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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멸망기 인물들>

[고구려 마지막 불꽃]

[갓쉰동전]

[당나라에 간 갓쉰동]

[연개소문의 중국침공 주장]

[고구려 호족들의 견제]

[연개소문을 존경한 고구려 군인]

[영류왕의 어전회의]

[연개소문의 정변]

[신크말치 대막리지 태대대로]

[칼 다섯자루와 인간발판]

[연개소문의 꿈]

[당태종의 야망]

[연개소문의 계책]

[안시성주 양만춘]

[역적과 혁명가]

[연남생 연남산 연남건 삼형제]

[고구려의 멸망]

[연헌성]

<라봉봉>

 

[고구려 마지막 불꽃]

고구려 마지막 불꽃이자

고구려에서 마지막으로 동아시아를 호령했던 연개소문 ,

그는 영류왕을 시해한 반역자임과 동시에

삼국통일 주인공 신라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황제 중 한명인 당 태종 이세민을 떨게했던 인물이고

영류왕을 시해했지만 그렇다고 본인이 왕이 된건 아니고

죽을때까지 군부정권을 이끌고 카리스마로 고구려를 통치했던 인물이라

고구려인들의 마지막 자주성과 기상을 상징하는 이중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연개소문 , KBS2 특별기획 드라마 칼과 꽃(2013) Sword And Flower

 

연개소문은 이후에도 수많은 글쓰는 사람들의 단골 소재가 되었고

반역자 , 호걸과 영웅으로 동시에 이야기 되는 인물입니다

 

중국 경극속 연개소문(오른쪽) , 대륙을 떨게한 고구려 마지막 불꽃

 

연개소문 그는 누구인가 ,

삼국사기에도 따로 개소문 열전이 있긴 하지만

신채호 조선상고사에 소개된 연개소문의 일대기를 다룬

한국 고소설 혹은 중국소설 중 갓쉰동전(갓=개 , 쉰=소문 이라함)

에 더 상세하고 길게 적혀있습니다

 

<신채호>연개소문은

 

1.고구려 9백 년 이래로 전통의 호족공화(豪族共和 호족 , 귀족정치)의

구제도를 타파하여 정권을 통일하였고 ,

 

2.장수왕 이래 철석같이 굳어 온

서수남진(西守南進 서쪽을 수비하고 남쪽으로 진출) 정책을 변경하여

남수서진(南守西進 남쪽을 수비하고 서쪽으로 진출)의 정책을 세웠고 ,

그래서 국왕 이하 대신 호족 수백 명을 죽여 자기의 독무대로 만들고 ,

서국 제왕 당태종을 격파하여 지나 대륙의 침략을 시도했는데

그 선악 현부(착하고 악하고 인자하고 아니함)는 별문제로 하고

아무튼 당시에 고구려뿐 아니라

동방아시아에 전쟁사 중에서 유일한 중심 인물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연개소문의 사실은

겨우 김유신전 가운데 

'개금(연개소문) 김춘추를 객관에 머무르게 했다.'

  마디가 있을 뿐이고 , 

 외에는 오로지

 ·   당서와 자치통감 등 지나사(지나=중국 , 중국사)를 뽑아 기록한 것뿐인데 , 

 지나사는  연개소문을 상대해서 혈투하던

당태종과  신하들의 입과 붓에서 나온 것을 재료로  것이기 때문에

믿을 가치가 매우 적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서부의 세족이요 , 

서부의 명칭이 연나이므로 , 

성이 연인데 , 

삼국사기에 성을 천씨라  것은

당나라 사람이  고조의 이름 연을 피하여

천으로 대신한 것을 그대로 가져다 기록한 것이다.

...연개소문이 지나를 침략하려 하여

 국정을 탐지하기 위해   서유(서방 여행) 것은 사실인 듯하다. 

중국에 전하는 갓쉰동전

 

(갓쉰동=개소문을 중국어로 카이쑤원이라 하는것을

거꾸로 한국어로 음사하여 개=갓 , 소문=쉰으로 읽은 것이라고

신채호가 주장함)

 

 이것과 같은 소설이니  대강이 다음과 같다.

 

다음부터는 갓쉰동전이라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한국의 고소설과

단재 신채호가 남긴 조선상고사 기록입니다

 

[갓쉰동전]

연국해라는 한 재상이 있었는데

나이 50이 되도록 슬하에 자녀가 없어서

하늘에 점지를 기도하다 한 옥동자를 낳아

이름을 갓쉰동이라 했고

갓 쉰살에 낳았다는 뜻이었습니다

 

자라마며 용모가 비범하고 재주가 월등해

연국해가 손 안의 구슬같이 사랑하여 늘 곁에 떠나지 못하게 했고

 

갓쉰동 , SBS 대하사극 연개소문(2006)

 

갓쉰동이 7살 되던해 문앞에서 장난치며 노는데

한 도사가 지나가며

 

<도사>아깝다 , 아깝다

 

하고 가서

연국해가 그 말을 듣고 도사를 뒤쫓아가 물으니 도사는

짐짓 사양하다 말하길

 

<도사>이 아이가 자라면 부귀와 공명이 무궁할 것이지마는

타고난 수명이 짧아서 그때를 기다리지 못할 것이오

 

그래서 연국해는 그 액을 면할 방법이 없냐 묻자 도사는

 

<도사>십오년 동안 이 아이를 내버려 부모와 서로 만나지 못하면

그 액을 면할 것이오

 

결국 연국해는 차마 못할일이었지만 도사의 말을 믿고

아들의 장래를 위해

하인을 시켜서 갓쉰동이를 멀리멀리 산도 설고 물도 선

시골 마을에 버리게 했고

다만 훗날 도로 찾을 표적을 만들려 먹실로 등에다가

'갓쉰동' 이란 석 자를 새겨서 보냈습니다

 

 

부모님과의 눈물의 이별

 

갓쉰동은 원주 학성동에 버려졌고

동네 어른 유씨가 그날 밤 꿈에 황룡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새벽에 앞내에 나가보니

한 준수한 어린아이가 있으므로 데려다 길렀는데

등에 새긴 글자를 보고 이름을 그대로

갓쉰동 이라 불렀습니다

 

갓쉰동은 자라면서 얼굴 모양이 빼어나고 용모가 영특하나

그 내력을 알 수 없어 온 집안이 천한 사람으로 대접했고

유씨 어른은  그를 사랑하긴 했지만 남의 시비를 싫어해

그 신분을 높여주지 못하고 다만 글을 약간 가르쳐

자기집 종으로 부렸습니다

 

하루는 갓쉰동이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는데

한 노인이 앉아서 퉁소를 불고 있었고

그 노인은 갓쉰동을 보더니

 

<노인>네가 갓쉰동이가 아니냐 ?

네가 오늘에 배우지 아니하면

장래 어찌 큰 공을 세우겠느냐 ?

 

하며 학문의 필요성을 이야기해줬고

갓쉰동은 그 이야기에 취해 해지는지도 모르고 듣다가

어두워지자 노인이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오라하며 사라졌고

 

그제서야 갓쉰동은 나무베러와서 빈 지게를 두고

주인의 꾸중을 어찌하나 하고 다시 산에서 내려오니

누군가 지게안에 나무를 베어 가득 채워놓았습니다

 

한국 민속신앙속 산신령

 

갓쉰동이 다음날부터 나무하러 가면

그 노인이 계속해서 검술 , 병서 , 천문 ,지리를 가르쳐주었고

내려오면 반드시 그 지게에 나무가 채워있어서 돌아올 뿐이었습니다

 

유씨어른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 두었는데

문희 , 경희 , 영희였고 세 사람다 뛰어난 미인인데

영희가 더욱 뛰어났습니다

 

갓쉰동이 15살 될때

유씨어른은 갓쉰동을 불러 세 아가씨를 가마에 태워

꽃구경을 가라했고 

갓쉰동은 그 말을 따라 가마를 가지고 문희 방앞에 가서

 

<갓쉰동>아가씨 , 가마를 대령했습니다

 

하자 문희가

 

<문희>아이고 맨 땅을 어떻게 디디겠느냐 ?

갓쉰동아 , 네가 거기 엎드려라

 

하고는 갓쉰동의 등을 밟고 내려와 가마에 들어갔습니다

 

 

절하는 고구려 남녀 벼화

 

경희를 태울때 경희도 그랬기에

갓쉰동이 분노해서 한 주먹으로 때려주고 싶었지만

유씨어른의 은혜를 생각하며 꾹 참고

영희의 방에 가서는

 

<갓쉰동>이 년도 그 년의 동생이니

별다르겠느냐

 

하는 생각에

 

<갓쉰동>가마를 대령하였습니다

 

한 마디 하고는 미리 뜰에 엎드렸는데

영희가 문에서 나와보고는 놀라서

 

<영희>갓쉰동이 , 이것이 무슨 짓이야

 

하였고

 

 

갓쉰동은

 

<갓쉰동>갓쉰동이의 등이야

하느님이 아가씨를 위해 만든 것이 아닙니까 ?

이 등으로 나무를 져다가 아가씨들의 방을 덮히고

이 등으로 쌀을 실어다가 아가씨들의 배를 불리고 ,

아가씨들이 앉고 싶으면 갓쉰둥이의 등을 자리로 쓰시고 ,

아가씨들이 걷고 싶으면 갓쉰동이의 등을 다리로 삼으시고...

 

말이 채 끝나지 않은채 영희가 달려들어

 

<영희>아서라 , 이게 무슨 짓이냐 ?

사람의 발로 사람의 등을 밟는 법이 어디 있느냐 ?

 

하고 갓쉰동을 일으켰습니다

 

갓쉰동은 일어나 영희의 꽃같은 얼굴 , 관옥 같은 살결과

정다운 말소리에 마음을 잡지 못하며 ,

 

<갓쉰동>나도 어렴풋이 어릴 때의 일을 생각하면

너와 결혼할 만한 집안 인데

 

라고 말하며 눈물이 글썽해졌습니다

 

영희도 갓쉰동이의 용모가 범상치 아니하고 음성이 우렁참을 보고

이같은 남자가 어찌하여 남의 집 종이 되었을까 생각하고

눈물이 흐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뒤로부터 갓쉰동이는 영희를 생각하고

영희는 갓쉰동이를 사랑하여

 사람 사이의 정의가 점점 두터워졌고 

 

갓쉰동이 

 

<갓쉰동>내가 일곱 살때 집을 떠나던 일을 어렴풋이 기억하는데 , 

아마 우리 부모가 도사의 말을 믿고 나를버려 훗날다시 찾으려 한것 같다. 

나도 집에 돌아가면 귀한  아들이니

 나하고 결혼하자

 

라고 하니 영희는

 

<영희>나는 귀인의 아내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사나이의 아내가 되기를 바란다

만일 네가 사나이가 아닐진대 귀한  아들이라도  남편이 못될 것이고 , 

네가 사내라면 종이라도 나는  아니면 아내가 되지 않겠다.

그러니 너는  회포를 말해보아라

 

했고 갓쉰동이

 

<갓쉰동>달딸이(당나라)는  우리 나라를 침범하여 백성을 괴롭히는데

우리는 다만 침입하는 달딸이를 물리칠 뿐이요

달딸국에 쳐들어가지 못했으니

나는 이것이 분하여  달딸이의 땅을   쳐서

 년의 태평을 이룩하려고 생각 한다.

 

하고 요즈음 나무하러 가서 어떤 선관(신선계의 관리)에게

날마다 검술 · 병서 · 천문 · 지리 등을 배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영희는 크게 기뻐하며

 

<영희>그렇지만 적국을 치자면 적국의 형편을  알아야  것인데

네가 친히 달딸국에 들어가  산천을 두루 돌아다녀서

국정을 살펴보아 훗날 성공할 터를 닦아가지고 오면

나는 너의 아내가 못되면 종이 되어서라도

 앞에서  년을 모시려 한다

 

 했습니다 

갓쉰동이 쾌히 허락하고 유씨어른 집에서 달아났는데

영희는 제가 가진 금가락지와 은그릇 등을 주어 노자를 만들게 했습니다

(아빠 미안ㅋ)

 

[당나라에 간 갓쉰동]

갓쉰동이 달딸국(당나라)에 들어 가서는

달딸의 말도 배우고 달딸의 풍속도 익히고 , 

  내정을 알기 위해 이름을 돌쇠라 고치고

달딸국왕의 가노(집노비) 되었는데

행동이 영리하므로 왕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달딸국왕의 둘째 아들이 영매하고  사람을  알아보아

갓쉰동이는 비상한 영걸(영웅호걸)이요 또한 달딸의 종자가 아니니

죽여서  후환을 없애자고  아비에게 고해서 철책 안에 잡아가두고 , 

음식을 끊어서 굶겨 죽이려고 했습니다

 

(참고로 달딸국은 당나라를 비유한 나라기에

달딸국왕의 둘째왕자는 곧

당고조의 둘째아들 당태종 이세민임ㅋㅋ)

 

갓쉰동이는  자기의 몸이 위태로움을 깨달았으나

계책이 없어 답답히 앉았다가

자기 곁에 매를 길들이려고 잡아넣은 새장을 보고 와락 달려들어 새장을 부수고 , 

 안에 있는 매를  날려보냈습니다

 

이때 마침 달딸왕 부자는  사냥을 나가고

달딸왕의 공주가 그를 지키고 있다가 놀라

 

<달딸국 공주>네가  매를 놓아 보내느냐 ? 

더욱 우리 아버지와 오빠에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냐 ?

 

했고 

갓쉰동은 

 

<갓쉰동>내가  갇힌 것을 답답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갇힌 매를 보니

 매가 답답해  것을 생각하였다. 

나를 풀어주지 않는 사람을 원망하면서

 곁에 갇혀 있는 매를 풀어 보내지 못한다면

매가 얼마나 나를 원망하랴. 

차라려 매를 위해 죽을지언정 매의 원망을 받지 않으리라

하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 갇혀 있는 매를 놓아주었다

 

공주가 그의 말을 듣고 측은히 여겨

 

<달딸국 공주>내가 우리 둘째 오라버니에게 들으니

네가 우리 달딸을 멸망시키려고 생긴 사람이라 하던데

네가 어찌하여 달딸을 망치려고 하느냐 ?

 

라고 했고 갓쉰동은

 

<갓쉰동>하늘이 나를 달딸을 망치려고 내셨다면

너의 오라버니가 나를 죽이려고 해도 죽지 않을 것이고 , 

 나를 죽일지라도  같은 사람이  나올 것이다.

너의 오라버니에게 이렇게 잡혀 죽게  몸이

어찌 달딸을 멸망 시킨단 말이냐 ? 

공주가 만일 나를 풀어주면

나는  매와 같이 산으로 물로 훨훨 날아다니면서

 

나무아미타불을 불러 공주를 사랑하고 보호해달라고 외울 뿐이요 , 

다른 생각이 없겠다.

 

공주가 더욱 측은히 여기는 빛이 있더니

 

<달딸국 공주>오냐 ,  아무리 무능한 여자인들 우리 아버지의 딸이요

우리 오라버니의 동생이니 어찌  하나를 살려주지 못하겠느냐 ? 

얼마 안가 우리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돌아오시거든

너의 무죄함을 아뢰어 너를 돌아가게  것이다.

 

라고 했고 갓쉰동은 공주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이며

 

<갓쉰동>공주는 애쓰지 말라. 

돌쇠   죽는 것이 무슨 큰일인가

나는 들으니 부처님은 사람을 구할 때에

아버지와 오라버니에게 고한 일이 없다던데..

 

공주가  말에 얼굴빛이 더욱 변하더니

내전 불당에 들어가 기도하고 열쇠로 철책의 문을 열어

갓쉰동이를 내보냈습니다

공주가 손목을 잡고

 

<달딸국 공주>내가 너를 처음 보았지마는

너를 보내는   마음도 따라간다. 

 몸은 매같이 휠훨 날아서 가더라도

 마음일랑 나를 주고 가거라

 

<갓쉰동>공주가 나를 잊을지언정 내가 어찌 공주를 잊겠는가 

 

하고는 갈길이 바빠 걸음아  살려라

 주먹을 불끈 쥐고 도망하여

성문을 나와 풀뿌리를 캐먹으면서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 달딸의 국경을 벗어나 귀국했습니다

달딸의 둘째왕자가 돌아와

공주가 갓쉰동이를 사사로이 놓아준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칼을 빼서 공주의 목을 베었습니다

 

당나라에서 탈출한 갓쉰동은 다시 고구려로 귀국해서

책문을 지어 과거에 급제하고 영희와 결혼하고 달딸을 토평했다 하고

 

(혹은 출세는 했는데 영희와는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고도 함)

 

이 소설에서 신채호 선생은

연개소문이 당나라를 정탐한 전설은 하나의 사실로 믿는다 했습니다

 

갓쉰동전은 일단 역사사실이라기보다는 옛날 역사고소설이고

현재 전해지진 않지만

신채호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갓쉰동전은 언문(한글) 소설이었고

우리글로 쓰여져 한국 어염집(평민) 부녀자들이 읽는 한국 고소설이었다 합니다

 

하여튼 이 한국 고소설 갓쉰동전에서

신채호 선생님은 소설이지만 연개소문이

중국을 정탐한 것은 사실로 보았고

이제 소설이야기는 대충 그만하고

다시 역사이야기로 가서

연개소문이 중국으로부터 귀국한 것은 대게 616년 경이었다 합니다

 

[연개소문의 중국침공 주장]

이런 상황에서 당시 당나라는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당고조의 둘째아들 이세민이 스스로 서서 연호를 정관이라 하고

15년간 정치와 전쟁에 애쓰고 이름난 신하와 어진 재상을 등용하고

내치를 다져 정관의 치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열었고

 

중국의 황금기 당나라

 

반대로 당시 고구려 상황으로는

고구려 영양왕의 아우 고건무는 을지문덕 장군과 함께

수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두 전쟁영웅이 됬지만 정치의견을 달리해

건무는 중국에 화의하자하고

을지문덕은 중국을 치자했는데

 

화의를 주장하는 건무가 영양왕 뒤를 이어 왕위를 이어

영류왕이 됬고

당시 수나라 당나라가 교체하며 중국이 혼란하던 시기

을지문덕 일파의 여러 신하들이 그 기회를 타서

중국쪽으로 강토를 늘리자 주장했지만

 

영류왕은 더더욱 중국과 수비와 화의에만 치중하며 듣지 않고

장수왕의 남진정책을 다시 써서 자주 군사를 보내

신라와 백제를 쳤습니다

 

연개소문은 이를 반대하며

 

<연개소문>고구려에 우환이 될 것은 당이지

신라와 백제가 아닙니다

지난 날에 신라와 백제가 동맹하여 우리나라의 땅을 침노해

빼앗은 일이 있으나 이제는 형편이 이미 변하여

신라와 백제가 서로 원수로 여김이 이미 깊어져서 여망(희망) 없으니 , 

국가에서 남쪽에는 견제책을 써서 신라와 동맹하여 백제를 막거나

백제와 동맹하여 신라를 막거나 , 

 계책 중에서 하나를 쓰면  나라가 서로 싸우는 통에

우리 나라는 남쪽의 걱정이 없게  것이니

 틈을 타서 당과 결전하여 다투는 것이 옳습니다

 

서쪽 나라는 우리 나라와 언제나 양립하지 못할 나라이니

이것은 지나간 일에 경험하여 보아도 분명한 것이므로

국가에서 왕년에 몇백만 수나라 군사를 격파했을 

 대군을 내어 토벌하였더라면

 평정이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이 쉬웠을 것인데 ,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를 잃었음이

이미 뜻있는 이의 통분히 여기는 바요 , 

오늘날도  늦기는 하였으나 저네의 형제가 화목하지 아니하여

건성은 세민을 죽이려 하고

세민은 건성을 죽이려 하는데 , 

이연(당고조 , 건성과 세민의 아버지) 혼암(어두움)하여

 사람 사이에서 어찌하지 못하니

이러한 판에 만일 우리가 대군으로 저네를 치면

건성이 모반하여 우리에게 붙거나 , 

세민이 모반하여 우리에게 붙을 것이요 , 

설혹 그렇지 못할지라도 저네가 수의 말년에 우리에게 크게 패하고 , 

 여러  난리가 뒤를 이어 백성의 힘이 아직 회복되지 못하였으므로

반드시 전쟁을  여력이 없을 것이니

이것도 비상한 좋은 기회이거니와

만일 저네  형제   사람이 패해 죽고

 사람이 전권(전부 권력 가짐)하여 세력이 통일된 뒤에

폐정(잘못된 정치) 고치고 군제를 바로잡아 우리 나라를 침범하면

땅의 크기와 백성의 많기가  저네에게 미치지 못하는데 ,

고구려가 무엇으로 저네에게 대항할 것입니까 ? 

국가 흥망의 기틀이 여기에 있는데

모든 신하와 장수들이 이를 아는 이가 없으니

어찌 한심하지 아니합니까 ?

 

하며 극력 당의 정벌을 주장하였으나

영류왕과 다른 신하들이 이를 듣지 아니했습니다

 

결국 연개소문의 주장은 현실로 되서

당태종 이세민은 아버지의 황제 자리를 빼앗고

신라와 백제에 사신을 보내 두 나라가 전쟁하지 말라 권고하고

곧 을지문덕의 전승 기념관을 당나라와 고구려 두 나라 평화에 장애가 된다며

허물 것을 요구해왔고

영류왕은 뒤늦게 당나라의 침입이 있을 줄 알고

천리장성을 쌓게 했지만

쌓는 일이 너무 고되어 남녀가 농사와 누에치기를 못해

고구려 국력이 피폐해졌고

고구려에게 암운이 드리워졌습니다

 

 

[고구려 호족들의 견제]

646년 서부 살이 연태조가 죽으니

아들 연개소문이 살이의 직위를 물려받았고

 

연개소문이 늘 격렬하게 당나라 치기를 주장하자

영류왕과 모든 대신 , 호족들은 다 연개소문이

평화를 파괴할 인물이라 위험시하며

그가 아버지 직위 물려받는 것을 허락치 아니했고

 

그러나 연개소문은 자신의 소신이 아주 굳어서

 

'내가 아니면 고구려를 구할 사람이 없다'

 

자처하는 인물임에도

어릴적 타향과 외국에서 두 번이나 종노릇 한 경력이 있어

굽혀야 할때 굽힐 줄을 아는 의지가 굳은 인물이었고

직위를 물려받지 못하자 네 부의 살이와 호족들을 찾아다니며

 

<연개소문>개소문이 불초하나

여러 대인들께서  죄를 가하지 않으시고

다만 직위 계승만 못하게 하시니 이것만도  은혜가 지극하여 , 

오늘부터 개소문도 힘써 회개하여 여러 대인들의 교훈을 좇으려 합니다. 

바라컨대 여러 대인들께서는 개소문으로 하여금 직위를 계승케 하셨다가

불초한 일이 있으면 직위를 도로 빼앗으시기 바랍니다

 

하자 여러 대인들이 그의 말을 애처롭게 여겨

서부 살이 직을 맡아보게 했고

 

 

그러다 연개소문은 오히려 서울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며

북쪽으로 쫓아내 북부여 장성쌓는 일을 감독케 했고

연개소문이 서부 군사를 거느리고 출발할 날짜까지 정했습니다

 

[연개소문을 존경한 고구려 군인]

이전부터 당태종 이세민은 고구려 내정을 탐지하려고

자주 밀사를 보냈는데

당나라인(중국인) 들은 번번이 고구려 순라병(감시병) 들에게 발각되므로

남해 가운데 있는 삼불제국의 왕에게 뇌물을 주고

고구려 군사 수와 배치와 군용지리 , 내정을 탐정해주길 부탁했고

삼불제국은 남양의 조그만한 나라로

옛날부터 고구려와 국제무역을 하고 조공을 바쳐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기에

삼불제국 왕은 쾌히 승낙하고 고구려에 조공한다 일컫고

정탐할 사신과 사선을 보냈고

 

사신은 다시 정탐하고 귀국한다 하고는 바다로 나가 당으로 향했는데

그러다 바다 한가운데서 고구려 해라장(해상경찰장) 에게 잡혔고

고구려 해라장은 연개소문을 하늘신 같이 숭배하던 사람이었기에

늘 조정이 연개소문의 계책을 써서

당을 치지 아니함을 분개하다가

이제 당의 밀정 삼불제국 사신을 붙잡으니

그 비밀문서를 빼앗아 고구려 조정에 올리고

밀정은 옥에 가두려다가

 

<고구려 해라장>아서라 ,

적을 보고도 치지 못하는 나라에

무슨 조정이 있단 말이냐 ?

 

하고는 문서는 모두 바다속에 던져 버리고

사신은 먹으로 얼굴에다가 다음과 같이 글자를 새겼습니다

 

<문신 글자>해동삼불제의 얼굴에 자자(문신) 하여

내 어린아이 이세민에게 이른다

금년(올해)에 만약 조공이 오지 않으면

명년(내년)에 마땅히 문죄하는 군사를 일으키리라

 

라는 한시 한편을 새겼고

다시

 

<문신 글자>고구려 태대대로 개소문의 군사 아무개 씀

 

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얼굴은 좁고 글자수는 많아 먹의 흔적이 흐려

알아볼 수 없다하여

다시 그것을 종이에 배껴서 그 사신에게 주어

당나라로 보냈고

 

 

당태종은 이것을 보고 크게 노하여

고구려를 침공하려 하니 모시던 신하가 간했습니다

 

<당나라 신하>대대로는 연개소문이 아니니

이제 사신의 얼굴에 자자한 연개소문이란 어떤 사람인지도 알 수 없고

하물며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연개소문의 부하군사의 죄로

맹약을 깨뜨리고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먼저 사신을 보내서 밀서로 왕에게 알아보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당태종이 그의 말을 좇아 사실의 진위를 알려달라는 밀서를 보냈고 

영류왕은 밀서를 보고 군사를 보내 해라장을 잡아다가 문초했습니다

 

해라장이 강개(원통)하여 자백하고 조금도 기탄(어렵게 생각)하지 아니했습니다

 

[영류왕의 어전회의]

영류왕이 크게 노하여 서부살이 연개소문 한 사람만 빼놓고 

다른 여러 살이와 대대로 울절 등 여러 대신을 밤에 비밀히 소집하였는데

해라장이 당의 임금을 모욕한 것은 오히려 조그만 일이거니와 

그 끝에 태대대로도 아닌 연개소문을 태대대로라 쓴 것과 

또 허다한 대신들 가운데 다른 대신을 말하지 않고 홀로 연개소문을 들어 

그의 휘하군사로 일컬은 것을 보면 

저들 연개소문을 따르는 자들이 그를 추대하는 것이 분명하고

 

(연개소문은 카리스마 때문에

집권전부터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들임)

 

또한 연개소문이 항상 당나라 칠 것을 선동해서 조정을 반대하여 인심을 사니

이제 그를 죽이지 아니하면 후환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으니 

벼슬을 박탈하고 사형에 처함이 옳다고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일치했습니다

 

그러나 전일 같으면 한 번 명령하여 군사 한 사람을 보내서 연개소문을 잡아오면 되겠지만 

지금은 연개소문이 서부 살이가 되어 많은 군사를 장악하고 있으니 

그 억센 천성이 체포를 받지 않고 열에 아흡은 반항할 것이 틀림없으니

조서로 연개 소문을 잡으려면 한바탕 국내가 소란해질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연개소문이 장성의 축조 역사 감독의 명을 받아 떠날 날이 멀지 아니 하였으므로 

오래지 않아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드리러 올 것이니

그때에 그의 모반한 죄를 선포하고 잡으면 

한 장사의 힘으로도 넉넉히 그를 잡을 수 있으리라 하여 

여러 대신들은 왕의 앞에서 물러나와 비밀히 그날이 오기만 기다렸습니다

 

<신채호>그러나 천하의 일은 사람의 예상대로만 되지 않는다

아침 저녁 시시각각으로 의외로 돌변하는 것이다

어전회의의 비밀이 어떻게 누설 되었는지 연개소문이 알았다·

 

[연개소문의 정변]

어전회의때 자신을 암살하려 영류왕이 결정했다는 것을 안 연개소문은

심복장사(심복=부하 , 장사=힘센 사람)들과 비밀히 모의하고 

선수를 칠 계교를 세워서 떠나기 전 어느 날 , 

평양성 남쪽에서 크게 열병식을 거행한다고 하고 왕과 각 대신들의 참석을 요청했습니다

 

연개소문은 각 부에도 알렸고 

각 부의 살이와 대신들은 가기 싫었지만 

안가면 연개소문의 의심을 사서 큰일에 불리하다 하여 일제히 참석하기로 하고 

오직 왕은 존엄을 지켜 시위병을 거느리고 그대로 왕궁에 있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연개소문이 비록 딴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하더라도 

왕의 위엄에 눌려 감히 어찌하지 못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날이 되자 모든 대신들이 연개소문의 열병식장에 이르러 

유량히 울려퍼지는 군악 아래 인도되어 군막 안에 들어 자리에 앉았고

술이 두어 순배 돌았을 때 연개소문은 갑자기 

 

<연개소문>반적(반란한 적)을 잡아라

 

하고 외쳤고 

주위에 대령하였던 장사들이 번개같이 달려들어 

칼 · 도끼 · 몽둥이로 일제히 외치니 , 

참석한 대신들도 다 백전노장이었지마는 겹겹이 포위되었고 

게다가 수효가 너무도 적어 벗어날 도리가 없었습니다

 

 

순식간에 대신과 호족 수백 명이 한꺼번에 어육이되고

온 식장이 피로 물들었고

이에 연개소문이 부하 장사를 거느라고 왕의 긴급 명령이 있어 왔다고 일컫고

성문을 지나 대궐문으로 들어갔습니다

 

연개소문은 막아서는 왕궁수비병을 칼로치고 

궁중에 뛰어들어서 영류왕을 죽여 

그 시체를 두 토막 내어 수채(물흐르는 구멍)에 던져버렸습니다

 

연개소문의 영류왕 시해

 

시위병들은 연개소문의 늠름한 위풍과 신속한 행동에 놀라고 질려서 

한 사람도 대항하는 자가 없어 

20년 전 패강 어구에서 수나라 장수 내호아의 수십만 대군을 일격에 섬멸하여 

천하에 이름이 진동하던 영류왕이 뜬금없이 무참히도 연개소문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신크말치 대막리지 태대대로]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죽이고 

곧 왕의 조카 보장을 맞아들여 대왕을 삼고 

자기는 '신크말치' 혹은 '대막리지' 혹은 '태대대로' 라 일컬어 국권을 잡았습니다

 

(대충 기존관직명에 대자나 태자를 붙여 엄청 강하다는 뜻 ,

오늘날 현대인들이 보는 식으로 바꿔보면

대영의정이나 대국무총리 이런 과시용 이름이라 보면 됨)

 

영류왕의 조카 고보장은 그렇게 왕위를 이어

고구려 28대 왕 보장왕이 되었고

고구려 마지막 왕이었기에 이름이 그대로 왕호가 되었습니다

보장은 비록 왕이라 하나 아무런 실권이 없고 , 

연개소문이 실권을 가진 정말 대왕이었습니다

 

연개소문이 된 

'신크말치' 는 곧 태대대로였고

고구려가 처음에 세 재상을 두어

 

‘신가’  ‘말치’  ‘불치’ 라 일컬었는데 

 

이것을 이두자로 

 

‘상가’ ‘대로’ ‘패자’ 라고 썼고

‘신가’ 는 정권과 병권을 다 장악했는데 

그 뒤에 ‘신가’ 가 권력이 지나치게 크다고 하여 

그 이름까지 폐지하고 

‘말치’  ‘크말치’ 라 일컬어 병권은 없이 오직 황을 보좌하고 

백관을 감찰하는 수석대신 일 뿐이었는데 , 

이제 연개소문이 ‘크말치 ’의 위에 ‘신’ 자를 더하여 ‘신크말치’라 일컬어 정권과 병권을 다 맡아보았으며

살이의 세습을 폐지하고 모두 연개소문의 무리로 임명하였으며

4부 살이의 평의제를 폐지하여 

관려의 출척(등용과 삭탈)과 국고의 출납과 선전(선전포고) · 강화(화의) 등 

큰 일을 모두 ‘신크말치’의 전단으로 하고 , 

왕은 옥새만 찍을 뿐이었습니다

 

<신채호>그리하여 연개소문은 고구려 9백 년 동안의 장상 대신들뿐 아니라 

고구려 9백 년 동안의 제왕도 가지지 못한 권력을 쥔 사람이 되었다

 

[칼 다섯자루와 인간발판]

연개소문이 원근을 호령하고 국사를 전제하자

매우 위엄이 있었으며

몸에 칼 다섯을 차고 있어서

좌우 사람들이 감히 쳐다보지 못했고

말에 오르고 내릴 때마다 항상 귀족장군을 땅에 엎드리게 하여

디디는 발판으로 삼았고

 

(고구려 노예 , 서민들 밟고 탄게 아니라

일부로 고구려 귀족들을 밟고 말위에 올라가며

무능력한 지배층으로 일어난 전란으로 피폐해진 고구려 백성들을 통쾌히했고

압도적 권력과 위엄을 과시한듯)

 

 

그가 외출할땐 사람들이 달아나서 구렁텅이라도 피하지 않았습니다

 

[연개소문의 꿈]

한편 당에 대적하여 이를 쳐 없애고 

중국을 고구려의 부용(附庸 : 속국)으로 만들려는 것은 연개소문의 필생의 목적이었습니다 

 

연개소문이 젊을 때 서유(서방 유람 , 중국에 머뭄)한 것은 

물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었거니와 

혁명적 수단을 써서 왕을 죽이고 각 부의 호족을 무찌르고 

정권과 병권을 한 손에 거두어 잡은 것도 또한 이 목적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당은 땅의 크기와 인구의 많기가 다 고구려의 몇 갑절이므로

연개소문은 당나라를 침에 있어서는 

고구려 혼자의 힘으로 하느니보다 여러 나라의 힘으로 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당나라를 없애서 전쟁이 없는 나라를 만들어야 하네 그래서 모든 백성들이 행복하게 잘사는 그런 나라 말이야 , 사극 대조영 중 연개소문 사망신

 

이때에 고구려와 당 이외에 몇몇 나라가 있었으니 

 

첫째 고구려의 동족인 남쪽의 신라 · 백제가 있었고

둘째 고구려의 이족(다른 족)인 

돌궐 (지금의 내몽고) · 설연타 (지금 서부 몽고 ) · 토곡혼(지금의 티베트) 등이 있었습니다

 

삼국시대 말기 동아시아 지도 , 연개소문은 당나라 포위망을 형성하려 했음

 

연개소문은 처음에 영류왕에게 아뢰어 

고구려 · 백제 · 신라 세 나라 가 연합하여 당과 싸우려 하였으나

영류왕이 듣지 아니하였고 , 

김춘추가 고타소랑(김춘추의 딸인데 백제군이 죽임)의 원수를 갚으려고

고구려에 와서 구원을 청하니

연개소문이 김춘추를 자기 집에 머무르게 하고 서로 천하의 대세를 이야기하고 , 

이어 춘추에게

 

<연개소문>사사로운 원수를 잊고 

조선 세 나라가 제휴하여 중국을 칩시다

 

라고 하였으나 김춘추는 한창 백제에 대해 이를 갈고 있는 때였으므로 

또한 듣지 아니했습니다

 

신라 태종 무열왕 김춘추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으니 신라는 이미 당과 동맹하였으므로 

드디어 백제 의자왕과 사신을 통하여 백제가 신라와 싸우면

고구려는 당을 쳐서 당이 신라를 구원하지 못하게 하고 , 

고구려가 당과 싸우면 백제는 신라를 쳐서 신라가 당에 응하지 못하게 하자 하는 

교환 조건으로 동맹을 체결하고 

 

십자동맹

 

연개소문은 또 오족루를 돌궐 등 여러 나라에 보내서

고구려가 당과 싸우게 되면 저들로 하여금 당의 배후를 습격하도록 운동하였으나

이때에 돌궐 등 여러 나라가 이미 당에게 정복되어 세력이 미약해서

겨우 설연타의 진주가한이 이를 허락하는 외에는 감히 응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연개 소문은 탄식하며

 

<연개소문>고구려가 남진책을 굳게 지키다가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이 적지않다.

 

고 했습니다

 

잠깐 연개소문이 혁명을 일으킬때

당태종은 고구려 인심을 위태로이 여기고 의심함을 기회해서

신속히 수군을 내어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고구려 수군에게 패한 요수전쟁이란게 있었는데

당나라 역사관들이 나라의 수치를 숨기는 춘추필법(중국식 기록법)을 사용하여

모호하게 몇구절만의 글을 썼다하나 이것이 안시성 싸움의 시작이자

고구려와 당나라 두 나라 충돌의 처음이었다 합니다

 

고구려와 당은 서로의 강약을 다투는 양립할 수 없는 나라요 , 

연개소문과 당태종은 너 나의 우열을 내기하는 양립할 수 없는 인물인데 , 

이같은 두 인물이 두 나라의 정권을 잡았으니 

두 나라 전쟁의 폭발은 조만간 필연적으로 일어날 사실이었습니다

 

만일 연개소문의 집권이 몇 해만 더 일렀더라면 

당태종이 동침(동쪽 침범 , 고구려 침공) 하기 전에 

이미 연개소문의 서정 (서쪽 정복 , 중국정복) 이 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는데 , 

다만 당태종이 중국을 통일 한 지 30년 , 

또 제왕이 되어 모든 시설을 재주와 지혜롭게 정비한 지 20 년 , 

또 돌궐 · 토곡혼 등의 나라를 정복한 지 l0년이 된 뒤에야 

연개소문은 겨우 혁명을 성공하고 

‘신크말치’ 의 자리에 올랐으므로 당태종이 먼저 침입한 것이었습니다

 

연개소문은 자기가 고구려 내정과 외교의 모든 큰 사건을 다 정리한 뒤에 전쟁을 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굴뚝 같았지마는 

이는 사세가 허락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둘러서 남으로 백제와 동맹을 맺고 

서북으로 설연타  등을 선동하여 여당(동맹)을 만들 뿐이었습니다

 

당태종은 수의 양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인하여 망했음을 알았지만

또한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형세에 있음을 자각했으므로 

연개소문의 내부세력이 아직 완전히 굳어지기 전에 이를 꺾으려고 

서둘러서 군사를 동원한 것이었습니다. 

 

<신채호>이것은 당시 양편의 형세였으니 

이 밖의 저네의 역사의 춘추필법적 기재와 

우리의 역사의 노예 근성적 편집은 거의 믿을 수 없는 망령된 말뿐이다.

 

[당태종의 야망]

당태종의 고구려 침입은 아주 빠른 행동이었지만 

그것은 실제론 거의 20년 동안의 일이었습니다

진나라 · 한나라 이후에 흉노가 쇠하고 , 

위나라 · 진나라(위진남북조 시대) 이후도 

오호(오호십육국 시대)는 

다 중국에 섞여 살게 됬으며 , 

그 밖에 돌궐 · 토곡혼이 가끔 중국의 서북에서 일어났으나 

다 오래지 않아 잔약해지고 , 

오직 고구려만이 동남 · 동북에서 중국에 대치하여 

척발씨의 주와 겨루고 수에 이르러는 양제의 수백만 군사를 전멸시켜서 

위무가 일세를 진동하여 놀라게 하는 동시에 

 

중국에 맞서서 ‘신수두(고구려 전통종교)' 의 교의며 이두자 (한국식 글자)의 시문이며 , 

그 밖에 음악 · 미술 등이 다 

그 고유의 국풍으로 발달하여 

정치상뿐 아니라 엄연한 일대 제국을 형성 하였으므로 , 

당태종이 중국 이외에 또 고구려가 있음을 시기하여 

정관의 치(당태종시대 태평성대를 이르는 말) 20년 동안에 

겉으로는 편안하고 한가롭게 여러 신하들과 도를 닦고 덕을 닦는 길을 강론하였지마는 

그의 머릿속에는 고구려와의 전쟁에 대한 계획이 오락가락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당 태종 이세민

 

그는 고구려를 치려면 먼저 수의 양제가 패한 원인을 생각하며

그와 반대되는 전략을 짜야겠다고 하여 이에 다음과 같은 오답노트를 작성했습니다

 

<당태종의 고구려 침공 오답노트>

1) 수의 양제가 패한 첫째 원인은 정예병을 가리지 않고 군사를 취하여 

숫자상의 군사는 비록 4백만에 이르렀으나

전투를 감당할 만 한 자는 수십만에도 차지 못한 때문이니

10년 양성한 군사 중에서 특별히 정예한 군사 20만을 골라내자

 

2) 수의 양제가 패한 둘째 원인은 고구려의 변경부터 잠식해 들어가지 아니하고 

대뜸 대군으로 평양에 침하였다가 양식길이 끊어지고 후원군이 없었던 때문이니

평양에 침입하지 않고 먼저 요동의 각 고을을 정복하려 하자

 

3) 수의 양제가 패한 셋째 원인은 수백만 육군이 제각기 먹을 양식을 스스로 지고 가 

도중의 군량을 삼고 따로 수군으로 하여금 배로 각지 창고에 있는 양식을 물로 운반해서 

목적지에 가져다가 머물러 있는 군사의 양식으로 삼게 하였다가 

양식 실은 배가 고구려의 수군에게 모 두 격침된 때문이니 

배로 운반하는 양식의 위험을 보충하기 위해 

국내에 소 · 말 · 양 등의 목축을 장려해서, 군인 한 사람에 대해 타는 

말과 양식 실은 소 각 한 마리와 양 몇 마리씩을 분배해주어 

양식을 군사가 직접 지고 가지 않고 소로 운반하게 하여 , 

도착한 뒤에는 배로 운반해오는 양식을 기다릴 것 없이 양식이 충족하게 하고 

또 소 · 양 · 말 등의 고기를 먹게 하려 하자

 

4) 수의 양제가 패한 넷째 원인은 다른 여러 나라의 원조가 없이 

오직 혼자의 힘으로 고구려와 싸운 때문이니 , 

신라 김춘추가 구원 을 청하니 공수동맹의 의를 맺어 고구려의 뒤쪽을 교란시키게 하자

 

이상과 같은 방략을 주도면밀하게 작성한 뒤

644년 7월에 각 군대를 낙양에 집결시키고 , 

군량은 영주의 대인성에 모으게 하고 , 

영주도독 장검 에게 명하여 유 · 영 두 주의 군사를 인솔하고 요동 부근을 유격하여 

고구려의 형세를 더듬어 알아보게 하고 , 

장작대장 염입덕에게 명하여 군량을 대인성으로 운반하게 했습니다

 

그 해 10월에  정병 4만 명과 장안 · 낙양의 용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바닷길로 떠나 말로는 평양으로 향한다 고 하고 실은 요하로 향했고 

또 장수 이적으로 요동도행군대총관을 삼고 육로로 요동으로 향하여 

두 군사가 요동에서 합세하게 하고 

당태종은 친히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뒤따르기로 했습니다

 

[연개소문의 계책]

당의 군사가 침입해온다는 기별이 이르니 

연개소문은 여러 장수들을 모아 대항할 계책을 강구하는데 , 

 

어떤 장수는 평원왕 때에 온달 이 주와 싸웠을 때와 같이 

기병으로 마구 무찔러서 요동 평야에서 격전을 벌여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 옳다고 하고 , 

 

어떤 장수는 영양왕 때에 을지문덕이 수와 싸웠을 때와 같이 

마을과 들의 백성과 곡식을 죄다 성으로 옮겨 지키게 한 뒤에 

평양으로 꾀어들여 양식길을 끊어서 굶주려 피곤해졌을 때를 타서 쳐 깨뜨리는 것이 

옳다고 하여 

 

여러 사람의 의론이 분분했습니다

연개소문이 말했습니다

 

<연개소문>전략은 형세에 따라 정하는 것이오.

오늘날의 형세가 평원왕 때나 영양왕 때와 다른데 

어찌 그때의 형세와 같이 여겨 전략을 정한단 말이오. 

오늘에 있어서는 위치를 골라 방어하고 

기회를 따라 진공 해야 할 것이니 

옛날 사람의 규정한 것을 그대로 지켜서는 아니되오

 

그리고 그는 명령을 내려 

건안 · 안시 · 가시 · 횡악 등 몇몇 성읍만 굳게 지키게 하고 , 

그 나머지는 곡식과 말먹이를 혹은 옮겨놓고 혹은 태워버려 적으로 하여금 

노략질할 것이 없게 하고(청야전술)

 

오골성으로 방어선을 삼아 용감한 장수와 군사를 배치해놓고 , 

따로 안시성주 양만춘과 오골성주 추정국에게 비밀히 일러 

 

<연개소문>지금 당나라 사람들이 수나라의 패전한 것을 징계삼아 

양식에 특별히 유의해서 

장래 군량이 모자랄 때 보충하려고 

군중에 소 · 말 · 양을 수없이 가져왔는데 ,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어 풀들이 다 마르고 강물도 얼어버리면 

그 가축들을 무엇으로 먹이겠소. 

저들도 이것을 알기 때문에 빨리 싸워 결판을 내려고 할 것이오. 

그러나 저네가 수나라의 패전을 징계삼아 평양으로 바로 나오지 않고 

안시성을 먼저 공격할 것이니 , 

 

양공(양만춘 공)은 나가 싸우지 말고 성을 굳게 지키다가 

저네가 굶주리고 피곤해지기를 기다려 

양공은 안에서 나와 공격하고, 추공은 밖에서 진격하오

나는 뒤에서 당의 군사의 뒤를 습격하여 아주 돌아갈 길이 없게 해서

이세민을 사로 잡으려 하오

 

했습니다

해상잡록에 이런 기록이 있었습니다

 

당태종이 출병하기 전에 일찍이 

당의 첫째가는 명장 이정으로 행군대총관을 삼으려고 하니까 

이정이 사양하며

 

<이정>임금의 은혜도 무겁거니와 스승의 은혜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태원에 있을 때에 개소문을 만나 병법을 배웠는데 

그 뒤에 폐하를 도와 천하를 평정한 것이

다 그의 병법에 힘입은 것이니 , 

오늘에 와서 신이 어찌 감히 전일에 스승으로 섬기던 개소문을 치겠습니까 ?

 

당태종이 다시

 

<당태종>개소문의 병법이 과연 옛사람 중의 누구와 견줄 만하오 ?

 

하고 물으니

이정은

 

<이정>옛날 사람은 알 수 없거니와 

오늘날 폐하의 여러 장수들 가운데는 그의 적수가 없고 , 

비록 천자의 위엄으로 임하시더라도 이기시기 어려울까 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당태종은 못마땅해 하면서

 

<당태종>중국과 넓은 땅과 많은 백성과 강한 병력으로 

어찌 한낱 개소문을 두려워 한단 말이오 ?

 

했고 이정이 다시

 

<이정>개소문이 비록 한 사람이지마는 그의 재주와 지혜가 만 사람에 뛰어납니다. 

그러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겠습니까 ?

 

<신채호>이 기록이 사실이라 하면 

당태종은 이때 일찍이 누이동생 때문에 연개소문을 죽이지 못하였음을 후회했을 것이다.

 

645년 2월에 당태종이 낙양에 이르러 수나라시절 수양제를 따라 

살수의 싸움에 참가하고 ,

수가 망한 뒤에 벼슬하여 선주자사가 되었다가 이때 나이가 많아 퇴직한 

정원도를 불러 고구려의 사정을 물어보습니다 

그는

 

<정원도>요동은 길이 멀어 양식의 운반이 곤란하고 

고구려가 성을 지키는데 능하여 성을 함락시키기가 극히 어렵습니다.

신은 이번 길을 매우 위태롭게 봅니다

 

라고 했고 

당태종은 좋아하지 않고

 

<당태종>오늘의 우리 국력이 수나라와 비교할 바 아니니 

공은 다만 결과나 보오

 

(That shit is old news ,

Watch me while I make it out)

 

했습니다 

그러나 만일을 염려하여 

태자와 이정에게 후방을 염중히 지키라 명하고 마침내 출발했습니다

 

요택에 이르니 200리 진구렁에 사람과 말이 지날 수 없어 

명하여 나무와 돌을 운반해다가 길을 만드는데 

수나라 때 장사들의 해골이 곳곳에 널려 있었습니다

당태종이 제문을 지어 울며 제사지내고 , 

여러 신하들을 돌아보며

 

<당태종>오늘날 중국의 젊은이들이 

거의 이 해골들의 자손이니 어찌 복수를 하지 않겠소 ?

 

했습니다 

당태종은 요택을 지나자

 

<당태종>누가 개소문더러 병법을 안다고 하느냐 ? 

병법을 안다면 어찌 이 요택을 지키지 않는단 말이냐 ?

(음하하하)

 

라고 했습니다

요하를 건넌 다음에는 싸움이 순조로워서

요동 곧 오열홀 · 백암 · 개평 · 횡악 · 은산 · 후황성 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 

다시 장수 이적 등 여러 장수들을 불러 군사회의를 열고 새로 나아갈 길을 의논하는데 , 

강하왕 도종은 오골성을 쳐 함락시켰으니 

바로 평양을 공격하자고 하였고 , 

이적과 장손 무기는 안시성을 치자고 했습니다

 

수의 양제가 일찍이 우문술 등으로 하여금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가서 평양을 공격하다가 

전군이 패한 것을 당태종도 경계하는 바였으므로 

도종의 의견을 쓰지 않고 , 이적의 의견을 따라 안시성을 침공했습니다

 

[안시성주 양만춘]

연개소문이 안시성주 양만춘과 오골성주 추정국에게 

요동의 싸움을 위임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안시성은 곧 

‘아리티’ 혹은 환도성이라 

혹은 북평양이라 일컬었는데 , 

태조왕이 일찍이 서부 방면을 경영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었습니다 

 

발기의 난에 이곳을 중국에게 빼앗겼다가 고국양왕이 이를 회복한 이래로

바다와 육지의 요충이라 하여 성을 더 높이 쌓고 정병을 배치하고 , 

성 안에 항상 수십만 섬의 양식을 쌓아두었고

공격하기 어렵고 함락시킬 수 없는 요새로 일컬어 온 지 오래였습니다

 

험준한 고구려 성 , 튀어나온 부분이 '치' 로 측면공격이 가능케 설계됨

 

그 해 6월에 당태종이 이적 등과 함께 수십만 군사를 거느리고 

성 안을 향하여

 

<당나라군>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성이 함락되는 날에 모조리 죽일 것이다

 

하고 외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양만춘이 성 위에서 역시 통역자를 시켜 당의 군사에게 

 

<양만춘>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성에서 나가는 날에 모조리 죽일 것이다

 

했습니다 

당의 군사가 접근하면 성 안의 군사가 이를 쏘아죽이되 

헛쏘는 화살이 없으므로 

당태종은 성을 겹겹이 엄중 포위하여 성 안을 굶주리게 하려고 했지만 , 

성 안에는 양식의 저장이 넉넉하고 

당의 군사는 비록 가져온 양식이 많았으나 

몇 달을 지내니 차차 떨어져가고 , 

요동의 몇 성을 얻기는 하였으나 아무 저축이 없는 빈성이었으며 

수로로 오는 배들은 모두 고구려의 수군에게 격파당해 양식 운반할 길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요동은 날씨가 일찍 추워지므로 만일 가을 바람에 풀이 마르면 

소· 말·양들을 먹일 수가없어 굶어 죽을 것이었습니다

(연개소문의 계획대로 흘러갔음)

 

당태종은 크게 당황하여 강하왕 도종에게 명하여 

안시성의 동남쪽에 토정을 쌓게 했습니다

흙으로 나뭇가지를 싸서 층층이 쌓아올라고 

중간에 길 다섯을 내어 왕래케 해서 

l0일 동안의 품과 50만의 돈을 들이고

군사 수만 명이 날마다 6 , 7번을 번갈아 교전하여 죽고 상하는 자가 적지 아니했습니다

 

토산이 이루어지자 산위에서 투석기와 파괴하는 수레를 굴려 성을 무너뜨리니 

성 안에서는 무너진 곳에 목책을 세워서 막았으나 당할 수가 없는지라 

양만춘이 결사대 100명을 뽑아 성이 무너진 곳으로 갑자기 내달아 

당의 군사를 쳐 물리치고 토산을 빼앗아 

산 위의 포석과 당거를 차지하여 이것으로 도리어 산 위의 당의 군사를 치니 

당태종이 달리 계책이 없어 군사를 철퇴시키려고 했습니다

 

안시성 전투의 토산

 

연개소문은 요동의 싸움을 

양만춘 · 추정국 두 사람에게 맡기고 

 

정병 3만으로 적봉진(지금의 열하) 부근으로 나가 

다시 남으로 나아가 장성을 넘어 상곡(-지금의 하간) 등지를 습격하니 

당의 태자 치가 어양에 머물러 있다가 크게 놀라 

급함을 알리는 봉화를 들어 햇불이 하룻밤에 안시성까지 연락되었습니다 

 

고당전쟁 지도

 

당태종은 곧 임유관 안에 변란이 일어났음을 알고 곧 군사를 돌이키려고 했고

오골성주 추정국과 안시성주 양만춘은 그 봉화로 연개소문이 이미 목적지에 이르렀음과 

당태종이 장차 도망할 것을 짐작하고 

추정국은 전군을 거느리고 안시성 동남쪽 좁은 골짜기로 몰려나와서 당의 군사를 돌격하고 , 

양만춘은 성문을 열고 급히 내달아 공격했습니다

 

당의 군사가 크게 어지러워져서 사람과 말이 서로 짓밟으며 도망했고

당태종은 헌우란에 이르러 말이 수렁에 빠져서 꼼짝을 못하고 , 

양만춘의 화살에 왼쪽 눈을 맞아 거의 사로 잡히게 되었는데 , 

당의 용장 설인귀가 달려와서 당태종을 구하여 말을 갈아태우고 , 

전군의 선봉 유홍기가 뒤를 끊고 혈전을 벌여서 당태종은 가까스로 달아났습니다

 

<신채호>성경통지 해성고적고의 

 

‘당태종의 말이 빠진 곳(唐太宗陷馬處)’ 

 

이란 것이 곧 그곳이니 , 

지금까지도 그곳 사람들에게 

 

'말이 수렁에 빠지고 눈에 화살을 맞아 당태종이 사로잡힐 뻔하였다.' 

 

하는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다.

양만춘 등이 당태종을 추격하여 요수에 이르러 허다한 당의 장사를 목베고 사로잡으

요택에 이르러 당태종은 말을 몰아 수렁에 처넣어 다리를 삼아서 밟고 건너갔습니다

10월에 임유관에 이르러서는 연개소문이 당군의 돌아갈 길을 끊고 , 

뒤에서는 양만춘이 몹시 급히 추격하니 당태종은 어찌할 바를 몰랐고

그러자 마침 눈바람이 크게 일어 천지가 아득해져서 지척을 분별할 수 없이 되어

양편 사람과 말이 서로 엎드러지고 자빠지고 하여 크게 혼란해지니

당태종이 이 기회에 도망하여 돌아갔습니다

 

안시성 싸움은 또한 동양 역사상의 큰 전쟁이라 , 

비록 숫자 상의 군사는 살수싸움에 미치지 못하지마는

그러나 피차의 방략이 용의주도함과 군대의 정예함과 물자의 소모는 

살수 싸움보다 더 했으며 

싸움을 한 시일도 그보다 갑절이었습니다

 

<신채호>

이 싸움이 곧 두 민족의 운명을 결정짓게 한 전쟁이었는데도 

연개소문이 혁명한 뒤에 이 땅을 다른 파에게 줄 수 없을 것인데 , 

당의 역사에 

'안시성주(양만춘)가 재주와 용기가 있고 성이 험하고 양식이 풍족하므로 

막리지(연개소문)의 난에 웅거해 지켜서 항복하지 아니하므로 막리지가 그 성을 주었다.'

고 하였지만 그렇다면 그때에 고구려가 몇 개의 나라로 나뉘어 있었던 것인데 

어찌 하나로 단결하여 수십만의 당군을 막았을까 ?

...이와같이 사실에 모순되는 기록이 많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

(이것들이 모두 중국이 속여서 기록한 것이다)

 

당태종이 양만춘의 화살에 눈이 빠졌음은 모든 인사들의 전설이 되고 

양만춘이 화살로 당태종의 눈을 뽑았다는 시들이 많았지만

신채호 선생님은 우리 나라 삼국 사기 동국통감 등 역사책에는 당시의 전황에 관해 

당서에서 뽑아 기록하였을 뿐 이러한 말이 없고 

이는 사대주의파 사학자들이 고대 우리 나라의 외국에 대한승리의 기록을 모두 삭제해버린 때문이라

생각했습니다

한국 사극에서 꼭 등장하는 양만춘 장군의 당태종 눈알뽑기 신 , 영화 안시성

 

중국 경극속 연개소문 , 중국인들의 그에 대한 공포가 형상화 됨

 

신채호 선생님은 중국의 유명 명군인 당태종의 죽음이

중국사에 모호하게 기록된 것에 이는 양만춘 장군의 화살독에

사망한 것을 감추려다 그렇게 된 것이라 했고

연개소문이 북경과 산동일대를 점령해서 풍요롭게 됬다는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역적과 혁명가]

연개소문은 조선시대까지 주군을 시해한 역적으로 이야기됬지만

일제강점기부터 왕정에 대한 불신과 민족주의가 대두하며

점차 혁명을 일으켜 외세를 물리친 영웅 이미지가 생겨났고

조선 멸망 이후 한국국민들은 더이상 왕에게 충성할 필요도 없어졌기에

연개소문은 당나라에 맞선 마지막 고구려 불꽃으로 이야기 되었고

박은식 , 신채호 등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혁명을 일으킨 영웅으로 재평가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채호나 김부식 역시

연개소문이 후계문제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했다는 점과

재주있고 비상한 인물이긴 했지만 잔인 , 포악한 성향때문에

사망후 고구려가 곧바로 멸망했음을 안타까워 했습니다

 

연개소문은 666년(혹은 664년)에 사망했다 하고

연개소문은 죽을때까지 고구려 최고 집권자로 군림하였고

왕아닌 왕으로서 죽을때 세 아들에게 당부했습니다

<연개소문>너희 형제들은 싸우지 말고 

물고기와 물의 관계처럼 화합하여 작위를 다투는 일을 하지 마라. 

만일 그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연남생 연남산 연남건 삼형제]

연개소문이 죽은 후

그의 맏아들이던 연남생이 태막리지의 직위에 올랐고

남생의 두 아우인 연남건과 연남산은

형을 도와 국사를 돌보았는데

주위 여러사람들은 연개소문 삼형제들의 사이를 이간질했습니다

 

연남생은 수저빨로 

고구려 왕위의 신하인 태막리지라는 엄청난 직위에 올랐지만

불행히도 아버지만한 카리스마나 재주가 있는 인물은 아니었고

게다가 고구려 최고권력자라기엔 나이도 고작 32세였고

당연 고구려 신하들도 연개소문까진 인정해주어도

엄연히 신하는 신하고 왕도 아니거늘 

연남생까지 최고권력자로 인정하긴 애매하고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태막리지가 된 연남생은 권력을 장악하고 국정을 맡게 된 후

지방으로 가서 여러 성을 순시했는데

동생 연남건과 연남산을 평양성에 남겨두어 뒷일을 보게 했고

이때 연남건과 연남산의 측근들이 두사람에게 와서 계속 연남생이

죽이려 할것이라 이간질했고

두 동생들은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연남생 역시 두 동생들이 평양성에서 반란을 일으킨다는 보고를 들었지만

믿지 않다 밀정을 보냈는데

하필 밀정이 남건과 남산에게 붙잡히게 됬고

이로인해 세 형제는 서로 의심하고 다투었고

동생들은 왕명을 칭하여 연남생을 평양으로 불렀으나

연남생은 동생들이 자신을 해치려 한다 생각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연남건과 연남산은 결국 정변을 일으켜 수도 평양성을 장악하고

연남생의 아들 연헌충까지 살해했고

스스로 태막리지가 된 연남건은 군사를 보내

연남생을 토벌하려 했고

연남생은 옛 수도 국내성으로 피신한 뒤

아들 연헌성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서

도움을 요청했고

연남생 , 연헌성 부자가 당나라에게 옛 수도 국내성과 6개 성 , 주민과 정보들을 바치자

천금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은 당나라는

50만 대군을 동원해 대대적인 침공을 했고

결국 668년 수도 평양성 성문이 열려

나당연합군에 의해 700년 역사를 끝으로 허망하게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고구려의 멸망

 

수나라 양제의 100만대군에도 을지문덕 장군이 백만대군을 몰살시켰고

당나라 명군 이세민의 대군도 양만춘 장군이 철통같이 지켜낸 고구려였는데

이전 고조선이 그랬듯이 뜬금없이 권력다툼 , 내분으로

허망하게 당나라에 길목을 열어주고 싸우지도 않고 나라를 사실상 바치게 된 것이었고

가히 군대에서 정훈교육때 자주 쓰는 말인

'외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위험하다'

의 실제 현실판이었습니다

[고구려의 멸망]

고구려는 그렇게 허무하게 멸망하게 되었고

고구려의 번성한 문화와 강함을 두려워한 당나라군들은

고구려 역사서부터 불태워버렸고

고구려 백성과 기술자들을 당나라로 끌고가 

요동 백성들을 뜬금없이 삼국지 촉나라시대 파촉땅같은 곳같은

멀고 먼 곳으로 강제 이주 시켜서

다시는 고구려땅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했고

 

이로인해 고구려땅인 만주땅은 압도적 포스와 문화가 있었던

고조선 , 고구려에 비해 문화가 더이상 발전하지 못했고

고구려 후신인 발해도 영토는 비슷하게 회복했을지언정 

고구려 전성기때같은 문화력과 위엄은 회복하지 못했고

이후엔 더 심각해져서 고구려 땅은 이후 만주라 불리게 되었고

고구려 백성들이 번성하고 춤추고 노래하던 곳은

허허벌판에 춥기만 하고 완전 오랑캐와 야만인들의 땅으로 바뀌어버립니다

 

한편 당나라에 나라를 팔은 연남생 , 연헌성 부자는

고구려 멸망이후 당나라로 부터 높은 벼슬과 재물을 받게 되었고

당나라 조정은 멸망한 고구려인들을 압박하는 한편

고구려인들을 달래기 위해

연남생을 요동으로 파견해 안동도호부 관리로 임명했는데

연남생은 안동도호부에서 당나라 관리로 2년간 근무하다

679년 46세의 나이로 안동도호부 관사에서 병으로 사망했고

679년 12월 26일 당나라는 죽은 연남생의 유해를

중국 땅으로 옮겨와 낙양 북망산에 매장했고

4일동안 조회가 중지되었으며

장례식 비용은 모두 조정이 냈고

비단 700필과 쌀 200석을 내려주고

물품을 내려주고 황실악단을 시켜 노래를 연주하게 하고

황실 호위대가 관운반을 호송하게 했고

연남생의 일생 , 관직 , 가계도에 대해 기록한 묘지명(비석)을 남기게 했고

연남생 묘지명은 1923년 발견됬습니다

당나라 입장에서는 가장 위험한 강대국이 고구려였고

고구려만 없으면 사실상 당나라 천하였고 주변에 적수가 사라지는 법이었기에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1등공신 

연남생은 당황제가 진심으로 제후왕급으로 대우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연남생 부자는 나라를 외국에 팔았다는 매국노 소리를 피하지 못했고

특히 고구려 멸망은 한민족에게 한민족 근원지 만주의 상실과

신라식 사대주의의 시작 , 민족 기상의 꺾임이라는 거대한 아픔으로 다가왔기에

우리들에게 연남생은 이완용의 원조 버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뿌린대로 거두고

민족을 팔아 호화호식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니

한편 결국 연남생 부자의 끝은 좋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당황실이 연남생을 왕급 신하로 대우해 줬어도

결국 당나라가 고구려땅을 정복함으로서 가져온 이득에 비해서는

새발의 피만큼 연남생에게 우쭈쭈 해준 것에 불과했고

이후 일본제국이 조선왕실과 매국노들에게 작위와 연금을 빵빵하게 줬지만서도

당연 국가자체에 비해서는 얼마 되지 않는 돈에 불과하기에

당연히 당나라나 일본제국은 한국에서 더 뽑아먹었습니다

 

그리고 사리사욕으로 민족을 팔고 배신한 인물은 

결국 또 언제 배신할 줄 모르기에

당나라 입장에서도 그저 우쭈쭈나 몇번 해주다가

고구려 멸망 이후부터는 더이상 필요가 없어진 카드가 되었고

중국에 흡수된 수만은 민족들의 운명이 그렇듯

곧바로 토사구팽 당하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연헌성]


연개소문의 손자이자 연남생의 아들 연헌성은

651년 연남생의 아들로 태어났고

이때는 할아버지 연개소문이 고구려 조정에서 한창 위엄을 떨치고 있던 시기였고

연헌성은 그렇게 국가최고 권력자의 적손으로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9살때 연헌성은 선인이라는 관등에 봉해졌고

할아버지가 죽자 아버지 연남생이 대막리지 지위를 이었고

아버지와 숙부들이 권력다툼을 하자

연헌성은 16세의 나이에 숙부들의 손에 형 연현충이 살해당하는 참변을 겪었습니다

 

다들 어찌할줄 모를때

연헌성은 손가락을 굽혀 적을 헤아리고서는

대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여기며 아버지 연남생에게

옛 도성 국내성에 머물며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도록 권했고

다시 현성은

<연현성>지금 사신을 파견하여 중국에 입조하게 하되

정성과 성심을 다하면 중국에서는 대인이 왔음을 듣고

반드시 혼연히 맞아들일 것입니다

그리고서 병력을 청하고 연합하여

토벌을 하게 되면 이것은 안전하고 반드시 승리를 하게 되는

계책입니다

했고

이에 연남생은 옳다 생각하고

여러 추장들에게

<연남생>현성의 말은 심히 택할 만하다

 

하고는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당고종은 침공 길잡이가 되어준 연남생 헌성 부자에게

특별한 예로 대우하여 금허리띠와 임금의 말 등을 하사했습니다

<중국 기록>공은 물러나고 나아가는 계략을 도모하고

옳고 그른 방책을 가리며

시각을 지체하지 않고 안위를 잘 헤아렸으므로

서쪽에서 중국의 병력을 끌어들여

동쪽으로 요동의 침략을 막을 수 있었다

양공(연남생)이 

가(집안)를 보존하고

국(나라) 를 계승시킨 것은

실로 공(연헌성) 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679년 아버지 연남생이 사망하자

연헌성은 슬퍼하여 초췌해짐이 심각해졌고

궁중에서 보낸 사신이 조문을 하러 왔으며

도로에 조문객이 서로 이어져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연헌성의 할머니(연개소문의 아내거나 외할머니일듯) 는

연헌성이 마실 것도 끊고 슬피울고 고집피우자

자신도 음식을 끊었고

이로인해 연헌성은 다시 조금씩 음식을 먹음으로서

할머니의 은혜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나라를 팔아도 일단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슬피운 현성)

현성은 이후 벼슬을 받고 지내며 반란 토벌등을 하며

당나라 장수로 공을 세웠는데

하루는 당나라 측천무후가 일찍이 금과 비단을 내걸고

문무관 중에서 활 잘쏘는 사람 다섯 명을 골라

이것을 상으로 주기로 했고

헌성을 비롯한 신하들은 서로 활쏘기를 양보했습니다

얼마후에 헌성이 측천무후에게 아뢰기를

<연헌성>폐하께서 활 잘쏘는 사람을 뽑으셨지만

대부분 중국 사람이 아닙니다

신은 당의 관리들이 활 쏘는 일을 수치스럽게 여길까 두렵사오니

그만 두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니 측천무후가 옳다고 여겨 받아들였습니다

당나라 시대 그림

 

이후 내준신이라는 신하가 위세를 휘두르며

현성의 처소에 은밀히 접근하여

금과 비단과 보물을 요구했지만

현성은 뇌물을 싫어했으므로 교분을 끊고 허락하지 않았고

이로인해 다른 죄로 모함을 받았는데

내준신은 헌성이 모반한다고 무고해서

목매어 죽였고

연헌성이 갑작스럽게 죽게되니 그 나이가 43세였습니다

나중에 측천무후가 헌성이 억울하게 죽은 것을 알고

우우림위 대장군을 추증하고

예를 갖추어 다시 장사지냈습니다

(정황상 당나라 입장에선

이미 이용가치가 다 떨어진

고구려 연개소문의 손자를 살려뒀다가

무슨 일일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일부로 죽여놓고 억울하게 죽었다고 미안하다며 다시 복권시켜 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라를 판 부자의 어처구니 없는 사망이었고

연남생 , 연헌성도 일찍 죽은 케이슨데

연헌성의 손자 연비 역시 과거에도 급제했지만

729년 고작 22세의 젊은나이에 요절했습니다

고구려에서 태어나 살았던 연남생 , 연헌성과 달리

연비는 출신이 당나라 수도 출신이라 기록되있고

세대가 지나며 고구려인이라는 정체성을 잃고

당나라에 동화되어 연개소문의 후손들은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삼국사기 김부식>남생과 헌성은 비록 당나라의 황실에 이름이 알려졌지만

본국(한국)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반역자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라봉봉>보통 김부식 같은 유학자의 경우 

임금을 시해한 연개소문을 나쁘게 봤고

왕조시대인 조선시대까지 이런 관념은 쭉 이어지다 일제강점기라는 외세의 지배를 겪던 시기

한국 역사학자들은 연개소문을 외세를 날려버린 영웅상으로 재평가하게 됬습니다

 

그러나 김부식이던 신채호던 연개소문의 능력 하나만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연개소문 역시 일반적인 반역자라면

당시 전쟁으로 혼란한 고구려에서

금방 실각했을텐데 자신 나름대로 명분을 갖추고 반역을 일으켰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 명분이란 바로 왕과 귀족들이 무능해서 

오랜 전쟁과 고난을 불러 일으켰다가 아닐까 싶고

고구려 귀족과 일반 백성들을 갈라치기해서

정권을 잡았고 연개소문으로 무신 , 군사정권이 시작되며

귀족들의 콧대가 납작해지며 빈민 , 서민들의 지지와 결집을 받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보통 한국사에서 양만춘 장군은 절대선 ,

연개소문은 악과 유능 이런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 당시 양만춘 장군이 혼자서 당나라 군을 상대할 수는 없었고

엄연히 국권은 연개소문에게 있었기에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기록대로 안시성 전투 뒷배경엔 

연개소문의 지휘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고

을지문덕의 뒤를 이은 큰 전략가였다는 생각입니다

 

장수왕의 평양천도때부터

고구려의 전략적 , 수렵적 기풍이 꺾여가기 시작했고

점차 음모적 , 농경적 기풍이 확립되었고

이로인한 수렵을 대표하는 국내성파와

농경을 대표하는 평양성파가 극심한 다툼이 있었고

고구려 후기는 귀족들의 권력쟁탈전과 함께

고구려의 호족공화제(혹은 문벌귀족체제)가 형성되어 

가문 , 귀족독재가 시작되며 왕권이 약화되고 있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통일중국과 전쟁까지 터져서

상황이 매우 나쁜 상황에서

고려 무신정권 직전처럼 귀족들이 전횡을 일삼았고

 

연개소문 일파가 군대를 데리고 일어나서 전부 쓸어버리고

다시 옛날 수렵적 건전한 기풍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주창한게 아닐까

저는 보고있고

실제로 연개소문이 칼을 다섯자루 차고 다녔다는 기록은

일반적으로 연개소문이 위엄을 과시하려 한게 아니라

실제 수렵민족들이 공격용 , 방어용 , 도축용 , 투척용 등 

여러자루 칼을 가지고 다닌다기에

연개소문은 당시 고구려의 국내성 수렵 VS 평양성 농경파로 나뉜 조정에서

진취적이던 국내성 수렵파로 일어나서 사대적이던 평양성 농경파를 제거하고

국권을 잡은 것으로 저는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오랜전쟁으로 흉흉한 상황+

오랜 전쟁으로 군부가 비대해진 상황에서는

연개소문같은 카리스마 인물이나 무신정권이 등장하기 정말 좋은 상황이었고

이성계의 역성혁명도 결국 고려말 잦은 전쟁으로 호족들의 사병이 비대해지다 나온 것이었고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도 장면내각이 한국전쟁이 휴전한 후 비대해진 군대를 줄이려 하다가 터진거고

연개소문이 특별히 잔악한 면도 있겠지만

단순히 연개소문 개인만의 문제였다기보단

오랜 전쟁으로 그 시대상에 맞는 인물이 나온 것이라 보고있습니다

 

하여튼 , 연개소문은 유능하고 통쾌한 모습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워낙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국권을 잡았고

이전 왕을 제거한 고구려 명림답부나 창조리도 

폭군만 제거하고 국가 실력자가 되었던 인물인데

연개소문은 왕과 귀족들을 전부 죽여버렸던 인물이라

고구려가 다음세대로 가는 인재풀을 전부 날려버렸고

유능하지만 잔악한 성향이 있어서

결국 사망후 급속도로 고구려가 기울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집권후부터는 고구려 내부에 

더이상 살육이 없었고 안정이 시작됬고

일치단결하여 연개소문의 생각대로

국내외 정세가 이루어졌단 면에서 

동아시아 세계의 대단한 대정치가였고

연개소문의 의도대로 만약 고구려 백제 신라가 단합했다면 ,

혹은 세 아들이 싸우지만 않았어도

세계 역사가 오늘날과 완전 다르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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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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