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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중기 인물들>

[초고왕]

[구수왕]

[사반왕]

[찬탈자 고이왕]

[대성팔족]

[고이왕의 율령반포]

[책계왕과 보과부인]

[자객에 살해당한 분서왕]

[황창랑]

[백성을 아낀 비류왕]

[계왕]

[백제 근OO왕]

[백제 최전성기왕 근초고왕]

[고흥의 서기]

[아직기]

[일본 학문의 시조 왕인 박사]

[요서경략설]

[근구수왕]

[불교를 전파한 침류왕과 마라난타]

<라봉봉>

 

[초고왕]

원래 백제 4대왕 개루왕대에

개루왕이 부녀자를 겁탈하려한 사건인 도미부부 설화가 있는데

개루왕은 기록에

성격이 공손하고 품행이 방정했다 나오고

도미 부부 설화의 어지러운 기록상 개루왕보다는

폭군이었던 개로왕일 가능성이 높게 여겨지기에 도미부부 설화는

일단 다음 이야기로 패스하겠고

 

개루왕이 사망하자

개루왕의 아들 부여초고가 왕위를 이어

백제 5대왕 초고왕이 되었습니다

 

개루왕대부터 견원지간인 백제와 신라는 서로 충돌하기 시작하였고

초고왕은 초고왕 2년 7월 가을

군사를 몰래 보내 신라 서쪽 변경 두 성을 격파하고

남녀 1천명을 사로잡아 돌아왔고

곧바로 다음달인 8월

신라왕이 직접 정예 기병 8천명을 거느리고 한수까지 진격해와서

초고왕은 신라군이 너무 많다 생각해

이전 빼앗은 성을 돌려주었습니다 (;;)

 

이후에도 초고왕 재위 49년동안

초고왕은 신라와 크고 작은 전투를 엄청나게 벌이며

백제국은 신라국과 남한지역의 맹주자리를 다투었고

점차 신라와는 앙숙 , 견원지간의 관계가 이때부터 형성되게 됩니다

 

신라 도깨비

 

백제 도깨비

 

[구수왕]

초고왕이 사망하자 초고왕의 맏아들

부여구수가 왕위를 이어

백제 6대왕 구수왕이 되었고

이때도 말갈 , 신라와의 공방전 기록이 있고

 

[사반왕]

구수왕이 재위 21년에 사망하자

그의 맏아들 부여사반이 왕위를 이었지만

나이가 어려 정사를 잘 처리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즉위후 곧바로 초고왕의 친동생 부여고이가 왕위를 이었고

백제 7대왕 사반왕은 즉위 기간도 ,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은

안습한 백제왕이 되었고

어린임금 사반왕은 곧바로 삼촌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후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안습 ㅠㅠ)

 

[찬탈자 고이왕]

결국 백제 8대왕은

개루왕의 둘째아들이자 초고왕의 친동생 부여고이가 차지하게 되었고

고이왕은 무력적인 임금이어서 사냥을 좋아했고

첫 기록부터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해 직접 40마리의 사슴을 쏘아 맞췄다하고

 

이거 완전 수양대군 아니냥 , 영화 관상

 

재위 7년 7월 가을에는

냇가에 오리 한 쌍이 날아가는 것을

고이왕이 쏘아서 모두 적중시켰습니다

 

 

고이왕은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숙부 출신 임금이지만

(수양대군 선배)

 

고이왕에게도 숙부가 있었는데

바로 기루왕의 아들이자

개루왕의 동생인 백제 태자 부여질이었고

 

고이왕은 숙부 부여질을 우보(재상)로 삼았는데

부여질은 성격이 충직하여

실수 없이 일을 계획한 사람이었습니다

 

고이왕 13년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와 삭방태수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자

고이왕은 그 틈을 이용해

좌장 진충으로 하여금

낙랑 변방 주빈들을 습격해 잡아오게 했는데

낙탕태수 유무가 그 말을 듣고 분개했고

고이왕은 침공을 받을까 걱정해 잡아온 사람들을 돌려보냈습니다

 

이후 고이왕은 좌장 진충을 우보로 임명했고

진물을 좌장으로 임명해서 군사일을 맡겼습니다

 

[대성팔족]

백제 기록을 보면 진씨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백제는 부여의 후예답게 왕권보다는 귀족 , 신하의 권한이 강한 나라여서

왕권이 약해 왕들이 자주 암살당하며

멸망때까지 단합이 잘 안되고 따로노는 성향이었고

 

백제의 대표적인 여덟 성씨 귀족들을

 

'대성팔족'

 

이라 하는데

대충 진씨 , 해씨 , 목씨 , 사씨 , 백씨 , 연씨 , 국씨인

7개의 백제귀족 성씨가 있고

중국에서 혼동해서 목협씨를 목씨와 협씨로 구분했기에

백제 7개 귀족가문을 대충 대성팔족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수서 동이전 백제편>

나라 안에 큰 성씨 여덟 가문이 있다

 

백제 7개 귀족가문 대성팔족같은 개념은

오늘날에도 보기 어려운 것만은 아닌게

서구권도 로스차일드가 , 록펠러가 등 유명 명문가가 존재하고 있고

가문의 인맥과 부를 대대로 세습하는 형편이고

 

삼국시대 귀족회의 고구려 제가 백제 정사암 신라 화백회의

 

오늘날 대한민국으로 치면

삼성 이씨 , 현대 정씨 , 엘지 구씨 , 롯데 신씨 , 에스케이 최씨 , 한진 조씨

 

등이 있는데

 

대한민국 대성 오족(?)

 

실제로 이들이 세계에 여러 상품을 수출하는 민간대기업임과 동시에

내수기관 피를 빨며 국가 산업기관 등을 전부 차지하고 있는

사실상의 준 공기업 개념이기도 해서

삼백산업 , 보험 , 건설 , 자동차 , 전자 , 교통 , 정유 , 통신 , 에너지 등

국내 산업이나 국제 시장의 불확실함과는 별개로

기업 경쟁력을 높이지 않아도 절대 망할리 없는

국가 내수산업기관 , 내수종목들을 독점하고 있기에

회사 경영과는 별개로 왠만해선 망할 일이 없는

캐시카우를 소유한 대한민국 귀족가문이나 마찬가지고

금융 , 보험 , 통신 , 정유 등 몇몇 산업들은 대놓고 돈먹고 돈먹는 구조에

신규 세력의 진입이 쉽지 않고

보통 1대로 끝나는 정치 , 공직에 비해서

사기업이라 3대 , 4대로 합법 세습이 가능하기에 현대판 귀족과 다름없고

 

이 가문들은 대부분 오늘날 혼맥으로 서로 끈끈이 엉켜있어

한국재벌가들도 현재 2세대 , 3세대까진 대충 서로 혼맥이 엮여있어서

이젠 더 가면 근친이 되버려서 더 엉킬 수가 없어서 

정치권이나 외부에서 혼맥을 가져온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고

 

인간은 본능상 대대로 이권을 계속해서 누리고 유지하고 싶어하기에

대성팔족같은 소수 로얄가문의 개념은

비단 백제사뿐만 아니라 현대 대한민국 , 조선시대 할 것 없이

한국사 , 세계사 곳곳에 등장하고 있고

특히 한국사에서 이런 소수 가문들은

왕을 바꾸기는 너무 어렵기에

주로 왕비를 배출하며 권력을 독점하려 하였고

 

신라도 박석김 체제로 가다가 김씨 왕 , 김씨나 박씨 왕비 배출 체제로 가게 됬고

고려는 재상지종(권문세족 , 문벌귀족) 이라 하며

고려왕실과 혼인 할 수 있는 고려가문 15개가 있었고

 

(라봉봉 조상인 김취려 가문의 언양김씨도 재상지종에 있군)

 

특히 고려 재상지종에 속한

윤관 가문의 파평윤씨와

민영모 가문의 여흥민씨의 경우

조선시대때도 권세를 이어가서

대대로 왕비를 배출하는 유명가문이 되었고

 

파평윤씨는 대윤과 소윤으로 유명한 조선 중종시대 쌍왕비를 배출한 가문으로 유명해

오늘날 대한민국 현 대통령 윤석열이 파평윤씨고

 

여흥민씨는 말할 것도 없이

태종 이방원 비 원경왕후 민씨와 고종 비 명성황후 민씨로

조선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가문이고

 

조선이 망한것도 안동김씨 , 풍양조씨 , 여흥민씨라는

일개 소수왕비가문의 세도정치 , 전횡이 있다는 점 ,

왕비 한명이 나오는 순간 왕비의 친오빠 , 남동생 , 사촌오빠들 ,

사돈의 팔촌까지 다 달라붙어 국가요직 한자리씩 따먹었기에

 

(음 우리오빠는 장관 , 남동생이는 서울시장 , 

아빠는 대법관 , 사촌오빠들은 힘이 쎄니깐 육군참모총장이랑 경찰청장에 임명해야겠꾼 !!)

 

왕비를 배출하는 소수 가문의 힘이 엄청났다는 점이고

 

이렇게 백제 대성팔족은 대대로 왕비를 배출하며

소수 가문들이 백제 권력을 좌지우지 했음을 보여주는 가문 권력집단이고

 

가히 백제판 일루미나티 개념이고

 

(전 음모론은 안믿지만 역사가 그래왔던대로

특정 집단가문이 권력유지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로 뭉쳐왔었고

삼성가 등 대한민국 10대 대기업 그룹 정도 힘이면 충분히

국가를 조정할 수는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나마 신라가 김씨+박씨 체제로 무식하게 이어지고

고려 역시 초기에 한국위인이자

후삼국시대 한국에서 거의 예수님 이미지였던 태조 왕건의 씨를 받기 위한 정통성때문에

근친이 성행했다는 점과는 달리

 

백제는 의외로 문란한 삼천궁녀 색골마왕 의자왕 , 도미부부 유부녀 겁탈설화와는 달리

의외로 시대별로 여러 다양한 가문이 골고루 해먹었고

국제적으로 왜국 스시녀들과도 서로 놀아났기에

오히려 폐쇄적인 권력유지를 위해 근친루트에 집중해 음침한 장애찐따가 된 신라쨩에

비해 덜 문란한 편이라고도 할 수 있고

 

백제는 의외로 문란한 역사적 이미지와 달리 의외로 정상 , 오히려 좋은 느낌도 있고

신라가 의외로 근본있고 정숙한 이미지와 달리 의외로 비정상 , 오히려 나쁜 기록이

꽤 많다는 점이 우리 한국사의 신비로운 점입니다

 

(왠지 씹덕들이 괜히 일반인 코스프레 , 일코에 열심인 것과 비슷한듯)

 

하여튼 ,

여기 백제 대성팔족 7개 귀족가문중

초기 한성백제를 좌지우지한

대표적인 가문이 일단 부여계인 해씨와 더불어

진씨들이고

진씨들은 대성팔족중 해씨와 더불어 가장 유서깊은 세력이어서

특히 8대 고이왕때 진충 , 진물 등이 나오고

백제 최전성기왕 근초고왕이 진씨를 왕비족으로 삼으며

백제를 대표하는 성씨가 되어버립니다

 

백제사 읽다가 진씨가 굉장히 자주나오니 주의하고

대표적인 백제 지배층 , 백제계 성씨라 보면 됩니다

 

[고이왕의 율령반포]

고이왕은 

조카왕위를 찬탈했고 사냥을 좋아한 임금이었지만

초기 백제의 명군이었고

 

고이왕은 체제를 개혁해 백제를 중앙집권화시켜서

우가우가하던 마한부족국가에서 본격적인 고대국가로 백제를 이끌었으며

6좌평 체제를 만들어서

오늘날식으로 여섯 장관을 두었으며

 

16품 체계를 두어서

오늘날 9급공무원 , 7급공무원처럼

16급 공무원 극우부터 1급 공무원 좌평까지 두어 16등급 체제로 관직을 개편했으며

백제 마지막 불꽃 계백장군이 2품 공무원인 달솔이었습니다

 

또한 고이왕은

6품 이상은 자주빛(보라색) 옷을 입고

은꽃으로 관을 장식하게 하고

 

영화 황산벌 속 의자왕의 왕자들

 

11품 이상은 붉은 옷을 입고

 

16품 이상은 푸른 옷을 입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황산벌 속 푸른옷의 신하들

 

고대에 가장 귀했던 색이 바로 보라색 , 자주색이어서

보라 , 자주색은 동양에서는 왕실과 초고위층이 입는 옷이었고

의외로 옷에 금색 , 붉은색이 아니라 한국 왕실은

보라색을 가장 높게 쳐줬고

 

백제 왕복 복원모형

 

역시 서양에서도 로마황제나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힐때 왕이라 조롱하려 입힐만큼

보라색 염료값이 거의 금값수준이라

최상위 극소수만 입을 수 있었던 매우 귀한 염료였고

 

로마와 한국 황제의 색 퍼플

 

구당서 백제전에 의하면

백제 군주는 자색 도포를 입었으며

신라 골품제에서 보라색은 성골과 진골만이 입을 수 있었으며

고려도경에는 고려 황제는 외국 사신을 접견할때

자색 공복을 입었다 기록되있고

 

백제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일본 역시

쇼토쿠 태자가 제도를 정비한 이래

의복령에 1품은 진보라색 , 2~3품은 연보라색 관복을 입는 것으로

규정되었으며

 

사극드라마에서 삼국 왕가가

꼭 금색이나 붉은색 옷을 입고 존귀하게 나오는 것과 달리

실제론 중국에서 음양오행설에서 중앙 황색을 황제 색으로 ,

붉은색이 그 다음으로 왕의 색을 상징하고 있어

잘모르는 연출가들이 중국 황제사상의 영향을 받아

배우들에게 금색이나 붉은색 옷을 입힌 것이지

 

실제로 서양의 경우 보라색이 황제의 색이었으며

한국 역시 보라색이 황실 , 왕실의 색이었지

고대한국 왕가는 귀한 색으론 쳐주었지만

중국과 달리 금색이나 붉은색 옷을 안입었습니다

 

간지 쩌는 골든임페리얼 아바타를 장착했지만 고증엔 어긋난 선덕여왕 , MBC 선덕여왕

 

의외로 정확한 고증의 양놈들이 만든 문명6 게임속 선덕여왕

 

과학 , 화학사에서도

윌리엄 퍼킨의 인공퍼플염료의 발견이 수많은 염료와 경제적 희생을 막고

근대화학에서 굉장히 중요히 여길 만큼

서양과 '중국을 제외한'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보라색은 굉장히 존귀한 황제의 색이자 역사적인 색임을 구분해 알아두면 좋고

 

고이왕은 이렇게 율령(법)을 반포하고

의복체계를 개편해 원시국가 백제를 고대국가 백제로 개편한 백제 초기 명군이었고

 

고이왕은 고이왕 28년

자주빛으로 된 큰 소매 달린 도포와

푸른 비단 바지를 입고

금꽃으로 장식한 오라관을 쓰고

흰 가죽띠를 두르고

검은 가죽 신을 신고 남당에 앉아서 정사를 처리했습니다

 

여러 자료로 복원한 백제 무령왕 영정

 

고이왕 29년 정월 봄

고이왕은 관리로서 뇌물을 받거나 도적질한 자는

그 세 배를 배상하여

종신금고형에 처하라 했고

이로서 백제는 고이왕대 이르러 율령을 반포한 국가 , 법치국가로 변모하게 됩니다

 

[책계왕과 보과부인]

고이왕이 재위 52년에 사망하자

고이왕의 아들 부여책계가 왕위를 이어

백제 9대왕이 되었고

 

책계왕때 고구려가 대방을 치자

대방은 백제에 구원을 요청했는데

이전 책계왕은 대방왕 딸 보과를 부인으로 맞이하였기 때문에

(보과부인)

 

책계왕은

 

<책계왕>대방은 우리와 장인과 사위 관계의 나라이니

그들의 요청을 들어 주어야 한다

 

하고는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했고

고구려에서 이를 원망했습니다

 

보과부인은 혼인동맹으로 대방에서 시집온 백제왕비로 유명해

간간이 언급되는 인물인데

중국이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세운

식민 통치기관 한사군중 하나인 대방군의 태수(대방왕) 는

중국 본토에서 직접 힘이 미치기 어려웠기에

사실상 대방의 왕이나 다름 없어 대방태수가 아니라

대방왕이라 불릴 정도였고

 

대방태수딸 보과부인이 책계왕비로 백제에 시집온 것은

백제와 대방이 혼인동맹을 형성 ,

그 와중 고구려는 중국 기관인 낙랑과 대방을 한국에서 축출하기 위해

한사군과 격렬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어서

중국과 동맹한 백제를 원망한 것이었습니다

 

단지 이 기록과 백제 지역에서 중국계 물건이 적지않게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중국선진문화가 백제지역으로 전파되었음으로 보고 있고

보과부인은 개방적인 백제의 외국인 왕비로서

나름 국제적 왕비로 언급되는 인물입니다

 

책계왕 13년

9월 가을

한나라가 맥인들을 이끌고 와서 백제를 침략했는데

책계왕이 직접 나가서 방어하다

적병에게 살해당합니다

 

(중국몽의 결과 ?)

 

책계왕이 대방과 동맹하며 적극 친중화하다

결국 중국 한나라에게 살해당했는데

이전 백제는 백제 건국자 온조왕이 낙랑을 경계한 것을 시작으로

중국과는 사이가 그냥저냥 그랬는데

책계왕때부터 백제는 점차 중국과도 악연이 시작되게 되었고

 

[자객에 살해당한 분서왕]

책계왕이 사망하자

책계왕의 맏아들 부여분서가 왕위를 이어

백제 10대왕 분서왕이 됬는데

분서왕은 분서왕 7년 2월 봄

낙랑의 서현을 기습해 빼앗았는데

곧바로 8개월 뒤인 10월 겨울 ,

분서왕은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했습니다

 

 

[황창랑]

분서왕은 황창랑이라는 소년에게 암살당했다고도 하는데

황창랑은 조선시대에 언급된 인물로서

황창랑은 8살난 어린아이인데 신라왕과 꾀해서

백제에게 분풀이를 하려고 백제 저잣거리에서 검춤을 추니

저잣거리 사람들이 담처럼 둘러서서 구경하였고

백제왕이 듣고 궁중에 불러들여 춤추라하니

창랑이 그 자리에서 왕을 찔러죽였다고 합니다

 

신윤복의 쌍검대무

 

하여튼 백제는 신라와 원수진 것에 이어서

책계 , 분서왕을 거치며 점차 중국과도 같이 갈 수 없는 존재임을 인식하게 되었고

책계 , 분서왕이 연속으로 중국에 암살당하며

큰 위기를 겪은 백제지만

비류왕~근초고왕이라는 초명군라인이 등장하며

백제는 위기를 진정시키고 곧바로 동아시아의 대국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백성을 아낀 비류왕]

분서왕이 급작스럽게 암살당할때

그에게 여러 아들이 있었지만

모두 어려서 신하와 백성들의 추대에 의해

구수왕의 둘째아들 부여비류가 왕위를 이어

백제 11대왕 비류왕이 되었고

 

비류왕은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며 사람을 아끼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던 인물이고

오랫동안 평민으로 살면서 명예를 떨친 인물이라

이례적으로 분서왕의 아들들을 제치고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고

이 인물 뒤 왕이 백제 최전성기왕 근초고왕이라는 점도 생각한다면

초기 기록부터 명군의 냄새가 굉장히 강한 인물이고

 

비류왕은 민간을 순회하며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홀아비 , 과부 , 고아 , 자식없는 늙은이 등

자력으로 살 수 없는 약자들에게 일인당 곡식 3섬씩 주었습니다

 

오늘자 배식봉사하는 윤석열 대통령(ㅠㅠ)

 

[계왕]

비류왕이 사망하자

너무 어려서 왕위를 비류왕에게 양보해야했던

분서왕의 어린 맏아들이 어느새 장성하여

다시 왕위를 이어 백제 12대왕 계왕이 됬는데

계왕은 재위 3년만에 사망해

다시 비류왕의 둘째아들에게 왕위가 넘어가게 되었고

 

계왕 사후 비류왕의 둘째아들 부여초고가 왕위를 이어

백제 13대왕 근초고왕으로 즉위합니다

 

[백제 근OO왕]

백제 왕실에서 개루왕 , 근개루왕이 있고

초고왕과 근초고왕 , 

구수왕과 근구수왕이 있는데

가까울 근자가 서양의 2세 개념과 비슷하다는 말이 있고

가까울 근 , 말 그대로 비슷한 계통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백제 최전성기왕 근초고왕]

근초고왕은 백제 최전성기 명군이자

온조왕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백제명군이고

백제시대 가장 영토를 넓힌 정복군주로 이야기 되는 왕입니다

근초고왕은 체격이 크고 용모가 기이하며 원대한 식견이 있었습니다

 

칠지도를 들고 있는 근초고왕 , KBS 근초고왕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 가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치양에 주둔하며

군사를 시켜 민가를 약탈하자

근초고왕이 태자에게 군사를 주어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불시에 공격해 그들을 격파하고

적병 5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고

노획한 물품은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근초고왕 26년

고구려가 침공해오자

근초고왕이 패하 강가에 복병을 배치하고

불시에 공격하자 고구려군이 패배했고

 

그해 겨울 근초고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군 3만을 거느리고

고구려 평양성을 침공하자

고구려 고국원왕이 필사적으로 항전하다

화살에 맞아 사망하자

근초고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습니다

 

 

근초고왕이 즉위하던 시대는

국제적으로 큰 혼란의 시대였고

북쪽의 고구려는 낙랑을과 대방군을 축출하며

백제와 국경선이 맞닿게 되며 충돌을 예고하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근초고왕은 내정을 튼튼하게 하고

전라도지역 끝까지 진출해 남은 마한의 잔존세력을 정벌해

오늘날 백제 국경을 확립하였으며

가야를 평정해 남방을 평정해 가야 중심의 해양주도권을 백제가

차지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점차 왜는 가야계 주도에서 백제계 주도로 큰 변화를 가지게 되어

아주 깊고 깊은 백제-왜 관계가 형성되게 됩니다

 

근초고왕의 진출 , 백제 최전성기 영토

 

친구가 없어 계속해서 이웃사촌(마한 고구려 가야 신라 왜 중국)들을 만들어간 근초고왕 , 나는 친구가 적다

 

근초고왕은 고구려와 전쟁에서 승리한 후

황색깃발을 사용해 백제가 황제국임을 과시했고

일본에 칠지도를 하사해 백제 중심 동아시아 질서를 형성했고

 

(칼은 원래 높은쪽이 아랫쪽에게 선물로 줌)

 

칠지도

 

[고흥의 서기]

근초고왕대부터 백제의 역사가 최초로 쓰여졌고

백제는 개국 이래로 글자로 자국의 역사를 기록한 적이 없다가

근초고왕때 와서 박사 고흥이 처음으로 백제 역사서 '서기' 를 썼고

서기는 훗날 일본역사서 '일본서기' 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일본의 삼국사기 격인 '일본서기'

 

[아직기]

또한 고사기에 따르면 근초고왕은 아직기와 왕인박사를 왜에 보내서

천자문과 논어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아직기와 왕인박사는 시대가 불분명하나

백제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일본에 문물을 전해준 인물로 일본에서 성인으로 여겨지는 인물들이고

근초고왕~아신왕대 인물로 여겨지고 있으며

아직기는 백제에서 사신으로 파견됬는데

왜국 천황이 아직기가 경서에 밝은 것을 알자 황태자 스승으로 삼고

천황이 아직기에게 뛰어난 학자에 묻자

아직기는 왕인을 추천해줍니다

 

[일본 학문의 시조 왕인 박사]

근초고왕대 이후부터 백제 박사들은 점차 국내외로 큰 활약을 하게 되는데

박사란 유교식 관직명으로서 오늘날 척척박사처럼

그시대에도 지식인을 뜻하는 말이었으며

 

근초고왕~근구수왕대 백제 왕인 박사는

당대 일본에서 백제에 사람을 보내어서 학자를 구하므로

왕인을 일본에 보내서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가게 했으며

왕인은 일본인들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왕인박사 , 한국 위인

 

전라남도 영암군에는 왕인 박사가 일본에 가기전 수련했다는 책굴과

유적지가 있어서 오늘날에도 영암 왕인문화축제를 열고 있으며

왕인박사는 특히 일본에서 문자와 여러 선진문물을 전수해준

대학자 , 성인 이미지가 있어

오늘날까지 일본인들이 존경하고 감사해하는 인물이고

당시 백제와 왜의 문화교류를 상징하는 대표 인물로 여겨지는

전설의 인물입니다

 

천자문과 논어를 가지고 도래하는 왕인 박사

 

지구 동쪽끝 섬나라인 일본 , 왜 특성상

타국과의 교류가 절실했고 선진문물 수용이 절실해서

국가 사상도 이런 선진문물 수용이 적극적인 사상으로 발전했고

일본은 그렇게 외국에서 온 문화 , 기술자들을 극진히 우대하는 풍습이 이때부터

오늘날까지 발전했으며 

외국에서 온 스승을 극진히 대접하는 문화가 있어

백제 왕인 박사 , 조선 도공 이삼평 , 조선 통신사

미국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 , 미국 에드워드 데밍

 

등 외국 선진문물 제공자들을 신처럼 극진히 모셨던 전통이 있는 나라고

그 시작이 왕인 박사였으며

오늘날에도 왕인 박사는 고대 일본에 백제문화 ,

선진 한반도 문물을 전한 대표적 지식인이었습니다

 

<일본기록>태자는 그를 (왕인박사 스승으로 모시고

전적(여러 사상이 적힌 책) 을 배웠는데

(왕인은)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왕인은 일개 개인 인물이기도 했지만

일본인들에게는 당시 일본에 건너와 여러 학문과 기술을 아낌없이 알려준

수많은 백제 기술자 집단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해서

일본에서 왕인을 존경한다는 뜻은 곧 백제 지식인 , 기술자들을 존경한다는

감사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며

 

왕인 박사의 흔적은 일본 전역에서 쉽게 찾을 수 있으며

왕인 신사 , 왕인천만궁도 있고

천만궁은 학문의 신을 모시는 신사라는 뜻이라 합니다

왕인은 일본인들에게 학문의 신 , 학문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고

당시 백왜관계 , 한일관계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왕인 연구자 요시토메가즈오 씨>

왕인박사는 4세기 백제로부터 공자의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고

왜국의 아스카문화를 꽃피웠다

이로서 일본에서 처음으로 한중일 3개국이 조우하게 된 것이다

왕인 박사를 심볼로 동아시아의 선린우호 , 민간교류를 계속해나가야 할 것이다

 

일본 왕인 신사 , 오사카 다카이시 신사

 

백제를 동경한 일본 ,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God knows 중에서..

 

[요서경략설]

이외에도 근초고왕은

중국에도 진출해 중국 요서지역을 점령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완전히 허구로 볼 수가 없는게

백제가 자리잡은 서울특별시 유역 , 한강유역 서쪽이 곧바로

산동반도와 배타고 조금만 올라가면 요서지역이라

분명 백제인들이 이전부터 많이 해상루트로 진출한 영역이었을테고

해상강국인 백제 특성상 충분히 해안가 루트를 기점으로

중국에 거점을 만들고 실제로 군사를 보내 영유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고

간간히 있는 기록이라

백제의 요서경략설 , 요서 진출설로 이야기 되고 있고

한국 교과서도 근초고왕때 백제가 왜와 요서로 뻗어나갔다

정도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백제 요서 경략설

 

[근구수왕]

근초고왕이 사망하자 근초고왕의 뒤를 이어

근초고왕의 아들 부여구수가 왕위를 이어서

백제 14대왕 근구수왕이 되었고

근구수왕은 태자시절부터 정복왕이었던 아버지 근초고왕을 따라

여러 전쟁에 참여한 백제판 흑태자였던 인물입니다

 

예전 근구수왕이 태자였던 시절

고구려 고국원왕이 백제를 침공하자

근초고왕은 태자를 보내서 고국원왕을 방어케 했는데

 

고구려인 사기는 원래 백제인이었는데

실수로 왕이 타는 말의 발굽을 상처나게 해서

벌을 받을까 두려워 고구려로 도망친 인물인데

그가 이때 돌아와서 태자에게

 

<사기>고구려 군사가 비록 수는 많으나

모두 가짜 군사로서 수를 채운 것에 불과합니다

 

그중 제일 강한 부대는 붉은 깃발을 든 부대입니다

만일 그 부대를 먼저 공략하면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허물어질 것입니다

 

이에 태자가 이 말을 따라

진격하여 크게 이기고 도망치는 군사를 추격하여

수곡성 서북에 도착했고

이때 장수 막고해가

 

<막고해>일찍이 도가의 말에

 

'만족할 줄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고 하였습니다

지금 얻은 바도 많은데

어찌 더 많은 것을 바라겠습니까 ?

 

간하자

태자는 이 말을 옳게 여겨

추격을 중단하고 그곳에 돌을 쌓아 표적을 만들고

좌우를 돌아보며

 

<태자>오늘 이후로 누가 다시 이곳에 올 수 있는가 ?

 

하고 말했습니다

 

근초고왕이 사망하자 태자가 왕위를이어

백제 14대왕 근구수왕이 되었고

근구수왕은 태자시절부터 전쟁에서 활약한 임금이었고

왕이 되고서도 3만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 평양성을 침공하기도 합니다

 

[불교를 전파한 침류왕과 마라난타]

근구수왕이 사망하자

근구수왕의 맏아들 부여침류가 왕위를 이어

백제 15대왕 침류왕이 되었고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진나라에서 오자

침류왕은 궁중으로 그를 맞아들여 우대하고 공경했고

백제에 불교가 이때부터 시작됬습니다

 

 

침류왕은 한산에 절을 창건하고

승려 10명에게 도첩(승려자격증) 을 주었습니다

 

침류왕은 불교수용이라는 중요 업적으로 이야기되는 왕이고

근초고왕~침류왕에 이르는 백제 전성기 명군라인은

어느새 고구려 광개토대왕이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인해

와장창 깨지게 되었고 점차 한성백제 500년 영광의 시대가 끝나가게 됩니다

 

<라봉봉>대부분 사람들이 전성기 왕에 주목하는게

우리나 세계 역사의 현실이긴 하지만

전성기 왕이 갑자기 짜잔 하고 어디서 떨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저는 항상 역사를 볼때

전성기왕 바로 이전 왕을 주의깊게 보는 편인데

 

고구려 광개토대왕 전에는 미천왕과 소수림왕 ,

신라 진흥왕 전에는 지증왕과 법흥왕이 있듯이

백제 근초고왕 전에는 비류왕이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비류왕은 굳이 태자를 어리다는 이유로 제쳐두고

신하와 백성들이 추대해 왕위에 올린 이례적인 인물이고

태종 이방원이 원칙을 깨서라도 나라의 운명을

첫째 세자가 아니라 셋째 왕자 이도에게 걸었던것 처럼

그만큼 백제 신하와 백성들도 정통성 , 원칙을 깨고서라도

비류왕에게 백제의 운명을 걸었을 정도로 비류왕이 인물이라 할 수 있고

 

너그럽고 인자하며 백성들을 아끼고 민간에서 명성이 높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백성 구휼 외엔 별다른 기록은 없지만 비류왕 재위 40년동안

아들 근초고왕이 사방으로 백제의 국력을 뻗을 수 있게한

내실이 차곡차곡 다져지고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근초고왕대부터 본격적인 인연을 맺은 일본은 특히

해양+문화예술대국 백제가 만들어낸

최고의 걸작품이었던 나라라 생각되고

 

백제 왕인박사가 하나하나 가갸거겨 (아이우에오 ?) 하며 하나하나 글자 하나씩 알려준

왜는 특히 훗날 일본이 되서 아시아에서 가장빨리 서구화 , 근대화에 성공하며

서양어 , 서양학문을 죄다 일본식 한자로 번역하며

오늘날 현대 아시아의 학문한자는 대부분

일본식 번역으로 보는게 현실이고 이게 일본인들의 숨겨진 진짜 자존심중 하나이고

 

(철학 과학 민주주의 대통령 이런게 다 일본인들이 고안한 일본식 한자임)

 

일본은 전세계에서 노벨상 , 필즈상을 싹쓸이 하며

세계에서 학문으로 우뚝서는 선진국중의 선진국이 되는데

그런 강대국 일본이 한국 왕인 박사를 학문의 시조로 섬긴 다는게

충분히 백제가 대단한 나라였음을 알 수 있는 점이고

 

(정작 우리는 김대중 대통령 '평화상' 빼고 한개도 없음 ㅠㅠ)

 

일본 만화 바키를 보면

맨날 미국 대통령들이 당선되면 세계서열 1위 설정인 한마 유지로한테 찾아가서

호텔에서 업드려 충성을 맹세하는 그런 막장 설정이 있는데

세계 최선진국 일본인들이 뜬금없이 한국에 와서 조상묘를 찾거나

일본내 백제 , 한국인 조상들을 기린다거나 하는게

참 사이비 종교 수장이 된 느낌 같달까

막 엄청 강해지는 느낌이고 국뽕이 차오르는 느낌입니다

 

고구려가 대놓고 국뽕이 있다면

백제는 (일본 덕분에) 은근한 국뽕이 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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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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