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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인물들>

[잊혀진 제국 가야]

[김수로왕]

[수로왕 VS 석탈해]

[허황옥]

[인도공주 허황옥]

[가야계 신라인의 활약]

[가야의 멸망]

[가야 마지막 왕 구형왕의 아들들]

[김세종(노리부)]

[백제 성왕의 목을 벤 김무력]

[유교 가야와 불교 신라(?)]

[가야계의 절정 김유신]

[우륵과 가야금]

[바다의 왕자 가야]

<라봉봉>

 

[잊혀진 제국 가야]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서적은

바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정사인 '삼국사기(김부식 저)' 로서

삼국사기는 이름처럼 고구려 , 백제 , 신라 삼국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김부식 삼국사기

 

그런데 우리가 분명 아는 또하나의 삼국시대 국가인

'가야' 가 있어야할텐데

제 조상님이지만 부식이형 이놈(?)이 경상도+신라계임에도 가야는 삭제해버렸고

사국사기로 만들고 가야본기도 넣었어야했는데

가야는 사실 김부식도 굳이 집어넣기 어려웠을 정도로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지 못한 나라라

기록도 적고 존재감이 미약한 나라입니다

 

잊혀진 4의 제국 가야

 

가야는 그렇게 한때는

고구려 , 백제 , 신라와 나란히 어깨를 견주던 해상+철의 제국임에도

우리에게 잊혀진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일연 스님께서

'삼국유사' 를 집필하며 고조선 , 가야를 새로 다루어

고려사회에 새로운 민족의식을 불어넣으며 민족통합 , 국론통합을

이뤄내셨고

 

일연 삼국유사

 

(삼국유사로 고조선이 재조명되며

이후 이성계의 조선건국에 영향을 끼침)

 

비록 삼국유사는 정사가 아니라 신화나 야사 , 전설위주로

주요사건과 방대한 팩트위주인 삼국사기에 비해는 부족한 느낌도 있으나

엄연히 역사서로서 실제로 삼국사기가 다루지 못한

사건들이 많은 엄청나게 귀중한 자료입니다

 

하여튼 ,

가야 이야기로 돌아가서

 

고대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지나 농지 이외에도

평지나 농지에서 농사를 가능하게 해주는

'강' 이었는데

 

고구려는 압록강과 대동강 ,

백제는 한강과 금강에서 폭발적인 성장을 이뤘고

신라는 강이 없어서 진짜 초기엔 찐따국가였는데

가야는 엄연히 낙동강이 있어

낙동강 하류지역에서 성장한 가야는 비약한 성장을 이뤘고

기원전 4세기 말부터 한국 철기문화의 중심지이자

강을 타고 왜 , 중국 등 국제무역에도 열심이며 발전한

마치 부여와 존재감이 같은 우리에게는 잊혀진 한민족 국가입니다

 

낙동강과 가야

 

영남의 젖줄 낙동강

 

진취적 느낌이었던 부여인들은

고구려 , 백제를 건국했고

 

보수적 느낌이었던 고조선 , 가야인들은

신라 건국 ,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신라지방에 여섯마을(6부) 를 이루며 살던 고조선 유민들은

신라를 건국하였고

가야는 낙동강유역에서

일찍히 벼농사를 지으며 농경문화를 발전시키고

철이 많이생산되서 바닷길을 통해 한군현 , 왜 등과 국제교류를 하고

바로 윗동네 신라에 큰 영향을 주었고

특히 신라가 기술로 유명한 기술강국이었기에

철기 기술이 풍부한 가야를 흡수한 후

철기기술 , 첨단기술과학이 발전해

삼국통일의 원동력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가야철기

 

가야토기

 

신라는 가야를 562년 ,

백제 660년 보다 98년 앞서 합병한 이유로

가야를 당연히 자기것으로 여기며

가야의 존재나 사국시대급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았고

가야는 원래 변한으로서 남한의 세국가를 뜻하는

삼한(마한-백제 , 진한-신라 , 변한-가야)의 개념이었지만

신라는 의도적으로 가야를 한의 자리에서 빼고

북한지역의 고구려를 삼한이라 넣어

삼국 , 삼한 , 고구려+백제+신라 개념이 완성됬고

 

변화한 삼한의식

 

삼국통일을 이루어낸 신라인들의 역사의식이

한국 고대사의 정형으로 만들어져서

의도적으로 가야를 역사에서 뺀 신라인들의 사고가

그대로 신라계 고려대학자인 김부식 삼국사기에도 이어졌고

오늘날 역사학계에서도 이어진 것입니다

 

일연스님이 가야역사를 쓰기도 하셨고

임진왜란때 옛 가야지역 , 경상남도에서

유독 의병이 많이 일어나며

광해군때 경남사람들은 북인이라는 이름으로

경남사람들이 집권했던 유일한 정권이 수립되는데

 

북인 시조 남명 조식이 경상남도 합천군 사람으로서

북인들이 정권을 잡자 가야 재평가가 이뤄졌고

결국 그것은 역사서 동사강목 , 지봉유설의 4국시대관으로 이어지는데

이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며

4국시대 개념은 처참하게 잘리고

가야는 일본식민사관에 의해

4국이 아닌 일본에 속하는 '임나' 로 전락했고

가야는 백제보다 먼저 일본에게 큰 영향을 끼친 나라임이도

백제의 압도적인 영향력에 가려서

그렇게 한국 , 일본 역사계에서 서자취급을 받으며

잊혀진 철의 제국 , 해양강국이 되었습니다

 

일본 스에키 토기에 영향을 준 가야토기

 

가야가 제국이라 불리는 것은 예의상 하는 말이라기보다

삼국시대 , 고구려 , 백제 , 신라는

기본적으로 제국적 면모가 있어서

자국민 이외에도

자국민 밑에 이민족을 둔 상황(왕국과 다른 제국의 형태임)이었고

가야 역시 일본의 원형국가인 왜와 바로 코앞이기에

가야인들이 백제가 일어나기전엔 많이 일본으로 넘어가서

가야-일본의 유물이 상당히 뒤섞여 있는 상황이고

가야인들은 백제가 발호하기 전 남해바다의 강자로서

일본에 국가를 건설하고 영향을 크게 끼쳤기에

가야는 한국사의 또다른 4의 제국이라고도 불립니다

 

삼국시대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와 나란히 섰었던 가야

 

하여튼 ,

이번은 가야주요인물들 이야기입니다

 

[김수로왕]

가야 시조는 김수로왕 , 수로왕으로서

삼국유사에 그 기록이 자세히 있는데

 

김해지역에서 사람들이 모여 살았는데

개벽(천지개벽 , 세상이 열림)한 이후에

이곳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도 ,

군신간의 칭호도 없었고

아홉 간이 있어 아홉마을에 살며

이들을 추장으로 백성들을 통솔하니

모두 7만 5천명이었습니다

 

왕이 나기 전 가야를 지배했던 아홉 추장들(사진과 무관ㅋ 트와이스임ㅋ)

 

백성들은 대부분 산과 들에 스스로 모여서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고 살았습니다

 

후한 광무제 건무 18년(42년) 북쪽의 구지봉에서

이상한 소리가 불려서 백성 2~300명이 모였는데

사람소리같은데 그 모습을 숨기며

 

<???>여기 사람이 있느냐

 

말했고

 

이에 아홉 간들은

 

<아홉명의 추장>우리들이 있습니다

 

이에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이러자

 

<아홉추장>구지입니다

 

<???>황천(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가서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여

이런 이유로 여기에 내려왔으니 ,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기를

 

'거북아 거북아 ,

머리를 내밀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으리'

 

라 하며 뛰면서 춤을 추어라 ,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게 될 것이다

 

이에 아홉추장들은 이말을 따라 모두 기뻐하며

노래하고 춤을추었고

 

김해 구지봉 , 한국관광공사

 

노래하며 춤추는 아홉 이장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러러 쳐다보니

자줏빛 줄이 하늘에 드리워져서

땅에 닿았고

그 줄이 내려온 곳을 따라

붉은 보자기에 쌓인 금합을 발견하고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알 여섯개가 있었고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백번 절하고 얼마있다

알들을 싸서 아도추장(아도간)의 집에 돌아와

책상위에 놓아두고 각기 흩어졌는데

 

12시간 뒤

그 이튿날 아침에 무리들이 모여서

그 상자를 다시 열어보니

여섯알은 어린아이가 되어있었고

용모가 매우 훤칠했습니다

 

이들을 평상위에 앉히고

사람들은 절하고 인사하며

극진히 공경했고

이들은 나날이 자라

10일만에 키가 9자가 되었고

용같이 생긴 아이는

그달 보름에 왕위에 올랐고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해서

이름을

 

'수로' 

 

라고 했습니다

 

알에서 태어난 김수로왕 , 김해가야문화축제위원회

 

나라이름을

대가락 혹은 가야국이라 했고

나머지 다섯사람도 각각

다섯가야의 임금이 되었습니다

 

여섯가야

 

수로왕은

임시로 대궐을 세우게하고 거처했는데

다만 수수하고 검소하니

초가집 지붕은 자르지 않고

흙으로 쌓은 계단은 3척이었습니다

 

(흙과 짚으로 만든 작은궁궐이나 검소는

동양군주의 미덕이자 이상적 군주의 모습이었음)

 

수로왕은 즉위 2년 정월(43년) 에

 

<김수로왕>내가 서울을 정하려 한다

 

라고 하고

이내 임시궁궐 남쪽에 나가

 

<김수로왕>이땅은 협소하기가

여뀌 잎(마디풀)과 같지만

수려하고 기이하여

16나한(부처님의 16제자) 이

살만한 곳이라 할 수 있다

 

하며

이곳에 1500보 둘레의 성과 궁궐과

전당 , 여러 관청청사와 무기고와 곡식창고의

터를 만들었고

두루 나라안의 장정 , 인부 , 기술자들을 불러모아

그달 20일에 성쌓는 일을 시작해

3월 10일에 공사를 끝냈고

궁궐과 옥사(집) 은 농사일에 바쁘지 않은 때를

기다려 이용하니

그해 10월에 비로소 시작해서

갑진 2월(44년) 에 완성됬습니다

 

수로왕은 좋은 날을 가려서

새 궁으로 거동하여 모든 정사를 다스리고

여러 일도 부지런히 보살폈습니다

 

MBC 특별기획 드라마 김수로(2010) 장면

 

[수로왕 VS 석탈해]

수로왕이 즉위한 후

석탈해가 바다를 따라 가락국(가야국)에 왔고

대궐로 나아가 수로왕에 아뢰기를

 

<석탈해>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고자 왔다

 

하니 수로왕이

 

<김수로왕>하늘이 나에게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 함이니 ,

감히 하늘의 명을 어기고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한 우리나라와 백성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이에 석탈해가

 

<석탈해>그러면 술법으로 겨루어 보겠는가

 

하니 수로왕이 좋다했고

탈해가 매로 변신하니

수로왕은 독수리가 됬고

탈해가 참새가 되니

수로왕은 새매가 되었고

이에 탈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니

수로왕 역시 원래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에 석탈해가 엎드려 항복하고

 

<석탈해>내가 술법을 겨루는 곳에서

매가 독수리에게 ,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하였는데

이는 대개 성인이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져서 그러한 것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진실로 어렵습니다

 

하고는 왕에 절을하고 물러갔고

수로왕은 혹시 석탈해가 머물러 있다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해

급히 수군 500척을 보내 쫓으니

석탈해는 계림(신라) 의 국경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왔습니다

 

수로왕에게 털리고 신라로 도망친

석탈해는 결국 지략을 써서

신라에서는 신라왕위를 얻어내는데 성공해

(의지의 석탈해)

 

신라 4대국왕이 됩니다

 

술법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석탈해가 가야 , 신라와 동시에 엮인걸 보면

건국초부터 이렇게 가야와 신라가

서로 바로 근처에서 영향을 주고받았고

가야계와 신라계의 낙동강 or 남해 패권을 둔 보이지않는

세력다툼에 대한 전설일 수도 있습니다

 

가야 보병

 

[허황옥]

48년에 수로왕에게는

구간(아홉추장) 들이 조회할때

 

<아홉추장들>대왕이 강령하신 이래로

아직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셨으니

청컨대 신들의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향려가 되게 하겠습니다

 

했고

이에 수로왕은

 

<김수로왕>짐에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니 짐에게 짝을 지어

왕후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일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

 

라 했고

갑자기 바다의 서남쪽에서

붉은 색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매달고 오고 있었고

수로왕은 그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이내 아홉추장들을 보내서

목련으로 만든 키를 바로잡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그들을 맞이하게 했습니다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하자

왕후가 말하기를

 

<왕후>나는 너희들과 본래 모르는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서로 따라가겠는가

 

했고

 

(대충 호통치며

왜 부하들을 보내냐

수로왕 당신이 직접와서 신부를 맞이하라 !)

 

 

신하가 돌아와 수로왕에게

왕후의 말을 전달하니

수로왕은 직접 행차하여

장막을 쳐서 임시궁궐을 설치하고 기다렸고

 

왕후는 산밖 별포나루에 배를 대고

땅위로 올라와 쉬고

입고있는 비단바지를 벗어

폐백으로 삼아 산신령에게 바쳤고

그들 무리는 노비까지 합쳐서

20여명이었고

가져온

금수능라(수놓은 비단) ,

의상필단(비단 옷) ,

금은주옥 ,

구술로된 장신구

들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왕후가 점점 수로왕이 있는 곳에

가까이 오니

수로왕은 나아가 그녀를 맞아서

함께 궁으로 들어왔고

여러 사람들은 나아가 뵙고 곧 물러갔습니다

 

수로왕은

가야에 온 손님들에게 방 하나씩 주어

편안케 하라 명했고

난초로 만듬 음료와 해초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있는 자리에서 자게하고

옷과 비단과 보화도 주고

군인들을 많이 모아서 그들을 보호하게 했습니다

 

수로왕은 왕후와 함께 침전에 있는데

왕후는 조용히 수로왕에 말하기를

 

<왕후>저는 아유타국의 공주로

성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살입니다

 

본국에 있을때 금년 5월에 부왕과 황후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황천을 뵈었는데

황천은 가락국의 왕 수로라는 자는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곧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것이

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림에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하라

 

라하고 하늘로 올라갔고

꿈을 깬뒤에도 황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을 향해 떠나라'

 

하였습니다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신선이 먹는 대추) 를 찾고

하늘로 가서(선계의 복숭아) 를 찾아

이제 아름다운 모습으로

용안을 가까잏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수로왕 역시

 

<수로왕>나는 나면서부터

자못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에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왔으니

이 사람에게는 매우 다행한 일이다

 

했고 마침내 둘은 혼인하여

이틀밤 , 하루낮을 지냈습니다

 

수로왕과 허황후 , MBC 사극 김수로(2010)

 

또 그들이 타고온 배는 돌려보내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라

이들에게 각각 쌀 10석과 베 30필씩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김수로왕은 허황옥 왕비와 함께

선정을 베풀다

199년에 157세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가락국기 , 수로왕 전설은

신화적 요소가 있어

역사적 사실로 보기는 어렵지만

9간은 가야에 원래 있던 토착 아홉귀족 ,

아홉부족을 상징한다 해석할 수 있고

수로왕 , 허황옥 부부가 이주민 세력일 가능성이

있다 볼 수 있습니다

 

[인도공주 허황옥]

특히 허황옥은 인도공주라해서

더 특이한 전설인데

일부로 불교가 국교인 고려에서

승려출신인 일연스님이

가야의 귄위를 높이며

최대한 엮으려 석가세존의 고향 인도와

엮었다 볼 수도 있는데

근데 워낙 전설이 특이하고

실제로 인도에 아요디아라는 나라가 있어서

진짜 바다건너나 아유타국에서

왔을 수도 있다하고

 

허황옥 루트

 

실제로 삼국유사를 쓴 일연스님은

아무리 불교승려지만

엄연히 역사학자기도 해서

한국전설과 신화를 그대로 모았을 뿐이지

결코 허술하거나 허무맹랑하게

삼국유사를 집필한 인물은 아니었고

뭔가 근거가 충분히 있었고

허황옥 전설 역시

외부인의 바닷길을 탄

가야 유래가능성도 충분히 있고

 

(실제로 고대 제주도도 동남아에서

유입됬다고도 하고

의외로 고대에 바닷길을 통한 국제무역이 조선시대때보다 많았기에

충분히 고대에도 해상루트를 통해

한반도 남부로 인도 , 동남아계가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역사 연구들도 있습니다)

 

허황후가 아유타국에서

배에 실어 가져온 돌로 쌓은

김해 파사석탑 역시

불은 빛의 옥문무늬가 있고 질도 달라

한국에서 나는 돌아 아니라합니다

 

붉은 무늬가 있는 김해 파사석탑

 

허황후는 그렇게 배에 석탑을 실어왔는데

이 석탑은 1000년동안 남쪽 왜의 침략을

막았다합니다

 

<삼국유사 , 금관성 파사석탑>

석탑을 실은 붉은 돛대 깃발도 가벼운데 ,

신령께 빌어서 험한 물결 해쳐왔다.

어찌 다만 황옥을 도와 건넜을 뿐이겠는가.

1000년동안 남쪽 왜의 침략을 막았다

 

허황후 , MBC 사극 김수로(2010)

 

허황후 , 한국과 인도 공동우표

 

[가야계 신라인의 활약]

가야대표인물은

이렇게 건국세력인

김수로 , 허황옥 부부가 가장 유명하고

나머지는 거의 존재감이 미약해

안습한 상황인데

 

가야인들은 신라에 합병된 이후

오히려 신라에서 크게 활약하며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마치 부여인들이

고구려 , 백제에서 활약한 것처럼)

 

[가야의 멸망]

금관가야 마지막왕은

김수로왕의 10세손인

김구해 , 구형왕인데

구형왕 시기 가야는

 

나제동맹을 맺은 신라와 백제가

북방의 고구려와 맞서면서도

후방의 가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524년 신라 최전성기라인의 국왕인

신라 법흥왕이 남쪽지역을 순시하자

가야 구형왕이 직접 찾아가서 만날정도로

가야는 생존활로를 모색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점차 백제는 가야서부 안라국을 공격해

세력권을 확대했고

다급해진 신라 법흥왕은

이사부 장군에게 3천 병력을 주어

가야를 공격하게 했고

이후 신라는 낙동강을 건너 김해를 정복하고

점령주민들을 신라로 이주시킵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중대통 4년 임자에 신라 제23대 법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가락국을 치니

왕은 친히 군졸을 지휘했으나

저 편은 군사가 많고

이 편은 군사가 적어서

맞서 싸울 수 없었다

 

신라 명장 이사부장군의 공격을

대항하지 못한 금관가야는 저항을 그만두고

항복을 선택했습니다

 

[가야 마지막 왕 구형왕의 아들들]

신라에 항복한 금관가야 왕 구형왕 김구해는

왕비와 세아들인

 

맏아들

김세종

 

(세종의 순우리말 이름은 노리부로서 누리는 세상을 뜻해서

박근혜의 새누리당의 그 누리와 같고

한자식으로 세상세자로 세종이고 한자이름이 세종대왕의 세종과 같음)

 

둘째아들

김무덕

 

막내아들

김무력

 

과 함께

자기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했고

법흥왕은 예를 갖추어 대접하고

상등(진골)의 직위를 주었고

금관국을 식읍으로 삼게했습니다

 

가야는 이후 진흥왕때

대가야 합병으로 완전히 멸망하나

법흥왕의 금관가야 합병으로

사실상 멸망한 것과 다름없었고

 

가야인들은 그렇게 신라의

 

'가야계'

 

로서 편입되어 활약했고

가야인들은 의외로

멸망 이후에서야 큰 이름을 날리는

아이러니함이 있습니다

 

가야는 본래 수준높은 철기문화로

일찍이 번성해 중국과 교류하고

왜에 큰 영향을 주었던 국가인데

 

(백제이전 왜국 담당일진이 가야였음)

 

백제가 일어나며 점차 왜에 대한

가야의 영향력도 점차 줄어만 가기 시작했고

이전 티격태격하던 신라는 지증왕대에 이르러

강도높은 개혁을 통해

남한지방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는 해가 되었고

그렇게 차차 입지가 좁아지자

법흥왕 , 진흥왕때 이르러 유구한 역사가 끝나게 되었고

단지 신라와 지리적으로 육로로 근접해있어

서로 큰 영향을 주고받았기에

가야인들은 신라로 합병 , 흡수된 이후에도

별다른 트러블 없이 신라내에서

귀족세력으로 맹활약했고

 

특히나 여기서 중요한건

구형왕의 아들 , 후손들이

모두 신라에서 대활약하며

후손들이 안전하게 가야계 신라인으로서

안위를 보장받게 된 점이 매우 큽니다

 

(미국 건너간 한국계 미국인들이 계속해서 노벨상 딴 격)

 

[김세종(노리부)]

가야 마지막왕 구형왕은 멸망한 망국의 군주임에도

의외로 자식농사는 성공했는데

구형왕의 맏아들 김세종 , 노리부는 이름부터 ㅈ간지라

역사덕후들은 한번쯤 들어볼법한 이름인데

 

한글식 이름 노리부도 뭔가 세상의 사나이 이런뜻이라

ㅈ간지고

한자식 이름인 세종 역시 세상세 자로 세종대왕의 세종과

한자가 정확히 같아서

ㅈ간지인 인물이고

 

뭔가 역사덕후들은

한번쯤 들어본 이름인

구형왕의 맏아들 노리부 , 김세종은

 

원래같으면 장남으로서

금관국의 왕이 되었을 인물이지만

아버지가 결국 신라에 항복하자

같이 항복해 이후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할때

신라장군으로 참전해

죽령 이북 , 고현 이내 10개군을 신라 영토로 편입시켰고

이때 파진찬인 세종은 이후 이찬으로 승진합니다

 

김세종은 이후 백제 공격도 막아냈고

진평왕이 즉위한 뒤 579년에는

신라 귀족 최고수장직인 상대등(국무총리 격) 에

임명될 정도로

가야계임에도 신라사회에서 차별받지 않고

왕 아래 가장 높은 직위까지 승진한 인물이었고

 

망국의 구왕족 가문이

수세대에 걸치지 않고

곧바로 그 세대에 바로 그 국가에서

최고위직에 올라섰다는 것은

그만큼 신라와 가야가 합병이전에도

같은 진한과 변한이라는 삼한의 백성이었던

공유의식 ,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어

사회적 반발이 적었다는 점이고

 

또한 신라가 당대 최강대국으로 성장할 수준으로

군사력 외에도 사상적으로도 열려있고 개방적이고

항복한 자 , 패자에 대해 열려있는 사회였음을

생각해 볼수도 있습니다

 

[백제 성왕의 목을 벤 김무력]

망국의 태자에서 자신을 멸망시킨 나라의

국무총리(상대등) 까지 지낸 김세종도 참 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이례적인 기록인데

 

가야계들은 멸망 이후에도

겹경사가 연속으로 터져서

그런 김세종보다 더 뛰어났던게

바로 김세종의 동생 김무력이었고

김무력은 구형왕의 막내아들로서

역시 이름이 ㅈ간지인데

 

구형왕이 자식들 이름을 되게 가오있고 근본넘치게 지었고

김세종이 세종대왕의 그 세종이라면

김무력은 무력 , 군사력을 뜻하는 그 무력인데

 

그렇게 멸망후 신라 장수가 된 가야왕자 김무력은

이사부의 부관으로서 단양적성 전투에 참여해

고구려가 차지하던 한강유역을 공략하는데 참여해

군공을 세웠으며

 

가야인들이 제작한 가야 철갑무사 토기 , 가야인물형 뿔잔

 

백제 성왕이 신라를 공격해왔을때

백제와 신라 양국의 국운을 건 전투였던

관산성 전투에서 김무력은 백제군주 성왕의 목을 벴고

백제군은 김무력 장군에게 갈려나가

좌평(재상) 귀족 4명과 군사 29600명의 목이 베어집니다

 

백제 신라양국의 운명을 가른 대회전이었던 관산성 전투 , 국방TV 토크멘터리 전쟁사

 

첫째형이자 상대등까지 올라간 김세종도 대단하지만

막내 김무력은 무려 백제 국왕의 목을 베는 군공을 세운

신라의 명장이 됬고

 

그렇게 가야계 김씨들은

멸망후에도 살아남아 신라에서 대성해

신흥무장가문으로 일어나며

신라 사회의 최고위 인물로 급부상합니다

 

가야계가 크게 등용받은 이유는

가야는 고구려 , 백제와 달리

중앙집권형 국가라기보다 교류중심 체제로 발전한 나라였고

가야 지배층들 역시 순장제도를 유지하며

자국백성들은 탄압했기에

 

(왕이 죽으면 살아있는 백성들을 왕 무덤에 같이 묻는 악습)

 

가야의 순장 , 산사람은 무슨죄임 ;; , 대가야 지산리 44호분

 

가야 민심도 딱히 신라에게 먹혀도

비인간적 제도인 순장제도 때문에

자기들의 지배층을 신뢰할 수 없었기에

지증왕때에 순장을 금지한

신라군을 쌍수들고 환영했을 가능성이 크고

악습의 폐지 ,

여기서 바로 신라와 가야의 운명이 갈렸고

 

중앙집권화도 되지 않아

딱히 그냥 부흥운동 ,  반란명분도 없고

가야와 신라가 같은 쌍도인이라서인지 몰라도

소백산맥으로 뚜렷히 갈라져 오늘날에도 사투리가 심하게 다른

전라도(백제) 와 경상도(신라 , 가야) 기도 해서

백제와 달리 가야는 신라와

워낙 지리적으로도 너무 가까워서 원래부터 서로 친숙하기도 했을거고

 

흘러가는대로 스무스하게 신라에 먹혀서

반기도 들 힘도 , 명분도 없던 가야인들이었고

이 상황을 잘아는 신라 귀족사회 역시

가야를 피지배세력이 아닌 동등한 신라귀족으로 편입시켰고

그렇게 가야인들은 대국으로 일어나던 신라에서

자신들의 재주를 마음껏 펼치며 신라에서 큰 이름을 날립니다

 

그렇게 김무력장군이 알짜배기 땅을 따먹고

신라에서 대활약하자

가야계는 신라에서 입지가 넓어졌고

김무력 장군의 아들 김서현 역시

신라장군으로서 활약하였는데

 

[유교 가야와 불교 신라(?)]

제가 위에서 말했듯이

김세종 , 김무력 , 김서현 등

가야 왕실 이름은

좀 근본있어보이는 유교식 이름 , 한문간지가 좀 있어서

ㅈ간지가 난다했는데

 

(옛날엔 한자가 영어격이고 중국이 미국개념이라

한국 지배층들이 점차 한화 , 중국화정책도

국가선진화 정책으로서 주요 국정과업중 하나였고

한글창제 이전까지 한국 지배층에서 유교 , 한자사용이 오지긴 했습니다)

 

비슷한 시기 신라 왕실이름인

김백정 , 김마야 , 김비담 , 김덕만

은 오늘날 한국인들이 보기엔 좀 이질적인 느낌이 강하고

 

(비덕 커플 ㅠㅠ)

 

사실 무근본 사극이긴 했찌만 너무 슬펐떤 비담과 덕만 , 둘다 불교식 이름임 , MBC 사극 선덕여왕(2009)

 

이는 가야계가 유교사상을 받아들여서

왕실에 근본력있는 유교식 이름을 지었고

신라계가 당시에 한창 유행한 불교사상으로

왕실에 불교식 이름을 지었다고 해석할 수 있고

 

반대로 당시 신라왕실은

오늘날 보기엔 뜬금없는 인도식(불교식) 이름이라

법흥왕시기부터 불교뽕을 한창 맞고 있던때라

좀 네이밍 센스가

막 극락으로 가버리는 특이점이 온 상황이었고

 

진평왕 김백정과 마야부인 부부는 참고로

석가세존의 아버지 , 어머니 이름과 같은데

때문에 진평왕 백정과 마야부부는 아들 ,

남성 성자의 출현을 엄청나게 바랬지만

계속 여자아이만 태어났고

그게 바로 이름이 김세존이 될뻔한 김덕만 , 선덕여왕입니다

 

요즘식으로 비유하면

요즘은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고나서

한국 목사가족에서 자식 이름들에게 김요한 , 김베드로 이런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도

있고 신라왕실이 당시 상당히 불교적인 이름이었습니다

 

유교 사상 역시 충효 , 조화를 중요시한

당대 새롭고 선진중국적이고 신선했던 사상이었기에

가야인들은 유교사상을 이용해

망국임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유행하던 신라에

새로운 자극을 불어넣고 망국출신임에도

나름 당대 최신사상격인 유학을 받아들여

세련되고 도도하게 신라사회에 편입됬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여집니다

 

[가야계의 절정 김유신]

김무력 장군의 아들 김서현 역시

김수로왕의 12세손으로서 신라장군으로 활약하며

가야계는 그렇게 신라사회의

신흥무장세력으로 맹활약했고

 

김서현은 비록 신라의 귀족사회에서

인정받은 집안이었음에도

골품제 국가인 신라에서 귀족과 왕족(신라성골) 의 차이는

엄청났고

김서현은 신라왕족 여성 만명과 사랑에 빠져서

선을 넘어버렸고

만명의 아버지 숙흘종이 분노해서

만명을 별채에 감금했는데

만명은 김서현과 사랑의 야반도주(사랑의 도피)를 해버립니다

 

김서현과 만명부인은

그렇게 김유신을 낳아버리는데

김유신은 바로 삼국통일의 주역이자 한국위인인

그 김유신 장군이고

김수로왕의 후손으로서 가야계의 최정점 인물입니다

 

한국위인 김유신

 

김유신은 가야인임에도

삼한일통이라는 그 전무후무의 위업으로 인해

신라에서도 그냥 일반적 국왕 이상의

예우를 받았던 인물이고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는

삼한일통의 또다른 영웅 태종무열왕 김춘추에게 시집가

문명왕후가 되었고

문명왕후는 삼한일통을 완성한 문무왕 김법민을 낳았기에

가야계는 김유신대에 이르러

신라 왕실과도 국혼을 맺고 아예 신라 왕실 핏줄로 뿌리내렸고

 

언양김씨로서 경순왕과 태조왕건의 피가 흐르는

제(라봉봉) 몸 역시

결국 멀리 보면 김유신 장군 , 김수로왕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아아 ,, 나는 강한 것이다 ,,

내몸엔 그분들의 피가 흐르고 있다 ,, 

크큭 ,,)

 

가야인들은 그렇게 멸망 이후에도

화려하게 신라 정계에서 데뷔하고 활약하며

무난하게 신라사회에 안착했고

일찍부터 유학을 중시하고 왕도정치를 추구해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신라사회에서도 적응한

가야인들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우륵과 가야금]

김유신이 가야계의 최정점이라면

'가야계' 가 아닌

진짜 순수 가야인으로서 가야 마지막 불꽃인

또다른 한국 위인이 있었는데

 

바로 한국 대음악가

 

'우륵'

 

입니다

 

우륵

 

우륵은 가야 성열현 출신으로서

대가야 가실왕의 총애를 받았고

가실왕과 우륵은 음악덕후로서

같이 가야금과 가야금악곡을 만들었고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우륵은 악기를 가지고 신라 진흥왕에게 귀순하였고

우륵이 가져온 그 악기의 이름을 가야금이라 했습니다

 

가야가 남긴 불후의 유산 '가야금'

 

우륵이 귀순하자

신라신하들은 가야의 음악은

나라를 망하게 한 음악 , 망국지음이라 하여

극구 반대했지만

진흥왕은

 

<진흥왕>가야가 쇠한 것은

가야왕이 음란해서 그렇지

음악 때문이 아니다

 

라고 말하며

우륵에게 집과 땅을 주어가며 편히 살게 해주었고

우륵은 망국의 한을 노래하며 

신라인들에게 가야의 음악을 가르쳤습니다

 

 

[바다의 왕자 가야]

가야는 그렇게 멸망했지만

한국인 , 일본인들에게

보이고 보이지 않는 수많은 유산을 남겼고

철기 문화 , 토기문화 같은 외적인 면과

가야금 , 가야음악 같은 내적인 면까지

두루 깊은 영향을 남기었고

 

한국내 지명이나 이름 역시

가야계의 영향을 받아

가야계 끝판왕 김유신 장군의 활약시점부터

점차 신라왕실은 가야식 한자 , 유교이름을 사용하였고

 

남한에서 가장 긴 강인 경상도의 젖줄 낙동강 역시

가락국(가야국)의 동쪽을 흐르는 강이라는 뜻의

낙동강이 됬다는 말이 있고

 

일본 역시

문화와 기술을 전해준 백제를 매우 중요시하고

가야는 그냥저냥 여기나

실제로 가야가 일본에 기마 , 철기 , 토기같은

기본적 생존 기술을 전해줬다 할 수 있고

백제는 이후에서야 글자나 옷만들기 , 집짓기 등

고급 문화 기술을 전해줬다고 보면 될것입니다

 

백제 이전에 가야인들이 배타고 건너가

대규모 일본 이주러쉬가 있었다는 생각이고

가야인들은 마치 고구려와 백제를 동시에 건국해버린

부여인들과 같이

신라에 큰 영향을 끼치고 일본을 건국한

남해바다의 패자이자

또다른 보이지 않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조상이었습니다

 

<라봉봉>가야는 근데 한국사에서

딱 존재감이 부여보다 조금 높은 정도고

이전 안타깝게도 저도 이야기를 쓰는데

깜빡하고 고구려 , 백제 , 신라 위주로 쓰고

가야이야기는 거의 쓰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존재감이 적고 미약하나

삼국 성장전에 북방에서 부야가 일진노릇을 했듯이

남방 , 남해에선 가야가 일진이었고

옛날 고대는 지금처럼 국경이 있고 그런 시대는 아니었기에

그냥 삼국인들 그리고 삼국이전 가야인들은

바로 옆 일본으로 배타고 되게 많이 건너갔습니다

 

가야는 중앙집권화보단 교류체제로 발전했다하고

그래서인지 가야는 여섯국가로 나뉘어 연맹왕국 성격이었고

또 건국신화부터 국제부부 , 다문화가정이었습니다 (한인커플 , 한인부부)

 

가야는 허황후의 인도~한국 해상루트가 사실이라면 참 대단한게 맞긴 맞지만

부여인들처럼 막 유목민족의 광활하고 기상있고

자주적인 그런느낌이라기보다

 

뭔가 가야는 신라녀석들이 좋아할 법하게

응큼 , 음습하고 찐따미가 있고 기술 , 공돌이형 이과국가가 아니었을까 싶고

덕분에 신라로 아주 스무스하게 편입됬고

신라는 가야를 매우 쉽게 합병해

낙동강 곡창지대를 확보하고 이후 한강곡창지대도 먹어서

2대 생산지대를 확보한 신라는

서로는 백제를 제압하고 북으로는 고구려의 남진을 막아낼 수 있었고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됬고

철기나 토기 , 재련 , 음악 등 가야 기술자들이 신라를 보이지 않는 면에서

크게 발전시켰을 것입니다

 

같은 과메기를 즐기는 쌍도인이기도 해서

너무 스무스하게 신라와 가야가 한몸이 되서 합병이후에도

신라는 가야에 대해 별 탈이 없었던 거고

 

반대로 홍어를 즐겨먹던 라도인들의 나라인

백제는 지배층이 부여계라 만주에서 온 녀석들이라

근본부터 신라 , 가야랑 좀 달라서

신라의 백제 합병이후에도 전라도는 계속해서 민주화운동이 오지게 일어났고

오늘날까지 여러 지역갈등이 남아있는게 아닐까도 싶습니다 (주절주절 , 아님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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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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