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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후기 인물들>

[광개토대왕의 꿈]

[광개토대왕의 영토확장]

[고구려 천하관]

[장수왕의 평양천도]

[도림과 개로왕의 바둑]

[재증걸루와 고이만년]

[조다]

[문자명왕의 부여정복]

[춘향전의 원조인물 한주]

[사랑과 전쟁 을밀]

[고구려인의 사랑]

[안장왕과 양원왕]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라봉봉>

 

[광개토대왕의 꿈]

고국양왕이 사망한 후

고국양왕의 태자 고담덕은 왕위를 이어

고구려 19대왕 광개토대왕이 되었고

공식 명칭은 '광개토왕' 혹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으로서

한국사에서 세종대왕과 더불어 유이하게 한국 민중들에게

'대왕' 으로 불리는 인물로서

광개토대왕은 고조선을 승계한 고구려 태왕으로서

중국에 뺏긴 고조선 영토를 수복하고

한국 영토를 크게 넓혔던 왕으로

실제로도 생각이 대범하고 포부가 컸던

한국판 알렉산더 대왕입니다

 

광개토대왕

 

 

보통 정복왕들은 당연 전쟁을 했으니 학살자라는 오명을 피할 수는 없고

함부로 미화나 용인해서도 안되지만

역사책에서 평생을 전장속에서 살았던

알렉산더 대왕 ,광개토대왕 , 칭기즈 칸 , 나폴레옹 등은

영웅적 위인으로 여기는 이유는

일반적 전쟁광 임금이라기 보다는

 

자칫하면 사라져버렸을 민족을 통합했다는 점 +

인품

 

때문이고

작은 명예와 이익을 탐하지 않고

큰 영광과 명성만을 추구했다는 점 ,

전쟁을 위한 전쟁이 아닌

힘에 의한 평화를 추구했기 때문에

역사에 정복군주임에도 일반적 정복군주나 독재자가 아닌

영웅적 서사가 많은 인물로 여겨집니다

 

광개토대왕이 나오는 판타지사극 '태왕사신기(MBC 2007)'

 

물론 전쟁이나 이런 것때문에 내로남불의 개념일 수도 있으나

이 인물들은 실제로 적들도 인정했을만큼의 인물이었고

보통 광개토대왕은 한국사 최전성기 왕으로 이야기 됩니다

 

엄밀히 보면 조선 세종대왕도 있고

요즘 한국 역사학계에서 슬슬 재조명 되고 있는 고려 현종도 있지만

가장 무력적으로 강했고 민족적 기상을 동서남북으로 떨친 때가

고구려 19대왕 광개토대왕 시기였고

현종과 세종도 매우 뛰어난 현군이었지만

광개토대왕은 현종이나 세종처럼

수비하거나 뒷짐지고 뒤에서 군사들을 출격시키는 임금은 아니었고

마치 알렉산더 대왕처럼 직접 갑옷을 입고 고구려 군대를 이끌었기에

영웅적 풍모로 묘사되는 인물이고

동서남북 말발굽이 가는 곳마다 승리한

친정을 한 임금이자 고구려의 위엄을 떨친 대왕이었습니다

 

안악 3호분 고구려 군대 행군 벽화

 

 

고구려 무사들

 

정복군주 시대 이전 시대는 항상 반드시

국고와 내정을 잘 다져놓은 현군들이 있길 마련이라

사실 광개토대왕 혼자만의 영웅적 업적이 아닌

선대왕들의 업적이 모인 것이지만

 

당시 고구려 역시 넓어진 영토속에서

남으론 백제 , 서로는 중국제국이라는 새로운 위기를 맞고 있었고

전략시물레이션 게임을 할때에도

고구려 같은 평야지대는 광대한 영토에서

막대한 자원을 뽑아낼 수는 있지만

동서남북이 위협적이기에

오히려 땅은 좁아서 생산성은 떨어져도

신라같은 지역이 한곳만 방어하면 되서

유리한 점도 있고 이런 상황속에서

광개토대왕이 고구려내 부족들을 통합하고

동서남북을 정복하며 고구려의 힘에 의한 평화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의 정복영역

 

그리고 광개토대왕은 자신이 생각하는

고구려 천하관을 열었고

광개토대왕의 꿈 , 고구려천하관은

중화민족 한민족을 구분시키고

한민족 울타리안에 고구려+백제+신라를 포함시켜서

오손도손 풍요롭고 화목하게 살려했고

한민족 울타리 밖에 중국과 왜는 분리시켜서

그들과 다름을 규정지었고

 

광개토대왕의 꿈은 오늘날 '한민족' 이라는 우리민족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의 꿈 , KBS 한국사기

 

그런거 때문에 우스개소리로 광개토대왕이 한민족 국부라는 이야기도 있고

우스개소리만은 아닌게 징기스칸이 나타나기 전 몽골민족이

소수민족으로서 한때는 맹위를 떨치다 사라져버린 흉노나 선비촉처럼

중국에 동화되거나 사라졌을 가능성도 컸기에

몽골민족들은 징기스칸을 일반적 정복자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국부로 여기고 있고

한민족 역시 광개토대왕이 최초로 백제와 신라를 고구려민족안에 포함시켰던거 때문에

광개토대왕을 일반적 정복군주로 여기지만은 않고 있고

한글을 만드신 세종대왕과 더불어

한민족개념을 만드신(?) 광개토대왕을

유이하게 대왕으로 부르며 한국위인에 포함시키고 있고

예우해서 광개토대제 , 광개토태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광개토대왕은 약소국 신라에

고구려군을 주둔시켰고

신라에는 고구려 사상 , 고구려천하관이 그대로 전파되어

훗날 삼한통일의식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광개토대왕의 웅대한 사상은 한민족에게 그대로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이 신라에 하사한 호우명그릇

 

[광개토대왕의 영토확장]

하여튼 ,

문답무용 , 짧고 굵었던 광개토대왕은

즉위하자마자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해 10개의 성을 점령했고

북쪽으로 거란을 정벌하며 거란으로 도망친 고구려 백성 1만을

달래어 돌아왔고

다시 남으로 가서 백제 요새 관미성을 점령해 남방요충지대를 확보합니다

 

광개토대왕은 동서남북으로 영토를 넓히며

동부여를 정벌했고

당시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던 남쪽의 백제를

단숨에 제압해 아리수(한강) 를 건너

백제수도를 압박하여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았고

남쪽으로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백제에게 괴롭힘 당하던 신라를 구원하며

신라를 부하국가로 삼으며 한반도 전부를 고구려 천하에 포함시켰고

 

고구려 천하관 영역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백제와 신라 양국을 모두 멸망시킬 수 있었음에도

당시 실제로 상당히 너그럽게 봐주며

남쪽의 속국으로 삼는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물론 당시 고구려 국력으로는 백제 , 신라 멸망시키기가 가능은 했어도

무리가 상당했던 일이었기에 광개토대왕이 멸망보다는

속국으로 만들며 무리하지 않고 지혜롭게 물러난 것이었고

 

참고로 전쟁에서 승기를 잡아도 완전히 압도하지는 않을 경우엔

일부로 적국을 멸망시키지 않거나

적국 왕을 살려주는것도 하나의 전략이고

삼국시대 말기때 승리에 눈먼 신라군이 포로로 잡은 백제 성왕을 참수하며

백제인들의 적대적 증오를 불러왔고

오히려 이럴 경우 적국 왕을 살려두는게

적국내에서 내부분열이 커진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광개토대왕이 전략전술을 진짜 제대로 알았던 것이고

이후에도 몽골이 일부로 고려를 멸망시키지 않고 중국인 견제에 집중했다거나

청나라가 항복한 조선 인조를 일부로 살려두며

명나라 공격에 집중할 수 있었고

고려와 조선에 극심한 혼란을 불러일으켰다는 점

등의 사례가 있기에 실제로 광개토대왕이 전략가적 인물이었다는 생각입니다

 

한민족이 발흥한 지역이자 고구려 중심지인 만주는

한국과 중국의 교통지였고

한반도를 안정시킨 덕분에 광개토대왕과 이후 고구려왕들은

서쪽의 중국을 견제하는데 집중할 수 있었고

이는 이후의 북방 유목민족들의 기본 전술이 되어

금나라 , 몽골 , 청나라가 광개토대왕 전술을 그대로 써먹으며

항상 한반도를 먼저 제압해

한국은 멸망은 시키지 않고 속국으로만 만들어 안정시킨 뒤

(후방안정)

 

풍요로운 중국을 침공하는

유목민족들의 기본 공식이 성립됩니다

 

[고구려 천하관]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항복을 받은 뒤부터는

곧바로 요동을 공략하여 고조선 영역을 수복해냈고

이때를 기점으로 고구려는 이전 고조선 영역과 비슷한 땅을 확보하며

정복과 팽창보다는 수비하는 형세로 바뀌었고

점차 우리가 아는 만주 , 고구려 영역이 이때 형성됩니다

 

광개토대왕의 영토확장 우표

 

전성기 고구려 영역

 

광개토대왕때부터 고구려인들의 민족적 자부심은 커졌고

고구려가 동아시아의 대국으로 굴기한 시작이었고

고구려 독자적 천하관이 형성되며

고구려인들은 광개토대왕을 기리며

광개토대왕릉비를 조각했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

 

이때부터 고구려는

백제 , 신라 , 동부여를 고구려 천하 일부로 취급하며

민족적 당위성을 만들었고

 

반대로 패려 , 숙신 , 후연 , 왜는

이민족으로 여기며 무참히 분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삼국통일의식의 시초가 이때 형성됩니다

 

또한 신라가 당시 고구려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는데

신라는 당시부터 고구려 문화를 받아들이며

고구려에 동화되었고 이로인해  

고구려인들의 상무적 기풍과 삼한통합정신은 후대 신라인들에게

그대로 나타납니다

 

[장수왕의 평양천도]

광개토대왕 사후

광개토대왕의 맏아들 , 태자 고거련이 왕위를 이어

고구려 20대왕 장수왕이 됬고

이때부터 주변국들도 강성한 고구려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고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대왕에 이은 고구려 명군이었고

장수왕은 남쪽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고

79년간 재위하며 고구려를 안정시켰습니다

 

장수왕의 평양천도

 

장수왕대부터 고구려는 남한의 풍요로움을 느끼고

점차 남진정책을 시작하였고

장수왕은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왕의 도읍지 한성을 점령한 후

백제왕 부여경(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천명을 생포했고

이날 백제(한성백제)는 멸망해

풍전등화의 위기속에서

백제태자만 겨우 남하해서

충청도로 웅진(웅진백제)으로 수도를 옮기게 됩니다

 

한성백제 복원모습

 

[도림과 개로왕의 바둑]

고구려 장수왕의 백제 한성함락 당시 숨겨진 공신이 있었는데

바로 고구려 승려 도림이었고

 

<신채호>장수왕은 외교의 수단으로

지나(차이나 , 중국) 의 위 , 송을 견제하고는

백제를 파멸시키기에 전력하였다

 

그러나 왕은 부왕 광개토왕과 같은 전략가가 아니라

흉칙하고 악독한 음모가였다

적국에 대하여 칼이나 활로 정면을 공격하지 않고

먼저 간사하고 악독한 계책으로 심복을 썩인 뒤에

손을 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

비밀히 조서를 내려 백제의 내정을 문란케 할 기묘한 계략을 가진

책사를 구하였는데 ,

그 조서에 응하여 불교승 도림이 나섰다

 

장수왕이 백제를 치기 위해

백제에 가서 첩자노릇을 할만한 자를 구했는데

이때 승려 도림이

 

<도림>소승이 원래 도는 알지 못하지만

나라의 은혜에 보답코자 합니다

 

('호국불교' 사상으로서

다른 불교국가에는 없는 한국 특유의 불교사상이었고

한국은 이후부터 나라가 위기에 처할때마다 승려들이 앞장서서

군대에 나섰음)

 

원컨대 대왕께서는 저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마시고

일을 시켜 주신다면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을 기약합니다

 

 

장수왕이 기뻐하며

비밀리에 도림을 보내 백제를 속이도록 했고

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지어 도망하는 체 하고 백제에 왔습니다

 

당시 백제 개로왕은 장기와 바둑을 좋아했고

고구려 승려(+첩자) 도림이 백제 한성(오늘날 서울특별시)대궐 문에 이르러

 

<도림>제가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워

상당한 묘수의 경지를 알고 있으니

왕께 돌려 드리고자 합니다

 

했고

개로왕이 그를 불러들여 대국을 해보니

과연 국수(나라에서 뛰어난 바둑기사) 였습니다

 

백제 바둑판 목화자단기국 , 일본국보

 

개로왕은 이로인해 도림스님을 높은손님으로 대우하고

매우 친하게 여겨

서로 늦게 만난 것을 한탄했고

아침저녁으로 어울려 바둑동무가 되었습니다

 

개로왕은

 

<개로왕>나의 바둑적수는 천하에 오직 도림 한 사람 뿐이다

 

하며 도림을 사랑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개로왕과 도림

 

도림은 몇 해 동안 개로왕의 곁에 있어

개로왕의 성격과 행동을 자세히 알아보고서는 

하루는 개로왕을 모시고 앉아서

 

<도림>저는 다른 나라 사람인데

왕께서 저를 멀리 여기시지 않고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나 ,

다만 한 가지 재주(바둑)로 보답했을 뿐이오 ,

아직 털끝만한 이익도 드린 적이 없습니다

 

이제 한 말씀 올리려 하오나

왕의 뜻이 어떠한지 알 수 없습니다

 

개로왕은

 

<개로왕>말해보라

만일 나라에 이롭다면 이는 선생에게서 바라는 것이로다

 

이에 도림은

 

<도림>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 , 언덕 , 강 , 바다이니

이는 하늘이 만든 요새이지

사람의 힘으로 된 지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갖지 못하고

다만 받들어 섬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마땅히 숭고한 기세와

부유한 치적으로

남들을 놀라게 해야 할 것인데

성곽은 수축되지 않았고

궁실은 수리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선왕의 해골은

들판에 가매장되어 있으며 ,

백성의 가옥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니 ,

이는 대왕이 취할 바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개로왕은

 

<개로왕>좋다 ! 내가 그리 하겠다

 

하고는

백성들을 모조리 징발해

흙을 구워 성을 쌓고

 

(백제가 흙성 , 목책 이런걸 되게 좋아했고

이 전통은 일본에 그대로 전해짐ㅋㅋ)

 

그 안에는 궁실 , 누각 ,사대(활놀이 장소) 를 지으니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또한 욱리하에서

큰 돌을 캐다가 판을 만들어

아버지의 해골을 장사하고

사성 동쪽으로부터 숭산 북쪽까지 강을 따라 둑을 쌓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창고가 텅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져서

백제에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났고

나라의 다급하고 급박한 형세가

쌓아놓은 계란(누란) 처럼 되었습니다

 

 

백제 개로왕이 뜬금없이 바둑친구 도림의 말을 듣고

무리한 궁궐공사를 하자 나라가 피폐해졌고

백제가 ㅈ되 버리자

도림은 다시 도망쳐 고구려로 돌아와

이 사실을 장수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재증걸루와 고이만년]

장수왕은 기뻐하며 백제를 치려

장수들에게 군사를을 나누어주었고

 

고구려 침공소식을 들은 개로왕은

뒤늦게 백성들이 쇠잔해지고 군대가 약해진 것을 깨달았고

아들 문주(부여문주) 에게 

울면서 하루빨리 남쪽으로 난리를 피해 왕통을 이으라 명했고

 

고구려 대로 제우 , 재증걸루 , 고이만년이

 

(두글자 성 , 복성으로서 성이 재증씨 , 고이씨임)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성을 공격한지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쪽 성으로 옮겨 공격하자

성 안이 위험에 빠지고

개로왕은 도망하여 나갔는데

고구려 장수 재증걸루에게 잡혔고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원래 벡제 사람이었는데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해 고구려의 백제침공 앞잡이가 된 것이었고

재증걸루는 붙잡은 백제 개로왕에게 두 번 절을 하더니

갑자기 개로왕의 얼굴에 세 번 침을 뱉고서

죄목을 따지며 꾸짖은 다음 개로왕을 아차성 밑으로 묶어보내 죽였습니다

 

옛 개로왕 신하였던 고이만년과 재증걸루

 

개로왕이 죽은 곳 아차산성

 

이로인해 백제는 건국이래 가장 최악의 위기를 맞게 되어

한성백제시대를 끝내고 웅진백제시대가 시작되었고

고구려는 알짜배기 꿀땅 한성 , 한강유역을 정복하며

더욱더 강성한 위세를 떨쳤습니다

 

장수왕때부터 고구려의 남하에 위협을 느낀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을 맺으며 연합하여 고구려에 맞섰고

웅진천도후 두려움에 떨던 백제와 신라는 더욱더 동맹체제를 강화합니다

 

장수왕은 그렇게

고구려 국내성에서 태어나서 고구려 평양성에서 죽었고

장수왕은 평양천도 , 한성함락이라는 업적 외에도

매우 오래살아 재위기간만 79년으로서

무려 97세를 살았던 인물이고

그래서인지 시호가 장수로서 오래산다는 그 의미의 장수가 맞습니다

 

[조다]

장수왕의 아들은 고조다였는데

아버지가 너무 오래살자 조다는 왕위를 잇지 못하고

아버지보다 먼저 죽어버렸고

이에 오늘날 사람들은 이런거때문에

찐따 , 못나고 별별치 못한 사람을 뜻하는

'쪼다' 의 어원이 혹시 조다가 아닐거냐는 우스개소리가 있씁니다

 

고구려 최전성기 명군라인에 낀 조다(;;)

 

[문자명왕의 부여정복]

하여튼 , 장수왕이 너무 오래살다 죽자

조선 최장수왕 영조임금 다음에 영조의 손자 정조가 왕위를 이은 것처럼

장수왕의 손자 , 고조다의 아들 고나운이 왕위를 이어

고구려 21대왕 문자명왕이 됬고

 

장수왕은 아들 조다가 일찍 죽자

손자 나운을 궁중에서 길러 장손으로 삼았고

장수왕이 사망하자 고나운이 왕위를 이었습니다

 

문자명왕 역시 명군이었고

이때 부여왕이 처자를 데리고 와서 나라를 바치고 항복해

부여는 이전부터 여러 부여계 민족으로 나뉘어있어서

고구려 , 백제 , 신라처럼 어느 하나의 특정국가라기 보다는

여러 뜻을 가진 이름이었고

고구려가 예전부터 부여를 계속해서 흡수하던 상황이었는데

길고긴 투쟁속에 문자명왕때를 기점으로 완전히 고구려의 영토로 포함되고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문자명왕대 형성된 고구려 최대영토

 

문자명왕은

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으로 이어지는

고구려 최전성기라인 마지막 임금으로 이야기 되고 있고

문자명왕 이후부터는 점차

남쪽의 신라가 극도로 강성해지기 시작했고

웅진으로 쫓겨난 백제 역시 무령왕이라는 걸출한 중흥군주가 등장해

고구려는 장수왕대처럼 적극적인 남진정책에 제동이 걸렸고

고구려 위세는 이후부터 점차 줄어들었고

문자명왕 이후에도 대국은 대국인만큼 고구려는 강성하긴 했지만

예전만 못했고

보통 고구려 최전성기는 문자명왕을 마지막으로 보고 있습니다

 

[춘향전의 원조인물 한주]

문자명왕 사후

문자명왕의 맏아들 태자 고흥안이 왕위를 이어

고구려 22대왕 안장왕이 되었고

 

안장왕은 춘향전의 원조 인물로서

고구려판 이몽룡이었던 인물이고

김부식 삼국사기가 아닌 신채호 선생님이 쓴 조선상고사에

그 이름을 남긴 인물입니다

 

한국 대표 고전 춘향전

 

고구려 안장왕이 태자였던 시절에

안장왕은 상인 행장을 하고 개백현(고양 행주) 로 염탐을 갔는데

그 당시 그 지방의 한씨의 딸 한주(구슬 주라서 고양시에서는 한구슬이라 함) 는

절세의 미인이었고 안장왕은 백제 정찰관의 눈을 피하기 위해

 

(당시 한강유역은 백제가 옛 수도를 필사적으로

수복하려 노력하는 형세였기에

고구려 , 백제가 업치락 뒤치락해서

고구려 영역이라기만 하기도 어렵고 국경지대였음)

 

한씨의 집에 도망쳐 숨어있다가

한주를 보고는 놀라고 기뻐하여

몰래 서로 정을 통하고 부부가 되기로 약속했습니다

 

흥안태자와 한주

 

그 후 흥안태자(안장왕)는 은밀히 한주에게

 

<흥안>나는 고구려의 태자이니

귀국하면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이 땅을 취하고

그대를 맞이할 것이다

 

라고 말하고 귀국하였고

그런데 개백의 태수가 한주가 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는

그녀를 첩실로 맞이하려 했는데

한주는 마음에 남자가 있다면서 죽기를 결심하고 거절했습니다

 

태수는 한주를 옥에 가두어 사형시키겠다고 위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온갖 달콤한 말 꾀려고 했고

 

이에 한주는 옥중에서 노래를 지어

 

<한주>죽어죽어 일백 다시 죽어

백골이 진토되고 넋이야 있건없건

임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노래부르니 듣는 이가 다 눈물을 흘렸고

 

옥중 춘향이

 

이에 태수는 그 노래를 듣고 더욱 주의 뜻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죽이기로 작정했고

안장왕은 한주가 갇혀 있음을 몰래 탐지하여 알고

짝없이 초조하나 구할 길이 없어

안장왕은 왕위를 이어받은

개백을 점령하고 한주를 구하는 자에게

천금의 금과 만호후의 직위를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사랑과 전쟁 을밀]

그런데 아무도 응하는 자가 없었는데(ㅋㅋ;;)

그러자 장군 을밀이 안장왕의 여동생인 안학공주를 사랑하고 있다고 밝히며

그녀를 달라고 했고

안장왕은 이전부터 절세미인이었던 누이 안학과

을밀이 사랑하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을밀의 문벌(집안)이 한미하다고 허락하지 않았고

이에 을밀은 병을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집에 틀어박혀 있었는데

이때 이르러 안장왕에게 나아가 뵙고서는

 

<을밀>천금과 만호후의 상이 다 신의 소원이 아니라

신의 소원은 안학과 결혼하는 것뿐입니다

 

신이 안학을 사랑함이

대왕이 한주를 사랑하심과 마찬가지입니다

 

대왕께서 만일 신의 소원대로

안학과 결혼하게 하신다면

신이 대왕의 소원대로

한주를 구해오겠습니다

 

하니

안장왕은 안학을 아끼는 마음이 한주를 사랑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결국 을밀의 청을 허락하고 하늘을 가리켜 맹세했습니다

 

을밀의 소원과 안장왕의 소원

 

안장왕은 을밀에게 수군 5000명을 내주어 개백을 치게 했고

을밀은

 

<을밀>신이 먼저 백제를 쳐서 개백현을 회복하고 한주를 살려낼 것이니

대왕께서 대군을 거느리고 천천히 육로로 쫓아오시면

수십 안에 한주를 만나실 겁니다 

 

하고는 개백에 다다른 을밀은 비밀히 결사대 20명을 뽑아서

평복으로 무기를 감추고 성 안으로 들여보냈고

 

마침 개백 태수가 생일잔치를 벌이며 한주가 마음을 돌리기를 바라며

사람을 보내 꾀었습니다

 

<개백 태수>오늘은 내 생일이다 ,

오늘 너를 죽이기로 정하였으나

네가 마음을 돌리면 곧 너를 살려줄 것이니

그러면 오늘이 너의 생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주는 대답했습니다

 

<한주>태수가 내 뜻을 빼앗지 않으면

오늘이 태수의 생일이 되갰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태수의 생일이 곧 내가 죽는 날이 될 것이오

내가 사는 날이면 곧 태수의 죽는 날이 될 것입니다

 

 

이에 태수는 크게 분노해

한주를 빨리 처형하라 명했고

이때 을밀의 장사들이 춤추는 손님으로 가장하고

잔치에 들어가 칼을 빼어 많은 손님을 살상하고

고구려 군사 10만이 입성했다고 외치니

성안이 크게 어지러워졌습니다

 

을밀은 군사를 몰아 성안을 넘어 들어가서

감옥을 부수어 한주를 구했고

안장왕이 대군을 몰고 남진하니 한강 일대의 성읍들이 항복했습니다

 

이에 백제가 크게 동요했고

안장왕은 아무런 방해없이

한주를 만났고 안학은 은밀에게 시집보냈습니다

 

한주가 높은 산에서 봉화를 들어

안장왕을 맞이한 곳이

오늘날 경기도 일산의 고봉산이 됬고

오늘날 고양시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고봉산 전설

 

(제가 엄청 어렸을때 잠시 고봉산쪽에서 살아서

이 이야기는 아주 잘 암ㅋㅋ

참고로 일산은 하나의 산이라는 단순한 뜻이고

그 산이 바로 고봉산임ㅋ)

 

안장왕(+한주)과 을밀장군(+안학) 은

그렇게 고구려 러브스토리를 남긴 인물들이었습니다

 

사랑은 원 플러스 원

 

[고구려인의 사랑]

특히 고양시 , 일산 근본전설인

한구술 , 한주 설화는

옥에 갇힌 여인이 고을 수령의 유혹에도

옛 정을 통하고 떠난 한 남자만 바라보며 절개를 키키고

변장한 사람들이 수령의 잔치에 나타나

잔치를 뒤집어 엎고 여인을 구해 꽃가마를 태워준다는 것은

춘향전의 서사와 아주 유사하며

 

흥안태자와 한주 설화나

집안이 미천했던 을밀 장군이 고구려 안학공주를 사랑하며

안장왕에게 공을 세울테니 안학공주를 달라 요구한 것은

고구려인들이 그만큼 신분에 얼매이지 않고

진취적이고 당찬 사랑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

그 정점은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고구려 러브스토리인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설화였고

실제로 고구려는 기록에서도

 

'노래와 춤을 즐겨 밤에 남녀가 떼 지어 놀았다'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 바로 했다'

 

'형수도 부인으로 맞아들인다'

 

'(결혼할 때) 남자 집에서는 돼지와 술만 보냈고

재물을 주는 예절은 없었다

혹시 재물을 받으면 모두 이를 부끄럽게 여겨

딸을 노비로 팔아먹은 것이라 여겼다'

 

고구려 벽화속 춤추는 남녀

 

라는 기록이 있을정도로

진취적 성향의 국가였던

고구려 , 고려는

 

대체적으로  보수적 성향의 국가였던

신라 , 조선과 연애방식도 정반대의 양상이었고

 

(고구려 , 고려는 자유연애혼이고

신라 , 조선은 집안끼리 혼인 , 정략결혼 형태였음)

 

혼인때 재물을 주고받는 것을 염치없는 것으로 규정한 고구려인들은

특이한 점은 고구려 부부들은 혼수로 수의를 준비했다하고

 

<위지동이전>고구려인들은 남녀가 결혼하면

먼저 자신이 죽을 때 입을 수의를 만들어 놓는다

 

수의는 사람이 죽을때 입는 옷으로서

고구려인들은 잦은 이민족의 침략으로

언제 어디서 죽음을 맞을 지 모를 정도로

긴박한 삶 속에서 살며

고구려는 상무정신을

국가 건국때부터 멸망때까지 일관되게 유지한 나라였고

 

광활한 대륙을 호령하던 초강대국 고구려인들은

스파르타처럼 항상 강한 전사를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고구려인들은

무를 숭상하는 상무정신 ,

하늘의 자손이라는 강한 선민의식을 바탕으로

고구려가 세상의 중심임을 표방하는 엄청난 민족의식을 갖고 살았고

고구려인들은 사랑에 있어서도 결코 나약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한국인들이 고구려 , 고려 사극을 보고

신라 , 조선과는 전혀 다른 가슴뛰고 웅장함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이런 고구려인들의 정신 때문이었고

 

우씨왕후 , 후녀 ,  안장왕과 을밀 , 평강공주와 온달 등

고구려인들은 남녀 , 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자신이 선택한 사랑을 택하였고

신분과 운명앞에 당당히 맞섰습니다

 

 

[안장왕과 양원왕]

안장왕 사후

안장왕이 아들이 없어

안장왕의 아우 고보연이 왕위를 이어

고구려 23대왕 안원왕이 되었고

이때부터 고구려 쇠퇴기가 시작됬고

당시 별다른 사건은 없이 조용한 치세가 이어졌습니다

 

안원왕 사후

맏아들 태자 고평성이 왕위를 이어

고구려 24대왕 양원왕이 되었고

 

양원왕대부터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 영토를

배부분 백제와 신라에게 빼앗기며

광개토대왕때부터 100여 년간 이어진

고구려 전성기가 끝나고

급부상한 신라에게 한반도 정세 주도권을 넘겨지게 됩니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양원왕 사후

양원왕의 맏아들 태자 고양성이 왕위를 이어

고구려 25대왕 평원왕이 됬고

평원왕은 평강왕 , 평강상호왕이라고도 불리며

그 유명한 평강공주의 아버지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평원왕때

온달이란 사람이 살았습니다

 

온달은 얼굴이 못생겨서 울툭불툭하고

성도 없는 거지였으나

마음은 밝고 시원했습니다

 

온달의 집에는 눈 먼 노모가 있어 늘 밥을 빌어다가 대접했고

그 밖에는 일이 없어 거리를 오락가락했습니다

 

가난하고 천한 자를 업신여기는 것은

사회의 상정 (인지상정) 이라

고구려 사람들은 바보도 아닌 온달을

모두 바보 온달이라 불렀습니다

 

(즉 온달은 실제로 정신장애를 가지거나 바보는 아니었고

너무 가난해서 고구려 사람들이 바보라 놀린 것임)

 

찐따 온달ㅠㅠ

 

고구려 바보로 너무 유명했던 온달은 어느새

평원왕도 알 정도였고 (;;)

평원왕에게 따님 하나가 있었는데

어릴 때 울기를 잘하므로

평원왕이 사랑 끝에 실없는 말로 공주를 달래기를

 

<평원왕>오냐 오냐 , 울지 마라

울기를 좋아하면 너를 귀한 집 며느리로 주지 않고

바보 온달의 계집으로 만들 것이다

 

하고 울 때마다 을렀는데

평강공주가 장성해 시집갈 나이가 되어

평원왕은 공주를 상부의 고씨 에게 시집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평강공주는

 

<평강공주>아버님께서 늘 저더러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낸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와서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시면

그 말씀이 거짓말이 되지 아니합니까 ?

 

저는 죽어도 바보 온달에게 가서 죽겠습니다

 

하고 반대했습니다

이에 평원왕이 크게 노하여

 

<평원왕>너는 만승천자 (존귀한 황제) 의 딸이 아니냐 ?

만승천자의 딸이 거지의 계집이 되겠단 말이냐 ?

 

그러나 평강공주는 듣지 않고

 

<평강공주>필부(보잘 것 없는 사내) 도 거짓말이 없는데

만승천자로서 어찌 거짓말을 하실 수 있습니까 ?

저는 만승천자의 딸이기 때문에

만승천자의 말씀이 거짓말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온달에게 시집가렵니다

 

라고 했습니다

평원왕은 어찌할 수가 없어서

 

<평원왕>너는 내 딸이 아니니 내 눈 앞에 보이지 말아라

 

하고 대궐에서 내쫓았습니다

 

평강공주는 나올 때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다만 금팔찌 수십 개를 팔에 끼워가지고 나와서

벽도 무너지고 둥만 남은 온달의 집을 찾아들어 갔습니다

 

블링블링 평강

 

온달은 어디 가고 노모만 있는 지라

그의 앞에 절하고 온달이 곳을 물었습니다 

 

노모가 눈은 멀었지만

코가 있어

귀한 따님에게서 나는 향내를 맡고

귀가 있어

아리따운 미인의 목소리는 들을 있었으므로

이상하게 여겨 명주같이 보드랍고 고운 손을 만지며

 

<온달의 늙고 눈먼 어머니>어디서 오신 귀하신 처녀인지 모르지만

어찌하여 빌어먹고 헐벗은 아들을 찾습니까 ?

아들은 굶다굶다 못하여

산으로 느릅나무 껍질이나 벗겨다가 먹으려고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평강공주가 온달을 찾아 아래로 가서

느릅나무 껍질을 벗겨 짊어지고 오는 사람을 만나 온달인 알고

이름을 물은 다음 자기가 찾아온 이유,

혼인하고자 하는 생각을 말했습니다

 

온달이 생각하기를

 

<온달의 생각>사람으로서야 어찌 부귀한 집의 아름다운 여자로서

빈천한 거지의 남편을 구할 있으랴

 

하고 소리 쳤습니다

 

<온달>너는 사람 흘리는 여우나 도깨비지 사람은 아닐 것이다

해가 졌으니 네가 나에게 덤비는구나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달려 돌아와서

사립문을 닫아 걸고 들어갔습니다

평강공주는 온달을 뒤쫓아가서 문밖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또다시 들어가 간청했습니다 

온달이 대답할 바를 몰라 머뭇거리기만 하자 노모가 말했습니다 

 

<온달의 노모> 집같이 가난한 집이 없고

아들보다 천한사람이 없는데

그대가 한 나라의 귀인으로서

어찌 가난한 집에서 남편을 섬기려고 하오 ?

 

그러나 평강공주는

 

<평강공주>종잇장도 마주 들면 가볍다고 하였으니 ,

마음만 맞으면 가난하고 천한 것이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

 

 하고 ,

드디어 금팔찌를 팔아

집과 밭과 논이며 종과 소며

밖의 모든 것을 사들여서

빌어먹던 온달이 하루 아침에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평강공주는

온달을 한갓 부자로 만들려 함이 아니었으므로

온달 더러 말타고 활쏘기를 배우기 위해 말을 사오라 했습니다

 

이때는 전국 시대 (전쟁하던 시대) 였으므로

고구려에서도 마정 (말에 대한 국가의 행정 , 사육과 번식과 판매관리 등 )

을 매우 중히 여겨

대궐의 말을 국마라 하여 잘 먹여 잘 기르고 화려한 굴레를 씌웠는데 ,

다만 왕이 말을 타다가 다치면 말먹이와 말몰이를 죄주었으므로 ,

말먹이와 말몰이들이 매양 날래고 굳센 준마가 있으면

이를 굶기고 때려서 병든 말을 만들어버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평강공주는 비록 깊은 대궐 안의 처녀였지만

이런 폐단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

말을 살 때에 온달에게

 

<평강공주>시장의 말을 사지 마시고 버리는 국마를 사오십시오

 

해서 온달은 나라의 말을 사왔고

평강공주가 몸소 먹이고 다듬어 말이 날로 살찌고 웅장해졌습니다

 

평강공주는 내조를 매우 부지런히 하였고

온달의 말타고 활쏘는 재주도 날로 진보하여

이름난 사람이 온달에게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3월 3일

신수두 대제의 경기회에 온달이 참여하여 말타기에 우등을 했고

사냥해 잡은 사슴도 가장 많았습니다

 

평원왕이 그를 불러 이름을 물어보고 크게 놀라며 감탄하였으나

따님에 대한 분노가 아주 풀리지를 아니하여

아직 사위로 인정하지 아니했습니다

 

그 뒤에 주 의 무제가 중국 북쪽을 통일하여 위염을 떨치고 ,

고구려의 강함을 시기하여

요동에 침입해와서 배산의 들에서 맞아 싸우는데 ,

어떤 사람이 혼자서 용감하게 나가 싸웠고

칼 쓰는 솜씨가 능란하고 활 쏘는 재주도 신묘하여

수백 명 적의 군사를 순식 간에 목베었습니다

 

알아보니 그는 곧 온달이었습니다

 

평원왕이 탄식하며

 

<평원왕>이는 진정 내 사위로다

 

하고 이에 온달을 불러

대형 벼슬에 임명하고 총애가 극진했습니다

 

 

평원왕이 돌아가고 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었습니다

 

<온달>계립령과 죽령 서쪽의 땅은 본래 우리 고구려의 땅이었는 데

신라에게 빼앗겨 그 땅의 인민들이 항상 원통하게 여기고

부모의 나라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신을 불초하다 마시고 군사를주시면

한번에 그땅을 회복하겠습니다

 

영양왕이 이를 허락하여 온달이 출정하게 되었는데 ,

온달은 군중에서 맹세하기를

 

<온달>신라가 한수 이북의 우리 땅을 빼앗았으니

이번 싸움에 만일 그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나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했습니다

온달은 아차성 아래 이르러 신라 군사와 접전하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돌아가서 장례하려고 하자 온달의 시신의 관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아니하므로

평강공주가 친히 가서 울면서

 

<평강공주>국토가 회복되지 않았으니 공이 어떻게 돌아가실 수 있겠습니까 ?

공이 돌아가지 못하시는데 내가 어찌 혼자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

 

하고 통곡하고 기절하니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구려 사람들은 평강공주와 온달을 그 땅에 나란히 장사지냈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평강공주가 애원하자

관이 움직였다하고 조선상고사에서는 평강공주도 같이 죽었다 나옴)

 

실제 온달은 진짜바보가 아니라

우리가 톨스토이 바보 이반 이야기나

옛날 장기려 박사님처럼

마음이 순박하고 착하고 돈계산에서 약삭빠르지 않은

그런 사람을 바보라 놀리듯이

 

실제로 매우 가난함에도 온달은 순박하고 착한 정신을 가져

고구려인들에게 소문난 맛집이 되어

평원왕 , 평강공주의 귀에도 들어와

결국 국혼을 맺게 된 것이었다 생각되고

 

고구려인들은 그런 온달 장군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했는데

온달장군이 신라인에게 죽자

당시 시인들이 이를 노래하고 이야기하며

고구려 백성들에 전해졌고

일반 고구려인들의 신라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 굳세져

온달의 죽음으로 인해 고구려는 멸망할때까지

신라와 평화가 영영 끊어졌습니다

 

신채호 선생님은

온달의 죽음으로 삼국시대가 큰 변환점을 맞이했다 기록했는데

고구려는 신라와 멸망때까지 적대하게 됬고

온달사후 백제와 고구려는 동맹하여 삼국흥망의 판국을 이루었으니

온달전은 삼국시대의 두드러지게 중요한 이야기이며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첨삭(요약) 을 지나치게 해서

온달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 비판했습니다

 

만약 못생기고 가난했던 온달이

인성이 ㅂㅅ이고 개판이었으면

홀어머니가 눈멀고 늙었다는 이유로 버리고 도망쳤을 것이고

산적떼나 들어가서 범죄나 저지르다 변변찮게 살다가 죽었을 것인데

 

마음이 밝았다는 기록과

산에서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갔다는 점에서

가난함에도 도둑질하거나 구걸로만 연명하려 하지는 않았을 거고

 

눈먼 가난한 어머니 , 그런 어머니를 모시는 배우지 못한 효자아들의

행태가 너무 불쌍하고 우스꽝스러워서

고구려인들에게 계속 바보로 소문이 났을 것이고

그 사실을 제대로 모르던 평원왕도 소문을 듣고

그냥 재미로 딸을 놀리며 겁주다가

딸이 다큐로 받아들이고 집을 나가자 멘붕이 왔을 것이고

심심했던 평강공주도 뭔가 좋은느낌도 들고

궁금해져서 유튜브 각인가 싶어서

호기심에 온달을 찾아 나서다 온달의 착한 성품을 직접 보고

부부의 연을 맺게 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옛날 조선 정조임금도 첩의 아들 , 서자들이

재능이 있음에도 신분으로 인해 그 재주를 펴지 못한 것을 한탄했듯이

머리가 똑똑히 태어나도 여건이나 집안 여력이 안되

공부를 못한다거나 배우지 못하고 그랬던 사람들도 많을 것이고

오늘날 대한민국에도 그런사람들이 많을텐데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시대엔 그게 더 심했을 것이고

 

온달 역시 기본적으로 천성은 총명하고 밝고 부지런한데

집이 너무가난하고 어머니를 돌보느라 배울 기회가 없어

넘치는 힘에 비해 활쏘기도 배울 기회가 없어서 혼자 몽둥이 들고

토끼들 쫓아다니며 한 마리도 못잡고 꽈당 넘어진다거나 하며

평범한 고구려 서민사냥꾼들의 비웃음을 받는 등으로 소문나다가

총명한 평강공주의 레이더에 걸려서

평강공주의 서번트가 됬을 가능성이 큽니다

 

온달이 남자신데렐라라 비하되기도 하지만

온달이 악했다거나 대충 한량으로 살고 그랬으면

그런 기회도 분명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젠 너무 고전이 된 평강공주와 바보온달의 사랑이기에

온달 , 평강 컴플렉스니 남자신데렐라라니 이런 말들도 많지만

이건 동화가아니라 역사기에

나이먹어보니 그렇게 극도로 가난했던 온달이랑 평강공주가

얼마나 힘들고 슬프게

사랑을 했을 것이라는게 딱 보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게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퓨어하고 대단한 이야기기에

 

글 쓰면서도 마음이 울컥했고

이전에도 온달평강 이야기는 여럿 썼지만

이번엔 일부로 삼국사기가 아닌 조선상고사버전으로 옮겨봤습니다

 

요즘 종영한 사극 태종 이방원 , 원경왕후처럼

끼리끼리 , 비슷비슷한 집안끼리 잘만난 수준의 만남도 있지만

한구슬과 춘향의 경우엔 왕이나 장원급제양반가문을 만난거니

여자의 상승혼의 예이고

을밀 , 온달의 경우는 

남자가 상승혼 한 예이고

 

흠잡을거 없는 수준높은 명문 집안끼리 만나도

관계가 매우 나빴던

숙종과 인현왕후가 있는가 하면

 

한주 , 춘향 , 을밀 , 온달의 경우엔

양가 집안 수준이 격차가 상당했지만

이 넷은 미약한 집안에도

내면적으로는 범죄에 연루되지 않고 꼿꼿이 지조와 순수함을 지켜서

결국 출생적으로는 토끼여도 인품으로서는 호랑이들이었기에

국가의 왕후나 정실 , 부마가 되기 충분했기에 결국 끼리끼리였고

 

내면이 올바르면 결국 반드시 드러나게 되는게 세상 이치기에

이 끼리끼리 만난다라는 말이라는 게

결국 내가 자의적으로 선택한게 아닌 타고난 집안의 수준차라기 보다

내가 자의적으로 선택하고 갈고 닦을 수 있는

개인의 내면의 무게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여튼 ,

평원왕대는 동아시아 국제정세가 급변한 시기였는데

중국의 수나라가 오랜 분열기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했고

이때 평원왕은 매우 두려워하며 수나라에 대한 방비를 했습니다

 

<라봉봉>저는 아무리 봐도봐도 고구려 , 고려 이야기는 너무신기하고

뜨겁고 진취적인 모습이 정말 마음에 듭니다

 

고구려인들의 사랑 역시

진취적이고 뜨거웠고 

어렸을때부터 바보온달 이야기가 참 마음에 남았는데

비록 온달 , 신데렐라가 남녀 상승혼의 대명사가 되버려서

부정적 이미지도 씌어졌지만

 

참 생각해보면

온달이나 신데렐라가 그만큼 효성과 인품이 있었기에

그런 행운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고

운명이란건 그냥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거나 거저 얻는 것이 아니라

결국 노력하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행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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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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