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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중기 인물들>

[왕이 되지 못한 맏아들 발기]

[안류의 천거]

[농부에서 국상이 된 을파소]

[발기의 반란]

[계수]

[형제의 의리]

[고구려 동천왕 VS 중국 관구검]

[충신 밀우와 유유]

[득래의 충고]

[안국군 달가]

[동생 돌고를 죽인 봉상왕]

[국상 창조리]

[창조리의 쿠데타]

[비운의 왕 고국원왕]

[소수림왕의 개혁]

[광개토대왕의 아버지 고국양왕]

<라봉봉>

 

[왕이 되지 못한 맏아들 발기]

고구려 폭군 차대왕을 살해한 명림답부는

왕족 고백고를 왕위에 올려서 국정을 좌지우지했고

백고는 신대왕이됬고 신대왕은 어진 정치를 펼치며

신대왕+명림답부 공동정국이 있었고

명림답부와 신대왕은 비슷한 시기에 사망합니다

 

신대왕이 사망하자

백성들이 신대왕의 맏아들 고발기가

어질지 못하다 하여

둘째아들 고남무를 추대해 왕으로 삼았고

 

(적장자 원칙 그런거 없었고

유목민족 특성처럼 능력제였던 고구려)

 

첫째형을 제치고 왕이 된 둘째 고국천왕

 

발기는 이를 원망해

백성 3만명을 거느리고

요동태수 공손강에게 가서 항복했습니다

 

하여튼 ,

고남무는 왕위를 이어

고구려 9대왕 고국천왕이 됬고 고국천왕은

아버지처럼 어진 명군이었습니다

 

[안류의 천거]

고국천왕 12년 가을 9월

중외대부 패자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는

모두 왕후의 친척(외척)으로서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그 자제들이 세도를 믿고 교만하고 사치했으며

다른 사람의 딸을 겁탈하고

남의 토지와 주택을 갈취했고

백성들이 이에 원망하고 분개했습니다

 

고국천왕이 이 소문을 듣고 분노해

그들을 처형하려 하니

좌가려 등이 모반하였고

좌가려가 서울(고구려 수도 국내성)을 침공하자

고국천왕이 진압했고

고국천왕은 진압 후 자책하면서

신하들에게 현명한 자들을 천거(추천)하라 명했습니다

 

신하들은 모두

동부의 안류를 천거하였고

고국천왕이 안류를 불러 국정을 맡기자

안류는

 

<안류>미천한 저는 용렬하고 어리석어

실로 중대한 국정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서쪽 압록곡 좌물촌에 사는 을파소라는 사람은

유리왕의 대신이었던 을소의 자손인데 ,

성질이 강직하고

지혜로우며 사려깊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등용되지 못하고

농사로 생계를 삼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만약 나라를 잘 다스리려 하신다면

이 사람을 등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농부에서 국상이 된 을파소]

이에 고국천왕은 사신을 보내

겸손한 말과 후한 예로 을파소를 초빙하였고

중외대부로 임명하고

우태의 작위를 주었는데

을파소는 생각하기를

자신이 몸을 나라에 바치기로 했지만

자기가 할 수 있는 능력에 비해

받은 직위가 너무 작다 생각하여

 

<을파소>우둔한 저로서는

감히 왕의 엄명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왕께서는 현량한 사람을 선택하여

높은 관직을 주어 위업을 달성하게 하소서

 

(더 줘 !)

 

이에 고국천왕은 그 뜻을 알고

을파소를 국상(국무총리)으로 임명했고

농사꾼 을파소가 국무총리로 파격승진하자

신하와 외척들은 을파소를 질투하고 미워했습니다

 

고구려 명재상 을파소

 

이에 고국천왕은 교서를 내려서

 

<고국천왕>귀한 자나 천한 자를 막론하고

만약 국상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친족까지 멸하리라

 

하고 엄포를 놨습니다

 

이에 을파소는 물러나서 사람들에 말했습니다

 

<을파소>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어서 살고 ,

때를 만나면 나아가 벼슬하는 것은

선비의 당연한 일이다

 

지금 임금께서

후의(은혜)로 나를 대우하니

어찌 전일의 은거(은둔 , 숨어 살기)를 다시 생각하랴 ?

 

이에 국상 을파소가 지성으로 나라에 봉사해

정치와 교화를 밝히고

상벌을 신중히 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고

중앙과 지방이 무사했습니다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천거한 안류에게 고마워하며

상을 내렸습니다

 

산상왕 7년 가을 8월

을파소가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슬피 울었습니다

 

[발기의 반란]

고국천왕이 사망한 후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어

동생 고연우가 왕위를 이어

고구려 10대왕 산상왕이 됬고

 

산상왕이 왕이되자

고국천왕의 형이자 이전 맏아들이지만

인성문제로 동생 고국천왕에게 왕위를 넘겨야했던

고발기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발기는 군사로 왕궁을 포위했고

산상왕은 궁궐에서 문을 닫고 나오질 않았는데

그럼에도 백성들은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었습니다

 

덕이 없었던 발기

 

이에 발기는 성사되길 어려움을 알고

처자들과 요동으로 도주했고

요동태수 공손도에게 군사 3만을 빌렸습니다

 

[계수]

다시 발기가 중국 한나라 3만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치자

산상왕의의 동생 계수가 발기군사를 막았고

 

(즉

고발기 ,

고국천왕 고남무 ,

산상왕 고연우 ,

고계수가 모두 신대왕의 아들들로 모두형제임)

 

이에 발기와 한나라 군사가 크게 패해 도망치자

계수는 선봉이 되어 도망가는 군사를 추격했습니다

 

발기는 계수에게

 

<발기>네가 오늘 감히 늙은 형을 죽이겠는가 ?

 

이에 계수는 형제간의 정의를 버릴 수 없어

감히 그를 죽이지 못하고 말했습니다

 

<계수>연우형님이 왕위를 사양하지 않은 것은

비록 정의로운 행동은 아니지만

형이 일시의 분한 생각을 못이겨

나라를 멸망시키려함은

무슨 뜻입니까 ?

 

죽은 후에 무슨 면목으로 선조들을 대하려합니까 ?

 

발기와 계수 형제

 

발기가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움과 뉘우침을 이길 수 없어

배천으로 도주해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습니다

 

계수는 슬피울고

발기형님의 시체를 거두어

초빈(급하게 시체를 가려둠)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형제의 의리]

산상왕을 슬퍼하면서도 일면 기뻐하며

동생 계수를 궐내로 불러들여 잔치를 베풀고

형제의 예로 대하면서 말했습니다

 

<산상왕>발기가 타국에 청병하여

국가를 침범하였으니

죄가 이보다 더 클 수 없다

 

이제 그대가 이기고도

발기를 풀어주어 죽이지 않은 것만 하여도 족한 일인데

그가 자결한 것을 대단히 애통해하니

 

그대는 도리어 나를 무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

 

이에 계수는 서글프게 눈물을 머금으며

 

<계수>제가 지금 한 마디 말을 하고

죽기를 청합니다

 

산상왕은

 

<산상왕>무슨 말인가 ?

 

하고 놀래자

계수는

 

<계수>왕후가 비록 선왕의 유명으로

대왕을 즉위하게 하였으나

대왕께서는 예로써 사양하지 않았으니

 

(이전 고국천왕비가 고국천왕이 죽자

동생 산상왕을 꼬셔서 왕위에 올림)

 

이미 형제간에 우애하고 공손해야 한다는 의리는 없어진 것입니다

 

저는 대왕의 미덕을 이루고자

짐짓 발기의 시체를 거두어 초빈을 한 것인데

이로 말미암아 대왕의 노여움을 당할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

 

대왕께서 만약 어진 마음을 베풀어

발기의 죄악을 잊어 버리고

형에 대한 상례를 갖추어 장례지내 주신다면

누가 대왕이 옳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

 

제가 이미 이 말을 하였으니

죽음을 당하여도 사는 것과 같습니다

청컨대 나아가 형리(법관)의 처형을 받겠습니다

 

산상왕이 이 말을 듣고

앞으로 다가 앉으며

따뜻한 표정으로 위로하며 말했습니다

 

<산상왕>(계수 동생아) 내가 불초(못나고 어리석다)하여

미혹됨이 없을 수 없었는데

이제 너의 말을 들으니

진실로 나의 잘못을 알게 되었구나

너는 나를 탓하지 말라

 

이에 동생이 왕에게 절하고

왕도 그에게 또한 절을 하여

형제는 마음껏 즐기다 헤어졌습니다

 

이후 산상왕은 관리에 명하여

발기 형님을 왕의 예로써 

배령에 장사하게 했고

산상왕이 원래 우씨왕후(고국천왕의 왕비) 에 의해

왕위를 얻게 됬으므로

다시 장가들지 않고

우씨를 왕후로 삼았습니다

 

(우씨는 즉 고국천왕의 아내였는데

남편 사후  다시 남편의 동생 산상왕과 결혼했고

이를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의 아내와 결혼하는

유목민족 , 고구려의 풍습 '형사취수제' 라고함)

 

고구려 왕후 벽화

 

[고구려 동천왕 VS 중국 관구검]

산상왕이 죽자

산상왕의 아들 고우위거(어릴적 이름은 교체) 가

왕위를 이어 고구려 11대왕 동천왕이 되었고

 

동천왕 16년(242년)

동천왕이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격파했습니다

 

참고로 당시 중국은 삼국지를 한창 찍고 있었는데

제갈량이 234년에 오장원에서 죽었고

당시 중국은 소설 삼국지 영웅들이

실제로 활약하던 시대긴 했지만

현실은 오랜 전쟁으로

개판 오분전이었기 때문에

중국본토가 세 나라로 갈라지는 난리가 나서

한나라때부터 관리해온 한국 지배기관 한사군 등을

관리할 여력이 떨어져가고 있었고

 

이때부터 점차 고구려는 반격을 개시하며

고조선 영토를 수복하기 시작했고

중국의 혼란을 틈타

고구려 동천왕이 서안평을 격파하며

요동의 핵심지대를 확보합니다

 

그러나 이 결과로

중국 위나라와 고구려의 장기간의 걸친

격렬한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동천왕 20년(246년) 가을 8월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1만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침공하였고

 

위나라 명장 관구검

 

동천왕은 보병과 기병 2만명을 거느리고

비류수에서 전투를 벌여

그들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고

다시 양맥골짜기에서 전투를 벌여 역시 적군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을 죽이거나 생포했습니다

 

연이은 대승에 자신만만해진 동천왕은 장수들에게

 

<동천왕>위나라의 대병력이 오히려

우리의 적은 군사만도 못하다

 

관구검이라는 자는 위나라의 명장이지만 ,

오늘날에는 그의 목숨이 나의 손에 달려있구나

 

동천왕은 곧 철기 5천명을 거느리고 진격했는데

 

고구려 철기병 벽화

 

관구검이 방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자

우리 군사가 대패하여 사망자가 1만 8천여 명이었고

동천왕은 기병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압록원으로 도주했습니다

 

중국군의 진법 , 대진제국4

 

10월 겨울

관구검은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환도성=고구려 수도 국내성의 전쟁시 수도였고

삼국시대엔 본수도와 전쟁시 수도가 동시에 존재했음)

 

고구려 백성들을 도륙했고

장군 왕기를 보내 동천왕을 추격했습니다

 

관구검의 침입

 

[충신 밀우와 유유]

동천왕은 남옥저로 도주하다 죽령에 이르렀고

군사들으 흩어져 거의 모두 없어지고

다만 오직 동부의 밀우가 혼자 동천왕의 옆에 남아있다

동천왕에게 말했습니다

 

<밀우>지금 추격해 오는 군사가 매우 가까우니

형세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신이 죽기로 결심하고 막겠사오니 ,

왕은 도망하소서 !

 

드디어 밀우는 결사대를 모집하여

함께 적진으로 달려가 힘껏 싸웠고

동천왕은 겨우 벗어나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스스로 호위하면서 일러 말하기를

 

<동천왕>만약 밀우를 데려 오는 자가 있으면

상을 후하게 주겠다

 

이에 하부의 유옥구가 나와서

 

<유옥구>신이 가 보겠습니다

 

하고는

드디어 싸움터에서 밀우가 땅에 엎어져 있는 것을 보고는

업어 왔습니다

 

동천왕은 자기 무릎을 베어주고 있더니

한참만에 밀우가 깨어났고

 

동천왕과 밀우

 

동천왕이 사잇길로 이리저리 헤매어

남옥저에 이르렀는데

위나라 군대의 추격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동천왕은 더 이상 계책이 없고 기세가 꺾이어

어찌할 바를 몰랐고

동부인 유유가 왕의 앞에 나와 말했습니다

 

<유유>형세가 매우 위급하니

그냥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신에게 어리석은 꾀가 하나 있습니다

청컨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나라 군사에게 먹이다가

틈을 보아 저들 장수를 찔러 죽이려 합니다

 

만약 신의 계책이 이루어진다면

왕은 힘껏 쳐서 승부를 결정하소서 !

 

이에 동천왕이

 

<동천왕>좋다 !

 

하였습니다

 

유유는 위나라 군대에 들어가 거짓항복하며 말하기를

 

<유유>우리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도망쳐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몸둘 곳이 없습니다

 

장차 군대 앞에 나와 항복하여

법관에게 처벌받기를 청하여

먼저 저를 보내

변변치 못한 물건을 가지고 와서

종군하는 자들의 찬거리나 드리고자 합니다

 

위나라 군사가 이 말을 듣고

항복을 받으려 했습니다

 

유유는 식기 속에  칼을 숨겨 가지고

앞으로 가서 칼을 뽑아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함께 죽으니

위나라 군사가 (장군을 잃고) 드디어 어지러워졌습니다

 

충신 유유의 죽음

 

이때 동천왕이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급히 공격하자

위나라 군사가 동요하여 대오를 갖추지 못하고

도망쳤습니다

 

동천왕이 나라를 겨우 회복하고 공을 논하는데

밀우 , 유유를 제일로 삼아

밀우에게 거곡과 청목곡을 내려주고

옥구에게는 압록강의 두눌하원을 식읍으로 삼게했고

그리고 죽은 유유에게는 벼슬을 추증하여

구사자로 삼고 또 그 아들 다우를 대사자로 삼았습니다

 

[득래의 충고]

예전에 동천왕의 신하 득래는

동천왕이 중국을 침략하고 배반하는 것을 보고

이를 중단하기를 수차례 간하였고

그러나 동천왕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았고

득래는 탄식하며

 

<득래>머지 않아 이 땅이 쑥대밭이 되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

 

말하고는 음식을 먹지 않고 굶어죽었습니다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국내성을 점령했을 당시

득래의 무덤은 헐지 말며

무덤의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하고

득래의 처자들을 찾아 모두 풀어주도록 명령했습니다

 

물론 자주적 입장에서 보면

득래는 친중파일 수도 있지만

당시 동천왕이 자만에 빠져서 위나라군에 털린다거나

수도가 함락당하고 죽을 위기까지 몰린 것을 보면

동천왕에게 나름 현실적으로 간한 신하로 볼 수도 있습니다

특히 득래가 매국 , 친중쪽이라 보기도 어려운게

만약 진짜 그런 부류였으면 곡기를 끊고 굶어죽지도 않고

중국으로 도망쳤을 것이고

득래는 나름 신하로서 중국의 힘이 강성한 것을 알고

동천왕에게 자만하지 말고 조심하라 조언했는데 씹혀서

자살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여튼 ,

자만심도 강해서 수도를 뺐긴 굴욕의 왕임에도

그럼에도 동천왕은 고조선 옛 고토를 수복한 자주적이고

고구려 신하들과 백성들의 사랑을 받은 왕이었고

동천왕이 재위 22년(248년)에 사망하자

고구려 백성들은 동천왕의 은덕을 생각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신하들 중에는 자살하여 순장(왕과 같이 묻힘) 되기를

바라는 자가 많았으나

새로 등극한 왕이 예가 아니라 하여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동천왕 장례일에

동천왕의 무덤에 와서 자결한 자가 아주 많았고

백성들이 섶(나뭇가지)을 베어

그들의 시체를 덮어 주었기 때문에

그 곳을 시원(섶 언덕)이라 불렀습니다

 

동천왕이 죽자

동천왕의 아들 , 태자 고연불이 왕위를 이어

고구려 12대왕 중천왕이 되었습니다

 

중천왕때는 왕비와 첩 관나부인의 암투가 있었는데

이거는 나중에 왕비 이야기에서 쓰기로 하고

이외엔 별다른 인물은 없었고

 

중천왕이 죽자

중천왕의 둘째아들 , 태자 고약로가 왕위를 이어

고구려 13대왕 서천왕이 되었습니다

 

[안국군 달가]

서천왕 11년 겨울 10월

숙신(말갈 , 여진족 조상) 이 침입하여

변방 백성들을 죽이자

서천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서천왕>내가 미미한 몸으로

외람되게 왕위를 이었으나

나의 덕은 백성들을 편하게 할 수 없고

위엄은 먼 곳에 떨치지 못하여

인근의 적들이 우리 강토를 침범하게 하였다

 

이제 지략있는 신하와 용감한 장수를 얻어

외적을 부수고자 하니

너희들은 각각 특출한 계략을 지녀

장수가 될만한 인재를 천거하라

 

여러 신하들은

 

<신하들>왕의 아우 달가는 용맹스럽고 지략이 있어

대장이 될만 합니다

 

서천왕은 이에

달가를 보내 숙신을 치게했고

달가는 뛰어난 계략으로 적을 기습해

단로성을 빼앗고 추장을 죽이고

주민 600여 호를 부여 남쪽 오천으로 옮기고

6 , 7 개소의 부락을 항복하게 하여

부용(식민지의 옛 말) 으로 삼았습니다

 

고구려 장군 벽화

 

서천왕은 크게 기뻐하며

달가를 안국군으로 삼고

서울과 지방의 군사 일을 맡겼으며

겸하여 양백 , 숙신 등의 여러 부락을 통솔하게 했습니다

 

서천왕이 사망하자

서천왕의 태자 고상부가 왕위를 이어

고구려 14대왕 봉상왕이 되었는데

아쉽게도 이전 명군라인이 끝나고

다시 폭군이 등장합니다

즉 봉상왕 이넘은 폭군이었습니다

 

봉상왕은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

의심과 시기가 많았는데

서천왕이 사망하자 즉위하였고

 

봉상왕은 즉위하자마자

안국군 달가를 죽였습니다

 

봉상왕은 달가가 아버지 항렬에 있고

큰 공적이 있으며

백성들이 존경하므로

그를 의심하여 모살한 것이었고

 

이에 고구려 백성들은

 

<고구려 백성들>안국군이 아니었다면

백성들이 양맥과 숙신의 환난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제 그가 죽었으니

우리는 장차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

 

백성들이 눈물을 뿌리며

서로 위로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동생 돌고를 죽인 봉상왕]

이후에도 봉상왕은 동생 돌고가

모반하려는 의도를 가졌다 해서

자결하게 했고

고구려 백성들을 돌고가 죄가 없다 생각해

돌고의 죽음을 애통하게 생각했습니다

 

돌고의 아들 을불은 시골로 도주했습니다

 

[국상 창조리]

봉상왕이 고구려 명장 안국군 달가를 죽일때부터

다시 국경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당시 모용외는 변경의 걱정거리였는데

봉상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봉상왕>모용씨의 군사가 강하여

여러차례 우리 강역을 침범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

 

하니

국상(재상) 창조리는

 

<창조리>북부의 대형 고노자는 어질고도 용감합니다

대왕께서 침략을 막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신다면

고노자가 아니고는 쓸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에 봉상왕은 그를 신성태수로 삼았고

그러자 그후로 모용외가 다시 침범하지 않았습니다

 

봉상왕 9년(292년) 가을 8월

봉상왕이 국내의 나이 15세 이상 장정 남자를 동원하여

궁실을 수리했는데 

이때 고구려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던 시기였고

백성들은 식량 부족과 부역에 시달려

이로 인해 유망(망해서 떠돌아 다님 , 유랑)하게 되니

 

 

국상 창조리가 봉상왕에게 간했습니다

 

<창조리>하늘의 재앙이 거듭 닥치고

흉년이 들어 백성이 살 길을 잃어

젊은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떠나고

어린이와 늙은이는 구렁텅이에 뒹구니

지금은 실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들을 걱정하여

두려운 마음으로 반성할 때입니다

 

대왕께서 일찍이 이를 생각하지 않고

굶주린 백성을 몰아

토목 공사에 시달리게 하니

백성의 부모라는 뜻에 매우 어긋납니다

 

하물며 , 이웃에는 강한 적이 있어

우리의 피폐함을 틈타 쳐들어온다면

국가의 백성을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에 헤아리십시오 !

 

이에 봉상왕은 성을 내면서

 

<봉상왕>임금이란

백성이 우러러 바라보는 자리인데 ,

궁궐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위엄의 중함을 보여 주겠는가 ?

 

지금 상국(국상) 이 아마 과인을 비방하여

백성의 칭송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창조리가 말했습니다

 

<창조리>임금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면

이는 어진 것이 아니며 ,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지 않는다면

이는 충성이 아닙니다

 

신이 이미 국상의 자리를 이어 받았으니

감히 말을 아니 할 수 없을 뿐이지

어찌 감히 칭찬을 구하겠습니까 ?

 

봉상왕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봉상왕>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고자 합니까 ?

바라건대 다시는 말을 하지 마시오 !

 

조리가 봉상왕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것을 알고

물러나 여러 신하들과 폐위할 것을 모의하니

봉상왕이 면할 수 없음을 알고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창조리는 군신들과 같이 의논해

봉상왕을 폐위시키고

봉상왕에게 죽은 돌고의 아들 을불을 왕으로 세웠는데

 

이 인물이 바로 고구려 15대왕 미천왕 고을불입니다

 

[창조리의 쿠데타]

예전에 봉상왕이 동생 돌고가 모반할 생각을 가졌다고 의심해

그를 죽이자 돌고의 아들 을불은 두려워서 도망쳤고

몰락한 왕손으로서 고된 머슴생활을 하는 중이었는데

 

국상 창조리가 봉상왕을 폐위시킬때

온나라를 뒤져 을불을 찾게 하였고

을불을 찾아나선 고구려 신하들은 

비류하 물가에서 비록 얼굴은 초췌했으나

행동거지가 보통사람과는 달랐던 한 사나이를 보고

이 사람이 을불이 아닌가 싶어서

나아가 절을 하고는 

 

<신하들>지금 국왕(봉상왕) 이 무도하므로

국상(창조리) 이 군신들과 함께 왕을 폐하려고 합니다

왕손께서는 행동이 검소하고 인자하며

사람을 사랑하므로

조상의 유업을 이을 수 있다 하여

저희들을 보내 맞아 오게 하였습니다

 

을불은 의심하여 말하기를

 

<을불>나는 평민이오

왕손이 아닙니다

다시 알아 보시오

 

이에 신하들은

 

<신하들>지금 왕이 인심을 잃은지 오래여서

실로 나라의 주인이 되기에 부족합니다

이로 인하여 여러 신하들이 왕손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청컨대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곧 을불을 받들어 돌아왔고

창조리가 기뻐하며

을불을 조맥 남쪽 인가에 머물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했습니다

 

9월 가을

봉상왕이 북쪽에서 사냥할때

국상 조리가 따라갔고

조리는 여러 사람들에게

 

<창조리>나와 마음이 같은 자는

내가 하는 대로 하라

 

창조리는 곧 갈대잎을 모자에 꽂았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를 따라 갈대잎을 꽂았습니다

 

 

창조리는 여러 사람의 마음이 모두 같다는 것을 알고

드디어 그들과 함께 봉상왕을 폐하여

별실에 가두고 군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했고

 

(그리고 봉상왕 자결)

 

그리고 곧 숨겨놓은 왕손 을불을 맞아

옥새를 올려 왕위에 오르게 했습니다

 

미천왕 고을불은 고구려 명군이었고

미천왕 14년 겨울 10월

미천왕은 중국 한나라의 한국 식민지배기관

낙랑군을 격파해 중국의 400년간의 지배를 끝냈고

연이어

15년 가을 9월은 대방군 침공 ,

16년 봄 2월

현토성을 격파하며

고조선 고토를 수복했습니다

 

[비운의 왕 고국원왕]

미천왕이 사망하자

태자 고사유가 왕위를 이어

고구려 16대왕 고국원왕이 됬습니다

 

고국원왕은 비참한 왕이었는데

아버지 미천왕이 머슴 , 노예급 생활을 하다가

창조리에게 옹립되어 왕이 되고

한사군을 축출해내며 영토를 크게 넓혔는데

고국원왕은 아버지때 크게 넓어진 영토를 이어받았지만

 

원래 전쟁으로 영토가 크게 늘면

바로 다음세대가 다시 공격을 받으며

방어에 집중하게 되는 패턴이 있고

 

(신라 정복군주 진흥왕이 한강유역과 함경도까지 진출하며

신라 영토를 엄청나게 넓혔지만

진흥왕 이후부터 신라는

한강유역을 찾으려하는

고구려 , 백제에게 쌍으로 두들겨 맞게 된 것처럼)

 

고국원왕때는 외세의 침공이 컸는데

연나라 임금 모용황은 고구려 수도 국내성을 점령해서

고구려는 동천왕때에 이어 또다시

수도를 털리게 되었고

고구려 남녀 5만명이 사로잡히고

궁실이 불타고 보물들이 탈취됬고

고국원왕의 아버지 미천왕이 무덤이 도굴되

시신이 빼앗기고

고국원왕은 왕모(왕의 어머니) ,

왕비가 납치되는 치욕을 맛보게 됩니다

 

모용왕이 고구려 수도를 약탈하고 돌아가자

이후 고국원왕은 연나라에 조공을 보내

보물을 바치며 겨우 연나라 모용황을 달랬고

 

비운의 고국원왕은 이후

고국원왕 41년 겨울 10월 

하필 백제 왕이 백제 최전성기 왕 근초고왕이었는데

근초고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자

고국원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방어하다

화살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백제 최전성기왕 근초고왕

 

백제인들은 이후 이를 자랑하며

자신들이 고구려 왕의 머리를 베어서 달아 맸다고

허풍을 부리고 다녔고

 

나름 같은 부여계국가로 시작해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는 이때부터 최악이 되어

한창 중앙집권화를 시작하며 일어나던

고구려 , 백제 양국은 한반도 주도권을 둔 충돌을 시작합니다

 

[소수림왕의 개혁]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전사했음에도

당시 고구려 국운은 그리 나쁘지 않아

한창 일어나고 있던 상황이었고

고국원왕이 전사하자 고국원왕의 태자

고구부가 왕위를 이어

고구려 17대왕 소수림왕이 됬는데

 

소수림왕은 나름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중요히 다룰만큼

고구려 중기 명군이었고

불교도입 , 태학건립 , 율령반포 등을 하며

고구려를 중앙집권국가로 발전시켰습니다

 

고구려 태학

 

[광개토대왕의 아버지 고국양왕]

소수림왕이 아들없이 죽자

동생 고이연(고이련)이 왕위를 이어

고구려 18대왕 고국양왕이 됬고

 

(고국천왕 , 고국원왕 , 고국양왕 헷갈리니 주의 ㅋ

참고로 고국양왕은 광개토대왕 아빠임)

 

고국양왕은 군사 4만을 출동하여 요동을 습격했고

요동과 현토를 쳐부수고 남녀 1만 명을 생포해 돌아왔습니다

고국양왕은 아들 담덕(광개토대왕의 이름)을 태자로 삼았고

백제군에 돌아가신 아버지 고국원왕의 복수를 위해

남쪽의 백제도 쳤습니다

 

<고국원왕>담덕아 너는 백제왕에게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하느니라

 

<담덕>소자 백제에 원수를 갚고

반드시 고구려를 부강한 나라로 만들겠습니다

 

당대 백제와 고구려의 팽창에 두려움을 느낀 신라임금은

고국원왕에게 신라왕의 조카 실성을 볼모로 보냈습니다

 

고구려 초기가 당차고 전설적인 이야기라면

고구려 중기는 한국땅을 점거한 중화민족과의 격렬한 전투와

고토수복의 시기였다 생각되고

고국양왕의 아들이자 고구려 최전성기왕 , 한국위인인

광개토대왕때부터는

고구려 천하 , 고구려의 불꽃의 시기인

고구려 후기로 다루겠습니다

 

<라봉봉>고구려 중기까지는 중앙집권화 전 시기라

나름 왕국이나 제국보다는 유목 , 부족국가적 낭만이 존재하던 시기였고

또 당시 중국이 한창 삼국지 찍던 시대라 중국국력이 매우 약해져 있던 상황이었고

이 틈을 타 우리의 고구려인들은 중화제국이 세운

한국식민지배기관 한사군을 적극적으로 축출해냈고

적극적으로 중국에 빼앗긴 고조선 영토를 수복해나갔습니다

 

초중기 고구려와 후기 고구려는 국가 분위기가 상당히 달라지는데

초중기때까지는 고구려가

유목 , 수렵 , 약탈 , 정복국가적 기풍이 강했다면

한사군 축출 이후 , 요동수복 이후인 후기부터는 넓어진 영토에서

점차 말에서 내려 유목국가적 기풍이 아닌 농경국가적 기풍으로 변한 고구려였고

전쟁 양상도 고구려 초중기까지는

기동성이 강한 유목민족 특유의 게릴라 전투의 형세였다면

후기부터는 농경민족처럼

수만대군을 구성한다거나 성안에서 밀집된 인구를 바탕으로

중화제국과 힘대 힘으로 , 인구대 인구로 총력전을 벌이는 양상으로 바뀌게 되고

시대의 발전 , 인구의 증가 등으로 점차 전쟁양상이 참혹해 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역사책에서는 기록되지 않지만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부터 점차

고구려 귀족내 유목파(국내성 귀족)와 농경파(평양성 귀족) 의 세력다툼이 있다 보고 있고

 

고구려는 후기부터는 팽창보다는 넓어진 영토에서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며 천하의 중심은 고구려라는

자신들만의 고구려 천하관을 구축하기 시작했고

그 시작을 광개토대왕이 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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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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