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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건국기 인물들>

[애증의 신라]

[박혁거세]

[알영 부인]

[도둑질 하지 않는 나라]

[호공]

[혁거세거서간]

[남해 차차웅]

[이사금과 임금님]

[유리 이사금]

[유리 이사금의 개혁]

[한가위의 유래]

[성씨가 다른 임금]

[알에서 태어난 석탈해]

[꾀를 써서 호공의 집을 빼앗은 석탈해]

[탈해 이사금]

[금궤에서 나온 김알지]

<라봉봉>

 

[애증의 신라]

이전 이야기에서 삼국시대 열전 인물들을 정리해놓으니

신라이야기를 쓸때 더 편할거 같고

여러분들도 역사공부하시거나 역사컨텐츠 제작하실때 참고하시라고

링크 걸어두겠습니다 ^^

 

<삼국사기 열전 인물 시대분류(+인물시대구분 깔끔하게 정리하는 법)>

https://labongbong.tistory.com/1629

 

고구려 , 백제라는 두 영광스러운 한민족국가 이야기가 끝났고

마지막 신라..

애증의 우리 신라는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뤄낸 삼국 최종승자임과 동시에

당나라라는 외세의 힘을 빌린 이후

한국은 천년 넘게 굴욕적인 중국과의 사대관계가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사대주의 외교로 비판받는 한국인들의 원류조상국가임과 동시에

한국인들의 증오를 받는 애증의 국가입니다

 

어린시절 한번쯤 다 가본 경주(신라 수도) 수학여행 , 불국사 수학여행 인증샷 코스

 

석굴암

 

신라 금관

 

사실 신라인들 입장에서만 보면 얍삽한 삼국통일이

지극히 국익을 위한 선택이라는 말도 있지만

삼국사기 기록 , 광개토대왕릉비 비문이나

조선상고사 내용처럼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이전부터 중국과는 다른

'한민족' 이라는 공동체의식이 분명 존재하였고

고구려와 백제는 조상이 같음에 서로 전쟁한 것을 원망했다는 기록도 존재하고

실제로 당대 삼국내에서도 평화적 연합 구상노력이 존재하였기에

신라에 대해 아쉬움이 많은 입장이고

물론 신라가 고구려 , 백제 , 신라 삼국중

가장 모범생이고 가장 착실하고 뛰어난 나라였으므로

승리한거고 배울점도 큰 나라인데

각설하고

 

제 생각에 신라에 대한 한국인들의

비판 VS 옹호론이 절반대 절반이라 치면

저는 비판쪽에 걸겠고

또한 신라의 비판점을 단순히 사대주의로 비판하긴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당시 신라가 동맹을 맺은 당나라가 지금 중국인데

지금 중국이 아니라 당시 미국이라는 포지션의 당나라였고

세계 최선진국이자 최고문화국 , 세계의 인재들과 문물들이 모이는 초강대국이었기 때문에

 

중국 황금기 당나라

 

신라의 입장 역시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면이 있었다 저는 생각하고

신라 입장에서는 한민족적 개념을 제외하고

단순히 국가 신라는 애초에 경상도에서 시작한 국가라

고구려 만주까지 못먹고

농사 잘되는 꿀땅인 충청도와 전라도 , 한강이라는 백제영역만 먹어도

땅과 인구를 2배 이상으로 넓힌 상황이 전개되므로

당시 굉장히 영리하게 외교줄타기를 해가며 삼국의 패자(집권자)가 될 수 있었던거라

함부로 비판할 수 만도 없다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제가 신라에 대해 옹호가 아니라 비판에 무게를 두는 이유는

신라는 다른게 문제가 아니라 골품제가 최악의 문제였던 국가로서

골품제는 신라 시작부터 끝까지 신라의 암으로서 신라인들은 끝내 골품제라는 사회의 암을

제거치 못하고 북방에서 일어난 고려에게 천년의 영광을 내어주었으며

 

시작부터 골품제때문에 신라 왕실은 근친이 성행했고

중간에도 골품제때문에 딸만있던 진평왕은 정치에 뜻이 없던 딸 덕만을 여왕으로 삼다

백제에 대규모 침공을 받아 뜻없는 백성들의 혈전이 펼쳐졌으며

마지막도 골품제때문에 일반백성과 귀족 , 왕족이 서로 다투며 문제가 곪아가다

반란이 터져 천년 번영한 황금의 나라가 붕괴했으며

 

고려가 몽골과 왜구와 홍건적이라는 외세의 침략에 쇠약해지다 붕괴되고

조선이 일본의 침략으로 멸망한것과 달리

통일신라는 진짜 전쟁도 없고 돈도 많고

문화력과 군사력도 굉장해서 동아시아에서 여포노릇하면서 잘먹고 잘살다가

가혹한 골품제와 세금을 자국백성들에 쥐어짜다

그냥 자국도적과 농민반란으로 전국시대가 열려 무너진 어처구니 없는 역사가 있으며

 

집에다 금칠한 신라 서라벌 금입택 ;;

 

백제 , 고구려계를 차별하지 않으며 골품제를 배격한 고려라는 대안국가가 등장하자마자

신라 사대부 , 귀족들이 전부 고려 왕건 밑으로 들어가며 신라는 어처구니 없게 멸망하게 된 것이었고

골품제란 신분제로서 신라 다음국가인 고려나 조선이 왕-귀족-평민-노비 이렇게 네가지 구분만 두고

그 이상을 구분하지 않았던것과 달리

 

신라는

왕과 귀족 , 백성들 사이에서도

 

성골-진골-6두품-5두품-4두품

 

이라는 까다로운 계급이 존재하였고

신분에 따라 의복이나 가옥에 엄격한 제약을 가했으며

귀족들도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골품이 낮으면 더이상 승진이 불가했으므로

일단 과거시험에만 합격하면 누구나 능력이 뛰어날경우

왕 바로 아래 문하시중 , 영의정이라는 최고대신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고려나 조선의 귀족과 양반계층과 달리

신라는 능력이 뛰어나도 골품제로 막아버린 지극히 폐쇄적이고 악한사회였으며

다른말로 자국민을 노예로 부린것과 다를 바 없는 국가가 신라였습니다

 

신라 골품제

 

초강대국에 사대한다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 말처럼 미국같은 초강대국의 지위를 존중하며

무고한 약한 백성들의 희생도 막으며

우리도 그 밑에서 한자리 해먹으며 미국 선진문물받고 우리가 미국형님 가오도 살려주며

잘 따르며 한미발전과 번영을 도모해야한다는

지극히 국익에 관련된 것도 있어서 함부로 비판할 수 없고

오히려 신라식 , 한국식 사대가 초강대국 밑에 찰싹붙어 항상 작은 나라임에도

세계 2등은 꾸준히 해왔던 터라

실제로 국력이 작은 나라로서 국익적 차원에서 나쁜 것만도 아니었지만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서운게 내부의 적이듯이

결국 신라는 건국초부터 괴롭혔던 왜 , 가야 , 백제 , 고구려 , 당나라때문에 멸망한게 아니라

오히려 황룡사 구층목탑의 의미처럼

신라는 왜 , 가야 , 백제 , 고구려 , 당나라를 전부 제압하고

청해진으로 세계경찰노릇한 엄청나게 대단한 나라였음에도

자신들이 만든 전국민 노예제도인 '골품제' 때문에 골품제라는 사회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어처구니 없게 붕괴한 것이며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

 

사실 노예제나 마찬가지인 신분제도는 신라 외에도 고려 , 조선에도 있었지만

왕들도 왕아래는 다 고만고만하다 여겼고

현실적으론 어렵지만 법적으론 평민들의 과거시험 진출기회는 열어줬으며

신라처럼 대놓고 귀족 , 일반백성끼리도 계급을 나눠서 승진을 제한하지는 않았으며

신라도 , 고려도 , 조선도 마지막은 항상 안타까움을 자아내지만

어느 식당이던 , 회사던 국가던 망한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또 아이러니한건 신라가 골품제는 못없앴지만

지배층이 죽으면 백성들을 죽여서 같이 묻는 악습인 순장제도는 가장 빨리 없앤나라였고

약소국 신라가 삼국중 가장 으뜸으로 선 이유도 순장의 폐지에서 시작되었다 저는 보고있으며

 

 

한중일에 모두 존재했던 순장 , 왕이 죽으면 왕 사후에도 도우라는 의미로 노비와 백성들을 같이 묻었음 , 불새 야마토편 1987

 

지배층(지도자)이 피지배층(백성) 을 가엾게 여기고 사랑하고 편의를 도와주면

그 나라는 아무리 약했어도 강대국으로 일어나는 법이고

반대로 가혹하게 하고 지배하려 들면

그 나라는 아무리 강했어도 약소국으로 전락하게 되는 법인게 세상과 역사의 동서고금의 순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좀 막 벌판에서 말타고 달리고

토끼고기 잡아서 불에 구워먹고 그런거에 대한 로망이 있어서

국가 자체는 고구려를 제일 좋아하고

음험하고 찐따스러운 신라를 그닥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데

근데 의외로 실제로 제가 세계 수많은 위인과 역사를 통틀어

제 인생에서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 신라인인데

바로 순장을 폐지한 신라 22대왕 지증왕이 제(라봉봉)가 가장 존경하는 역사인물이고

 

신라 마지막 '마립간' 이자 첫 '왕' 지증왕

 

저는 신라 지증왕을 세종대왕과 더불어 한국사에서 월클이라 불릴만할

내놓을만한 유이의 임금이라 보고 있고

지증왕과 세종대왕은 순장폐지와 한글창제라는 굉장한 업적으로

마치 노예해방의 링컨 대통령처럼 자신의 대를 비롯해 수십년 , 수백년 뒤의

아직 태어나지도 않을 수많은 무고한 희생을 막은 세계사의 큰 위인이라 저는 보고 있고

 

제가 신라를 골품제때문에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론 그시대에 순장 하나 없앤것만으로도 우리 한국인들은 신라에 큰 빚을 졌다 보고있고

순장이 산업혁명 이전까지 세계초강대국이자 옛날의 미국지위였던 중국에선

무려 청나라때까지 이어졌음을 보면

한국인들은 중국인들보다 더 백성과 지배층들이 단결할 수 있음의 계기가

바로 지증왕대부터 시작되었다 보고있고 참 이런것 때문에 애증의 국가가 신라입니다

 

지증왕은 위대한 업적들이 많음에도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같이 인기있는 위인도 아니고

너무 고대인물이라 자료도 적어 한국 대중들에게도 큰 조명은 받지 못하는 인물이고

그런것때문에 저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말하라하면

대충 비슷한 느낌의 미국 링컨 대통령을 말하지만

링컨 대통령은 정말 존경은 하지만 총맞아 죽은게 닮기 두렵기도 하고

 

마음속으로는 신라 지증왕을 가장 존경하고 있고

제가 신라 경순왕 후손 언양김씨로서 지증왕 김지대로의 피가 흐르고 있어서도 있고

지증왕은 당시 기준으로 굉장히 평화적인 인물이었고 편안히 사망했던거 같고

64세에 왕이 된 굉장히 묵묵히 늦게 꽃피운 인물의 대기만성형 스타일의 임금이기도 했고

무고한 백성들의 희생을 막고자 엄청나게 많은 시간 인내와 노력을 했음이 상상되는 인물이며

삼국사기에 지증왕 기록에 왕체홍대 담력과인 (왕은 체격이 크고 담력이 뛰어났다) 라는 말이 있는데

저는 좀 살아가며 두려움을 느낄때마다 언제부턴지

마음속으로 '담력과인 체홍대' 라는 말을 중얼거리는 버릇이 생겼고

그렇게 혼자서 그런 방식으로 기도하고 나면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저도 신라는 싫어하지만

지증왕은 진심으로 존경하는 편이고

다들 교과서나 매체등의 영향으로

전성기시기 정복군주인 법흥왕 , 진흥왕 , 태종 무열왕을 띄워주는 편이지만

저는 단순한 임금이 아닌 성인쪽 인물이거나 백성들의 무고한 희생을 막거나

수성의 영역쪽 인물을 더 높게 평하는 사람이라

박혁거세 , 지증왕 , 성덕왕을 신라의 대단한 명군이라 여기고 있고

하여튼 신라도 인물도 , 명군도 참 많은 나라였고 여러 생각이 복잡한

한국 대표 고대국가였고 

 

아무리 신라가 미운 생각이 들어도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백제나 고구려보다는 덜 막장이고 더 나은 나라니

고구려 , 백제 , 신라 삼국 백성들이 신라의 우산아래로 옹기종기 모인 것이었으며

진도준을 대하는 진양철 회장마냥

이쁜자식(셋중 그나마 제일 정상인 자식) 매하나 더드는 심정으로 신라 비판하는게

저와 대부분 독자들의 심정이라 저는 생각하고 있고

 

전형적인 성균관 유생이나 신라 화랑 스타일의 진도준 (곱상한 꽃미남+똑똑함)

 

아무리 백제나 고구려를 중국에 맞선 대단한 주체적인 제국이라 띄어준다 한들

결국 골품제허접사대찐따 신라한테도 패배할정도로 민생이 개털이고 막장이었던 나라고

역사에서 진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며

 

광활한 영토를 잃었다는 안타까움과 불쌍한 동정표때문에

오늘날 백제 , 고구려에 대한 평이 좋은 것 뿐이지

막상 백제나 고구려가 통일했으면 현재 한민족은 다들 무사 , 무신국가의 기풍으로 되어

붓보다 칼을 숭상하는 문화가 되서 전쟁도 잦고

이상한 털보나 오크년들이 미남미녀라고 계속 국가적으로 가스라이팅 됬을거고

군사정권이나 일본 사무라이문화같이 군인들 지나다니면

다들 실금 흘리면서 납작 업드려 머리 조아리고 있어야하고

미소녀소년 아이돌+선비나라였던 신라에 대해 그리움이 증폭되며 다들 신라가 사실 예쁘고 착했는데

나쁜 백제 , 고구려의 흉계에 휘말려 멸망해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전쟁이나 하며 굶고있다며 한탄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

신라가 골품제처럼 욕먹을 짓도 심하게 있긴 한데

신라도 이긴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며

고구려 , 백제를 중시하고 신라를 극혐하신

단재 신채호 선생님

(일제강점기 시대 독립운동역사학자라는 상황때문에 신라를 좋게 볼 수가 없었던 것도 있으시고)

과 달리 저는 그냥 우리가 고구려 , 백제 , 신라를 누구도 더 낫거나 나쁘다 여기지 말고

다 우리의 아픈 손가락이며

모두 우리의 자랑스러운 조상이라 여기며

배울점과 한계점 , 장점과 단점을 잘 찾아 유산을 계승해야한다 생각할 뿐입니다

그러면 신라 이야기로 가봅시당

 

[박혁거세]

고조선의 유민(나라잃은 백성)들은

경상북도 산골에 나뉘어 살며

여섯 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나라 잃고 만주와 평양에서 경상북도까지 헤메신 옛 고조선 선조들)

 

이것이 진한의 6부가 되었고

진한은 신라국이 됩니다

 

둘째마을 고허촌장 소벌공은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의 숲 사이에 말이 꿇어 앉아 울고 있음을 보았고

가보니 말은 사라졌고 다만 큰 알이 있었습니다

 

신라 천마도

 

이것을 쪼개자 그속에서 어린아이가 나왔고

 

혁거세왕의 탄생

 

그는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는데

아이의 나이 10여세가 되자 지각이 들고 영리하며

행동이 조신했습니다

 

그가 바로 신라시조 혁거세이고

여섯마을사람들은 그의 출생을 기이하게 여겨

높이 받들다가 이때에 이르러 그를 임금으로 삼았고

처음 그가 나온 알이 박의 모양과 비슷하게 생겨서

성을 박으로 했습니다

 

진한(신라)에서는 왕을 거서간이라 했는데

거서간의 뜻은 귀한사람 , 귀인에서 나왔다고도 하고

이로서 신라의 첫번째 왕은 박혁거세 거서간입니다

 

[알영 부인]

혁거세 거서간 5년 1월 봄 ,

용이 알영 우물에 나타나서

오른쪽 옆구리로 여자아이를 낳았고

한 노파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데려다 길렀는데

우물 이름으로 그녀의 이름을 지었고

알영은 자라면서 덕스러운 용모를 갖추었습니다

 

알영부인의 탄생 (드래곤 암핏 페티쉬 ㄷㄷ;;)

 

박혁거세 거서간은 이를 듣고

그녀를 왕비로 받아들였고

그녀는 행실이 어질고 내조가 훌륭하여

당시 사람들은

 

'두 사람의 성인'

 

이라 불렀습니다

 

두 사람의 성인

 

[도둑질 하지 않는 나라]

왜인들은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를 침공하려다가

박혁거세에게 하늘에서 내려준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기도 했고

낙랑사람들이 군사를 동원하여 침범하려다

신라사람들이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으며 곡식더미가 들에 가득 쌓인것을 보고

신라는 도둑질 하지 않는 나라임을 알고 부끄럽게 여겨 돌아갔다고도 합니다

 

혁거세 알영부부는

백성들에게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하고 농토를 충분히 이용하게 하며

백성들을 가르치고 길렀습니다

 

양잠그림 , 누에치는 여성들

 

[호공]

혁거세 거서간은 호공이란 신하가 있었는데

그는 원래 왜인이었는데 처음에 박에 허리를 차고 바다를 건너왔기에

호공(박공) 이라 불렸습니다

 

옛날 현재 남한지방은 마한 , 진한 , 변한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훗날 마한은 백제 , 진한은 신라 , 변한은 가야로 변하게 되었고

백제 , 신라 , 가야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 원삼국 시대에는

마한이 삼한의 대장역할을 했었는데

 

고대 삼한

 

마한왕은 마한 동부 사람들이 국경의 신라인들과 함께 살며

점차 번성하자 박혁거세 거서간이 보낸 신하 호공을 책망하며

신라를 질투했습니다

 

이후 마한왕이 사망하자

어떤 사람이 혁거세거서간에게

 

<어떤사람>서한(서쪽 한 , 마한) 왕은 이전에 우리 사신을 모욕했습니다

이제 그 국왕이 죽은 기회를 이용하여 공격하면

그 나라를 충분히 평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혁거세거서간은

 

<혁거세거서간>다른 사람의 재난을 우리의 행복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행위이다

 

혁거세거서간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곧 사신을 보내 마한왕을 조문했습니다

 

[혁거세거서간]

혁거세거서간은 백제보다 빨리 신라를 건국한 신라 시조임금이었으며

혁거세거서간 40년에 백제 시조 온조가 왕위에 올랐을 정도였고

혁거세거서간 53년에는 동옥저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며

 

<동옥저 사신>우리 임금이 남한에 성인이 났다는 말을 들었기에

저를 보내 이를 바칩니다

 

했을 정도로 신라에서 성인으로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혁거세 거서간은 61년을 재위하고 사망하였고

 

신라시조 박혁거세상 , 온 세상에 밝은 빛을..

 

[남해 차차웅]

혁거세 거서간 사후

혁거세 거서간의 적자(정실부인의 아들) 이자

 어머니가 알영부인인

박남해가 왕위를 이어

남해 차차웅이 되었습니다

 

차차웅은 신라말로 무당이라는 뜻인데

무당은 한국에 불교가 들어오기전 사제 , 신관의 역할을 했던 계층으로

오늘날 산골에 있고 굿하는 단순한 마을내 무당이 아니라

한국에 불교가 오기 전엔 한국 최고종교가 무속이었기 때문에

남해 차차웅 당시 무당은

국가 최고 지식인 , 종교지도자 , 국가사상교주 이런 강대한 이미지가 있어

지금 무당보다 당시 무당의 힘이 훨씬 강했고

 

차차웅은 무당이란 뜻으로서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주관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무당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다가

마침내 존경받는 어른을 차차웅이라 부르게 된 것이었습니다

 

1900년대 초의 무당들

 

마을에서 권위있는 어른으로 묘사되는 이누야샤속 무녀 금강

 

박남해가 아버지 박혁거세 거서간의 왕위를 이어

신라 2대왕 남해 차차웅이 되었고

 

(아직 신라가 왕호를 사용하기 전이라 왕이 아니라 거서간 , 차차웅이고

옛날 역사책에선 혁거세왕 , 남해왕이라고도 했지만

요즘 추세는 거서간 , 차차웅이라는 신라 고유 방언으로 부르려는 추세인듯)

 

남해차차웅도 아버지 닮아서 훌륭한 인물이었고

재위기간동안

낙랑군사가 쳐들어와 남해차차웅이 두려워했는데

측근들이 하늘이 그들을 돕지 않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했고

얼마후 그들이 물러갔다하고 (--;;ㅋㅋ)

왜인들이 병선 100여 척을 보내 약탈하다

유성이 적의 진영에 떨어져서 왜인들은 두려워 퇴각했다고도 합니다

 

(주작같지만 대충 신라가 초기부터 짱깨+쪽본인들에게 시달렸다는 기록 겸

성스러운 신성력으로 적병을 물리쳤다는 왕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기록인듯 --;;ㅋㅋ)

 

신라에 존재했던 신성한 결계

 

남해차차웅 재위 5년 정월 봄에는

남해차차웅은 석탈해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장녀를 그에게 시집보냈고

2년후에는 탈해를 대보에 임명하고 군사와 정치에 대한 사무를 맡겼습니다

 

[이사금과 임금님]

남해차차웅 박남해가 사망하자

남해의 태자 박유리가 왕위를 이어

신라 3대왕 유리 이사금이 되었고

또다시 왕호가 바뀌는데(거서간-차차웅-이사금)

한번만 쓰고 버린 거서간 , 차차웅과 달리

이사금은 나름 오래갔는데

 

이사금은 굉장히 중요한 왕호이자 한국 고유어인게

이사금은 바로 임금님의 유래가 된 말이며

이사금-잇금-임금으로 변화하며

왕실과 귀족들은 중국한자의 영향으로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지만

백성들은 이때부터 신라의 잇금 칭호가 강렬하게 자리잡아

조선 멸망때까지 왕을 임금님이라 부르게 된 것이고

오늘날에도 한국에서는

동화책에서도 더 정감있게 왕을 임금님이라 하거나

왕을 더 정중하고 친숙하게 높여 부르는 말로 임금님을 사용합니다

 

이사금 , 잇금에 대한 유래가 유리 이사금 기록에 재밌게 나오는데

원래 남해차차웅은 다음 왕위를 아들 박유리가 친아들이라는 이유로

왕위를 물려주려 하지 않고

좀더 선진적이고 열려있었던 남해왕은

어질고 슬기로운 사위 석탈해에게 물려주고자 했고

 

(남해왕도 괜히 혁거세왕 아들이 아닐정도로 대단하고 앞서간 민주적 생각을 가진듯)

 

태자 박유리 역시

대보 석탈해가 원래 덕망이 있다 생각해서

왕위를 탈해에게 사양했고

탈해 역시

 

<석탈해>임금이라는 자리는 보통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라고 말했고

그들은 시험삼아 떡을 깨물어 보았고

그 결과 유리의 이 자국이 많았으므로

즉시 측근들과 함께 그를 받들어 왕위에 오르게하고

왕호를 이사금(잇금 , 이의 자국) 이라 했습니다

 

잇금으로 왕을 정해서 이사금

 

굉장히 훈훈한 건국초 신라였던게

박혁거세가 총명하단 이유로 10대 어린아이를

여섯 촌장들이 왕위로 올렸고

혁거세 아들 남해왕도 왕위에 미련이나 욕심없이

아들이 있음에도 훌륭한 사위 석탈해에게 양위하려했고

석탈해 역시 그럼에도 남해왕 태자 유리에게 다시 양보하는 등

아무도 왕위에 미련이나 욕심이 없는 훈훈한 모습이고

신라가 건국초 굉장히 건전하고 건강한 기풍으로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근데 통일신라때 1초에 한번씩 왕바뀌는 군벌시대 개막ㅋㅋ)

 

또한 석탈해는 자신보다 박유리가 이 개수가 많음을 알고

미리 구색을 맞춰서 서로 가오 안상하게 왕위를 양보했을 수도 있고

지금도 노인들 돈 제일 털어가는게 치과인데

옛날 그시절 치약도 없던 시대라 치아관리가 지금보다 더 어려웠을거고

치아관리가 잘되서 이의 개수가 많다는건 그만큼 자기관리 , 청결 등이 철저하단 거고

나름 그시절 현명한 이를 가리는 그당시기준에도 나름 과학적 방법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유리 이사금]

신라 3대왕 유리 이사금도 명군이었고

유리 이사금은 재위5년 11월 겨울

순행하다 노파가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유리 이사금>내가 세상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몸으로 왕위에 앉았으나

백성을 먹여 살릴 수 없고

노인과 어린이로 하여금 이토록 극한 상황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죄이다

 

라고 말하고 옷을 벗어 덮어주고 밥을 주어 먹게했고

관리에게 명하여 홀아비 , 과부 , 고아 , 자식없는 노인들을 위문케하고

늙고 병들어 혼자 살 수 없는 자들을 부양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이웃나라 백성들이 이 소식을 듣고

신라로 오는 자들이 많았고

이 해에

백성들의 생활이 즐겁고 편안하여

처음으로 도솔가를 지었고

이것이 노래가사의 시작이었습니다

 

유리 이사금은 노례이사금이라고도 불리는데

노래라는 말이 유리(노례)에서 나온게 아닐까도 싶고

노래왕이 바로 유리왕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원조 가왕 ?)

 

[유리 이사금의 개혁]

유리 이사금 9년 봄 ,

유리 이사금은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을 하사해서

양산부는 양부로고치고 이씨 성을 ,

고허부는 사량부로 고치고 최씨 성을 ,

대수부는 점량부로 고치고 손씨 성을 ,

간진부는 본피부로 고치고 정씨 성을 ,

가리부는 한기부로 고치고 배씨 성을 ,

명활부는 습비부로 고치고 설씨 성을 주었고

 

관직에 따리 17등급을 두었고

관직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이벌찬(신라 영의정 , 국무총리)

2,이찬

3.잡찬

4.파진찬

5.대아찬

6.아찬

7.일길찬

8.사찬

9.급벌찬

10.대나마

11.나마

12.대사

13.소사

14.길사

15.대오

16.소오

17.조위

 

[한가위의 유래]

유리 이사금은 6부를 정하고 이를 두 편으로 나누고 (청팀 , 백팀 같이)

두 왕녀로 하여금 각각 부내의 여자들을 거느려

무리를 나누어 편을 짜게 했고

이들 두 편은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새벽에

큰 부의 뜰에 모여 길쌈을 시작하여 밤 열시 경에 끝냈고

그들은 8월 15일이 되면 길쌈을 얼마나 했은지 심사했으며

길쌈을 적게 한 편에서 술과 음식을 차려

길쌈을 많이 한 편에 사례했습니다

이 때

노래와 춤과 여러가지의 오락을 하였고

이 행사를 가배라고 했고

가배는 가위 , 가윗날 , 한가위 , 추석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한가위 , 길쌈배틀

 

이 행사를 할때 진 편에서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면서 탄식하는 소리로

 

'회소'

 

라고 하였고

그 소리가 슬프고 맑아

뒷날 사람들이 이 곡에 노랫말을 붙이고 회소곡이라 했습니다

 

(가곡의 왕 슈베르트보다 앞서간 한국가곡 ;; 킹뽕이 차오른다 ;;)

 

유리 이사금 , 노례 이사금은 정말 노래왕이 아니었을까 싶은 기록들이고

나름 건국초 신라의 기틀을 잡았는데

뭔가 유리 이사금은 F 성향의 인물이었을거 같아서

재위 기간동안 국정업무보다는 백성 돌보기 , 노래 , 춤추기 , 축제 이런거나 즐기는 타입이었고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씨하사 , 17등급 관직을 둔 것은

뭔가 T 성향의 인물같은 대신 석탈해가 주도하지 않았을까 싶고

유리왕대 일어난 일들이지만

유리왕은 보통 노래와 예능담당 , 국정은 석탈해가 담당하며

유리 이사금+석탈해 연립정권이 분업활동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INFP 였던 유리 이사금

 

유리 이사금 14년

고구려 왕 무휼이 낙랑을 습격해 멸망시키자

낙랑백성 5천명이 신라로 투항해왔고

유리 이사금은 그들을 6부에 나누어 살게했습니다

 

유리 이사금 34년 9월 가을 ,

유리 이사금은 병환이 나자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유리 이사금>탈해는 신분이 국척(임금의 인척 , 왕의 사위)이요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고

공을 여러 번 세웠다

 

나의 두 아들은 재능이 그를 따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죽은 뒤에는 탈해를 왕위에 오르게 하라

나의 유언을 잊지말라

 

[성씨가 다른 임금]

이로인해 유리 이사금 사후

62세의 그의 사위 석탈해가 왕위를 이어

신라 4대왕 탈해 이사금이 되었고

재밌는 점은 1대왕 박혁거세와 2대왕 박남해 , 3대왕 박유리는 '박' 씨인데

4대왕 석탈해는 '석' 씨라는 점이고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국가들이

왕정국가는 한가지 성만이 왕위를 이어왔고 이어올 수 있었는데

신라는 석탈해때부터 신기하게도 성이다른 사위에게도 왕위계승권이 주어졌고 (!!)

이는 신라가 세계 어느나라와도 다른

굉장히 특이한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국가임을 의미합니다

 

(어느나라던 국가 건국초기는 원래 여러 혁신적인 기풍이 가득한 시기라

석탈해가 신라 건국초 뛰어난 공을 세워서 제도와 룰을 바꿔버린거라 볼 수도 있고)

 

[알에서 태어난 석탈해]

석탈해는 원래 왜국의 동북쪽 천리 밖에 있는 다파나국에서 태어났고

원래 왜국은 야마토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

한반도에서 가장 근접한 규슈섬에서 시작했으므로

다파나국은 오늘날 일본 규슈섬이 아니라 혼슈섬이라는 말도 있고

아니면 석탈해 신화와 캄차카반도 신화가 비슷해서 캄차카반도라는 말도 있는데

하여튼 석탈해는 신라 6부 여섯마을 출신은 아니었던 이방인이라는 뜻의 설화로

보면 됩니다

 

원래 다파나국 왕은 여국의 왕녀를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지 7년만에 큰 알을 낳았고

왕은

 

<다파나국왕>사람이 알을 낳았으니 이는 상서로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리라

 

라고 말했지만 여인은 알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함께 싸서 상자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고

그것이 가는대로 두었습니다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캄차카반도 신화>

해안가에서 어로작업을 하며 생활하는 미티는

남편인 쿠이키나쿠(큰까마귀)가 집을 비운 사이에

정부인 바크팀티란(까치인)을 불러들여 밀회를 즐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

미티와 바크팀티란이 은밀한 만남을 즐기고 있는 사이에

쿠이키나쿠가 갑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밖에서 아무리 불러도 미티가 나오지 않자 ,

이를 이상히 여긴 쿠이키나쿠는 불을 지펴 침실로 연기가 들어가도록 했다.

그러자 엉뚱하게도 외간남자인 바크팀티란이 숨을 헐떡거리며 침실에서 뛰쳐나왔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 미티는 개의 알을 임신했고

그것이 명의 인간으로 바뀌었다.

쿠이키나쿠의 집에서 바크팀티란의 아이를 양육하던 미티는

쿠이키나쿠의 구박을 견디다 못해 ,

아이를 가방에 집어넣고는 집을 떠나버렸다.

 

(물에 뜨는 가방에 버린 아이들이 바다로 흘러흘러 신라로 ?..)

 

다파나국 캄차카반도설..

 

그 상자는 처음에 금관국(가야) 해변에 닿았는데

금관 사람들은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고

그 상자는 다시 진한 아진포 어구에 닿았습니다 (이때는 혁거세 39년)

 

그때 해변에 사는 신라할머니가 상자를 줄로 끌어올려 해안에 매어놓고 열어보니

한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노인은 아이를 데려다 길렀고

 

아이가 어른이 되자

키가 9척이 되었으며

기풍과 정신이 훌륭하고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이 아이는 성씨를 알 수 없으나

처음 상자가 도착하였을 때 ,

까치 한 마리가 울면서 날아 따라 왔으니 ,

까치 작(鵲)자를 줄여

'석(昔)'으로 성을 삼는 것이 좋겠고,

또한 상자를 풀고 나왔으니 ,

'벗을 탈(脫)'과 '풀 해(解)'로 이름을 짓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 말했습니다

 

(캄차카 반도신화랑 호환이 되며 까치의 아들 석탈해였기에

까치가 울면서 따라온듯 소름 ;;)

 

탈해는 처음에는 고기잡이를 하여

어머니(할머니)를 봉양했습니다

 

그는 한번도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고

그의 어머니는

 

<어머니>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골격과 관상이 특이하니

마땅히 학문에 종사하여 공명을 세우라

 

라고 말했습니다

 

석탈해

 

이에 따라

그는 학문에 전념하였고

동시에 지리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꾀를 써서 호공의 집을 빼앗은 석탈해]

그는 양산 아래에 있는 호공의 집을 보고

그 곳이 좋은 집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꾀를 써서

이 터를 얻어 그 곳에서 살았고

이 땅은 뒷날 월성터(월성=신라 궁궐)가 되었습니다

남해왕 5년 석탈해가 어질다는 소문이 나자

남해왕은 자기딸을 그에게 시집보냈습니다

 

어떻게 석탈해가 호공의 집을 빼앗았냐면..

그는 호공의 집에 남몰래 숫돌과 숯을 묻고서

다음날 아침 관가에다가

그 집은 자신의 조상이 대대로 살았던 집이었는데

자신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호공이 들어와 차지했다며 송사를 제기했고

그는 숫돌과 숯을 증거물로 제시하여 그 집을 차지하게 됬고

소문이 나자 신라 남해왕은 이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라 생각하여

그를 맏공주와 배필이 되게 했다합니다

 

(까치머리 양아치 석탈해에게 집을 NTR 당한 호공)

 

기록상 석탈해는 할멈밑에서 자랄때도

고기잡이하며 할멈을 봉양하며 한번도 게으름 핀 적이 없었고

학문에 종사하며 공명을 세우라는 할멈의 말에

열심히 공부해서 신라국정을 지휘하게 된 인물이라

뭔가 정략적이고 근면성실한 ESTJ 스타일이 아니었을까 싶고

 

엄격한 관리자였던 석탈해

 

이런것때문에 유리 이사금때도 유리 이사금이 그래도

박씨태자기도 하고 선량한 타입이니

석탈해는 무리해서 석씨라는 정치적 리스크를 감수하며까지 왕위를 잇지 않고

박유리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그 대가로 유리 이사금 밑에서 국정을 총지휘했을 것으로 보이고

 

(유리 이사금 역시 유능하고 충성스런 매형이 알아서 힘든 일 다 해주고

자기는 놀기만 하면 되니 개꿀따리였고)

 

 

F 타입인 유리 이사금(유리왕 , 노례 이사금 , 노래왕)이 닉값하며

춤과 노래와 축제를 즐기며 백성들을 위로할때

T 였던 석탈해는 진짜 실무를 총지휘하며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돋움 할 수 있는

신라의 국가 체계와 기틀을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이 공을 인정받아

유리 이사금 사후 성이 다름에도 왕위를 잇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유리 이사금은 혹여나 자기 아들들이 박씨 친아들이라는 이유로

지혜롭고 경험많은 대신 석탈해를 제치고 왕위 될까봐

신하들에게 두번세번 유언으로 꼭 석탈해를 왕위에 올리라 당부하고 당부했고

유리 이사금은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유리 이사금>선왕은

'내가 죽은 후에 아들과 사위를 막론하고

나이가 많고 현명한 자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라' 고 유언하셨다

이에 따라 내가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제는 마땅히 왕위를 탈해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

 

이로인해 석탈해는 여섯마을의 박씨가 아닌 외부 출신의 석씨임에도

뛰어난 재능과 충성심으로 신라 4대임금이 될 수 있었고

신라가 골품제때문에 폐쇄적이었을 뿐이고

골품제의 문제가 두각된건 승진이 정체된 안정기 , 태평한 시기일 뿐이지

골품제 힘이 약했던 건국초나 전쟁시기에는 누구나 공만 있으면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던 많이 열린 나라였습니다

 

[탈해 이사금]

탈해 이사금 2년 5월 여름 ,

탈해 이사금은 왜국과 친교를 맺고 사신을 교환했습니다

 

탈해 이사금때부터 백제와의 충돌이 시작되는데

탈해 이사금 5년 8월 가을

마한(백제 원형국) 장수 맹소가 복암성을 바치고 항복했고

탈해 이사금 7년 10월 겨울

백제왕이 국토를 개척하여 낭자곡성(충주)까지 넓히고

탈해왕에게 만나기를 요청했지만 탈해왕은 가지 않았고

이로부터 백제의 침공이 시작됩니다

 

[금궤에서 나온 김알지]

탈해 이사금 9년 3월 봄 ,

탈해 이사금이 금성 서쪽 시림의 나무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고

날이 샐 무렵에 호공을 보내 어찌된 일인지를 알아보도록 했습니다

 

호공이 가보니 그곳에는 나무 가지에 금빛나는 작은 상자가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호공이 돌아와 이를 보고하였고

왕은 사람을 보내 그 상자를 가져와 열게 했습니다

 

그 속에는 어린 사내 아이가 들어 있었고,

그 아이는 자태와 용모가 뛰어났고

탈해왕이 기뻐하며 측근들에게

 

<탈해 이사금>이 아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로 준 것이 아니겠는가 !

 

라고 말하고 ,

그 아이를 거두어 길렀습니다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났고

그의 이름을 알지라고 하였습니다

 

알지는 금빛이 나는 상자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라고 하였고 (김알지)

시림을 고쳐 계림이라 부르고 ,

이를 국호(나라 이름)로 했습니다

 

이로인해 신라는 진한 , 사로 , 계림 , 신라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데

계림(닭 숲)은 신라 초기 국호이자 훗날엔 신라 애칭이었다 보면 됩니다

 

(신라는 시림에서 나왔나 그럼 ? ;;)

 

탈해 이사금 시기 신라는

백제 , 왜 , 가야의 삼중공격에 시달렸는데

모두 묵묵히 방어해냈고 (신라 대단..)

 

이런저런 신비한 기록들이 석탈해를 중심으로 많이 존재하고

이외에도 석탈해는 신라에 스키타이 및 철기문화를 가져온 사람이란 설도 있고

스키타이의 한자어가 바로 석탈해라는 이름이 된 것이며

스키타이의 제철기술 , 중앙아시아 금관문화를 들여왔다고도 하고

여러 신격화된 이야기를 제외하고 인간적 이야기만 보더라도

석탈해가 효자이자 근성있고

초기 신라의 기틀을 다졌던 대단한 인물이라는 느낌이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라봉봉>제가 신라는 텍스트 압박에 항상 쓰기 부담스러운데

막상 쓰고보면 굉장히 토속적이고 친숙하고 익숙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라 쓰기 굉장히 편한게 신라고

그만큼 오늘날 한국 원류국가기에 너무 당연하고 정석적이고 정상적 이야기가 신라에 참 많고

백제나 고구려는 웅장한 모험하는 느낌이 많지만 좀 오바떨거나 비상식적 느낌이 강한거에 비해

신라는 그냥 조용히 물이나 공기같은 느낌의 나라이고

과하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 그런 스무스한 느낌입니다

 

그동안 왠만하면 제가 개인적 이야기는 안한거 같은데

제가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 신라 22대왕 지증왕이며

언양김씨인 제가 지증왕의 후손이란 사실이 참 자랑스럽고

참 대단한 나라긴 했고 애증이던 뭐던

현재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는 결국 돌고돌아도 신라인이고 신라계라는 것입니다..

 

요즘 그림 삘이 받는 느낌이라

앞으로 퍼온 사진들 줄이고 제가 직접 그린 그림양을 더 늘리고 하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고

하여튼 다음 이야기에서 봅시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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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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