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부흥운동 인물들>
[의직의 죽음]
[백제의 멸망]
[당나라의 음모]
[백제부흥운동]
[백제 마지막 희망 복신]
[백제부흥군의 왕 부여풍]
[도침의 질투]
[복신의 죽음]
[당나라의 이간책]
[흑치상지 VS 지수신]
[백마강 전투]
[풍왕의 후손들]
<라봉봉>
[의직의 죽음]
5천 결사대의 계백장군과 백제군은 그렇게 황산벌판에서 장렬하게 산화했고
김유신과 5만 신라 군사는 개가를 부르며 백제의 서울로 향했습니다
이때 당의 장수 소정방은 백강 어귀 기벌포에 이르러
끝없는 진펄에 행군할 수가 없어서 풀과 나무를 베어다가 깔고 간신히 들어오는데 ,
백제의 왕은 임자의 말대로 독 안에서 자라를 잡으려고 그곳을 지키지 않고 ,
수군은 백강을 지키고 육군은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
당의 군사는 이미 진펄을 지났으므로 용기가 갑절하여
백제의 수군을 깨뜨리고 언덕으로 올라 왔습니다
의직은 군사를 호령하여 격전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의직은 지략이 계백만은 못하지 마는 용감하기는 비등하여
한때 당나라 군사들의 담을 서늘케 하였으므로
신라 사람이 의직의 죽은 곳을 조룡대라 이름 하였으니 ,
의직을 용에 비유하고 의직을 죽인 것을 용을 낚아 올린 것에 비유한 것이었습니다
[백제의 멸망]
끝내 합류한 신라와 당군은
합세하여 솝울(소부리 , 사비)을 공격했는데
백제 의자왕은 태자 외에 적자가 몇 있고
서자가 40여 명이 있어
왕이 평일에 그들에게 다 좌평의 직함을 주어
나라의 큰일에 다 참모하고 심지어 실권도 행사하였는데 ,
이때에 와서
대략 세 파로 나뉘어졌습니다(콩가루집안 + 아들이 수십명인데 수십명끼리 파가 있음ㅋㅋ)
태자 효 등은 북경 곰나루성(웅진성)으로 가서 웅거하여
전국의 의병을 모으자고 하였고 ,
둘째 아들 태는 솝울(사비성)을 지켜 부자 · 군신이 힘써 싸우면서
각지의 의병을 기다리자고 하였으며 ,
왕자 융 등은 고기와 술과 폐백을 적군에게 올려 물러가기를 빌자고 했습니다
사오십 명의 적자 서자들이 왕의 앞에서 제각기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여 떠들어대니
왕이 어느 의견을 좇아야 할지 몰라서
왕자의 말을 다 허락하여
융에게는 강화의 권한을 맡기고
태에게는 싸워 지킬 권한을 맡기고 ,
자기는 태자와 함께 북경 곰나루성으로 도망했습니다
융이 소정방에게 글을 보내 퇴군하기를 요청하고
고기와 술을 보냈다가 다 거절당하니
둘째아들 태가 대왕의 자리에 올라 군사와 백성들을 독려하여 방어전을 펴는데 ,
태자의 아들 문사가
<문사>대왕과 태자께서 생존해 계신데
삼촌이 어찌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가 ?
만일 일이 평정되면 삼촌을 쫓던 자는 다 역적의 죄로 죽을 것이다
하고 좌우를 거느리고 성에서 달아나니
백성이 모두 그를 따르고 군인들도 싸울 뜻이 없었습니다
(막판에 콩가루 터짐ㅋㅋ)
융은 또 화의를 성립시키지 못했음을 부끄럽게 여겨
성문을 열고 나가 항복하니
신라와 당의 군사가 성 안으로 올라갔습니다
왕후와 왕외 희첩과 태자의 비빈들은 모두 적병에게 욕보지 않으려고
대왕포로 달아나 바위 위에서 강물에 뛰어들어 죽어
낙화암이란 바위 이름이 생겨서 지금까지 그 곧은 절개를 전하고 있습니다
다른 여러 아들들은 혹은 자살하고 혹은 달아났습니다
의자왕은 곰나루성(백제 두번째 수도 웅진성)으로 달아나 성을 지키는데
수성대장 , 곧 임자의 무리가
의자왕을 잡아 항복하려고 했습니다
의자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였으나
동맥이 끊어지지 아니하여
태자 효와 소자 연과 함께 포로가 되어 당의 진영으로 묶여갔고
당의 장수 소정방은 거의 죽게 된 의자왕을 이리저리 굴리며
<소정방>이제도 대국에 항거하겠느냐 ?
하고 장난거리를 삼고 ,
신라 태자 법민은 왕자 융을 마구 굴리며
<김법민>네 아비가 우리 누이 부부(고타소)를 죽인 일이 생각나느냐 ?
하고 앙갚음을 했습니다
[당나라의 음모]
신라 태종이 소정방에게 치사하기 위하여
금돌성(경북 상주)에서 솝울(백제 마지막 수도 사비성 , 충남 부여)로 달려갔습니다
소정방은 일찍이 당의 고종으로부터 백제를 토벌하면
기회를 보아 신라를 쳐 빼앗으라는 밀명을 받고 왔었으므로
신라의 틈을 엿보고 있는 참이었고
김유신이 이것을 알고 태종에게 아뢰어 어전회의를 열어 대항책을 강구하는데
김다미가 말했습니다
<김다미>우리 군사로 하여금 백제의 옷을 입고
당의 군영을 치면 당의 군사가 나와 싸우면서 우리 군영에 구원을 청할 것이니
그때 불의에 습격하면 당의 군사를 깨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백제 전역을 수복하고 북으로 고구려와 화친하고
서쪽으로 당에 항거하며 백성을 위무하고 군사를 길러 때를 기다렸다가
동병(군사를 움직임)하면 누가 우리를 업신여기겠습니까 ?
태종이 말했습니다
<태종 김춘추>이미 당의 은혜를 입어 적국을 토멸하였는데
또 당을 치면 하늘이 어찌 우리를 돕겠느냐 ?
김유신은
<김유신>개 꼬리를 밟으면 주인이라도 무는 법입니다
이제 당이 우리의 주인이 아닌데 우리의 꼬리를 밟을 뿐 아니라
우리의 머리를 깨려고 하니 어찌 그 은혜를 생각하겠습니까 ?
하고 당을 치기를 굳이 권하였으나
태종은 끝내 듣지 아니하고 군중에 명하여 엄중히 대비만 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소정방은 신라의 경계함을 알고 음모를 중지했습니다
<신채호>백제는 수없이 전쟁을 한 나라이므로
나라 사람들이 전쟁에 익숙하고 의리에 용감하나
유교를 수입한 이래로는 일반 사회가 명분이라는 굴레에 목을 매여
성충과 흥수가 비록 외적을 평정할 만한 재주와 지략을 가졌으나
명림답부(고구려 폭군 차대왕을 죽인 고구려 신하)와 같이
폭군을 죽일 만한 기백이 없었고 ,
계백과 의직이 비록 자기 몸과 집안을 희생하는 충렬을 가졌으나
연개소문과 같이 내부를 숙청할 수완이 없어서
마침내 망령된 의자왕을 처치하지 못하여
임자 등 소인의 무리들로 하여금 수십 년 동안 정치상의 중심을 잡고 ,
평시에는 나라의 재물을 자기네의 몸의 향락에 써서 탕진하고
난시에는 나라를 들어 적국에 투항하게 하였다
중경(中京)과 상경(上京)이 다 왕자의 투항으로 망하고 ,
그 밖 에 삼경(三京)과 각 고을들도 또한 모두 반항없이 적의 차지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인민의 '다물(땅을 되찾음)' 운동(나라를 되찾자는 운동)은
의외로 격렬하여
임금과 관리들이 나라를 판 뒤에 분기하여
맨손으로 적병과 싸워 망국의 마지막길 역사를 혈우(血雨 , 피의 비 , 혈전)로 끝맺었다
만일 그들이 유교의 명분설에 속지 않고
혁명의 기분을 가졌더라면
어찌 간사한 자들이 나라를 망치도록 내버려두었으랴 ?
이제 다음 장에 백제의 다물운동(부흥운동)에 대하여 그 대강을 말하려 한다
[백제부흥운동]
백제 의자왕이 당나라 포로가 되고
백제는 장구한 700년 역사 678년을 끝으로
660년에 멸망하였지만
백제 백성들은 계속하여 그 땅에 살고 있었고
백제의 후예는 멀리 섬멀티였던 왜에도 많이 살던 상황이라
백제 멸망이후 곧 격렬한 부흥운동(멸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는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솝울(사비성)'이 이미 적에게 함락되고
의자왕이 잡혀가니 고관과 귀인들은 거의 다
임자 · 충상 등 나라를 팔아먹은 무리들이므로
모두 유수(다스리던)하던 성과 고을을 들어 적에게 항복하였지마는
성충의 무리로 몰려 벼슬에서 물러난 옛 신하들과
초야의 의사들이 망국의 화를 구원하고자 각지에서 벌떼처럼 일어났습니다
<신채호>
이같이 열렬한 다물운동(부흥운동)의 의사들은
신라 역사가들이 이를 패잔한 도둑이라 배척하여 그 사적을 지워버려서
그들의 이름조차 묻혀버렸지만
이에 신라본기 · 김유신전 · 해상잡록 · 당서 · 일본서기 등의 책을 참조하여 보면
당시 백제의 의병이 일어난 지방은 대략 세 군데인데
하나는 백제 남부의 동북 지금의 전라도 동북인 금산 내지 진안 등지요 ,
또 하나는 백제 서부의 서쪽 절반 지금의 충청도 서쪽 절반의
대흥(大興) · 홍주(洪州 : 지금의 洪城) 내지 임천(林川) 등지 이고 ,
나머지 하나는 백제의 중 지금의 충청남도 연기(燕岐) 등지이다.
이제 세 파의 전말을 대강 말하여 백제 말년의 혈전사(血戰史)의 일부를 보이려 한다.
[백제 마지막 희망 복신]
서부 의병대장 부여복신은 무왕의 조카인데 ,
일찍이 고구려와 당에 사신으로 가서 외교계의 인재로 이름났고 ,
서부은솔이 되어 임존성을 견고히 수리하고
성 안 창고에 양식을 비축해두는 외에 ,
통주(그릇기둥 ?)를 세워 그 속에 쌀가루를 감추어두어
훗날 뜻밖의 일에 대비하였는데 ,
마침내 임자의 참소를 만나 벼슬을 내놓으니
군사와 백성들이 다 목놓아 울어서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당의 군사가 중경 솝울(사비)과 상경 곰나루(웅진)를 함락시켜 왕이 잡혀 가니
성 안의 군사들이 현재의 은솔을 내쫓고 복신을 추대하여 은솔을 삼아서 항전하였는데 ,
전좌평 자진(自進 : 당서에는 도침)은 주류성을
전좌평 정무(正武) 는 두시이(전북 무주)를 습격해서 웅거하여
군사를 합하여 곰나루를 다물(옛 땅을 되찾음)하려고
복신에게 사람을 보내서 힘을 합하기를 청했습니다
복신은
<복신>이제 적의 대군이 우리의 두 서울과 각 요지를 빼앗아 웅거하고
우리의 물자와 기계들을 모두 몰수하였는데 ,
우리가 초야에서 흩어진 군사와 양민을 소집하여
대나무 창과 몽둥이로 저네 화살과 칼을 가진 자를 나아가 공격한다면
이것은 반드시 패할 것이니
우리의 병이 패망하면 백제의 운명은 끝장이오
당이 10여 만의 많은 군사를 내어 바다를 건너왔으니
그 양식은 신라의 공급과 우리 국민에게서 약탈한 것을 의뢰할 수밖에 없는데 ,
신라는 여러 해의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이 나서
능히 오래도록 양식을 공급하지 못할 것이고 ,
민간의 약탈로는 많은 군사의 양식을 보충할 수 없을 뿐더러
더욱 우리 백성들의 반감이 쌓여서 의병의 수를 증가시킬 뿐인데 ,
당의 군사들도 이것을 알기 때문에 며칠이 안 가서
반드시 1 , 2만의 수비병을 두고 대부분은 철회하여 돌아갈 것이오
우리가 이제 다만 험하고 요긴한 성을 굳게 지키다가
저네가 돌아간 뒤에 때를 타서 저네의 수비병을 격파하고
조종(祖宗)의 구업(옛부터 한 일)을 회복해야 할 것인데
이제 싸워서 요행의 승리를 바라서야 되겠소
하였으나 정무 등이 듣지 않고
곰나루성 동 남쪽의 진현성을 쳐서
잡힌 의자왕 이하 대신들과 장졸들을 빼앗으려다가 실패하고
정무는 두시성으로 , 자진(도침)은 주류성으로 달아나 웅거하여 지켰습니다
오래지 않아 당이 곰나루를 웅진도독부라 일컫고
당의 장수 유인원은 당의 군사 1만 명으로
신라 왕자 인태는 신라 군사 7천 명으로 함께 지키게하고
그 밖의 각 중요한 성에다가 두 나라의 군사 얼마씩을 배치했습니다
각지의 백제 의병들은 신라 태종이 토평할 책임을 맡고 ,
당의 소정방은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9월 3일에 돌아갔습니다
이에 자진(도침)이 복신과 군사를 합하여 곰나루성을 치자고 하니 복신이 말했습니다
<복신>우리 군사가 패망한 이제 한 번 큰 승리가 없으면 인심을 진작시킬 수 없는데 ,
곰나루성은 지세가 험하여 공격해 떨어뜨리기가 지극히 어려우니
차라리 정예한 군사를 뽑아 신라 군사의 돌아가는 길을 끊는 것이 좋겠소
하였으나 자진은 듣지 않고 곧 군사를 지휘하여
성의 동남쪽 진현성과 왕흥사의 영책을 깨뜨려 많은 물자와 기계를 빼앗고
곰나루성의 사변에 네댓 군데 목책을 세워서 신라의 군량 운반하는 길을 끊으니
일시에 의병의 형세가 크게 떨쳐서 남부의 20여 성이 다 호응하였으나
신라 태종이 태자 법민 · 각간 김유신 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여례성(전북 무주)을 공격하므로 진무가 나가 싸우다가 전사하고 ,
진현성의 의병도 신라 군사에게 습격당해 1천5백 명이 죽고 ,
왕흥사 영책의 의병도 7백 명이 전사했습니다
이에 신라 군사가 임존성을 쳤는데 ,
복신의 방어가 면밀하여 마침내 이기지 못하고 군량이 뒤따르지 못하므로
11월 1일에 군사를 돌이켰습니다
이듬해 2월에 부여복신이 강서의 흩어진 군사를 모아 강을 건너가서 진현성을 회복하니
당의 장수 웅진도독 유인원이 정병 1천을 보냈고
복신이 중로에서 불의에 습격하여 1천 명을 한 사람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게 하니
유인원이 연방 신라에 사자를 보내 구원을 청하여
신라 태종이 이찬 품일로 대당장군을 ,
잡찬 문충으로 상주장군을,
아찬 의복으로 하주장군을 ,
무훌 · 욱천 등으로 남천주대감을 ,
문품으로 서당장군을 ,
의광으로 낭당장군을 삼아서 구원하게하니
3월 5일에 그 선봉대가 두량윤성(충남 청양)에 이르러 진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복신이 대오가 정연하지 못함을 보고 갑자기 나가 습격하여 전멸시키고
그 군계(군대의 무기와 기계)를 빼앗아서 몽둥이에 대신하고 성으로 들어와 지켰습니다
신라의 대군이 이르러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기를 36일에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사상자만 많이 내고 돌아가는지라
복신이 사방의 의병 을 지휘하여 좌충우돌 수많은 장수와 군사를 베고 물자와 기계를 모두 빼앗고 ,
다시 진격하여 가소천(거창 동쪽 ?)에 이르러서는
신라가 구원병으로 보낸 김흠순의 군사와 싸워 크게 깨뜨리니
흠순 등이 홀몸으로 달아나 신라의 군사가 다시는 나오지 못했습니다
[백제부흥군의 왕 부여풍]
이에 복신은 왕자 풍(부여풍)을 맞아다가 왕을 삼고
곰나루성을 포위하여 신라에서 양식 운반해오는 길을 끊으니 ,
복신의 명성이 천하에 떨쳐 백제의 여러 성과 고을이 모두 호응해서
신라와 당이 임명한 관리를 죽이고 복신에게 귀부하였으며 ,
고구려의 남생(연남생 , 연개소문 아들)은 구원병을 보내서
북한산성을 쳐 멀리 복신을 응원하고 ,
일본은 화살 10만 개를 바쳐 복신을 도왔습니다
<신채호>...백제의 어진 신하 성충이 이미 죽고
의자왕이 교만하고 횡포하여 겉으로는 비록 강성한 듯하나
내용은 텅 비어 있어서 두 나라의 군사가 함께 공격하면 이를 멸망시키기 쉬움을 설명하였다
당의 임금과 신하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마침내 13만 대군을 내어 신라와 협력해서 백제를 토멸한 것이다
백제가 멸망한 사실은 이미 앞장에서 대강 말하였거니와
백제가 망할 때에 고구려의 남생(연개소문 사후 집권한 연남생)이
백제에 대하여 구원병을 내지 못한 것이 큰 실책이었다
백제가 망한 뒤에도 당의 군사가 이미 돌아가고 의병이 벌떼처럼 일어나는 때에
고구려가 수만의 군사를 내어 곰나루 · 솝울 등지로 나아가서
복신 · 자진(도침) 등과 연합하여 싸웠더라면 백제는 다시 일어났을 것이요 ,
백제가 다시 일어나면 넉넉히 신라를 견제하여 당의 군사에 대한 양식의 공급을 못하게 하였을 것이고 ,
신라의 양식이 아니고는 고구려에 연개소문 · 양만춘 같은 영걸이 없더라도
당이 능히 평양까지 침입하지 못했을 것이며
설혹 침입하였다 하더라도 수의 양제처럼 패해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고구려의 안전을 도모하려면 먼저 백제의 멸망을 구원했어야 할 것인데
신라와 당 두 나라의 군사가 이미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야
소수의 군사를 보내어 칠중성(경기도 파주 적성)을 함락시키고는 돌아가버렸고 ,
부여복신이 군사를 일으켜 백제 전군이 거의 회복된 뒤에도 겨우 수천 명을 내어
북한산성의 남녀 합해서 겨우 2천7백여 명의 신라인이 있는 외로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패하여 물러났으며
그 밖에는 백제를 구원하는 움직임이 없었으니 ,
남생은 훗날 나라 망친 죄를 짓기 전에 나라를 그르친 죄도 적지 않았다
이같이 용렬한 사나이에게 정권을 물려주고 죽은 연개소문은 또한 어찌 죄가 없다 할 수 있으랴 ?
662년 당나라는
35길로 군사를 나누어 고구려 평양에 침략하게 하고
신라군사와 협력하여 고구려 남쪽경계를 침략하는 동시에
신라의 양식을 평양으로 운반해 보내게 했습니다
신라는 이때 태종의 장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왕 중종 문무왕이 김유신 , 김인문 , 김양도 등
아홉장수로 하여금 전국 군사를 총동원케해서
동시에 큰 수레 20개를 만들어 쌀 4천섬 , 벼 2만 2천여 섬을 실어다
평양에 있는 당나라 군사에게 보내려 했습니다 (ㅠㅠ)
이때 백제의 의병이 태산(전북 순창 ?)에 웅거하여
복신과 호응하고 있었는데
당의 웅진도독 유인궤가 급히 문무왕에게 사자를 보내
<유인궤>만일 태산의 백제 군사를 그대로 두어 세력이 공고해지면
양식 운반하는 길이 끊어져서 주둔해 있는
1만 7천의 두 나라 군사가 다 굶어죽어
웅진이 다시 백제의 것이 되어 백제가 다시 회복될 것이요 ,
백제가 회복되면 더욱 고구려를 도모하기 어려울 것이니
먼저 태산성을 쳐주시기 바랍니다
했고 그래서 문무왕은 김유신 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9월 15일에 태산성 아래에 이르러 항복하기를 타이르고
부귀로 꾀이니 백제의병이 큰소리로
<백제 부흥군>성은 비록 작지마는 장졸이 다 의에 용감하여
싸우다가 죽은 백제의 귀신이 될지언정 항복하여 산 신라 사람이 되지 않겠다 !
하고 외치고는 대항해 싸워
여드레 만에 성 안의 군사 수천 명이 다 전사하고 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신라 군사는 나아가 우술성(대전 대덕)을 포위했습니다
이 우술성은 복신이 신라 군량 운반의 길을 끊기 위하여 장수를 보내서 지키게 한 것인데
수십 일을 마주 버티다
성안의 달솔 조복과 은솔 파가가 적과 내응하여 성 안의 의병 1천 명이 다 전사하고
성이 또한 함락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웅진의 양식 운반하는 길이 열렸으나
평양의 당의 군사가 고구려 군사에게 크게 패해 패강도총관 임아상은 유시(빗나간 화살)에 맞아 죽고 ,
옥저도총관 방효태는 그 아들 13명과 함께 사수(평안남도 보통강)에서 패전하여 군사가 전멸하고 ,
소정방 등의 군사는 한시성(평양부근)에 웅거하여 있다가 양식이 떨어져
신라의 공급을 애타게 기다리며 연방 사자를 보내므로
신라의 김유신이 군사를 두 군단으로 나누어 한 군단은 김유신이 인솔하여 평양으로 양식을 운반하고
한 군단은 김흠순이 인솔하여 웅진으로 양식을 운반하게 하였는데 ,
칠중하(임진강)에 이르러서는 모든 장수들이 다 두려워서 건너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김유신이
<김유신>고구려가 망하지 않으면 백제는 다시 일어나고 신라는 위태롭게 될 것이니
우리가 어찌 위험을 꺼리겠소
하고 사잇길로 하여 강을 건너는데
고구려 사람들에게 발각될까 험한 산을 타 수십 일 만에 평양에 이르러 소정방에게 양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소정방의 군사가 배불리 먹고는 패전한 끝에 다시 나아갈 수 없다하여 바다를 따라 달아나 돌아갔고
신라 군사는 머물러 싸우고자 하되 수효가 고구려 군사에 대적할 수 없고
달아나 돌아가자 하되 고구려 군사가 추격할 것이라 형세가 매우 난처했습니다
이에 유신은 영을 내려 깃대를 그대로 꽂아두고
소와 말의 꼬리에는 북과 북채를 달아매어 서로 쳐서 소리가 나게 하고 ,
장졸들만 가만히 빠져나와 돌아오는데
날씨가 춥고 굶주려 사상자가 많이 나고
또 칠중하에 이르러서는 고구려군에게 추격을 당하다가 요행히 벗어났습니다
동시에 웅진에 양식을 나르던 신라 군사들은 돌아가는 길에 큰 눈을 만난데다가
백제군사에게 포위되어 살아 돌아간 자가 백에 하나도 못 되었고
부여복신이 다시 곰나루성에 이르러 성 부근 사면에다가 목책을 세워서
신라와 당의 군사의 교통을 차단하니
백제 전국이 다 호응하여 신라 · 당 두 나라에서 임명한 새 관리들을 죽이고
백제의 관리를 내어 모두 부여복신의 지휘 아래 속하니
이때는 백제의 다물운동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할 만하였습니다
(백제 부활각 ?!)
[도침의 질투]
부여복신이 처음으로 군사를 일으킬 때에 어떤 사람이 복신에게 말했습니다
<어떤사람>남의 제재를 받으면 큰일을 실패하기 쉽습니다
공은 무왕의 조카요 명망이 안팎에 떨치니
스스로 서서 왕이 되어 전국의 군사를 지휘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복신은
<복신>그렇게 하면 그것은 사(사적인 것)를 백성에게 보이는 것이니
의가 아니오
하고 의자왕의 아들 왕자 풍을 맞아 왕을 삼고 ,
또 자진(도침)이 의병을 앞장서 주창한 공이 있고 ,
일찍이 좌평의 벼슬을 지낸 대신이라 하여 영군대장군이 되게 하고 ,
복신 자신은 상잠장군이 되어 강서의 군사를 전관하였는데
복신이 신라 · 당 두 나라 군사를 여러 번 격파하고 곰나루성을 포위 공격하니
당의 장수 유인궤가 감히 나와 싸우지 못하고 ,
또 소정방 등이 평양에서 패하여 달아나니 저들이 크게 낭패하여
당의 고종은 유인궤에게 조서를 내려 웅진의 외로운 성을 지키기 어려우니
전군이 곧 바닷길로 돌아오라고 하여 유인궤 등이 도망하여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복신이 이것을 알고 여러 장수들을 모아 당군의 돌아가는 길을 공격해서 유인궤를 사로잡으려 했는데 ,
자진은 본래부터 항상 복신의 재주와 병망이 자기 보다 뛰어남을 시기하다가
이 일을 듣고는 더욱 복신이 큰 공을 이룰까 하여
드디어 유인궤에게 복신의 계책을 밀고하고 ,
또 인궤에게
<자진>당의 황제가 만일 백제가 한 나라가 되는 것을 허락한다면
백제가 길이 당의 은혜를 감사하여 당을 높이 섬길 것이요 ,
복신 등을 잡아 바치겠습니다
라고 하여 인궤는 도망해 돌아갈 생각을 중지하고 자진과 서로 연락이 잦았습니다
그러다가 복신의 부장 사수원이 그 밀모의 증거를 잡아 복신에게 알리니
복신이 크게 노하여 연회를 베푼다고 하고 여러 장수들을 모이게 하여
그 자리에서 자진을 잡아 그 죄를 선포하고 풍왕에게 고하여 처형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풍왕은 자진이 비록 죄가 있으나
대신이니 극형에 처함이 옳지 않다고 형을 감해주려고 하였으나 ,
복신은 나라를 배반한 자는 살려둘 수 없다고 고집하여 마침내 자진을 참형에 처했습니다
[복신의 죽음]
풍왕은 복신에게 옹립되어 왕이 되었으나
항상 병권이 여러 장수들의 손에 있음을 의심하고 꺼리어 왔는데
복신이 자진을 처형하여 전국의 병권이 복신에게 돌아가니
왕의 좌우가 복신을 참소하여
<대신들>복신이 전횡하여 제멋대로 대신을 죽이니
그의 안중에 어찌 대왕이 있겠습니까 ?
대왕께서 만일 복신을 죽이지 아니하시면
복신이 장차 대왕을 해칠 것입니다
했습니다
이에 풍왕은 복신을 죽이기로 비밀히 모의하고 ,
그 해 2월에 복신이 마침 병이 나 굴방에서 치료하고 있는 기회를 타서
왕이 문병한다 핑계하고 좌우의 신임하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가서
갑자기 달려들어 복신을 결박하고 왕명으로 좌평 이하 각 대신을 불러
복신의 손바닥을 뚫어 가죽끈으로 꿰고 죄를 논하는데 ,
풍왕도 복신이 죽으면 적병을 막을 사람이 없을 줄은 환히 아는 터이라
마음 속으로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며
<풍왕>복신의 죄가 죽이는 것이 옳으냐 ?
하고 물었습니다
달솔 득집이
<득집>이런 악독한 반역자는 죽여도 죄가 남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복신이 득집을 향해 침을 뱉고
<복신>이 개 같은 놈아...
(일본서기에는 이 썩은 개 못난 노예 같은놈아 ! 라 기록됨)
하고 마침내 회자수(망나니)의 칼에 목이 떨어지니
백제 백성들이 복신의 죽음을 듣고 모두 눈물을 뿌렸습니다
(손바닥 찢어져서 예수님처럼 죽은 백제 부흥운동 명장 복신)
풍왕은 복신의 목을 소금에 절였습니다
[당나라의 이간책]
유인궤가 곰나루성에서 포위되었으나
신라와 당이 다 복신을 두려워하여 나아가 구원하지 못하였는데
복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당의 고종은 장군 손인사로 하여금
2만 7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
백제 의자왕의 아들로서 당에 포로가 되어 있던 왕자 융을 백제왕이라 일컬어 데리고 가게하여
바닷길로 와서 덕물포에 상륙하여 비밀히 사자를 보내
<당고종>풍왕은 잔인하고 시기심이 많아서
자기를 옹립하고 또 큰 공이 있는 부여 복신을 죽였거니
하물며 다른 장수들이야 오죽하리오
당은 원래 백제의 땅을 가지려 함이 아니라
오직 백제가 고구려와 한편 되는 것이 미워서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친 것이거니와
이제 융은 백제 선왕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능히 대세를 알고
또 황제(당)의 신임을 얻었으므로 백제왕의 작위를 주고 대군으로 호위하여 귀국하게 하였으니 ,
백제의 총명한 장수와 군사들은 나의 말을 믿고 융을 왕으로 받들면
전쟁의 수고로움이 없이 고국을 회복하고 편안히 부귀를 누릴 수 있을 것이지마는
만일 대군에게 완강히 항거하다가는 나도 공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공들은 잔인한 풍을 임금으로 받들었다가는 패하면 대군에게 죽음을 당할 것이요 ,
승리하면 풍의 시기를 받아 복신처럼 참혹하게 죽을 것이니
이 어찌 지혜로운 자의 취할 일이라오 ?
하는 조서를 전하여 풍왕의 여러 장수들을 꾀었습니다
(이이제이 , 오랑캐는 오랑캐로 제압하는 당의 전략)
[흑치상지 VS 지수신]
남부달솔 흑치상지와 진현성주 사타상여가
풍왕이 복신을 죽인 것을 원망하다가
마침내 그 관내 2백여 성을 들어 부여융에게 투항하고
흑치상지는 다시 서부달솔 지수신에게 글을 보내서
풍왕이 잔인하여 백제를 중흥시킬 영주(英主 영리한 주인)가 아님을 말하고 ,
이어 같이 항복하여 함께 일을 하자고 권하였습니다
지수신은
<지수신>우리들이 상좌평(복신)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백제를 부흥시키려고 하다가
불행히도 중도에 간신에게 모해당했으니
이 어찌 우리들이 통분할 일이 아니겠소마는
상좌평이 의병을 일으킨 것은 본래 당적(당나라 적)을 내쫓으려 함이었는데
어찌 상좌평의 죽음을 아파하여 그 복수를 위해 당에 투항을 한단 말이오 ?
그것은 상좌평을 배반하는 것일 뿐 아니라
곧 백제를 배반하는 것이니
상좌평의 영혼이 있다면 그 마음 아픔이
손바닥 꿰뚫리던 혹독한 형벌의 아픔보다 더할 것이오
나는 공이 번연히 후회하고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오
했습니다
그러나 흑치상지는 대답을 주지 않고
8월에 신라 · 당 두 나라 군사의 앞잡이가 되어
부하 5만 명을 이끌고 주류성을 포위했습니다
이에 백제가 두 나라로 나뉘어
지수신이 관할하는 서부는 풍왕에게 속하여 서백제가 되고 ,
흑치상지가 관할하는 남부는 융에게 속하여 남백제가 되었습니다
<신채호>
서백제는 당을 대적하여 싸우는데
남백제는 당의 노예가 되어 그 지휘를 받아 서백제를 치니
아 , 백제중홍의 대업을 이같이 창피히게 만든 자는
곧 부여풍... 상좌평 부여복신을 죽인 부여풍이니 ,
부여풍은 곧 중흥하는 백제를 멸망시킨 첫째가는 죄인이다
풍이 비록 죄인이지마는
풍이 약하다고 하여 백제를 배반하고 당의 노예가 된 흑치상지도
곧 백제를 멸망시킨 둘째가는 죄인이다
전사(이전 역사)에는 오직 당서의 포폄(칭찬과 나무람)에 따라
흑치상지를 몹시 찬미하였으니
이 어찌 어리석은 아이의 붓장난이 아니냐 ?
[백마강 전투]
풍이 복신을 죽이고는 적병을 막을 만한 방략이 없으므로
곧 고구려와 왜에 사자를 보내서 구원병을 청하였는데
고구려는 당의 침략을 염려하여 군사를 내지 못하였고
왜는 병선 4백 척을 보내서 원조했습니다
왜병은 백마강 가운데 있고
서백제의 군사는 강 언덕에 진을 쳐
남백제 · 신라 · 당 세 나라의 군사와 대전하는데 ,
신라의 병선이 강의 상류로부터 왜의 병선을 무찔러 불질러서 죄다 태워버리니
왜병이 패하여 무너져서 다 물에 빠져 죽고
언덕 위 서백제의 군사는 남백제와 당의 군사에게 패하였습니다
(백마강 전투)
이에 세 나라의 군사가 총집결하여 주류성을 치니
풍은 드디어 달아나고 장수와 군사들은 다 전사했습니다
(백제 진짜 멸망)
[풍왕의 후손들]
풍왕은 가지고 있던 보검도 떨어트리고
측근 몇 명과 북쪽 고구려로 도망쳤고
이후 고구려도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하자
풍왕은 당나라로 압송되어 유배를 갔습니다
이후엔 부여풍의 후손 여선재가 중국 송나라에서 한국 고려로 환국 ,
의령에 정착하여 의령여씨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부여풍도 은근 특이한 인물이었던게
충신 복신을 질투해 죽인 암군이었지만
은근 자손들이 살아남았고
부여풍은 일본에 있던 시절
기록으로서는 일본 최초로 양봉을 시도하기도 했고
<일본서기 고쿄쿠 덴노>
이 해(643년) 백제의 태자 여풍이 꿀벌 둥지 네 개를 미와산에 풀어
사육하였다.
그러나 결국 번식시키지 못하였다 (안습)
그의 아들 중
부여사는 일본 나라현에 정착했고
그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부여정가는
일본내에서 스스로 백제왕이라 칭하며
일본에 불교 , 건축술 , 농업술을 전파했지만
718년 신라자객(으로 추정) 에 의해 전사합니다
백제는 존재감이 고구려 , 신라에 부족하여
삼국사중 가장 기록이 적음에도
역사가 장차 700년이나 되는 한국 고대 해양국가였고
백제에 원수진 신라에 기록이 불타서 더욱 부족해졌는데
그나마 불행중 다행으로
일본에서 백제를 기리며 백제에 대한 여러 기록을 온전히 남겼습니다
<라봉봉>
중국 역사소설 삼국지가 세 나라가 굉장히 여러 인물과
여러 개성이 강해서 굉장히 히트칠 수 밖에 없는 스타성을 지니고 있는
소설이란 평가가 있는데
한국 삼국시대 역시 각 세나라의 개성이 정말 독특해서
고구려 육지 , 백제 바다 , 신라 외교라는 뚜렷한 장점도 있고
은근 셋다 특이하고 개성넘치는 나라라
삼국지 못지않게 흥미진진한게
고대한국의 역사라 생각하고
백제의 포지션은 삼국중 가장 인기없는 오나라 포지션이 아닐까 싶고
오나라가 강동의 험한 요지에 웅거하여 세력을 키웠는데
적벽대전이나 형주대전처럼 강과 습지 등 물을 활용한 전투씬이 굉장히 자세히 나오는데
독자들에겐 아마존 정글에서 탐험하는 모험적 느낌을 선사해주고
오나라가 가장 삼국중 인기는 없으나 나름 인물도 많았고
탄탄하게 오래간 나라기도 해서 백제가 딱 이런 오나라의 포지션이라 생각되고
고구려가 위나라 포지션이긴 하지만 안타깝게 신라에 패배하고
제갈량 포지션인 고구려 을지문덕 , 연개소문 등
한민족에게 가장 가슴아픈 기억이 되어버렸기에 나름 촉나라같기도 하고
신라가 촉나라 지형이지만 여러 통수를 거듭하며 얍삽하게 삼국통일을 했다는 점에서
나름 위나라 같기도 하고
하여튼 백제는 일단 오나라같은 느낌이 있다는 생각이고
실제로 오나라 지방(남중국)과 백제가 자주 교류하며 비슷한 문화권을 공유하였고
나름 한국정사에 나와서 일단 기록상으로는 진실인 대륙백제설을 보면
백제가 말년에도 오나라 강남지방을 점유했다는 것을 보면
비슷한 구석이 있긴 있습니다
이외에도
학교 교과서로만 백제를 공부하면
백제가 말기에 충청+전라도의 작은 나라였다 착각할 염려가 큰데
일연 삼국유사에 따르면
5~6세기 한국 인구수는
고구려 69만호 , 백제 76만호 , 신라 17만호였다 하고
옛날에 피임기술이 없고
근대위생과 의학기술이 없어
영아 생존률이 떨어지기도해서 무조건 애를 많이 낳아서
살아남는 아이만 키워야 했고
농경사회라 인구가 곧 자산인게 강했던 시기라
조선시대까지 보통 한 호 , 한가정당 식구가 5~6명정도 했었다니
1호당 5명으로 잡으면
고구려 인구가 대략 350만명 ,
백제인구가 380만명 ,
신라인구가 85만명으로 추산되는 것이고
즉 아무리 고구려가 광대한 만주벌판을 가지고
우리의 가슴을 뛰게하고 아프게 하는 한국인이 가장 애정하는 나라임에도
코딱지만한 충청+전라도를 점유한 백제인구보다 30만명이나 적은 상황이었고
만주는 땅이 넓어도 극한의 추위에 농사가 안됬고
백제는 땅이 좁아도 오늘날 호남평야가 한국 대표 쌀 생산지인것처럼
충청과 전라도라는 막강한 옥토를 가지고 있었기에
인구 밀집도가 엄청나게 높고
멸망때까지 신라를 애송이로 여기던 대국이긴 했고
삼국시대 최대 인구대국이자 부국이라
실제 백제인은 당시 고구려나 신라를 야만+그지새끼 국가정도로 취급하고
자신만이 동쪽의 문화국을 자처하며 멸망때까지 자부심이 상당한 상황이었고
말기에도 내부지배층이 단합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던게
설마 우리가 그런 쥐방울만한 신라에게 먹히겠나 싶은
안일한 생각이 백제인들 사이에서
지배층+피지배층 할 것 없이 만연해 있었지 않았을까 싶고
신라는 없는 인구에서 과학기술 혁신으로
일당십 수준으로 나라 수준을 끌어올린 면도 있고
없는 형편에 최대한 쥐어짜서 삼국통일을 한 것이라
신라 역시 대단하다면 대단한 것입니다
하여튼 백제 인구가 의외로 삼국에서 가장 많았음을 알아야
백제사를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고
일본까지 합산하면 그냥 고구려+신라는 상대가 안되는 수준의
영토+인구+옥토(비옥한 농지) 를 가진 삼국시대 끝판왕 나라였고
기록이 부실해서 가장 간과하기 싶지만
사실은 삼국에서 가장 우람하고 거대한 제국이 백제였습니다
저는 백제사를 연구하며 항상 느낀게
근대시기 식민지 문제로 앙금이 깊어진 한일관계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바로 백제가 아닐까 싶었고
또한 쓰면서 만약 일제강점기 일본제국 역사학자들이
한국지배를 위해 허술한 가짜논리인 임나일본부설 , 내선일체론을 밀지 않고
백제연합국 , 대백제공영론 이런 논리를 내세워 가스라이팅했다면
한국내 지식인들 나름 백제사정도는 진심으로 동조할 수 있었기에
좀 무서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도 싶지 않고
혹은 일본에서도 백제를 좀더 신중히 연구하는 기회가 되어
자신들의 근본과 뿌리를 자각하고
정한론을 버리고 한민족 야마토민족이 더 공생 , 공영하는 관계로
나아가는 열쇠가 되지 않았을까도 싶습니다
또한 ,
우리에겐 백제라는 귀중한 유산이 있고
요즘 한일분위기도 서로 좋다 생각되기에
앞으로 잠자는 해양문화국 백제가 더더욱 알려질수록
한일민족(백제민족)이 더 가까워지는건 시간문제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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