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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박씨시기와 석씨시기 인물들>

[부산과 울산의 정복자 거도]

[초기신라 정복왕 파사이사금]

[각간의 유래]

[지마이사금]

[존버왕 일성이사금]

[마지막 박씨왕 아달라이사금]

[신라왕실의 족내혼]

[계립령과 죽령]

[왜국여왕 비미호]

[석씨왕조의 시작 벌휴이사금]

[군주]

[내해이사금과 포상팔국의 난]

[석우로 부하 물계자]

[신라 초기 명장 태자장군 석우로]

[첨해 이사금의 질투]

[석우로의 죽음]

[부창부수 명원부인]

[말한마디의 중요성]

[최초의 김씨임금 미추이사금]

[김씨와 황금 , 황금의 나라]

[유례이사금의 백제와의 일본침공 구상]

[미추왕의 대나무귀신 군사들]

[기림이사금의 함경도 나들이]

[마지막 석씨왕 흘해이사금]

[석우로 아들 석흘해]

[신라 석씨왕실의 몰락]

<라봉봉>

 

[부산과 울산의 정복자 거도]

(이전 이야기와 이어짐)

탈해이사금은 신라에서 이례적으로

박씨나라에서 석씨로서 성씨가 다른 임금이 되었고

그는 신라 초기의 기틀을 다진 명군이었는데

 

탈해이사금때부터 신라는 점차 경상도의 고대한국소국들을 합병해가며

고대국가로 가기 시작하였고

 

탈해 이사금

 

거도라는 사람은 탈해 이사금때 벼슬하여 간 벼슬을 하였는데

그때 우시산국(울산광역시) 과 거칠산국(부산광역시) 이

이웃해 있어 신라의 걱정거리였는데

거도는 변경의 지방관이 되어 그곳을 병합할 생각을 품었습니다

 

매년 한 번씩 여러 말들을 장토 들판에 모아놓고

군사들로 하여금 말을 타고 달리며 유희놀이를 하게 했고

당시 사람들이 이 놀이를 '마기' 라고 불렀는데

두 나라 사람들이 자주 보아 왔으므로

신라의 평상적인 일이라 생각했는데

 

이에 거도는 마기놀이를 한다 뻥치고

병마를 출동하여 불의에 쳐들어가 두 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통수왕 김신라..

 

따란 ! '신라' 는 울산 고래고기를 획득하셨습니다

 

'신라' 는 부산 대지국밥도 획득하셨습니다

 

신라는 덤으로 부산의 '가오' 역시 획득하셨습니다 (그만 획득해..)

 

[초기신라 정복왕 파사이사금]

신라는 이때부터 점차 경상도의 맹주로 굴기하게 되며

한창 당시 신라와 비슷한 시기 건국한

백제가 서울 , 충청 , 전라도로 세력을 펼쳐가듯이

신라 역시 점차 경상도에서 정복을 시작하며 힘을 뻗쳐나가던 상황이었습니다

신라는 그렇게 석탈해 탈해이사금 다음왕때부터 본격적 정복군주가 등장하는데

 

신라는 이례적으로 박씨임금이 이어지다가

석씨 석탈해가 왕위를 이어 신라 1~3대는 박씨 ,

4대는 석씨 석탈해가 임금이 되었고

 

탈해이사금(석탈해) 사망후

대신들은 신라 5대 임금으로는 

다시 석씨가 아니라 유리이사금 박유리의 둘째아들 박파사를 왕위에 올렸습니다

그로인해 그는 신라 5대임금 파사이사금이 되었고

 

석탈해는 효행있고 총명한 인물이었으며 박씨임금의 사위였기에

이례적으로 룰을 깨고 왕위에 올랐지만

그의 아들까지 왕위에 올리기엔

이미 박씨체제가 굳어져있던 신라였기에 결국 다시 왕위가 박씨에게 돌아간듯하고

 

박파사도 왕위에 오른게 나름 특이한데

신하들은 원래 탈해이사금이 죽었을때

유리이사금의 태자 박일성을 왕위에 오르게했는데

어떤이가

 

<어떤이>일성이 적자이긴 하지만

사람됨과 총명함이 파사만 못하다

 

하여서 둘째인 박파사를 왕위에 올렸고

적통이니 원자니 하는게 옛날에도 중요시됬지만

그당시 사람들도 찐따측정하는 능력은 있었기에

옛날에도 적통아들이 찐따면 바로 능력있는 다른 놈한테 권력 몰아주었고 

나름 건국초기엔 그래도 신라가 능력제로 돌아가서

신라가 크게 발전한 것이었습니다

 

박파사는 절도있고 검소하며 물자를 아끼는 생활을 하였고

또한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칭송했습니다

 

파사이사금은 재위초부터 명군의 자질을 보였는데

그는 창고를 풀어 백성들을 구제했으며

옥에 갇힌 죄수를 조사해 큰 죄인이 아닐경우 모두 석방시켰고

홍수나 가뭄 , 변방의 변고를 대비해

농사와 양잠을 장려하고 군사를 훈련시켜 긴급상황에 대비케했습니다

 

파사 이사금 23년 8월 가을 ,

음집벌국(경주 안강읍) 과 실직곡국(강원도 삼척시) 이 국경문제로 다투다가

파사 이사금에게 와서 결정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파사 이사금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여기고

금관국 수로왕이 나이가 많고 아는 것이 많을 것이라 생각하여

그를 불러와 물었습니다

수로왕이 의견을 내어 다투던 땅을 음집벌국에 주도록 했습니다

 

이에 파사이사금은 신라 6부로 하여금 수로왕을 위해 연회를 베풀게 했고

5부는 모두 이찬(당시 신라 최고관등 , 장관급) 을 보냈는데

한기부만 직위가 낮은 자를 보내서 대접하였고

 

(옆나라 임금이 친히 리스크까지 감수하며 신라까지 행차해

이웃국가 국경분쟁문제까지 해결해줬고

게다가 지금 세계 대통령끼리

자주 비행기타고 외국에서 만남갖고 그런 개념이 아니라

그당시 임금이 타국가 외국 수도까지 행차한다는건

왠만한 게임 레이드뛰는것보다 큰 엄청난 모험이자

자국 행정이 마비될정도로 큰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이었고

 

이에 수로왕 감사잔치에 장관 6명이 와야되는데

5부서에서는 장관이 전부 총출동했는데

한부서에서 뜬금없이 9급공무원보내서 수로왕에게 수치준 상황)

 

분노한 수로왕은 그의 종 탐하리를 시켜서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를 죽이고 돌아갔습니다

 

보제의 종이 도망해서 음집벌주 타추간의 집에 의탁하였고

파사이사금이 사람을 보내 그 종을 찾았지만

타추는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파사이사금이 노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음집벌국을 공격하니

그 우두머리가 자기의 무리와 함께 스스로 항복했고

이 소식에 쫄은 실직(삼척시) , 압독(경산시) 두 나라 왕도 항복했습니다

 

이외에도 신라초기 정복군주였던 파사이사금은

파사이사금 29년 5월 여름

군사를 보내서 비지국(창녕군) , 다벌국(대구광역시) , 초팔국(합천군) 을 합병해

점차 신라는 한반도 동남부의 강국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각간의 유래]

파사 이사금 사후

파사이사금의 적자 박지마가 왕위를 이어

신라 6대왕 지마이사금이 되었고

 

예전에 파사이사금이 태자 지마를 데리고 유찬 못가에서 사냥후 한기부를 지날 때

이찬(옛날 신라 최고벼슬) 허루가 음식을 차려 대접하였고

술기운이 무르익자 허루의 아내가 젊은 딸을 데려나와 춤을 추었습니다

 

이에 이찬 마제의 부인역시 자기의 딸을 데리고 나왔고

태자가 그녀를 보고 기뻐했지만

허루가 이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태자비는 내딸이 해야되는디 ㅡㅡ;;)

 

이에 파사이사금이 허루를 달래며 말하기를

 

<파사 이사금>이곳 땅 이름이 대포(큰 부엌) 인데

공이 이곳에서 훌륭한 음식과 좋은 술을 차려 잔치를 베풀어 즐겁게하니

직위를 주다(술이 많음) 이라 하여 이찬 위에 두어야 마땅하겠다

 

라고 말하고

마제의 딸을 태자의 배필로 삼았고

대신 허루를 주다로 삼아 위로했고

주다는 뒤에 각간(이찬 위 신라 최고벼슬 , 신라 영의정) 이라 불렸습니다

 

신라 뿔 술잔

 

[지마이사금]

하여튼 ,

왕이 된 지마이사금은 백제 , 왜국과 화친하고

가야 , 말갈과 투쟁을 했고

 

재밌는 점은 지마 이사금때 왜국과 화친을 해서

이때부터 80여년간 왜군이 신라를 침공해오지 않았고

왜국 역시 이당시 내부사정으로 혼란기여서 한국으로 들어올 여력이 없었다 합니다

 

[존버왕 일성이사금]

지마 이사금 사후

박일성이 왕위를 이어 신라 7대왕 일성이사금이 됬는데

옛날에 유리이사금의 아들이 박일성과 박파사가 있었고

장남이었던 일성이 원래 태자였는데

동생 파사가 더 인물이 좋아서 신하들이 파사를 왕위에 올렸고

파사-지마 부자가 사망하자

다시 54년간 존버하던 일성이 왕위에 올라 신라 7대왕이 된 것이었습니다 (;;)

 

 

근데 일성이사금시대는 별다른 기록은 없고

말갈에 시달렸다거나

민간에서 금 , 은 , 옥 사용을 금하고

농사에 힘쓰라 명령을 내렸던 정도고

 

[마지막 박씨왕 아달라이사금]

일성이사금 사후 일성의 맏아들

박아달라가 왕위를 이어 (박지마 오빠 VS 박아달라 오빠 ;;)

신라 8대왕 아달라 이사금이 되었고

박아달라는 초기 신라 마지막 박씨왕이었고

예전 석탈해 임금이 신라에 큰 덕을 쌓았기에

비록 석씨임금은 석탈해 한대로 끝나고 다시 박씨시대가 시작됬지만

박씨들도 점차 시원찮아지자 석씨들이 다시 규합해서 왕위를 노리기 시작했고

박씨들은 최후의 발악으로 일성이사금 박일성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지마이사금 박지마의 딸 내례부인 박씨인

박씨+박씨간 족내근친혼으로 태어난 박아달라를 마지막으로 왕위에 올리게 됩니다

 

[신라왕실의 족내혼]

신라를 건국한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선정을 하며 성인이라 불린 인물이었기에

박씨들은 이후 나타난 뛰어난 인물인 석탈해와 그의 후손들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결국 족내혼 , 근친혼을 택해서 자신들을 성인의 후손임을 강조하며

왕위 기득권을 지키려 했던 것으로 보이고

이것이 바로 신라가 초기부터 멸망까지 두고두고 문제가 된

 

'골품제'

 

의 시작이었습니다

 

(시작점은 여럿으로 이야기되나

대충 신라가 혈통에 예민했다 보면 됨)

 

자기들은 성인의 후손이니 성스러운 뼈다귀인 성골이고

나머지는 다들 소뼈다귀 , 개뼈다귀라 대충 구분을 했는데

이게 초기엔 그냥 그러려니 넘어갔지만

왕실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점차 공고해지며 근친까지 시작된 것이었고

 

이후에도 신라에 김씨시대가 시작되자

김씨임금중 가장 뛰어났던 신라성군 지증왕 김지대로의 후손들(지증왕계)이

지증왕 김씨도 혁거세거서간 박씨급의 성인이긴 하니깐

성골임을 주장하며 골품제를 강화하며 기득권을 지키려 했고

성골 , 골품제가 본격적으로

지증왕 사후 지증왕의 아들 법흥왕대부터 선덕여왕때까지 이어졌음을 보면

지증왕계는 왕위를 내놓지 않기위해 다른 왕족들과도 구분을 지키려했고

끝내 두명의 여왕까지 만들며 성골승계를 유지하려하다가

야심가 김춘추와 김유신의 등장으로 저지되게 됬고

김춘추 역시 진골출신으로 성골을 누르고 왕위에 올랐음에도

성골이라는 이름이 주는 마력은 너무 강했기에

통일신라때도 또다시 하대성골을 부활시키며

원성왕부터 경문왕의 직계 조상들은 모두 근친혼을 6번하며

헌강왕 , 정강왕 , 진성여왕 , 효공왕이 이유없이 20대에 죽어버렸고

하여튼 신라가 한국왕조중 가장 기득권 지키기에 철저한 국가여서

초기 박씨엄마와 박씨아빠한테 태어난 박아달라 이사금때도 그렇고

왕실내에서도 계속되는 잦은 근친혼으로 장애찐따가 된게 신라였고

 

잦은 근친으로 주걱턱이 된 합스부르크 왕가 , 합스부르크 립

 

신라 불후의 명장 김유신 역시 이런 고귀한 혈통들을 지키려 일부로

친여동생 문희가 친구 김춘추 임금과 낳은 막내딸 ,

즉 자기 조카 지소부인과 결혼했고

고귀한 혈통을 지키려 혈안이었던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한국위인이 맞긴 맞는데 (;;)

환갑의 나이에 10대 로리조카와 결혼한 병신 페도새끼였던 것도 팩트였을 정도로

신라 지배층들은 혈통에 대한 집착이 광적인 나라였고

 

이웃나라 백제 , 고구려 역시 왕정국가로서

당연 적통이나 혈통을 안중요시한건 아니었는데

적어도 백제나 고구려는 왕실인 부여씨 , 고씨가 독점하며

대성팔족 백제 일곱귀족들이나 고구려 5부 다섯귀족가문과 결혼하며

대놓고 근친까진 안했는데

적어도 왕실이 나라의 귀족가문내에서 돌려 사귀었던

백제 , 고구려인들이 보기에도 신라인들의 혈통 , 골품에 대한 집착은

 

'야 신라야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노 ? 가족끼리는 섹스하는거 아니노..'

 

이라 여길 정도로 가히 역겨울 수준이었으며

아무래도 고구려는 중국 , 말갈 , 북방 유목민족과 국경이 열려있어

백성들 사이에서 굳이 근친이 쉽지 않았고

 

백제는 해양대국으로서 광활한 동아시아 바다가 주무대였고

부용국이던 왜인과도 많이 사귀기도 했는데

 

신라는 산골짜기 구석탱이에 숨어있어 외적을 방어하긴 좋은 지형이었지만

고구려와 백제가 비옥한 평야지대에 자리잡은 것과 달리

신라 경상도는 마치 한국의 촉나라 사천지방같은 지형에 자리잡았기에

나름 따뜻한 남부지방이라 살기도 좋고

방어는 쉬위도 외부로 들어가고 나가기가 어려운 지형이었고

이로인해 정치가 안정됬음에도 근친혼이 성행하며 폐쇄적인 국가화 되었던게

아닐까 싶습니다

 

남매가 모텔 인증샷 인스타(비석문)에 올린 신라..

 

문제는 이런 신라가 자기들끼리 근친하다 합스부르크왕가처럼 멸망해버린것과 달리

군사력도 깡패국가였기 때문에 하필 삼국 최종승자가 되었기 때문에

백제 , 고구려 병합 이후에도 이때 버릇을 못고치고

계속해서 김씨들끼리 근친하며 해먹다가

백제 , 고구려 유민들의 원망을 오지게 받고

통일신라 말기

후백제 견훤이 등장해 신라 왕 모가지 썰고 백제 의자왕의 복수를 해버렸고

후고구려 , 고려 왕건이 등장해 경순왕한테 도게자 받고

고구려 연개소문과 보장왕의 고구려 부흥을 완수시켜버리게 됩니다

 

하여튼 신라 골품제 , 근친의 뿌리는 멀리멀리

박씨왕실시대부터 시작된 신라 건국기부터 이어진 유서깊은 전통(?)이었으며

쉽게말해서 내가 박씨인데 저기 김씨들이랑 결혼하면

김씨들이랑 재산을 반띵해야하니

친여동생이랑 결혼하면 재산을 지킬 수 있다는 아주 미친 생각을 신라인들이

하고 시행했으며 (이집트도 이지랄하다가 로마 카이사르가 따먹어버림)

 

옛날에는 유전자개념 , 근친의 위험성에 대한 과학적 개념은 없었지만

인류의 시작부터 석기시대를 거쳐오며 한국신석기시대부터

가족들 냄새에 불쾌해지는 본능 , 경험적으로 같은 혈연끼리 결혼(족내혼)을 하면

장애 , 기형아가 출산된다는 것을

알게되며 '족외혼' 이 시작된 것이었는데

폐쇄찐따 신라는 다시 신석기시대부터 내려온 족외혼 관습을 거부하고

기득권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박혁거세 , 김지대로의 후손들끼리만 해쳐먹으려 동성결혼을 하다

결국 신과 자연의 섭리를 거부하다 개같이 멸망한 케이스입니다

 

박씨끼리에서 태어난 박아달라도 그런 박씨들의 최후의 발악이었지만

결국 옛 시대던 현재던 임금이나 지도자는 혈연으로 되는 것이 아닌

능력과 그간 쌓아온 덕으로 되는 것이었기에

신라 마지막 박씨왕이라는 운명을 피할 수는 없었고

 

[계립령과 죽령]

신라 8대왕 아달라 이사금은 

계립령에 길을 개통시키고 죽령을 개통시켰다는 기록 외엔

딱히 기록은 없고

이 기록들은 신라가 점차 경상도 바깥지방도 언제든지 진출이 가능하다는 의미였고

 

북벌할 수 있는 신라 핵심지대였던 죽령

 

[왜국여왕 비미호]

이외에는 특이한게 왜국의 야마타이국 여왕 히미코(비미호) 가

사신을 보내 예방해왔다는 기록이 있고

그외 기록은 없지만

왜국에 여왕이 나타나 신라와 교류했다는 기록때문에

신라도 나름 왜의 영향을 받아 훗날 선덕여왕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지도

않았을까도 싶습니다

 

왜국여왕 히미코 , 삼국지 13

 

[석씨왕조의 시작 벌휴이사금]

아달라 이사금 사후

다시 신라는 석씨 왕조가 시작되는데

석탈해가 잠깐하고 박씨들에게 다시 왕위를 뺏긴것과 달리

이번엔 좀 길어서 200년간 석씨왕조가 지속됬고 (ㄷㄷ)

아달라 이사금이 아들없이 죽었으므로

백성들은 탈해 이사금의 손자 석벌휴를 왕위에 올려

신라 9대왕 벌휴 이사금이 되었고

 

신라 백성들도 박씨왕들이 점차 시원찮게 하니까

예전 명군이었던 석탈해왕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다

다시 석씨들을 왕위로 세운게 아닐까 싶고

 

벌휴 이사금은 200년 석씨왕조 초대군주로서

바람과 구름을 보고 점을 잘쳐서

홍수와 가뭄 , 풍년과 흉년을 잘 찍었으며

사람이 정직한가 사악한가도 잘 찍어서

사람들이 그를 성인이라 불렀다 합니다

 

점쟁이였던 벌휴 이사금

 

벌휴 이사금은 박씨들과 연관없는 순수 석씨임금이었는데

어머니가 지진내례부인 김씨로서

본격적으로 김씨들도 신라 왕실에 참여하고 있었고

김씨 시초 김알지는 바로 신라 시초 석탈해가 거두어 기른 아이였고

박씨에 대항한 나름 의미있는 석+김씨의 결탁이었습니다

 

이미 박씨시대는 저물어 갔지만

물론 박씨들은 그럼에도 기득권을 내려놓고 싶지 않았고

결국 박씨들은 차선책으로 박혁서세 , 알영부부의 여자후손을 왕비족으로 만들어

훗날 석씨들이 몰락한 것과 달리

훗날 김씨들과 결탁해서 신라왕족의 일원으로 꾸준히 참여하게 됩니다

 

[군주]

하여튼 ,

벌휴 이사금은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좌우군주로 삼고

소문국(의성군)을 정벌하였고

이때부터 신라에 군주(군사주인) 라는 명칭이 시작되었습니다

 

[내해이사금과 포상팔국의 난]

벌휴이사금 사후 벌휴이사금의 손자 석내해가 왕위를 이어

신라 10대왕 내해이사금이 되었고

벌휴 이사금의 태자 골정과 둘째아들 이매가 먼저죽고

장손이 아직 어렸으므로 이매의 아들 석내해를 왕위에 올린 것이었습니다

 

내해 이사금때

바닷가의 여덟나라가 공모하여 가라(가야) 를 침공하자

가라왕자가 구원을 요청해왔고

 

(포상팔국의 난)

 

내해 이사금이 태자 석우로와 일벌찬 이음에게

신라 6부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케 했고

그들은 여덟 나라 장군을 죽이고

포로 6천명을 잡아 돌아왔습니다

 

포상팔국의 난

 

[석우로 부하 물계자]

석우로 말고도 포상팔국의 난때 활약한 또다른 인물이 한명 있는데

바로 물계자로서 물계자 기록에 포상팔국의 난 기록이 더 자세히 나오는데

물계자는 집안이 대다로 미미했지만 기개가 커서

어릴때부터 장대한 뜻을 가졌고

 

포상의 여덟나라가 아라국을 치기로 함께 꾀하자

아라국에서 사신을 보내와 신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내해 이사금이 왕손 날음으로 하여금 이웃의 군과 6부 군사를 거느리고가서

구해주게 해서 8국의 군대를 패배시켰고

이 싸움에서 물계자는 큰 공을 세웠지만

왕손에게 미움을 샀으므로 그 공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계자에게 말하기를

 

<어떤사람>자네의 공이 대단히 컸는데 기록되지 못하였으니

원망하는가 ?

 

(나는 네가 기록되지 못한 것을 기록했어)

 

 

기록 안된다는것을 기록했어 , 천재들의 집

 

물계자는 

 

<물계자>어찌 원망하리오 ?

 

이에 어떤사람은

 

<어떤사람>어찌 왕에게 아뢰지 않는가 ?

 

하니 물계자가 말하기를

 

<물계자>공을 자랑하고 이름을 구하는 것은

뜻있는 선비의 할 바가 아니다

단지 마땅히 뜻을 힘써 연마하며

후일을 기다릴 뿐이다

 

했습니다

이후 3년이지나

골포 , 칠포 , 고사포국 세 나라가 갈화성(울산)을 공격해오자

내해 이사금이 직접 물계자를 거느리고 가서 구해

세 나라의 군사를 대패시켰고

물계자는 수십 명을 목베었으나

공을 논함에 이르어서는 또 얻는 바가 없었습니다 (;;)

 

이에 물계자는 자기 부인에게

 

<물계자>일찍이 들으니 신하된 도리는

위험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어려움을 만나면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이라 했는데

전날의 포상 , 갈화의 싸움은 위험하고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도 목숨을 바치지 못하고

자신을 버리지 못한다고 사람에게 소문이 났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저자와 조정에 나가겠는가 ?

 

물계자는 머리를 풀고 거문고를 들고

사체산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여튼 , 이런 것들로인해 경상도 내에서 신라의 위상은 상승하게 되었고

신라의 도움을 받은 가야가 왕자를 인질로 보내오게 됩니다

이외에도 내해 이사금때 백제와 전투에서 여럿 승리하며

점차 남한내 신라의 입지가 다져지게 됩니다

 

[신라 초기 명장 태자장군 석우로]

내해이사금에게는 또다른 뛰어난 명장이 있었는데

바로 석우로로서 내해 이사금의 아들 즉 태자였고

태자임에도 용맹하고 충직했던 석우로였기에

석우로 태자는 태자이자 신라초기 명장으로서

신라인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신라 초기 명장 석우로

 

그러나 내해이사금은 아들 석우로태자를 왕위에 올리지 않고

사위 석조분을 왕위에 잇게하라 유언했고

석조분은 벌휴 이사금의 장남인 석골정의 장남으로서

벌휴 이사금 다음 원래 왕위계승자였지만 너무어려서

내해 이사금이 먼저 왕위에 오른거라서

내해 이사금은 죽기전 원래 왕위에 있어야할 조분을 왕위에 올리게 했고

이로인해 석우로태자는 용맹하고 충직한 태자임에도 왕위를 잇지 못하고

한때 태자라는 신분을 버리고 신라의 장군으로서 활약하게 됩니다

 

신라 11대왕 조분이사금은

조분이사금 2년 7월 가을

이찬 석우로를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김천시)을 토벌하여 승리하고

그 땅을 군으로 만들었습니다

 

따란 ! 신라는 김천 포도를 획득했다 !

 

조분이사금 4년 7월 가을

왜병이 침략하자 이찬 석우로가 왜인과 사도에서 싸웠고

석우로는 바람을 이용해 불을 질러 배를 불태웠고

적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조분이사금 7년 2월 봄

골벌국(영천시) 왕 아음부가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해왔고

조분이사금은 그들에게 집과 밭을 주어 편안히 살게하고

그 땅을 군으로 만들었습니다

 

따란 신라는 영천 포도를 획득했다 !

 

조분이사금 15년 정월 봄

이찬 석우로는 공을 인정받아 서불한(각간 , 신라 영의정) 에 임명되고

병마사를 겸하게 되었습니다

 

조분 이사금 16년 10월 겨울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자

석우로가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마두책을 수비했습니다

그날 밤 날씨가 몹시 추워지자

석우로는 사졸들을 위로하고 직접 섶에 장작불을 피워

그들을 따뜻하게 해주었습니다

이에 사졸들이 진심으로 감격하며

마치 솜을 두른 것 같이 여겼습니다

 

 

석우로는 그렇게 태자 , 대장군 , 서불한으로서 조분이사금의 전폭적 신뢰를 받고

충직하고 인덕도 있던 인물이라 신라 초기 명장으로 활약하게 됬는데

미인은 박명하고 충신은 요절하는게 역사의 안타까움이라 했던가..

 

[첨해 이사금의 질투]

조분이사금 사후

조분이사금의 친동생 석첨해가 왕위를 이어

신라 12대왕 첨해이사금이 되자

첨해 이사금이 재위했을때

사량벌국(상주시)이 전에 신라에 속했다 문득 배반해 백제로 돌아가므로

석우로가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여 멸망시켰습니다

 

첨해이사금은 한때 태자였으며 군공과 업적이 엄청난 태자장군 석우로가

자신의 왕위에 위협이 될까봐 두려워했고

 

첨해 이사금 2년 정월 봄

첨해 이사금은 이찬 장훤을 서불한에 임명하며

원래 서불한이었던 석우로를 견제했고

석우로는 다음해 왜인들에게 의문의 죽음을 맞습니다

 

[석우로의 죽음]

253년 계유년

왜국의 사신 갈나고가 객관(사신접대관) 에 와 있었는데

석우로가 대접을 맡았고

석우로가 손님에게 희롱하며 말하기를

 

<석우로>조만간에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밥짓는 여자로 삼겠다

 

고 했고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을 보내 신라를 치니

첨해 이사금이 우유촌(울진)으로 피난갔고

석우로가 말하기를

 

<석우로>지금 이 환난은

내가 말을 조심하지 않은데서 생긴 것이니

내가 당해내겠다

 

하고 왜군에게 가서

 

<석우로>전일의 말은 희롱(농담) 이었을 뿐이었다

어찌 군사를 일으켜 이렇게까지 할 줄 생각하였겠는가

 

이에 왜인이 대답치 않고

석우로를 잡아 나무를 쌓아 그 위에 얹어놓고

불태워 죽인 후 돌아갔습니다

 

 

그때 석우로의 아들은 어려서 걷지 못하므로

다른 사람이 안고 말을 타고 돌아왔는데

훗날 흘해 이사금이 되었습니다

 

[부창부수 명원부인]

훗날 미추이사금때에

왜국의 대신이 와서 문안했는데

석우로의 아내가 국왕에게 청하여

사사로이 왜국 사신에게 음식을 대접했고

그가 몹시 취하자 장사를 시켜 마당에 끌어내 불태워

석우로의 원한을 갚았습니다

 

 

왜인이 분하여 금성을 공격해 왔으나

이기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습니다

 

<김부식>석우로가 당시 대신으로서

군무와 국정을 맡아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또 이기지 못하더라도

패하지는 아니하였으니

그 계책이 반드시 다른사람보다 월등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마디 말의 잘못으로 스스로 죽음을 취하였고

두 나라로 하여금 싸우게까지 하였다

그 아내가 능히 원한을 갚았으나

역시 변칙이요 바른 길은 아니었다

만일 그렇지 아니했다면

그의 공은 또한 기록할만 하였다

 

(그냥 가만히 숨만쉬고 있어도 알아서 레전드대접해주는데

괜히 아가리 털다가 ㅈ되서 안타깝구먼 이런뜻)

 

그럼에도 신라최고왕족이자 대신 , 대장군 석우로를

홀몸으로 왜군진영에 가게해 사과시킨건 그냥 첨해 이사금이

코안풀고 정적제거를 위해 석우로의 위험을 방치했다 볼 수 있으며

신라인들의 존경을 받은 석우로가 죽자 신라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됬고

석우로도 첨해 이사금의 견제에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괜히 왜국 사신에게 화풀이하다 이사단이 난게 아닐까 싶고

 

아무리 명장이고 덕장이어도 대놓고 왕이 견제하고 죽이려 들면

평생 전장에서만 산 사람이라 흥분해서 큰 실수를 할 수있는게 인지상정이고

이렇게 순진하고 충직하고 권세가 강했던 석우로는

그가 부담스러워진 첨해 이사금의 견제와 무시에

더이상 신라에 쓸모 없어졌다는 무력감을 느겼지만

충신이라 또 쿠데타는 못일으키고 혼자 끙끙 앓다가

술자리에서 괜히 왜인에게 시비걸다가 전쟁이 발발했고

또 첨해 이사금도 그런 석우로를 보호하려 하지 않고

권신숙청의 좋은 기회로 여기고

 

'왜 입털다 전쟁일으키고 지랄임 그냥 니혼자 나가 뒤져 이새끼야'

 

를 시전했고

돌아갈 곳이 없어진 석우로도 그냥 맨몸으로 사과하러가서

왜인에게 불타오르네(Fire)를 시전당했고

석우로 마누라도 빡돌아서

훗날 왜인에게 불타오르네(Fire , Feat BTS)

싹다 불태워라 바우와우와우를 시전했던거라

생각됩니다

 

[말한마디의 중요성]

근데 석우로도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명장으로서

좀더 참고 인내하고 폭군에게 좌천되도 그냥 조용히 도닦고 잠수타야했는데

괜히 아가리 잘못 털어서 전쟁을 일으키게 된 것이어서

김부식도 얘가 좋은놈은 맞는데 무리수 ㅈ됬노.. 하며

이런 점을 콕 찝어 비판했고

외교에서 중요한 기본적 원칙 하나가

굳이 일부로 적을 만들지 않을것이며

가까운 이웃국과 건설적 관계를 수립해야하는것인데

 

아무리 짱깨 쪽본이 싫어도

장사를 하더라도

굳이 중국 , 일본과 척을 지면

어마어마한 위안 , 엔화시장을 놓치게 되는 것이라

함부로 불쾌한 감정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서도 안되고

굳이 반중감정 , 반일감정을 드러내며 손해를 보면 안되는 법이고

장사의 기본 원칙인데

또 고운말 바른말 한마디가 적을 고객 , 친구로 만들 수도 있고

이게 국제 외교로 가도 똑같은 법이라

 

굳이 아가리 털어서 적만들고 국민 , 기업들 수익 줄게하는게 진짜 멍청한 짓이라

석우로도 당시 그를 견제하던

첨해이사금의 먹이가 되기 딱 좋은 상황을 자초해버렸고

하여튼 석우로가 죽은 뒤 신라는 안보에 구멍이 뚫렸고

백제가 침범하자 일벌찬 익종이 그들과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최초의 김씨임금 미추이사금]

첨해 이사금 사후 또다시 신라는 큰 변혁을 맞이하게 되는데

박씨-석씨에 이어

이번엔 김씨임금이 등장하게 됬고

첨해 이사금 사후 석첨해가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김미추를 왕위에 올려

신라 13대왕 미추이사금이 되었고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다스리는 시초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김미추의 조상 김알지가 계림의 금궤에서 태어나자

석탈해왕이 데려와 그에게 금궤에서 따온 김씨 성을 주고(금=김) 궁중에서 길렀고

뒤에 대보(재상) 에 임명했고

 

김알지는 김세한을 낳고 ,

김세한은 김아도를 낳고 ,

김아도는 김수류를 낳고 ,

김수류는 김욱보를 낳고 ,

김욱보가 김구도를 낳았고

김구도는 곧 김미추를 낳았고

 

(무슨 성경인줄 ;;)

 

김알지의 김씨일가는

7대에 이르러 신라에서 살아남아 끝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집요한 김씨들)

 

미추 이사금 김미추

 

명군이었던 미추이사금은 백성들을 위로하며

노인 , 가난하여 스스로 살 수 없는 자들을 위문하고 구제했고

미추이사금은

미추이사금 7년

직접 정사와 형벌의 자잘못을 물었으며

사신 다섯을 파견해 각지를 순회하며

백성들이 무엇을 고통스러워하며 걱정하는지를 조사하게 했습니다

 

미추이사금 11년 2월 봄

미추이사금은 농사에 해가 되는 일은 모두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고

 

미추이사금 15년 2월 봄

신하들이 궁궐을 다시 짓자 청했지만

미추이사금은 백성들에게 노동을 시키는 것은 중대사라 여겨

이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명군의 냄새가 나는 기록들이며

석씨최초임금이자 명군 석탈해가 첫코를 잘 꿰어서

훗날 석씨들 왕조시대가 열렸듯이

김씨최초임금이자 명군 김미추가 첫코를 잘 꿰어서

훗날 김씨들 왕조시대가 열린것이며

 

이렇게 처음하는 사람들은 처음 선례를 잘 남기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고

그래야 후손들이 조상의 도움을 받으며 꿀을 빨 수 있게 되고

옛날 사람들은 이를 '덕' 이라 했습니다

 

미추이사금은 신라 최초의 김씨 임금으로서

훗날 신라는 김씨향후회가 전부 독차지한 나라가 됨으로서

김알지와 미추왕 김미추는 혁거세거서간 박혁거세가 박씨 시조로 추앙받은것처럼

김씨 시조로 크게 높여졌으며

 

미추왕릉도 신성시되어 미추왕릉의 귀신군사들이 신라를 외적으로부터 보호했다거나

김유신 무덤에서 김유신과 병사들이 나와서 미추왕릉으로 가서

미추왕과 나라걱정을 했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있는걸 보면

미추왕은 동해의 용이 됬다는 삼국통일 문무왕과 더불어

신라의 호국신같은 존재로 모셔진 훌륭한 명군이었습니다

 

[김씨와 황금 , 황금의 나라]

이외에도 미추왕릉 근처 계림로 도로공사현장에서

1973년 우연히 황금보검유물이 발굴됬는데

신라 금관과 더불어 신라 황금유물의 절정의 문화유산으로서

신라가 금씨 즉 김씨를 국성으로하는 황금의 나라였을 보여주는

정밀한 황금보검이 출토되었고

 

경주 계림로 보검 , 태극문양 새겨진 국뽕 ㅈ되는 황금태극검 ㄷㄷ ;;

 

신라황금보검은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보검양식과 비슷하기에

석탈해의 석씨일족이 저기 동쪽왜국이나 동북쪽 캄차카반도 , 스키타이에서 흘러왔다면

김알지 , 김미추의 김씨일족은 흉노족이나 중앙아시아에서 흘러왔다는

설이 있고

 

 

의외로 신라도 나중에서야

북쪽의 고구려가 북방을 전부 통솔할때부터 폐쇄적이게 됬지

고구려 건국전이나 건국초만해도 고구려가 만주를 전부 장악하지 못하던 때라

멀리 서역 , 중앙아시아에서 만주를 건너 신라로 여러 유목민족들이

이주해오고 정착해왔을 상황이 분명 있습니다

 

[유례이사금의 백제와의 일본침공 구상]

최초의 김씨임금이자 명군 미추이사금이 사망하자

조분 이사금의 맏아들인 석유례가 왕위를 이어

신라 14대왕 유례이사금이 됬고 그는 조분이사금의 맏아들이었습니다

유례 이사금의 어머니는 박씨였는데

그녀는 밤길을 가다가 별빛이 입으로 들어갔는데

이로인해 임신이 됬고 (;;)

석유례를 낳던 날 저녁에 이상한 향기가 방에 가득찼었습니다

 

유례이사금때는 왜병들이 신라를 때리고 튀는일이 극심해져서

유례이사금 12년 봄

유례이사금은 신하에게

 

<유례이사금>왜인이 자주 우리 성읍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없다

내가 백제와 함께 계획을 세워

백제와 우리가 일시에 바다를 건너 왜국을 공격하려 하는데

이 계획이 어떠한가 ?

 

이에 서불한 홍권이

 

<홍권>우리는 수전에 익숙하지 못하므로

모험삼아 원정을 하는 경우에는

예상 밖의 위험이 있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더구나 백제는 사술이 많고

항상 우리나라를 병탐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들과 함께 일을 도모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에 유례 이사금이

 

<유례이사금>옳다

 

고 말했습니다

 

(빠른 수긍ㅋㅋ)

 

 

[미추왕의 대나무귀신 군사들]

유례이사금 14년 정월 봄

이서고국(청도군 이서면)이 신라수도 금성을 공격해왔고

신라는 군사를 크게 동원해 방어했으나 물리칠 수 없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귀에 대나무 잎을 꽂은 이상한 병사들이 나타났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신라군과 함께 적군을 쳐부수고 난 후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어떤 사람이 수만 개의 대나무잎이 죽장릉(미추왕릉)에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했고

이로인해 백성들이

 

<신라백성들>돌아가신 임금께서 하늘의 군사를 보내 전쟁을 도우셨따

 

고 말했습니다

 

[기림이사금의 함경도 나들이]

유례이사금 사후

조분 이사금의 손자 석기림이 왕위를 이어

신라 15대왕 기림이사금이 되었고

기림이사금은 왜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비열홀(함경남도 안변)에 순행해 나이많고 가난한 자를 직접 위문하고

어려운 정도에 따라 곡식을 하사했고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 왔다고도 합니다

 

여기서 초기신라가 국력도 약했던 시절에

함경도 비열홀까지 진출했다는 것은

진흥왕때 국력이 강한 최전성기때 함경도에 진출한것때문에

혹시 잘못된 기록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한반도 동해안이 굴곡이 많은 서해안에 비해 

깔끔한 일자형으로 쭉 뻗어있어서 그냥 동해 바닷가로 쭉 타고 올라가면

경상 , 강원 , 함경이 코앞이기에

의외로 초기 신라가 함경도까지 쉽게 들낙날락하던 상황이었고

의외로 초기 신라가 강원도도 빠르게 진출하기도 했고

백제가 평안도 , 경기도 , 충청도 , 전라도라는 서부한국지역을 장악했듯이

신라 역시 경상 , 강원 , 함경도라는 동부한국지역이 주 무대라

건국초부터도 동서구도가 뚜렷했기에

학계에서도 잘못된 기록은 아니라 보고도 있습니다

 

 

[마지막 석씨왕 흘해이사금]

기림이사금이 아들없이 사망하자

내해이사금의 손자 석흘해가 왕위를 이어

신라 16대왕 흘해이사금이 되었고

흘해이사금은 신라 마지막 석씨 임금이었고

석씨는 이후 박씨와 달리 신라에서 완전히 몰락하게 됩니다

 

[석우로 아들 석흘해]

흘해이사금은 바로 위에서 말한 초기신라영웅 석우로 태자장군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조분왕의 딸 명원부인으로서 석우로 열전에 나온

남편의 복수를 한 여인이었고

 

예전에 석우로 장군이 살아있을때

그는 임금을 섬기는데 공로가 있었기에

여러 번 서불한(신라 국무총리) 이 되었고

그는 아들 석흘해의 용모가 준수하고 심기가 강직하고 두뇌가 명민하며

일을 처리하는 것이 보통사람과 다른 것을 보고

여러 제후들에게 말했습니다

 

<석우로>내 집안을 흥하게 할 자는

반드시 이 아이다

 

신라신하들도 기림이사금이 아들없이 죽자 의논하며 말하기를

 

<신라신하들>흘해가 어리기는 하지만 나이든 사람이 갖출 수 있는 덕을 지녔다

 

며 그를 받들어 왕위에 올렸습니다

 

흘해이사금 3년 3월 봄

왜국왕이 사신을 보내 아들의 혼처를 요청하자 아찬 급리의 딸을 보냈고

 

흘해이사금 35년 2월

왜국이 흘해이사금의 공주에 청혼했는데

공주가 이미 출가했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흘해이사금 36년 2월

갑자기 돌변한 왜국이 절교한다는 글을 보내오고

 

흘해이사금 37년

갑자기 왜병이 풍도에 와서 변경의 민가를 약탈하고

또 금성을 포위공격했습니다 (;;)

 

이벌찬(=서불한 , 국무총리) 강세는

 

<강세>적병이 멀리서 왔으니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습니다

공격시간을 늦추어

그들이 피로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흘해 이사금은 그렇다고 생각해서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고

적들이 식량이 떨어지자 퇴각하려 했고

이때 흘해 이사금이 강세로 하여금 강한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게 해서

그들을 격퇴했습니다

 

[신라 석씨왕실의 몰락]

흘해 이사금은 아들없이 죽었는데

그는 172년간 종속된 석씨왕실 마지막 임금이었고

이후 신라의 석씨왕족들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됬고

박씨들이 기득권을 지키려 족내혼 , 근친혼을 하다 몰락했듯이

석씨들 역시 점차 박씨가 실패한 것을 그대로 답습하며

기득권을 지키려 족내혼 , 근친혼을 하다 멸망해버렸고

석씨시대 잠깐 나왔던

김미추 미추왕이 명군의 자질을 보이자 김씨들이 번성하기 시작했고

이후 석씨세력의 피가 섞인 실성이었지만 눌지가 실성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며

석씨왕실은 완전히 몰락했고

외부세력인 김씨들은 이후 토착세력인 박씨들과 결합해 세력을 확장하게 됩니다

 

(사실 석탈해는 박씨들이 거뒀고 김씨들은 석탈해가 거뒀던 건데

통수에 통수릅 거듭하는 신라왕사)

 

박씨가문 232년 , 석씨가문 172년간 신라왕실을 이끌었고

나머지 556년을 김씨가문이 이끌게 됬고

흘해 이사금 석흘해를 끝으로

신라는 김씨시대가 시작되며 김씨나라들이 됬고

이런 신라가 삼국통일을 해버리며

고려 , 조선에 이어 오늘날 대한민국까지 김씨가 가장 흔한 성이 되어버린

한국은 오늘날도 김씨들의 코리아가 되버렸고

우리가 영어로 나라 이름은 고주몽이 세운 고구려 , 고려 즉 코리아인데

정작 국민들중 가장 많은 성이 바로 신라나 가야쪽 김씨라는 사실이고

한국인들이 정신적으로는 고구려 , 고려를 존경하나

육체적으론 결국 신라인인 아이러니한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또한 박씨는 오랫동안 김씨들과 함께 번성하여

오늘날 우리나라 성씨분표 1위가 김씨 , 2위가 이씨 , 3위가 박씨로서

나름 잘 살아남았던 것에 비해

석씨들은 존재감이 거의 없는 마이너성씨가 되었고

석씨왕실은 김씨왕실시대 초기에 생긴 어찌저찌한 세력다툼에서 패배한 뒤

신라 왕실에서 찍혀서 왕실에서 대충 쫓겨났던거로 생각됩니다

 

<라봉봉>비록 한국사에서 존재감은 없는 인물들이 많지만

신라가 김씨시대가 시작되기 전 나름 경상도 지역 패자로 우뚝 서려는 노력이

김씨 이전 박씨와 석씨왕조 시대에 있었던 것이고

석씨시대를 끝으로 신라의 경상북도 통합은 끝났다 할 수 있고

김씨왕조시대부터

경상북도 너머 백제와 고구려 역시 각자 자신들의 구역 통합을 끝낸 상황이었기에

한국내 소국들 , 쪼렙들 사냥은 다 끝나고

본격적으로 신라는 국경에 백제 , 고구려만 남은 상황이 됬고

이렇게 소국들이 많던 시대는 원삼국시대라고도 하고

본격적인 삼국시대는 신라 김씨왕조대부터 시작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석우로로서

신라인들의 존경을 받은 명장이자 충신이었고

석우로가 말실수로 한방에 나락간 인물이긴 하지만

신라인들의 존경을 받은 인물로서

석우로가 충직하고 병사들을 아까는 모습으로 명장 첫스타트를 잘 끊어주었기에

신라는 이후에도 이사부 , 김무력 , 김유신 같은 존경받는 명장라인들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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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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