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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멸망기 인물들>

[삼국통일의 기운]

[혜왕]

[살생을 금지한 법왕]

[백제 마지막 불꽃 무왕]

[서동요]

[백제왕손 서동과 신라공주 선화]

[서동의 왕위계승전쟁 '동서전쟁']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씨 왕비 ?]

[해동증자 의자왕]

[성충의 지략]

[윤충의 대야성 함락]

[성충과 연개소문의 여제동맹]

[성충의 대륙경영]

[성충의 죽음]

[백제의 간신 임자]

[김유신의 여자스파이 금화]

[충신 흥수]

[황산벌의 계백]

<라봉봉>

 

[삼국통일의 기운]

위덕왕대에 중국에서는 모처럼만에 중국 통일제국 수나라가 등장하며

한국 역시 통일의 기운이 감돌게 되는데

 

사실 수나라 등장 이전부터도 이런 기운이 존재하였고

고조선 멸망 이후 만주와 한반도는 중국의 식민통치기관 한사군의 직 , 간접적 지배를 받았으며

한사군직할령 이외 지역에서는 고조선 유민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시국가 , 여러 소국들을 만들며 옹기종기 살다가

고구려 , 백제 , 신라라는 고조선의 후예국가들이 등장하여

점차 소국들을 합병하고 한사군과 대결에서 승리하며 한사군을 축출해 냈고

한사군 축출 이후부터는 점차 고구려 , 백제 , 신라가 국경을 접하게 되며

솥발처럼 맞대어 대결하는 형세가 되었고

광개토대왕의 등장대부터 고구려 천하관이 등장하며

광개토대왕대부터 고구려군이 주둔한 신라가 점차 고구려화되던 상황이었고

이때부터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에서 벗어나기위해

백제와 국혼 , 왕실끼리 혼인으로 점차 하나가 되던 상황이었고

고구려와 같은 부여에서 나왔던 백제 역시

고구려와 같은 겨례끼리 칼을 겨눴기에

이전대부터 고구려인들의 원망을 받던 상황이라 점차 한반도에도

중국과 다른 한민족 사상 , 삼한의식이 생겨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중국 통일제국 수나라의 등장은 이러한 상황에서 불에 기름을 엎은 꼴이었고

이전 한국 고조선은 중국 통일제국 한나라에 멸망당한 전례가 있었고

고구려 역시 한나라에 당한게 많았기 때문에

중국과 국경을 맡대고 있던 고구려에서 가장 먼저 심각하게 대응하던 상황이었고

민족 방파제 역할을 하던 고구려가 중국과 사투를 준비하며 국력이 약화되던 시기

위기감을 아직 느끼지 못했던 백제와 신라는

당시 중국과 국경을 직접적으로 맞댄 상황은 아니었기에

중국과 손잡아 고구려를 물리치면 된다는 낙관주의에 빠진 상황이었고

북방에서 고구려가 중국세력에 대한 방파제 역할을 하던 상황이었기에

풍요롭고 따뜻한 남쪽에서 북의 고구려만 막으면 되던

백제와 신라는 서로 투탁거리기만 할 뿐

당시 고구려의 위기가 초래할 상황을 예견하지 못하던 상황이었습니다

 

하여튼 중국통일제국 수나라의 등장에 가장 위기감을 느낀건 고구려였고

백제는 성왕이 관산성전투에서 신라군에게 전사하고

한강유역을 완전히 신라에 내어준 이래로

오직 신라에 대한 보복을 준비하던 상황이었고

 

그럼에도 이전 백제가 마한 후예로서 남한에서의 영향력과 종주권을 바탕으로

가야 , 왜를 심복처럼 다루며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형성해

고구려나 신라와 대결한 것과 달리

관산성 전투의 패배로 백제는 가야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고

가야는 신라에 합병되었고

백제는 이때부터 신라에 쫄며 급속도록 위축되었고

왜도 신라의 부상에 점차 한국 파병에 두려움을 느끼며 백제는 이전과 다른 침체기를 겪게 됩니다

 

이때부터 점차 삼국관료들 사이에서는

이전 영토확장이나 땅따먹기식 소규모 전투와 달리

국가 수도나 핵심지대를 노리는 '멸망전'이 계획되고 있었고

삼국시대 마지막을 장식한 '삼국통일전쟁' 의 기운이 감돌게 됩니다

 

삼국통일전쟁기를 다룬 역사게임 '삼한일통'

 

[혜왕]

백제 성왕의 아들 위덕왕 사후

위덕왕의 동생 부여계(부여혜)가 왕위를 이어

백제 28대왕 혜왕이 되었고

 

위덕왕에겐 아들 아좌태좌가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아좌태자는 왕위를 잇지 않고 일본에서 살아 후손을 남겼고

동생 혜왕이 왕위를 이었다는 점에

혜왕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해석도 있지만 확실한 진실은 모르고

혜왕은 안습하게 재위기간이 1년이고

기록이 왕위에 올랐고 다음해 죽었다 딱 두줄인 불우한 임금입니다

 

[살생을 금지한 법왕]

혜왕이 사망하자 혜왕의 맏아들

아들 부여선이 왕위를 이어 백제 29대왕 법왕이 됬는데

법왕은 시호가 법 법자로서 오늘날 법관할때 그 법인데

이당시 법이라 하면 불법을 의미하는 말로 쓰기에

법왕은 엄격한 법으로 통치한 법가주의 임금이라기 보다는

불교와 관련이 깊은 인물이었고

 

약간 허접하고 막장스러운 백제스러운 임금이었던 법왕은

좀 어이없는 임금이었던게

즉위하자마자 12월 겨울에

명령을 내리기를 살생을 금하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와 새매를 놓아주고

고기잡고 사냥하는 도구들을 태워버리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즉 불교식 사상인 살생을 금하라는 명령을

국가적으로 내려서 그냥 모든 백성들에게 육식을 금하게 한

채식주의자 비건임금이었는데

본인만 채식하는 것은 자유고 정상이지만

남에게 강요하면 남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고 비정상이이게

본인이 채식만 먹는걸 전국민한테 강요한 임금이었고

 

전국민 육식금지령.. 백제 대단해 , 일본 대단해

 

이 기록이 근데 소름돋고 또한 중요한 이유는

백제 혜왕의 이 병신력은

섬나라 왜에게 전해져

일본은 이 병신같은 명령을 백제 멸망시기부터 시작해서 1200년동안

메이지 유신 전까지 국법으로 진지하게 철저하게 지켰다는 것입니다..

이 악법으로인해 1200년동안 일본여성들의 키와 가슴 사이즈가 작아진 것이었고

하여튼 굉장히 잘못된 법이었습니다

 

법왕의 육식금지령은 소름돋게도

백제가 멸망한 660년 이후

백제를 짝사랑하던 어느 옆나라에서 슬금슬금 부활하는데

675년 일본 덴무 천황은 법왕이 했던거와 완전 똑같은 '육식금지령' 을 내려서

1872년 즉 현재기준에도 얼마 되지 않은 시기까지 1197년동안 철저하게 지켰고

한국같으면 반도적 기질로 생존에 예민한 문화가 강했기에

삼국시대 이후 진작에 사라진 법과 허례허식적 문화들이

 

일본은 섬나라여서 외풍이나 외부세력 , 외국의 영향을 잘 받지 않았기에

한국 귀족의 허례허식이 일본에서 그대로 보존된 경향이 강했고

 

(대륙인 미국이 실리주의로 간 것과 달리

섬나라인 영국도 오늘날 이런 경향이 강해서

자유국가이자 노예제를 최초로 폐지한 미국이나

왕 모가지 따고 시민혁명을 일으킨 대륙국가 프랑스와 달리

오늘날에도 영국은 왕도 존재하고 시민들끼리 클래스 , 신분구분이 철저하고

클럽문화나 좀 허례허식이 많이 사멸하지 않고 보존되있고

변화가 적은게 섬나라 특유의 전통임)

 

이로인해 백제에서 발명된 허례허식과 악습인

나노리 문화(싸움전 자기소개)나 육식금지문화는

일본인들의 천오백년 일본사 전체를 관통하는

일본의 정신과 육체를 지배한 백제사상으로 그대로 남게 됩니다

 

(첨엔 장난으로 썼는데 생각해보니 나노리랑 육식금지가 정신과 육체니 말이 되넹..)

 

영화나 매체속 위엄있는 근육빵빵 일본 사무라이들

 

육식금지령의 여파로 아시아 최단신 수준이었던 현실 일본 사무라이..

 

물론 이 육식금지라는게

해양국가인 백제와 일본 특성상

사실 육고기가 귀했고 물고기가 풍부했으며

당시 사람들 개념에는 물고기는 육식이 아니랑께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불교문화+지리적으로 생선이 공급하기 좋았으며

소나 말은 단순히 맛있는 먹거리가 아니라 당시기준에선

전투나 운송 , 농사에 쓰이는 국가 안보와 관련된 동물이라

국마를 키우는 관청이 존재하던 시기기도 해서

국가적으로 함부로 육고기를 먹으면 안되어 이런저런 차원에서 금지된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옆나라 일본에서는 이런 허례허식이 더욱 심화되어

자연사해버린 소도 고기로 활용하지 않고 그냥 기름만 내고 땅에 묻는 등

엄청 바보같은 짓으로 국력 , 자원낭비를 심하게 하긴 했고

덕분에 일본인들은 동아시아에서 키가 최단신이 되어

볼품없게 변해서 한국에서는 이때부터 일본인들에 대한 이미지가

쪽바리(나막신)에 팬티(훈도시) 와 뻐드렁니와 산다라박 머리와 단신과 소식좌 등

특이한 이미지로 굳어졌는데 이게 놀리거나 조롱하는게 아니라

실제로 일본이 메이지 유신 전까지 국가적으로 전국민이 그래서 심각한 상황이었고

사무라이나 귀족계층의 경우 가문의 명예와 자존심때문에 국법을 더욱 철저히 지켰기에

결국 메이진 유신부터 일본정부가 장려하며 고기에 대한 긍정적인 미신을 퍼트리고

서양 요리를 일본화시켜서 고기를 넣은 카레나

자신들의 친숙한 덴뿌라(튀김) 기술을 접목해 화양절충(일본과 서양을 절충) 의 일환으로 

서양 고기튀김 커틀릿을 개조한 고기튀김 돈까스(가쓰레쓰) 나

프랑스 오믈렛을 개조한 오므라이스 등을 퍼트리며

육식을 장려했고 

 

일본 근대화의 상징인 고기튀김 '돈까스' , 새우튀김정도는 원래 익숙했던 일본인이라서 고기 거부감을 줄이려 밀가루에 튀겨버림

 

무라이 겐사이의 '식도락' , 주저주저하며 소고기를 먹는 근대 일본인들로서 백제인들 육식금지령 영향이 최근까지 갔음 ;;

 

한국에서 근대시기 신체발부 수지부모 , 부모가 주신 신체를 훼손하는 것을 불효라며

머리를 절대 자르지 않았던 유교를 잘못 해석한 악습으로 인해

머리를 서양식으로 짧게 자르라는 단발령이 당시 한국근대사회 최대 화두였다면

 

일본에서는 근대시기 불교의 살생금지로 고기를 절대 먹지 않는

불교를 잘못 해석한 악습으로 인해

고기를 먹으라는 육식금지해제령이 당시 일본근대사회 최대 화두였고

 

오늘날 보면 바보같은 짓이지만

당시 한국황제 고종 광무제가 직접 단발령을 실시하며 유생들을 달랠 정도였고

당시 일본황제 메이지 덴노가 직접 공개적으로 고기를 먹는 모습을 보여주며

귀족들을 달랠정도였는데

병약하고 왜소한 메이지 천황은 육류를 먹고 꾸준히 운동하라는 서양의사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1000년 이상 유지된 육식금지령을 1872년 없앴는데

이게 반발이 심해 육식을 반대하는 자객이 궁궐에 침입할 정도였다 하고 (;;)

 

사실 웃긴게 정작 불교를 만든 부처님(싯다르타)은

탁발 , 사람들에게 음식을 기부받아 그냥 주는대로 먹었고

제자들이 챙겨주는 밥상을 가만히 먹지 않고 직접 탁발을 다녔고

그때 제자들이 일렬로 줄지어서 부처님 뒤를 따라갔다 하고

80대에 돌아가실때에도 상한 돼지고기를 먹고 탈이 나서 죽었다하는데

 

정작 싯다르타는 정력적인 인물이라 무술대회 1등하며 코끼리도 집어던졌다하고

섹스도 열심히 해서 존예 금수저 와이프였던 야쇼다라 공주와

잘생긴 아들 라훌라도 낳고 행복하게 살다가

생로병사에 현타와서 불교를 만들은 인물이었고

죽을때까지 고기나 야채 , 카레 , 제육볶음 가리지 않고 먹다 돌아가신 인물이었는데

정작 싯다르타를 따르는 승려들은 싯다르타가 진정 추구한 가치 ,

허례허식을 거부하고 인간다움과 진정한 진리를 탐구한 모습과 멀어지고

싯다르타처럼 민중속으로 가지 않고 궁궐같은 사원을 짓고

애도 안낳으면서 민중이 주는 짬밥을 가리지 않고 평생 먹지 않고

따로 값비싼 비건식단을 챙겨서 더 수고롭게 먹질 않나

 

하여튼 불교나 유교나 기독교 할 것 없이 종교쟁이들은

정작 싯다르타나 공자 , 예수가 살았던것과 달리

허례허식에 집중해 거대한 사원과 과도한 의식으로 정작 진정한 종교의 뜻과

멀어지는게 예나 오늘날이나 마찬가지로 반복되고 있고

종교쟁이들이 득세해서 국교화시키고 백성들에게 허례허식과 제사 , 사원건설을 강요하며

국고를 말아먹은게 동서양이 한두 사례가 아니고

 

육식금지령이 내려진 당시 백제나 일본 역시 마찬가지라

저는 차라리 섹시한 공주 한명 꼬셔서 총명한 애도 낳고 술도먹고 노래와 댄스도 추며

파계승이라 불렸던 신라 원효대사가

오히려 가장 싯다르타 , 부처와 비슷한 한국의 불교인이라 생각하고 있고

실제로 한국에서 현재까지도 원효대사가 가장 권위있는 불교승려임을 감안하면

진정한 종교의 의미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봐야 한다 생각합니다

 

하여튼 ,

그럼에도 다행히도(?) 육식금지왕 법왕은 역시 아버지처럼

1년 재위로 안습하게 사망해서 육식금지는

한국에서는 어찌어찌 흐지부지되고 일본에서는 부활해 일본인들을 천년간 괴롭혔고

 

한일전 한국 승리.. !!

 

(백제인들이 일본에 독을 풀었다 !)

 

[백제 마지막 불꽃 무왕]

진짜 다행히 백제 법왕 다음왕은 혜왕이나 법왕처럼 나약한 하남자가 아닌

백제 상남자 , 상마초맨이었던 무왕이고

백제 30대왕 무왕의 이름은 부여장으로서 법왕의 아들이라 하고

 

이름부터 무력 무자로 상남자 그 자체였던 무왕은

일본에서나 인기많은 성왕과 달리

서동요 러브스토리 때문에

한국인들에게는 백제에서 가장 사랑받는 임금 중 한명이고

 

무왕의 일대기를 다룬 사극 '서동요' , SBS

 

무왕은 위기의 백제에 등장한

백제 마지막 명군이었고 백제 마지막 불꽃이었습니다

 

[서동요]

무왕은 정치도 잘했고 정력적인 타입의 임금이었는데

삼국사기에는 법왕의 아들 부여장으로 왕위를 이었지만

삼국유사 전설에 의하면 그는 왕이 되기 전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 가에서 집을 짓고 못의 용과 관계하여 부여장을 낳았고 

부여장은 재기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고 항상 마를 팔아 생활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서동(마파는 아이)이라 부르게 됩니다

 

한국 전통 뿌리채소 마

 

신라 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갔고

마를 동네아이들에게 먹이니 친해져서 신라아이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고

그는 노래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했는데

신라수도 서라벌 아이들이 부른 노래는 신라 전체로 퍼져나갔습니다

 

<서동이 지은 서동요>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사귀어 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동요가 서울에 가득 퍼져서 신라 대궐까지 들리자

백관들이 임금에게 극력 간하여 공주를 귀양가게 했고

왕후는 공주를 떠나보내며 순금 한 말을 주며 노자로 쓰게했고

공주는 귀양지에 도착하려는데 서동이 도중에 나와서 절하며

모시고 가겠다 했고 공주는 그가 어디어 왔는지는 몰랐지만

우연히 믿고 좋아했고 이로 말미암아

공주는 서동을 따라가면서 몰래 정을 통하게 되었고

그런 뒤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았고 , 동요의 영험함을 믿었습니다

 

서동-선화 부부는 함께 백제에 이르렀을때

선화공주는 모후가 준 황금을 내어 장차 살아갈 계획을 의논하니

서동은 크게 웃으며

 

<서동>나는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을 흙처럼 많이 쌓아 두었소

 

하였고 공주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면서

그러면 이를 부모님이 계신 궁전으로 보내자 하니 서동이 좋다했고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에게 금을 보낼 방법을 물으니

법사가 신통력으로 하루만에 신라 궁중으로 금을 가져다 놓았고

신라 진평왕은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이상히 여겨 서동을 존경하여

항상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고

서동은 이로인해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비록 말도안되는 서동의 나와바리 익산의 전라동화지만(전라도 동화 ㅎ)

역사라는게 진짜 동화나 판타지소설보다 더 판타지스러운 면도 분명 존재하고

나름 무왕 기록이 명군 그 잡채인 걸로 봐서는

서동기록도 어쩌면 나름 일정부분 실화일 수도 있고

 

무왕이 건축한 익산 미륵사지 석탑

 

[백제왕손 서동과 신라공주 선화]

조선상고사 기록은 서동요 삼국유사 기록과 완전히 다른데

 

서동은 백제 위덕왕의 증손으로서 준수한 도련님으로 삼국중 가장 이름이 았섰고

신라 진평왕의 둘째 따님은 삼국 중 가장 이름난 어여쁜 아가씨였는데

 

당대 삼국 킹카 퀸카였던 서동과 선화

 

진평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여럿 낳은 임금이고

선덕여왕 덕만이 아버지인데 의외로 덕만이보다 더 존예인게 선화라

선화를 가장 사랑하여

 

<진평왕>신라의 왕 된 것이 나의 자랑이 아니라

선화의 아버지 된 것이 나의 자랑이다

 

하며 늘 선화를 위해 사윗감을 구했고

 

즉 당대 삼국에서

가장 킹카가 서동이던 상황이었고

가장 퀸카가 선화이던 상황이라서

킹카와 퀸카 사이에서 묘한 기류가 흐르며

동네 사람들이 모여대며 웅성웅성대는 상황이었는데

 

서동 VS 선화

 

진평왕은 서동의 이름을 듣고 선화 남편으로 희망했고

위덕왕은 증손 서동을 위해 증손부 감으로 선화 이름을 듣고 서동의 아내로 희망했는데

 

문제는 신라는 역사적으로 박 , 석 , 김 세 성끼리만 결혼하는 문화(골품제)가 있었고

이로인해 부여씨에게 딸을 줄 수는 없는 상황이었는데

 

백제는 신라처럼 결혼할 성씨가 정해진 것같이 엄격한 제한은 없었지만

위덕왕의 아버지 성왕을 죽인자가 곧 진평왕 아버지 진흥왕이었고

진흥왕은 바로 성왕의 사위였고

증손부 며느리를 감히 아버지 죽인 원수의 딸 ,

장인을 죽인 괴악한 사위의 손녀를 데려오랴는 엄중한 생각으로

서동의 장래 아내는 목씨 , 국씨 등 백제 대성팔족의 여자이거나

민가의 여자가 될지언정 절대 원수 진흥왕의 자손이 될 수 없다는 판단이라

 

서동과 선화는 얼굴도 보지 못한채

상상으로 먼 타향속 공주님과 왕자님을 그리며

서로가 호감을 품었지만

신라 , 백제 양쪽 모두 관산성 전투의 원수지간으로 꼬여있어 거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 몬테규의 몬테규 가문과 줄리엣 캐플릿의 캐플릿 가문이

서로 원수지간인 상황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이 만난 실제상황이었다 보면 되고

 

<로미오와 줄리엣 명대사>

Oh Romeo , Romeo , wherefore are thou Romeo?

오 로미오 , 로미오 왜 당신은(영어 고어) 로미오인가요 ?

Deny thy father and refuse thy name.

당신의 아버지와 당신의 이름을 거부하세요

Or if thou wilt not, be but sworn my love.

만약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없다면 , 나의 사랑은 맹세에 지나지 않습니다

And I'll no longer be a Capulet.

그리고 나도 캐플릿 가문이 되지 않겠어요

 

(줄리엣이 로미오한테 이름을 버리라한게 이해가 되긴 됨)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동은 커갈수록 백제 왕가가 아니라

신라 민가자제로 태어났으면 선화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을 것임이

머리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마침내 백제 왕궁에서 탈출하여 신라 서라벌로 찾아갔고

가서는 머리를 깎고 어느 대사의 제자가 됬는데

당시 신라 왕실은 불교를 깊게 믿어 왕실에서 백고좌를 열어

승려의 설법을 듣던 때였기에

서동은 법연을 기회로 선화를 만날 길을 얻게 됩니다

 

승려가 된 서동과 신라공주 선화는

만나서 눈이 마주치자

선화는

 

<선화>백제의 서동이 사랑스러운 사나이라지만

아마 저 중만은 못할 것이다

 

하고

그날부터는 서동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중을 그리게 되었으며

 

 

서동 또한

 

<서동>내가 네 남편이 되지 못하면 죽어버리리라

너도 내 아내가 되지 않으려거든 죽어버리라

 

하여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맺어졌고

서동이 선화의 시녀에게 뇌물을 주어

밤을 타 선화의 궁에 들어가 사통하였고

 

선화는 서동이 아니고서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지 않으려 굳게 맹세했지만

주위 사정이 허락하지 않아

서동과 선화는 의논한 끝에 이 일을 드러내서 세상에 알리려 했고

세상에서 허락하면 결혼하고 허락하지 않으면 함께 죽기로 작정하고

서동이 가끔 엿이며 밤이며 그 밖의 과일을 많이 사가지고

거리로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꾀어 노래를 부르게 했고

 

<서동이 알려준 노래>

선화 아가씨는 염통이 반쪽이라네

본래는 온통이었지만 반쪽은 떼어 서동에게 주고 반쪽은 남겨 가지고 있으나

상사병에 병들어 있다네

서동이여 , 어서 오소서

어서 와서 염통을 도로 주시어 선화 아가씨를 살리소서

 

라는 노래부르게 하여 노래가 하루 아침에

신라 서울 동경에 퍼져서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고 

선화는 아버지 진평왕에게 고백하고 ,

서동은 귀국하여 증조부 위덕왕에게 바른대로 고하며 ,

다른 사람과 결혼하라 하면 죽기로 반대했습니다

 

진평왕과 위덕왕은

처음에는 부모나 조부모 몰래 남녀가 사통한 것은 가정의 변이라 하여

당장 사형에 처할 했지만

사랑하는  , 사랑하는 손자를 어찌할 수 없어 

진평왕은 ·· 성의 결혼 습관을 깨뜨리고 ,

위덕왕은 아버지의 원수를 잊고 서동과 선화의 결혼을 허락하여

나라 왕실이 다시 사돈 사이가 되었다 합니다

 

(조선상고사의 아름다운 기록)

 

무왕이 패기있고 재능있는 임금이었던 임금이었던건 사실이고

고대 전설이나 신화도 허투로 볼만한 이야기는 꼭 아니라서

서동요도 실제로 어느정도 사실에 근거한 설화일 수도 있고

 

삼국유사 서동요에서 서동이 선화공주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로 갔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다들 무심코 지나치는 기록이지만

굳이 신라로 가고 여자 꼬시러 가는데

남자가 상투틀던 그시대에 머리를 깎고 가는게

논리적으로 납득이 안되는 상황이고

조선상고사 기록대로 승려가 되어 변장해서 선화공주에 다가가려는 거로 본다면

머리를 깎았다는게 납득이 되는 상황이고

퍼즐이 맞춰지는 소름돋는 상황이라 보면 됩니다

 

[서동의 왕위계승전쟁 '동서전쟁']

삼국사기에 의하면 법왕의 아들 부여장 무왕은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고 기상이 걸출했다 합니다

 

신라와 하하호호하던 서동요 기록과는 정반대로

무왕의 역사기록은 신라에 대한 백제의 대반격이라 요약해볼 수 있는데

신라군에게 사망한 성왕의 아들 무왕은 국가 멸망의 위기에서 내부수습하기 바빴고

본격적으로 무왕대에 이르러 백제는 다시 신라에 반격을 가하게 됩니다

 

조선상고사 기록에 의하면

서동과 선화공주가 결혼한 뒤에

백제와 신라는 매우 친밀하게 지냈는데

 

신라는 나중에 김춘추의 딸 김고타소가 백제군에게 사망한 후

백제를 몹시 원망하여 백제를 토벌한 뒤 그러한 기록을 모두 태워버려서

신라왕가의 여자로서 백제에 시집간 자취를 숨겨버려서라 하고

 

훗날에도 무왕이 여러 전설에 등장하며

서동대왕 말통대왕으로 계속 불린 것을 보면

실제로 서동요는 실화일 가능성이 있는 전설이라 그냥 동화로 보기에도 어려운 기록이고

 

하여튼 , 

서동과 선화의 결혼이후 백제 위덕왕 26년~무왕2년까지

백제와 신라사이 전쟁이 한 번도 없었고

두 나라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수에 사신을 보내서

고구려 치기를 청하여 수문제 , 양제의 침입을 일으키게 했다 합니다

 

보통 무왕대부터 백제가 신라에 성왕의 원수를 갚으려 압도적 반격을 시작했다 여기지만 

조선상고사에서는 완전히 다른 해석이 있는데

대충 추려보면

 

고구려 , 백제 , 신라는 오늘날 고려 , 조선왕조로 가며

굳어진 전제왕권과 달리 굉장히 특이한 정치체계를 가진 국가였고

 

신라에서는 왕위를 박 , 석 , 김 세 성이 서로 돌아가며 했고

특히 아들만 왕위를 잇는게 아니라

사위도 왕위를 이을 권리가 주어진 특이한 국가였는데

 

고구려는 호족공화제로서 5부귀족들이 공동정치를 하던 나라였고

 

백제는 부여씨 아래 진 , 국 , 해 , 연 , 목 , 백 , 협이라는

대성팔족이라 불리는 여덟 대가문이 있었으나

실상은 왕비만 냈고 부여씨가 정권을 독차지하여서

고구려의 호족공화와는 달랐고

 

신라는 원래 박 , 석 , 김 세 씨의 공화의 나라였지만

이 시기는 김씨 한집안이 왕위 상속을 독점하던 시기라

 

부여씨 독점의 백제 ,

김씨 독점의 신라의 시대여서

두 나라 왕이 마음만 맞으면 결혼연합이 용이했던 시대였습니다

 

게다가 ,

신라에서 박 , 석 , 김씨만 혼인하는 이유는

골품제로서 굉장히 폐쇄적으로 보이지만

신라는 성이 다른 사위도 왕위를 이을 수 있어서 엄청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문화기도 했고

서동과 선화의 사랑에 감동해

신라에서 박 , 석 , 김이아닌 부여씨까지 혼인을 인정해 주었다는 점은

다른말로는 부여씨의 신라왕위계승 , 백제와 신라가 합쳐져 한 나라가 될 수도 있던 상황이었고

그리고 아들은 없고 딸만 있었던 진평왕이 훗날 여자임금 선덕여왕이 되는 덕만이 아니라

선화공주를 가장 사랑했다는 점이고

 

맏딸 선덕은 여자기도 하고 출가하여 정치에 관여치 않았고

둘째딸 선화 남편 무왕이 맏사위였기에 무왕은 신라 왕위 계승권이 있던 상황이었고

백제 무왕은 신라의 왕이 될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신채호>진평(신라 진평왕)도 또한 왕위를 무왕에게 전해줄 생각을 가졌었을 것이다 .

만일 그렇게 되었더라면

박 ·  · · 부여 성이 서로 전해주는 판국이 되어

신라와 백제가 합쳐져서 나라가 되어 나라 인민의 뜻없는 혈전을 면했을 것이다.

 

만약 이런식으로 백제와 신라가 결혼동맹으로 완전히 한나라가 되어

무왕이 백제+신라 왕을 겸하며

유럽 결혼동맹으로 유명한 합스부르크 왕가처럼 되었다면

 

삼국통일전쟁은

김유신의 미명아래

잔혹하게 병사와 백성들이 희생당하지도 않았을테고

김춘추의 미명아래 굴욕적인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가질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더 나아가서 백제의 거대한 해외영토 즉 '일본'을 한민족이 잃지 않는

엄청난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며

저도 조선상고사를 읽으며 일말의 가능성에 소름이 돋았고

점차 국뽕 망상블로거처럼 되는 느낌이지만..

 

아아 환국땅을 되찾았을 수도 있었던 백제..

 

마치 고구려가 광개토대왕이 그냥 백제신라가야 전부 밀어버렸으면

한국이 만주와 한반도에 이르는 거대한 영역을 가지고 있었을 거라는

가슴뛰는 IF (만약) 역사가정이 크게 이야기 되듯이

 

뛰어난 재능으로 신라결혼국법에 예외적으로 편입되었던 무왕이

신라 왕실의 일원으로서 신라국법에 합당한 승인을 받고

신라 선화공주의 남편이자 신라 진평왕의 사위로서

정식으로 백제와 신라 국왕을 겸하게 됬다면

한민족이 일본영토 혹은 일본에 대한 영향력도 잃지 않았을 것이고

당시 백제 신라가 나제동맹으로 고구려도 거침없이 뚜까패던 시기였는데

완전히 한 나라가 된다 가정하면 하나가 된 나제국(신라백제국)은

그대로 평양과 국내성 , 만주로 북진해서 고구려를 통일시키고

바다로 왜로 진격하여 왜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해 왜를 완전히

한민족의 영역으로 통일시키고

한국이 중국과 비견하는 대륙+해양 영토를 가진

로마같은 대제국으로 성장했을지도 모르고

어찌보면 소름돋는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생각합니다

 

아아 !! 온조대왕과 무왕이시여 !!!

 

한국사를 공부하면

다들 고구려 멸망으로 만주 잃은것만 생각하는데

백제 멸망으로 일본 잃은 것도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고

 

실제 한민족 땅 만주에 고구려 민족만 산게 아니라 말갈(여진 민족) 이 살았고

말갈이 고구려에 부용했듯이

왜 영토에 백제 민족만 산게 아니라 왜(아마토 민족) 이 살았고

야마토 민족이 백제에 부용했듯이

실제로 당시 왜도 한민족 세력권이자 영토나 마찬가지던 상황이었고

옛날 고대한국남방과 일본어가 같았다는 설도 있어서

나름 오늘날처럼 한국 일본으로 완전 분화된 시기도 아니었기에

백제 멸망은 곧 고구려 만주의 상실이나 마찬가지인

일본열도의 상실이나 마찬가지 였다는 생각도 듭니다

 

삼국통일기는 잔혹한 전쟁이야기만 보통 나오지만

고구려 연개소문의 조선 세나라의 제휴 이야기나

무왕이 신라 왕위 계승가능성에 대한 낭만적인 이야기도 분명 존재하고 있고

만약 백제와 신라가 잔혹하게 유혈합병된 역사와 달리

무왕과 선화의 만남으로 신라 왕위계승서열 1위인 신라국왕사위 백제 무왕이

평화적으로 백제와 신라를 무혈합병했더라면 굉장히 역사가 다르게 흘러갔을 가능성이

분명 존재했었습니다

 

<신채호>그러나 천하의 일이 어찌 그렇게 평순하게 진행되랴 ?

나라 여러 신하들은 거의 이를 반대했겠지마는

중에 가장 반대의 의견을 품은 이는 김용춘(김춘추 아빠)이었을 것이다

 

김용춘 네 이놈!! , 코믹 메이플 초반에 암걸리는 장면.jpg

 

김용춘은 진평왕의 셋째딸 문명의 남편으로서

선화가 멀리 백제로 시집가 떨어져있으니

진평왕의 애정이 자연 문명에게 쏠리고

첫째사위 선화의 남편 서동보다 둘째사위 용춘을 더 아끼었고

 

용춘 역시 신라왕위가 무왕에게 가지 않으면

본인에게 올거라는 희망을 가졌기에

왕위가 무왕에게 가는 것을 반대하고 저지했고

그로인해 진평왕은 무왕에게 왕위 물려줄 생각을 끊고

출가해서 중이 된 맏딸 덕만을 불러서 왕태녀로 삼았고

 

진평왕은 왕위는 선덕여왕 덕만에게 주되

실권은 용춘에게 주어서 용춘을 직접 신라 왕위에 올리지는 않으며

나름 중립적으로 용춘과 무왕 두 사위의 관계를 달래려 했고

 

그러나 무왕 역시 총명한 인물이라 그런 수단에 속지 않으려 했고

신라왕위계승에 박탈된 것에 분노한 백제 무왕은

즉위 후에 용춘을 죽이려고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했고

용춘은 처음엔 뒤에 숨어 진평왕의 참모가 되다

내성사신으로 대장군을 겸하여 직접 전선에 나서니

이것이 이른바 '동서전쟁' 이었다 합니다

 

동서전쟁은 백제와 신라 , 동과 서의 신라왕위 쟁탈전으로서

두 사람의 이기심에서 출발했지만 어느새

백제와 신라의 국가와 민족의 흥망을 내건 총력전이었고

나라 인심을 고취시키고 명예와 벼슬로 결사대를 동원하니

한편에는 비애애 우는 인민 , 한편에는 공명에 춤추는 장수와 군사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 삼국사기 열전에 여러 이름날린 신라장수들이 나오는데

지금은 백제이야기기에 생략하기로 하고

무왕대 기록은 대부분 신라와의 전쟁기록으로

무왕은 서동요 주인공 로맨티스트이자 한국 전국시대의 포문을 연 인물이었다고도 보면 됩니다(..)

 

무왕은 백제 500년 수도 한강수복이라는 목표를 포기하고

동부전선에 집중해 신라 수도 서라벌에 칼을 겨누었고

사실 큰일을 먼저하면 작은일이 해결된다는 화장실 명언이 있듯이

 

신라 수도 서라벌 함락=신라멸망=백제의 신라합병=신라영토인 한강의 수복

 

이라는 귀납논증적 공식이 형성되기에

나름 무왕은 요새 , 방탄화된 한강을 포기하고

방어에 취약한 신라 본토를 습격하기로 결심했고

신라 입장에서도 수도를 지켜야하는데 군사 , 방어시설은 이미 한강에 몰빵해놓은 상황이고

그렇다고 최정예군들을 한강에서 뺄 수도 없던 상황이라

무왕의 '빈집털이' 전략은 나름 들이맞아

백제는 대반격에 성공해 신라의 서부 영토를 대거 잠식해들어가며

관산성 전투이후 계속 신라에 패전하던 백제는 무왕때 승리로

점차 자신감을 찾아갔고 소극적인 태도를 버리고 다시 적극적으로 국제 문제에 개입하게 됩니다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씨 왕비 ?]

그러나 자만해진 무왕은 백제가 중흥하자 다시 대규모 토목공사를 단행했고

자신이 성장한 도시 익산을 제2의 지역 혹은 새 수도로 키우려고

익산에 신도시를 짓기 시작하였고

629년 익산 미륵사를 완공합니다

왕권을 과시하려는 무왕은

630년에는 사비궁을 준수했고 634년에는 궁남지를 조성합니다

 

미륵사지석탑에서 나온 금제사리항아리 , 준공한자가 무왕비 사택씨라 나오니 선화공주 사후 후기에는 백제 대성팔족 사택씨와 결탁한 무왕이고 사택씨 영향으로 지어진듯

 

여기서 원래 무왕의 왕비는 신라공주 선화인데

무왕이 재위후기에 건설한 미륵사지석탑에서 나온 금제사리항아리와 봉안기에는

미륵사를 창건한 백제 무왕의 왕후가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기록돼 있는데

이로인해 무왕비는 사택씨이고 선화공주 서동요는 허구의 동화라는 말도 있지만

 

제 생각엔 무왕이 재위초기엔 신라선화공주와 결탁해서 재위에 오르고

신라왕위까지 물려받기 위해 신라와 전쟁을 벌이다 고전하게 되었고

선화공주 사후 집권 후반기는 결국 백제 대성팔족 사택씨에 재장가들어

신라와 연관없는 순수 백제귀족인 사택씨의 영향으로

신라 왕위에 대해서 좌절하고 놀이와 여흥에 빠지고 미륵사 짓고 그러다 사망한듯 하고

 

무왕은 집권초기는 그렇게 신라인 와이프 선화의 영향으로

신라왕위에 적극적 모습을 보이며 신라로 진출을 꾀하였고

집권후기는 선화의 사후 그냥 백제 귀족에 장가드는 평범한 백제임금의 모습으로서

이전과 달리 위축되어 절이나 짓고 술과 노래나 즐기며

청춘을 바쳤던 선화를 잃은 쓸쓸함을 달래며 무기력하게 사망한 인물이 아닐까 싶고

 

이게 역사를 자세히 보면 명군옆에 명와이프가 항상 존재하길 마련인데

취집이란 말도 있지만 셔터맨이란 말도 있듯이 남자도 와이프빨을 무시 못하는게

당장 일반 가정도 남자가 서민인데 와이프가 금수저면

시작부터 장인쿤 돈으로 50평짜리 아파트에서 신혼이 쌉가능이긴 하고(그지근성 굿)

 

마치 공민왕이 집권초 와이프 노국대장공주의 도움으로 적극적으로

북진해나가고 개혁정책을 수립했지만

노국대장공주 사후

죽은 노국대장공주를 그리며 무기력하게 술퍼먹고 똥꼬충+폭군화된것처럼

 

무왕도 집권초 와이프 선화공주의 도움으로 적극적으로

신라에 동진하며 백제+신라임금이 동시에 되겠다는 야망과 꿈을 꾸고

개혁정책을 수립하며 백제인들을 고취시켰지만

선화공주 사후 사택씨에게 휘둘리며 절이나 짓고 대왕포에서 술이나 퍼먹으며

죽은 선화를 그리며 위축된 대왕으로서 사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노국대장공주가 공민왕의 어린시절 , 어려운시절부터 함께한

'조강지처' 였던 상황이고 정치적 동반자가 되어주었던 인물이고

 

선화공주 역시 무왕과 양가 집안이 꼬인 상황에서도

직접 머리깎고 신라로 가서 청춘을 다 바쳤던 어렵게 맺어진 인연(조강지처)에

이런 상황때문에 백제와 신라 양국 국민들의 기대와 관심 + 삼국평화에 대한 염원까지 담겨모인

제대로 된 국혼을 맺은 커플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서로 의지하던 부부였기에

왕비 사후 명군임에도 굉장히 정신이 오락가락 했을 가능성이 크고

 

고려 공민왕이나 백제 무왕은 각각 고려와 백제의 마지막 명군이자

마지막 큰 인물이었던 인물들인데

역사속 인물들이 위인일수록 기복이나 시행착오가 많기에

그렇기에 높은 곳에 올라갈수록 추락할때 데미지가 커지는 법이라

 

(유럽을 호령했던 나폴레옹 말년이 초라했듯이)

 

무왕도 신라공주 선화라는 엄청난 와이프를 얻고 신라왕위계승 1순위 당첨권을 받고

평화를 염원하는 당시 백제와 신라 삼한인들의 기대를 받으며 

큰 희망에 높이 날아 올랐지만 

무왕도 딱히 내가 사위니 신라왕이 되겠다는 고집과 군사력 동원 외에는

당시 전쟁으로 고통받던 삼국사회에

새로운 이데올로기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는 못했으며

결국 김춘추 애비 김용춘의 방해로(금발 태닝 김용춘에게 신라 왕위를 빼앗기다 !)

계속되는 좌절과 선화의 죽음으로

완전 땅으로 즉각 곤두박질치고 피범벅이 되어 추하게 사망한게 아닐까 싶고

 

미륵사지석탑 봉안기에는 미륵사가 639년 창건됐다는데

무왕이 641년 사망했기에

명군 무왕도

재위 후반기엔 국정운영이나 정치적 행보는 전무하고 궁녀들이랑 뱃놀이나 즐기거나

놀고 술먹고 그런기록밖에 없어서

선화 사후 사택가문과 결혼한 무왕은 후반기엔 많이 약해진 상황이었다 생각됩니다

 

대체적으로 무왕은 그럼에도 백제 마지막 명군으로 평가되는 상황이고

만약 신채호 조선상고사 학설을 따른다면

백제와 신라는 서동-선화 결혼동맹으로 무왕시기

김유신 등장전에 평화적으로 통일할 기회가 있었고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수십 수백만의 동족상잔의 인명피해를 막았으며

두배로 강해진 백제+신라 연합국력으로 인해

가끔씩 백제한테도 깝치던 왜가 완전 한국 영토화 됬고

'백제제국 야마토주' 민들이

백제신민서사를 외우고 국부 온조대왕묘와 백제 신궁에 매일 참배하고

한국에서 제주도 놀러가듯이

국내선으로 일본열도로 온천여행 가서 원숭이한테 땅콩주면서 놀수도.. (K-NTR)

 

이런 느낌이랄까..? (아아 김구선생님..?)

 

[해동증자 의자왕]

백제 마지막 명군 무왕이 여러 전설들을 남기며

41년의 긴 재위기간동안 백제를 안정시키고 사망하자

그의 아들 부여의자가 왕위를 이어

백제 31대왕 , 백제 마지막왕 의자왕이 되었고

의자왕의 마지막 왕이라 시호가 없어 본명으로 불리는 왕입니다

 

의자왕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서

당시에 해동증자라고 불렸고

즉위 초까지는 백제를 이끌 차기 명군으로서 백제인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습니다

 

[성충의 지략]

의자왕때 백제를 대표한 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부여성충이었고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성충은 부여씨로서

백제의 왕족이었습니다

 

성충은 어릴 때부터 지모가 뛰어나서

일찍이 예의 군사가 침범해오자 고향사람들을 거느리고

산성에 웅거하여 지키는데

늘 기묘한 계교로 많은 적을 죽이니

예(고구려 ?)의 장수가 사자를 보내

 

<예>그대들의 나라를 위하는 충절을 흠모하여 약간의 음식을 올리오

 

하고 궤 하나를 바쳤고 사람들이 모두 궤를 열어보려고 하였으나

성충이 이를 못 하게 말리고서 불 속에다 넣게 했고

그 속에 든 것은 벌과 땅벌이었습니다

 

다음날 또 예의 장수가 궤 하나를 바쳤고

모두 이것을 불에 넣으려 하니까 성충은 그것을 열어보게 했고

그 속에는 화약과 염초가 들어 있었습니다

 

삼일째 되는 날 적은 또 궤 하나를 보내왔는데 ,

성충은 그것을 톱으로 켜게 했고

그러니까 피가 흘러나왔고 칼을 품은 용사가 허리가 끊어져 죽어있었습니다

 

이때는 645년 의자왕 시대로 의자왕은 말을 듣고 성충을 불러 물었습니다 

 

<의자왕>내가 덕이 없어 대위를 이어 감당치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는 중이오

신라가 백제와 없는 원수가 되어

백제가 신라를 멸망시키지 못하면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킬 것이니

이는 더욱 내가 염려하는 바요 ,

 

옛날 월왕 구천이 범려를 얻어

10년을 생취(부국강병)하고

10년을 교육하여 오를 멸망시켰으니

그대가 범려가 되어 나를 도와 구천이 되게 해주지 않겠소 

 

성충은

 

<성충>구천은 오왕 부차가 교만하여 월에 대한 근심을 잊었으므로

23 동안 생취 교육하여 오를 멸망시켰지마는

이제 우리 나라는 북으로 고구려 ,

남으로 신라의 침략이 쉬는 날이 없어서

전쟁의 승패가 순간에 달려 있고

국가의 흥망이 아침저녁에 달려 있으니

어찌 한가롭게 20 생취 교육할 여가가 있겠습니까 ?

 

그런데 고구려는 서부대인 연개소문이 바야흐러 불측한 뜻을 품고 있어

오래지 않아서 내란이 있을 것이라 ,

한참 동안 외국에 대한 일을 경영하지 못할 것이니

아직은 우리나라가 근심할 바가 아니지만은 ,

신라는 본래 조그만 나라로서 진흥왕 이래로 문득 강한 나라가 되어

우리 나라와 원한을 맺어 근자에 와서는 더욱 심하여

내성사신 용춘(김용춘) 선대왕 (무왕) 혈전을 벌이다가 죽고 ,

그의 아들 춘추가 항상 우리 나라의 틈을 엿보았으나

다만 선대왕의 영무하심이 두려워서 얼른 움직이지 못하였는데 ,

이제 선대왕께서 돌아가셨으니

저네가 반드시 대왕을 전쟁에 익숙하지 못한 소년으로 업신여기고 ,

또한 우리 나라의 상사(무왕 장례) 있음을 기회하여

오래지 않아서 침략해올 것이므로

이에 반격의 대책을 연구함이 옳을까 합니다

 

의자왕은

 

<의자왕>신라가 우리 나라를 침범하면 어디로 해서 오겠소 ?

 

<성충>선대왕께서 성열성(충청도 제천) 서쪽 가잠성 (충청도 괴산) 동쪽을 차지하시니

신라가 이를 원통해한 오래이므로 반드시 가잠성을 공격해올 것입니다

 

하고 성충이 대답했습니다

 

<의자왕>그러면 가잠성의 수비를 증강시켜야 하지 않겠소 ?  

 

하고 왕이 다시 물으니

성충은

 

<성충>가잠성주 계백은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여

비록 신라가 전국의 군사로 포위 공격한다 하더라도

쉽사리 깨뜨리지 못할 것이라 염려할 것이 없고 ,

갑자기 나가서 적의 허를 찌르는 것이 병가의 상책이니

신라의 정병이 가잠성을 공격해오거든

우리는 가잠성을 구원한다 일컫고 군사를 내어

다른 곳을 공격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고 대답했고 의자왕이 다시

 

<의자왕>그러면 어느 곳을 치는 것이 좋겠소 ?

 

하고 물으니 성충은

 

<성충>신이 들으니 대야주(경상도 합천) 도독 김품석이

김춘추의 사랑하는 소랑의 남편이 되어 권세를 믿고

부하와 군사와 백성을 학대하고

음탕과 사치를 일삼아서 원한의 대상이 오래인데 ,

이제 우리 나라에 국상 있다는 말을 들으면 수비가 더욱 소홀해질 것이고 ,

신라의 정병이 가잠성을 포위 공격하는 때이면

대야성이 위급 해지더라도 갑자기 이를 구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군사가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이긴 여세를 몰아 공격하면 신라 전국이 크게 소란해질 것이니

이를 멸망시키기는 아주 쉬울 것입니다

 

의자왕은

 

<의자왕>그대의 지략은 고금에 짝이 드물겠소

 

하고 성충을 상좌평(백제 최고벼슬) 임명했습니다

 

[윤충의 대야성 함락]

이듬해 3월 과연 신라가 김유신 장군으로 하여금

정병 3만을 거느리고 가잠성을 치게하니

백제장수 계백이 성에 의지하여 임기웅변하여 응전하니

여러 달 동안에 신라군사가 많이 죽고 다쳤고

7월에 의자왕이 정병 수만을 뽑아 가잠성을 구원한다 하고

북으로 나아가다 갑자기 군사를 돌이켜 대야주로 향해 미후성을 포위함락시켰고

 

당시 대야주 도독 김품석은 신라의 촉망받는 정치가 김춘추의 딸 소랑의 남편이어

위세가 등등했는데

김춘추는 공주 소랑을 사랑하여 대야주의 속현 고타(경상도 거창) 를 식읍으로 주어

고타소랑이라 부르며 소랑의 남편 김품석을 대야주 도독으로 삼아서

그 40여 성과 고을을 관할케 했는데

공주의 남편이란 위세를 빌린 김품석은 오만방자하고 음란난폭하여

군사와 백성을 구휼치 아니하고 재물과 여색을 탐내어

가끔 부하의 아내나 딸을 빼앗아 첩으로 삼았고

 

김품석은 부하장수 금일의 아름다운 아내를 빼앗은 상황이라

금일은 통분하여 늘 보복하려 하다가

백제가 미후성을 함락시켰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내통하기를 청했고

 

의자왕이 부여성충의 아우 부여윤충으로 하여금

정병 1만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자

성안은 술렁거려 나가 싸울 자가 없었고

품석 부부가 하는 수 없이 성을 줄테니 우리 부부만 신라로 돌아가게 해달라

딜을 했고

윤충은 이 말을 듣고

 

<윤충>자기네 부부를 위해 국토와 백성을 파는 놈을 어찌 살려두겠는가

그러나 허락하지 않으면 성안에 그대로 웅거하여 지켜

얼마동안 더 싸울지도 모르니

차라리 거짓허락하고 사로잡는 것이 좋겠다

 

하고는 김품석 고타소 부부에게

 

<윤충>태양을 두고 맹새하여 공의 부부가 살아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겠소 !

 

하고 복병을 두고 군사를 물리니

품석이 먼저 부하장사로 하여금 성 밖으로 나가게 했고

백제가 복병을 내어 습격하여 죄다 죽이고는

품석부부는 금일에게 살해당했고

이리하여 백제 군사가 대야성을 함락시킵니다

 

의자왕이 미후성에 와서

윤충의 작위를 높여주고 말 20마리와 쌀 1천 섬을 상주었으며

그 이하 장사들에게도 차례로 상을 내려 칭찬하고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보내 각 고을을 공략케 했고

대야주는 원래 임나가라(가야)의 땅이었으므로

그 지방의 백성들이 옛 나라(가야) 를 생각하고

신라를 싫어하다가 백제의 군사가 이르니

모두 환영하여 40여 성과 고을이 한 달 만에 죄다 백제 차지가 되었습니다

 

[성충과 연개소문의 여제동맹]

의자왕이 대야주 40여 성을 차지한 지 오래지 않아서

고구려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고구려의 국권을 잡았고

 

연개소문의 영류왕 시해 , 칼과 꽃

 

의자왕은 성충에게 물었습니다

 

<의자왕>연개소문이 남의 신하로서 임금을 죽였는데

고구려 전국이 두려워서 그 죄를 묻는 자가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

 

<성충>고구려가 서국(중국)과 전쟁을 한 지

여러 백 년 만에 처음에는 여러 번 서국에서 패하다가

근세에 이르러 날로 강대해져서 요동을 차지하여

그 세력이 요서에까지 미치고

물에서만 마음대로 돌아다닐 뿐 아니라 바다에까지 드나들어

영양왕 때에는 세 번이나 백만의 수나라 군사를 격파하여 나라의 위염이 크게 떨쳐서

고구려의 군사와 백성들이 서국과 맞서려는 기염이 하늘을 찌르려 하는 판인데

 

건무(영류왕)가 도리어 이를 압박하고 서국과 화친하여

군사와 백성들의 노여움을 산 지가 오래였습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여러 대의 장상으로 이름난 집안으로서

왕의 정책에 반대하고 정당론(당나라 정벌론)을 주장하여

국민들의 마음에 호응하고 ,

그리하여 건무를 죽였으므로

고구려 전국이 연개소문의 죄를 묻지 아니 할 뿐 아니라

바야흐러 그 공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하고 성충이 대답했습니다

 

의자왕이 다시

 

<의자왕>고구려와 당이 싸우면 어느 나라가 이기겠소

 

하고 물으니 ,

성충은

 

<성충>당은 비록 땅이 고구려보다 넓고 백성도 고구려보다 많지만은

연개소문의 전략은 이세민(당태종)이 따를 바가 아니니

승리는 반드시 고구려에 돌아갈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의자왕이 또 물었습니다

 

<의자왕>이세민은 네 나라의 여러 영웅들을 토벌하여

통일된 중국의 황제가 되었고

연개소문은 아무런 싸움의 경력이 없는데

어찌 연개소문의 전략이 이세민보다 낫다고 하오 ?

 

성충은

 

<성충>신이 왕년에 일찍이 고구려에 가서 연개소문을 만나보았습니다

그때에는 연개소문이 아무런 직위도 없고

다만 명문의 한 귀소년이었지마는

모습이 우람하고 의기가 호탕하므로

신이 그를 기이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함께 이야기하다가 말이 병법에 미쳤습니다

그래서 신은 연개소문의 지혜와 계략이 비상함을 알았습니다

 

연개소문과 성충

 

이번의 일로 말하더라도

연개소문이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받은 지 오래지 않아 아무런 기색도 없다가

하루 아침에 대신 이하 수백 명을 죽이고 ,

패수의 전쟁에 수의 군사를 격파하여 위명을 떨친 건무왕을 쳐 이기고

고구려의 대권을 잡았으니

이는 이세민이 따를 바가 아닙니다

 

<의자왕>그러면 고구려가 능히 당을 멸망시킬 수 있단 말이오 ?

 

하고 물으니 성충은

 

<성충>그것은 단언할 수 없습니다

만일 연개소문이 10년 전에 고구려의 대권을 잡았더라면

오늘날에 당을 멸망시켰을는지 모르지만 ,

연개소문은 겨우 오늘에 와서야 성공하였는데

이세민은 이미 20년 전에 서국을 통일하면서

나라 다스리는 규모가 정밀하여 ,

백성을 사랑하여 민심을 열복시킨 지 이미 오래이므로

연개소문이 설혹 싸움에 이긴다 하더라도

민심이 갑자기 당을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당을 멸망시키기 어려운 한 가지 이유입니다

 

연개소문이 비록 고구려를 통일하였지마는 그것은 겉모양이고

그 속에는 왕실과 호족들의 남은 무리가 날로 연개소문의 뜻을 엿보고 있어

만일 연개소문이 당을 멸망시키기 전에 죽고

그 후계자가 옳은 감이 아니면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이 당을 멸망시키기 어려운 또 한 가지 이유입니다

 

그러니 두 나라의 흥망을 미리 말하기 어렵습니다

 

<의자왕>우리 나라가 이제 대야주는 차지하였으나

아주 그 근본을 뒤집어 엎지 못하였으므로

신라는 보복할 마음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오

고구려가 당을 멸망시키거나 당이 고구려를 멸망 시키거나

반드시 남침해올 것이니 그때에 우리 나라는

북으로 고구려나 당의 침략을 받고 ,

동으로는 신라의 반공을 받을 것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 ?

 

<성충>지금의 형세로 보건대 고구려가 당을 치지 않으면

당이 고구려를 쳐서 서로 대립할 것인데

이것은 연개소문이 뻔히 알고 있을 것이고

고구려가 당과 싸우자면

반드시 남쪽 백제와 신라와는 화친하여야만 뒤돌아볼 염려가 없을 것도

연개소문이 환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백제와 신라는 피차 원한이 깊어

고구려가 이 중 한 나라와 화친하면 다른 한 나라와는 적국이 될 것도

연개소문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개소문이 장차 두 나라 중에서 어느 한 나라와 화친하여

당과 전쟁을 할 때에 남쪽 두 나라가 서로 견제해서

고구려를 엿보지 못하게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이제 백제를 위해 계책을 세운다면

빨리 고구려와 화친하여 백제는 신라를 ,

고구려는 당을 맡아 싸우는 것이 옳을 줄 압니다

신라는 백제의 적이 못 되니 틈을 타서 이로움을 따라 나아가면

모든 편의가 고구려보다 백제에 있습니다

 

의자왕이 그의 말이 옳다고 하고 성충을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냈습니다

성충이 고구려에 가서 이해를 따져 연개소문을 달래서

동맹의 조약이 거의 맺어지게 되었는데 ,

연개소문이 갑자기 성충을 멀리하여 여러 날을 만나보지 못하였고

성충이 의심이 나서 탐지해보니

신라의 사신 김춘추가 와서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을 막고

고구려와 신라의 동맹을 맺으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충은 연개소문에게 글을 보내

 

<성충>공이 당과 싸우지 않으면 모르지만

만일 당과 싸우고자 한다면 백제와 화친하지 않으면 것이요

왜냐하면 서국이 고구려를 때에 번번이 양식 운반의 불편으로 패하였으니

수나라가 분명한 본보기요

이제 백제가 만일 당과 연합하면

당은 육로인 요동으로부터 고구려를 침노할 아니라

배로 군사를 운반하여 백제로 들어와서 백제의 쌀을 먹어가며

남에서 부터 고구려를 것이니 ,

그러면 고구려가 남과 양면으로 적을 받게 것이니

위험이 어떠하겠습니까 ?

 

신라는 동해안에 나라가 있어서 당의 군사 운반의 편리하기가 백제만 못할 뿐더러

신라는 일찍이 백제와 화약하고 고구려를 치다가

마침내 백제를 속이고 죽령  고현 안의 10군을 함부로 점령하였음은

공이 아는 바이니 ,

신라가 오늘에 고구려와 동맹한다 하더라도

내일에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의 땅을 빼앗지 않으리라 어떻게 보증하겠습니까 ?

 

연개소문이 글을 보고는 김춘추를 가두고

죽령 욱리하일대의 땅을 빼앗으려고 했고

이리하여 성충은 마침내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돌아갔습니다

 

[성충의 대륙경영]

기원후 644년에 신라가 장군 김유신을 보내 죽령을 넘

성열 , 동대  여러 성을 공격하므로

백제의 의자왕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 응전할 계획을 의논하였는데

성충이

 

<성충>신라가 여러 패한 끝에 스스로 보전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이제 갑자기 침략을 시도하니 이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신이 들으니 김춘추가 고타랑을 잃은 복수를 하기 위해

여러 가만히 바다를 건너 당에 들어가서 구원병을 청하였다고 합니다

당의 임금 이세민이 해동을 침략할 뜻을 품은 오래 였으므로

반드시 신라와도 고구려 · 백제 나라에 대한 음모를 꾸였을 것인데

헤아리건대

아마 당은 고구려를 치는 동시에 수군으로 백제의 서쪽에 침입하고 ,

신라는 백제를 쳐서 고구려를 구원하지 못하게 하고 ,

또한 대군으로 고구려의 후방을 교란 하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라가 성열 · 동대 등의 성을 차지 하기 전에는

고구려의 후방을 교란시키지 못할 것이고 ,

당이 요동을 차지하기 전에는 수로로 양식 운반하기에 급급하여

백제에 침입할 병선이 없을 것이니 ,

이제 백제로서 계책을 세운다면

당분간 성열 등의 성을 신라에게 내맡기고 군사를 단속하여 기다려야 것입니다 

당과 신라가 고구려에 대해 격렬한 전투를 벌여 서로 손을 뺏기가 어렵게 것인데

신라는 백제를 염려하여 군사를 많이 내지 못할 것이지만은 

당은 반드시 나라를 기울여 고구려에 침입할 것이니

백제는 그틈을 타서 배로 정병 수만 명을 운반하여

당의 강남을 친다면 이를 점령하기가 아주 용이할 것이고 ,

강남을 점령한 뒤에는 물력과 민중으로 나아가 공략한다면

서국의 북쪽은 비록 고구려의 차지가 되더라도

남쪽은 백제의 차지가 것입니다

 

그러면 신라가 비록 백제를 아무리 원망하더라도

하잘것없는 조그만 나라가 어찌 하겠습니까 ?

오직 머리를 숙여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그때에는 백제가 신라를 멸망시킬 수도 있고

그대로 존속시킬 수도 있어서

아무런 말썽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의자왕이 그의 말을 좇아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변경을 굳게 지키게 했고

이듬해에 과연 당이 30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에 침입하였는데

안시성을 포위하고 싸웠으나 동안 승부가 나지 않았습니다

한편 신라는 13 대군을 내어 고구려의 남쪽을 공격하여

후방을 교란시키려고 하므로 ,

의자왕은 계백에게 명하여 신라의 후방을 습격하여

성열 일곱 성을 회복하고

윤충을 보내 부사달(경기도 개성 ?) 10 성을 점령하고 ,

수군으로 당의 강남을 습격하여 월주 등지를 점령하여

착착 해외의 척지를 경영했습니다

 

(대륙백제설이 조선상고사에 나옴;;)

 

백제는 미쳤다 ! 중국이 경악하고 일본이 벌벌떠는..(근데 국뽕글 아니고 정사임 ;;)

 

[성충의 죽음]

그러나 ,

임자(백제 간신)의 참소로

성충이 마침내 의자왕의 박대함을 당하여 뜻을 펴지 못했습니다

 

<삼국사기 의자왕>

16 3월에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이 적극 말렸더니 ,

왕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하려는 자가 없었다.

성충은 옥에서 굶주려 죽었는데 ,

그가 죽을 왕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마디 말만 하고 죽겠습니다.

제가 항상 형세의 변화를 살펴보았는데

전쟁은 틀림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전쟁에는 반드시 지형을 선택해야 하는데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군사를 보전할 있습니다.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

수군은 기벌포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방어해야만 방어할 있습니다.'

 

그러나 왕은 이를 명심하지 않았다.(안습)

 

백제 마지막 충신 성충

 

[백제의 간신 임자]

한편 당시 신라는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칼을 갈던 상황이었고

그럼에도 백제는 성충 , 윤충 , 계백 , 의직 등

어진 재상과 이름난 장수가 수두룩하고

사졸들은 숱한 싸움을 겪어서 도저히 신라의 적이 아니었으니

신라장군 김유신이 몇 번 변변찮은 작은 싸움에서 이겼지만서도

공이 혁혁하지는 않은 상황이었고

그로인해 신라장군 김유신은 음모를 펼쳐서

먼저 백제를 침공하기 앞서 백제 정치를 어지럽히려 했습니다

 

<신채호>김유신은 지혜와 용기있는 명장이 아니라 음험하고 사나운 정치가요 , 

 평생의  공이 싸움터에 있지 않고 음모로 이웃나라를 어지럽힌 사람이다

 

(신채호 선생님이 일제강점기 시기 독립운동가 + 민족주의 학자라

자주적인 고구려 백제를 좋아하고 외세 힘을 빌린 신라를 극혐하셨음ㅋㅋ)

 

<신채호>김유신+김춘추 극혐 ㅋㅋ

 

옛날 신라 부산현 현령 조미곤이 백제의 포로가 되어

백제좌평 임자의 집 종이 되었는데

조미곤은 충실하고 부지런하게 임자를 섬겨서 자유롭게 밖에 드나들게 되자

도망쳐서 신라로 돌아와 백제 사정을 고했습니다

 

신라장군 김유신은 조미곤에게

 

<김유신>임자는 백제 왕이 사랑하는 대신이라니

내 뜻을 알려 신라에 이용되게 하면 그대의 공이 누구보다도 클 것인데 ,

그대가 능히 위험을 무릅쓰고 내 말대로 하겠소 ?

 

조미곤은

 

<조미곤>생사를 돌아보지 않고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이에 조미곤은 유신의 밀령을 받고 다시 백제에 들어가 임자에게

 

<조미곤>이 나라의 신민이 되어

이 나라의 풍속을 모른다는 것은 안 될 일이기에 미처 아뢰지 못하고

나가 다니다가 돌아 왔습니다

 

라고 하니 ,

임자는 이 말을 곧이듣고 의심하지 않았고

조미곤이 틈을 타 임자에게 말했습니다

 

<조미곤>지난번에 실은 고향을 생각하여 신라에 갔다 왔고

먼젓번 말은 한때 꾸민 말이었습니다

신라에 가서 김유신을 만나보았는데

유신의 말이

 

백제와 신라가 서로 원수가 되어 전쟁이 그치지 아니하니 ,

두 나라 중 한 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인데

그러면 우리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지금의 부귀를 잃고 남의 포로가 될 것이니

원컨대 우리 두 사람이 미리 약속하여

신라가 망하면 유신이 공에 의지해 백제에서 다시 벼슬을 하고

백제가 망하면 공이 유신에게 의지해 신라에서 다시 벼슬을 하기로 합시다

그러면 두 나라 중 어느 나라가 망하든지

우리 두 사람은 여전히 부귀를 보전할 것이 아니겠소

 

하는 자기의 뜻을 말씀드려 보라고 하였습니다

 

임자가 잠자코 아무 말이 없자 조미곤은 송구스러워하며 물러났습니다

 

며칠 뒤에 임자가 조미곤을 불러

전일에  말을 물으므로

조미곤이 다시 유신의 말을 되풀이하고 이어

 

<조미곤>나라는 꽃과 같고 인생은 나비와 같은 것인데 , 

만일  꽃이  뒤에  꽃이 핀다면

 꽃에서 놀던 나비가  꽃으로 옮겨가 사시를 항상 봄처럼 놀아야  것이 아닙니까 ? 

어찌 구태여 꽃을 위해 절개를 지켜 부귀를 버리고 몸을 망치겠습니까 

 

했고 임자는 원래 부귀에 얼이 빠진 추악한 사나이였으므로

 말을 달게 여겨 조미곤을 보내 유신의 말에 찬성했습니다

유신이 다시 임자에게

 

<김유신>한 나라의 권세를 독차지하지 못하면 부귀가 무슨 뜻이 있겠소 ? 

들으니 백제에는 성충이 왕의 총애를 받아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만 되고 , 

공은 겨우  아래에서 하는  없이 세월을 보낸다니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소 ?

 

하고 백방으로 꾀어 부여 성충을 참소하게 하고 , 

마침내는 요망한 계집 금화를 임자에게 천거하여

백제 왕궁에 들여보내게 해서

부여성충 이하 어진 신하들을 혹은 죽이고

혹은 귀양보내서 백제로써 백제를 망치게 했습니다

 

(따란 ~ 김유신의 모략이 성공하였습니다. 백제 방어력 70% 하락 !)

 

[김유신의 여자스파이 금화]

임자는 김유신이 보낸 무당 금화를

미래의 화복과 국가 운명의 길고 짧음을 미리 아는 선녀라 일컬어

의자왕에게 천거했습니다

 

(요망한 계집 금화는 삼국지 초선 역할인듯 ㅋㅋ)

 

미인계(섹시걸의 덫..)

 

왕이 이에 혹해서 금화에게 백제 앞날의 길흉을 물었고

금화는 눈을 감고 한참 있다가 신의 말을 전한다고

 

<금화>백제가 만일 충신 형제를 죽이지 아니하면

눈앞에 나라가 망하는 화가 미칠 것이요 ,

죽이면 천년만년 영원히 국운이 계속되리라

 

했고 의자왕은

 

<의자왕>충신을 쓰면 나라가 흥하고

충신을 죽이면 나라가 망함은 고금을 통한 이치인데

이제 충신 형제를 죽여야 백제의 국운이 영원할 것이라고 함은 무슨 말이냐 ?

 

금화는

 

<금화>그 이름은 충신이지마는 실은 충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의자왕>충신 형제란 누구란 말이냐 ?

 

하고 왕이 물으니 금화는

 

<금화>첩은 다만 신의 비밀한 맹령을 전할 뿐이고

그것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의자왕은 성충(成忠)과 윤충(允忠) 형제 가 다 이름에 충(忠) 자가 있어

그들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임자는 왕의 성충에 대한 마음이 흔들렸음을 알고

그를 참소하여 내쫓으려고 했고 의자왕이 마침 임자와 한가로이 술을 마시게 되자

임자에게 물었습니다

 

<의자왕>성충은 어떠한 사람이오 ?

 

임자가

 

<임자>성충은 재주와 계략이 또래 중에서 뛰어나

전쟁의 승패를 미리 획책하면 백에 한 번도 실 수하는 일이 없고 ,

남의 뜻을 잘 짐작하며 말솜씨가 있어

이웃나라에 사신으로 가면 임금을 욕되게 하지 아니합니다

참으로 천하의 기재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재가 있는 만큼 그를 다루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신이 들으니 성충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 개소문과 친밀해서

개소문더러

 

'고구려에 공이 있고 백제에 성충이 있으니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하면 천하에 얻지 못할 것이 있겠소 ?'

 

하여 엄연히 백제의 개소문을 자처하고 ,

개소문은 성충에게

 

'나나 공이 아직 대권을 잡지 못하였음이 한이오.'

 

하며 성충을 매우 후하게 대접했다고 합니다

성충이 이같이 불측한 마음을 가지고

이웃나라의 권세있는 신하와 정의가 매우 가깝고 ,

또 그의 아우에 윤충 같은 명장이 있으니 ,

신은 대왕께서 만세(사망)하신 후에는

백제는 대왕 자손의 백제가 아니요 성충의 백제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의자왕은 윤충을 파면하여 소환하고 성충을 소홀히 대접했고

  윤충은 바야흐로 월주(중국 남부)에서 장사를 훈련하여

당의 강남을 온통 집어 삼키려고 하는 참이었는데

갑자기 참소를 만나 파면 돼서 돌아오니

오래지 않아 월주는 당에게 함락되었고

그래서 윤충은 울분하여 죽었습니다

 

윤충이 죽고 성충도 물리쳐지니

금화는 더욱 기탄없이 의자왕에게 권하여

웅장하고 화려한 왕흥사와 태자궁을 지어 나라의 재정이 마르게 하고 ,

백제 산천의 지덕이 험악하니 쇠로 진압해야 한다고

각처 명산에 쇠기둥 또는 쇠못을 박고

강과 바다에 쇠그릇을 던져넣어 나라 안의 철이 동이 나게하니 ,

나라 사람들이 금화를 원망하여 '불가살' 이라 일컬었습니다

'불가살' 은 백제 신화의 '쇠 먹는 신' 의 이름이었습니다

 

이에 성충이 상소하여 임자와 금화의 죄를 통렬히 논란하였으나

왕의 좌우가 다 임자와 금화의 심복이었으므로 다투어 성충을 참소하기를

 

<간신들>성충이 대왕의 총애를 잃은 뒤로 늘 울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오늘날 이런 상소를 올린 것입니다

 

라고 했고 의자왕은 성충을 잡아서 옥에 가두고

좌평 흥수를 고마미지(전남 장흥)로 귀양보내고 ,

서부은솔 복신을 파면하여 가두니

이들은 다 성충의 무리였습니다

 

성충은 옥중에서 다시 유언의 상소를 올려

 

<성충>충신은 죽을지라도 임금을 잊지 못하느니 신이 한 말씀 올리고 죽고자 합니다

신이 천시 (天時)와 인사(人事)를 살피건대 ,

오래지 않아 전화가 있을 것 입니다

무릇 군사를 씀에는 지세를 택하여 위쪽에 처해서 적에 대응 해야만 만전(안전)합니다

만일 적병이 침입하거든

육로로는 탄현에서 막고 ,

수로로는 백강에서 막아 험한 곳에 웅거해 싸워야 합니다

 

하고는 음식을 끊어 28일 만에 죽으니

곧 고구려 태대대로 연개소문이 죽기 한 해 전이었습니다

 

[충신 흥수]

654년 신라 진덕여대왕이 사망하자

김춘추가 왕위를 이었는데

김춘추는 이전 동서였던 백제 무왕과의 왕위 다툼 감정을 누그러트리고자

일부로 출가해서 여승이 된 두 여인에게 왕위를 준 것이었는데

이제와서 두 나라 사이가 돌이킬 수 없게 되자

결국 직접 왕위에 올라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되었고

태종은 왕이 되자 더욱 백제군에 죽은 자신의 사위와 딸인

김품석 부부의 보복을 서두르게 됬고

또한 백제의 침노가 심해서 태자 김법민을 당에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였고

 

당나라 역시 이때 당태종이 죽고 당고종이 즉위하여

고구려에 대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 먼저 백제를 신라와 합쳐 쳐서 없앤 다음

다시 고구려를 함께 공격하기로 하고 신라 태종의 청을 허락했습니다

 

660년 3월

신라왕자 김인문이 당의 행군대총관 소정방과 함꼐

군사 13만을 거느리고 당나라에서 출발해 바다를 건너

6월에 덕물도(인천) 에 이르렀고

신라 태종이 금돌성(충북 음성) 에 진을 치고

태자 김법민과 대각간 김유신과 장군 진주 , 천존으로 하여금

병선 1백 척으로 맞이하였고

당나라장수 소정방이 신라태자 김법민에게

 

<소정방>신라 당 두나라 군사가 수륙으로 나뉘어

신라 군사는 육지로 쫓고

당의 군사는 물로 쫓아

7월 10일에 백제 서울 소부리(사비) 에 집합합시다

 

하므로

법민과 유신이 다시 금돌성으로 돌아와

김품일 , 김흠순 등 여러 장군들과 함께

정병 5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로 향했습니다

 

그제서야 백제 의자왕은 깊은 밤의 연회를 파하고

여러 신하들을 불러 싸우고 지킬 방법을 의논하는데

 

좌평 의직은

 

<의직>당나라 군사가 물에 익숙지 못한데 멀리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반드시 피곤할 것이니

뭍에 내리자마자 돌격하면 깨뜨리기 쉬울 것이고 ,

당의 군사를 깨뜨리면 신라는 저절로 겁이 나서 싸우지 않고 무너질 것입니다

 

하였고 ,

좌평 상영은

 

<상영>당의 군사는 멀리 와서 빨리 싸우는 것이 이로울 것이므로

뭍에 내릴 때에는 장수와 군사들이 다 용감하게 싸울 것이니

험한 곳을 막아 지켜서

저네가 양식이 떨어지고 군사가 해이해진 뒤에 싸우는 것이 옳고 ,

신라는 일찍이 여러 차례 우리 군사에게 패하여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으니

먼저 신라 군사를 쳐 깨뜨리고 다시 형편을보아 당의 군사를 치는 것이 좋습니다

 

라고 하여 의론이 분분했습니다

의자왕이 전에는 평시나 전시를 물론하고 용단을 잘 내렸는데 ,

이때에 와서는 요망한 무당과 여러 소인들에게 둘러싸여서

의외로 흐리멍덩하여 어찌할바를 모르다가(충신들 다죽으니 ㅉㅉ)

홀연히 지모로 이름있던 좌평 , 일찍이 성충의 무리로 지목되어

고마미지에 귀양간 부여흥수를 생각하고 사자를 보내서 그에게 계책을 물었습니다

 

흥수는

 

<흥수>탄현과 기벌포는 국가의 요충이라

한 사람이 칼을 빼어들고 막으면 만 사람이 덤비지 못할 곳이니 ,

수륙의 정예를 뽑아서 당의 군사는 기별포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대왕께서는 왕성을 지키다가

저네 두 적이 양식이 떨어지고 군사가 피로해진 다음에

맹렬히 공격하면 백 번 싸워 백 번 이길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사자가 돌아와서 그대로 보고하니

임자 등은 성충의 남은 무리들이 다시 등용될까 두려워서

 

<임자>흥수가 오래 귀양가 있어서 임금을 원망하고

성충의 옛 은혜를 생각하여 항상 보복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이제 성충이 남긴 상소의 찌꺼기를 주워서 나라를 그르치려고 하는 것이니

그의 말을 써서는 안 됩니다

 

당의 군사는 기벌포를 지나 들어오게 하고

신라 군사는 탄현을 넘어 들어오게 한 다음에 힘써 공격하면

독 안에 든 자라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이리하면 두 적을 다 분해할 수 있을 것인데

어찌하여 험한 데를 막고 적병과 대치하여

시일을 허비해서 군사의 용기를 줄게 합니까 ?

 

했고 의자왕은 그의 말이 옳다 하여

다시 궁녀들로 하여금 술을 올리고

노래를 부르게 하여 전쟁이 눈앞에 있음을 잊었습니다

 

백제 충신 흥수

 

[황산벌의 계백]

7월 9일

신라 대장 김유신 · 김품일 등이 5만 군사를 거느리고 탄현을 지나

황등야군(논산과 연산 사이 즉 황산벌)에 이르니

의자왕이 장군 부여계백을 보내 신라 군사를 막게 했습니다

 

계백은 출전에 임하여

 

<계백>탄현의 천험을 지키지 않고

5천의 군사로 10배나 되는 적을 막으려 하니 내일의 일을 내가 알겠다

 

하며 탄식하고 처자를 불러

 

<계백>남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내 손에 죽어라

 

하고 칼을 빼어 다 죽이고 군중에 나아가 군사들을 모아놓고

 

 

<계백>고구려 안시성주 양만춘은 5천의 무리로 당의 군사 70만을 깨뜨렸으니 ,

우리 5천의 군사 한 사람이 열 사람을 당할 것인데

어찌 신라의 5만 군사를 두려워하겠느냐 ?

 

하고는 군사를 몰아 달려가 황등야군에 이르러 험한 곳에 웅거해서

세 진영에 나뉘어 싸우니 김유신 등이 네 번 공격하였다가 네 번 다 패하여

만여 명의 사상자가 났습니다

 

김유신은 싸워서 이길 수는 없고

당의 군사와 약속한 7월 10일이 되어 다급해서 품일과 흠순을 돌아보고 말했습니다

 

<김유신>오늘 이기지 못하면 약속을 어기게 되는데

당의 군사가 홀로 싸우다가 패하면

신라의 수십 년 공들인 일이 헛일로 돌아갈 것이고 ,

당의 군사가 이기면 비록 남의 힘으로 복수는 하였다 하더라도

신라가 당의 업신여김에 견디지 못할 것이니 어찌 하면 좋겠소 ?

 

품일과 흠순이

 

<품일과 흠순>오늘 열 갑절의 많은 군사로 백제를 이기지 못한다면

신라 사람은 다시 낯을 들지 못할 것이오

먼저 내 아들을 죽여 남의 자제들을 죽도록 격려하여

혈전을 벌이지 아니하면 안되겠습니다

 

하고 흠순은 그의 아들 반굴을 ,

품일은 그의 아들 관창을 불러

 

<흠순과 품일>신라의 화랑이 충성과 용맹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제 1만의 화랑으로 수천의 백제 군사를 이기지 못한다면 ,

화랑은 망하고 또 신라도 망하는 것이다

너희들이 화랑의 두목이 되어 화랑을 망치고 말겠느냐 ?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을 다할 것이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를 다할 것인데 ,

위급함을 당하여 목숨을 바쳐야만 충과 효를 다했다고 할 것이다

충효를 다하고 공명을 세우는 것이 오늘 너희들이 할 일이 아니겠느냐 ?

 

반굴이

 

<반굴>네

 

하고 그 무리와 함께 백제의 진으로 돌격했다 전사했고

관창은 나이 겨우 16 살로 화랑 중에서도 가장 어린 소년이었는데 ,

반굴의 뒤를 이어 혼자 서 백제의 진중으로 달려들어가

몇 사람을 죽이고 사로잡혔습니다

계백이 소년의 용감함을 사랑하며 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며

 

<계백>신라에 소년 용사가 많으니 갸륵하다

 

하고 그대로 돌려보냈고

관창은 아버지 품일에게

 

<관창>오늘 적진에 들어가 적장을 베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하고 ,

물을 움켜 마셔 목마름을 풀고는

다시 말에 채찍질하여 창을 들고 백제의 진중으로 달려들었습니다

계백이 그를 쳐죽여 머리를 말꼬리에 매달아서 돌려보냈고

품일이 이것을 보고 도리어 기뻐서 뛰며

 

<김품일>내 아들의 면목이 산 사람 같구나

나라 일에 죽었으니 죽은 것이 아니다

 

라고 외치니 신라 군사들이 모두 감격하여 용기가 났습니다

이에 유신이 다시 총공격의 명령을내려 수만명이 일제히 돌진 했고

 

(즉 최고 지휘관 아들 두명을 일부로 카미카제식 자살돌격 시키고는

밑에 졸병들도 죽기로 안싸우면 반굴이랑 관창이꼴 날거라는

무언의 협박을 하며 분위기를 고조시킨 김유신임)

 

계백이 친히 북을 쳐 응전하매

두 나라 군사가 참으로 용감하였지마는

수효가 너무도 모자란 백제군이었고

결국 계백장군과 백제 5천 결사대는 한갓 성스럽고 깨끗한 희생으로 전장에서 쓰러져

백제 역사의 끝장을 장식했습니다

 

(계백 전사 직후 백제 멸망)

 

백제 마지막 명장 계백

 

성충 , 흥수 , 계백 장군 세 마지막 백제 충신들을 기린 삼충사 , 충남 부여 삼충사

 

<라봉봉>삼국유사를 쓴 일연스님은

본캐가 원래 스님이라 살생금지한 법왕을 찬미한 인물인데

종교를 그런식으로 강요하다 역사에서 종교 본래 취지가 왜곡된 사례가 참 흔했기에

법왕과 일본의 오랜 육식금지령은 참 잘못된 법안이었다 생각하고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는

'지옥의 붕괴와 그 부흥' 이라는 소설을 쓰며

그리스도에게 패배해 감옥에 갇힌 악마가

어떻게 다시 부활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썼는데

악마는 교회를 발명해서 인간들을 현혹시키고 점차 허례허식에 물들여

악이 부활할 수 있었다며 교회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고

한국사회를 지배한 신체발부 수지부모로 머리에 이가 다박다박 끼는 상황에도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 것을 오랜세월 이어갔다는 것이나

고기를 먹지 않는 승려 , 결혼하지 않는 신부 , 돼지고기를 금하는 이슬람교 등

저는 종교의 허례허식으로 인류의 발전이 항상 저해되어 왔음을 알고 있기에

특히 집중해서 이 부분을 비판하는 입장이고

종교니 국가니 하는 것도 물론 성스러운 면도 존재하고 인간사회에서 굉장히 중요하고 숭고한 면이 있음에도

결국 사람이 만들었고 사람들의 삶을 더 좋게 하기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누구나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어야하며

사람 밑에 있지 사람위에 있어서는 안된다 생각합니다

 

일본이 백제를 기억하고 존경하는 것은 참 고맙지만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전까지 오랜기간 한국 , 중국에 미개한 야만국에 쪽발이 소리 들었던 이유가

결국 반도국가라 생존에 힘쓰며 허례허식을 빠르게 제거해간 한국에 비해

섬국가라 생존에 상대적으로 느긋해서 백제의 망령에 그대로 사로잡혀서라 생각하고

백제에서 시작된 나노리 문화나 육식금지령 등을 일본에선 천년 넘게 지속해왔다는 점도

일본 사회의 폐쇄적인 한 부분이고

역사에서 섬나라들이 외적에 휘둘리지 않아 평화로웠으면서도

반대로 외부와 소통이 단절돼

미개한 악습이나 괴이한 풍습이 대부분 섬국가에 오랜기간 존재했듯이

영국 , 일본이 오늘날까지 클래스 , 계급 , 신분제 , 왕실이 있는것도

아무리 세계의 굴지의 선진국임에도 본받을 것은 못된다 생각합니다

 

당대 백제의 삼국사기 , 삼국유사적 내용은 이전 이야기에서 썼기에

조선상고사 내용 위주로 썼는데

조선상고사 기록은 삼국사기와 완전히 다른편이고

서동요 내용이 더 사실적이고 자세한 편이고

무왕이 사위로서 신라 왕위계승을 해 신라를 평화적으로 합병하려 했다는 점이나

성충이 중국 남부를 정복하여 대륙백제를 경영했다는 점 등

여러 잘 안알려진 소름돋는 이야기가 많고

 

백제 멸망직전에도 백제는

거의 레알마드리드 지구방위대처럼

지단 , 베컴 , 호나우두 , 카시야스 전부 가진 상황이었는데

 

(성충 , 윤충 , 계백 , 의직)

 

무능한 의자왕이 계속 간신들 말을 듣느라

S급 , A급 선수들 다 바보같이 방출해 버려서 망한거지

확실히 백제가 멸망때도 일본이 남아있었고

교과서에서 조그만한 충청+전라도로 묘사되어 신라보다 작아보이는

말년의 백제와 달리

멸망 직전까지도 백제는 인구랑 막대한 농토랑 해상영역때문에

고구려보다 크면 컸지 절대 작은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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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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