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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의 아들과 손자 연남생과 연헌성>


그렇게 연개소문의 첫째 아들

연남생은 당나라에 투항했고


당고종은 남생에게

평양도 행군 대총관 겸

지절 안무 대사를 제수하니


그는(남생은) 가물,남소,창암 등의 성을

가지고 항복했습니다


황제가 또한

서대 사인 이건역에게 명해서

남생의 군중에 가서 위로하게 하고

포대 금구 일곱 가지를 하사했습니다


이듬해에

그, 남생을 불러서 당나라에 입조케해서

요동대도독현토군공의 직함으로 바꾸고

서울(당나라 수도)에 거처를 하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서

남생은 군중,군대에 들어가서

이적(이세적)과 함께

고구려 수도 평양을

공격하고

성 안으로 들어가 왕,고구려 28대왕,

마지막 왕 보장왕을 사로잡게 했습니다,,


황제는 자기의 아들에게

조서를 줘서

요수로 가서 그들을 위로하고

상을 주게 했습니다


남생은 군중에서 돌아와서

우위 대장군 변국공으로 승진했고


그는 46세에 죽었습니다,,


남생은 순후(온순하고 인정이 두텁다,,) 하고

예의가 있었으며 (당나라인들의 시각에서,,)

이치에 합당하게 상주를 올렸으며

말을 잘했고 또한 활을 잘 쏘았다고 합니다


그가 처음 당에 갔을 때

도끼에 엎드려서 대죄하니

세상(당나라)에서 이것으로

그를 칭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중국, 당나라 위주의

기록을 참고해서 쓴 삼국사기 기록이고

(한국 기록은 당시 부족했기에,,)


고구려인 입장에서

남생은

형제끼리 권력투쟁에 나라를 팔고

당나라군의 앞잡이가 된

어리석고

비열한 매국노 이런 이미지였을것입니다,,


헌성(연남생의 아들, 연헌성)은

천수 연간에 우위 대장군으로

우림위를 겸했고


무후(당나라 측천무후)가

일찍이 금폐 金幣 (금화 혹은 금과 예물)를 내놓고

문무관 중에서

활 잘 쏘는 사람 다섯 명을 골라서

이것을 상으로 주기로 했다고 합니다


내사 장광보가 먼저

헌성에게 양보해서

그가 제일이 됬고

헌성은 다시 우왕 검위 대장군

설토마지에게 양보하니

마지(설토마지)는 또한

헌성에게 양보했다고 합니다,,


얼마 후에

헌성이 아뢰기를,,


<연헌성>폐하께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뽑으셨지만


대부분 중국 사람이 아닙니다


신은 당의 관리들이

활 쏘는 일을 수치스럽게 여길까

두렵사오니


그만 두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니

무후가 옳다고

여겨서 받아들였습니다


내준신이라는 당나라 관리가

일찍이 헌성에게 재물을 요구했는데

헌성이 이에 응하지 않았고


이에 내준신이 헌성이 모반한다고

무고해서(사실이 아닌 일을 거짓으로 꾸미어

해당 기관에 고소하거나 고발하다)

헌성을 목매어 죽였습니다,,


<헌성>고구려를 버리고

당나라에 충성을 바쳤건만

결국 이용되다가 죽는구나,,


무후가 나중에 현성이 억울하게

죽은 것을 알고

우우림위 대장군으로 추증하고

예를 갖추어 다시 장사지냈다고 합니다,,


<김부식>논평한다

송신종이 왕개보(왕안석, 송나라 개혁가)와

사적(역사, 역사사건)

을 논하여 말했다


<송신종>태종[당태종]이 고구려를 쳤을 때

왜 승리하지 못하였는가 ?


이에 개보(왕안석)가 대답하였다


<왕안석>개소문[연개소문]은

비상한 인물이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런 즉 소문(연개소문)도 역시

재사 才士 (재주가 많은 남자)

였는데

정도로서 나라를 받들지 못하고

잔인,포악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대역 大逆 (대역죄인의 어원, 왕실을 범하여 짓는 죄)

에 이른 것이다


[춘추]에는


'임금이 시해되었는데도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면

나라에 사람이 없다고한다'


라고 하였는데

소문이 몸을 보전하여

집에서 죽은 것은


가히 요행으로 토벌을

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남생과 헌성은 비록 당나라의

황실에 이름이 알려졌지만

본국(고구려,고려,한국)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반역자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라봉봉>김부식님 역시

반역자였던 연개소문 이외에도

남생과 남생의 아들 헌성을 비판했습니다


김부식님은 유교를 중시했고

또 고려,고려 왕실의 관료였기에

연개소문을 오늘날같이 재평가라기보다

반역자의 입장으로 기록할 수밖에없었고


또 연개소문의 후손들 역시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기록하셨습니다


팔아도 될게있고

팔아서 안될게있는데


남생과 헌성은 팔아서는

안될것을 팔았습니다,,


이는 자신의 근본,

나라와 고구려 백성을

팔아 자신의 안위를 채운

행위이기에


이런 인생으로

부귀영화를 바란다는 것은

불가능 하며

결국 헌성도 충성을 맹세한

당나라에 이용당하다가 버려져

죽임을 당하게 됬습니다,,


김부식님의 사론에서

연개소문의 비범함을 칭찬하면서도

영류왕을 시해한 죄를 비판할 때


'임금이 시해되었는데도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면

나라에 사람이 없다고한다'


라는 공자님의

[춘추]의 말을 인용한것은

오늘날에도 현대인들에게

의미심장한 대학자 김부식님의

날카로운 비판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공자님의 [춘추]에 나온

이말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플라톤>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저질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


라는 말과 비슷하고

'사람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라는

말과도 비슷하며

어찌보면 냉혹해 보이는 명언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연개소문은 상당한 카리스마,

권위주의적 인물이었고

기록같이 유능,비범한 모습을 보여주고

고구려 말기에 나타난

고구려의 마지막 불꽃이라는 평같은

인생을 살다간 인물입니다


그러나 역시 자식들의

권력다툼으로 고구려가 혼란에

빠지게 만들거나 독재 등

독재자의 한계적인 모습도 보여준 인물이라

할 수있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영웅이 나타나기를, 훌륭한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스스로 부당한 권력,

비도덕의 함정에 속지않게

성실히 배우고

정당하게 돈을 벌고

스스로 도의를 잃지 않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주인 의식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국민이 많아질수록

독재자는 사회에

나타나지 않을 것 입니다,,


그러나 이미 당시 고구려는 그런 사회였고

다른말로는 연개소문이 당시에

고구려에서 최선의 인물이었다는 것이었고

한편으로는 마지막 고구려의 불꽃,자존심이었고

한편으로는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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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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