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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후기 인물들>

[꺼져가는 불꽃]

[진사왕 VS 광개토대왕]

[관미성 함락]

[아신왕]

[진무 장군]

[근성의 아신왕]

[백제 여성 기술자 진모진]

[백제 기술자 궁월군]

[전지왕의 귀국]

[해충과 해씨가문]

[상좌평]

[구이신왕 어머니와 목만치의 밀통]

[한성백제 마지막 명군 비유왕]

[비유왕의 나제동맹]

[개로왕의 대북도발]

[고구려 첩자 도림]

[도미 부부]

[한성함락]

[한성백제 마지막 희망 문주]

[재증걸루와 고이만년]

<라봉봉>

 

[꺼져가는 불꽃]

백제는 비류왕-근초고왕-침류왕이라는 명군라인을 장식하며

북으로 고구려를 제압하고

남으로 마한의 잔존세력을 합병해 전라도 끝까지 진출하고

가야를 제압하고 신라를 압도하며 낙동강과 남해를

백제의 영향으로 만들어 해양권을 확립했으며

서로는 중국 요서와 산동에 진출 ,

동으로는 왜에 진출해 왜의 종주국이 되며

한성백제 최전성기 불꽃을 타올랐습니다

 

불꽃형상의 백제 금제왕관

 

고구려는 백제 근초고왕과의 전쟁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아픔을 겪었지만

고구려 역시 이전 미천왕때 낙랑과 대방의 수복으로

풍요로워진 상황이었고

고국원왕 다음왕인

명군 소수림왕때 율령반포로 국력과 내정이 착실히 다져지고 있었기에

곧바로 아픔을 회복하고 백제에 설욕을 갚으려 했고

고구려는 곧 광개토대왕이 등장하며

첫 삼한의 패자였던 백제를 꺾고

두번째 삼한의 패자로 일어나게 됩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고담덕 , 한국 위인

 

[진사왕 VS 광개토대왕]

다시 백제 이야기로 돌아가서..

침류왕이 사망하자

침류왕의 태자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근구수왕의 둘째아들이며 침류왕의 동생이자

태자의 숙부인

부여진사가 왕위를 이어 백제 16대왕 진사왕이 되었고

진사왕은 근초고왕때 엄청나게 넓어진 영토를 방어하려

관문의 방어시설을 설치했고

그 길이가

청목령(경기도 개성)에서 시작해서 북으로는 팔곤성 ,

서로는 바다에 닿았습니다

 

(오늘날 경기도 개경 , 금천을 보호하는

예성강 수비라인으로 판단)

 

경기도 안성에서 발견된 4~6세기 백제병사들이 고구려군을 막기위해 설치한 나무울타리성인 목책성

 

비록 근초고왕때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켰음에도

고구려가 한창 일어나고 왕성했던 시기였기에

고구려가 두려웠던 백제인들과 진사왕은

북쪽에 방어시설을 쌓으며 고구려의 남침을 대비하기 시작하였고

과연 고구려의 침공이 곧바로 시작됩니다

 

진사왕 재위 8년

고구려왕 담덕(광개토대왕)이 곧바로 설욕을 준비하며

4만대군을 이끌고 침공해왔고

백제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석현성 등 10여성을 함락시켰고

진사왕은 담덕이 용병에 능통하다는 말을 듣고

대항하기를 회피했습니다

 

[관미성 함락]

10월 겨울

백제 최대 요새이자 철옹성인 관미성이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함락되었고

관미성은 사면이 가파른 절벽이며 바닷물에 둘러쌓여 있었는데

한국사 최고 정복왕인 광개토대왕이 일곱 길로 고구려 군사를 나누어

20일을 공격해 빼앗았고

백제 최대요새 관미성 함락은

곧 백제 최강의 안보라인이 무너졌음을 의미하며

백제 멸망의 시작을 알리는 카운트다운이었습니다

 

관미성

 

관미성이 함락되고 다음달 11월

진사왕은 구원의 행궁에서 사망합니다

 

[아신왕]

북쪽에서 광개토대왕이라는 괴수(백제 입장에선..) 가 등장해버린

불안한 정국속에 진사왕까지 급사해버리자

침류왕의 맏아들 부여아신이 왕위를 이어

백제 17대왕 아신왕이 되었고

그는 원래 침류왕의 태자였지만 나이가 어려

숙부 진사왕에게 양보한 뒤 진사왕이 사망하자

왕위를 이은 것이었고

그가 왕위를 이을 시기는 고구려 역사상 최고의 시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시대이자

백제 역사상 최악의 시대였습니다

 

[진무 장군]

아신왕은 진무장군을 좌장으로 임명하여 군사일을 맡겼고

진무는 백제 대성팔족(백제 귀족가문) 진씨가문 일족으로

아신왕의 외삼촌이자

침착하고 굳세며 지략이 많았으므로

당시 백제인들이 그를 따랐고

광개토대왕에 맞설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도저히 고구려에 굴복할 수 없었던 백제 아신왕은 진무에게

 

<아신왕>관미성은 우리나라 북쪽 변경의 요새이다

그 땅이 지금은 고구려의 소유로 되어 있다

이것을 과인은 애통해 하니

그대는 응당 이 점에 마음을 기울여

이 땅을 빼앗긴 치욕을 갚아야 할 것이다

 

라고 말했고

아신왕은 1만군사를 동원해

고구려 남쪽변경을 칠것을 계획했는데

진무는 병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석현 등 다섯성을 회복하기 위해

먼저 관미성을 포위했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둘러싸고 굳게 방어했고

진무는 군량의 수송로를 확보하지 못해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습니다

 

[근성의 아신왕]

이후에도

아신왕 4년 8월 가을(395년)

아신왕은 좌장 진무에게 명해

고구려를 치게하니

고구려왕 담덕이 직접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패수에 진을치고 대항했고

백제 군사가 크게 패해

사망자만 8천 명이었습니다

 

그해 11월에도 아신왕은

패수전투의 패배를 보복하려

직접 군사 7천을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 청목령 아래 진을 쳤지만

큰 눈이 내려서 회군하게 됩니다

 

계속해서 아신왕이 제대로 공격도 못하면서

고구려에게

슴만튀(가슴을 만지고 튀기) , 엉만튀(엉덩이 만지고 튀기)

를 계속 해대자

 

분노한 광개토대왕은 결국

다음해인 396년 아신왕 5년에

광개토대왕은 직접 고구려 수군을 이끌고

아신왕을 검거하려 친히 나섰고

 

백제의 수도를 비롯해

수십개 성을 함락시킨 뒤

아신왕에게 항복선언을 받아냅니다

 

검거 완료

 

아신왕은 광개토대왕의 앞에 직접 나가 무릎을 꿇고

 

<아신왕>영원히 노객(신하 , 노비) 이 되겠습니다

 

하고 외쳤으며

 

담덕이 형한테 개기다 ㅈ되버린 아신왕 , MBC 태왕사신기

 

생각이 깊었던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백제 아신왕을 죽이지 않고 살려준 후

아신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고구려에 볼모로 끌고 갔고

백제는 그렇게 고구려에게 58성 700촌을 빼앗기고 수도함락 ,

임금이 고구려 임금에게 도게자(머리박기) 하는 최대 굴욕을 맛보고

멸망 3분전 상황으로 돌입하게 되었고

겉은 살아는 있는데

언제 툭치면 사망할지 모르는 병사상태에 진입합니다

 

게다가 정의를 구현한 광개토대왕한테

무릎꿇고 바닥에 코박죽 했던게 쪽팔렸던 아신왕은

(아마도) 역사책에 자신이 광개토대왕에게

코박죽 했던것을 쓰지 말라 했고

이로인해 백제역사기록엔 아신왕이 광개토대왕에게

굴욕당한게 기록되지 않아있고

 

정의로운 광개토대왕은

백제를 참교육한 역사를 사람들이 혹시 잊어버릴까 두려워

광개토대왕비에다가 아신왕의 굴욕을 친절하게

워터마크까지 여러개 박아서 박제시켰고

 

'백제 아신왕 참교육한 썰ㅋㅋ' 상세히 쓰여있는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은 광개토대왕비에

백제 국명을 백제(백가지 성씨의 건넘)도 아니고

백잔(잔인한 백제 , 같은 겨례인

고구려 태왕을 죽인 잔혹한 놈들이라는 뜻)

이라 백제를 낮춰 기록했고

광개토대왕은 백잔주 아신왕의 항복을 은혜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기특히 여겼다고

아신왕의 굴욕을

친절하게 비문에 영구박제 시켜버립니다

 

참교육자였던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릉비>

백잔과 신라는 옛부터 고구려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

백잔과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

영락 6년(396년) 왕(광개토대왕) 께서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해셨다

고구려군이 남진하여

영팔성 , 구모로성 , 각모로성.......

구천성 등을 공취하고 그 수도를 ...하였다

백잔이 의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한강) 를 건너

정병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잔주(백잔의 주인 , 아신왕) 가

곤핍해져 남녀 생구 1천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그러나 광개토대왕 밑줄에 곧

근성의 아신왕은 항복한뒤 3년만에

다시 광개토대왕과 약속을 어기고

왜와 화통했다하고 (ㅋㅋ)

 

(다시는 고구려에 지지 않겠다 , 왜몽 함께할 것)

 

하여튼 ,

고구려에게 굴욕을 당한 아신왕은 곧

아신왕 6년 5월 여름

긴박해진 아신왕은 왜국에 군사를 빌리기 위해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를 인질로 보냈습니다

 

 

아신왕 7년엔

아신왕은 계속해서 믿고있던 진무장군을

병관 좌평(국방부 장관) 으로 삼았습니다

 

진무장군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맡선

백제 명장이었고

초기 백제를 대표했던 왕비가문인 진씨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고

진씨가문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주도했지만

계속해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연전연패하자

진씨가문의 화려한 권세가 끝나고

점차 백제의 국가 주도권이 진씨가문에서 해씨가문으로 넘어갑니다

 

아신왕은 여러 굴욕에도 계속해서

왜와 동맹하며 계속해서 고구려에 설욕을 하려 하는데

아신왕이 고구려를 공격하려 군사와 말을 대대적으로 징발하자

지친 백제백성들이 병역을 고통스럽게 생각하여

많은 사람들이 신라로 도망했고

이 결과 백제의 인구가 줄었습니다 (;;)

 

[백제 여성 기술자 진모진]

아신왕대에도 백제-왜 교류가 활발했고

일본기록엔

 

'웅신천왕(오진 덴노) 14년 2월 봄

백제 아신왕이 봉의공녀 (옷짜는 여자 기술자) 를 바쳤는데

이름이 진모진 이었다 하고

지금의 내목의봉(쿠메키누누이 , 구메노키누누이) 의 시조이다'

 

라는 기사가 있고

 

백제는 아신왕대에 일본에 옷만드는 여자기술자 진모진을 보내서

옷만드는 기술을 알려주게 되었고

진모진은 백제판 코코샤넬이었다 보면 되고

백제 기록은 소서노를 시작으로 의외로 여성들도 많이 활약했습니다

 

옛날 고구려 백제 신라 왜 사신의 모습(순서대로) , 시스루 스타일의 옛날 왜인들

 

백제가 전해준 옷을 입고 한복처럼 진화한 일본 복식

 

당나라 신성공주묘 벽화

 

고구려 수산리 벽화

 

일본 다카마쓰 고분벽화 , 고대 동아시아에서 유행한 주름치마로 의복기술을 넘어 점차 인싸템도 따라하기 시작한 일본인들

 

[백제 기술자 궁월군]

또한 일본서기 웅신천왕 14년 기사에는

 

이해 궁월군이 백제로부터 와서 기화하였다

그리고 아뢰기를

 

<궁월군>신은 저희나라의 인부 120현을 거느리고

귀하하려 하였으나 신라인이 방해하여

모두 가라국(가야) 에 머물러 있습니다

 

라고 했고

이에 천왕은 갈성습진언을 파견하여

궁월의 인부를 가라에서 데리고 오도록 했는데

3년이 지나도록 습진언은 돌아오지 않았고

 

2년뒤 기록에는

 

<일본서기>평군목토숙녜와 적호전숙녜를 가라에 보냈다

그리고 날랜 병사를 주면서 조를 내리기를

 

'습진언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틀림없이 신라가 길을 막고 있기 때문에

지체하고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빨리 가서 신라를 공격하여 그 길을 열라'

 

라 했고

이에 목토숙녜 등 날랜 병사를 거느리고 진격하여

신라 국경에 다다르자

신라왕은 두려워하며 그 죄를 스스로 인정하였고

궁월의 인부를 거느리고 습진언과 함께 돌아왔다

 

라는 기록이 있고

궁월군은 그렇게 우여국절끝이 120현(고을) 규모의 인부들과

일본 열도에 도래하였다는 기사가 일본서기 기록에 있고

궁월군은 원래 403년 일본에 망명시도를 했지만

그렇게 우여곡절끝에 아신왕 말기 시기인 405년 일본에 도착하여

일본으로 건너갔고

 

궁월군은 한반도계 도래인으로서

하타씨의 시조로서 궁월군과 백제 120현 백성들은

왜에 도착후 견직물(비단) 을 다루는 일에 종사하며

그들이 만든 견직물은 피부(일본어로 하다)처럼 부드럽고 따뜻해서

혹은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에 (하타)

바다를 뜻하는 하타씨를 성으로 얻게 됬고(신라계라는 말도 있음)

하타씨들은

가쓰라강에 제방을 쌓아 농지를 넓히는 등

수도가 되기전 교토지역을 개척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합니다

 

(일본 역사도시 교토를 개척한 백제인들 ㄷㄷ)

 

하타씨가 세운 고류지(광륭사)

 

일본 국보 1호 고류지 반가사유상 , 한반도의 나무를 사용함

 

교토 고류지 영보전 내 하타씨 부부상

 

일본 천년고도 교토를 건설한 백제인들(백제-왜 관계는 영-미 관계와 비슷하고 미국 건국한 영국 청도교인들이라 비유됨)

 

[전지왕의 귀국]

아신왕이 사망하자

아신왕의 뒤를 이어 부여전지 전지왕이 왕위를 이었는데

전지왕은 한국사에서 특이한 임금이었습니다

 

전지왕은 아신왕의 맏아들로서

아신왕 3년 태자가 되고

아신왕 6년 인질로 왜국에 갔는데

이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궁지에 몰린 아신왕이

왜국에 군사를 요청하고 또한 비상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아신왕이 사망하자

 

아신왕의 둘째동생 훈해가 정사를 대리하며

태자 전지의 귀국을 기다렸는데

아신왕 막내동생 첩례가 형 훈해를 죽이고

자기가 왕이됬고

 

이때 전지가 왜국에서 부고를 듣고

울면서 귀국을 요청하니

왜왕이 군사 1백을 하여금 전지를 보호하여

귀국하게 했습니다

 

참고로 당시 왜의 종주국이었던 백제의 상황상

백제가 왜국에 태자를 인질로 보낸 것은

우리가 아는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바치는 그런 인질과 다른개념이었고

고대 일본어에서 인질의 해당하는 질의 훈독을

무카하리 (人力 , 인력) 라 하며 왕의 대리인이라는 뜻이라 하고

왜가 백제 섬멀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기에

백제도 왜와 매우 가까웠긴 해도

아무래도 외부인이긴 했기에 일본 지역 토착민인

왜왕 눈치를 적당히 보았고 왜왕 역시

부모국가 상황이었던

백제가 요구하는대로 시행한 그런 상황이었다 생각됩니다

 

또 기록상에서도 삼국사기를 집필한 김부식이 당시

거의 영국과 미국 같았던

백제와 왜의 관계를 정확히

잘 모르고 그냥 신라식 역사관을 답습한대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고

또한 일본 역시 일본서기가 국뽕이 심각하게 투여된

자기망상적 내용이 많이 포함된 서적인걸 감안해

적당히 읽어야지

 

백제에게 가끔씩 까부는

일본 문헌 기록과 실제 일본 민중들이

백제인들에 감사하고 존경하는 현실적 괴리가 크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 백왜관계는 한국 , 일본 기록보다는

실제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도래해 남긴 유물과

일본민중 , 지방촌로들에게

대대로 전해오는 전승등이 오히려 정확한 면이 있고

역사기록은 완전 무시해도 안되지만

역사가와 권력자의 이해관계로 쓰여지는 부분도 있기에

백왜관계는 기록상만으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해충과 해씨가문]

하여튼 ,

전지가 백제 국경에 이르자

한성사람 해충이 와서 고하기를

 

<해충>대왕이 죽은 후에

왕의 동생 첩례가 형을 죽이고 자기가 왕위에 올랐으니

태자께서는 경솔히 들어오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에 전지가 왜인을 체류시켜 자신을 호위케 하며

바다 가운데 섬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백성들이 첩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이해 왕위에 오르게 했습니다

 

전지왕의 다사다난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두 나라를 오간 일대기였고

 

그렇게 부여전지 전지왕은 아신왕의 뒤를 이어

백제 18대왕 전지왕이 되었고

전지왕은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해충에 보답하기 위해

해씨일족을 점차 등용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점차 백제 주도권이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몰락한 진씨가문에서

해씨가문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 즉위한 전지왕은 해충을 달솔로 임명하고

한성의 벼 1천 석을 주었고

전지왕 3년 2월 봄에는

이복동생 부여신을 내신 좌평 ,

해수를 내법 좌평 ,

해구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했고

모두가 전지왕의 친척이었으며

그렇게 전지왕대부터 해씨일족이 진씨를 밀어내고

백제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상좌평]

전지왕 4년 정월 봄

전지왕은 부여신을 상좌평으로 임명하여

군사와 정사를 맡겼고

상좌평이라는 직위가 이때부터 시작되니

지금의 재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고구려 대대로 , 신라 상대등 , 백제 상좌평 ,

고려 문하시중 , 조선 영의정 , 대한민국 국무총리)

 

양직공도 속 백제 관료의 모습

 

[신제도원]

전지왕대 인물로

한국사서에는 등장하지 않고

일본측 역사서 일본서기에만 등장하는

또다른 백제인이 있는데

바로 전지왕의 누이(여자형제) 이자

아신왕의 딸인 부여신제 혹은 신제도원이라는 인물이고

일본 기록에서는 신제공주 , 시세츠 히메라 불리는 인물이고

 

(지우히메 아니고 진짜 혈통이 히메였고 원조 히메라 불린 한국인임)

 

일본서기에는

웅신천왕 39년에

직지왕(전지왕) 의 누이인 신제도원이

7명의 여성을 거느리고 왜에 왔다고 하고

신제도원이 무슨일로 왜에 갔고 이후 행적은 더이상 나오지 않으나

신제도원과 남매인 전지왕 역시 태자시절에 왜에 갔고

왕실 직계 자녀가 양국을 자유롭게 오고 갔을 만큼

 

(백제와 왜는 사실상 연방이나 분국 , 하나의 국가화 된 상황이라

서로 왕래가 자유로웠고

한번 가면 다시 못가거나 다시 못돌아왔던

신라-왜 관계와는 전혀 달랐음)

 

백제 , 왜 관계가 활발했음을 보여주는 인물이고

당시 왜는 백제로부터 다양한 선진문물을 전수받았는데

그 중엔 방직 , 옷만드는 기술도 있었고

당시 왜에서는 직조(실을 엮어 직물을 만드는 기술) 기술을 얻으려

중국과 백제로부터 직조기술자들을 데려왔고

왜에서는 아지사주와 도가사주 등을 오나라에에 보내서

베를 짜는 공녀를 구했다는 기록도 있고

이전 옷만드는 여성기술자 백제판 코코샤넬이었던 진모진이

백제에서 왜로 건너가기도 했기에

 

정황상 백제왕녀 신제도원 역시 정황상 백제 방직기술을 전수하려

왜로 건너갔다 여겨지고 있고

부여신제 , 신제도원이 거느린

7명의 여성도 섬유 , 직조 기술자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백제 샤넬이었던 신제공주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발견된 독창적 기술의 백제 면직물

 

[구이신왕 어머니와 목만치의 밀통]

전지왕이 사망하자

전지왕의 맏아들 부여구이신이 왕위를 이어

백제 19대왕 구이신왕이 되었고

닭다리 통구이가 생각나는 구이신왕은

특이한 이름과 달리

1년도 아니고 7년의 재위기간임에도

왕위에 오르고 사망했다는 기록 두개 밖에 없고

일본 기록으로는

 

<일본서기>

전지왕 사후 구이신이 왕위에 올랐는데

왕이 어려 야마토(일본) 의 목만치가

국정을 잡았고 왕의 어머니와 밀통하여 무례한 행위를 많이 저질러

천황이 목만치를 소환하였다

 

백제기에서는

 

'목만치는 목라근자가 신라를 정벌할 때

그 나라 부인을 얻어 낳은 자식인데

아버지 공적으로 임나에서 전횡하다

우리나라(백제) 에 들어와 귀국(귀한나라 , 왜) 과 왕래하였다

천조(천황)의 명령을 받아서 우리나라의 정사를 장악하고

권세를 세상에 떨쳤다

그러나 천조가 그 포악함을 듣고 소환하였다'

 

라고 한다

 

라고 기록되있고

 

대충 어린 구이신왕때 구이신왕의 어머니와 섹파관계였던 목만치가

구이신왕을 제껴두고 백제를 뒤흔들다

일본 천황에게 꾸지람을 받았다하는 기록이고

 

중국 진시황 엄마인

조태후가 남편을 잃자 원래 여불위 첩이었기에

홀몸이 된 이후 자주 여불위를 찾았고

간통죄가 부담스러워 두려워진 여불위는 자신의 대타로

거근이었던 노애를 환관으로 위장시켜

조태후에 보내서 조태후와 섹파가 되서

애를 둘이나 낳아버렸다는게

진시황제 친엄마의 실제상황 스토리기도 하고

 

한국 고려시대때 고려 여황제격이었던 천추태후와 섹파관계였던

김치양이 권세를 휘둘렀다는 기록이 있듯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이런 기록들이

문란하다 기록되기는 하지만

좀 불쌍하게 보면

당시 이혼제도가 없던 시대였기에

여성들은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되면

정절을 지켜야한다며

평생 혼자 여자찐따로 살다 죽어야 됬고

사실상 죽음을 강요받던게

불과 백년전의 옛날시대고

일반 서민과 빈민 여자 백성들은 뭐 암암리에 다시 재혼하고 그랬겠지만

황실 , 왕실이나 귀족가문의 경우는 먹고사는 건 보장된다 하더라도

가문의 명예니 뭐니 하며

그 법이 더 엄격하기 때문에

사실상 혼자서 나무방망이나 비비며 살다가 죽어야 하는

너무 가혹했던 조선시대까지 한국 여인들의 삶이었고

 

세계사적으로도 왕후나 왕비가 임금 사후 간통했다는 기록이 많은데

그래서 과거시대엔 배우자 사별 이후는

현실적으로 정상적 남편 , 부인이 될 수 없기에

사실혼임에도 밀회 , 섹파관계를 유지하며

음란하다며 ㅉㅉ 하며 눈총을 산 것이었고

 

이를 단순히 문란하게 볼 것도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으로 오늘날 재가 , 재혼이 당연시된 기준으로 보면

지극히 인간적이고 정상적인 인간의 생리적 욕구 등에서 나온 행동이고

참 왕정시대 , 옛 시대의 안타까운 기록들이고

현대사회로는 별것도 아니고

오히려 불륜이 아닌이상

합법적 이혼 후나 배우자 사후 재가는

사회 안정과 개인의 행복을 위해 장려된다는 점에

옛날엔 이로인해 나라가 분열되고

혼란스러워지고 참 안타까운 면들이 있습니다

 

신분과 제약이 많았던 옛 시대의 사랑 , 짱구 극장판 10기

 

[한성백제 마지막 명군 비유왕]

구이신왕이 사망하자

구이신왕의 맏아들 부여비유가 왕위를 이어

백제 20대왕 비유왕이 됬고 (11대왕 비류왕과 한자부터 다름)

 

비유왕은 용모가 훌륭하고 말을 잘하여

사람들이 따르고 귀중히 여겼습니다

 

 

비유왕은 백제 멸망 3분전에 나온 명군으로서

이 임금 재위 28년동안 전쟁이 단 한번도 없어

백제인들은 다음 시기 폭군 개로왕 전 잠깐동안 평화의 행복을 맛보았고

 

즉위후 4부를 순행하며 백성들을 위무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정도에 따라 곡식을 줬고

 

왜국 사신 50명을 맞이하고

중국 송나라에 조공하며

송황제는 선왕의 작호를 책봉해주었고

 

[비유왕의 나제동맹]

비유왕은 신라엔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했는데

양국은 서로 사신을 파견하며

백제는 신라에 좋은 말 두 필을과 흰 매를 ,

신라에서는 보답으로 좋은 금과 구슬을 답례로 보내주었고

 

마한 , 백제인이 금과 은보다 귀하게 여겼던 보석 '구슬' , 백제 구슬

 

이는 은유적인 기록이지만

나제동맹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당시 고구려는 최전성기를 맞고 국력을 사방으로 떨치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도 백제였지만

신라 역시 점차 고구려가 백제군을 막아준 대가로

내정간섭을 심화하며 주권이 위태로워지던 상황이었고

 

백제와 신라는 원래 삼한출신으로 원래 같은 뿌리였기에

건국때부터 시작한 싸움을 멈추고

비유왕대 이르러 왠일로 서로 친밀한 키스를 나누었고(?)

 

하여튼 북쪽의 고구려가 무서워진

백제 비유왕과 신라왕은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과거 원수진것을 일단 잊고 우리가 남이가 하하하

하며 서로 달래며 고구려군에 맞서기로 결심하였고

그 유명한 신 '라' 와 백 '제' 의 동맹 

 

'나제동맹'

 

이 성사됩니다

 

나제동맹

 

백제는 원래 일진국가였지만

광개토대왕한테 꿀밤 쎄게 맞고 찌그러져서 호흡기 달고 있던 상황이었고

신라는 의외로 센데 태생적으로 찐따였던 국가였기에

양국이 연합하자 의외로 시너지가 좋아서

백제와 신라의 담당일진이었던 고구려도

점차 밑동네 두 찐따들이 부담스러워졌고

 

(찐따들도 힘을 합치면 강하다구 ~ )

 

한성백제 마지막 명군 비유왕이 이때 마지막으로 내실을 다지고

나제동맹으로 신라와 관계도 개선시켜놔서

비유왕 다음왕 개로왕때 수도가 고구려에 불타고

한성백제가 멸망하고

백제왕실은 하는 수 없이 웅진으로 남하해

웅진백제시대를 여는데 이때도 신라가 군사를 파병해주었고

비유왕 덕분에 완전 멸망은 막고 수도이전으로 그치게 된 것이었고

훗날에도 신라와 연합으로 북방안보를 확립한 백제였기에

중흥할 발판도 결국 비유왕이 만든 것이었고 

한성백제 마지막 불꽃이자 왕다운 왕이었던 임금이었고

개로왕이 말아먹지만 않았어도(개재앙)

한성백제가 더 갔을수도 있으며

동아시아 역사가 완전 바뀌었을 수도 있는데

비유왕 이후부터 백제는 기존 백제와 다른 양상으로 바뀌며

이전 백제가 올드백제라면 이때부터 점차 뉴백제가 됩니다

 

게다가 비유왕 시기 고구려왕은 장수왕이었는데

장수왕은 간잽이 기질이 강해서

고구려 정보원(고정원)들을 통해

외국왕들이 찐따인지 일진인지 잘 파악하며

찐따면 강간해버리고

일진이면 웃으며 잘 지내며 계속 간을 보는

그런 타입의 인물이었고

 

장수왕은

남쪽 백제 비유왕이 정치를 잘하자 더이상 백제를 조지지는 못하고

그냥 조용히 아빠(광개토대왕) 가 넓힌 땅 관리하며 골프를 치고 있었고

 

백제 비유왕이 사망하고

고구려 장수왕은 다음 백제왕

개로왕이 애미뒤진(줄여서 앰뒤 ㅎ) 병신새끼인 것을 알게되자

곧바로 침공해 백제를 앞뒤로 무참히 강간해버렸고

 

솔직히 비록 제가써도 비속어가 심하다 생각되지만

실제 전쟁은 이보다 심각한게 현실이고

전쟁시대에 돌입하면 백성들 강간은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전국민 노예 , 창녀화 되고 민생이 씹창나는게 현실이기에

이런 심각한 비속어도 애기들 애교수준인게 전쟁이고

이래서 역덕들이나 역사학계가 말투가 좀 거친 편이 있고

 

당시 백제 상황을 완전 씹창내고 대전쟁을 불러왔다는 점에

비유왕 다음왕인 개로왕은

역사학계에서도 애미뒤진(앰뒤) 씹새끼에 폭군쓰레기로 평가되는

쓰레기 레전드를 찍은 쓰레기 왕이긴 합니다

 

비유왕은 그렇게 멸망 3분전 한성백제 마지막 명군으로 등장해

멱살잡고 백제를 끌어오며 내실을 차곡차곡 다져놓았지만

명군으로서 28년간 재위했던 것에 비해

윗동네 고구려 명군 장수왕은 (백제에겐 불행히도) 79년을 재위한

한반도 역사상 가장 장수하고

가장 오래 집권한 인물로 이야기되는 인물이고

장수왕은 백제인들에게 사망한

고구려 조상들의 한을 풀고 싶었던 인물인데

 

장수왕은 비유왕이 명군이라 백제를 조지지 못하고

계속 닉값하며 장수하면서

장기적으로 비유왕 죽을때까지 ,

정자 주사위 굴리기 실패한 역대급 똥캐였던

비유왕의 태자 부여개로가 즉위할때까지 존버하던 상황이었고

 

디시위키의 안습한 개로왕 평가

 

[개로왕의 대북도발]

그렇게 비유왕 사후

비유왕의 맏아들 부여개로(케로로 아님 ㅎ) 왕위를 이어

백제 21대왕 개로왕이 되었고

 

개로왕은 애미뒤진 병신왕답게

아버지가 재위 28년동안 납작 업드려서

고구려 침공 중단하고 재위 28년동안

한번도 외국침공을 안하고 , 안받고 통치한 것과 달리

거의 첫기록부터 주제파악 못하고 고구려 남쪽 변경을 침공하였고

비유왕 28년동안 백제백성들은 전쟁이라는 걸 전혀 모르고 살며

외국과 교류하며 모처럼만의 평화시대를 구가하며 잘 지내고 있었는데

 

삼국사기 신라측 기록으로는

개로왕이 즉위하자마자 1달만에 혼란을 틈타 장수왕이 침공해

신라가 비유왕때 맺어둔 '나제동맹의 계약' 이 발동해서

신라의 지원군과 함께 물리쳤다하고 

일단 이건 초기니까 개로왕 잘못이 아니라고 쳐도

 

앰뒤개로왕 15년 8월 가을

개로왕이 장수를 파견하여 고구려 남쪽 변경을 침공하며

백제는 다시 수십년만에 전쟁시대로 돌입하게 되었고 (;;)

 

당시 백제가 고구려에 개길 국력도 상황도 아니었고

불과 얼마전 백제 아신왕이 고구려 광개토대왕 앞에서

공개적으로 수치플하며 치욕당한게

엊그제인 상황이었는데

비유왕이 조용히 짜져서 평화에 집중하며 내실을 다진 것과 달리

본인을 근초고왕으로 착각한 개로왕은 고구려 침공 후 얼마뒤

중국에 사신을 보내서

고구려 좀 공격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덕분에 장수왕 꼭지가 점차 열리기 시작하였고

 

<개로왕이 위나라에 보낸 표문>

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이리와 승냥이 같은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으니

비록 대대로 중국의 교화를 받았으나

번방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 천자의 궁궐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은 끝이 없으나

북쪽의 서늘한 바람으로 말미암아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천명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존경하는 심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삼가 본국의

관군장군부마도위불사후장사 여례와

용양장군대방태수사마 장무 등을 보내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어

아득한 나루를 찾아

목숨을 자연의 운명에 맡기면서

저의 정성을 만분의 일이라도 보내고자 하옵니다

 

바라건대 천지신명이 감동하고

역대 황제의 신령이 크게 보호하여

이들이 폐하의 거처에 도달하여

저의 뜻을 전하게 할 수 있다면

비록 이를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더라도

길이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저와 고구려는 조상이 모두 부여 출신이므로

선조시대에는 고구려가 옛 정을 존중하였는데

그의 조상 소(고국원왕) 가

경솔하게 우호관계를 깨뜨리고

직접 군사를 거느려 우리 국경을 침범하여 왔습니다

 

우리 조상 수(근구수왕) 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공격하니

잠시 싸우다가

소의 머리를 베어 효시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감히 남쪽을 돌아보지 못하다가

풍씨(연나라 왕실 성)의 운수가 다하자

그의 잔적들이 고구려로 도망해 온 이후로

추악한 무리가 차츰 세력을 쌓아 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우리를 무시하고 침략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한을 맺고 전화가 이어진지 30여 년이 되었으니 ,

재정은 탕진되고 힘은 고갈되어 나라가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한 생각이 곳까지 빠짐없이 미친다면 ,

속히 장수를 보내 우리 나라를 구해 주소서 

그렇해준다면 저의 딸을 보내 후궁을 청소하게 하고 ,

자식과 아우를 보내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겠으며 ,

치의 땅 ,

명의 백성이라도 감히 저의 소유로 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연(거련 , 고구려 장수왕)은 죄를 지어

나라가 스스로 남에게 잡아 먹히게 되었고 ,

대신과 호족들의 살육 행위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넘쳐나서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 ,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멸망할 시기로서 폐하의 힘을 빌릴 때입니다

 

또한 풍족의 군사와 군마는 집에서 키우는 새나

가축이 주인을 따르는 것 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고 ,

낙랑의 여러 군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

황제의 위엄이 한번 움직여 토벌을 행한다면

전투가 벌어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비록 명민하지는 않으나 힘을 다하여 우리 군사를 거느리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하고 간계를 꾸미는 일이 많으니 ,

겉으로는 외효가 스스로 자신을 변방의 나라라고

낮추어 쓰던 말버릇을 본받으면서도 ,

속으로는 흉악한 화란과 행동을 꿈꾸면서 ,

남쪽으로는 유씨와 내통하기도 하고 ,

북쪽으로는 연연과 맹약을 맺어 강하게 결탁하기도 함으로써

폐하의 정책을 배반하려 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 임금은 지극한 성인이었으나

단수에서 전투를 하여 묘만을 벌 주었으며 ,

맹상군은 어질다고 소문이 났었으나

길가에서 남을 꾸짖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작게 흐르는 물도 일찍 막아야 하는 것이니 ,

지금 만약 고구려를 치지 않는다면 앞으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경진년 후에

우리 나라 서쪽 경계의 소석산 북쪽 바다에서

10여 구의 시체를 보았고 ,

동시에 의복 , 기물 , 안장 , 굴레 등을 얻었는데 ,

이를 살펴보니 고구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이는 바로 황제의 사신이 우리 나라로 오다가

고구려가 길을 막았기에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매우 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옛날 나라가 신주를 죽이니

장왕이 맨발로 다녔으며 ,

새매가 풀어준 비둘기를 잡아 요리를 하니

신릉군이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적을 이기고 이름을 세우는 것은 대단히 아름답고 훌륭한 일입니다

작은 변방도 오히려 만대의 신의를 생각하는데

하물며 폐하께서는 천지의 기를 모으고 ,

세력이 산과 바다를 기울일 있는데

어찌 고구려와 같은 애숭이로 하여금

황제의 길을 막게 합니까 ?

이제 , 북쪽 바다에서 얻었던 안장을 바쳐 증거로 삼고자 합니다

 

위나라 황제는 백제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신을 보내

위협을 무릅쓰고 조공을 바쳤다 해서

융숭히 예우해주고 기쁘다 했지만

그럼에도 위황제는

 

(역시 당시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고구려 장수왕이 무섭기도 하고)

 

딱히 고구려가 명령을 위반하고 죄를 지은적도 없고

고구려인들 말이 사리에 맞으니 만약 고구려가 나중에

혹여나 명령을 어긴다면 그때 토벌하면 이치에 합당할 것이며

혹여나 우리 군사가 출동할때 백제가 길잡이가 되면

좋겠고 그대 성의는 잘 알겠으니 답례품 넉넉히 챙겨주겠다 말해주었고

 

이후에도 개로왕이 고구려가 자주 변경을 침공한다며

위나라에 표문을 올려 군사를 요청했지만

위나라에서는 듣지 않았고(ㅋㅋ)

이에 개로왕이 이를 원망하며 마침내 조공을 중단합니다 (ㅋㅋ)

 

[고구려 첩자 도림]

장수왕은 중국에게 고구려 침공해달라 꼬지르는

개로왕의 행태에 분개하고 있었고

계속되는 개로왕의 슴만튀 , 엉만튀에 꼭지가 돈 고구려는

백제를 멸망시키기로 작정하게 되는데

 

먼저 장수왕은 꾀를 내서

침공전에 첩자를 보내서 백제를 전체적으로 망가뜨리기로 결정합니다

 

장수왕은 백제를 치기위해

백제에 가서 첩자 노릇을 할만한 자를 구했는데

이때 승려 도림이 이에 응하여 말했습니다

 

<도림>소승이 원래 도를 알지 못하지만

나라의 은혜에 보답코자 합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저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마시고

일을 시켜 주신다면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을 기약합니다

 

도림

 

장수왕은 기뻐하며 비밀리에 도림을 보내 백제를 속이게 했고

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지어 도망하는 체하고

백제로 왔습니다

 

당시 개로왕은 장기와 바둑 두기를 좋아했고

도림이 대궐문에 이르러

 

<도림>제가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워

상당한 묘수의 경지를 알고 있으니

왕께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

 

했고 개로왕이 그를 불러 들여 대국을 해보니

과연 국수(나라의 뛰어난 바둑기사) 였습니다

 

개로왕은 고구려 간첩 도림을 마침내 상객으로 대우하고

매우 친하게 여겨

서로 늦게 만난 것을 한탄했고

 

 

도림은 계속해서 개로왕에게 바람을 넣었고

하루는 도림은 개로왕을 모시고 앉아서 조용히 말했습니다

 

<도림>저는 다른 나라 사람인데

왕께서 저를 멀리 여기시지 않고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나 ,

다만 가지 재주로 보답하였을 뿐이고

아직 털끝만 도움도 드린 적이 없습니다

이제 말씀 올리려 하오나 왕의 뜻이 어떠한지 없습니다

 

이에 개로왕은

 

<개로왕>말해보라 만일 나라에 이롭다면

이는 선생에게 바라는 바이다

 

도림은

 

<도림>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언덕바다이니 이는 하늘이 만든 요새이지

사람의 힘으로 형국이 아닙니다

사방의 이웃 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갖지 못하고

다만 받들어 섬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마땅히 고상한 기세와 부강한 치적으로

남들의 이목을 두렵게 해야 것입니다

 

그러나 성곽은 수리되지 않았고 궁실도 수리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선왕의 해골은 들판에 가매장되어 있으며 ,

백성의 가옥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니 ,

이는 대왕이 취할 바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개로왕은 이에

 

<개로왕>좋다 ! 내가 그리 하겠다

 

하며 나라 사람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흙을 구워 성을 쌓고 (백제 성은 토성이었음)

그 안에는 궁실 , 누각 , 사대를 지으니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또한 욱리하에서 큰 돌을 캐다가 관을 만들어

아버지의 해골을 장사하고

사성 동쪽으로부터 승산 북쪽까지 강을 따라 둑을 쌓았고

이로 말미암아 창고가 텅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져서

나라의 다급하고 급박한 형세가 쌓아놓은 계란처럼 됬습니다

 

 

즉 도림은

한창 개로왕이 선조대 재산이랑 논밭 말아먹고

월세살다가 검소하고 소년가장이던 아버지(비유왕)덕분에

그나마 재산좀 회복하고 자가집으로 옮겨서 숨통 트여가고 있던 상황에서

롤을 좋아하던 개로왕에게 롤을 통해 친해졌던 롤친구였는데

 

도림은 자꾸 친한척 하면서 점차 오지랖을 부리며

명색이 가장인데 가오좀 잡으라고

지금타는 구형 소나타 팔고 페라리나 람보르기니 한대는 사줘야

주변 이웃들이 감탄할 것이라 계속 바람을 넣은 상황이었고

이에 (병신이었던) 개로왕은 부동산 담보대출로 대출 풀로 땡겨서

아빠가 남겨준 자가집을 담보로 페라리를 질러버렸고

본인만 굶는게 아니라 무능한 가장 덕분에 가족들은 쫄쫄 굶으며 대출금 이자에 허덕이며

카푸어가 되어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상황이 되었다 보면 됩니다

 

[도미 부부]

개로왕은 이외에도 백성을 괴롭힌 앰뒤 폭군이었고

개로왕시기 당시 백제 백성들의 고난을 상징하는

도미부부 이야기가 있습니다

 

도미는 백제 사람으로서

비록 호적에 편입된 하찮은 백성이었지만

자못 의리를 알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도미부인 영정

 

그의 아내는 아름답고 예뻤으며

또한 절조있는 행실을 하여

당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앰뒤 폭군이었던

개로왕(기록은 개루왕이라 하지만 현재는 개로왕이라 이야기됨)

이 이를 듣고 도미를 불러 더불어 말하기를

 

<개로왕>대저 부인의 덕은

비록 지조를 지킴을 앞세우지만

만약 그윽하고 어두우며 사람이 없는 곳에서

교묘한 말로 유혹하면

능히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하니

도미는

 

<도미>무릇 사람의 정이란

헤아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아내와 같은 사람은

비록 죽더라도 두 마음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개로왕이 이를 시험해보기 위해

도미에게 일을 시켜 잡아두고는

한 명의 가까운 신하로 하여금

거짓으로 왕의 의복을 입고 말을 타고

밤에 그 집에 가게 하였고

사람을 시켜 왕이 오셨다 알린뒤

그 부인에게

 

<개로왕>나는 오래 전 부터 

네가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도미와 내기를 걸어서 이겼다

 

내일 너를 들여 궁인으로 삼기로 하였다

지금부터 네 몸은 내것이다

 

드디어 난행을 하려하자

도미의 부인은

 

<도미부인>국왕께서 헛말을 하지 않으실 것이니

제가 어찌 따르지 않으리요

청컨대 대왕께서는 먼저 방에 들어가소서

제가 옷을 갈아입고 들어오겠습니다

 

하고는 물러나 계집 종을 번거롭게 치장시켜서 바쳤습니다

이에 개로왕은 후에 속임 당한 것을 알고 크게노하여

도미에게 왕을 속인 죄로 처벌하여

두 눈알을 빼고 (역시 폭군) 사람을 시켜 끌어내

작은 배에 태워 강에 띄웠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를 끌어다가

강제로 음행을 하려 하니

도미 부인은

 

<도미부인>지금 낭군을 이미 잃었으니

홀로 남은 이 한 몸을 스스로 지킬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왕을 모시는 일이라면

어찌 감히 어길 수 있겠습니까 ?

 

그러나 지금 월경(생리) 중이라서

온 몸이 더러우니

청컨대 다음 날 목욕을 하고 오겠습니다

 

이에 개로왕이 이를 믿고 허락했고

부인이 곧바로 도망쳐 강어귀에 갔으나 건널 수가 없었고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니

문득 외로운 배가 물결을 따라 이르렀으므로

이를 타고 천성도에 다달아 남편을 만났는데

두 눈이 뽑혀 장님이 된 남편은 아직 죽지 않았었습니다

 

ㅠㅠ

 

도미 부부는 풀뿌리를 캐 씹어 먹으며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의 산산 아래에 이르니

고구려 사람들이 불쌍히 여겼습니다

 

부부는 옷과 음식을 구걸하며

구차히 살아

나그네로 일생을 마쳤습니다(ㅠㅠ)

 

열녀 도미부인에게 제사지내는 충남 보령시민들 , 정절사

 

즉 개로왕은 사치스런 궁궐공사 이외에도

유부녀 겁탈 + 죄없는 백성 눈알 뽑기 등을 시행한

폭군중의 폭군이었고

덕분에 비유왕시기 침공엄두를 못내던 장수왕도

개로왕이 분리수거도 안되는 쓰레기중의 쓰레기임을 깨닫고

군사를 모으며 백제침공을 시작한 것이었고

하여튼 아신왕에 이어

두번째로 고구려 선생님에게 백제는 정의가 구현됩니다

 

다시 시작되는 고구려 선생님의 참교육

 

[한성함락]

개로왕 21년 9월 가을

고구려 장수왕은 3만대군을 거느리고와서

백제 수도 한성을 포위했고

개로왕이 성문을 닫고 있었는데

능히 나가 싸울 수 없었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네 방면으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한 바람을 이용해서 불을 질러 성문을 태웠고

백성들 중에서는 두려워하여

성 밖으로 나가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상황이 어렵게 되자

개로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도주하려 했는데

고구려 군사가 추격하여 개로왕을 죽였습니다

 

[한성백제 마지막 희망 문주]

개로왕은 죽기직전 아들 부여문주에게

 

<개로왕>내가 어리석고 총명하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다가 이렇게 되었다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을 당하여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려 하겠는가

 

나는 당연히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 하지만

네가 여기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할 것이 없으니

난리를 피하여 있다가 나라의 왕통을 잇도록 하라

 

문주가 곧 목협만치와 조미걸취를 데리고

남쪽(웅진)으로 떠났고

 

[재증걸루와 고이만년]

문주가 떠난 뒤

고구려 대로 제우 , 재증걸루 , 고이만년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와서

북쪽 성을 공격한지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쪽 성으로 옮겨 공격하자

성 안이 위험에 빠지고

개로왕이 도망하여 나갔는데 고구려군에 잡혔고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개로왕의 얼굴을 향해 세번 침을 뱉고서

죄목을 따진 다음

아차성 밑으로 묶어 보내 죽이게 했습니다

 

 

걸루와 만년은 원래 백제사람인데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해간 인물들인데

개로왕을 그냥 안죽이고 죽기전 면상에 침 세번까지 뱉었다는 것을 보아

당시 백제민중들이 개로왕을 매우 싫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습한 디시위키 속 개로왕 평가 2

 

그렇게 백제의 500년 수도 위례성(=한성 , 오늘날 서울 한강유역) 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500년의 영광의 역사를 뒤로하고

완전히 불태워지고 사라지게 되었고

고구려 장수왕은 조상들의 두 원수였던

북연과 백제 수도 화룡성과 위례성을 둘다 불태우고

북연황제 풍홍과 백제대왕 개로왕을 죽여 조상들의 한을 풀었고

 

백제는 이때 사실상 나라가 멸망할 정도로 완전히 쪼글아들었고

개로왕 시대를 마지막으로 한성백제 493년이라는 영광의 시대가 끝나고

국력이 급속도로 쪼글아든 백제는 이후부터는

점차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잃고

바다건너 왜와의 관계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백제 역사가 700년 , 정확히는 678년의 장구한 역사가 있는데

백제 두번째 , 세번째 수도였던 웅진과 사비였던

오늘날 공주와 부여가 백제의 후예이자 전통도시를 자처하지만

그럼에도 웅진백제는 63년 , 사비백제는 122년 밖에 안될 뿐더러

백제 영광의 시기가 전부

오늘날 한강유역인 서울특별시에 몰려있는 현실이고

왜와의 관계 역시 한성백제 시대에 정립되었으며

493년이라는 어마어마했던 한성백제는

결국 한명의 어리석은 왕의 방탕으로 끝나고

이후 백제는 남쪽에서 200년간 호흡기 유지하며 그냥저냥 살다가

한때 괴롭히고 놀았던 옆집 찐따 신라가 강성해지자

자신을 괴롭히던 양아치 일진 참교육을 꿈꾸며

근육질로 성장한 찐따신라에 강제합병되는 비운의 운명을 맞게 됩니다

 

<라봉봉>참 안타까운 역사의 흥망성쇠 중 망의 부분의 기록이고

백제기록은 참

농사가 힘들고 사방으로 트여있어서 늘 전쟁을 준비하며 살았던 고구려나

동남쪽 구석에 위치하고 오른쪽 왜가 계속 침공해서 생계가 절박했던 신라에 비해서

 

백제는 처음부터 한강유역이라는 농사 잘되고 풍요넘치는 금싸라기 땅에 자리잡아서

마한왕이 대놓고 스폰 팍팍해주며

처음부터 고생따윈 모르고 처음부터 금수저 물고 시작했고

지리적으로 더 가까웠던 신라가 왜에 계속해서 시달린 것과 달리

왜에도 종주권을 확립하여 본국에서 살기 힘들면 왜몽(아메리카 드림 백제버전)을 꿈꾸며

대거 넘어가기도 했던 백제였고

 

뭐랄까 고구려 , 신라에 비해 간절함이나 절박함과 거리가 멀었던 백제인이었다 생각되고

이런거 때문인지 문화예술에는 엄청 집중한 백제인이었고

나름 명군이 여러 등장해 여러 부흥을 이끌어 냈지만

좀 역사 기록이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허접스러운 느낌이 강한데

 

고구려의 침공으로 풍전등화가 된 당시에도

비유왕이라는 명군이 등장해 하드캐리했지만

아들 개로왕놈이 다 말아먹고 오백년 수도까지 불타버렸고

개로왕은 뭔가 비류왕-근초고왕 관계처럼

비유왕-개로왕 이라는 새로운 명군라인을 꿈꾸고

본인이 근초고왕이라도 된듯이 정복군주마냥 행세하다가

고구려한테 참교육 당하고 폭삭 망했고

 

고구려 광개토대왕 , 백제 근초고왕 , 신라 진흥왕이 땅을 크게 넓힌 정복군주라

호사가들에게 높게 띄어지는 인물이긴 하지만

조상 유산이 짱짱할 시기 왕이 된 금수저 출신이긴 했고

개로왕도 나름 부모가 명군이라 금수저 출신이긴 했는데

그렇다고 광개토 , 근초고 , 진흥왕이 적어도

개로왕마냥 유부녀 겁탈하거나 무리한 궁궐공사하거나 놀이에 빠져 국정을 팽개치진 않았고

유명한 세계정복군주들은 화려함 뒤에 체계적이고 엄격한 자기관리로 정복군주 생활을 하다

전쟁스트레스로 단명한 인물들이 많고

백성들에게는 관대했으며 개로왕같이 부하부인 건들이거나 하는 등 졸장타입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개로왕은 당시 백제가 그리 좋은 상황도 아니었고

한창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고구려 장수왕이 계속 조상의 원쑤를 갚겠다며

백제를 벼르던 상황에서 계속 고구려를 도발하다 괘씸죄까지 걸리게 된 것이었고

외치도 실패 ,

내치도 자기 백성 못살게 굴고 부하들 학대하다 부하들이 고구려에 투항해서

백제 침공 앞잡이가 되는 등 답이 없는 인물이고

그나마 개로왕 아들 문주가 아비 안닮고 할아버지 닮아 제정신 박힌 놈이었기에

백제가 명맥이 끊길번하다가 다시 일어나 겨우 종사를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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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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