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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말기 인물들>

[웅진백제 시대]

[웅진의 유래]

[문주왕의 웅진백제]

[부여곤지]

[해구의 난]

[어린임금 삼근왕]

[동성왕의 2차 나제동맹]

[백제 중흥군주 무령왕]

[무령왕릉]

[전륜성왕]

[성왕의 사비천도]

[관산성 전투]

[용맹했던 위덕왕]

[아좌태자]

[임성태자]

<라봉봉>

 

[웅진백제 시대]

그렇게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군에 붙잡혀 목이 참수되고

백제 수도 한성(위례성) 은 불타고 한성백제는

백제 시조온조왕이 도읍을 정한 기원전 18년부터 서기 475년까지

493년이라는 500년 역사를 뒤로하고 멸망했고

 

개로왕의 태자 부여문주가 살아남아 웅진(곰주 , 공주) 으로 남하해

웅진을 새 도읍으로 정하고 475년~538년 동안의 64년간 백제 두번째 수도인

웅진백제 시대가 시작됩니다

 

[웅진의 유래]

웅진의 유래는 참 재미있는 한국사의 하나인데

웅진의 웅은 곰웅자로서 웅담 , 웅녀할때 그 웅이고

이름답게 곰에 대한 전설이 있는 도시였습니다

 

웅진은 한글로 쓰면 곰나루 혹은

고대 한국어로 고마나루 , 고마나리로 불렸는데

일단 나루 , 나리는 뱃나루 , 뱃나루터 , 나룻배 할때 배를 정박하는

일정한 지역을 뜻하는 순 우리말이고

 

고대 백제의 영향을 깊게 받은 일본어에서

곰을 쿠마라 부르고 있고

'리락쿠마' 라는 곰 캐릭터가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것 같이

한국어로 고마 , 곰 이렇게 변화했던 것입니다

 

일본 만화캐릭터 리락쿠마

 

일본 아키히토 천황을 만난 쿠마몬

 

<한국사서 삼국사기 , 삼국유사 , 신증동국여지승람>웅진

 

<중국사서 양서>고마

 

<일본사서 일본서기>웅진 = 구마나리

 

웅진 , 곰나루에 대한 유래는

약간 웅녀설화가 생각나기도 하고

짧은 기간이나마 한때 한국 대표국가의 수도기도 했고

수간물 + 워낙 독특한 전개의 스토리여서

 

놀랍게도 지역구전으로 현재까지도 공주일대에서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고

구전설화등을 요약해보면

 

옛날 백제시대 웅진 북부지역 연미산에는 사람의 말을 하는

암콤(암컷 곰) 이 살고 있었는데

암콤은 혼자여서 늘 외로웠고 남편 갖기를 소망했는데

그러다 나무하던 나무꾼 남자 한명을 납치해서 (역보쌈잼)

굴로 데려갔고

괴력의 암콤은 굴 입구를 바위로 막은 뒤

남자에게 자기가 사냥해서 잡아온 먹이를 주면서

남자에 대해 완전한 사육을 시작합니다

 

역 사육

 

결국 시간이 지나고 남자와 암콤은 정이 들어

둘 사이에 새끼가 태어났고

새끼는 남자의 자식이었으면서도

생김새는 영락없는 곰이었습니다(모계유전)

 

갈수록 산으로 가는 라봉봉 역사이야기..

 

옛날에 암콤은 혹시 나무꾼이 도망칠까 두려워

돌로 입구를 가두며 남자를 사육했지만

둘째를 낳은 이후부터는 안심하는 마음이 들어서

더이상 남자를 가두지 않았고

 

남자는 그 기회를 틈타 곧바로 줄행랑 쳐서  금강을 건너 도망쳤고

암콤은 서럽게 울부짖다가 새끼들을 껴안고 강으로 뛰어들어 죽었고

그때부터 금강을 지나는 배들이 풍랑으로 침몰했고 연미산 일대에

해마다 흉년이 들었는데

 

이 소식은 백제의 왕에게도 알려졌고

백제 임금은 인근에 작은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 곰의 혼령을 위로했고

얼마 후 금강이 다시 잠잠해져 배가 침몰하는 일이 줄어들었고

이 일로 인해 이곳은 웅진 , 곰나루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ㅠㅠ 백제기록은 왜캐 슬픈게 많노)

 

곰나루 곰 기념비 , 한국관광공사

 

공주 곰사당과 곰비석 웅신단비

 

이런 이유떄문에 공주는 나름 유명해졌고 

공주는 풍요로운 금강을 끼고 있는 도시로서

오늘날도 밤과 꿀로 유명하고 (공주밤 , 공주밤꿀) 

나름 곰이 겨울잠을 자기전

도토리 , 밤 , 돌배를 먹고 체중을 30%가량 늘린다거나

꿀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꿀에 환장한 동물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결국 슬프게 죽어버린 암콤의 염원은

밤과 꿀이 넘치는 곰들의 지상낙원이 된

공주의 오늘날로 어찌저찌 이루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햄스터들의 천국 해씨별과 비슷)

 

곰꿀별 공주

 

[문주왕의 웅진백제]

슬픈 암콤의 전설을 뒤로하고 ..

하여튼 ,

이렇게 나름 좋은 꿀땅이었던 공주는

한성백제 멸망후 풍전등화의 위기속

백제의 두번째 수도로 낙점되었고

 

백제 두번째 수도 '웅진'

 

죽어버린 부왕을 뒤로하고 남하한 백제태자 부여문주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백제 재건이라는 막중한 책명이 주어졌고

 

이전 백제수도 한성이 고구려군에 포위됬을때

개로왕은 문주를 신라에 보내서 구원을 요청케 했고

문주는 신라에게 구원병 1만을 얻어 돌아왔는데

고구려군사는 비록 물러갔지만 성이 파괴되고 개로왕이 사망하여

문주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습니다

 

(참고로 한성 , 한강유역은 교과서 그림과 달리

틈틈히 서로 뻇고 뻇기고 먹고 철수하던 중간지대였음)

 

백제 22대왕 문주왕은 성격이 우유부단했지만

백성을 사랑했으므로

백성들 역시 그를 사랑했습니다

 

문주왕은 즉위후 한강일대는 더이상 수도로 기능하기 어렵다 판단해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고

구백제 , 한성백제를 뒤로하고

뉴백제 , 웅진백제 시대를 열게 됩니다

 

[부여곤지]

다행히 폭군이어서 폭군짓하다 나라 말아먹은 개로왕과 달리

문주왕은 아버지 안닮고 할아버지(비유왕) 닮아 명군이어서

위기속 혼란의 백제를 안정시키는데 주력했고

동생 부여곤지를 내신좌평에 임명하는데

부여곤지는 내신좌평 임명후 5개월만에 사망하는 인물이지만

굉장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곤지왕 상상화 , 김영화 화백

 

곤지는 한국기록으론 문주의 동생이자 개로왕의 아들로서

일본기록으로는 비유왕 아들이며 개로왕 동생이라는데

굉장한 왕가의 직계 왕족이었고

학계에서는 곤지를 개로왕 동생으로 보고 있다고 하고

 

문주가 곤지 형 혹은 개로왕 동생이긴 한데 

곤지가 능력이 출중해 왕위를 못이었음에도

백제 정치계에서 크게 중용되었다 보고 있고

 

곤지는 그럼에도 태자 , 맏이가 아니었고

정치적 부담감 , 맏이는 본국에 남게하고

뛰어난 동생은 섬멀티에서 굴리려는 등 이런저런 이유들로

왜로 보내졌고 기록엔 없지만

일본으로 건너간 곤지는 아스카베 일대를 경영하며 기반을 닦았다는

전승이 전해져 옵니다

 

곤지가 굉장히 중요한 이유는

일본과 관계 외에도

백제 중흥군주이자 위기의 백제를 부흥시킨 명군이었던

무령왕과 관계가 깊은 인물이라는 점이고

 

일본서기에서는 개로왕은 아우 곤지를 왜에 사신으로 보낼때

곤지의 간청에 따라

자신의 임신한 왕후를 곤지의 아내로 삼아 보냈고

 

(고구려의 침공에 두려웠던 개로왕은 급하게 임신한 아내를

안전한 섬멀티 왜로 보내지 않았을까 싶고

나름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그시대에는 외국가는데 목숨을 걸어야했고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기도 어려웠기에

 

그냥 쿨하게 동생한테 아내를 넘겨버린 개로왕이었고

도미부부 건들이던 폭군색골이었던

개로왕 성격상 어짜피 아내는 또 구하면 되니까

위기방편 겸 겸사겸사 그냥 쿨하게 형사취수제 느낌으로

아내를 준 거일수도 있고

 

아니면 현대적으로 보면

일단 당시 이혼제도가 없었기에

좀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 복잡한 불륜사태도 많았을 수 있고

곤지가 이전부터 형수 , 왕후와 연모했는데

목숨걸고 왜로 가는 조건으로 형한테 딜을 했고

형도 마침 왕후를 바꾸고 싶어서 대충 동생한테 넘겼을 수도 있음)

 

그러다 왜에 가던 도중 개로왕 부인 겸 곤지의 새아내는

산기를 느껴서 후쿠오카 북쪽 가카라시마 섬에 정박하여

무령왕을 출산하는데

 

 

일본 가카라시마 섬 무령왕 출생지

 

일본어로 섬이 시마라 하고(가고시마 , 하시마섬)

무령왕은 이로인해 섬왕 , 사마왕이라 불렸고

본명이 부여사마입니다

 

이로인해 곤지는 뛰어난 능력 외에도

무령왕 아버지라는 점에서

굉장히 백제사 뒤편에 가려진 또다른 인물이었고

 

문주왕은 수도를 옮긴 위기속에서

혈육이었던 곤지를 불러서 백제 수상격인 내신좌평에 임명하며

나름 위기를 타파하려 했지만 곤지는 곧 사망하였고

 

곤지는 비록 사망했지만

이후 그의 두 아들 동성왕과 무령왕이 즉위해 위기의 백제를 구하게 되기에

부여곤지는 이름도 뭔가 연지곤지마냥 간지가 있고

왕은 못되지만 두 왕의 아버지가 됬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백제인입니다

 

[해구의 ]

하여튼 ,

백제를 구하려는 여러 노력에도 문주왕 4년 8월 가을 ,

병관좌평(국방부 장관) 해구는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하여

법 질서를 문란케하니 문주왕은 이를 제어하지 못했고

다음달인 9월에

문주왕이 사냥을 나가 외부에서 묵었을때

해구가 도적으로 하여금 문주왕을 해치게 하여

문주왕은 암살당합니다

 

[어린임금 삼근왕]

문주왕이 알 수 없는 도적에게 사망한 뒤

사건의 전말을 모르던 백제조정은 해구가 범인인 것을 모르던 상황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문주왕의 13살배기 어린 맏아들 부여삼근이 왕위를 이어

백제 23대왕 삼근왕이 되었고

위기의 상황속에서 국방부 장관인 해구의 권한은 더욱 강해졌고

아무것도 모르던 삼근왕은

군사임무와 나라정사에 일체의 권한을 좌평 해구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다 삼근왕 2년 봄

좌평 해구가 은솔 연신과 무리를 모아

대두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삼근왕이 2천군사로 토벌케 했지만

이기지 못했고

삼근왕은 다시 덕솔 진로에게 명하여

정예군사 5백으로 해구를 죽이게 했고

연신이 고구려로 도망치자

그의 처자들을 체포하여

웅진 시장에서 목을 베었습니다

 

겨우 반란을 진압한 삼근왕은 재위 3년만에 사망합니다

 

[동성왕의 2 나제동맹]

삼근왕이 사망하자

문주왕의 아우 부여곤지의 아들 부여모대가 왕위를 이어

백제 24대왕 동성왕이 되었고

동성왕은 담력이 크고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습니다

혼란스러워 짧게 재위했던 문주왕 , 삼근왕과 달리

동성왕은 22년을 재위하며 본격적인 웅진백제의 시작을 알린 인물이었고

 

동성왕은 동성왕 15년 3월 봄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했고

신라왕이 이찬 비지의 딸을 시집보내서

백제는 이전 백제 비유왕+신라 눌지왕 때처럼

동성왕때 이르러

백제 동성왕+신라 소지왕의 제2차 나제동맹이 이루어집니다

 

제 2차 나제동맹

 

이전 선물만 주고받은 비유왕때의 1차 나제동맹과 달리

동성왕때의 2차 나제동맹은 백제와 신라가 국혼을 맺은

'결혼동맹' 으로서 그 성향이 더욱 강하였고

당시 고구려가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으며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백제와 신라에 압박을 하던 상황이었기에

위기감이 커진 백제와 신라는 결혼동맹까지 맺으며

적극적으로 고구려에 대항하려 했습니다

 

동성왕 16년 7월 가을

고구려와 신라가 살수벌판에서 싸우는데

신라가 이기지 못하고 퇴각하여 방어하다

고구려 군에게 포위됬는데

동성왕이 3천군사를 보내 구원하자 포위가 풀렸고

이 시기부터 점차 백제 , 신라가 동맹으로 강해짐을 깨닫고

고구려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게 됩니다

 

다음달은 8월 가을에는

고구려가 치양성을 포위하자

동성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고

신라왕이 장군 덕지에게 명령해 구원케 하니

고구려 군사가 물러갔습니다

 

(나제동맹 성능 든든합니다 !)

 

동성왕은 그렇게 위기의 백제를 구원하나 싶었지만

하필 말년에 궁궐공사에 빠져버렸고 (ㅡㅡ;;)

 

동성왕 21년

백성들이 굶주려 잡아먹으며

도적이 많이 생기자 신하들이 창고를 풀어 구제하자 했지만

동성왕은 듣지 않았고

한산 백성 2천명이 고구려로 도망쳤고

 

다음해인 동성왕 22년 ,

동성왕은 대궐 동쪽에 임류각을 세우고 연못을 파고 기이한 짐승을 길렀고

간관(기자)들이 항의하는 글을 올렸으나 듣지 않았고

다시 간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해

대궐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방송국 폐간)

 

신하들의 간청도 씹어버린 동성왕은

노름에 빠져 측근들과 임류각에서 잔치를 하며 밤새 실컷 즐겼고

 

다음해 동성왕 23년

백제에서는 가뭄 , 노파가 여우로 둔갑 , 호랑이 출몰 등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고

동성왕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던 백가는

사람을 시켜서 동성왕을 칼로찔러 죽였고

12월에 이르러 동성왕이 사망하니

시호를 동성왕이라 했습니다

 

[백제 중흥군주 무령왕]

동성왕이 사망하자 그의 둘째아들(삼국사기) 혹은

곤지의 아들이었던 부여사마가 왕위를 이어

백제 25대왕 무령왕이 되었고

무령왕은 모처럼만에 등장한 백제 명군 of 명군 이었던 인물이었고

특이하게 외국(일본) 에서 출생한 인물이었고

신장이 8척(190cm) 이었고 눈매가 그림같았으며

(키 190cm 존잘남 ㄷㄷ;;)

 

인자하고 너그러워서 민심이 그를 따랐습니다

 

백제 중흥명군 무령왕

 

무령왕은 즉위후 반란을 일으킨 좌평 백가를 진압했고

백가가 나와서 항복하자

무령왕은 백가의 목을 베어 백강에 던졌습니다

 

무령왕은 22년간 즉위하며 안정적 치세로

백제 중흥을 이끌었던 중흥군주였고

 

무령왕은 북부로는 고구려의 황해도까지 공격하는 등

웅진으로 밀려버린 백제 전선을 북방으로 끌어올려서

한강유역을 탈환 , 재지배에 성공하였고

 

한성 수복이라는 업적 하나만으로

백제에선 명군 중 명군이라 할 수 있고

 

다시 빛나기 시작되는 백제

 

'추억' 같은건 필요없어 그야 '지금' 강하게 깊게 사랑하고 있으니끄아 !! , 케이온

 

무령왕은 즉위후 동성왕을 시해한 귀족세력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했고

양서의 백제전에서는 22개로 운영되던 담로(백제 지방) 에

부여씨 왕족을 보내 통치하게 해서 중앙집권적 질서를 세웠다하고

제방건설 , 백성구휼 등 민생 안정에도 힘썼습니다

 

당시 수도를 잃고 남하한 백제 부여씨 왕족에 대해

귀족들의 무시가 강했던 시기에서

웅진백제로 넘어오며

한성일대 귀족들의 힘이 약화되고

특히 충청도 일대 귀족들의 권세가 강해지게 되던 시기였고

이런 상황에서 무령왕은 이전 동성왕이 흉폭하게 귀족들을 찍어누르다

시해당한 것과 달리

적절한 방법으로 안정적인 방식으로 왕권을 강화한듯 합니다

 

무령왕 상

 

[무령왕릉]

무령왕은 이외에도 중국 남조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강화했고

이로인해 무령왕 사후 양나라의 벽돌식 건축의 영향을 받은

무령왕릉이 건설되는데

 

무령왕릉은 백제사의 기적같은 발굴로서

거의 한국판 투탕카멘 무덤 발견같은 대사건이었고

도굴이 쉬웠던 고구려 , 백제 무덤은 입구가 있는 굴식무덤이라

완전 돌로 무덤을 덮어버려 산을 만들어 버린 신라에 비해

고구려 , 백제 무덤은 온전한 것을 찾기가 어려웠는데

무령왕릉은 기적같이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어

한국 , 일본 사학계의 충격을 준 대사건이었고

이로인해 호화로운 백제 왕실의 금제 유물 외에도

일본서기 기록의 정확성이나

여러 기록들이 교차검증되는 중요한 발견이었습니다

 

무령왕릉 , 유네스코 세계유산

 

무령왕릉은 무덤 양식은 중국 양나라 벽돌식 구조 ,

무덤 관은 일본 왜의 금송으로 제작되었고

백제가 그만큼 해양강국으로서 한중일과 큰 교류를 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입니다

 

무령왕릉 출토유물

 

무령왕의 발베개

 

무령왕은 그렇게

쇠퇴하던 고구려에 반격을 가해 500년 수도 한성을 수복하고

마한의 남은 잔존세력을 전부 흡수했으며

송 , 왜와 교류하며 백제의 국위를 다시 세우고

백성들을 아껴 인망이 두터운 인물이었고

백제 후기에 나타난 성군으로 뽑히는 인물입니다

 

[전륜성왕]

무령왕이 사망하자

무령왕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부여명농이 왕위에 올라

백제 26대 성왕이 됬는데

그는 지혜와 식견이 뛰어나고 일을 처리함에 결단성이 있었고

무령왕이 사망한후 명농이 왕위에 오르자

백성들이 그를 성스러운 왕 , 성왕이라 불렀습니다

 

이름이 예사롭지 않은 인물인데

이건 그가 단순히 성스러운 임금이어서 성왕이 붙은게 아니라

당시 고구려 , 백제 , 신라는 인도-중국을 거쳐 한국에 도입된 불교가

한창 유행하고 있어 왕가에서도 깊이 부처님을 믿고 있던 상황이었고

이로인해 요즘도 한국 크리스챤 목회자 가정에서 아들 이름을

김요셉 , 김바울 등으로 이름짓듯이

당시 한국 왕가에서도 가족들 이름을 불교식으로 붙였고

성왕은 바로 당시 유행하던 '전륜성왕' 사상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전륜성왕 사상이란..

전륜 , 구르는 바퀴라는 뜻으로서

전륜성왕은 수레바퀴를 타고 다니며

정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인물로서

금륜왕 , 은륜왕 , 동륜왕 , 철륜왕 순으로 나뉘고 있고

금륜이 4개국 , 은륜이 3개국 , 동륜이 2개국 , 철륜이 1개국을 다스린다 하고

 

(금수저 , 은수저 , 동수저 , 쇠수저랑 비슷하노 ㅋㅋ)

 

한국에서도 유행했던 전륜수저사상

 

제일 하빠리인 철륜왕은 전쟁으로 세계를 정복해 다스리고

동륜왕은 압도적 무기로 적의 기를 죽여 지배하고

은륜왕은 사신을 보내서 외교로 다스리고

금륜왕은 덕으로 세계를 정복해 다스린다 하며

대충 전륜성왕이란건 인도에서 킹엠페러 이런 뜻으로

조오오옹나 쎈 문무겸비의 임금이라 보면 되고

 

전륜성왕을 표방한 인도정복왕 아소카왕의 돌기둥속 바퀴

 

아소카왕 바퀴문양을 가져온 인도 국기

 

전륜성왕과 관련된 전설이 바로

부처 , 고타마 싯다르타가 태어날때 이야기가 있는데

 

싯다르타가 태어날때 아시타 현자는

얼굴을 흰 양산으로 가리고 빨감 담요에 싸여 있는 황금보물같은 아기를 보고

기뻐서 가슴에 안았고

위대한 석가족의 아이 , 아기 부처 , 싯다르타를 보고

그 남다른 상을 살피더니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싯다르타를 안고 있는 아시타 선인 , 금강신문

 

<아시타 현자>이 아기는 최고로 뛰어난 사람 ,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합니다

속세에 있으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고 ,

출가하면 법륜을 굴려 만인을 제도하는 대성자 부처가 될 것입니다.

 

그러더니 현자는 자기의 얼마남지 않은 삶을 생각하고 말없이 눈물을 흘렸고

현자가 우는 것을 보고 석가족의 왕 정반왕(싯다르타 아빠) 이 물었습니다

 

<정반왕>갑자기 왜 슬퍼하십니까 ?

혹시 우리 왕자에게 무슨 장애라도 있단 말입니까 ?

 

석가족의 왕이 걱정하는 것을 보고 현자는 눈물을 거두고는

 

<아시타 현자>너무 걱정 마십시오

왕자님에게 어떤 불길한 상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소견 좁은 늙은이의 관상에서 왕자님을 보면

분은 평범한 상이 아닙니다

정성껏 길러주십시오

왕자는 깨달음의 최고 경지에 이를 것입니다

 

가장 으뜸가는 맑고 순수함을 것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고 그들을 불쌍히 여긴 나머지

진리의 바퀴를 굴릴 것입니다

 

그의 청정한 덕행은 널리 퍼져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늙은이의 삶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늙은이에게는 죽음이 찾아올 것인데

늙은이가 죽으면 비할 없이

힘을 가진 이분의 가르침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너무 아쉬워서 슬퍼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윤 , 륜 , 바퀴라는 말은 매우 자주 나오는 말이고

바퀴는 동그란 수레의 축으로서

스스로 굴려 수레를 나아가게 하고

앞으로 , 뒤로 , 동서남북으로 가게하는 도구이며

인간의 생로병사와 인연도 결국 바퀴처럼 돌고돈다는 인도식 사상이어서

전륜성왕 이외에도 다시 돌아 살아나는 불교의 '윤회' 사상도 굉장히 유명하며

굉장히 유명하고 한국사 임금들도 전륜성왕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굉장히 중요한 사상이라 보면 됩니다

 

생로병사에 고뇌하다 전륜성왕이 되길 포기하고 부처가 되기 위해 출가를 결심하는 싯다르타 , 사문유관

 

즉 불교에서 가장 킹왕짱 두명이 전륜성왕과 부처인데

둘다 대단한 뜻이긴 하지만

전륜성왕은 분명 대단하고 좋은 임금이나 엄연히 왕이라 지배할 백성과 나라가

필요한 존재여서 속세와 연관이 있었고

 

부처는 왕이 아니어도 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인간의 최고의 선이었고

 

(참고로 싯다르타를 보통 부처님이라하지만

기독교의 인물 예수가 말그대로 예수님을 가르키는 말인것과 달리

불교의 부처는 깨달은 자라는걸 통칭하는 말로서

누구나 경지에 이르면 부처가 될 수 있어 좀 넓은 개념임)

 

이로인해 정반왕은 아들 싯다르타가 속세에 머물러

태자로서 자신의 왕위를 계승해 뛰어난 왕이 되어

약소국 카필라국과 백성들을 부강하게 해주길 바랬고

싯다르타는 결국 속세를 나와서 태자의 자리를 버리고

왕중의 왕 전륜성왕이 아닌 세상의 왕 부처가 되었다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왕 바로 밑 개념인 전륜성왕도

나름 왕중의 왕 , 당시 개념으로도 인도황제라는 개념이었기에

세상 여러나라의 왕들이 전륜성왕에 복속되어 통치를 받는 개념이라

부처는 너무 넘사벽이라 일개 왕들도 되기 너무 어렵기도 해서

 

(저는 군주로서

부처의 영역에 도달한 임금이 한글창제한 세종대왕정도라 보고 있고

이공계의 부처라하면 아인슈타인 급이기에

부처되기는 노벨상 받는 난이도와 비슷하다 생각합니다)

 

동양 군주들은 이렇게 자기를 성스러운 왕 , 성왕이라 칭하는 경우들이 있었고

비록 포르쉐나 맥라렌 , 랜드로버가 조오옹나 비싸지만

막말로 공장 1년만 다녀도 중고로 한대 뽑을 수는 있기에 (--;;)

노벨상 받는 난이도보단 더 쉽고

적당히 이웃집 찐따들 기죽이고 성공한 사람 행세하기는 좋은차라

왕들도 부처되기는 너무 어려워서 이렇게 자신을

성왕이니 카이사르라는 등 칭하며

가오를 잡으는 경우가 많았고

 

서양으로는 수많은 군주들이 예수처럼 살기는 어려우니

엠페러나 카이사르를 참칭했듯이

동양이나 한국에서는 이렇게 부처처럼 살기는 어려우니

황제나 전륜성왕을 참칭했다 보면 됩니다

 

나름 길고 긴 설명이 필요할 만큼

동양사를 깊게 보면 알아야할 동양에서 중요시한 사상이었고

 

참고로 후삼국시대 궁예도 전륜성왕-미륵 신앙 영향을 받아 자신을 미륵이라 주장했음 , 사극 태조왕건

 

비슷한 시기 신라역시

백제 성왕의 라이벌이었던 신라 최전성기 임금 신라 진흥왕은

아들 이름을 전륜성왕의 영향으로

아들 이름을

태자 김동륜 , 왕자 김사륜 , 김구륜으로 지으며

전륜성왕처럼 조오옹나 쎈캐로 자라기를 기원하였고

 

성왕 , 진흥왕시기 불교와 전륜성왕 사상이 국가적으로 유행했고

한국 역시 중국 황제에 대등한 전륜성왕이라 보여주는

나름 자주적 노력이라 보면 됩니다

 

결론은 장인 성왕과 사위 진흥왕은

둘다 부처님에 감화되다 림보상태에 빠져서 중이병이 쎄게 온 상황이었다능..

 

사왕진안을 펼치다 삐끗해서 중2병에 빠져버린 성왕 , 중2병이라도 사랑이 하고싶어

 

[성왕의 사비천도]

하여튼 ,

다시 성왕 이야기로 돌아가서

성왕은 이름과 달리 백제판 고국원왕(전쟁에서 죽은 고구려임금) 으로서

애통과 비운의 임금이었는데

 

즉위 초부터 고구려한테 뚜드려 맞았는데

쎈캐였던 아버지 무령왕과 달리 이기지 못하였고 (ㅠㅠ)

 

이외에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인 사비천도가 있는데

이전 웅진백제는 한성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에 함락당한 후

임시로 옮긴 전시수도라

웅진은 방어에는 좋지만 터가 좁은 편이라

오래쓸 나라의 중심지로는 아쉬운 지역이었고

 

또한 웅진 토착귀족들에게 백제왕이 암살당하는 등 여러 정치적 혼란이 있었기에

성왕은 귀족 견제 및 나라의 국운을 다시 세우고자

터가 넓고 기존 수도인 웅진성과 가까웠던

사비성(사비=소부리)으로 수도를 옮겼고

사비천도를 단행하였고

사비지역의 토착귀족새력인 사씨(사택씨) 의 적극적 후원을 받게 됩니다

 

백제 3번째 , 백제 마지막 수도 사비(소부리)

 

사비천도는 함정을 조심해야함

 

또한 성왕은 국호를 남부여라 개칭하며

부여 정통 후손으로서의 정통성을 강조했고

백제는 왕실 국성이 부여씨기도 하며

나라이름이 남부여라는 것은

부여의 후예중 가장 우두머리란 의미로 해석할 수 있고

 

당시 백제와 가장 원수관계였던 고구려 역시 부여에서 나온 국가기에

백제는 우리가 고구려보다 더 먼저 부여에서 계승했고

고구려는 부여의 아류국가이며 백제야말로 부여의 정통국가다 !

이런 프로파간다도 됬기에

성왕은 나름 진지하게 이름을 남부여로 바꾸었지만

이미 당시 민중들이나 이후 민중들에게도 백제가 뇌속에 너무 깊게 박혀있었기에

남부여는 안습하게 결국 다시 백제로 고정됩니다

 

[관산성 전투]

백제 성왕은 신라와 연합해 다시 고구려에 대해 반격을 시작해

백제와 신라군은 함께 북진하였고

 

신라군은 강원도 일대를 ,

백제군은 경기도 지역을 침공하여 고구려 일대를 빼앗는데 성공 ,

그 결과 백제는 한강 하류(경기도) 6군을 손에 넣었고

신라는 한강 상류(강원도) 10군을 손에 넣게 됩니다

 

<일본서기 백제의 성명왕이 고구려를 쳐서 한성을 차지하고 평양을 침>

(551)에 백제 성명왕(성왕)이 친히 백제 군사와

나라(신라와 가야)의 병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쳐서 한성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한 진군하여 평양 쳤다. 모두 6군의 땅은 고지를 회복한 것이다

 

백제와 신라의 한강 장악 , KBS 역사저널 그날

 

점차 신라와는 미묘한 균열이 생기는데

예전 백제와 신라가 둘다 찐따였던 시절에는

서로가 너무 급하고 필요해서 일치해서 단합하였지만

막상 똥 마려울때와 똥 싸고난뒤 심정이 다르듯이

둘이 연합하고 강력해져서 고구려를 손쉽게 물리치고

백제와 신라는 같이 북진하여 영토를 뻥튀기 수준으로 불리는 경지에 이르게 되자

슬슬 딴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고

 

양쪽이 공평한 느낌인 나제동맹도

점차 신라 주도로 끌려가기 시작했는데

신라는 진흥왕 이전 지증왕이라는 엄청난 현군이 등장해

강도높은 내정개혁을 완료하고

과학기술이 국가적으로 장려되기 시작해 강대국으로 일어나던 시기였고

지증왕 이전까지 신라는 백제와 고만고만한 찐따연합 , 찐따클랜원이었다면

지증왕떄부터 신라는 엄청난 슈퍼찐따가 되어버렸고

한창 쇠질을 시작하던 조그만한 치토스같던 신라는

지증왕이라는 슈퍼헬창왕의 등장으로

점차 피부도 구리빛으로 변화하고 압도적인 블랙맘바 , 아나콘다가 되어

언더아머 옷을 입고 3대 500을 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고

 

갑자기 강해진 찐따 신라 ;;

 

지증왕은 국내시장을 열어 자본주의를 활성화해서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었으며

선박이용을 제도화해서 신라의 해군력이

이때 엄청나게 증가했다고 저는 보고 있는데

지증왕대 이르러 찐따같던 신라는 멀리 배타고 원정가서

울릉도 , 독도를 정벌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고

 

해상강국 백제가 해군 ,

유목국가 고구려가 육군에 강한 이미지가 강하지만

저는 지증왕때 이르러 해군력을 신라가 백제를 압도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보고있고

또한 과학기술 발달로 쇠뇌기술(석궁기술) 이 타국가들보다 압도적으로 발달해

지증왕때부터 점차 고구려도 제압할 수 있는 육군력도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생각하고 있고

 

삼국통일때 백제 고구려를 제압하는 근원적 무력과

더 나아가 초강대국 당나라와 물량빨로 밀던 야만의 일본도 제압할 수 있는

통일신라의 압도적 육군 , 해군력이 신라 지증왕때부터 시작됬다고 보고 있고

이때부터 계획된 신라 지증왕의 해양계획이

삼국통일 , 나당전쟁 , 동아시아 바다의 패자 신라 장보고의 해군력 , 

신라해적의 일본약탈 ,

태조왕건의 후삼국 시대를 평정한 해군력까지 이어졌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즉 이미 백제는 신라 지증왕대부터 이미 신라에게

해양강국 백제가 남보다 자랑하던 해양권 , 무적함대까지 따이던 상황이었고

마치 스페인 무적함대 아르마다가 영국의 압도적인 함포개량으로 따이며

유럽 패권이 역전되는 현상이랑 비슷한 상황이었다 보고 있고

 

백제 성왕대 이르러서는 당시

백제는 저물어가는 해 스페인 ,

신라는 뜨는 해 영국의 시기였으며

신라가 이미지와 달리 항해술이 엄청났던 나라이고

백제인들은 더이상 그들이 자랑하던 바다도 안전하지 않게 되었고

이로인해 성왕대부터 나제동맹은 백제가 일방적으로 신라에 끌려다니고 있었고

백제는 신라라는 든든하고 강력한 동맹으로 이전 한강수도를 되찾아 기뻤지만

내심 신라가 고구려보다 더 강하단걸 느끼며 점차 불안해지던 상황이었고

 

신라 역시 본인들도 힘이 엄청 강해졌음을 점차 실감하게 되는데

점차 계속해서 자기들이 피흘려 활약하기만 하고

백제가 꿀땅을 떠먹기만 하는 관계가

점차 불편해지며 나제동맹에 균열이 생기고 있었고

 

(A deal is a deal)

 

성왕 31년 7월 가을

신라 진흥왕은 백제 동북 변경을 빼앗아 신주를 설치했는데

두려움을 느끼던 성왕은 진흥왕을 달래기 위해

10월 겨울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서

진흥왕은 성왕의 딸과 국혼을 맺게 됬고

 

당시 백제는 한강유역을 먹긴 먹었는데

한강이 비록 농사짓기는 최상인 풍요의 대지지만서도

이미 세월이 지나며 백제의 한강귀족들은 몰락했고

웅진 , 사비의 귀족들 힘이 너무 강하고

한강유역이 불타 재가됬으며 방어가 어려워 이전 개로왕대처럼

또 왕이 잡혀 죽을 수도 있는 안보상 취약한 지역이었기에

다시 되돌아가기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이런저런 이유로 백제군은 한강하류지역을 포기했는데

이틈을 타 신라가 한강지역을 전부 장악했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보고있고

 

굳이 한강지역이 없어도 웅진 , 사비에서 중국과 교류하기가 쉽고

이미 섬멀티였던 왜에서 자원도 꾸준히 들어오던 백제였기에

한강유역을 상실한 이후에도 백제는 국력이 의외로 엄청나게 강했던 상황이었고

 

반대로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하지 못하면 중국과 교류가 단절되는 상황이라

국가 역량을 총동원하고 백제와 동맹을 파기하면서까지 한강유역을 먹으려

혈안이 된 상황이었고

이전 한강지역을 차지했을때 백제 , 고구려가

한강유역의 안보적인 것은 경시하고 경제성에만 집중해

널찍하게 농사나 지으며 쌀이나 생산했던 것과 달리

신라는 한강지역을 차지하자마자

한강지역을 요새화화며 완전 군사도시로 만들어버렸고

계속해서 한강에 벙커 , 터렛 , 스파이더 마인을 쫙 도배하며 떡장갑을 두르며

남북 백제 고구려의 양면공격도 대응할 수 있게 한강유역을 신라 수도급으로

엄청나게 요새화 , 우주방어 작업을 하던 상황이었고

이로인해 삼국통일시기에는

정작 신라 수도가 취약해지고 한강이 방탄화된 상황까지 이르게 됩니다

 

한강을 먹자마자 우주방어하는 신라

 

한강유역을 뺏겨 씁쓸해진 백제 성왕은 너무나 강성해져버린 신라 진흥왕을 달래며

딸까지 시집보내지만 그러면서도 백제 , 신라에서는

이전 나제동맹 , 결혼동맹과 달리 계속해서 딴 소리들이 나오는 상황이었고

이런 와중에 성왕은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라를 쳐야한다는 태자 부여창의 강경한 주장을 받아들여

결국 마음을 바꿔 신라를 침공하려 백제 군사를 총동원했고

백제의 국력을 끌어모은 최대 회전이었던 관산성 전투가 벌어지며

백제와 신라 양국의 운명이 결정되게 됩니다

 

성왕 32년 7월 가을

성왕은 신라를 습격하려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었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 신라군에 살해당합니다

 

관산성 전투는 양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대회전이었고

백제는 무려 3만여명의 백제-가야-왜 연합군이라는 대군을 총동원한 상황이었는데

신라는 이전에 이런식으로 백제-가야-왜 연합에 다굴당하다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구원을 요청한 것과 달리

이제는 혼자서도 이 세 나라를 맞설 수준으로 엄청나게 강성해진 상황이었던게

그때와 달랐던 것이었고

 

용맹했던 백제태자 부여창은 직접 앞장서서

대군을 이끌고 신라영역으로 진격해 들어갔고

성왕은 전방에서 태자가 분전하는 것을 보고 태자의 건강을 염려하며 위로하려

보병과 기병 50명을 이끌고 가는데

정보를 입수한 신라군은 온 나라의 군대를 모아서

구천 혹은 고리산 일대에서 성왕을 사로잡는데 성공합니다

 

신라 장수 도도는

성왕을 사로잡고는 성왕에게 두 번 절하고는

 

<도도>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

 

하자 성왕은

 

<성왕>왕의 머리를 노비(너같이 천한 신라장수)의 손에 줄 수 없다

 

라고 하니

도도는

 

<도도>우리(신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

 

 했고 (신라인들은 약속 , 맹세를 굉장히 중요히 여겼음)

 

<일본서기>다른 책에는 명왕이

호상(의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성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성왕>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수는 없다

 

하고 머리를 내밀어 도도에게 참수당했습니다

 

성왕의 죽음

 

(분서왕은 낙랑자객에게 암살당하고

개로왕은 고구려군에게 참수당하고 

성왕은 신라군에게 참수당하고

국제적으로 바람잘날 없던 백제 임금들..)

 

이로인해 백제는 이전 고구려와 원수진것에 이어

신라와도 깊은 원수를 지게 되었고

더더욱 왜와 동맹을 강화하며 강성해진 신라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게 되었고

삼국시대 후기에 이르러서는 한반도에도

우경 , 사람의 힘이 아닌 소로 농사를 짓는 과학적 농경의 도입으로

점차 인구가 증가하며 전쟁의 양상도 이전 수천명의 소규모 게릴라전에서

수만명이 참살당하는 잔혹한 수만규모 대회전으로 바뀌고 있었고

 

국제 정세 역시 이후 중국에서 통일제국 수나라가 등장하며

점차 한반도 역시 통일의 기운이 감돌게 되며

점차 백제는 그 찬란한 역사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갑니다

 

[용맹했던 위덕왕]

성왕이 신라군에게 참살당하자

그의 뒤를 이어 태자 부여창이 왕위를 이어

백제 27대왕 위덕왕이 되었고

위덕왕은 옛날 근초고왕의 아들 , 태자로서 군대에나가 전두지휘한

근구수왕과 비슷하게 용맹한 인물이었지만

자신때문에 아버지가 죽었음에 죄책감이 컸던 인물입니다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의 모습을 본따 만든 구세관음상 , 일본 호류지

 

위덕왕 기록은 한국보다 일본측에 역시 자세히 남아있는데

그는 용맹한 성왕의 태자여서 적극적으로 아버지를 따라

태자임에도 적극적으로 백제 국정과 전투지휘를 맡은 인물이었고

 

이전

553년 10월 20일

부여창은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려 북진하는데

백제태자가 군사를 이끌고 온다는 소식에

고구려 양원왕 역시 친히 고구려군을 끌고 내려왔고

이들은 백합야 , 백합벌판에서 전투를 벌입니다

 

태자 부여창은 백합 들판에서 병사들속에서 함께 먹고 잤고

평원은 끝없이 넓은데 개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한산했고

갑자기 북치고 피리부는 소리가 들리니

부여창이 크게 놀라 북을 쳐 대응했고

밤새 굳게 지키다 새벽이 되보니 군대와 깃발이 가득 덮여있었고

날이 밝자

목에 경개(목보호 갑옷) 를 입은 자 1기(기병 1명) ,

징을 꼽은 자 2기 ,

표범꼬리를 끼운 자 2기 모두 합해 다섯 기병이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와서 묻기를

 

<고구려 독수리 오형제>

어린 아이들이

 

'우리 들판에 손님이 있다'

 

고 하였는데

어찌 맞이하는 예를 행하지 않겠는가.

우리와 더불어 예로써

문답할 만한 사람의

이름과 나이, 관위를 미리 알고자 한다.

 

이에

부여창이

 

<부여창>성은 (고구려 왕실과) 같은 성이고

관직은 간솔이며 나이는 29세이다.

 

라고 대답했고

백제 편에서 반문하니 또한 앞의 법식대로 대답했습니다

 

옛날 백제식 전투 매너 (Manners Maketh Man)

 

일본서기 기록인데

여기서 이렇게 전투하기 전 

자신의 가문 , 설명들을 하고 상대방에게 문답하는 전투법식은

훗날 일본식 전투문화로 굳어지게 되었고

 

열병기 , 화포와 총이 발명되기 전

냉장기 , 활과 창과 검 전투 시대에는

불필요한 손실을 줄이려자 장수 지휘관이 직접 나가서

상대 장수 지휘관과 1-1로 대결을 벌여서 승패를 결정짓는 이런

일기토의 경우가 많았는데

 

초한지와 삼국지의 항우나 여포가 유명하고

소설 삼국지에서는

관우가 술이 식기전 같은 찰나에

화웅 , 안량 , 문추같은 명장의 목을 따오는게

유명한 명장면 중 하나이고

이외에도 한국은 고려 척준경이나

고려신궁 이성계가 활로 아지발도를 저격했다는 등

오늘날처럼 후방에서

배나온 지휘관들이 스타크래프트 하듯이 전투하는 것과 달리

옛날에는 과학기술력보다는 이렇게 지휘관 개개인의 무력과 용맹이

전투에서 영향력이 컸기에

 

(총기가 나오기 전 옛날 시대에는 근육질로 단련된 후진국 전사들이

기마부대를 이끌고 선진국에 침략해

미녀들을 강간하고 보물들을 약탈하는게 흔했는데

[후진야만국들 스포츠였음 ;;]

 

요즘은 배나와서 구보도 힘든 뚱보 미군이

뒤에서 다이어트 콜라랑 도리토스 우적우적 먹으면서 컴퓨터로

무인공격기랑 레이저 쏘면

20년동안 쇠질만해서 식스팩 ㅈ되고

극한오지에서 뱀씹어먹고

3대 700치는 용맹한 후진국 군인이 눈떠보면 천국가있음)

 

직접 뛰어난 지휘관이 앞장서는 것이

귀족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 무지한 병사들을 위한 귀족들의 희생이자

옛날 냉장기 시대 전투의 방법이었고

이로인해 국가별 귀족들 끼리

상대와 자신의 명예를 위해 이름을 묻고 답하는

문답매너가 있었던 과거였습니다

 

그래서 이게 일본 무사도 문화로 넘어가서

한창 그시대 낭만마냥 써먹다가

역시 조총 , 총기의 도입으로 점차 꼬리를 내렸고

 

하여튼 이 부여창의 전투방식이

일본에 수입되서 '나노리' 라는 전투 예의범절 이런거로 퍼졌고

중세 일본에서 전쟁터에 나간 무사가 전투에 돌입화기 전

상대방에게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밝히는 의식이 됬고

완전 부여창의 전투와 똑같습니다

 

관등성명 안대면 큰일나는 일본 전투매너

 

정치인이 미워도 법치로 처벌하는 게 아닌

폭력과 암살은 반대하는 입징이라 굉장히 불행한 일이라 생각하는

아베 신조 총리 암살당시

한편으로는 아베 신조 경호가 실패한 이유가

일본 정치인들은 높으신 분들에 대한 공격에

나노리를 밑바탕에 두고 있었기에

예고도 없이 공격한 야마가미 데쓰야를 전혀 막지 못했다는 분석도 있는데

이게 블랙유머인지 진짜 분석인지 헷갈릴 정도로 일본에는

오늘날까지 이런 나노리 문화가 만연해 있고

 

나노리 문화는 사방으로 트여있어

생존이 직결된 유목민족에겐 그딴거 없다싶이해서

그냥 자기소개할때 휙 하고 활쏴서 저격해버리고 돌진해버리는 전투로

바뀐 한국에선 이후 사멸하였고

이런거 때문에 여몽연합군의 일본침공당시

자기소개도 없이 웃으면서 활쏘며 일본군을 사냥하는(?)

고려군을 일본군은 엄청나게 두려워하며 트라우마로 남았고

이런 귀족들의 명예 , 나노리 문화가

총기발전 이후에도 사회 곳곳에 남았던 일본이기에

전투전 문답이 굉장히 중요해서

일본제국 청년장교 쿠데타 당시

 

'문답무용 쏴라 쏴 !'

 

라는 말이 일본역사에 남는 말이 됬을 정도고

미국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을 항복시키려

미국 맥아더 장군이 이런 일본인들의 (똥명예) 습성을 잘 파악하고 적당히 

항복한 천황의 권위를 완전박탈하지 않고

적당히 잘 가오 살려주면서 구슬리며

일본 민심을 얻어서 일본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포켓몬스터 로켓단 명대사>누구냐 !? 하고 물으신다면 ,

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 !

 

싸우기전에 꼭 자기소개 무한반복하는 일본악당들ㅋㅋ

 

하여튼 그렇게 백제태자 부여창과 고구려 군사들은

드디어 표를 세우고 싸우기 시작하였고

 

<일본서기>이 때 백제(왕자)는 고려의 용사를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었고

그리고 (부여창이) 머리를 창끝에 찔러 들고

돌아와 군사들에게 보이니 ,

고려군 장수들의 분노가 더욱 심하였다

 

이 때 백제군이 환호하는 소리에 천지가 찢어질 듯하였고

다시 부장(대장 밑 장수) 북을 치며 달려 나아가서

고려왕을 동성산 위까지 쫓아가 물리쳤다

 

즉 부여창은 직접 전투에 나가 상대 장수 목을 딴

태자 이전에도 엄청난 용장이었던 인물이었고

 

고구려군을 물리쳐 기세가 오른 백제군은 

554년 신라정벌론을 펼치며 신라를 공격하자 했는데

자신만만해진 태자 부여창이 강경하게 나오자

많은 신하들이 반대하였고

일본 기록으로는

 

<일본서기>여창(부여창)이 신라를 치고자 꾀하였다.

기로(노신하)들이 간하기를 ,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

 

고 하였다.

여창이 말하기를 ,

 

'늙었도다. 어찌 겁이 많은가?

나는 대국을 섬기고 있으니 ,

무슨 두려움이 있겠는가 ?'

 

라고 하고 드디어 신라국에 들어가 구타모라 요새를 세웠다.

그 아버지 명왕(성왕)은

여창이 오랫동안 진영에서 고생하고

또 오래도록 잠과 음식을 폐하고 있을 것을 우려하였고 ,

아버지의 자애는 성글기 쉽고 ,

자식의 효성은 이루어지기 힘들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스스로 가서 위로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출정한 부여창을

위로하고자 성왕은 태자를 맞이하러 소수의 경호병만 이끌고

태자가 있는 군진으로 나서다

 

첩보를 입수한 신라군의 매복에 사로잡혀 목이 잘리게 된 것이었고

성왕 포함 4인의 좌평(장관) 과 29600명의 백제군사가 전사하는

대학살 수준의 패배였고

 

지금도 3만명이라 하면 엄청난 대군인데

그당시 3만명은 지금으로 치면 거의 30만명이 죽은 패배급에

국가 전력 절반 이상이 전사한 수준이고

 

신라가 훗날 김유신 장군을 필두로 백제를 멸망시킬때

황산벌에 나선 대군이 신라 5만이었고 이것도

신라 백성중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장정들은 모조리 끌어모은 총력전 수준인걸

감안하면 당시 백제가 인구가 엄청나게 많았음에도

관산성 전투는 단순히 왕 한명 전사한 전투가 아니라

뼈아프고 국가 근본이 흔들릴 수준의 대패였습니다

 

성왕이 전장터에서 사망하자

긴박한 상황속에서 곧바로 태자 부여창은 왕위를 이어야했지만

부여창은 자신의 고집때문에 아버지와 많은 병사들이 죽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 왕위 오르기를 거절하였고

 

(당시 태자 부여창도

백성들의 비난 + 맨정신으로 도저치 왕위에 오를 수 없었음)

 

이에 왕위를 포기하고 승려가 되려 출가하려 했지만

신하들의 만류로

태자가 나이 든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아 대패를 당했으니

이번에는 제발 나이 든 신하들의 말을 들으라는 논리에 설득당해

대신 백성 100명을 출가시키며 부여창은 왕위에 올라

백제 27대왕 위덕왕이 됬습니다

 

위덕왕은 이렇게 태자시절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굉장히 용맹했지만 또 뛰어난 아버지를 닮아

죄책감과 기본 인성은 있는 인물이었고

하여튼 ,

위덕왕은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올랐지만

이때부터 무령왕때 이루어진 전제왕권은 바닥을 치고

다시 귀족들이 득세하게 되었습니다

 

위덕왕 당시부터 국제정세는 엄청나게 변화하는데

중국 남북조는 수나라로 통일하며

중국은 한나라 이후 모처럼만에 통일제국이 등장하였고

이는 곧 한반도에도 어떤 거대한 태풍이 몰려올 것을 의미하는 바 였습니다

 

위덕왕은 고구려를 고립시키려 수나라를 이용하려 했고

수문제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협력을 제의했는데

수문제는 위덕왕의 제의를 무시했고

이 사실을 안 고구려는 백제를 공격해 보복한 후 돌아갑니다

 

위덕왕은 관산성 전투에 대한 보복을 하려 했지만

신라의 기세가 너무 강했기에 별다른 성과는 없었고

단지 44년이라는 엄청난 재위기간을 가지고 74세에 사망하게 됩니다

 

[아좌태자]

위덕왕에게는 아좌태자가 있었는데

아좌태자는 위덕왕의 아들로 그림을 잘 그렸다 하며

597년에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 ,

그곳에서 아좌태자는 일본인들의 일본위인인 쇼토쿠 태자의

초상화를 그려주었고 이 그림은 오늘날까지 남아있고

일본 지폐에까지 실리게 됩니다

 

(근데 오늘날 일본도 웃긴게

국보 1호는 한국산 불상이고 지폐는 백제그림임ㅋㅋ) 

 

아좌태자가 그린 쇼토쿠 태자 , 일본을 대표하는 지폐에 한국인이 그린 그림이 있는걸 보니 일본인들도 기분이 묘할듯

 

아좌태자는 당시 일본 최고 지식인이었던

일본의 근본을 창시한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었던 인물로서

쇼토쿠 태자가 고대일본에서 가진 입지가 엄청났단 것을 감안하면

역시 당시 한국 백제가

일본 왜의 정신과 몸을 지배하고 가스라이팅해서

일본을 최면지배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섬에다 완전한 사육)

 

흠흠..

하여튼 , 아좌태자가 도왜한지 1년 후

위덕왕이 승하하고 아좌태자가 아닌 위덕왕의 동생 혜왕이 왕위를 이었고

그는 이후 일본에서 자취를 감췄다는데

그럼에도 그가 그린 쇼토쿠 태자의 그림은 일본의 전설로 남아있습니다

 

[임성태자]

이외에도 위덕왕 사망 1년전

일본에 임성태자라는 인물이 사신으로 파견됬는데

그는 26대 성왕 혹은 27대 위덕왕의 셋째아들로 여겨지고 있고

 

일본 콘피라산 신사의 임성태자 상

 

임성태자는 일본에서 타타라씨 성을 하사받고

칠성신(북두칠성) 신앙을 전해주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정화수를 떠놓고 밤하늘에 뜬 칠성신이 좌정해 앉은

정화수의 수면을 바라보며 두 손을 비비며

비나이다 비나이다 기도하는 물떠놓고 기도하는 그거를 전해주었고

백제 임성태자가 칠성신앙을 전해준 이후로

 일본 서부는 아직도 칠성신앙이 강하다 합니다

 

<칠성신앙 전설>

옛날 어느 과부댁에 일곱 형제가 있었다.

그런데 일곱 형제는 어머니가 밤만 되면

어디론가 나가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하루는 뒤를 따라갔더니

어머니가 밤마다 차디찬 물이 흐르는 개울을 건너

이웃 마을 남자를 찾아가는 것이 아닌가.

 

형제는 이에 아무 없이 다음 개울에 징검다리를 놓아

어머니가 발이 시리지 않게 하였고 ,

어머니는 이를 모른 이런 고마운 일을 이들이

나중에 하늘의 별이 되게 달라 하였다.

그리하여 형제는 북두칠성이 되었다.

넷째는 징검다리를 놓을 투덜거렸기 때문에

다른 별에 비해 흐릿하게 보인다.

 

칠성신앙 , 비나이다 비나이다

 

이외에도 임성태자는 왜에 제철기술을 전파하고

불교를 확산시켰다 하고

 

임성태자의 후손이 오우치 가문인데

이들은 백제 후손임을 자처하며

조선시대까지 사신을 보냈다 하고

오우치 가문 당주는 자신이 백제 부여씨 왕가의 후예임을 내세워

조선과의 무역에서 특권을 받으려 시도했고

몇백년 지난 족보가 뭔 소용이겠냐만은

참 고맙고 기특한 일이기도 해서

조선 정부에서도 훈훈하게 오우치씨가 백제 왕가 후손이라는 점을 인정하며

상당한 우호적 교류가 많았습니다

 

한국 조상묘를 찾은 임성태자 45대손 오우치 기미오 부부

 

한국사랑에 진심인 오우치 기미오씨(ㅠㅠ)

 

이외에도 임성태자는 오우치씨 외에도

토요타씨의 시조라는데

바로 일본 1위기업이자 일본의 삼성이라 할 수 있는

토요타 자동차의 그 토요타고

 

세계경제최선진국 중 하나인 일본경제를 견인하는 1위기업 토요타가

백제인들의 후예라거나

일본 국보 1호가 한국산 불상 ,

일본 지폐 그린 사람이 백제인인 것을 감안하면

일본도 참 한국과 인연이 굉장이 뿌리가 깊고

 

우리가 일제 식민지때문에 반일감정이 크지만

일본은 엄연히 중국부상 이전까지 세계 2위 G2국가로서

초강대국 미국 바로 밑 강대국+선진국인데

 

아베 암살사건 당시 수면으로 드러났던 이야기로서

의외로 일본 정재계를 한국종교 통일교가 지배한다는 이야기도 있고

일본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이 한국계인건 유명한 사실이고

둘은 백제와는 거리가 좀 있어도

이 둘이 일본사회내에서 깊게 자리잡은 이유는

그만큼 일본사회 주류 , 비주류 계층 할 것 없이

백제로 이어진 혈통과 인연으로 인해

한국계의 활동이 굉장히 자연스럽고 친숙하게 일본사회내에 받아들이고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일본재계 서열 1 , 2위가 한국계임 ;;

 

오늘날에도 한국 K-pop , 드라마와 음식과 화장품이 일본에서 유행하고

한국에서는 학술 및 과학기술 , 산업 , 일본애니 , 일본음식이 유행하기 때문에

한중일 세 동아시아 국가는 이렇게 과거의 교류하던 역사를 잊지 말고

불행하고 어두운 과거를 서로 함께 이해하고 배려하며

평화로운 21세기를 만들어 가야 한다 생각합니다

 

<라봉봉>보통 우리(한국인)가

신라는 ㅈ같이 여기고

백제는 그냥 듣보잡 취급하며

고구려 , 고려 뽕에 빠지지만

우리가 고구려를 대하듯이 일본인들은 백제를 진심으로 존경한다고 생각하니

이제 이해가 될거같고

 

비록 시간이 지나서 말도 , 문화와 풍속도 크게 달라진 한국과 일본이지만

백제시대때만 해도 백제와 왜는 사실상 서로 같은나라였고

이런 일본인들의 백제뿌리의식이 전국시대 , 에도시대는 물론 현대일본까지 계속되었기에

 

일본은 막강한 힘으로 한국을 식민지배했음에도

워낙 장구하고 위대한 역사로 인해 한국 식민지배에 대해 회의적인 나라였고

일본제국시기 일본 정계 내에서도

이제는 한국이 비록 약해졌고 일본이 강해졌지만

한국은 역사가 너무 깊은 나라라 식민지배하기 어렵다는 말이 나온게

이런것 때문에 나온 것이었고

이런것 때문에 당시 수많은 열강들이

식민지 백성들에게 채찍질하며 그냥 카카오나 커피콩이나 따게했던 것과 달리

한국 일본은 뿌리가 근본적으로 같았기에

 

백마들이 깜둥이들 식민지로 만든 것과 달리

다른 열강들의 식민지배와 완전히 다르고

일본제국도 조선은 식민지배하기를 굉장히 어려워했고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일본제국과 식민지 조선의 경우는

역으로 제국인이 식민지인들에게 감화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삼킬 수 없듯이

우리가 김구선생님 말처럼 약소국이었을지언정

문화와 역사적으로 너무 찬란했던 시기가 있었기에

일본이나 주변 강대국이 한국에 큰 역사적 빚을 진게 많고

조상들의 뛰어남 덕분에

한국은 작은 반도에 엄청 약소국임에도 항상 주변 강대국들이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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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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