반농경 국가였기에
중국에 그렇게 호전적이지 않았고 이후 만주에 등장한 다른 유목민족에 비해서는
굉장히 학문과 문화도 발달하고 굉장히 평화주의적인 편이었고
오히려 당시 고구려가 중국을 너무 믿다가 멸망을 초래한 면도 있었고
이후 만주를 영위한 민족들은 고구려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
농경을 안한건 아니지만 철저하게 유목적인 기풍으로 올인하게 되었고
고구려가 중국침공을 주저했던 것과 달리
힘을 키우는 순간 곧바로 중국대륙을 침공합니다
마지막으로 만주에서 중국을 침공해서 성공시킨게 만주에서 건국한 청나라였고
청나라가 민족을 통합하고 강성해서 명나라를 삼켰다는 일반적 역사인식과 달리
당시 청나라는 당대 엄청난 식량난과 국가멸망위기에 휘말려 있던 상황이었고
명나라 국력과 무기(신기술 화약무기)기술력 등에 비해 엄청난 열세임에도
중국대륙을 침공하지 못하면 모두가 굶어죽는다는 절박함과
중국의 분열을 적극 이용해서
중국침략을 성공할 수 있었고 굉장히 운도 따라주었고
마지막으로 만주에서 중국을 침공한게 일본제국인데
이때는 일제의 만주합병후 넓어진 전선과
일본제국이 당대 아시아에서 가장 강하다는 오만 등에 빠졌고
당대 별다른 절박함이나 국제 정세도 일본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고
일본 육군과 해군의 갈등도 강했고
오히려 분열해있던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이
일제의 중국침략으로 똘똘 뭉치고 선진국들의 물자지원과
실전경험을 풍부하게 쌓게되어 현대중국 건설의 기반이 되어버리고
철저하게 실패합니다
즉 고구려는 당시 수나라와 대전쟁에서 승리한 상황에
이로인한 수나라의 극심한 대분열과
침공보복 명분도 있고 주변 이민족과 연합도 가능해 기세를 잡은 상황이었고
어짜피 백제나 신라는
큰 원수진 일이 있어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는 상황이기에 함부로 고구려로 북진이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아무리 중국이 무슨 무한맵 이미지가 있지만
당시 중국은 진짜 헬중국 시대에 수나라 조정에 대한 분노가 들끓던 시기라
당시 수나라는 수백만 대군을 동원하느라 나라가 피폐해지고 극심한 분열을 겪던 시기였기에
당시 고구려 명장 을지문덕의 주장도 충분히 일리가 있던 상황이었고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고구려가 수나라 멸망기 , 수당교체기나 하다못해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 자기 형 태자 이건성과 싸울때(현무문의 변) 를 이용해서
중국을 침공했으면 충분히 중국에 극심한 혼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했고
백제 신라는 어짜피 못올라오는 형국인데
장수왕의 남진정책을 비판적으로 보는 입장이셨고
단순히 신채호가 민족주의 사학자여서가 아니라
당시 국제정세에 고구려가 남진정책 쓸 상황이 아니었고
신채호 선생님은
고구려가 남진정책보다는 백제 ,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중국에 칼을 겨누는데 집중하는게
당시 안보상황에 맞다 보셨고
그렇게 친중정책에 물들어가며 망해가던
고구려에서 혁명(쿠데타) 을 일으켜
남진정책을 포기하고 중국과 대결에 전념한
연개소문을 의의있게 보셨습니다
한국삼국시대동안은 항상 중국이 분열해야 한국의 평화가 보장됬기에
(통일 한나라때 고구려는 조용히 지내다
중국에서 삼국지 찍자마자 계속 고조선 고토 수복해가고
광개토대왕의 고구려 천하 시대까지 열었고 중국의 침략에서 안전했고
수나라 통일하자마자 대전쟁을 치뤄야했음)
조선상고사에서는
연개소문은
먼저 신라나 백제 둘중 하나와 동맹을 맺어 남방 안보를 확보하고
(어짜피 둘은 원수니 한명만 동맹만 맺어도 알아서 안전해짐)
중국에 칼을 겨누어야한다 적극 주장하다 주전파로 몰려서
왕과 대신들의 의심을 받다가 궁지에 몰려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고
연개소문은 당시 고구려 마지막 대정치가였기에
일반적 역적이나 무식한 군인이라 하긴 어렵기에
신채호가 보는 연개소문이 김부식이 보는 연개소문보다 더 정확하다 생각되고
문제는 당시 고구려도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졌다는 점 ,
굳이 고구려가 중국을 침공하지 않았더라해도
영류왕의 판단미스로 고구려는
중국의 혼란기와 수당교체기 , 이세민의 반란인 현무문의 변 당시에도
중국대륙의 분열이라는 골든타임을 놓쳤고
당태종 이세민 역시 당대 영걸이었기에
이세민의 완전한 중국대륙 혼란 진압으로
중국이 대결집하며 다시 중국이 복구에 성공하는 상황에도
고구려는 전쟁복구 , 회복력도
인구력과 농업생산력이 엄청난 중국에 비해
엄청나게 느렸기에
생존을 위해서라도 유목민족들이 그리했던 것 처럼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을 한번 휘저어서
중국에 오호십육국 시대를 부활시키던가 해야했고
당나라 역시 선비족계열 국가였고
생각보다 중국사가 중국한족의 역사가 길지 않고
고구려 제외 북방 유목민족들
역시 중국 한족들에게 당한게 많았고 중국통일에 위기가 컸기에
고구려 역시 유목민족들과 연합하거나 하며
중국 대륙을 분열시키던가 했으면 그 역사가 더 길어졌을 지도 모릅니다
영양왕의 뒤를 이은 영류왕은 당나라에 포로들을 조건없이 돌려보내는 등
아무런 실리나 이익을 얻지 못하고 친중정책에 곪아가고 있었고
당대 을지문덕의 주장은 단순히 전쟁을 좋아한다거나 그런게 아니라
고구려 안보와 생존 측면에서 나온 주장이었고
영양왕은 나름 균형이 있어서 을지문덕과 고건무(영류왕) 의 주장을 이해한듯 보이나
영류왕이 즉위하며 완전 친중화 되다 갈피를 못잡을 때 연개소문이 일어나
왕과 대신들을 살해하고 국권을 잡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원래 스타크래프트를 볼때에도
프로선수들이 싸울때 막 서로 못보고 지나치고 그러면 답답하고 분통이 터지지만
내가 할때는 당연 나 말고는 아무것도 안보이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이고
미래인들이 아무리 이전 역사를 보고 분통지어도
실패나 실수 역시 엄연히 당대 고구려와 중국의 실력격차였고
당시 고구려 역시 수나라 백만대군을 막느라 전국토가 갈린 상황에
만주 땅덩어리가 넓어도 농사가 안되는 쓰레기땅이 많아서
엄청난 쌀생산력의 중국보다 회복력도 훨씬 떨어져서
을지문덕의 주장에 찬동한다 한들 실행에 옮기기 어려웠고
어떤 변명도 필요없이 당시 중국이 이겼고 고구려가 진게 맞습니다
삼국지를 보면 촉나라 제갈량이 북벌하다가
만약 마속이 가정을 지켰다거나
위연의 자오곡 대책이 받아들여졌다면 하는
아쉬움에 독자들의 비명을 자아내지만
삼국지 전문가들이 보기엔
실제로 촉나라는 위나라에 비해 생산력 , 자원 , 영토면에서 게임이 안됬고
그냥 제갈량이 그 작은 나라로 북벌을 엄청나게 했다는 거 자체가
제갈량의 내정능력이 엄청 대단했다 보는 편이며
삼국지 전문가들은 아무리 제갈량이 그런 수를 다 썼고 성공시켰다 한들
위나라 북벌엔 회의적으로 보고 있고
이미 이전 촉나라는 유비가 이릉대전에서 패배하며
엄청난 대군과 2세대로 넘어가는 인재 데이터를 전부 날려버렸기에
이때 사실상 망한건데 그냥 망한나라에서
제갈량이 멱살잡고 겨우 끌어모아 당대 초강대국인 위나라를 침공하는
원정군을 꾸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제갈량 능력이 엄청 뛰어나다는 수준이라 보고 있고
제갈량이 사망하자마자 망한 것만 봐도 당시 촉나라 국력이 이미 위나라에 상대가 안됬고
고구려 역시 사실상 수나라 100만대군을 막을때
국토가 쑥대밭이 되서 사실상 이때 망한건데
이후 을지문덕의 계책도 상당히 실현이 힘들었고
이후 연개소문이 멱살잡고 끌어오다 연개소문 사후 곧바로 망하는것과 비슷합니다
기습이나 도박수 역시 충분히 이기는 상황이나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칠때 승산이 있지
제갈량이나 을지문덕 역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친다는 점에서
도박수를 함부로 둘 수는 없었고
결국 촉나라나 고구려는 굉장히 보수적인 전술을 운영할 수밖에 없었고
고구려 역시 중국 분열기 당시 가끔 요하 건너 중국을 침략했던 것과 달리
수나라 , 당나라 통일제국 등장부터는 엄청나게 겁을 먹고 사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다르게 보면 그래도 중국은 산업혁명 이전까지 한번도 역사에서
세계 초강대국 지위에서 내려온적이 없던 초강대국중의 초강대국이었기에
그런 중국과 힘대 힘으로 정면대결할 논의를 했던 한국 고구려가 패기가 강하고 대단한 나라였던게 맞고
이후 유목민족들이 고구려의 실패를 본능적으로 배우고 곧바로 중국침공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류왕의 친중정책]
하여튼 ,
그렇게 수나라의 침공을 막아낸 영양왕이 사망하자
영양왕의 이복동생 고건무가 왕위를 이어
고구려 27대왕 영류왕이 되었고
영류왕은 그렇게 영양왕시기
평양성을 침공한 내호아의 수군 , 보급선을 침몰시킨
고구려 전쟁영웅 출신 임금이었습니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일어나자
영류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는데
당나라 고조는 이전 수나라 말기 많은 군사들이
고구려에 붙잡혀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영류왕을 달래며 양국이 같이 화친하고
중국 백성들을 돌려달라 했고
영류왕은 그 말을 듣고 고구려안의 모든 중국인들을 찾아모아
당나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 수가 1만여 명에 달했는데
당나라 고조가 크게 기뻐했습니다
반대로 당시 고구려 연개소문 등 강경파들은
영류왕이 포로들을 너무 조건없이 돌려보낸다고 불만을 품었을 수도 있고
당시 고구려 역시 비록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기긴 이겼지만
오랜 전쟁과 청야전술(나라 식량을 불태우는 전술) 로
엄청나게 피폐해진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영류왕은 왕이 되기 전에는 고-수전쟁에서 큰 활약을 한
전쟁영웅이었지만 고구려 태왕이 되자 태도를 바꿔
수나라를 멸망시킨 당나라와 화친 정책을 폈고
이게 당고조때는 그나마 양국의 실리적 , 합리적 외교가 진행됬지만
당태종이 즉위하며 상황이 급변했고
당태종은 고구려에 무리한 요구를 강압하기 시작합니다
626년 당태종 이세민은 아버지의 황제 자리를 빼앗고
신라와 백제에 사신을 보내 서로 전쟁을 하지 말라 권고하고
곧 을지문덕의 전승 기념으로 쌓은 경관(승전기념관) 이
고구려와 당나라 두 나라 평화의 장애가 된다 하여
없앨 것을 요구해왔습니다
고구려 영류왕은 또 당황제의 요구를 들어주고 경관을 헐어버렸는데
(이로인해 고구려 내 불만이 계속 커졌을 듯)
곧 다시 영류왕은 크게 놀라서 오래지 않아
당의 침입이 반드시 있을 것을 깨달았는데
그럼에도 장수왕의 북수남진(북을 수비하고 남을 공격) 정책을 그대로 지켜서
남쪽에 대한 침략을 그만두지 않음과 동시에
국내의 남녀를 징발해 북부여성에서 요동반도 남쪽 끝까지
천여 리의 장성을 16년이나 쌓으니
이른바 '천리장성' 이었습니다
천리장성의 건설은 전쟁보다 더 거창해서
남자는 농사를 짓지 못하고
여자는 누에를 쳐 길쌈을 하지 못해서
고구려 국력이 크게 피폐해졌습니다
이런 와중에 고구려 영류왕은 고구려 태자 고환권을 당나라에 보내서
조공하였고
당태종이 위로하고 고구려 태자의 예방에 대한 답례로
진대덕이라는 인물을 보내왔는데
하필 진대덕은 간첩 , 스파이였고
즉 영류왕은 1만 포로도 보내주고 경관도 허물고 , 태자까지 당에 보냈는데
돌아오는 것은 하나도 없다싶이도 하고 결국 당태종의 간첩이 답례로 왔고
그만큼 뭔가 당시 고구려 외교가 실리 없이 화친정책(거짓평화)에만 치중하며
굉장히 잘못되게 돌아갔다 해석해 볼수도 있습니다
진대덕은 고구려 경내에 들어오며
이르는 성읍마다 관리들에게 비단을 후하게 주면서
산수구경을 좋아하니 보고싶다했고
지키는 고구려 관리들이 기꺼이 안내하니
진대덕의 발걸음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고
이로써 진대덕은 고구려 지리를 상세히 알 수 있었습니다
진대덕은 고구려에 남아 귀국하지 못한 수나라 포로들을 보고
친척들의 안부를 전해주니 모두 눈물을 흘렸고
고구려 백성남녀들이 이 광경을 구경삼아 보았습니다
진대덕은 사신으로 온 겸 고구려 국력을 살폈지만
영류왕은 눈치채지 못하고 진대덕을 환대해주었고
진대덕이 당나라로 돌아가 보고하자
당태종이 기뻐했고
진대덕은 고구려가 당나라 사신에 대한 숙소 접대 범절이
보통이 아니었다 보고하였고
당태종은 고구려는 원래 중국 한사군이었던 곳일 뿐이라며
고구려를 칠것인데 일단 전쟁의 상처때문에 때를 기다린다 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영류왕의 무조건적인 친당정책에 불만을 품은 강경파들은
큰 불만을 품게 되었고
늘 격렬하게 당을 치기 주장했던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일으켜
궁중에 뛰어들어 영류왕을 죽여서
영류왕의 시체를 토막내어 구렁텅이에 버렸고
영류왕의 동생 대양왕의 아들 고보장을 허수아비 왕으로 옹립하고
본인은 막리지가 되어 국권을 잡아서 사실상 왕아닌 왕이 되었습니다
<라봉봉>원래 연개소문 이야기까지 하고 고구려 인물들 이야기를 끝내려했는데
연개소문 기록이 의외로 굉장히 많아서 다음 이야기에 쓰겠고
당시 고구려와 국제 정세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1차 세계대전 전까지 수나라의 113만 대군은 전무후무한 세계최고 대군이었다 하며
과장좋아하는 중국역사지만 이때만은 과장된 기록이 아니라 할 정도이니
그 고대시대에 통일제국 수나라가 통일한지 얼마 안되서
고구려 원정에 100만대군을 편성했다는 점은
그만큼 고구려의 위엄이 엄청났던 것고
광개토대왕때부터 고구려 천하관을 펼치며 민족적 자부심이 엄청나진
한국 고구려인들을 상대하려
초강대국 통일중국이 전 국력을 쏟아붓고도 패배한 사건입니다
한국 군사정권대부터
우리 민족은 5000년동안 가난했고
변방의 약소국으로 살아오기만 하다
단군이래 겨우 박정희 , 전두환 때부터 보릿고개와 가난을 면했다 이런식으로
군사정권을 옹호하는 역사관이 만들어져
한국 국민들에게 주입됬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체계적이고 카리스마있게 경제개발을 한 업적은 있지만
좀 본인 치적을 위해 불법을 저지르거나 과장된 부분도 부정할 수 없고
굳이 한국뿐만 아니라 독일 화학자 하버의 질소비료 발명전까진
초강대국이었던 중국이던 영국이던 다 농사안되면 굶어죽고 가난하던 시절이고
굳이 박정희가 없었어도 독일에서 개발된 질소비료는 전세계로 퍼졌기에
굶어 죽는 사람들이 없었을 것은 사실 팩트입니다
이전부터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우리 역사와 민족적 자부심은
일제에 의해 상당히 훼손 , 축소됬고
조선인들은 시기와 질투를 좋아하고 겁이 많다는 식의
일제식 역사관으로 1차훼손 ,
군사정권을 겪으며 군사정권의 경제개발을 과시하기 위해
우리 민족은 단군이래로 항상 반만년간 가난하고 약소국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노릇을 했는데
박정희 , 전두환의 노력으로 우리가 해냈다며 과시하다
그런식으로 민족적 자부심이 2차 훼손됬고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이런 역사관으로 공부한 한국기성세대들이 많고 오늘날 한국인의 역사관으로 형성됬는데
실제로 한국은 5천년 역사동안 중국과 자웅을 겨루던 시기가 여럿 있었고
그 말은 이 작고 작은 우리 한국이
세계사에서도 세계 초강대국 노릇을 몇번 하기도 했다는 점이고
한국은 결코 약소국이나 작은 나라도 아니었으며
지금 한국은 작긴 작지만
한국역사를 항상 작은 나라였다고 주입하는 것은 식민사관이나 타국의 견제도 있을 것이니
너무 거기에 휘말리면 안된다 생각합니다
이번 고구려 이야기 쓰면서 조선상고사를 많이 참조했는데
원래 한국사가 김부식 삼국사기가 근본이고
그 위에 빠진 이야기를 일연 삼국유사가 채웠고
그 위에 빠지거나 디테일한 이야기를 신채호 조선상고사가 채운 형세고
삼국사기에 축소되있거나 나오지 않는 고구려 인물들이
조선상고사에 잘 설명되있고
조선상고사가 무슨 신채호의 소설이 아니고 신채호 선생님이
비록 개인 주장을 강하게 쓰셨음에도
각지 탐방하고 고서들 긁어모아 남긴 역작이기에 충분히 당시 정세와 교차해보면
일리가 있는 주장들이고
삼국사기만 보면 이해가 잘 안될 수 있는 퍼즐들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느낌입니다
당시 고구려가 무슨 민족적 기상이 너무 강하고 호전적이기만 해서
중국과 대결하고 고개를 숙이지 않고 그런게 아니라
당시 국제정세상 당시 고구려 나름대로 최선의 수를 둔 것이었고
고구려의 수는 이후 만주의 유목민족들이 체계화시키고 발전시킨 셈이고
중국의 통일이라는 큰 변수가 등장하자마자
고구려는 그렇게 한국을 통일하려 시도하거나 중국을 침공하려 시도하며
우왕좌왕하다 실패하고
(이후부턴 유목민족들이 한국은 버리고 중국에 군사력을 몰빵하며 선택과 집중을 함)
고구려는 너무나 빠른 속도로 통일중국과 전쟁으로 황폐화되고 크나큰 위기를 맞게 되었고
영류왕도 이런 상황에서 우왕좌왕하던 사이
연개소문이 일어나 영류왕과 친중파를 살해하고 국권을 잡게 되었고
삼국사기만 보면 반역자로만 여겨질 수 있는 연개소문이
왜 쿠데타를 일으켰고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는 조선상고사에 상세히 기록되있고
비록 쿠데타는 쿠데타지만 연개소문은
단순한 사리사욕이나
일개 감정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무식한 일개 군벌무장은 아니었고
자신만이 위기의 고구려를 구할 수 있다고 믿고
당시 어떤 판단과 논리를 세우고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점이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박정희 대통령과 굉장히 비슷하고
두 인물 다 쿠데타 이후에도 오랜기간 안정적인 철권통치를 구현했고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갖췄다는 점에서
참 비슷한 인물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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